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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량이 많아서 크루즈 배 승선 전, 승선, 하선 후 탐방한 국가를 나누어 게재합니다.
남미 크루즈 승선하여 탐방한 국가
일시:2017년 2월 15일 수요일~3월 1일 수요일((전체는 2월 9일~3월 7일까지)
탐방 국가:칠레,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영국령), 우루과이
남미 크루즈 7개국 전체 일정
일시:2017년 2월 9일 요일~3월 7일 요일 26박 27일
탐방국가:멕시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영국령),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2017년 2월 15일 수요일 칠레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크루즈 배 승선
*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 크루즈 배 승선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크루즈 배 프린세스 크라운 호에 승선했다. 오후 3시까지 승선을 해야 한다. 미국 선사의 배로 11톤급이다. 프린세스 호는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할 때도 승선했던 선사의 배다. 그래서 우리 부부에게는 정감어린 배다. 2015년 50주년을 맞이하는 프린세스 크루즈는 세계 3위 대형선사다. 18척의 현대적 선박을 보유하고 있으며, 매년 170만 명의 승객들을 전세계 가장 많은 기항지로 안내한다. 9년 동안 최고의 크루즈 일정 상을 수상하였고, 혁신적인 선박 안에서 다양한 요리와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및 각종 안락한 시설들을 제공하며 최상의 서비스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12층 305호다. 선실 발코니에서 본 발파라이소 항구가 참으로 아름답다.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신 비경이다. 갑판에도 올라가서 바라보았다. 승선하여 제일 먼저 해야할 일정은 비상훈련이다. 우리 부부는 구명조끼를 가지고 7층 C 구역에서 훈련을 했다. 선실에 따라서 배정된 구역이다. 구명조끼에 배정된 구역이 적혀있다. 오랫 동안 우리 부부가 꿈꾸어 오던 남미 크루즈가 이루어진 축복의 날이다.
*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 출항
크루즈 배는 오후 6시에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를 출항한다. 15층~16층 배의 갑판으로 나가서 출항의 비경을 보았다. 발파라이소 항구 주변 풍경이 시가지와 바다와 절경을 이룬다.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거대한 크루즈 배 곁으로 도와주는 보조 배들이 다가온다. 이제 우리 부부는 먼먼 바다를 항해하여 남미 크루즈를 출발한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 첫날
오늘은 원래는 정찬석식인데 시간이 늦어서 뷔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 부부는 중국인 부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했다. 베이징에 거주한다고 해서 우리 부부가 베이징에 갔던 여행 이야기를 하며 정담을 나누었다. 석식을 마치고 6층~7층에 있는 대극장에 가서 공연을 보았다. 오늘은 첫날이어서 간단한 노래와 춤을 공연한다. 노래와 춤 공연을 마치고 남자 사회자가 세계 각국에서 온 승객을 소개한다. 미국은 1천 명이 넘게 승선했다. 캐나다, 중국,등 많은 나라에서 왔다. 나라 이름을 부르면 그 나라 사람들이 '와~'하며 손을 든다. 나는 두 번째 줄 중앙에 앉았다. 사회자가 South Korea 를 외칠 때, 나도 '와~'크게 외치며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랬더니 몇 명이 왔냐고 묻는다. 우리 일행의 숫자 12를 영어로 말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 전체의 집계는 70 명 정도인 것 같다. 많이 온 편이다. 마지막 순서로는 캐나다 나이 든노인 남자가 혼자 나와서 조크로 웃긴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전일항해, 선장 환영 파티
* 전일항해-선장 환영 파티
오늘은 전일 항해하는 날이다. 칠레 발파리이소 항구를 출항하여 칠레 푸에르트몬트 항구로 가는데 먼 거리로 오늘은 태평양 망망한 바다를 항해한다. 아침 조식은 15층 후미 뷔페식당에서 인도인 부부와 같이 먹었다. 그들은 인도인이지만 영국 런던에 거주한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한국문인협회에서 인도세미나 갔던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식사했다. 조식 후 5층 로비에 모여 선내 오리엔테이션 시간을 갖었디. 이렇게 전일항해하는 날은 선내의 다양한 시설 및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음껏 즐겨는 시간이다. 대극장, 카지노, 나이트 클럽, 다양한 종류의 수영장, 인터넷 카페, 스파, 자쿠지, 피트니스클럽, 면세점, 죠깅 트랙, 도서관, 뷔페, 정찬식당, 다양한 종류의 바 등을 각자의 취향에 맞게 찾아 다니며 이용한다. 우리 부부는 오후에는 15층 야외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선장 환영파티가 있다. 오늘은 가장 고운 의상으로 차려입고 정찬식당에서 식사를 한다. 우리 부부도 곱게 차려 입고 나갔다. 석식 후 5층~6층 로비에서 선장과 샴페인 파티를 가졌다. 우리 부부도 환영 단상에 올라가 선장의 안내를 받으며 샴페인을 차곡차곡 높이 피라미드로 쌓아올린 잔에 부었다. 아주 환상적인 낭만의 밤이다. 대극장 공연도 관람했다. 노래와 춤 등 남녀들의 공연이 찬란하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이다.
* 크루즈 배 선실과 발코니 바다 비경
크루즈 배는 상당히 크다. 그래서 복도가 아득하다. 선실도 아늑하고 아름다운 공간이다. 선실은 바다와 바로 접해 있다. 발코니 선실은 조금 값이 비싸지만 그래도 바다의 비경과 낭만과사색과 무원의 철학으로 그 민큼의 보상을 충분히 해준다. 청청한 태평양 바다가 비경이다. 하얀 포말의 물결이 배 후미를 따라오며 더욱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지금은 2월 중순, 한국은 겨울인데 이곳은 여름이다. 정반대의 계절이다. 그래서 해가 늦게까지 찬란하다. 모두 신비로운 절경이다.
2017년 2월 17일 금요일 칠레 푸에르토몬트, 푸에르토바라스, 오소르노 화산, 페트로우에 폭포
* 칠레 푸에르토몬트 항구 텐더보트 승선
칠레 푸에르몬트 항구에 하선하여 텐더보트를 타고 항구의 육지로 간다. 5분 정도 소요되는 조금 먼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간다. 크루즈 배가 워낙 커서 해안 바다의 조건이 어려운 기항지에서는 이렇게 이동한다. 텐더보트는 우리 크루즈 배의 옆구리에 부착하고 다니는 배다. 비상시에는 구명 배의 역할도 한다. 크루즈 배의 직원들이 나와서 텐더보트로의 이동을 안전하게 도와준다. 바다 안에서 배를 바꿔 타는 것이라서 조심해야 한다. 이것도 크루즈 여행의 큰 체험이다.
* 칠레 푸에르토몬트 항구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 항구에 오전 7시 기항했다. 텐더보트로 항구의 육지로 가며 본 항구는 산과 도시가 어우러진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오늘은 푸에르토몬트, 푸에르토바라스, 호수지역, 페트로우에 폭포, 오소르노 화산을 탐방한다. 웅장하고 위엄있는 푸에트로 몬트의 자연 경관과 그곳에 얽혀있는 가치있는 문화를 발견할 수 있는 기항지 관광이다. 푸에르토몬트는 남아메리카 칠레 남쪽 로스라고스주의 주도다. 거대한 페트로우에 폭포, 푸에르토 바라스의 장미를 볼 것이다. 21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이 도시는 칠레 로스라고스(많은 호수라는 뜻) 주의 주도로 1853년 독일이민자들이 렐론카비만 북안에 호수지방의 한 중심도시로 건설하였다. 독일계 주민이 많으며 남부 독일풍의 건축물이 이색적이다. 목재의 집산지로 제재업이 발달했다. 육, 해,공 교통의 요지로 2500Km의 남북 종단 철도와 팬아메리칸 하이웨이의 종점기도 하다. 남부 목양지를 위한 연안항로의 기점이다. 해군, 공군기지가 있다. 1960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름 그대로 호수가 많으며 최대 규모의 얀키우에호를 비롯해 랑코호, 루팡코호 등 크고 작은 호수들이 유명하다. 오늘 첫 기항지 관광으로 기대되는 날이다.
* 칠레 푸에르토몬트 시가지
푸에르토몬트 항구에 하선하여 푸에르몬트 시가지를 지나간다. 빈센테 로살레스 국립공원, 페트로우에 폭포, 에스메랄다 호수, 푸에르토바라스, 탐방하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는 5번 버스에 승차했다. 외국인과 같이 승선한다. 항구에서 다시 큰 버스로 승차했다. 선사에서 주관하는 기항지 관광이어서 현지 영어 가이드가 동승하여롤 설명해준다. 우리 인솔자는 수신기로 한국어로 해석하여 재설명해준다. 이곳은 독일인이 최초로 들어왔다. 독일 풍의 갈색 목조 건물이 많다. 1840년~1850년대에 독일인 기독교인들 125세대가 이주했다. 푸에르토 몬트는 앙쿠드만(Gulf of Ancud)과 태평양을 향해 열려있는 렐론카비 해협의 북쪽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 칠레 남부의 도로의 마지막 지점이다. 더 남쪽으로 가려면 배나 비행기를 이용해야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칠레의 호수지방의 핵심 도시로, 원래 마푸체 인디언들의 거주지였으나, 독일계 이민자들로 하여금 다시 세워진 도시로, 독일계 주민이 많으며 남부 독일풍의 건물들이 이색적인 곳이다. 목재업이 성행한다. 육로, 해상 교통요지다. 남북종단 철도가 있다. 하이웨이 종점이다. 10월에서 다음 해 4월까지 크루즈 운항 배가 들어온다, 해양성 기후다. 6월~9월까지 겨울이다. 최저 3도다. 11, 12월은 여름으로 21도다. 1년에 200일 정도 비가 온다. 각 국가에서 운영하는 학교가 많다. 해당 국가의 자국 언어로 교욱한다. 독일은 독일 학제로 운영한다. 저소득층을 위해서 아침, 점심을 제공한다. 푸에르토몬트에서 호수지역 갈 때 보이는 하얀 주택은 임대주택이다. 실업율이 3% 정도로 낮은 편이다. 오늘 우리는 푸에르토몬트 항구를 출발하여 남미의 후지산으로 불리는 활화산인 오소르노 화산을 조망하고, 에스메랄다 호수에서 보트 유람선을 타고, 로살레스 국립공원에서 페트로우에 폭포를 보고, 발라스 장미도시를 탐방하고 다시 이곳 항구로 돌아올 예정이다.
* 칠레 푸에르토바라스 독일 향기의 장미도시
푸에르토바라스는 장미의 도시다. 최초로 온 사람들이 장미를 심었다. 시가지 도로변에 장미가 많다. 독일인 페테르로살레스가 와서 건설한 도시다. 독일인이 많이 거주한다. 갈색 집단 주택에서부터 독일인의 도시 향기가 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다.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4만 명이 거주한다. 건물들은 독일 사기지와 유사하다. 지금은 지나가며 보고 돌아갈 때 내려서 자세히 볼 것이다.
* 칠레 푸에르토바라스 양키후에 호수지역
푸에르토바라스는 장미의 도시다. 최초로 온 사람들이 장미를 심었다. 시가지 도로변에 장미가 많다. 독일인 페테르로살레스가 와서 건설한 도시다. 독일인이 많이 거주한다. 갈색 집단 주택에서부터 독일인의 도시 향기가 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다.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4만 명이 거주한다. 건물들은 독일 사기지와 유사하다. 지금은 지나가며 보고 돌아갈 때 내려서 자세히 볼 것이다.
* 칠레 오소르노 화산 근처의 들녘
칠레 들녘을 달려간다. 독일인 학교도 지나간다. 자국언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독일어로 수업을 하는 학교다. 자국 교욱을 중시한다. 이 도르는 아르헨티나까지 가는 국제도로다. 가다가 호수도 건너고, 그래서 관광으로도 좋은 길이다. 도로변에 목장에는 양떼, 소떼가 있다. 푸른 숲이 많다. 농토도 있다. 큰 호수변 도로를 달린다. 이 지역은 오소르노 화산 폭발로 예전 식물은 다 죽고 새로운 나무와 풀들이 자리는 곳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과는 조금 다른 풍경이다. 토양이 화산재로 기름진 농토다.
* 칠레 오소르노 화산
칠레 들녘을 한참 달려온 곳에서 오소르노 화산Osorno Volcano을 만난다. 칠레 중남부 오소르노시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오소르노주는 칠레 로스라고스 주에 있는 도시다. 1553년 라우에 강과 다마스 강의 합류점에 건설된 것이 시의 기원이다. 그러나 원주민의 습격 등 개척이 진전되지 못하다가 1850년대 이래 독일계 이민에 의해서 식민이 본격화되면서 개발되었다. 혼합 농업의 중심지로 주변에서는 밀, 감자 등을 산출하며 낙농업, 식육 가공업, 양조업이 발달하였다. 호수와 화산 지대에 있는 관광의 중심지로 남아메리카의 스위스로 불린다. 구름이 끼어서 설봉은 잘 안 보이지만 웅장한 산이 눈앞에 다가온다. 호수와 비경을 이룬다. 이쪽 지역은 화산 폭발로 다른 토양, 다른 수종의 나무들이다. 겨울 스키장 통로 지역이다. 학교를 지난다. 오소르노 화산이 마을 사이로 보인다. 검은 재로 인하여 흙이 검다. 오소르노 화산의 고산 설봉이 드디어 보인다. 산에 하얀 꽃나무가 있는데 벌들이 꿀을 생산하는 꽃이다. 오소르노 화산은 2661m의 활화산으로 2000m 이상 부터는 눈으로 덮여 있다. 최근의 화산 활동은 1960년 칠레 대지진 때이다. 오소르노 화산은 칠레 오소르노시의 남동쪽에 있는 활화산으로 높이는 2,661m이다. 성층화산이며, 2,000m이상부터는 눈으로 덮여있다. 1869년 이후로 화산활동이 중지되었다가 1960년 칠레 대지진 때의 폭발이 가장 최근의 화산활동이다.
푸에르토바라스 북동쪽 59㎞ 지점이며, 산마루에 토도스로스산토스 호수와 양키웨 호수를 동서에 두고 높이 솟아 있는 아름다운 성층화산이다. 해발 2,000m 이상부터는 흰 눈으로 덮여 있다.
1719년 이래 약 10회에 걸쳐 폭발, 때로는 용암이 분출되었으나, 1869년 이후 활동이 중지되어 화구 내에서도 눈을 볼 수 있었다. 풍부한 강수량으로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족제비·여우·사슴·퓨마 등의 동물과 라피카다 같은 습지대에서는 벌새·딱따구리·참새 등의 조류들이 살고 있다. 1960년 칠레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폭발한 것이 가장 최근의 화산활동이다. 1848년 최초로 정복되었으며, 등정하기 좋은 시기는 10월∼12월이다. 버스가 지나는 길목에서 호수 앉은 오소르노 화산이 비경을 선사한다. 구름으로만 덮여서 설봉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니고, 2000m이상은 눈으로 덮인 하얀 풍경이 산정을 휘감고 있다.
* 칠레 페트로우에 강
페트로우에 강과 호수도 빈센테 로살레스 국립공원 안에 있다. 남미의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동쪽으로 아르헨티나 국경과 접하고 있다. 오소르노 화산 용암이 흘러내려서 형성된 호수다. 페트로우에 강은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흐른다. 맞은 편에는 멀리 오소르노 화산 설산이 장관이다. 국립공원이라서 밀림지대다. 검은 화산재로 흙이 모두 검다. 강변에는 포크레인과 사람들이 들어와 무슨 작업을 한다.
* 칠레 에스메랄다 호수 유람선
에스메랄다 호수는 로살레스 국립공원 안에 있다. 제주도의 1.5배 크기다. 에메랄드 빛 호수로 '성스러운 호수'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300m 수심이다. 해발 1800m에 위치해 있다. 유람선이 꽤 큰 배다. 세계 각국 사람들과 함께 승선했다. 이곳 호수의 물이 비가 오면 고였다가 페트로우에 강으로 간다. 지금도 호수에 비가 내린다. 촉촉한 낭만이 흐르는 호수를 유람선으로 타고 흐르며 조망한다. 맑은 날과는 다르게 우수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니 중후한 풍경을 선사한다. 호숫가에 하얀 집이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기 전부터 거주했다. 우리는 건너편에 가서 내린다. 잠시 햇살이 나오니 에메랄드 빛 호수 물빛이 장관이다. 오소르노 화산 빙하에서 내려온 물이어서 그렇다. 이곳 날씨는 자주 변하여서 여러 풍경을 보게 된다.
* 칠레 페트로우에 폭포
에스메랄다 호수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안데스 산맥의 페트로우에강 상류에 위치한 여러 개의 폭포로 이루어진다. 오소르노 화산의 용암 흐름에 의해 형성되었다. 페트로우Petrohue에 강이 낙차가 심한 곳에 조성한 폭포다. 7개 정도의 폭포를 본다. 비가 와서 위험해서 통행을 막았는데 지금은 열려 있어서 탐방이 가능하다. 참 다행이고 좋다. 여기는 로살레스 국립공원이다. 칠레 로스 라고스 지역의 비센테 페레스 로살레스Rosales 국립공원에 있는 폭포다. 우람한 산에 하얀 꽃나무가 많다. 면적 2,530㎢의 비센테 페레스 로살레스 국립공원은 1926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칠레와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이다. 하얀 물살과 에메랄드 빛 강이 울창한 산과 함께 비경이다. 지금은 여름이다. 뉴질랜드 남섬 밀포드사운드와 유사하다. 국립공원 강다리를 건너 산길을 따라 걸어간 곳에서 폭포를 만났다. 그리 높게니 우람한 폭포는 아니다. 페트로우에 강물이 바위 사이로 낙차하며 곳곳에 크고 작은 물줄기를 흘려보내며 아담한 폭포들의 연출한다. 비가 오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강물과 폭포는 더욱 거친 야생으로 다가온다.
* 칠레 푸에르토바라스 중식식당 네루다 시
독일 양식의 진갈색 건물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연어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건물 복도에 네루다의 시가 걸려 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네루다(1904~1973)는 1945.7 칠레 공산당 입당하여 박수갈채와 가시밭길의 삶을 함께 걸었던 시인이다 .1948년 1월 6일 의회석상에서 연설했다. 이 연설은 이후 '나는 고발한다'라 제목으로 널리 알려졌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네루다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45년 7월 칠레 공산당에 입당한 것이었다. 7월 8일, 네루다는 산티아고의 카우폴리칸 경기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칠레 공산당 입당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대는 나에게 낯선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주었다. / 그대는 나에게 살아 있는 모든 이들의 힘을 보태주었다'라고 노래한 그의 시 [나의 당에게]는 바로 이 순간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공산당 입당 이후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세월 그 자체였던 칠레의 역사와 더불어 영광과 고난의 길을 번갈아 걸어야만 했다. 시작은 대단한 박수갈채 바로 그것이었다. 7월 15일 브라질 상파울루의 파카엥부 경기장에서 10만 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서 열린 공산주의 혁명가 프레스테스의 환영 집회에서 네루다는 시를 낭송했고, 그의 시는 대중의 가슴속을 활화산으로 만들었다. 이후 네루다가 가는 곳에는 대중과 시가 있었고, 열렬한 환호가 있었다. 네루다가 공산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오래 전 일이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때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희생당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들에게 쓰러지는 것을 보고 그는 이미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시스트들이 마드리드 밤거리에서 준동하고 있을 때 오로지 공산주의자들만이 세력을 조직하고 군대를 창설하여 이탈리아인들, 독일인들, 무어인들, 팔랑헤 당원들과 대적하였다. 이와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반파시즘 투쟁과 저항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힘이었다'라며,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된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를 멸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때 그의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이를 보면 네루다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상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에 대한 애정이었다. 이러한 선택이 그를 평생 가시밭길로 걸어가게 했지만, 그는 그 선택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34년 12월 6일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가장 위대한 라틴아메리카 시인의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네루다의 시가 이성과 논리를 뛰어넘는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에너지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루다가 살아온 환경과 풍토가 그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시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자서전 초입에서 이렇게 말했다. '유년 시절 얘기를 하자면 잊을 수 없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비다. 남반구에서는 비가 정말 어마어마하게 쏟아진다. 마치 케이프혼이라는 하늘에서 개척지라는 땅을 향해 쏟아지는 폭포수 같다. 나는 이 땅에서, 칠레의 ‘서부’와 같은 개척지에서 삶에 눈을 뜨고, 대지에 눈을 뜨고, 시에 눈을 뜨고, 비에 눈을 떴다.' 네루다는 하늘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와 같은 삶을 살았고, 그 비와 같은 시를 썼다.
1904년 7월 12일,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 중부의 포도주 산지인 파랄에서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당시 네루다의 어머니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노산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낳는 것이 꽤 힘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출산하고 나서 두 달 후인 9월 14일 사망했다. 네루다는 자신을 세상에 나오게 해준 여인을 영영 알지 못했다. 네루다가 그토록 절절한 사랑의 시를 썼던 것의 근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매우 친절한 여교사로 학생들에게 시와 작문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다. 네루다는 어머니의 이런 면모를 닮았음에 틀림없다. 네루다의 아버지는 자갈 기차 기관사였다. 자갈 기차는 침목 사이에 자갈을 제때 채워주지 않으면 철로가 유실되기 때문에, 그 자갈을 나르는 기차를 말한다. 이런 자갈 기차에서 일하는 인부는 철인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아버지의 성격은 매우 거칠었다. 아버지가 귀가할 때마다 문이 흔들리고 집 전체가 진동했으며, 계단은 삐걱거렸고, 험한 목소리가 악취를 풍겼다. 이런 아버지가 자식을 홀로 키워야 했다면, 네루다의 어린 시절은 몹시도 험난했을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재혼했고, 새어머니는 상냥하고 온화했다.
어린 시절부터 네루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동정심이 많은 아이였다. 한번은 누군가 상처 입은 고니 한 마리를 네루다에게 주었다. 네루다는 상처를 물로 씻어주고는 빵조각과 생선조각을 부리에 넣어주었는데, 고니는 모두 토해버렸다. 상처가 아물었는데도 고니는 네루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네루다는 고니를 고향으로 보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새를 안고 강가로 갔다. 그러나 고니는 슬픈 눈으로 먼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렇게 20일 이상을 고니를 강으로 데려갔지만, 고니는 늘 너무도 얌전했고 네루다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고니를 다시 데리고 집으로 오려고 안았는데, 고니의 목이 축 처졌다. 어머니의 죽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소년은 고니를 통해 죽음을 맨가슴으로 받아 안았다.
강압적인 아버지 몰래 필명으로 창작 활동했다. 1915년 6월 3일, 네루다는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올라 생애 첫 시를 썼다. 그는 새어머니에게 이 시를 바치기로 했다. 뮤즈의 첫 방문을 맞이한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그는 부모님한테 가서 시를 적은 종이를 내밀었다. 건성으로 읽어본 아버지가 '어디서 베꼈니?'라고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네루다는 자서전에서 '그때 처음으로 문학비평의 쓴맛을 보았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이미 식을 줄 모르는 독서열로 밤낮을 거의 잊고 살 정도였다. 1945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여성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그 고장의 여학교에 부임한 것은 네루다의 문학열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었다. 미스트랄은 네루다가 찾아갈 때마다 러시아 소설책을 주곤 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등의 소설을 읽은 네루다의 꿈은 자연스럽게 문학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다.
역마살 낀 보헤미안의 삶, 정치적 행보가 떠돌이 삶을 부추겼다. 네루다처럼 떠돌이 삶을 오래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 거주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그는 끊임없이 여행하는 삶을 살았다. 혼인을 세 번이나 한 것도 보헤미안의 삶에 어울린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30년 네루다의 첫 번째 결혼의 부인은 마리아 안토니타 허허나다. 공산당에 입당함으로써 그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해지지만, 보헤미안으로서의 삶은 더욱 강화된다. 공산당에 입당하기 전 1945년 3월 4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네루다의 본격적인 정치 행보가 시작된다. 1946년 대통령에 취임한 곤살레스 비델라 대통령이 공산당과 체결한 협약을 파기하자 파블로 네루다는 격렬하게 비판했다. 특히 1948년 1월 6일의 의회 연설은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네루다의 상원의원 면책특권을 박탈하고, 2월 5일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영장을 발급한다. 네루다의 은둔생활 혹은 방랑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2월 24일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탈출한 네루다는 파리, 폴란드, 헝가리를 거쳐 멕시코에 체류한다. 세계 곳곳을 거쳐 1952년 카프리 섬에 거주하고 있을 때 칠레 정부는 네루다의 체포영장을 철회한다. 1969년 칠레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네루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이듬해 살바도르 아옌더를 단일후보로 추대하고 후보에서 사퇴한다. 1970년 9월 4일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네루다는 파리 주재 칠레 대사로 임명된다.
네루다는 세계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 받으면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지만 수상의 영예는 쉽게 오지 않았다. 1971년 10월 21일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그 해에 전립선암 수술을 해야 했고,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1970년 7월 12일, 예순여섯 살 되는 생일에, 그는 의사인 친구 프란시스코 벨라스코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봐, 나 걱정거리가 있는데 말이야.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거든.' 벨라스코는 지금 즉시 산티아고 최고의 비뇨기과 의사를 찾아가라고 충고했다. 그는 전문의에게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무언가 작은 종양이 하나 보이는데, 한 달 안으로 다시 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가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항상 용감했던 네루다였지만, 죽을 병에 대해서는 용감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1971년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 시절이다.
1973년 건강상의 이유로 대사직을 사임했으면서도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에게 칠레 내전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운명의 때는 오고 있었다. 9월 11일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하고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칠레 독립기념일인 9월 18일, 네루다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아내 마틸데는 구급차를 불러 네루다를 병원으로 옮겼다. 9월 20일 멕시코 대사가 와서 네루다에게 칠레를 떠나도록 설득했다. 네루다에게 바깥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슬픔을 누를 길이 없었고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다. 그는 아내 마틸데에게 말했다. '그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을 건네주고 있다고. 노래하던 빅토르 하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 몰랐어? 그자들이 하라의 몸도 갈기갈기 찢어놓았어. 기타를 치던 두 손을 다 뭉개놓았대.'그 럼에도 네루다는 평생 견지해온 낙관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문병 온 화가 네메시오 안투네스에게 말했다. '이 군인이라는 자들이 지금은 끔찍할 만큼 잔인하게 굴고 있지만, 조금 있으면 사람들 마음을 끌어보려고 할걸세.' 그러나 암세포는 끝내 네루다의 생명을 앗아갔다. 1973년 9월 23일 10시 30분이었다.
파란만장한 생애만큼이나 스펙트럼 넓은 시세계를 지닌 시인이다. 파블로 네루다처럼 다양한 시세계를 선보인 시인도 드물다. 그는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민중을 선동하는 혁명시인이었다. 그는 열렬한 사랑을 갈구하는 격정적인 연애시인이면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냉철하고 지성적인 시인이기도 했다. 직관으로 쓴 짧은 서정시로부터 아메리카 역사를 노래한 서사시까지 네루다가 보여준 시의 스펙트럼은 칠레의 긴 영토가 대면하고 있는 바다만큼이나 파란만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루다가 유난히 사랑시를 많이 쓴 시인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시를 쓴 시인의 경우 대중성은 확보하지만 그 질은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네루다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이여, 우리는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격자 위로 포도넝쿨이 기어오르는 곳:
당신보다도 앞서 여름이 그
인동넝쿨을 타고 당신 침실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 방랑생활의 키스들은 온 세상을 떠돌았다:
아르메니아, 파낸 꿀 덩어리—:
실론, 초록 비둘기—: 그리고 오랜 참을성으로
낮과 밤을 분리해온 양자강.
그리고 이제 우리는 돌아간다, 내 사랑, 찰싹이는 바다를 건너
담벽을 향해 가는 두 마리 눈먼 새,
머나먼 봄의 둥지로 가는 그 새들처럼:
사랑은 쉼없이 항상 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삶은 담벽으로, 바다의 바위로 돌아간다:
우리의 키스들도 그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100편의 사랑 소네트 033> 전문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 마음속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파도가 치다가 어느 순간 고요해진다. 비든 바람이든 파도든 고요든 그것들은 소름이 되어 살갗에 박힌다. 네루다의 시가 그만큼 격동하는 삶 속에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우리의 심장 박동을 닮았고, 그리하여 우리의 뼈와 살과 피부가 느끼는 감각을 생생하게 옮겼기 때문이다. 특히 여름에 읽으면 그 감동이 태풍처럼 강렬해진다. 그것은 네루다가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시를 썼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마음이다.
'고통받으며 투쟁하고, 사랑하며 노래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아픔을 세상에 나누어주는 것이 내 몫이었다. 빵도 맛보고 피도 맛보았다. 시인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눈물에서 입맞춤에 이르기까지, 고독에서 민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내 시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시인을 꿈꾸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미 학생시인으로서 필명을 날리고 있었던 때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노트를 창밖으로 던진 후 불태워버렸다. 네루다가 필명을 사용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이러한 탄압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그는 체코의 작가 얀 네루다의 성을 빌리고, 파울로(바오로, 바울)에서 영감을 얻은 듯한 파블로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는 처음에는 단지 필명이었으나, 1946년도에는 아예 법적인 이름이 된다. 이 이름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강압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1921년 산티아고의 사범대학 불어교육과에 입학한 네루다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그의 창작열은 칠레의 자연만큼이나 왕성했다. 1923년 8월 그는 첫 시집 <황혼 일기>를 펴냈다. 20세가 안 되는 어린 시인의 가슴속에서는 맑고 투명한 정열이 샘솟고 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하늘을 불 밝히는 이 놀라운 / 구릿빛 황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 황혼은 저 자신을 다시 기쁨으로 채우는 법을 가르쳐주었어요'[마루리의 황혼]와 같은 구절은 젊은 영혼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것이었다. <황혼 일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학창시절 네루다가 숭배했던 칠레 시인 페드로 프라도는 '확신컨대, 나는 이 땅에서 그 나이에 그만한 높이에 다다른 시인을 따로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칭찬은 네루다의 창작열을 더욱 북돋아 1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펴내게 한다. 이 시집이야말로 네루다를 깊이와 넓이를 확보한 인기 있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 이 시집의 시들은 흥분제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관능적이고 오묘한 여성의 몸처럼 아늑하고도 화려한 우주의 신비를 담고 있고, 어느 순간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의 세계 속으로 깊이 파 들어간다.
여자의 육체, 하얀 구릉, 눈부신 허벅지,
몸을 내맡기는 그대의 자태는 세상을 닮았구나.
내 우악스런 농부의 몸뚱이가 그대를 파헤쳐
땅 속 깊은 곳에서 아이 하나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이 내게서 달아났고
밤은 내 가슴으로 거세게 파고들었다.
난 살아남기 위해 그대를 벼렸다, 무기처럼,
내 활의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은 오고, 난 그대를 사랑한다.
가죽과, 이끼와, 단단하고 목마른 젖의 몸뚱이여.
아 젖가슴의 잔이여! 아 넋 잃은 눈망울이여!
아 불두덩의 장미여! 아 슬프고 느릿한 그대의 목소리여!
내 여인의 육체여, 나 언제까지나 그대의 아름다움 속에 머물러 있으리.
나의 목마름, 끝없는 갈망, 막연한 나의 길이여!
영원한 갈증이 흐르고, 피로가 뒤따르고,
고통이 한없이 계속되는 어두운 강 바닥이여. -<사랑의 시 1> 전문
네루다의 문학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후의 작품 <무한한 인간의 시도>(1926) <열렬한 투척병>(1933)을 거쳐, 초현실주의의 걸작으로 주목 받은 <지상의 거처>(1935)까지 그야말로 네루다의 시적 행진은 쾌도난마 그 자체였다. 그 사이에 1926년 버마의 랑군(오늘날의 양곤) 주재 명예영사로 임명되면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1935년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바르셀로나로 옮겨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것이 네루다를 공산당에 입당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의 시도 역사의식을 가슴속 깊이 품게 되었고, 그 결과 <모두의 노래>(1950) 같은 총체적인 서사시를 생산해낸 것이다. 네루다를 티브이에서 소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잘 몰랐던 칠레의 시인 네루다를 배우고, 그의 시와 마주 서서 참 보람되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 칠레 푸에르토바라스 양키후에 호수
푸에르토바라스는 독일인이 건설한 도시다. 장미 도시다. 우리는 아까 그냥 지나갔던 이 도시에 하차하여 호수와 시가지를 탐방했다. 먼저 양키후에 호수에 왔다. 칠레에서 세번째 큰 호수다. 이곳은 호수 지역이기도 하다. 그 만큼 호수가 많다는 뜻이다. 광활한 호수는 바다와 같다. 호수변에는 예쁜 주택들이 고운 풍경을 더해준다. 호수변에 공연장도 조성해 놓았다. 주변 시가지에는 카지노, 은행, 공연장 등이 있다. 비가 내리는 호수는 낭만을 함께 선사한다.
* 칠레 장미의 도시 푸에르토바라스
푸에르토 바라스 Puerto Varas 는 독일인이 조성한 도시다. 주도이자 항구도시인 푸에르토 몬트(Puerto Montt)에서 약 20km 떨어져 있다. 칠레 로스라고스(Los Lagos)주에 있는 호반 휴양도시이다. 독일계 주민이 많으며, 남부 독일풍의 건조물이 이색적이다. ‘장미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1854년에 비센테 페레스 로살레스(Vicente Pérez Rosales)가 건설하였다. 독일인이 들어올 때 도시 곳곳에 장미를 심어 시가지에 장미가 많다. 큰 나무들이 울창한 공원에도 장미가 많이 있다. 1852년부터 독일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오늘날에도 독일의 전통과 문화가 진하게 남아 있다. 칠레 중남부, 로스라고스 주 중부의 관광 · 휴양지로 푸에르토몬트에서 북쪽 15km 거리다, 양키우에호 남안에 있음. 인구 약 3만 3000명. 남부 호수 지대의 중심지로 농업이 성함.가까이에 칠레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천연호수 ‘쟌키우에(Llanquihue, 면적 860㎢) 호’가 있다. 인접해 있는 푸에르토 몬트가 급격하게 성장하자, 이곳 역시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다양한 해산물 등을 기반으로 하여 주요 관광지로 부각되었다. 도시 곳곳에 고급 호텔과 식당이 들어서 있으며, 관광객들을 위한 다채로운 문화 이벤트도 개최된다. 우리도 이곳 중후하고 아쿠 큰 식당에서 중식을 했다. 그리고 양키우에 호수와 바라스 시가지를 산책하며 호수 낭만과 독일의 멋진 낭만을 즐겼다.
* 칠레 푸에르토몬트 항구 재승선
푸에르토몬트의 기항지 관광을 마치고 크루즈 배를 재승선한다. 칠레는 농산물 검역이 엄격하여서 크루즈 음식 반입을 절대 금한다. 외부에서 이런 것을 배로 들여오면 안 된다. 내일은 전일 항해다. 내일 오후 3시에 크루즈 배 6층 컨포런스 홀에서 우리 일행은 만난다. 오늘 저녁 식사는 자유다. 정찬식당에 가도 좋고, 뷔페식당에 가도 좋다. 뷔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또 런던에 거주하는 인도인 부부와 한 테이블에서 했다. 남자분이 날보고 지난번에도 만났고, 또 만났다고 매우 반가워한다. 대학교수였다고, 지금은 퇴직했고, 77세라고 소개한다. 부인은 73세라고 소개한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지금은 퇴직했다고 소개했다. 나의 남편은 우리은행 지점장이었고, 지금은 퇴직했다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두번째 직업으로는 나는 시인이고, 남편은 수필가라고 소개했다. 인도 교수님은 놀랍다고, 훌륭하다고 칭찬했다.
저녁에는 8시 15분부터 하는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성악가 남자 혼자 멋있는 음악을 선사한다. 악단과 함께 직접 파아노를 치며 노래도 부른다. 그 주인공 남자는 노래도 성악가로 잘 하지만 피아노, 하모니카, 기타, 드럼, 색스폰까지 연주하며 노래까지 부른다. 무대를 누비고 다닌다. 오늘 공연이 참 좋았다.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잊지 못할 것 같다. 공연 관람 후에는 7층에서 댄스도 관람했다. 음악과 함께 남녀 쌍쌍이 춤을 춘다. 네일은 전일항해다. 오전에 수영을 하고, 오후엔 3시에 모임이 있다. 크루즈 여행은 공연도 좋고, 음식도 좋고, 최고의 대접과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우아한 낭만을 즐기는 여정이다. 오후 6시에 푸에르토몬트 항구를 출항한다.
2017년 2월 18일 토요일 전일항해, 칠레 아말리아 해협
* 칠레 아말리아 해협
아침에 일어나서 발코니에 나가보니 우람한 산이 바다 가운데 떠 있다. 칠레 아말리아 해협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옷을 두텁게 입고 갑판으로 나가서 사방을 조망하며 보았다. 외국인 부부를 만나 서로 사진도 찍어 주었다. 웅장한 산에는 나무도 자라고 있다. 큰 나무는 아니지만 소나무 같은 모양의 나무들이 가득 차 있다. 많이 남극 가까이 왔는데, 지금은 이곳이 여름이어서인지 푸르다. 한국은 북반구에 위치하고, 여기는 남반구에 위치한 곳이어서 우라와는 계절이 정반대다. 2월로 한국은 겨울이니까, 여기는 여름이다. 갑판에는 바람이 세차다. 산 사이로 질주하는 배의 장관을 보고 15층 뷔페식당으로 와서 조식을 했다. 전면이 유리창인 창가에 앉아서 먹는다. 고개만 들면 산은 여전히 보인다. 바다와 산이 만나서 비경을 이룬다. 바닷물과 산을 섞어 행복한 조식이다. 캐나다에서 온 부부와 한 테이블에서 먹었다. 한국 남한을 사랑한다고 했다. 아이 러뷰, 러블리를 반복한다. 한국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잘 알고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캐나다에 가 보았고, 다시 로키마운틴만 1주일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더니, 좋고 굳, 굳 한다. 우리 부부가 갔던 밴쿠버, 토론토, 온타리오 강. 나이아라 폭포, 공원, 천섬, 캘거리, 로키산맥, 빅토리아섬, 뷰차드가든 등 모두 함께 공감하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오늘부터 파도와 바람이 심하다. 문이 안 열린다. 로비 안내원에게 신고했더니 거센 바람으로 위험해서 우리 방만 아니라 전체의 장을 문을 못 열게 조정했단다. 오후 3시에는 6층 컨퍼런스홀에서 다 같이 모여 '해무' 한국영화를 관람했다. 선사 측에서 제공해준 테이프다. 1998년 한국의 IMF 체제 후의 여수 어선의 배를 그린 영화다. 흉칙한 장면과 부끄러운 정사의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저녁에는 뷔페식당에서 미국 조지아에서 온 흑인 부부와 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다. 흑인 부부는 한국 서울에 두번 왔단다. 북한 김정남이 죽은 것도먼저 얘기했다. 그 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았다 저녁에는 8시 15분부터 하는 대극장공연을 관람했다. 마술쇼다. 재미있다. 박스에 사람이 들어가 반이 자리는 등 묘기가 아슬아슬하다. 공중에 떠서 남녀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혼자온 여자노인 일행과 7층 댄스룸에 가서 남녀대결 게임을 보았다. 피아노 치며 노래하는 홀 등을 돌아보고 룸으로 왔다. 밤에는 11시~새벽 6시까지 깊은 숙면을 취했다.
2017년 2월 19일 일요일 칠레 아말리아 해협 빙하지대
* 칠레 아말리아 해협 빙하지대
6시 30분에 모닝콜이 울렸다. 우리는 이미 6시에 기상했다. 웃을 따뜻하게 입고 갑판으로 나갔다. 오늘 아침 7시~8시까지 아말리아 빙하 해협을 통과한다. 배가 서서히 아말리아 해협으로 진입하여 빙하 가까이로 간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갑판 위에 모여 빙하를 조망한다. 그리 큰 빙하는 아니지만 웅장하다. 여러 빙하가 있지만 크루즈 배가 접근하는 빙하는 이곳 아말리아 빙하다. 산과 산 사이로 빙하가 내려와 바다에 투신한다. 이 빙하는 특이하게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뒤로 후퇴하는 빙하다. 그러니까 뒷면보다 앞면이 녹아 줄어드는 것이다. 이곳 산에는 남금의 특이한 식물과 동물 그리고 콘도르 새가 산다. 바다에서 수달, 고래 등이 산다. 갑팡 15층~18층을 오르내리며 빙하를 보있다. 칠레 파타고니아 지대의 빙하지역은 약 400Km 가까운 긴 거리에 이른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단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세계 최대의 빙하지대인 셈이다. 크루즈 배가 아말리아 빙하Amalia Glacier 해협을 통과 1시간에 거쳐 통과한다. 칠레 파타고니아 지대의 빙하지역은 약 400Km 가까운 긴 거리에 이른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단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세계 최대의 빙하지대인 셈이다. 아말리아 빙하는 너비 1Km, 높이 40m, 길이 약 21Km에 이르는 큰 규모의 빙하로 파타고니아의 빙하중 많은 빙하가 바다쪽으로 밀고 내려와 빙하의 넓이가 넓어지는 빙하도 있고, 아말리아 빙하처럼 후퇴하는 지역도 있다. 알래스카 빙하나 록키산맥의 빙하들은 지구온난화로 모든 빙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빙하가 줄고 있는것과는 다른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칠레 파타고니아 지대의 빙하지역은 약 400km 가까운 긴 거리에 이른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단의 파타고니아 지역은 세계 최대의 빙하지대다. 전체 빙하의 크기를 더하면 남극보다도 크다. 크루즈로 탐방가능한 빙하는 모레노(Moreno)빙하다. 모레노(Moreno) 빙하는 아르헨티나 엘찰톤에서 접근한다. 모레노 빙하의 크기는 길이가 약 32km 정도다. 빙벽이 떨어지는 모습과, 빙벽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쿠아 빙하라고도 알려져 있는 아말리아 빙하는 베르나르도 오히긴스 국립공원에 위치한 바닷물 빙하다. 파타고니아 남쪽 빙원에서 발원하여 1945년부터 1986년까지 빙하의 종점이 7Km 후퇴 하였다. 이 시기는 오히긴스 빙하를 따라 빙하가 가장 강력하게 후퇴된 시기다. 지금도 빙하으이 후퇴는 계속되고 있다. 이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것이다. 이 빙하의 일부분은 레클루스 화산에 들어싸여 있다. 최근 1980년에 화산 폭발로 인하여 북쪽 경사면이 생겼다. 이 지역의 약 190㎢ 를 차지하는 아말리아의 거대한 얼음 블루마운틴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여느 다른 빙하들처럼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 이 지역의 생태군은 아주 다양하다. 절벽이나 숲의 나뭇기지에 서식하는 모든 다른 종류의 새를 볼 수 있다. 배를 따라 헤엄치는 돌고래도 종종 볼 수 있다. 이곳은 멸종위기에 처한 바다수달의 고향이며 안데스 산맥 콘도르가 있는 지역이다. 아말리아는 이지역에서 가장 접근하기 쉬운 빙하 중 한다. 에스테로 아말리아는 빙원의 종점에서부터 남동쪽으로 16Km 뻗어 있다. 전체 피요르드는 깊고 위험하지 않다. 이 지역은 육로로는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크루즈만이 이 지역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1520년 마젤란이, 그리고 19세기 초에 다시 다윈이 갈라파고스 군도로 가는 길에 이 주위의 후미들을 항해했다. 꼭대기에 눈이 덮인 산맥, 원시 상태의 야생 자연, 그리고 물에서 솟구치는 고래 떼가 있어 이곳은 참으로 독특한 여정이다. 갑판에서 추운 날씨지만 끝까지 빙하를 았다. 그리 가까이 가서 빙하를 보여주진 않지만 안데스 산자락을 타고 흐르는 빙하가 장엄하다.
* 크루즈 배 뷔페식당에서 만난 대극장 공연 음악가
아말리아 해협의 빙하를 보고 15층 뷔페식당에서 조식을 했다. 호주 사람들과 합석했다. 우리 부부의 사진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극장에서 지난번에 공연한 음악가를 만나 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피아노 치며 하모니카 등 악기를 연주화 함께 성악 노래를 하던 남자다. 그가 탐존슨의 딜라일라 노래를 부를 때는 객석의 관객이 모두 열광하며 모두 함께 불렀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l love you)고 했더니 그는 감사하다(thank you)라고 답했다. 나는 그의 음악세계를 사랑하고, 그의 광폭한 노래를 사랑하고, 그의 영혼을 사랑한다. 오늘 밤 극장에서 그의 공연이 또 있다. 나는 꼭 일찍 가서 앞좌석에 앉아 카메라에 그를 담아 올 것이다.
* 크루즈 배 12층 305호 선실과 발코니 바다
뷔페식당에서 아침 식사 후 방으로 와서 휴식했다. 발코니에서 아직 떠나지 않은 빙하도 사진 찍고, 아말리아 해협을 빠져 나가는 뱃머리 풍경도 사진 찍었다. 오늘은 전일 항해다. 발코니 바다에서 본 남극의 산은 데드라인이 있다. 어느 선 아래에는 파란 나무들이 사는데, 그 위 부분 데드라인에는 바위만 있다. 방하 줄폭포도 흐른다. 우리 부부의 선실은 A12305다. 즉 아쿠아 12층 305호실이다. 층마다 예쁜 이름을 붙였는데, 12층은 아쿠아층이다. 남편은 고단한지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나는 옷장과 금고, 룸 내경을 사진 찍었다. 이런 정경도 먼 훗날 멋진 추억이 될 것이다. 중식은 15층 뷔페식당에서 먹었다. 샤워하고 오후엔 쉬고, 석식을 정찬식당에 가서 했다.
* 크루즈 배 6층 보트첼리 식당 정찬석식
오늘은 정찬식당에서 석식을 한다. 곱게 단장하고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간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귀걸이, 목걸이, 팔찌까지 하고 고상한 걸음으로 간다. 6층 보트첼리 정찬식당에는 배의 후미에서 포말지어 멋진 낭만을 선사하는 비닷물이 창문으로 들어온다. 기막힌 비경이다. 여기는 해뜨는 시간이 오전 6시 51분이고, 해지는 시간이 오후 9시 2분이다. 지금 저녁 6시경인데도 찬란한 태양이 바다를 춤추게 한다. 정찬식당에서 쇠고기와 새우, 샐러드,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먹고 뷔페식당에서 과일과 차를 마시러 간다. 동갑인 부산에서 온 친구와 사진도 찍었다. 나와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동갑으로 모두 용띠다. 그래서 우린 삼룡이라 칭하며 친하게 지냈다.
* 크루즈 배15층 뷔페식당 후식 차와 과일
6층 정찬식당에서 석식을 하고 15층 뷔페식당에서 와서 광일과 차, 그리고 커피를 마신다. 뷔페식당에는 언제나 넘치는 음식이 있다. 밤 9시까지 열려있다. 우리 부부는 식사는 정찬식당에서 하고 과일과 차와 커피를 먹으러 왔다. 바다에 무지개가 찬연하다. 과천 언니와 만나 사진 찍었다.
* 크루즈 배 대극장 공연-음악가의 피아노 연주와 노래
오늘 밤은 대극장에서, 뷔페식당에서 만나 함께 사진 찍었던 그 음악가의 열연이 있는 날이다. 오늘도 공연한다. 기타, 드럼, 섹스폰, 파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영국 국기가 자막으로 깔리고 '레잇비'를 부를 때는 객석에서 열광한다. 영국 4인조 중 하나인 비틀즈의 노래다. 공연관람을 마치고 카지노에 가서 우리 팀 남자 두 분이 하는 것을 봤다. 150불 땄다고 한다. 30분 정도 응원하다가 댄스 룸에 가서 보고, 피아노 라이브 연주고 보고 룸으로 왔다.
2017년 2월 20일 월요일 칠레 푼타아레나스 파타고니아, 양목장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 입항 태평양 일출 비경
아침 5시 30분 모닝콜에 기상했다. 6시에 조식이다. 7시 35분 7층 로비에서 모여 하선하다. 6시 51분에 일출이다. 식사 후 선실에 와서 일출 비경을 보았다. 디카, 폰사진 모두 잘 찍었다. 자손들에게 보내 줄 것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 텐더보트 승선
텐더보트로 푼타아레나스 항구로 이동한다. 텐더보트에서 앞에 앉은 사진 부산 친구가 우리 부부를 익살스럽게 뽀뽀하라며 사진을 찍어준다. 우린 젊은 기분으로 한바탕 웃었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 텐더보트 하선
텐더보트로 푼타아레나스 항구에 왔다. 항구 주변이 상당히 크고 아름답다. 푼타 아레나스는 산티아고 남쪽 약 2,200km 지점, 브런즈윅 반도 동쪽의 마젤란 해협에 접하고 있다. 푸에고섬의 우수아이아를 제외하면 세계 최남단의 도시다. 파나마 운하의 개통과 선박 석유연료의 개발에 따라 기항지에서 급탄지(給炭地)로 변모하여 중요성은 저하되었다. 그러나 파나마 운하 개통 전까지는 남동태평양에서 대서양 간의 연락항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런 역사를 말해주듯 항구의 외부와 내부에 시설이 잘 되어 있다. 마젤란 사진과 그가 이곳에 온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시가지
오늘 칠레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의 기항지 관광은 100년 이상된 양 목장 방문, 양털깍기 시연, 푼타아레나스 파노라믹 투어 등이다. 푼타아레나스는 남극으로가는 항구가 있는 도시다. 칠레 남부, 마가야네스 주의 주도다. 브룬스비크 반도 동쪽 연안 마젤란 해협에 접하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 마가야네스 magallanes라고도 한다. 인구는 11만 4천 명이다. 자유항이며 목양, 임업의 중심지다. 로레토 탄전이 있다. 우수아이아 버금가는 세계 최남단의 도시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는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도시다. 이곳에서는 비글해협이나 등대를 본다. 다음에 우리가 갈 곳이다. 지금 우리는 양 목장으로 간다. 바다와 접한 시가지를 지나간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마젤란 해협
오른 쪽 섬이 마젤란 해협의 '불의 땅'이고 우수아이아가 있다. 내일은 저 섬의 오늘쪽인 아르헨티나 영토 우수아이아에 간다. 오른쪽은 칠레 땅이다. 이 지역은 천연가스 연료를 사용한다. 땅 속에 관을 연결하여 사용한다. 지금 우리는 푼타아레나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 중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페리도 있다. 칠레는 15개 지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곳은 12번 지역이다. 1달러가 칠레화로 680페소다. 푼타아레나스의 인구는 12만 명이다. 이곳은 주도다. 푼타아레나스와 푸에르토몬트는 페리가 자주 운항한다. 비행기도 운항한다. 2시간 소요된다. 육로는 아르헨티나를 거쳐서 가는데 43시간 소요된다. 도시가 본토에서 멀어서 노동자의 임금이 비싸다. 왼쪽으로 공군기지가 지나간다. 농사짓기 어려워서 북부에서 갖다 먹는다. 마젤란 해협은 마젤란이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대서양을 38일을 소요하여 아까 보았던 티에라델프에고 섬까지 넘어온 해협이다. 대서양에서 이 해협을 통하여 태평양으로 빠져 나간다. 그 소요시간이 38일 이었다. 마젤란 해협 발견으로 항로에 큰 기여를 했다. 항해 시간 단축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마젤란 해협이라 이름 지었다.
마젤란 해협은 남미 본토와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주요 항로다. 길이는 520Km, 너비는 약 3~32Km다. 대부분이 칠레에 속해 있다. 스페인어로는 마가야네스 해협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중심도시는 1927년~37년까지 마가야네스라 불리던 칠레의 푼타아레나스다. 오늘날에는 520Km를 조금 넘는 길이를 몇 시간에 걸쳐 이동하지만, 1520년에는 처음으로 포르투갈 텀험가인 페르난도 마젤란이 이 지역을 항해할 때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넘어가는데 38일이 걸렸다. 이 항로의 발견으로 대다수의 선박은 이동거리를 단축하는 효과를 보게 되었다. 해양물류 산업에도 큰 도움이 되어 이곳은 인기가 많고 바쁜 항로가 되었다. 1914년에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마젤란 해협의 선박 통행량은 급감하였으나, 반대로 여행업은 큰 상승세를 타게 되었다. 역사적인 마젤란 해협을 바라보며 간다. 먼 나라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본다. 뜻깊은 여정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파타고니아
파타고니아는 스페인이 처음 들어와서 큰 발의 원주민을 보고 지은 이름이다. 거인이 털신 신고 다녔다. 원주민은 180Cm 이상으로 컸다. 1만 3천년부터 원주민이 거주했다. 파타고니아Patagonia라는 이름은 마젤란과 그의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했던 파타곤Patagon에서 유래되었다. 파타는 '큰', 고니아(곤)는 '발'이란 뜻이다. 처음엔 유배지였다. 남극 기지로 가는 곳으로 큰 의미가 있는 도시다. 연중기온은 낮고 바람이 세다. 이 거센 바람의 힘은 파타고니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이곳은 대평원이다. 목장이 많다. 광활하다. 양, 소떼가 많다. 타조 같은 새가 있다. 갈색 초지 대평원에 여라 마리가 있는 것을 보았다. 새 이름은 리아다. 암컷이 알을 2~3개 낳으면 숫컷이 품는다. 천적은 은색 , 적색 여우다. 알을 훔쳐 먹는다. 칠레는 석탄, 철광산업이 주였다. 푼타아레나스는 항구도시로도 중요하다.독수리 같은 새가 나무 기둥에 앉아 있다. 호수가 말랐다. 리아 새와 양떼들도 있다. 이 지역에서만 사는 새는 갈매기와 유사하다. 항상 그룹을 지어 다닌다. 한번 짝지으면 끝까지 부부로 산다. 이 지역에 아주 많은 새다. 대평원 한가운데 멀리 호수와 산이 보인다. 남편이 앉은 맞은편에는 아까 나무기둥에 앉아있던 그 종류의 새가 있다. 비포장 도로라서 버스가 요동친다. 몬타해협바다가 보인다. 이곳은 마젤란 해협은 아니다. 100년 전 영국령 포클랜드에서 양 300마리를 사 왔는데 그때부터 양을 사육했다. 귀에 탄생연도와 주인 표시를 해둔다. 여기도 영국인이 많다. 버스 안에 화장실이 있다. 이 길고 드넓은 파타고니아를 달릴 때 아주 유용한 시설이다. 가도, 가도 끝없는 파타고니아대평원에 동일한 수종이 있다. 키 작은 나무들, 갈색 풀이 뉴질랜드 남섬과 유사하다. 아까 본 갈매기와 유사한 새들이 날아가기도 한다. 저 새들은 지조 있는 새로 평생을 한 부부로 산다. 이곳에 사는 새 이름 세가지는 타조 모양의 리아, 독수리 모양의 크레스티드 까라까라, 오리 모양의 까이끼네스다. 무리 지어 생활한다. 크고 작은 빙하가 50개 이상 있다. 그 크기는 남극, 그린란드에 이어 세번째다. 파타고니아 지역의 경제기반은 주로 목축업(특히 양), 농업(밀, 과일), 어업(고래잡이) 등 농수산업, 석유기반의 에너지산업, 광업이 주를 이룬다. 안데스 산맥의 장대한 계곡과 남부지역은 습도가 낮아 양을 사육하는데 유리하다.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되는 양이 약 1500만 마리로 추산 되는데, 그 중 절반이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시육된다. 양이 이 지역에 들어온 19세기 후반 이후, 양은 이 지역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가 되었다.
파타고니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위 38°선 이남 지역으로, 서부는 칠레의 영토, 동부는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 안데스 산지와 파타고니아 고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인구는 희박하나 빙하 지형이 많아 관광업이 발달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파타고니아 지방은 칠레의 푸에르토몬트와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강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을 말한다. 전체 면적이 100만 ㎢를 넘어 한반도 면적의 5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양국에 걸쳐 잇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1520년 마젤란의 원정 당시 원주민들이 거인(patagón)일 것이라고 짐작한 데서 유래한다. 파타고니아에는 안데스 산맥이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달리고 있으며, 산맥의 동쪽 대부분은 파타고니아 고원이 차지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와 동부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로 구분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강수량이 많고, 안데스 산지에 빙하의 침식 작용이 더해져 복잡한 해안선과 산악 지형이 특징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건조한 기후에다 넓은 고원이라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서늘한 기후에다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영토 모두 핵심 지역과 거리가 멀어 전반적으로 인구가 희박하며 큰 도시도 드물다. 밀 재배와 목축업,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 등이 주요 산업이며, 최근에는 관광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파타고니아는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동일한 풍경을 드러낸다. 자작한 나무들과 풀들이 건조한 영토를 지킨다. 참으로 신비로운 땅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마을로 가는 페리 승선
넓은 호수에 백조 3마리가 있다. 이 호수를 페리로 건너 간다. 버스를 통째로 배에 싣는다. 우리가 방문할 양 목장이 건너 마을에 있다. 페리호에 승선했다. 우리는 내리지 않고 버스에 그대로 있다. 초속 60m로 바람이 부는 곳이다. 초속 40m만 불어도 사람이 날아간다. 바람이 센 지역이다. 이곳 파타고니아 지역에는 빙하도 많다. 주지사가 양 300마리를 영국령 포클랜드에서 데려왔는데 번식하여 부를 축적했다. 농업, 목축업, 어업으로 생활한다. 파타고니아는 스페인이 처음 들어왔을 때 광활한 대지에 놀랐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극히 일부다. 다양한 생태군이 있었다. 펭귄을 처음 본 곳이기도 하다. 그리 넓은 호수는 아니지만 바다 같은 환상으로 페리를 타고 양목장 마을로 넘어왔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야외 박물관
양목장에 도착했다. 오늘 이곳을 탐방한다. 양 사육, 가공, 가공품 수출등을 담당한다. 우리가 피치로에 해협을 건너 온 이곳 섬이 피스코 섬이다. 목장 주인의 세 딸들이 오늘 우리들의 식사를 위해 서빙해 줄 거란다. 해협 언덕 넓은 영토에 양목장 야외 박물관이 있다. 칠레 국기와 이곳 주기가 게양되어 펄럭인다. 또 건물 안에는 실내 박물관도 있다. 여러가지 오랜 세월 사용해온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릴 적 한국에서도 사용했던 다리미도 있다. 참으로 정겨운 풍경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양 목욕
알파카 농장의 양을 목욕 시킨다. 작은 우리 안에 남자가 양을 데리고 있다. 여자는 막대기를 들고 물가에 서 있다.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보려고 줄을 지어 서 있다. 남자가 문을 열어 양을 물 속으로 보낸다. 그떄 여자는 막대기로 양을 물 속에 밀어 넣으며 목욕을 시킨다. 몇 미터쯤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몸을 씻긴다. 이런 양 목욕은 1년에 몇 차례 시키는 것이란다. 신기한 양의 생활을 보았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박물관
이곳 지역의 양목장은 100년 전 파타고니아 정착민들이 만든 양떼 목장이다. 파타고니아 에스탄시아에 방문 온 것이다. 농장의 시설을 둘러보고, 양치기, 양털깎기 등을 관람한다. 지금은 박물관에 들어와 관람하고 있다. 실외도 보고 실내도 본다. 그 옛날부터 사용해 오던 물건들을 모두 전시해놓앗다. 재봉틀, 다리미, 그릇 등 온갖 생활용품이 다 모여 있다. 우리나라에서 어릴 적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과 유사한 것들도 많다. 칠레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정겨운 박물관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라마들
양목장에 라마들이 있다. 페루 마추픽추에서 본 그런 라마다. 라마, 또는 야마라고 부른다. 곁에는 소도 있다. 양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을 기르고 있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나무로 지은 성당
그 옛날의 나무 성당이 뒤켠에 있다. 성당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현지 여자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이 목장 주인이 딸 결혼을 위해 손수 지은 경전이다. 3명이 3개월 동안 나무를 해다가 지었단다. 아버지의 딸어 대한 사랑이 대단하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부모의 자식 사랑은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퓨마가 사는 곳
양목장을 돌라보는 중에 푸마가 사는 곳을 만났다. 철조망과 그물망으로 사방과 윗부분까지 망을 쳐놓았다. 퓨마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퓨마는 지금 15살이다. 이곳 목장에는 3살 때 들어왔단다. 양목장에서 퓨마을 만나니 소슬하다. 양목장 주인은 동물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것 같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양고기 굽는 곳
장작불에 양고기를 굽는다. 양고기를 긴 막대에 꿰어 네 다리를 펼쳐서 장작불가에 세워 놓고 저렇게 3일 동안 굽는단다. 양 네 마리가 우리들의 방문을 위해 죽었다고 생각하니 불쌍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구워진 양을 잘게 도막 치고 있다. 크루즈 배의 탐방객인 우리들에게 중식으로 제공하기 위해서다. 고마운 일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중식
중식으로 양고기, 찐감자, 야채, 토마토, 옥수수, 와인, 케익, 복숭아 통조림 등이 나왔다. 세계의 여행객들과 마주앉아 함께 먹는다. 모두 우리들의 크르주 배에서 온 승객들이다. 양고기 맛이 있다. 양고기를 먹기도 하지만 칠레 파타고니아의 식생활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양탈깎기 시연
이제 양목장의 마지막 순서로 마당에서 양털깎기 시연을 본다. 양뗴를 몰고 나와 그 중 양 한 마리를 남자가 붙잡고 마당 중앙에서 털을 깎는다. 여자는 가장자리에서 영어로 해설을 한다. 양 한 마라에게서 아주 많은 양털이 나왔다. 다 깎은 양털을 깔아 놓고 와서 만져보게 한다. 이런 산업으로 수입원을 이룩하여 이곳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을 게 해준 양목장 체험이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양목장 산책
모든 탐방을 마치고 목장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호수와 접한 목장의 풍경은 참으로 목가적이다. 목장 주인은 이곳 섬에 이런 목장을 30개 소유하고 있단다. 떠나 올 때 작은 선물을 준다. 딸이 차에 올라와서 양가죽 열쇠고리를 나누어 준다. 정이 담긴 선물이다. 이제 푼타아레나스로 이동한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전망 포인트
양목장에서 버스로 파티고니아를 달려간다. 작은 나무들과 건조한 풀이 광활한 대평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비가 온다. 앞의 버스가 분제가 생겨서 도로에서 약간 지체했다.버스 3대가 운행히고 있다. 모두 크루즈 승객이 탄 버스다. 버스 뒤에 있는 실내 화장실이 참 좋다. 2시간을 달려왔다. 전망 포인트(뷰포인트 라 크루즈힐)에서 푼타아레나스 시가지를 조망한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바다 가운데 우리의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다. 우리를 기다린다. 촉박한 시간으로 급히 떠나왔다. 크루즈 배는 출항시간을 지켜야 해서 그렇다. 다음 기항지에 예정시간보다 늦게 들어가면 추가금액을 엄창 많이 다시 지불해야 한단다. 왜냐하면 우리 크루즈 배를 받기 위해 비워둔 항구가 약속시간 보다 늦게 들어가면 다음 배를 받는데 차질을 빚어 받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항구에 정박하는 비용은 항구에 따라 다르지만 상당히 비싸단다. 그래서 출항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배는 기다려주지 못한다. 다음 기항지로 개인이 찾아와야 한다. 크루즈 여행은 그렇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마젤란 동상 광장
칠레 푼타아레나스 시가지에 진입하여 마젤란 동상 광장에 왔다. 주변에 우람한 나무 공원이 있다. 광장에는 큰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동상이 서 있다. 주변은 은행, 관공서 등 웅장한 건물들이 많다. 유럽풍의 영국식 건물도 많다. 마젤란이 마젤란 해협을 발견한 공이 크다. 푼타아레나스의 메인 광장이다. 마젤란은(1480?~1521) 포르투갈 태생의 스페인 항해자다. 마젤란 해협의 발견자이며 인류 최초의 지구일주 항해 선단의 지휘자다. 1505년 인도의 부왕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의 함대로 인도에 갔다. 인도에서 7년 동안 체재하면서 몰루카 제도에서 그 풍부한 향료의 거래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1512년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1516년 국왕 마누엘 1세를 알현하여 봉급 증액과 항해 임무 등을 청원했으나 국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1517년 카스티야로 갔다. 1518년 카스티야 왕 카롤루스 1세(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에게 서쪽으로 돌아가는 항로에 의해 몰루카 제도에 도달하는 계획을 제안하였다. 이 항해에는 몰루카 제도의 향료를 노리고 앙베르의 상인도 출자하여 5척에 약 240명이 승선했다. 일행은 1519년 9월 20일에 출항하여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그해 12월 리우데자네이루만에 도착했고 그 후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를 찾아 남하하여 1520년 1월 라플라타강을 탐험했으며 괌 섬을 거쳐 1521년 4월 7일 필리핀 제도의 세부섬에 도착했다. 섬의 왕 하마발과 우호를 맺어 그리스도교를 전하고 에스파냐 왕에게 복종하게 했으나, 이것을 거부하는 근처 막탄섬의 왕 라프라프를 징벌하기 위해 출진했다가 4월 27일 그 섬에서 전사했다. 남은 일행은 1522년 9월 6일 에스파냐로 돌아갔으나, 식량부족과 괴혈병 · 악천후에 시달려 살아 돌아온 자는 겨우 18명이었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지구일주 항해다.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마젤란에 대한 항해 역사와 그를 눈앞에서 만난다. 그가 발견한 마젤란 해협을 보며 왔고, 광장에서 그와 마주 하고 있다. 비록 동상이지만 지구에서 훌륭한 일을 한 분을 만 것은 축복이다. 비가 그쳤다가, 오다가를 반복한다. 오랜 역사를 말하듯 나무들이 매우 우람하다. 비록 사람은 갔어도 그의 혼은 남아서 세계인의 걸음으로 불러 모은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시가지
마젤란 동상 광장 주변 시가지를 한 바퀴 산책했다. 도심 거리라서 차도에는 차들이 왕래하고 도로변에는 관공서, 은행, 상가, 사무실 등 주요 건물들이 많다. 유럽풍 향수가 배인 건물들이 아름답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 풍경
푼타아레나스항구에 오니 날씨가 화창하다. 마젤란 공원에서 가까운 곳인데 오는 동안 활짝 개였다. 기막힌 날씨 변화다. 사진이 아주 잘 나온다. 바다에 무지개도 떴다. 크루즈 배가 바다 가운데 떠서 우리를 기다린다. 항구 주변은 항구 터미널 실내, 실외에 마젤란에 대한 안내문구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영향력이 이곳에서 얼마나 는지 증명하는 대목이다. 교과서에서나 배운 마젤란과 마젤란 해협을 오늘 생생하게 보고, 밟고 간다. 잊을 수 없는 보람되고, 기쁘고, 흐뭇한 여정이다. 참으로 행복하여서 고맙고, 감사하다고 가슴으로, 입술로 크게 외치고 다닌다. 축복이다. 하늘도, 산도, 구름도, 바다도, 태양도 모두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품어준다. 이렇게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씻어주고 보듬어 주니 모든 아픔이거나, 고통이거나, 질병이 있다손 치더라도 다 치유해 줄 것이다. 그래서 세계여행은 나의 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자꾸 우리 부부를 이끈다. 시간과, 건강과, 적당한 여유에 감사한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에서 텐더보트 승선 크루즈 배로 이동
아침에 텐데보트로 육지로 나왔던 것처럼 이번에는 반대로 텐더보트를 타고 크루즈 배로 돌아갈 시간이다. 해는 석양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푼타아레나스 항구에서 텐더보트를 타고 바다를 달린다. 보트의 창문 밖으로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가 보인다. 참 반갑고 고맙다.
* 칠레 푼타아레나스 항구 크루즈 배 재승선
저녁은 뷔페식당에서 먹었다. 그런데 큰 크루즈 배 바로 곁으로 헤엄치며 가는 고래 두 마리를 보았다. 한 마리는 바닷물을 하얗게 높이 뿜어 솟구치게 하고는 지나간다. 또 한 마리는 배 바로 곁으로 다가와 긴 몸통을 물 위로 내밀었다가 들어가곤 한다. 엄청 큰 고래다. 등도 보여주다가, 하얀 배도 보여주고, 유유히 태평양 바다로 나아간다. 식당의 세계 사람들이 모여 'Whale, Whale'하고 환호랬다. 고래는순식간에 긴 거리를 이동하고 저 멀리서 헤엄치고 있다. 저녁식사 후 대극장에서 오후 8시 15분ㄴ부터 9시까지 기타맨의 음악공연을 보았다. 악단과 함께 기타를 연주한다. 크리스 산토리나가 고향이고, 57세라는 덩치 큰 남자의 소로 무대다. 지난번 음아가보다는 나의 영혼을 사로잡진 못해도 참 낭만의 밤이다. 베사메쿠쵸를 부를 때는 함께 불렀다. 극장을 나와 우리 부부와 과천 언니랑 카지노에 가서 우리 일행 두 남다가 하는 카지노를 보았다. 보는 것도 재미있다. 한 여자는 빠찡꼬를 한다. 10달러를 넣고 밤새 즐기는 게임이란다. 남편은 룸에 가고, 과천언니와 선내를 걷다가 뷔페식당에 가서 물 한 컵을 먹고 18층 라운지 뮤직공연을 보러가지고 했는데, 남편이 커피와 물을 들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냥 온 거란다. 기뻐서 셋이 담소를 나누고 룸으로 왔다. 밤 10시가 넘어서 그냥 물에 왔다. 내일은 낮 12시게 배가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기항한다. 우리는 1시에 7층 중안 로비에서 만나 기항지 관광을 한다. 디카 건전지, 수신기,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오늘의 메모를 적고 있다.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12일째 여정이 마무리 되는 시간이다. 참 빨리 가는 여정이다.
2017년 2월 21일 화요일 지구의 끝도시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바다 설산 풍경
새벽 5시 30분에 기상했다. 어스름 새벽인데 동트고 있다. 고산 설봉이 창가를 지나간다. 비경이다. 여기는 아르헨티나 영토다. 크루즈 배가 이세 칠레를 떠나 아르헨티나 영토에 진입한다. 우수아이아 항구에 기항한다. 우리 부부는 15층~18층 갑판에 나가 우수아이아 항구를 조망했다. 바다 위에 뜬 설산 풍경이 비경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 기항
크루즈 배가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에 기항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남극의 도시다. 15층~18층 갑판에 올라가 풍경을 보았다. 기막힌 비경이다. 우람한 산이 뱃머리에 서 있고 고봉에는 눈이 하얗다. 산과 눈과 바다와 청정도시가 비경을 이룬다.
* 크루즈 배 뷔페식당 조식
갑판에서 내려와 뷔페식당에서 조식을 했다 언제나 풍성한 식단으로 우리를 대접하는 손길이 고마다. 배의 직원들은 최선을 다 해 서빙해 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리 골고루 많이 있어서 참 좋다. 한국에 돌아가면 두고두고 그리울 식단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 하선
크루즈 배를 하선할 때는 그룹 번호표를 몸에 부착해준다. 배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부착하고 다녀애 한다. 우리 일행은 1번이다. 그것은 세계여러 나라 사람들이 일시에 이동하므로 순서를 정하는 표식이다. 버스를 승차할 때는 그 버스 번호이기도 하다. 나는 붉은 색상의 1번 표를 가방 끈에 부착시켰다. 1번 그룹은 우리 일행 12명과 세계 각국 사란들 100명 이상이다. 크루즈 배 7층 중앙에서 오후 1시에 만나 6,7층 대극장으로 이동하여 대기하다가 배 밖으로 하선할 때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 4층에서 하선한다. 긴 도로가 배에서 이어지고 있다. 우수아이아 항구에 기항한 다른 크루즈 배들도 있다. 우리는 오늘 비글해협 야생동물 관광 크루즈 (Beagle Channel Wildliffe Cruise)로 눈 덮힌 산과 폭포가 많은 강, 침엽수 등이 어우러진 야생동식물 서식지를 보트로 탐험할 것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투어 배 승선
크루즈 배에서 하선하여 우수아이아 항구의 길을 따라 조금 걸어서 비글해협 투어 배 승선장으로 간다. 우수아이아는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위치해 있다. 세계 최남단의 항구도시이며 비글 해협과 닿아 있다. 비글 해협이란 이름은 1832년 찰스 로버트 다윈이 탐사선 비글호를 타고와 통과하였는데, 그때의 비글호에서 명명되었다. 비글호의 선장은 로버츠 피츠로이였다. 하지만 이곳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로버트 피츠로이이다. 그는 1830년대 탐사항해를 하던 중 이곳을 발견했다. 피에라 델 푸에코에 있는 이 해협은 좁지만 안전한 수로이다. 티에라 델 푸에고의 최고봉은 다윈 산으로, 높이는 1,830미터에 달하면 눈이 90미터 이상 쌓여 있다. 비글 해협의 섬들은 종종 영토 분쟁에 휘말리곤 했는데 현재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두 나라가 양분하고 있다. 양국은 이곳의 풍부한 광물과 크릴새우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부근에는 눈 덮인 산과 폭포가 많은 강이 있고 침엽수가 울창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비글해협의 동쪽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지나가며, 서쪽은 전부 칠레에 속한다. 비록 큰 배가 항해할 수 있는 해협이지만, 남쪽 드레이크 해협과 북쪽 마젤란 해협에 더 안전한 수로가 존재한다. 비글호의 두 번째 항해에는 찰스 다윈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너비 약 5~13km. 길이 약 240km로 광대하다.
비글 해협은 수많은 선박을 난파시키며 악명을 떨친 케이프 혼의 험한 바다를 피해 우회할 수 있는 곳으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아름다운 수역을 둘러싸고 종종 벌어지는 정치적 분쟁을 제외한다면 비글 해협은 온갖 바다 동물이 서식하는 조용한 안식처다. 마치 천연의 원형극장처럼 둥글게 늘어선 험준한 산, 빙하와 폭포들을 배경으로 자연의 장관이 펼쳐져 있다. 다윈의 족적을 따라 오늘 우리는 비글해협을 탐험한다. 우수아이아 항구에 기항한 우리들의 크루즈 배 프린세스 크라운호 곁을 지나간다. 이 일대 바다가 모두 비글해협이다. 기항지에서 점점 멀리 배가 미끄러져 간다. 우리 부부는 갑판에서 해협을 조망했다. 아름다운 우수아이아의 비경이 배를 따라 온다. 하얀 포말과 바다, 설산과 시가지 풍경이 장관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새섬
비글 해협Canal Beagle은 남아메리카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 있는 해협. 펭귄과 바다사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진화론을 주장했던 찰스 다윈이 이곳을 지날 때 탑승하고 있었던 배의 이름이 비글호였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해협이다. 해협의 동쪽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국경이 지나가며 서쪽은 전부 칠레에 속한다. 이 좁은 해협에는 종종 바위섬들이 있는데 한대 지방의 해양 생태를 대표하는 많은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해협투어는 우수아이아의 필수 여행이다. 배가 새섬 가까이 왔다. 꼭 펭귄 같은 새들이 넓은 바위 무리지어 가득 앉아 있다. 진풍경이다. 배는 빙그르 돌아 어느 곳에 승선한 사람이라도 다 볼 수 있도록 배려해준다. 펭귄은 아닌데 펭귄 모양으로 바위에 서 있다. 색깔도 펭귄과 똑 같다. 날아다니기도 하고, 바위에 아슬하게 짝지어 서 있기도 한다. 크고 작은 바위섬도 많고 이곳 주변 섬은 모두 새들이 서식하고 있다. 비경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갈매기섬
이번에는 배가 제법 큰 섬으로 왔다. 해변 모래사장에 갈래기 들이 모여 사는 갈매기섬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비글 해협 바다는 대서양과 태평양이 만나는 곳으로, 해협 곳곳에 있는 수많은 섬에 사는 다양한 동물의 먹이를 제공한다. 이곳에 다양한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이다. 바다갈매기, 바다제비, 짧은꼬리앨버트로스, 도둑갈매기, 증기선오리와 가마우지가 마젤란펭귄이나 젠투펭귄과 함께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자리 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지금 보는 이 섬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육지를 연상케 한다. 아름다운 정경이다. 약 2시간 30분 카타마란호를 타고 비글해협을 크루징하며 바다 생태계를 관람한다. 아메리카 남단 비글해협에는 작은 섬과 암초가 여러 군데 있어 해표, 바다새, 펭귄 등이 서식하고 있다. 로스 로보스섬에는 바다사자를, 로스 피하로 섬에서는 가마우지 떼도 볼 수 있다. 분명 우리의 바다와는 색다른 바다 풍경이다. 사람이 있어야 해변에 새들이 모여 놀고 있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바다사자섬
큰 바위 섬에 바다사자들이 많다. 대부분 널쩍하고 큰 바위 위에 누워서 뒹군다. 어떤 검은 녀석을 자기의 가족을 돌보는 것인지 크고 작은 몇 마리를 보듬고 있다. 대부분 진갈색이도 몸집이 큰 편이다. 무공해 청정 바다에서 잘 자란 평화스런 자태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 등대섬
조그만 섬에 붉은 등대가 오롯하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곳 비글해협으로 들어오는 배를 키켜주는 항구다. Les Eclaireurs 등대는 지구의 끝에 있는 등대이며 남미 최고의 포토 포인트이기도 하다. 해협 남서쪽에 있는 섬들의 소유권을 놓고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이미 1900년대 초반부터 분쟁을 지속해 왔다. 1977년 국제사법재판소 ICJ는 비글해협 남서쪽의 3개 섬들이 당시 점유국인 칠레 영토인 것으로 확정했지만 아르헨티나는 승복하지 않았다. 이에 1978년~1984년까지 19차례에 걸친 군사 충돌이 발생했고,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분쟁은 끝났다. 지구 어느 곳에서든지, 이곳 바다에서도 국가간의 분쟁이 일었다니 참 소슬한 이야기다. 등대는 처연하게 아무 것도 모르는양 바다를 밝히고 있다.
* 아르헨티나 비글해협에서 우수아이아 항구로 돌아가는 배
이제 배를 돌려 기항지로 간다. 배가 속도를 줄여 비글해협 해변을 조망했다. 아름다운 숲과 집이 있고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산길을 간다. 멋진 풍경이다. 이 집은 우수아이아 입항할 무렵 우리 크루즈 배가 지나온 곳이다. 여기는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비글해협이다. 고운 풍경이다. 배는 이제 우수아이아 항국로 질주한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지구의 끝도시 표식판
배에서 내려 우수아이아Ushuaia 시가지 산책을 하기 위해 도시로 걸어가서 해변에 이곳이 지구의 가장 남극 끝 도시라는 표식판을 만났다.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긴 안내판이다. 우리는 지구의 도시로서는 가장 남극 끝점에 형성된 도시, 우수아이아에 서 있다.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가 바다에 떠 있다. 고맙고, 반가운 풍경이다. 아름다운 설산과 바다 등이 비경을 이룬다.
아르헨티나의 인구는 약 4,100만이다. 수도는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로 수도에만 300만 명 이상이 거주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 약 1,500만이 거주한다. 남극대륙 및 남부 도서지역을 제외한 국가의 면적은 2,791,810㎢로 한반도의 약 12배에 달핚다. 동쪽으로는 브라질과 우루과이, 서쪽으로는 칠레, 북쪽으로는 볼리비아, 파라과이와 경계를 맺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대서양과 면하고 있다. 여기는 아르헨티나 영토다. 비글 해협 연안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티에라델푸에고 주, 비글 해협 연안의 세계 최남단, 세상의 끝에 있는 도시다. 아르헨티나의 해군기지가 있는 도시로 카타마란호를 타고 비글해협을 다녀오는 투어가 인기다. 땅끝 박물관, 감옥 박물관 등도 이 도시의 볼거리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위치하며, 아르헨티나 본토와는 마젤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다. 1870년 영국의 선교사인 와스티 H. 스털링이 이곳에 처음 정착했다. 1884년에는 아르헨티나 해군기지가 세워졌고, 티에라델푸에고 제도가 아르헨티나령과 칠레령으로 나누어진 뒤 1893년 시가 되었다. 경제활동으로는 제재, 목양, 어업, 덫사냥 등을 주로 한다.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다. 우수아이아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주의 주도로,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푸에고 섬의 남안에 있으며, 인구는 약 5만 명이다. 현지 사람들은 이곳을 ‘핀 델 문도(Fin del Mundo)’, 즉 ‘세계의 끝’이라고 부른다. 남극을 제외한 세계 최남단,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남쪽에 설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항구 마을, 그곳에 바로 세계의 끝 우수아이아가 자리 잡고 있다. 먼 옛날 대항해 시대 당시에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많은 배들이 대자연의 재앙 앞에 침몰했다. 좁고 거친 파도를 가진 해협을 바라보며 경사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마을은 1년 내내 세계의 끝을 느끼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우리도 아시아 대한민국에서 우수아이아를 보기 위해 여기 왔다. 항구 주변의 지구 맨끝 땅이라는 표식판 앞에서 매우 큰 감동으로 한 동안 바라보았다. 사실 이곳 영토보다 더 아래의 마을에 사람이 사는 곳이 있단다. 그곳 인구는 2천 명이다. 지구에서 도시로 표기되는 조건은 인구가 5천 명 이상 거주해야 된단다. 그래서 이곳보다 더 아래의 그 마을은 도시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5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 우수아이아가 지구의 최남단 땅끝 도시로 불리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 여기 온 것은 큰 축복이며 생애의 큰 보람이고 기쁨이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시가지 산책
우수아이아는 아르헨티나 영토다.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3250Km, 남극에서는 1200Km 떨어져 있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티에라 델 푸에고의 주도다. 이 주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세상의 끝'이라는 별칭을 가진 항구 도시다. 1520년 대서양쪽에서 남하하던 마젤란은 해변을 따라 밝혀져 있는 불을 발견했다. 이 불은 이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의 횃불이었다. 바람이 강한 불모의 땅에 타고 있는 불을 이상하게 여긴 마젤란은 '불의 땅'이라는 뜻의 티에라 델 푸에고라고 이름을 짓게 되었다. 푸에고 섬의 중심인 우수아이아는 인구 6만 명의 도시다. 1896년 아르헨티나는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이곳을 죄수 유배지로 지정하고, 1902년 이곳에 감옥을 건설하였다. 1947년까지 죄수를 수감하였다. 어업, 임업, 목축업(소, 양)과 함께 금의 발견이 많은 정착민을 유도하였다. 1월 기온은 가장 따뜻한 때로 평균 10도이며 하루 일조량이 17시간에 달한다. 반대로 7월은 가장 추운 달로 평균 기온이 1도, 일조량은 7시간에 그친다.
우리 일행은 어느 지점에서 흩어져 각자 도시를 산책하고 크루즈 배에 오후 7시까지 승선하기로 했다. 우리 부부는 우수아이아의 시가지를 많이 보기 위해 도심 복판 거리를 따라 한참 걸어 갔다. 이토록 추운 남극 영토인데, 지금이 여기는 여름이어서인지 도로변 휴식 공간에 꽃이 피어 있다. 참 반가운 풍경이다. 도로변에 민들레도 자생한다. 도시의 건물ㄷ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구조와 고운 색상이다. 관광객이 세계 각국에서 오는 도시라서 잘 조성하고, 잘 가꾼 풍경이 정성스럽게 보인다. 상가, 호텔 등 다양한 건물들이 줄지어 가득하다. 아이쇼핑도 하고, 사진도 찍고, 배가 보이는 골목길로 내려왔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로 가며 본 풍경
조금 둔덕의 우수아이아 도심 시가지에 내려오니 바다가 보이고, 크루즈 배가 보인다. 참으로 반가운 정경이다. 내려가는 언덕길은 파란 풀이 곱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에바페론 공원
우수아이아 시가지 산책을 마치고 크루즈 배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났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부인인 에바 여인의 공원이다. 그녀의 흉상을 세워 놓았다. 그리 크진 않지만 아담한 공원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공부할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복지에 기여를 많이 했지만 너무 지나친 복지로 나라를 곤경에 빠뜨린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다는 정도만 나는 알고 있다. 브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 무덤공원에 그녀의 묘가 있다. 대궐처럼 크다. 우리 부부는 예전 남미 육로여행에서 그 묘를 보았다. 에바 페론(1919~1952)은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이다. 빈민층의 딸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의 인생은 인생 그 자체만으로도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성녀'로 존경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정권유지를 위한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평가와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 몰락의 단초라는 너무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에바 곁에서 아르헨티나를 사랑한 그녀의 숨결을 느끼며 잠시 머물고 크루즈 배를 승선하기 위해 서둘러 나왔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
항상 기항지에서 크루즈 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저기 바다에서 우람한 몸체로 평화롭게 앉아 우리를 기다린다. 고맙고 감사하다. 배가 있는 곳으로 왔다. 횡단보도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도로다. 곳곳에 경찰과 경찰견이 치안을 지키고 있다. 우수아이아 도시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자꾸 돌아본다. 바다, 산, 설산, 시가지가 모두 아름다워서 떠나기 싫다. 크루즈 배가 전경이 카메라에 담긴다. 우리 부부는 함께 카메라와 스마트폰에 담았다. 먼 훗날 두고두고 보며 행복할 것이다. 승선 카드를 체크하고, 짐 수색을 거쳐서 우리의 룸 12층 305호로 돌아왔다.
*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항구 재승선하여 크루즈 배에서 본 풍경
이곳은 남극 여행의 전초 기지로도 유명하다. 남극으로부터 불과 1,000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사람들이 머무는 베이스 캠프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궂은 날씨로 늘 회색빛을 띠는 이 마을의 거리를 걸으면서 세계 최남단 마을의 정취를 느낀다. 아르헨티나 최남단 티에라델푸에고 주의 주도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남쪽 끝에 위치하여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항구 도시로 남극 지방의 해상 교통 거점이다. 이 도시의 우수아이아 항구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비글 해협에 위치한 남극 항로의 기점으로, 해상 교통의 요지이다. 위치와 기후적 특성이 만들어 낸 특별한 자연환경, 티에라델푸에고 국립공원 등 관광 자원도 풍부하다. 원격지라는 특성 때문에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남아메리카 대륙 남쪽 끝에 있는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서 가장 큰 섬에 있다. 세계 최남단의 항구도시이며 비글해협(1832년 찰스 로버트 다윈이 비글호로 통과한 데에서 명명)과 닿아 있다. 1870년 영국 선교사인 와스티 H.스털링이 처음 정착하였고 1884년 아르헨티나의 해군기지가 설치되었다. 1893년 시가 되었다. 부근에는 눈 덮인 산과 폭포가 많은 강, 침엽수 등 장엄한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주민들은 양고기 가공과 제재·어업 등에 종사한다. 기선과 비행기로, 브에노스아이레스로부터 5시간 소요하며 찾아오는 관광객이 많다. 중요한 해군기지이기도 하여서 해군사관학교 후보생은 반드시 한번은 이곳에서 근무해야 한다. 나는 이런 역사와 중요한 몇 가지 사항들을 간직한 우수아이아를 다시 보기 위해, 석식 중 카메라를 들고 16층 갑판으로 올라왔다. 우리 나라의 남극기지도 어딘가에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자 곳곳을 더 자세히 바라보있다. 그리 곳곳을 사진기에 담았다. 작은 도시인데 항구 주변에 주요 시설 건물들이 많다. 이제 해는 떠나가려 한다. 이제 곧 우리의 배도 떠날 것이다. 오후 8시 출항한다. 이곳은 밤 9시가 넘어야 해가 진다. 선셋 풍경이 비경이다. 다른 크루즈 배도 떠나간다. 아름다워서 잊지 못할 기항지다. 갑판에서 다시 15층 후미 뷔페식당에서 석식을 했다. 그 무렵쯤 배는 떠나간다. 다시 또 오고 싶은 여행지다. 석식 후 대극장 공연을 관람했다. 8시 15분부터 공연한다. 좀 늦게 갔는데 마침 맨 앞자리에 좌석이 있어 앉았다. 엉덩이가 아주 큰 중년 흑인 여자가 상체가 많이 파인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노래를 부른다. 악단은 어제와 동일하다. 파워풀하게, 애절하게 잘 부른다. 오늘은 배 갑판에서 찬바람을 쐬어서인지 시가지를 많이 걸어서인디 피곤하여서 공연 후 룸으로 바로 왔다. 하루, 하루의 여정이 참으로 행복하다.
2017년 2월 22일 수요일 지구 최남단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바다 칠레 케이프혼 통과
* 지구 최남단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바다 칠레 케이프혼 통과
새벽 6시에 기상하여 발코니에 나가려 하니 문이 안 열린다. 바람이 세계 불 때는 중앙 전체 통제소에서 발코니 문을 못 열게 하기도 하고, 또 바람의 힘으로 문을 밀어 자동으로 안 열리기도 한다. 그때는 억지로 발코니 문을 열면 안 된다. 그리고 억지로 열고 나가도 바다로 빠질 수 있어 나가면 안 된다. 7시 모닝콜을 받고 옷을 구껍게 입고 먼저 15층 뷔페식당에 가서 조식을 했다. 창문 밖으로 바위섬이 자나간다. 여기는 칠레령이다. 식사를 마치고 16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 이곳은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곳이다. 교차하는 바다 길목이 요란하게 바람과 파도가 요동치는 것이다. 420m의 바위 절벽이 보인다. 기막힌 비경이다. 저 바위섬을 보고 네덜란드 호른이라는 사람이 케이프 혼곶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여기는 지구의 남극 땅 끝점이다. 이제 돌아서 포클랜드로 간다. 맞은 편은 망망한 태평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바다다. 이제 이곳을 돌아 대서양, 아르헨티나 쪽으로 간다. 파도가 심하여 배 곁으로 하얀 물거품이 찬란하다. 해가 검은 구름 속에서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손과 얼굴이 시리다. 참으로 뜻깊고, 의미 있고, 보람찬 여정이다.
오늘 오후 3시에는 6층 컨러런스 홀에 모여 우리 일행끼리 윷놀이를 한다. 점심식사는 뷔페식당에서 미국 워싱턴에 산다는 우리 교민 부부와 넷이 합석하여 식사를 했다. 한국에 있는 국민들보다 담장 밖에 있는 해외동포들이 우리나라의 요즘 사태를 많이 염려한다고 했다. 대통령 문제도 잘 해결되고, 안보 등 모두 잘 지켜지길 빈다. 오후 3시에는 윷놀이를 했다. 한 판에 10달러씩 걸고 했는데 우리 부부는 한 편이었다. 첫판은 여서 10달러씩 내고, 두 번째 판은 이겨서 돈을 내지 않았다. 내가 말판을 썼다. 모두 흥겨운 놀이였다. 오후 3시 30분부터 뷔페식당 끝에서 누들타임이 있다. 우리 부부는 윷놀이를 마치고 4시경 가서 메밀국수를 먹었다. 김과 새우를 얹어 남편은 비프 국물에, 나는 피시 국물에 말아 먹었다. 그런데 남편 국물은 한국 된장 맛이 나서 맛있고, 나는 좀 싱겁지만 멸치 맛이 나서 개운하고 좋았다. 참 행복한 시간이다. 남미 최남단 케이프 혼 통과하는 시간 08:00~09:00까지 선내 티브이 45번 채널에서도 방영해준다.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까지는 케이프혼은 마젤란 해협과 함께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중요항로였다. 높이 약 420m의 절벽이 바다에 다가서 있는 데다, 편서풍이 심하고 파도가 거칠어서 항해하기 어려운 곳이다. 칠레 최남단 케이프 혼은 바다의 에베레스트로 불리며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바다로 알려져 있으며, 국민적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고 희망과 도전정신을 심어주기 위한 김승진 선장의 요트 세계일주 ‘희망항해’의 최대 난관으로 꼽혔다. 남미와 남극사이의 해역에 위치한 케이프 혼이 바다의 에베레스트라 불리는 이유는 연중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는 물론 유빙이 많은 해역이기 때문으로, 김승진 선장의 아라파니호가 케이프 혼을 통과하던 당일에도 평균 풍속 36노트(최대풍속 50노트)의 돌풍과 함께 파고 5~7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파도가 5일 동안 계속돼 요트에 물이 차는 등 항해에 최대 위기를 겪기도 했다. 오후 3시에는 우리 그룹만 6층 컨퍼런스룸에 모여 윷놀이들 했다. 인솔자가 한국에서 윷을 가져와 우리 나라의 전통민속놀이를 먼 타국 배에서 하니 참 흐뭇했다. 남미의 최남단이자 ‘세계의 끝’이라 일컬어지는 케이프 혼은 1578년에 영국인 F. 드레이크가 이곳에 도달하였고, 1616년 네덜란드인 W.C. 쇼우텐이 처음으로 통과하여 그의 고향인 조이델해 서안의 호른의 이름을 따서 케이프 혼이라 명명하였다.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하기까지는 마젤란 해협과 함께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중요 항로였다. 높이 약 420m의 절벽이 바다에 다가서 있는 데다, 편서풍이 심하여 파도가 거칠어서 항해하기 어려운 곳이다. 오늘날도 기선은 북쪽의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다.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에 위치한 혼 곶은 칠레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 위치하며 지명은 네덜란드의 도시인 호른Hoorn에서 유래하였다. 이 지역은 남아메리카 최남단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으며 세 개의 그레이트 케이프들인 아프리카의 희망봉, 오스트레일리아의 루윈 곶, 남아메리카의 혼 곶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또한 드레이크 해협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곶은 오랫동안 세계를 돌며 무역을 하였던 범선들이 이용하던 클리퍼 루트의 이정표가 되었다. 하지만 혼 곶 주변의 바다는 강풍과 큰 파도, 빠른 해류와 유빙 때문에 극히 위험하다. 이로 인한 위험 때문에 선원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대항해 시대 때에는 선원들 사이에 희망봉 근처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유령선 괴담과 같은 '백의 노인 괴담'이 있었다. 조타수들이 파도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볼 때 배 뒤로 지팡이를 질질 끌며 희 옷을 입은 노인이 바다 위를 걸어 배 뒤를 쫓아 온다는 것이다.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면서 선박들이 혼 곶을 돌아가야할 필요성이 크게 줄었다. 하지만 혼 곶 주위를 항해하는 것은 요트 항해에서 주요한 도전과제다. 몇몇 취미 항해자들이 이 항로를 이용한다. 때로는 세계일주의 한 부분으로 이용된다. 비록 많은 수의 항해자들이 혼 섬을 지나기 위해 날씨가 화창해지기를 기다리고 심지어 이 섬을 방문하거나 과거와 같이 이 곶을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실제 곶보다 북쪽에 있는 운하를 이용하다. 몇몇 유명한 요트 경가에서 특히 벤데 글로브 같은 경기에서는 혼 곶을 지나 세계일부를 하고 이 항로를 활용한 세계일주 최고 속도가 기록된다. 케이프 혼은 장엄했다. 처음에는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나깆 못하고 크루즈 배 복도에서 유리창을 통해 보았다. 온통 구름과 해무로 가득찬 바다에 작은 섬들이 지나간다. 계속 그런 풍경이 이어지다가 차츰 큰 바위섬들이 지나간다. 우리는 16층 갑판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케이프 혼을 조망했다. 세계의 사람들이 나와서 함께 조망한다. 바람은 사람의 온몸을 흔든다. 바다는 큰 파도가 요동친다. 하늘은 문을 닫고 태양을 숨기고, 회색 구름만 가득 바다에 내려보낸다. 바람과 구름과 해무와 물방울들이 요동는 순간이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한치도 양보없이 열린 상대방의 바닷길로 침범하는 것이다. 육중한 바다의 물을 밀어부친다. 왜 이곳이 죽음의 무덤인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저런 사나운 바다를 그 어떤 배가, 어떻게 지나겠는가. 우리의 크루즈 배는 워낙 톤급이 크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배가 이토록 거친 바람과 파도에 마지막으로 드러난 케이프 혼 섬이 바다에 오롯하게 몸체를 드러낸다. 420m의 바위 절벽이다. 저곳이 케이프 혼곶, 케이프 혼이다. 아프리카의 희망봉처럼 지구의 남극 끝 영토에서 육지의 표식으로 서 있는 것이다. 나는 희망봉도 가 보았다. 그곳은 여기보다는 바람이 덜 불었다. 이제 케이프 혼 섬은 서서히 멀어지고 바다는 고요해진다. 신비로운 남극 극점을 통과하는 것을 체험한 오늘의 여정은 평생을 두고 큰 감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 크루즈 배 15층 야외극장 음악공연 관람
오후 5시부터 15층 수영장이 있는 야외극장에서 영국 가수 공연실황을 방영한다. 남편과 나는 30분 정도 관람했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멋진 낭만을 선사한다.
* 크루즈 배 정찬석식
저녁만찬은 정찬식당에서 했다. 다 같이 모여서 아까 윷놀이에서 모아놓은 돈으로 와인파티를 했다. 여자 6명끼리, 남자 6명끼리 두 테이블에 앉아 정겨운 담소를 나누었다. 나에 대한, 시인이라는 직함에 대한, 일행분들이 함께 동행한 것에 서로 감사했다. 석식을 마치고 대공연을 보았다. 디스코와 음악공연이다. 박수를 치고 신나는 시간이었다. 공연을 맟고 남편과 같이 카지노에 가서 우리 일행 남자들의 카지노 하는 것을 보고, 댄스룸에 가서 댄스도 보고, 기타 기악가와 어제 공연장에서 노래 부른 흑인 여인이 노래와 연주하는 것을 보고, 50대 중년 핸썸한 남자 홀로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것을 바로 앞에서 보고, 우리의 룸 12층 305에 왔다. Aloha Deck 12, 305호다. 층마다 이름이 있는데 12층은 Aloha다. 크루즈 여행은 참 행복한 여정이다.
2017년 2월 23일 목요일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
* 크루즈 배 16층 갑판에서 본 포클랜드 제도
아침 7시경 기상하니 창밖이 훤하다. 포클랜드 스탠리 항구에 배가 들어가고 있다. 오늘 오전 8시에 기항이다.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가서 둘러보았다. 바다 위에 납작하게 뜬 영토다. 군도로 이루어진 영토라서 군데군데 섬들이 떠 있다.
* 크루즈 배 뷔페식당 조식
케이프 혼을 조망하고 뷔페식당에 가서 조식을 하였다. 창가에서 바깥 풍경을 보며 먹는다. 이제 조식 후에는 지구의 끝점을 돌아가는 케이프 혼을 볼것이다. 벌써 유리창으로 크고 작은 섬들이 지나간다.
*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 기항
조식 후 방에 오니 배가 입하하여 멈추었다. 포클랜드는 군도로 이루어진 영토다. 섬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항구까지는 텐더보트로 30분 정도 소요된다. 크루즈 배가 정박하는 시설이 안 되어서 우리도 텐더보트를 30분 정도 타고 나갈 것이다. 우리는 중식 후 12시 30분에 모인다. 5층 중앙광장에서 모여 오후 1시경 텐더보트를 타고 나갈 예정이다. 벌써 텐더보트가 크루즈 승객들을 태우고 나간다. 포클랜드 섬은 바람이 세게 부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군도 어느 곳에도 큰 나무가 없다. 해변쪽으로 작은 나무 군락이 줄지어 있을 뿐, 파란 풀도 보이지 않는다. 높은 산은 바위 군락이고, 데드라인처럼 회색 산정이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농사도 못 짓는 영토다. 오늘 우리는 그 영토에 발을 딛고 탐방한다. 한국에서 우리를 이끌고 온 김혜진 인솔자님은 매일 기항지의 관광지에 대한 영문신문을 번역하여, 한글로 설명한 글을 방에 넣어준다. 그것을 늦은 밤이나 새벽에 받아 보고 그날의 일정과 기항지 탐방할 곳의 설명을 보면 참으로 많은 도움에 된다. 고마운 일이다. 먼먼 남극의 땅, 여기는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다. 11시 30분부터 중식이니 휴식하다가 중식 후 나간다. 오늘은 12시 30분에 5층 중앙광장에서 모인다. 중식릉 배에서 하고 나간다. 예산 기온이 9~12도로 쌀쌀하다. 포근한 옷과 우산을 준비하란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른다. 포클랜드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동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크루즈 배는 포클랜드 제도의 스탠리 항구에 기항한다.
* 크루즈 배에서 텐더보트 승선 포클랜드 제도 풍경
포클랜드 제도Falkland Islands는 남대서양에 있는 영국의 자치식민지.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부른다. 포클랜드는 마젤란 해협 동쪽으로도 비슷한 거리 만큼 떨어져 있다. 영국으로부터는 12,173km 거리이고, 아르헨티나로부터는 아르헨티나의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북동쪽으로 400km정도 거리에 있다. 영국령 섬무리 중 하나다. 마젤란 해협 동쪽 760km, 남대서양에 있다. 주도는 동포클랜드Falkland섬, 서포클랜드 섬으로 되어 있다. 넓이 1만 2173km2. 인구 2100명이다. 기후가 차고 습기가 많은 황량한 곳이다. 소, 말, 양 등의 목축과 어업이 행해지며 양모, 피혁, 냉동육을 수출한다. 중심 도시는 동포클랜드 섬의 스탠리다. 1592년 영국의 존 데이비스가 도착했으나, 1764년 프랑스인이 처음으로 이주했다. 이어 영국인도 이주했으나 1770년 스페인이 이들을 추방시켰다. 양국 간에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아르헨티나가 독립하고 나서 자국령을 주장했으나 1833년 영국이 점령했다. 1982년 양국 간에 영유권을 둘러싼 무력충돌이 일어나 양쪽 다 상당한 손실을 입은 끝에 영국이 승리했다. 포클랜드제도는 아르헨티나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남대서양 상에 동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큰 섬과 770여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다. 면적은 약 1만 2000km2으로, 인구는 3000여 명이다. 수도는 동포클랜드에 위치한 스탠리(Stanley)다. 현재 영국령에 속해 있지만, 아르헨티나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텐더보트에서 이런 역사적으로 얽힌 애달픈 포크랜드 영토를 조망한다. 그러나 포틀랜드 제도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이다. 왼편으로는 바위선 줄기가 뻗어있고, 오른편으로는 시가지가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서로 영유권 문제로 전쟁이 나서 사망한 용사들의 무덤도 멀리 보인다. 날씨도 청명하여 더욱 화사함을 선사하는데 저 섬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슬픔을 물고 있다니 참으로 애련하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항구 텐더보트 하선
크루즈 배에서 텐더보트를 타고 포클랜드로 이동한다. 포클랜드는 약 2천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스탠리는 수도다. 1845년에 지어진 정부 하우스, 그리스도 교회 대성당과 2마리의 블루 고래 턱뼈로 만들어진 고래뼈 아치를 볼 수 있다. 오늘 그런 건물들과 도시를 돌아볼 것이다. 항구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크루즈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계속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국령이라고 고함치듯 영국 국기가 펄럭인다.
* 영국령 포클랜드 바다의 엘리자베스호 배
셔틀버스를 타고 짚시코브 해변으로 가는데 바다에 엘리자베스호가 기울러져 있다. 영국여왕 이름에서 지은 이름의 배인데 1879년 밴쿠버에서 온 배다. 다 사용하고 그냥 둔 배란다. 전쟁 때 사망자의 무덤도 지나간다. 영유권 문제로 복잡한 땅이다. 내가 아는 분쟁의 시초는 이렇다. 원래는 아르헨티나 영토였는데 미국 어선이 그들의 해역에서 고기잡이로 들어오자 나포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심한 공격을 했고, 포클랜드 제도를 아무런 소유국이 없다고 공포하였다. 그때 치고 들어온 나라가 영국이다. 그런데 스페인이 아르헤티나를 정복했고, 포클랜드도 스페인령이 되었다. 그리고 스페인이 떠나갈 때는 다시 아르헨티나에거 돌려주었다. 그런데 영국은 다시 들어와 자기네 영토라고 아직도 주장한고 있다. 영국식 이름으로는 포클랜드, 아르헨티나 이름으로는 말비나스 제도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에 국제사회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다. 영연방 국가들은 이 제도에 대한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들 중 카리브 공동체 국가들은 최근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함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이 곳을 회원국의 특수해외영토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페루는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며, 포클랜드 전쟁 중 물자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외 브라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우루과이 등 대부분의 남미 국가들과 해당 지역기구인 메르코수르(MERCOSUR), 남아메리카 국가 연합 등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칠레는 포클랜드 전쟁 중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퇴임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유럽연합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은 아르헨티나의 영유권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또한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미합중국은 1940년대 이래 공식적으로 이 제도의 영유권주장에 대해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포클랜드 전쟁 중에는 영국에 대해 물자 및 정보지원을 실시했다 이 제도에 대한 국제연합(UN)의 수십 년 된 입장은, 중립적 관점에 의거하여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협상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위치한 섬으로, 12,173㎢의 면적에 서포클랜드와 동포클랜드 섬 및 주위 776개 섬으로 이루어졌다. 중심지인 스탠리와 영국군 기지는 동포클랜드에 있어,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해양성 아남극기후로 비교적 냉량한 편이다. 여름인 1월의 평균기온은 13 °C , 겨울인 7월의 평균기온은 4 °C 가량이다. 평균 연간강수량은 573.6mm로 동포클랜드가 서포클랜드보다 습윤한 편이다. 습도가 높고 바람도 비교적 강한 편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나, 많이 쌓이지는 않는다. 강풍이 세차게 부는데, 특히 겨울에 많다. 이 제도의 기후는 강수량은 적고 겨울에 춥다. 이런 상황인데 짚시 코브 해변으로 가는 해변의 길목에서 보이는 바다에 엘리자베스호 배가 폐선으로 놓여있다. 여기는 영국령이라는 묵시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이곳은 저 배말고도 저렇게 바다에 버려서 많다는데 아무런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는 사람의 각자 시각으로 해석하면 된다.
* 영국령 포클랜드 짚시코브 해변
짚시코브 해변이 보인다. 그런데 하얀 해변은 지뢰밭이란다. 호기 들어간다면 조심하란다. 하차하여 자작한 나무들 사이로 난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포클랜드의 수도 스탠리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지협이다. 짚시(Gypsy Cove)로 이동하여 보존이 잘 된 자연 산책로를 걸으며 탐방한다. 펭귄과 돌고래를 보는 곳이다. 뷰포이인트에서 쿠르즈 배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는다.
포클랜드 제도는 주요섬인 이스트포클랜드·웨스트포클랜드 섬과 200여 개의 조그만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스트포클랜드 섬에는 수도이며 유일한 도시인 스탠리 항이 있다. 포클랜드 제도 정부는 영국의 부속령인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섀그클러크 암초 등을 관할하는데, 섀그클러크 암초는 포클랜드 제도 동쪽과 남동쪽으로 1,100∼3,200km 지점에 있다. 1690년 영국인 선장 존 스트롱이 처음으로 포클랜드 제도에 상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2개의 주요섬 사이의 해협을 영국의 해군 장군 포클랜드 백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고, 나중에 그 이름이 주위 섬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남아메리카 현지에서는 주로 말비나스 제도로 불리는데 이는 초기 프랑스 탐험가들이 탐험을 시작한 지점인 생말로(St. Malo) 항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구릉지대가 주요한 2개의 섬의 북부를 가로질러 동서로 뻗어 있는데 이스트포클랜드 섬의 어즈번 산에서는 그 높이가 705m에 달한다. 해안에는 익곡이 많이 형성되어 보호항이 발달했으며, 작은 강들이 이탄으로 덮인 넓은 계곡을 지난다. 서늘하고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극한 온도를 나타내는 경우는 거의 없고 약간의 계절 변화가 있을 뿐이다. 강한 서풍이 늘 평균 시속 31㎞로 부는 반면 연평균기온은 약 5℃이며 평균최고기온은 9℃, 평균최저기온은 3℃이다. 연평균강수량은 635㎜이다. 키 작은 초본 및 관목류가 빽빽하며, 교목은 자라지 않는다. 초원지대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화이트그래스와 디들디이다. 방목이 불가능한 앞바다 섬들은 터속그라스로 뒤덮여 있다. 서늘하고 습기가 많은 기후로 인해 식물의 완전 분해가 억제되어 현지에서 연료로 사용되는 이탄층이 두껍게 형성된다. 원산지 포유동물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포클랜드 고유종인 여우는 멸종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검은눈썹알바트로스, 매, 가는 줄무늬의 카라카라 등을 비롯해 약 65종의 조류가 서식한다. 또한 수백만 마리나 되는 펭귄의 서식지로 대부분이 바위날기펭귄, 마젤란펭귄, 젠투펭귄이고, 왕펭귄, 마카로니 펭귄도 소수 있다. 돌고래류와 작은 곱등어류도 흔히 볼 수 있으며 오타리아 비로니아, 코끼리물범류도 풍부하다.
이곳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들어와 있다. 산책길에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독특한 남극의 식물들이 곳곳에서 자란다. 산책길은 그 식물들을 보호하도록 줄을 쳐서 잘 조성해 놓았다.
* 영국령 포클랜드 짚시코브 해변 바다의 돌고래
해변의 산책로롤따라 걷는데 바다에서 돌고래 세 마리가 무리지어 바다 위를 들락날락 한다. 해변 가까이 와서 우리들에게 묘기를 보여주듯 바로 앞에서 헤엄쳐 다닌다. 돌고래는 만드시 무리지어 단다. 눈앞에서 보이던 돌고래가 잠시 후 저 먼 곳에서 들짝을 보이기도 한다. 신기한 정졍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짚시코브 해변 펭귄들
돌고래가 헤엄치는 바다 바로 곁의 해변에는 펭귄들이 많이 모여 있다. 이들도 돌고래처럼 외객을 환영하듯 바로 눈앞의 해변 모래사장에 모여서 비경을 선사한다. 우리는 산책길에서 멈추어 조망한다. 언덕 숲에도 몇 마리씩 모여 있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잘 보이는 곳에도 처연하게 있다. 포클랜드 섬의 독특한 관광 명물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토 분쟁 지역으로 널리 알려진 포클랜드 제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펭귄 서식지다. 이곳에는 총 5종의 펭귄 50만 마리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중 젠투 펭귄은 12만 마리 정도다. 황제펭귄과 킹펭귄에 이어 현존하는 펭귄 중 세 번째로 몸집이 크다는 젠투펭귄(Gentoo Penguin)도 있다. 사실 우리는 오늘 젠투펭귄을 보기로 했는데 펭귄이 이동하여서 그곳 대신 이곳에서 펭귄을 보는 것이다. 이곳 시골에는 지뢰가 널려 있는 가운데 펭귄들이 번성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거의 2만 개에 가까운 지뢰가 묻혔다. 지뢰 때문에 사람들은 접근하지 못했지만,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는 펭귄들은 몸무게가 가벼워서 지뢰를 밟아도 터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뢰밭 바로 위에 펭귄 서식지가 있다. 1980년대에는 어업 때문에 포클랜드 제도의 펭귄들이 위협 받았으나, 지뢰밭 때문에 사실상 야생 동물 보호구역이 된 지금은 펭귄의 확고한 서식지가 됐다. 여러 가지로 위험요소를 안고 있는 영토인데 펭귄들은 아주 평화롭게 고요한 자태로 모여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짚시코브 해변 전망대에서 본 풍경
짚시코브 해변에 전망대가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서면 좀 더 잘 보인다. 바다와 선들과 하얀 백사장과 백사장위에 서 있는 펭귄무리와 하얀 바위 군락, 파란 식물들 그리고 하늘이 조화롬게 어우러져 절경이다. 여기서 우리 부부는 미국 위싱턴에서 왔다는 우리 교민 부부와 만나 반가움에 같이 사진을 찍었다. 뷔페식당에서 식사를 함께 하며 사귄 부부인데 우리 부부와 비슷한 연령이고, 말이 잘 통하여 좋았었다. 다시 또 전망대를 떠나 산책길을 걷는다.
* 영국령 포클랜드 짚시코브 해변 산책
짚시코브 해변 산책로에서 멀리 우리 크루즈 배도 보인다. 해변에 대포도 있다. 풀들이 매우 억세다. 나무도 잘라지 못하고 앉은뱅이 나무다. 사나운 해풍에 머리를 들지 못해서 그렇다. 다시 셔틀버스로 나와 스탠리 시가지로 간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변두리 주택
짚시코브 해변에서 스탠리 시가지로 나올 때 본 변두리 주택이다. 목조 건물로 지붕이 가파르다. 스위스 주택을 연상케 한다. 파란 풀이 땅에서 자라고 그 위의 고풍스런 영국 주택 색깔인 어둔 갈새 톤의 집들이 아름답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주빌레 하우스
스탠리 시가지로 돌아와서 다운타운을 둘러본다. 주빌레 하우스는 스탠리 항구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건물이 매우 아름답다. 영국여왕 방문을 기념하여 지은 집이다. 지금은 관공서로 사용한다. 건축자재를 영국에서 들여와서 지었는데 지붕만 현지 자재로 지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영국 성공회
스탠리 시가지 해변의 도로변에 있는 영국식 교회당이다. 웅장하다. 고래뼈로 만든 아치형 상징물도 있다. 아치형 휴식 공간인데 예술적 조형이다. 붉은 색 지붕의 건물이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모습도 보인다. 포클랜드 섬이 영국 영토라는 메시지로 외치는 듯 오롯하게 서 있다.
포클랜드 섬은 영국인이 1592년에 처음 발견했다고 하지만, 네덜란드인이 1600년 무렵에 발견한 것이 최초의 역사적 기록이다. 또한 최초로 이 섬에 살았던 사람은 1764년의 프랑스인이다. 1765년에서야 영국인이 웨스트포클랜드 섬에 처음 정착했다. 그러나 1767년에 이미 프랑스로부터 이 섬을 사들였던 스페인으로부터 1770년도에 공격을 받았다. 전쟁이 시들해지자 영국은 1771년 웨스트포클랜드 섬을 복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영토권을 포기하지는 않고 경제적인 이유로 1774년 섬에서 철수했다. 스페인은 1811년까지 이스트포클랜드 섬을 소유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오던 아르헨티나는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했다. 그로인하여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부는 1820년 스페인 소유인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주권을 주장했다. 미국 군함 USS 렉싱턴호가 포클랜드 지역 내에서 물범류를 사냥하자 1831년 아르헨티나가 미국의 배 3척을 불법 포획했다. 미국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트포클랜드 섬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정착지를 파괴했다. 영국군은 1833년 섬에 남았던 아르헨티나 장교들을 추방했다. 그리고 1841년 포클랜드 제도에 영국인 민간인 부총독이 임명되었다. 1885년에는 1,800명 정도의 영국인이 자리를 거주했다. 1892년에 포클랜드는 식민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정기적으로 영국의 섬 점령에 항의했다.
실제 영토 소재는 남대서양에 있는데 영국의 지배를 받는 군도이다. 아르헨티나와 영국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영토 분쟁 지역이다. 현재는 주로 영국의 해외영토로 간주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및 스페인어권에서는 말비나스 제도Malvinas 라고 부른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영토 분쟁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의 불씨가 되어 아르헨티나 군이 침공해 몇 달 동안 포클랜드 제도를 점유하기도 했다. 말비나스라고 하는 것은 이 곳에 처음으로 도착한 이들이 프랑스의 생말로 주민이었기에, 프랑스어로 '생말로'의 혹은 '생말로 주민'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말루인 섬이라고 부른 것을 스페인어로 번역한 것이다. 포클랜드 제도에는 포클랜드 늑대가 서식하였으나, 지금은 멸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포클랜드 제도를 둘러싼 영토권 문제는 1964년 국제연합(UN)으로까지 넘어갔다. 1965년 UN 총회는 이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소환하여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이런 형태의 분쟁들은 1982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그 직후인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부는 곧 포클랜드를 침공했다. 이 침공으로 시작된 포클랜드 전쟁은 아르헨티나군이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스탠리에서 제도를 강제로 재점령한 영국군에게 항복함으로써 10주 만에 끝났다. 영국은 섬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고, 군사제한지역과 어획금지구역을 상당히 먼 거리까지 확대했다. 1996년 영국 인구는 대략 2,600명이었다. 지구 어느 곳에서도 영토 분쟁은 끊이지 않음을 먼 곳에서 다시금 알게 한다. 이 섬이 스페인의 소유였고, 스페인이 떠났으니 아르헨티나 소유라고 주장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영국인이 예전부터 거주해오던 섬이라서 그들의 소유라고 외치는 것도 당연하여 현재까지 팽팽하게 대립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잘 협의되어 평화로운 섬이 되길 바랄 뿐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경찰서
스탠리 시가지는 해변을 따라 번화가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해변을 따라 주요 건물들이 있는데 경찰서도 있다. 건물이 아담하고 아름답다. 고운 색상의 경찰차도 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우체국과 시청
스탠리 시가지에 우체국과 시청 건물이 나란히 붙어 있다. 우체국은 영국식으로 빨간 색 문과 빨간 색 공중전화 박스를 앞에 설치해 놓았다. 시청 외벽에는 시계를 걸어 주었다. 포클랜드 섬은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주장으로 대립되는 묘한 지역이다. 포클랜드 제도의 최초의 발견자에 대한 것부터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주장은 엇갈린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6세기 초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으로 구성된 마젤란 탐험대가 최초로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니 그 연장선 상에서 역사를 풀어보려는 의도다. 영국에서는 또 그들 나름대로 16세기 말 영국의 항해사 존 데이비스가 최초라고 주장한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그래서 존 데이비스를 이 제도의 최초 발견자로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다 문서로 확인된 기록은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오스만 제국의 피리 레이스가 제작한 지도에도 이 섬으로 추정되는 섬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경에 발견된 것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반면, 포클랜드 제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상륙자는 17세기 말 영국 탐험대라는 것에는 논란이 없다. 포클랜드라는 이름도 이 탐험대가 포클랜드 자작이라는 당시 해군관료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아무튼 영국이 먼저 포클랜드 제도에 발자국을 남긴 '기록'이 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포클랜드 제도에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1764년 프랑스인들이다. 그러나 1766년, 프랑스 정착민들은 보상을 받고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를 스페인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 없이, 1766년부터 영국인들이 포클랜드 제도에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때 양측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4년 뒤 앞서 세운 영국의 기지를 발견한 스페인인이 침공해서 점령했으나, 다음해 영국에 반환했다. 그러다가 1774년 경제적인 문제로 퇴거하면서 영유권을 표시하는 명판을 남겨두었다. 스페인 역시 죄수 캠프로 섬을 이용하다가 중도에 철수했다.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독립 당시에는 포클랜드 제도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1826년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이 아르헨티나에 귀속된다고 공식 선언한다. 1828년에 아르헨티나는 독일 상인을 파견해서 관리한다. 그런데 독일 상인이 불법적으로 어선을 나포하고 해적질하자 자국 어선에 대한 해적질을 처단하고자 미해군이 독일 상인의 기지를 포격해서 파괴한다. 1833년 영국은 해적 행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변 해역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전함을 보내서 포클랜드 제도를 군사력으로 점유한다. 이때 영국이 아르헨티나 식민자들을 내쫓았다는 주장이 최근 아르헨티나 정부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 소스에서 영국 측이 오히려 식민자들에게 남을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부정되고 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권리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으로서는 자신들이 최초로 상륙하고 자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영토를 되찾았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에 접수된 이후, 이 제도는 100여년간 영국에 의해 평화적으로 점유된다. 영국에 의한 점령기간 중, 약소국 아르헨티나는 최강국 대영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후 전 세계적인 탈식민지화 추세에 따라 1946년 아르헨티나가 다시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1965년 유엔총회는 식민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영국계 주민들이 대다수였던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했다. 1973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 제도의 영유권을 다시 주장한다. 유엔총회는 양국이 분쟁해결을 위한 평화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회담을 시작하였다. 이후 1982년 2월까지 꾸준히 협상이 지속됐으나, 영국으로서는 이 협상에 적극적일 이유가 없었고, 1982년 3월, 아르헨티나 외무부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지 않고 있다며, 협상이 신속히 진행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상할 수 없고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고 공식 선언한다. 이후 양국간에 긴장감이 높아지게 된다.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해 아르헨티나의 영토로 인정하고 이를 반대하는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한 상태에서 미주지역 국제기구를 창설하는 것에 최종 합의를 했다. 참으로 시린 영토다. 바다 가운데 떠 있는 그리 크지도 않은 동과 서의 아담한 섬이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영유권 분쟁으로 시달리고 있다. 외형으로는 평화 그윽한 섬으로 많은 사람들의 걸음을 수용한다. 내면의 아픔도 배우고 가라고 바다가 푸르게 외친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카톨릭 성당
이 성당은 영국식이 아닌 기독교 교회 건물이다. 조금 전에 보았던 영국식 성공회 건물과는 많이 다르다. 영국 향기 물씬 배운 고전적 영국 성공회 건물보다 이곳 성당은 현대적인 향기가 흐른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묘한 대립이 잠재하고 있는 모습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시가지 학교
스탠리 시가지 해변도로 곁에 초록 지붕의 학교가 길게 놓여 있다. 단층 건물이지만 작은 규모는 아니다. 길게 옆으로 뻗어나간 건물이 섬 지역의 학교라는 이미지를 지운다.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시가지이고, 학생들도 많다는 것으로 인식된다. 가끔씩 해변 휴식공간에서 영국인 아이들이 보이기도 한다. 나는 교사였기에 남다른 시각으로 조명된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아르헨티나인의 호텔
포클랜드 섬은 남대서양에 동도와 서도로 크게 나뉘어져 있고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섬으로 구성된 나비 모양의 군도다. 아르헨티나로부터 동쪽으로 480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스탠리는 포클랜드 군도의 수도이며 동쪽 섬이다. 포클랜드 군도는 중심지 스탠리가 있는 동쪽 섬과 서쪽 섬 그리고 776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다. 면적은 1만 2173㎢로 경기도(1만 136.16㎢)와 서울(605.52㎢)을 합친 것보다 조금 크다.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3140명이다. 해변을 따라 스탠리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인구 중 2000명이 스탠리에 살고 있다. 원주민이 61.3%로 가장 많다. 영국인 29.0%, 칠레인 6.5%, 스페인인 2.6%이며, 일본인도 0.6%가 산다. 경제적 가치도 그다지 크지 않은 섬이다. 주 산업은 목양이다. 양의 수가 60만 마리로 상당히 많다. 수목이 자라지 않는 불모지가 많아 농산물은 거의 재배되지 않는다.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은 7500만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5000달러로우리나라보다 조금 높다. 바라보기로는 황막한 땅인데 양을 기른다는 것도, 국민소득이 우리나라보다 높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그 이유로는 근해에 많은 원유가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클랜드는 현재보다 미래의 가치가 더 크다. 또 인류의 마지막 자원 보고라는 남극 대륙의 전진 기지에 해당된다. 1차 세계대전 때에는 남대서양의 영국 해군기지 역할을 했다. 부근 해상에서 영국과 독일 함대의 전투가 벌어졌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화폐는 포클랜드 파운드를 별도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도보로 시가지 탐방을 하던 중 호텔을 보았다. 그런데 입구에 상호가 아르헨티나 언어로 '말비나스 하우스 호텔'이라고 적혀있다. 포클랜드가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로 불린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경영하는 호텔이어서 그렇단다. 영국인과 아르헨티나인이 섞여 있는 영토임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마가릿 대처 수상 흉
스탠리 시가지 야트막한 둔덕에 영국 마가릿 대처 수상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퍼머 머리를 넘겨 빗은 그녀는 아직도 청청한 모습이다. 포클랜드 군도는 16세기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등 유럽의 항해가들에 의해 무인도로 처음 발견됐다. 1832년 영국이 고래잡이 기지로 삼기 위해 영유권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군도의 영유권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82년 4월 2일부터 두 나라 간에 75일간에 걸친 영유권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영국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는 1982년의 포클랜드전쟁에서도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이곳 스탠리 시가지 오롯한 언덕에 그녀의 흉상을 세운 것이다. 마가랏 대처는 영국의 정치가로 교육·과학장관 등을 지내고 보수당 당수를 거쳐 영국 최초의 여자 총리가 되었다. 긴축재정으로 경제부흥을 이루고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으로 '철의 여인'이라 불리며 3기라는 최장기 집권을 하였다. 옥스퍼드대학의 서머빌 칼리지를 졸업하고, 1951년 데니스 대처와 결혼하여 쌍둥이 남매를 두었다. 1953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 1959년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1∼1964년 연금·국민보험부 정무차관, 1970∼1974년 교육·과학장관을 지냈다. 1975년 E.히스를 물리치고 영국 최초의 여성 당수(보수당)로 선출되었다. 1979년 노동당의 L.J.캘러헌 내각이 의회에서 불신임결의를 당하고 해산된 직후의 총선거에서 대처가 영도하는 보수당이 승리함으로써 영국 최초의 여총리에 취임하였다. 집권 후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영국의 경제부흥을 이룩하였다. 1983·1987년 실시된 총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 3기를 연임함으로써 영국 사상 최장기 집권의 총리가 되었다. 그 후 과감한 사유화와 노조의 와해, 교육·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 등으로 ‘철(鐵)의 여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1986년 5월 한국을 방문하였다. 1990년 유럽통합 반대입장을 고수하다가 당 지도부의 반발을 사게 되어 자진 사임하였으며, 1991년 5월 정계를 은퇴하였다. 1992년 남작 작위(케스티븐의 대처 남작)를 받고 귀족회의인 상원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2013년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그녀는 1970년 중반~1980년 초반까지 노조 항복 받고 영국 기틀을 마련한 여인이다. 영국을 승리로 이끈 자다. 남대서양 바다 가운데 포클랜드 섬에서도 그녀의 드높은 위상이 휘날리고 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전쟁기념 위령탑
스탠리 해안도로변 에 바다와 마주 서서 솟구쳐오른 첨탑이 있다.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전쟁에서 죽어간 용사들의 위령탑이다. 1982년에 세웠다. 꼭대기에는 군인용사가 서 있다. 기념비 앞에는 붉은 꽃 화환이 놓여 그날의 슬픔을 위로한다. 기념비 뒤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알리는 글과 전쟁 장면을 부조로 새겨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고, 지상에서는 군인용사들이 엉켜 싸우는 장면이다. 포클랜드 전쟁은 1982년 4월 2일에 일어났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이 이 섬을 불법점거하고 있다며, 말비나스 제도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하며 침공하였다. 침공의 배경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영유권 협상을 진행해봤자 이익이 없으며 또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았던 영국의 소극적인 협상태도라는 설도 있고, 아르헨티나의 레오폴도 갈티에리의 군사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의 추락하던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 국제적 주목을 받고자 전쟁에 뛰어들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영국군의 포클랜드 제도 주둔군이 줄어들었던 요인도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일으키게 한 요인이 되었다. 한편 국제연합 상임이사회는 결의안을 발표하고 아르헨티나가 제도 전체에서 군병력을 철수할 것과 외교적 대안을 양국이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칠레, 콜롬비아를 제외한 전 국가가 아르헨티나를 지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한편 영연방과 아일랜드는 영국 정부를 지원하고 나섰다. 결국 미국까지 가세하게 되고 영국은 구원병을 포클랜드 제도에 파병하기로 결정하여 포클랜드 전쟁이 본격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영국 해공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영국군은 5월 21일 산 카를로스 해안에 이르렀고 6월 14일 아르헨티나 군은 결국 항복하였다. 아르헨티나 군의 패배의 원인은 전투기의 성능상의 문제였는데 아르헨티나 공군 주력기 미라쥬는 영국 공군 주력기인 해리어보다 성능상에서는 훨씬 뛰어났지만 문제는 미라쥬를 띄우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길고 넓은 활주로가 필요한 반면 해리어
는 수직 이착륙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공군전에서 영국에 밀려 항복하고 말았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었으며 전비 15억 달러를 소비하였는데, 국위선양 등 작은 성과에 비하여 커다란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아르헨티나는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고 GNP 600억 달러의 거의 국력을 총동원하는 모험으로 영국보다 더욱 많은 전비를 염출하여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 몰렸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군은 즉각 포클랜드 제도에 병력을 증강하였다. 아르헨티나는 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갈티에리 정부는 실각하게 된다. 아르헨티나와 영국 당국은 1989년 외교적 협상을 게시하였지만 지금까지 별다른 진전도 없고 협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에 사는 주민들의 자결권에 따라, 주민들의 의사에 의해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고,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제도의 역사적 승계성을 주장하며, 스페인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포클랜드 제도도 같이 승계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의 귀속여부는 거주민의 의사에 의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영제국이 1833년 군사력을 써서 이 섬의 아르헨티나계 주민들을 축출하고 영국계 주민들로 채웠기 때문에, 자결권 주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의 여지는 남아있다. 현재 이 섬은 거의 영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아르헨티나에 의한 지배를 반대하고 있다. 영국에서 포클랜드 제도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이유가 대서양과 남극에 있는 무궁무진한 지하 자원과 특히 얼음 상태로 잔존해 있는 물을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남극에서 얼음 상태로 존재하는 물은 전 지구에 존재하는 담수의 90%에 달한다. 이후 1995년에 아르헨티나와 영국은 상호 협약을 통해 포클랜드 전쟁으로 악화된 양국간의 외교를 회복하기도 했다. 그 협약의 내용 중에는 아르헨티나와 영국 간의 상호 자원개발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은 아르헨티나와의 협약을 무시하고 포클랜드 제도 일대의 대서양에 매장된 석유를 일방적으로 불법 채취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포클랜드 섬에서 보는 슬픈 전쟁기념비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해변 주택
총독 관저 앞에서 주택을 보았다. 높이가 낮은 지붕이 바다와 맞서 넓게 설치되어 있다. 해풍을 이기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 같다. 여인이 집을 보수하고 있다. 아름답고 독특한 구조의 주택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거리의 예쁜 꽃들
스탠리 시가지에서 고운 꽃들을 만났다. 바다를 바라보는 거리에 삭막하지 않도록 인공으로 키운 작은 공원이다. 벤치도 놓여 있고 둥근 시멘트 조형물 안에 여러 가지의 꽃들을 기른다. 해풍을 이기고 고운 여러 가지 색상의 꽃들이 대견하다. 도로변의 담장 밑에도 꽃들이 길게 늘어서 피어 있다. 아름다운 거리다. 자세히 보니 건물들의 정원에도 민들레와 엉겅퀴, 크로버 등의 꽃이 피었다. 우리 나라에서 보는 모습과 유사한 꽃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포클랜드의 불화를 잠재우듯 화사한 풍경이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총독관저
포클랜드 스탠리 시가지를 해변도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걸어온 곳에서 영국 총독관저를 만났다. 푸른 숲길을 따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파랑 집이다. 하얀 나무 담장과 문이 야트막하게 열려 있지만 들어가진 않고 문 앞에서 바라만 보았다. 조금 더 앞의 해변에 전쟁기념탑이 보이는데 그곳은 가지 않고 조망만했다.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은 영어를 사용하는 영국계 포클랜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활방식은 목양을 키우는 고립된 소규모 공동체생활과 수도인 스탠리에서의 생활, 이 두가지 방식으로 명백히 나뉜다. 스탠리에는 영국의 과학자와 군인을 포함하여 포클랜드 인구의 2/3가 거주한다. 동도와 서도 두 개의 주요 섬에서 스탠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대부분은 목양지다. 규모가 다양한 양목장은 개인이나 영국에 본사를 둔 회사의 소유이다. 약 70만 마리의 양이 있는데 매년 수천 톤의 양모와 약간의 양고기가 생산된다. 모는 섬의 주요자원으로 주로 영국으로 수출되며, 1851년 왕의 칙허장을 받은 포클랜드아일랜즈사는 경제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여전히 제도에서 유일한 최대 목양주이다. 인접한 바다에서 행해지는 수산업이 목양업을 지원해준다.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 왕이 임명한 총독을 행정부의 수반으로 한다. 총독은 의회의 의장을 겸하며 선임사무관들과 선출된 의회의원들로 이루어진 행정위원회의 조언을 듣는다. 포클랜드에는 실업자가 없으나 주택난이 심각해 유입인구가 적다. 사회복지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15세까지의 아동은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받게 되어 있다. 스탠리에서는 중등과정까지 무상 의무교육을 실시한다. 스탠리에 있는 병원에서 무료 의료 서비스가 제공된다. 내륙교통은 자동차와 국영항공이 담당한다. 해안의 화물선은 보급품을 운반하고 영국으로 수송할 연간 양모 생산량을 모으기 위해 주요섬인 이스트포클랜드·웨스트포클랜드 섬을 돈다. 포클랜드의 마운트 플레전트 공항을 출발, 어센션 섬을 경유해 영국으로 가는 정기 여객기가 있다. 인공위성을 통해 섬 외부와의 통신도 원활한 편이다. 참으로 묘한 영토다. 아르헨티나와는 가까운 거리인데, 먼 거리에 있는 영국이 지배한다. 이곳 총독관저 역시 영국 행정부가 점유하고 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리고 큰 함성으로 외치는듯 짙푸른 나무들이 울창하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해변 시가지
스탠리 시가지 길가 벽면에 그림이 줄지어 걸려있다. 이곳의 역사와 자연 등에 대한 사진이다. 스탠리는 동도의 섬으로 주도다. 1690년 영국 탐험대였던 존 스트롱 선장이 처음 이곳에 상륙했고, 무인도였던 이곳을 당시 영국 해군 관료의 이름을 따 이름 지었다. 최초 발견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영국과 아르헨티나 양측의 입장에 따라, 영국은 1592년 항해사 존 데이비스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1520년경 에스파냐(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고 원정을 나선 마젤란 탐험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1600년경 네덜란드인 세발다 데 웨르트가 이곳을 탐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764년 프랑스인들이 동포클랜드에 정착하면서부터였고, 이후 1765년 영국인 존 바이런이 서포클랜드에 상륙하여 1766년부터 영국인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국 정착촌에 대한 존재를 모른 채 당시 전 세계에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스페인에 이곳을 양도하고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영국과 스페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지리적으로 관리가 어려운 점 등 경제적, 정치적 이유로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 차례로 철수하였다. 이후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아르헨티나는 1816년 독립을 선언하였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가 1820년에 프클랜드의 영유권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1832년 영국은 포클랜드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므로 포클랜드는 영국 땅이라고 주장하며, 이곳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착민을 추방하고, 1833년 이곳을 무력 점령한 뒤 자국민을 이주시켜 자치령으로 삼고 계속 점유하였다. 이때부터 양국은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여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 세계 패권을 지고 있던 대영제국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아르헨티나는 영국에 반환 요청만 할 뿐 해결점을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50년의 세월이 지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레오폴도 갈티에리 군사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 직무대행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선전포고 없이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무력침공을 감행하면서 전쟁을 일으켰으나 아르헨티나군이 제도를 점령하자 영국군은 함대와 군대를 파견해 74일 만에 탈환하였다. 이 전쟁으로 아르헨티나군 7백여 명과 영국군 250여 명이 전사했고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이 전쟁의 패배로 이듬해 몰락하였다. 이후 영국이 실효지배하고 있지만,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면서 양국 간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편, 한국 정부는 2011년 9월 19일, 포클랜드제도 인근의 포클랜드해를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영유권 분쟁이 마무리되지 않고 가속화되는 점을 감안해 아르헨티나에서 부르는 말비나스해(Malvinas Sea)와 병기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이 방침은 포클랜드가 분쟁지역이라는 측면 외에도 국제수로기구(IHO)의 <해양과 바다의 경계> 책자에서 동해(East Sea) 표기 문제와 관련한 영국의 반대 입장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남미경제공동체인 메르코수르(MERCOSUR)는 2011년 12월 19~20일 우루과이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포클랜드 깃발을 단 선박에 대해서는 자국 내 항구 이용을 금지한다고 결의하였다. 이는 메르코수르가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아르헨티나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메르코수르는 아르헨티나를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남미 주요 4개국이 정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로써 포클랜드제도를 둘러싼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갈등은 더욱 복잡하고 가열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남대서양에 위치한 영국의 해외 영토로, 수도는 스탠리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 간의 영토 분쟁 지역이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말비나스 제도로 부른다.
포클랜드는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대서양에 위치하며, 공식 명칭은 포클랜드 제도이다. 2개의 주요 섬인 동포클랜드와 서포클랜드를 비롯한 78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구는 2,840명(2012년 기준)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영국계 백인이며, 영어가 공용어이다. 공식 화폐는 포클랜드 제도 파운드로, 영국 파운드와 화폐 가치가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목양업이 활발했으나, 1987년부터는 어업전관수역에 대한 어업 면허 수수료가 정부 수입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충분한 재정 수입으로 인해 1인당 평균 소득이 5만 달러를 상회하며, 영국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해 있다. 18세기 중엽부터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를 중심으로 유럽 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한 이후 영국-에스파냐, 영국-아르헨티나 간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으나, 1833년부터 영국의 실효적 점유가 이어지고 있다. 1982년에는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영국이 승리하면서 지금까지 영국의 해외 영토로 남아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 제도 대신 말비나스 제도라고 부른다. 수도는 동포클랜드 섬의 동부 해안에 위치한 스탠리이다. 포클랜드는 산이 많으며 최고점은 약 770m인데 황량한 풍경이 전개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친 날씨가 잦으며, 여름은 꽤 기온이 높지만 그밖의 계절에는 스코틀랜드 연해지역의 기후와 비슷하다. 수목이 자라지 않으며 거의 불모지이거나 초원이어서 농산물은 재배되지 않고 주로 목양을 생활한다. 이 섬은 1592년에 영국의 항해가 데이비스가 발견했을 때는 무인도였다. 이런저런 애환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도로변의 사진자료에는 이런 역사와 자연환경 등의 독특한 장면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크루즈 배를 재승선해야 하는 촉박한 시간 관계로 자세히 보진 못하고 지나가면서 대충 보았다. 스탠리 해변 시가지는 아기자기 하면서도 더러는 웅장한 건물들로 곱게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해변 풍경
남대서양 바다와 접한 스탠리 해변은 매우 아름답다. 파란 잔디를 심어 조성한 해변 공원이다. 벤치도 있고, 둥근 나무 도막, 대포 등을 전시하고 있다. 영국인 가족이 아이들과 함께 휴식하기도 하고 우리처럼 세계 여행객들이 포클랜드의 시간을 즐기기도 한다. 청청한 하늘과 정열의 태양, 코발트 빛 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멋진 낭만의 해변 둔덕을 걸으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영국식 빨간 공중전화
여기는 영국령이라고 강조하듯 우체국 앞에 영국식 빨간 공중전화 박스가 서 있다. 영국 런던 시가지에서 보았던 바로 그 전화 박스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커피점
포클랜드 섬의 스탠리 시티투어를 마치고 카페에 들러 남편은 커피를,나는 차를 한 잔씩 마셨다.피곤해서 설탕을 듬뿍 넣어 마셨다. 포클랜드 섬에 도착하여 셔틀버스에 승차했을 때 인솔자가 커피점 티켓을 나누어 주었다. 아마도 버스와 커피점 이용을 하나로 묶어서 표를 산 것 같다. 외국인들과 함께 보내는 휴식시간이다. 잠시지만 포클랜드의 문화를 보는 시간으로 흐뭇했다.
* 영국령 포클랜드 스탠리 항구 크루즈배로 가는 텐더보트 재승선
오후 5시까지는 텐더보트에 승선해야 한다. 크루즈 배가 오후 6시에 출항 예정이다. 4시 30분 항구로 와서 텐더보트를 탔다. 항구에 영국령이라는 영국국기가 휘날린다. 포클랜드 아일랜드라는 큰 글씨도 있다. 푸른 바다와 독특한 식물들, 고운 시가지 투어 등 오늘 멋진 탐방이다. 바다에 갈매기들이 많이 떠 있다.
* 크루즈 배 15층 하늘과 마주한 야외수영장
오후 5시경 룸에 들어와 15층 갑판의 야외수영장에 갔다. 포클랜드 투어로 많이 걸어서 다리가 아프고 몸이 피곤하여서 수영장에 가서 온탕 버블 온수에 몸을 담그고 놀앗다. 영국런던에서 오신 인도교수님과 우리 부부는 함께 대화를 나누며 수영장에서 놀았다. 그의 아들은 심장내과 의사이고, 딸은 치과의사라 했다. 나는 나의 큰아들은 고등학교 교사이고, 작은 아들은 약사라고 소개했다. 작은 아들 내외가 모두 약사라고 했다. 포클랜드에 대하여, 인도에 대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고 헤어졌다. 저녁은 뷔페식당에서 가서 맛있게 먹었다. 대극장 공연은 아주 뚱뚱한 50대 남자가 피아노 치며 노래 부른다. 악단은 뒤에서 반주를 아주 훌륭하게 연주한다. 7층 후미 퓨전방에서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의 노래 오디션을 보고 방에 왔다.
* 영국령 포클랜드 항구 출항
크루즈 배가 오후 6시 30분에 출항한다. 이곳은 아직 낮 시간이다. 조금 전에 다녀왔던 포클랜드 섬이 바다에 떠 있다. 낮으막한 섬들이 바다 위에 누워 있다. 크루즈 배는 섬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바다 가운데 정박해 있다가 승객이 모두 승선한 후에 떠나는 것이다. 포클랜드 섬에 접안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서다. 저녁 대극장 관람 후에는 댄스홀에 가서 승객들노래 오디션을 관람했다. 반드시 영어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조건이다. 우리 팀에서도 한 팀이 참가해서 응원하러 간 것이다. 객석의 사람들이 한 팀을 선정하는 투표 방식이다. 노래가 다 끝난 후에 종이를 나누어 주고 가장 잘 부른 한 팀을 적어 내란다. 몇 팀을 선정하여 하선 전 날 무대에서 공연하도록 한단다. 우리 팀은 떨어졌지만 흥겨운 시간이었다.
2017년 2월 24일 금요일 전일 항해, 크루즈 배에서 쇼핑
* 전일 항해-크루즈 배에서 쇼핑
오늘은 전일항해다. 크루즈 배 5층 미켈란젤로 룸에서 오전에 타임 세일이 있다. 쇼핑센터에 가서 가족에게 줄 기념품 샀다. 두 아들과 며느리, 우리 부부의 선물로 작은 가방을 하나씩 사고 손자, 손녀들 선물도 샀다. 오후 3시에는 한국팀 승객들이이 모여 한국영화 럭키(Luckey)를 2시간 동안 봤다. 주연은 유해진이다. 그리고 음악회도 갖었다. 저녁에는 정찬식당에 가서 랍스터와 쇠고기 안심요리를 먹었다. 8시 15분 대극장 공연은 뮤지컬이다.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행복을 선사한다. 내일은 오전 7시 40분에 모여서 하선하여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을 관광한다. 오늘 일찍 자야 한다. 그래서 공연 관람 후 바로 방으로 왔다.
2017년 2월 25일 토요일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항구 기항
새벽 5시에 모닝콜이 울리고 6시에는 조식을 했다. 배가 기항하면 서둘러 펭귄 서식지로 이동해야하기 때문이다. 오전 7시에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항구에 기항한다. 왼편으로는 도시가, 오른 편으로는 동녘 서광이 시작 되고 있다. 바다를 가르고 나오는 태양의 장엄한 일출이 비경이다. 바다와 만난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도 비경으로 뜬다. 7시 20분에 하선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예상 기온이 19~27도로 기온이 많이 상승하였다. 가벼운 복장으로 입고 겉옷과 우산을 준비했다. 푸에르토마드린에서 약 2시간 30분 이동하여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로 간다. 이동하면서 파타고니아의 대자연과 각종 야생조류, 동물 등을 본다. 푸에르토마드린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대서양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누에보 만과 추붓 주의 발데스 반도 안쪽 깊숙히 자리하고, 깊은 수심을 가진 항구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척박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지역을 외부 사람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웨일즈 사람들은 그들의 웨일즈 언어와 문화가 영국에 의해 무너지게 되자 토지와 문화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약속을 받아들여 이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1865년 5월에 다양한 직업군의 웨일즈 사람 153명이 리버플 항구에서 오래된 증기선을 타고 출발하였다. 두 달여 후 7월 27일 배는 험한 파도를 거쳐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해안의 누에고 만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아무 것도 없던 이곳에 첫 정착민이 되어 웨일즈 문화를 지켜가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영국 웨일즈의 Baron Madryn의 이름을 따서 Port Madryn 이라 명명하였다. 현재 6만여 명이 거주한다. 도시의 북쪽에 대규모 알루미뉸 공장이 들어오면서 이 도시의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다. 오늘은 푸에르토마드린 도시를 보고 푼타톰보 펭귄 서식지로 갈 것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아침 해변과 시가지
크루즈 배에서 하선하여 14번 버스를 타고 시가지로 나간다. 경찰이 크루즈 배 앞에서 승객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항구의 길이 길게 늘여 있어서 바다 가눙데의 길을 따라 나가며 주변 풍경을 본다. 아침 해변과 잔잔하게 출렁이는 바다 그리고 푸에르토마드린Puerto Mydrin 시가지가 매우 아름답다. 아르헨티나 국기가 펄럭인다. 푸에르토마드린은 발데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지방의 추부트(Chubut)주에 있는 해안 도시이다. 발데스 반도는 아르헨티나의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자연보호 구역으로, 바다 포유류의 서식지이다. 매년 여름 바다사자와 바다코끼리, 바다 표범 등이 번식을 위해 이곳을 찾는다. 펭귄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는 이곳은 유네스코 지정 보호구역이며, 발데스 반도 내에는 포장도로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 유산인 발데스 반도와, 푼타 닌파스에 의해 자연적으로 형성된 누에보만(Nuevo Gulf)에 면해 있는 해안 도시이다. 도시명은 19세기 당시 파티고니아 정착에 공헌한 이민자 웨일스 러브 존스 패리 경이 영국에 소유했던 대지의 이름 ‘마드린’에서 유래된 것으로 ‘푸에르토 마드린’은 마드린 항구라는 뜻이다. 19세기에 시작된 아르헨티나의 유럽 이민 진흥 정책에 따라, 1865년 150명의 영국 웨일스(Wales) 이민자들이 당시 대서양 횡단용 대형 수송기였던 미모사 쾌속범선을 타고 파타고니아 지방에 도착하여 마을을 개척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영국 웨일스 북부 지방의 린 반도에 있는 마을 네핀과 자매 도시로 결연되어 있는 등 지금도 웨일스와 교류하면서 문화를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21세기에는 볼리비아 이민자들이 정착하여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현재 전체 인구의 약 8%를 차지하게 되었다.
주요 경제 활동으로 1970년대 건설된 알루미늄 공업단지가 지역 고용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어업과 관광업에 종사자가 늘고 있다. 도시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경험하기 위해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베이스 캠프가 되는 곳으로 고래, 펭귄, 코끼리바다물범 등의 해상 동물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 남부, 추부트 주 북동부의 항구도시. 라우손 북쪽, 누에보만에 면하고 있다. 인구는 2만 1000명 정도다. 천연의 양항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파타고니아를 잇는 항로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벌써 도시는 외객을 맞으려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면모를 연출하고 있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 외곽
푸에르토마드린 항구에서 하선하여 버스르 타고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를 지나서 간다. 푸에르토마드린은 아르헨티나 추부트(Chubut) 주의 한 도시이며 약 58,000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1865년 마드린(Madryn)이란 이름으로 웨일스 이민자에 의해 세워졌으며, 웨일스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 등에 의해 세워진 추부트 철도 건설로 도시가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은 페닌슐라 발데스와 해안가가 관광지로 유명하다. 그런데 푸에르토마드린 외곽 시가지가 매우 독특한 풍경으로 전개된다. 현지 영어 가이드로부터 여기가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 마지막 지역이라는 설명을 듣고 창밖을 보니 시가지와 건조한 언덕이 마주하고 있다. 주름진 모양의 야트막한 사막산이 시가지를 에워싸고 있다. 지금 우리는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부터 연결된 고속도로 3번을 달려간다. 건조한 들녘이다. 이제 파타고니아로 진입하고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부는 폭이 점점 좁아지면서 긴 삼각형 모양을 띠는데, 파타고니아는 바로 이 삼각형 지역을 가리킨다. 명확한 지역 구분선은 없지만, 대체로 남위 38°선 이남 또는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 강 이남을 파타고니아 지방으로 간주한다. 파타고니아 지방의 남쪽 끝에는 마젤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티에라델푸에고와 이 군도의 남단에 혼 곶이 위치하고 있으며,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인 드레이크 수로가 있다. 파타고니아는 안데스 산맥의 분수계를 기준으로 서부 태평양 방면의 칠레 파타고니아와 동부 대서양 방면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로 구분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아이센 주를 포함한 북부 파타고니아와 마가야네스 주를 포함한 남부 파타고니아로 다시 나뉘며,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산악 지역인 안데스 파타고니아, 고원으로 이루어진 중앙 파타고니아, 해안 평야인 대서양 파타고니아로 세분할 수 있다.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의 산악 지역에는 다수의 산악 빙하가 존재한다. 해안 지대에는 산악 빙하에서 기원한 융빙수가 흐르는 하천과 빙하기에 이루어진 피오르 해안이 형성되어 있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산악 지역은 강수량이 많아서 남반구에서 남극을 제외하면 얼음과 빙하로 덮인 빙원이 넓게 발달한 유일한 곳으로 약 50여 개의 크고 작은 빙하들이 있다. 동쪽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지방은 크게 남아메리카의 팜파스 평원과 남부 안데스 산맥을 따라 형성된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파타고니아 중부의 고원 지대는 신생대에 여러 번의 화산 폭발로 형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무암 용암층이 지표면을 광범위하게 덮고 있다. 안데스 산맥에 인접한 서부 지역은 용암층 위로 빙하에 의해 운반된 퇴적물이 덮고 있다. 또한 빙하가 녹은 물이 갇힌 아르헨티노 호, 비에드마 호 등의 빙하호가 분포해 있다.
파타고니아는 우리 나라에서는 보지 못하는 독특한 지형이다. 차츰 파타고니아로 진입하여 가고 있다. 도로 양쪽으로 건조한 파타고니아가 전개된다. 이번 여행에서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파타고니아의 지형을 많이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여기서 1시간 정도 가면 휴게소가 있단다. 잠시 쉬고 다시 또 1시간 30분 정도 가면 목적지인 펭귄 서식지가 있단다. 그곳에서 펭귄을 보며 산책 후 돌아올 때 버스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한단다. 자연 그대로 보존된 파타고니아다. 서쪽 태평앙에서 바람이 불지만 안데스 산맥이 건조하다. 연강수량이 200mm미만이다. 이곳에는 영국 웨일즈 사람들이 1865년에 150명 정도가 와서 살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버스는 시가지 와곽을 벗어나 파타고니아 들녘으로 점점 달려간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풍력계
파타고니아 들녘에 풍력계가 도로 양쪽으로 많이 줄지어 서 있다. 이 지역은 바람이 많아서 풍력계 발전소가 있다. 고속도로변에 작은 무덤 묘비도 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자의 무덤인 듯하다. 막힘이 없어 차들이 고속 질주한다.
파타고니아는 연중기온은 낮고 바람이 세다. 이 거센 바람의 힘은 파타고니아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건조지대로서 덤불로 뒤덮여 있다. 대체로 북쪽으로 콜로라도 강, 동쪽으로 대서양, 남쪽으로 코이그 강, 서쪽으로 안데스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파타고니아 탁상지는 광대한 스텝형 초원지역(사실상 나무가 없음)이다. 네그로 강을 따라 대서양 연안의 약 90m 지점에서 안데스 산기슭의 약 900m 지점까지 서쪽으로 매우 평평한 평야 형태로 융기해 있다. 네그로 강 남쪽의 평야들은 더 울퉁불퉁하다. 대서양 연안쪽 대부분은 깎아지른 듯한 높은 절벽이 좁은 해안평야를 사이에 두고 대서양에 맞닿아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와 푸에이레돈 호 동쪽의 탁상지는 현무암질 암상으로 덮여 있다. 구릉지대는 풍화작용에 강한 결정질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서로 탁상지에 형성된 높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깊고 넓은 골짜기에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 쪽으로 흐르는 콜로라도·네그로·추부트·치코·산타크루스 강이 흐른다. 파타고니아 북부지역의 연평균기온은 12~20℃이며, 강우량은 101~432㎜의 반건조성기후이다. 남부지역의 기후는 차고 건조하며, 내륙에서보다 연안 쪽에서 기온이 더 높으며, 서풍이 세차게 분다. 북부지역은 주로 탁 트인 관목림지로 되어 있다. 풀은 모래질 토양에서 왕성하게 자라고, 복숭아·서양자두·아몬드·포도·채소·알팔파 등의 관개작물들이 계곡에서 재배된다. 구아나코·라마·여우·스컹크·살쾡이·퓨마·독수리·새매 등의 조수와 여러 종류의 뱀과 도아뱀 등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한다. 중요한 천연자원으로는 코모도로리바다비아·프라사인쿨·카르트리엘 주변에서 나는 석유와 리오네그로 주 시에라그란데의 철광석, 네우켄 주의 구리와 추부트 주의 우라늄과 망간 등이 있다.
남아메리카 대륙의 파타고니아(Patagonia) 지방은 칠레의 푸에르토몬트(Puerto Montt)와 아르헨티나의 콜로라도(Colorado) 강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을 말하며, 전체 면적이 100만 ㎢를 넘어 한반도 면적의 5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 파타고니아라는 명칭은 1520년 마젤란의 원정 당시 원주민들이 거인(patagón)일 것이라고 짐작한 데서 유래한다. 파타고니아에는 안데스 산맥이 서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달리고 있으며, 산맥의 동쪽 대부분은 파타고니아 고원이 차지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을 기준으로 서부의 칠레 파타고니아와 동부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로 구분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강수량이 많고, 안데스 산지에 빙하의 침식 작용이 더해져 복잡한 해안선과 산악 지형이 특징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는 건조한 기후에다 넓은 고원이라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서늘한 기후에다 칠레나 아르헨티나의 영토 모두 핵심 지역과 거리가 멀어 전반적으로 인구가 희박하며 큰 도시도 드물다. 밀 재배와 목축업, 석유와 천연가스의 채굴 등이 주요 산업이며, 최근에는 관광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세계 여행을 하며 많은 나라에서 풍력계를 보았지만, 오늘 이토록 건조한 평원의 파타고니아 들녘에서 보는 풍력계는 아주 이색 풍경이다. 우뚝 솟은 풍력계 모양이 하늘 닿을 듯 높게 보인다. 파타고니아의 바람이 선사하는 소중한 에너지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공룡동상
아득한 파티고니아 들녘 고속도로변에 커다란 공룡동상이 서 있다. 티아노사우르스 공룡 서식지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지역이라서 세워 놓은 것이다. 이곳 주변에는 공항도 있다. 푸에르토마드린 북쪽 추부트 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항이다. 가까운 곳에 알루미늄 공장이 있다. 생산된 알루미늄의 80%는 수츨하고, 20%는 자국에서 소모한다. 푸에르토 마드린에서 아주 중요한 산업이다. 버스가 서서히 지나가며 공룡동상을 자세히 볼 수 있게 해준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강변 나무들
건조한 파타고니아 들녘 가운데 나무가 보이고 민가 주택이 보인다. 이곳은 추부트 강변이다. 물이 있어서 나무들이 잘 자란다. 주로 웨일즈인들이 거주한다. 추부트 주는 아르헨티나 남부에 있는 주이다. 면적 224,686 km², 인구는 2001 기준으로 41만 명 정도다. 주도는 라우손이다. 15개 군을 관할한다. 파타고니아 지방에 속하며, 남위 42° 와 46° 사이에 위치한다. 서쪽은 안데스 산맥을 경계로 칠레와의 국경을 이루며, 동쪽은 대서양에 면한다.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된 추부트 강이 동서로 가로질러간다. 안데스 산맥 기슭에는 빙하의 영향을 받은 호수가 많고, 동쪽은 기후가 건조하여 염호가 있다. 17세기에 스페인 식민지가 개척되었으나, 고립된 위치에 있고 기후가 한랭·건조하고 토질이 척박하여 별다른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19세기 영국 웨일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추부트 강 유역에 정착하여 양 등의 사육을 하며 개척하였다. 웨일스 이민들이 정착하여 자신들의 식민지 건설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1884년 아르헨티나의 준주가 되었고, 1955년 주가 되었다. 최근 석유가 다량 발견되어 석유 생산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고 있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아 관광업이 발달하고 있다. 안데스 산맥에는 국립공원이 있으며, 대서양 연안에는 고래와 펭귄이 모여든다. 웨일스 문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웨일스어를 쓰는 사람도 소수 남아 있다. 파타고니아에서도 이렇게 풍요로운 지역이 있다고 외치듯 추부트 강변의 나무들과 민가 주택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한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끝없는 파타고니아가 계속 이어진다. 건조한 땅에 키 작은 나무 무더기들이 앉아있다. 풀도 무더기로 앉아있다. 이곳은 파카고니아 영토다. 평원이다가 건조한 모래 언덕산이다가 나름대로 여러가지 풍경을 선사한다. 사람이 지나다닌 길이 있다. 미국 서부 모하비 사막을 달릴 때처럼 동일한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들이 웅쳐서 엉켜 힘겹게 살고 있다. 내 조국의 들녘과는 많이 다르다. 내 조국의 나무들아, 너희들은 침 행복한 환경에서 사는 거다. 니곳 나무들은 뿌리가 매우 깊게 뻗어있다. 줄기와 잎이 뾰족하고 작다.식물들이 이곳 풍토와 기후에 적은된 모양으로 형성되어 있다. 식물들도 건조한 땅에서 살기 위해서 작고 뾰족한 잎으로 성장한다. 잎이 뾰족한 이유는 동물들이 뜯어 먹지 못하게, 그리고 물의 증발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줄기와 뿌리는 매우 질기고 길게 뻗어있다.강한 생명력을 소유하고 있다. 겨울 스포츠 지역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사람도 살고 있다. 라마와 비슷한 동물인 와나고도 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먹고 사는 동물이기도 하다. 지금은 해변 쪽으로 이동했다. 하늘로 지평선이 맞닿는다. 반원을 그린다. 도로 양편으로 아득한 파타고니아다. 그 사잇길로 버스가 힘차게 달려간다. 동물도 한 마리 기르지 않는다. 가축이 없다. 아니 기르고 있다는데 파타고니아 평원이 너무 넓어서 어디에 있는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풀이 여름인데도 노랗다. 신비로운 땅이다. 철조망 울타리가 가끔씩 보인다. 목장인 듯하다. 타조 같은 새 리아가 있다. 새끼 두 마리가 타조처럼 걸어간다. 덩치가 큰 데 저건 새끼란다. 날지 못하는 새다. 무척 빠르게 숲으로 갔다.
파타고니아Patagonias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위 38°선 이남 지역으로, 서부는 칠레의 영토, 동부는 아르헨티나의 영토이다. 안데스 산지와 파타고니아 고원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인구는 희박하나 빙하 지형이 많아 관광업이 발달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건조지대로 덤불로 덮여 있다. 북쪽은 콜로라도 강, 동쪽은 대서양, 남쪽은 코이그 강, 서쪽은 안데스 산맥과 경계를 이룬다.
파타고니아 탁상지는 광대한 스텝형 초원지역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호와 푸에이레돈 호 동쪽의 탁상지는 현무암질 암상으로 덮여 있다. 동서로 탁상지에 형성된 높은 골짜기로 둘러싸인 깊고 넓은 골짜기에 안데스 산맥에서 대서양 쪽으로 흐르는 콜로라도·네그로·추부트 강 등이 흐른다. 북부지역은 반건조성기후이고 남부지역의은 차고 건조하다. 서양자두·아몬드·알팔파 등의 관개작물이 계곡에서 재배된다. 구아나코·라마·여우·스컹크·살쾡이·퓨마·독수리 등의 다양한 야생동물들이 서식한다. 주요 천연자원으로는 석유·철광석·구리·우라늄·망간 등이 있다.
기후는 한랭한 사막기후가 탁월하여 겨울에는 몹시 추우며 남단부에서는 연 평균기온이 5℃까지 내려간다.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빈약한 스텝(초원)으로 덮여 있으며 가시가 있는 관목림 지역도 넓다. 경작에 적합하지 못한 지역이 광범위하여 목축, 특히 양과 소의 방목지대가 압도적이다. 최근 코모도로리바다비아에서 석유개발이 시작되면서 파타고니아지역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알루미나, 석탄, 철광석 등 미개발 광물자원이 많고 수력자원·어업자원 또한 풍부하다. 이 밖에 안데스 산록의 많은 호수를 중심으로 관광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창가의 햇살이 따사롭다. 약간 덥다. 청명한 날씨다. 민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집이 있을 텐데, 파타고니아 영토가 워낙 넓어서 우리가 못 찾는 것이다. 양농장도 지나가는데 광활해서 양이 보이지 않는다. 호주에서 들여온 양이다. 이곳 사람들을 양을 잡아 불에 쬐어 익혀서 먹는다. 라마와 사슴 비슷한 동물 3마리가 숲에서 풀을 뜯는다. 갈색 털이다. 철조망은 계속 이어지는 구간이 있다. 광활한 파타고니아다. 바라보는 눈이 시리다. 눈이 저리도록 전개되는 비경이다.
*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휴게소
휴게소에서 15분 정도 휴식하였다. 휴게소 주변에는 나무도 있고, 크로바가 꽃도 피웠다. 파타고니아 영토인에 아마도 물을 주어 기르는 것 같다. 건조한 언덕산이 보인다. 여기서 펭귄 서식지까지는 110Km다. 그 중에서 22Km는 비포장 도로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그 독특한 땅을 밟아본다는 것이 신기하고 흐뭇한 여정이다.
* 아르헨티나 푼타 톰보 광활한 펭귄 서식지
푸에르토마드린에서 톰보 펭귄 서식지에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푼타아레나스에서 양목장을 방문할 때와 유사하다. 고속도로도 달리고, 22Km의 먼지 휘날리는 비포장도로도 달렸다.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는 남미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가장 큰 마젤란 펭귄 서식지다. 6개월만 바다에 나가 살고 9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 번식기에는 육지로 나온다. 9월에 숫컷이 먼저 와서 구덩이르 파고 소리내며 암컷을 유혹한다. 짝짓기를 하기 위해서다. 소리가 서로 다 다르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각가 다른 것과 같다. 10월에 교미하여 암컷이 알 2개를 생산한다. 계란 크기 정도다. 암, 수 둘이 40일 동안 품는다. 서로 번갈아 바다로 나가 먹이를 먹고 온다. 새끼는 1마리 정도만 살아서 100일 정도 보호를 받고 살다가 독립해서 바다로 나가 산다. 지금은 털갈이 시기다. 바다에 나갈 준비 중이다. 우리는 여기서 1시간 30분 정도 펭귄과의 만남을 즐길 것이다. 톰보지역에 진입하여 잠시하차하였다. 화장실만 빨리 다녀온 후 다시 승차하여 펭귄 서식지 가까이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차하여 자유로이 펭귄을 관찰하며 1Km정도를 걸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일정이다. 길은 하나라서 그 길만 따라 다니면 된다. 12시 45분까지 이곳 주차장으로 와서 우리가 타고 들어온 14번 버스에 각자 승차하면 된다.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약 50만 마리의 마젤란 펭귄들이 서식한다. 암수 한 쌍이 살며 새끼를 품고, 부화시키는 구멍만도 25만 개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마젤란 펭귄의 생태를 생생하게 관찰할 것이다. 1979년부터 펭귄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푼타 톰보는 파타고니아 대륙에 있는 가장 중요한 마젤란 펭귄 서식지다. 해마다 번식을 위해 수십만의 마젤란 펭귄이 모이는 지역으로 남미 대륙에서 가장 큰 펭귄 군락이다. 매년 9월 펭귄이 처음 들어와 3월 중순까지 지내가 떠나는데, 11월에는 갓 태어난 새끼를 관찰할 수 있다. 마젤란 펭귄은 몸길이가 약 6.7Cm다. 눈썹에서 머리 옆으로 목으로 돌아가면서 흰 띠가 있고 가슴 굵고, 가는 검은 색 띠가 두 중줄있다. 다리는 검다. 훔볼트펭귄 및 케이프펭귄과 생김새가 비슷하나 이들은 가슴의 띠가 하나뿐이다. 바닷가 절벽이나 모래언덕, 숲, 풀밭 등 여러 환경에서 무리지어 생활한다. 작은 돌이나 작은 나뭇가지 또는 잎 등을 재료로 하여 구멍 속에 둥지를 틀고 한 배에 2개의 알을 낳는다. 알은 흰색이고, 알을 품는 기간은 약 28일이다. 먹이로는 바닷물고기를 잡아 먹는데 번식기에는 주로 오징어를 잡아 먹는다. 마젤란 해협, 포클랜드제도에 살며 브라질 남부까지 진출하기도 한다. 마젤란 펭귄은 온순한 성격으로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지만 새끼를 돌보는 기간에는 예민하여 부리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한다. 펭귄 보호 구역 내에서는 주의사항이 있다.
1.펭귄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2.펭귄에게 절대 먹이를 주지 않는다.
3.펭귄 둥지나 펭귄을 만지지 않는다.
4.펭귄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때는에는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5.펭귄을 몰래 데려오지 않는다.
지난 1982년 일본의 히로데펭기스 회사가 펭귄으로부터 추출한 농축단백질로 영양식을 제조하고 가죽을 이용하기 위해 추붓주와 펭귄 4만 8천 마리를 도살하기로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 무산된 적이 있다. 이런 기본 적인 주의사항을 머리에 주입시키고 펭귄 서식지로 진입했다.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입구의 초입에서 우리 부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구멍에 펭귄이 있는 것이 신비로워서 주저앉아 바라보느라 떠나지 못했다. 모두 모여 그 펭귄에 촛점을 맞추고 사진을 이리저리 찍었다. 그때 인솔자가 말했다. 이런 풍경은 계속 나온다고 어서 더 들어가 보란다. 정말 걸어가면서 수많은 펭귄과 수많은 구멍이 보인다. 푼타 톰보 서식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관활한 서식지다. 언덕에, 나무에 구멍을 파고 산다. 구멍은 모두 숫컷이 파 놓은 집이다. 엄마, 아빠, 아기 한 가족 셋이 서 있기도 하고, 홀로 구멍에 들어앉아 있기도 하다. 돌아다니기도 한다. 사람의 통행로는 펭귄 서식지의 진입을 막기 위해 줄을 쳐 놓았다. 그런데 펭귄은 줄 아래로 빠져나와 사람들이 걷는 길을 마음껏 통행한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통행로인 나무판 다리 아래 무리지어 있기도 하다. 이 일대가 모두 천연 펭귄 서식지다. 숲 곳곳에 구멍이 있고, 그 집 주변에 펭군이 한 마리 또는 두서 마리가 있다. 구멍 속에 웅크리고 앉아서 사람을 빤히 쳐다보기도 하고, 구멍 앞에 일어서서 몸을 가다듬기도 한다. 나무 그늘 아래에는 여러 마리가 모여 있다. 더러는 엄마 아빠를 따라 아기 펭귄이 뒤뚱거리며 언덕진 길을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세계인의 걸음을 부르는 펭귄들은 사람과 하나 되어 사는 평화로운 생활을 전시한다. 사진기를 갖다 몸 가까이 대어도, 얼굴을 바짝 내밀에 바라보아도 전혀 색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행동을 할 뿐, 사람으로 인해 도망 가거나, 해코지 하려는 행동은 전혀 없다. 제번 긴 길인데 곳곳에서 수시로 이어져 만나는 펭귄들로 인하여 힘들지 않다. 오늘 아르헨티나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에서 참 행복한 여정을 보낸다.
* 아르헨티나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바다전망대에서 본 펭귄들
한참을 걸어서 가니 해변이 나온다. 이곳이 바다와 마주한 바다전망대다. 아르헨티나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여기까지만 인간의 걸음을 허락한다는 표식이다. 이곳에서 우리 부부는 인도 교수님 부부를 만났다. 크루즈 배의 뷔페식당에서 자주 만나서 함께 식사를 해서 정이 들었다. 내외가 모두 인도 분이신데, 남자 분이 영국 런던에서 대학교 수학교수였단다. 우리 부부도 소개하여 문인 부부임을 알고 있다. 여기서 만나니 어찌나 반가운지 우리 부부와 함께 네 명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그 부인은 나를 감싸안고 내 볼에 연신 뽀뽀를 한다. 70대 후빈이신데 나를 동생처럼, 딸처럼 사랑스럽게 안아주신다. 그리고는 영국 런던에 꼭 오란다. 인도 사람들은 매우 순수해서 그 말이 허울이 아님을 우리 부부는 안다. 인도 여행에서도 그런 훈훈한 인정을 참 많이 체험했다. 예, 그리할게요라고 대답은 영어로 쉽게 했지만, 마음뿐 결국 아쉽게 헤어져야할 사람들이다. 그 분들은 벌써 바다 펭귄들을 다 보고 나가셨다. 크루즈 배에서 디시 만나자고 하고 바다 펭귄들을 조망했다. 육지에도 수없이 많았는데, 바다에도 펭귄이 수없이 많다. 바다에 나가 헤엄치는 녀석도 있고, 해변 모래사장을 걷거나, 서 있는 녀석도 있다. 까맣고 하얀 몸통으로 바다와 백사장을 누비며 비경을 선사한다.
* 아르헨티나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 바다전망대에서 나오며 본 펭귄들
바다전망대에서 나오며 또 펭귄을 수없이 많이 만난다. 아까 지나간 곳인데도 새로운 포즈의 예쁜 펭귄들이 있다. 시간은 촉박한데 펭귄들은 자꾸 시선을 이끈다. 털갈이를 하는 펭귄도 있다. 저런 과정을 거치고, 새끼를 다 길러서, 이제 곧 4월이면 먼먼 바다로 나가 살 것이다. 더러는 그런 과정을 빨리 마치고 바다로 나간 펭귄도 있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세계여행을 90여 개국이나 다녔지만 오늘 만큼 천연의 환경에서 그들 방식 그대로 생활하는 대단위의 어마어마한 펭귄 서식지를 본 적이 없다. 그들의 집이라는 수없이 널려있는 다량의 구멍도 처음 보았다. 이제 나는 펭귄을 완전히 보고 배우고 가는 것이다. 손주들에게 보여주려고 폰으로도 사진을 많이 찍었다.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지 않을 것이다. 두고두고 그리워 하기도 할 것이다. 먼 후일 어두운 그림자가 정원에 스밀 때, 우리 부부는 그런 회억으로 담소를 나누며 행복해 할 것이다. 이런 체험은 세계여행에서 얻는 값진 보물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 마을
푼타 톰보 펭귄 서식지를 떠나 크루즈 배가 있는 푸에르토마드린으로 간다. 도로를 달릴 때 파타고니아 마을이 보인다. 광활한 파타고니아에 붉은 지붕의 집들이 보인다. 파란 숲과 참 고운 정경이다. 파타고니아 지역에서는 주로 목축업으로 특히 양을 기른다. 농업으로는 밀과 과일을 재배한다. 어업은 고래잡이 등을 한다. 농수산업과 석유 등을 기반으로 한 에너지 산업, 그리고 광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안데스 산맥의 장대한 계곡과 남부 지역은 습도가 낮아 양을 사육하는 데 유리하다. 현재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되는 양은 1500만 마리로 추산되는데, 그중 절반을 파타고니아 지역에서 사육하고 있다. 양은 이 지역에 처음 들여온 19세기 후반 이후 주요 수입원의 하나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 가격이 정점에 도달하였다가 세계적으로 양모 가격이 하락하면서 파타고니아 북쪽의 팜파스에서는 사육하는 양의 수가 줄어든 반면, 파타고니아 중부 지역의 평원에서는 그 수가 증가하였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방의 추부트(Chubut) 주는 산타크루스 주와 함께 양모 생산의 주요 지역이다. 이외에도 양에 비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소, 돼지, 말 등도 사육하고 있다.
파타고니아 서부 산지와 티에라델푸에고를 덮고 있는 산림을 통해 임업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파타고니아 지역의 강한 바람은 풍력 발전에 유리한 자원이 되고 있다. 이 외에도 광물, 천연가스, 석유, 수력 등 에너지 생산은 지역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굴한 광물과 석유 등을 수송하기 위해 북부 안데스 산록에 여러 개의 철도 노선이 건설되었다. 또한 칠레에서 가장 수량이 풍부한 강과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강 등에 대규모의 전력 생산과 농업을 위한 댐이 건설되었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파타고니아 지역은 목축업 및 에너지 산업 이외에 관광업이 지역 경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혼 곶을 둘러보는 유람선 관광과 남극 대륙 관광은 이 지역의 유명한 관광 상품이며, 마젤란 해협 해운의 기지였던 마가야네스(Magallanes), 칠레의 양모 중심지였던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대서양 연안의 발데스(Valdés) 반도, 안데스 산록의 페리토모레노(Perito Moreno) 빙하, 아르헨티노(Argentino) 호, 남부의 우수아이아(Ushuaia),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와 같은 관광 명소가 있다. 파타고니아 안데스는 해발고도 3,500∼3,600m의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 끝 지역에서는 2,000m 안팎으로 낮아진다. 최고봉은 남쪽에 있는 산발렌틴산으로 4,058m다. 그러나 중앙 지역은 별로 높지 않다. 이 부분은 빙하의 침식으로 생긴 많은 골짜기들에 의하여 안데스 산맥이 잘려나간 곳에 해당하며 빙하호가 많다. 태평양 쪽의 비탈면에서는 비가 많이 오고 삼림지에는 도밤나무가 많다. 파타고니아 대지는 안데스 산맥의 많은 지맥이 대서양 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진 대지이며 해안에 낭떠러지가 솟아 있는 곳이 많아 해안선은 단조롭다. 파타고니아 지역을 달리며 몇 군데의 농장도 보았다. 건조하고, 거친 나무 더미만 있는 영토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까 싶은데 힘든 환경을 극복하고 살아가는 정경이 아름답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파타고니아를 가르는 포장도로
광활한 파타고니아를 뽀얀 포장도로가 가르는 풍경이 눈앞에 다가온다. 주변의 영토는 원시에 가까운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인데 포장도로는 인간의 찬란한 손길이 고인 현대의 모습이다. 목장의 철조망이 도로변에 쳐져 있어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정경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건조한 땅의 마을
아까 지나간 추부트 강변의 마을이다. 민가 군락이 나무 숲 사이에 있다. 건조한 땅에서 일어선 풍요로운 풍경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휴게소의 파란 풀
이 휴게소도 아까 갈 때 들었던 곳이다. 주변에 나무와 풀들이 곱다. 파란 잔디 위에 크로버꽃도 피었다. 우리나라의 크로버꽃과 동일하다. 휴게소 밖의 다른 지역은 건조한데 이곳만 파랗다. 물을 주어서 기르는 것 같다. 잠시 휴식하고 떠났다.
*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들녘 마을
파타고니아 들녘을 달리다 보면 가끔씩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목장, 민가, 가축 등이 보인다. 그럴 때면 참 반가웠다. 그런데 파타고니아 그 건조한 들녘에 마을이 보일 때는 참 풍요롭게 보인다. 지금 그런 풍경을 만나고 있다. 나무와 파란 식물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아까 갈 때 보았던 공룡 동상도 또 보인다. 파타고니아의 기후는 일반적으로 서늘하고 바람이 강하게 분다. 안데스 산맥 서쪽 칠레 해안 지역에서는 한랭한 해양성 기후,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에서는 한랭한 스텝 기후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칠레 파타고니아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여름철 기온은 남부에서 14℃, 북부에서는 19℃를 나타내고, 강수량도 곳에 따라 2,000~7,000㎜의 범위로 편차가 크다. 북부 해안 지역에서는 강설이 매우 드물지만 남부 지역에서는 자주 발생한다. 해안 가까이 안데스 산맥이 있는데 북부의 수목 한계선은 해발 고도 약 2,000m이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져 600~800m까지 낮아진다. 남부의 해발 고도가 높은 산지에서는 빙하로 덮인 빙설 기후(가 나타난다. 동일 위도상의 여름철 기온은 태평양 연안보다는 대서양 연안에서 더 높다. 따뜻한 남적도 해류의 일부가 남아메리카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기 때문에 아르헨티나 해안은 찬 훔볼트 해류가 북상하는 칠레 파타고니아에 비하여 기온이 더 높다.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겨울철 기온은 내륙 고원 지대로 갈수록, 그리고 남극 가까이 갈수록 낮아진다. 안데스 산악 지역에서는 지형 효과로 지역에 따라 강수량이 매우 상이하게 나타난다, 서쪽의 칠레 파타고니아는 탁월한 편서풍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은 반면, 안데스 산맥 동사면의 경우에는 비 그늘 효과로 건조하며 일부에서는 사막도 나타난다. 최남단 푼타아레나스의 연평균 강수량은 395㎜다.
세계여행을 하는 것은 명소만 보기 위해서는 아니다. 이동하며 그 나라의 속살까지 보는 것도 세계여행에서 매우 소중한 여정이다. 파타고니아에 대하여 교과서에서나 배웠는데, 이번 여행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게 되어 보람되고 흐뭇하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
푸에르토마드린 시가지가 보인다. 바다와 접하고 파타고니아 건조한 영토와 접한 독특한 풍경이다. 시가지 안에는 울창한 공원도 있다. 더워서 그늘에 앉아 땀을 식히는 사람도 있다. 해변에는 마드린의 여인을 상징하는 동상도 있다. 우리를 기다리는 크루즈 배도 보인다. 바다 물빛과 햇살과 상큼한 해변 도시가 비경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항구 주변 풍경
버스가 배가 정박한 항구까지 간다. 이번 푸에르토마드린 항구는 육지에서 바다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긴 길을 따라서 들어가며 본 항구 주변 풍경은 비경이다. 바다, 해변, 백사장, 시가지, 하늘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는 완벽한 아름다움이다.
* 아르헨티나 푸에르토마드린 항구 재승선
버스에서 하차하여 크루즈 배를 재승선한다. 경찰 두 명이 크루즈 배 곁에서 안전을 지키고 있다. 검정 개도 함께 지킨다. 배에 승선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의 행렬이다. 배 직원들이 나와서 시원한 물과 물수건을 나누어준다. 크루즈 여행에서 최상의 대접은 언제 어디서나 베풀어준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이라고 외치듯 행복을 선사해준다. 버스에서 하차하여 크루즈 배를 재승선한다. 경찰 두 명이 크루즈 배 곁에서 안전을 지키고 있다. 검정 개도 함께 지킨다. 배에 승선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의 행렬이다. 배 직원들이 나와서 시원한 물과 물수건을 나누어준다. 크루즈 여행에서 최상의 대접은 언제 어디서나 베풀어준다. 이것이 크루즈 여행이라고 외치듯 행복을 선사해준다. 승선하여 수영장에 가서 온탕물로 맛사지를 하였다. 팅 속 물줄기에 전신을 번갈아가며 맛사지 하면 피곤이 풀린다. 수영장 코너 푸드점에 가서 피자, 햄버거, 감자튀김,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룸에 ㅇ하서 샤워하고 대극장 공연을 관람하였다. 오늘은 러시아인 남녀 두 명이 나와서 서커스를 공연한다. 남자는 코믹하게 객석의 두 사람을 세워 1층 객석을 반을 갈라 배구줄을 치고 양편 사람들에게 에드버룬처럼 큰 공을 주어 배구를 하게 한다. 나중에는 큰 한아름도 넘는 크기의 공을 주어서 신나게 치고 즐겼다. 여자는 중년여인으로 춤이 예술이다. 마지막에는 두 남녀가 함께 춤을 춘다. 옆으로 번쩍 들기도 한다. 러시아의 공연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오늘은 공연만 보고 룸으로 와서 크루즈 여행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였다. 땀에 젖은 옷을 빨기도 하고, 방을 정리했다. 인솔자가 한국에서 가지고 와서 나누어준 컵라면과 김치를 가지고 뷔페식당에 가서 일행과 나누어 먹었다. 속이 개운하다. 식당 직원이 우리가 먹은 라면과 김치 그릇을 치우며 '오! 김치'라고 하여서 한국을 아는 것에 기뻐서 함께 웃었다. '코리안 푸드'라고 했더니 안다고 한다. 한국의 김치가 세계적인 음식이 된 것이다. 뷔페식당에서도 김치가 나온 적이 있었다. 오늘 많이 걸어서 밤에는 깊은 잠을 잤다.
2017년 2월 26일 일요일 전일 항해
* 크루즈 배 15층 갑판 수영장
오늘은 전일 항해다. 아르헨티나의 바다, 대서양을 질주하여 점점 올라간다. 날씨도 점점 더워진다. 오전에는 10시~11시에 할인쇼핑 센터인 5층 미켈란젤로 디너룸에 가서 둘러보았다. 또한 10시 15분~11시 15분까지는 6.7층 대극장에 가서 주방 직원의 인사와 요리시연을 보았다. 지배인과 주방장이 아주 코믹하게 진행한다. 뷔페중식을 마치고 오후엔 수영장에 갔다. 15층에는 수영장이 두 군데 있다. 모두 중앙인데 아이스크림과 피자를 주는 건물을 사이에 두고 양편에 있다. 지난번과는 다른 수영장에서 놀았다. 오늘은 한국 레드캡에서 온 여행객 여자 2명과 함께 온수탕에서 물 맛사지를 하며 즐겼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수영모자가 자꾸 날라간다. 그래도 기온이 20도 이상이어서 포근하다. 오후 3시~4시 30분 까지 수영장에서 몸을 편안하게 맛사지 하였다. 남편과 함께 돈을 내지 않아도 무제한으로 주는 아이스크림을 받아 먹었다. 물도 먹고, 몸을 닦고 룸에 왔다. 샤워 후 곱게 단장하고 정찬석식당에 갔다.
* 크루즈 배 정찬석식
우리 부부는 곱게 차려 입고 정찬식당에 갔다. 나는 이 크루즈 배에서 산 목걸이를 하고 갔다. 모두 예쁘다고 한다. 10불의 행복이다.이제는 자연스럽게 여자끼리, 남자끼리 앉아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먹는다. 오늘 메뉴는 꿩고기, 랍스터와 왕새우를 먹었다. 아이스크림과 모듬 과일로 후식을 했다. 서로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이었다. 룸으로 돌아오는데 외국 여행객 남자가 날 보더니 '뷰티풀'이라고 칭찬한다. 그저 감사하다고, '떙~큐'히고 왔다. 양치 후 대극장 공연장에 갔다. 오늘은 러시아계 모로코 여인이 1775년에 제작한 오랜 전통의 바이올린을 가지고 나와 연주한다. 값이 약 3백억 원이라고 하여 놀랐다. 홀로 연주한다. 뒤에서 악단이 가끔씩 반주를 한다. 조그맣고 고전적인 모양의 바이올린을 빠르고, 슬프고, 경쾌하고, 다앙하게 연주한다. 멋진 공연이다.
* 크루즈 배 밤의 선실 내경
대극장 공연 관람을 미치고 룸에 와서 선실 내경을 사진에 담았다. 은은한 밤의 선실 내경이 아름답다. 언제 또 오겠는가. 언제 또 이 배를 타겠는가. 우리 부부에게 그럴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다른 곳으로 세계여행을 떠나겠지. 크루즈 배가 그리워질 때 두고두고 오늘의 사진을 보리라.
2017년 2월 27일 월요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푼타델에스테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 기항
크루즈 배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에 기항했다. 예상 기온이 25~33도다. 기온 상승으로 더운 날씨다. 가벼운 복장으로 가야 한다. 우리 부부는 전에 남미 육로 탐방에서 다녀간 곳이다. 배가 진입할 때 그날의 여행 기억이 떠오르며 반갑고, 또한 낯익은 도시가 시야에 담기기도 했다. 몬테비데오는 1726년 에스파냐인이 성채를 건설한 뒤 무역기지로서 번영하면서 우루과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우루과이는 한반도의 4/5 크기에 해당한다. 전 국토의 85%가 경작 및 목축이 가능한 굴곡이 많은 평야지대다. 1830년에 우루과이의 수도가 되었다. 라플라타 강 어귀 북부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남아메리카의 ‘작은 파리’라고 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유서 깊은 박물관, 근대미술관, 우루과이대학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장미원도 있고, 남아메리카에서 손꼽히는 해수욕장과 피서지가 있다. 미식축구 경기장이 있는 바트예이오르도녜스 공원을 비롯한 공원들과 동쪽으로 푼타델에스테 시까지 뻗어 있는 대서양 연안의 해변 등이 휴양지로 손꼽힌다. 오늘 우리는 푼타델에스테로 간다. 전에 왔을 때 가 보지 않은 곳이어서 많이 기대되는 여정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라플라타강
몬테비데오 항구에서 하선하였다. 항구는 그리 크지 않다. 아르헨티나로 가는 페리호 승선장도 있다. 내려서 보니 라플라타 강이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바다 같은 데 바다가 아니고 강이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지나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하구의 폭이 200㎞가 넘어 세계에서 가장 넓다. 우루과이 강과 파라나 강의 합류점을 기점으로 그 하류를 라플라타 강이라고 한다. 하지만 라플라타 강은 엄밀히 말해 강이라기보다는 바다의 만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라플라타 강은 우루과이 강 하구의 거대한 삼각강이자 파라나 강의 넓은 삼각주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하구의 총 길이는 약 290㎞다. 대서양과 만나는 부분에서는 하구의 폭이 220㎞로서 대단히 넓지만 내륙으로 가면 2㎞로 크게 줄어든다. 라플라타 강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사이를 흐르며 양국의 국경선을 형성하고 있다. 강의 남측에는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자리하고, 북측에는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 등의 대도시가 자리하여 양국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라플라타 강 주변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이다. 이 나라는 남북으로 약 500km, 동서로 약 470km 펼쳐져 있다. 북쪽과 북동쪽으로 브라질, 남쪽으로 라플라타 강 어귀, 남동쪽으로 대서양과 접하고 있다. 서쪽 경계선 전체는 우루과이 강이 아르헨티나와의 국경을 이루며 흐른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인 우루과이는 인접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적 그늘 속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우루과이는 이 두 나라와 많은 문화·역사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몬테비데오 항과 부에노스아이레스 항은 두 나라의 대표적인 항구이자 관문이다. 대서양과 라플라타 강이 만나는 곳에 항구가 있다. 전에 왔을 때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페리호를 타고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가서 탐방했었다. 그 바다 같은 광활한 강에 또 온 것이다. 벅찬 감격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대서양 바다
몬테비데오 항구에서 하선하여 라플라타 강을 보고 조금 더 달려가니 대서양이 나온다. 대서양과 라플라타 강 물이 합해지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풍경을 본다. 경계선은 없지만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장엄한 비경이다. 대서양과 라플라타강이 만나는 곳에 항구가 있다. 우리는 그곳 항구에서 하선하였다. 우루과이의 대외무역은 대부분 몬테비데오의 항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주요수출품은 양모·육류·가죽 등이다. 시내에는 양모 가공시설과 육류 가공설비를 갖춘 냉동포장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 직물·, 구두, 비누, 성냥, 의류 공장 등이 시 전역에 있으며 포도주와 낙농제품도 생산된다. 우루과이는 바다와 큰 강이 접한 나라로 독특한 비경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주변 시가지
버스를 타고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를 지나 남미 최고의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로 간다. 2시간 소요된다. 세관 건물을 지나고 성벽이 나오면 그것은 스페인 유적이다. 우리 가이드는 우루과이 현지인 남자인데 이름은 윌리엄이다. 우리 버스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크루즈 배의 사람들이 함께 타고 간다. 그래서 현지 가이드가 영어로 말하면, 우리 한국 인솔자가 통역하여 말하는 것을 우리는 수신기를 통해 듣는다. 버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며 항구주변 시가지를 본다. 웅장한 유럽풍의 건물들이 보인다. 거리에는 벽화도 그려져 있다. 몬테비데오는 우루과이(Uruguay)의 수도다. 대다수 국민은 코카서스 인종에 속하는 스페인계와 이탈리아계이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이이고 인구의 3/5이 로마 가톨릭교도이다. 주로 서비스업·경공업·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광물과 에너지 자원 보유량은 한정되어 있다. 오늘 우루과이에 대하여 몬테비데오에 대하여 많이 보고 배울 것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독립광장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중심지인 독립광장을 지나간다. 주변은 한국의 명동과 같은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인구의 거의 반 정도가 수도인 몬테비데오 대도시권에 거주한다. 독립광장의 중앙에는 우루과이의 독립 영웅인 호세 아르티가스 장군의 기마 동상이 세워져 있다. 존경받는 인물이며 국가행사 때는 헌화를 한다. 광장 주변에는 옛 대통령 관저 및 고층 업무용 빌딩들, 5성급 호텔, 솔리스 극장 등이 있어 매우 웅장한 풍경이다. 근처에는 관광객을 위한 가죽제품이나 기념품점 등 쇼핑센터가 많이 있다. 우루과이는 포르투갈과 브라질에게 점령되었다가 1828년 독립했다. 1973년부터 군사정부가 지배했으나 1984년 국민투표가 실시된 후 1985년 민간정부가 다시 들어서게 되었다. 1973년부터 1985년까지는 억압적 군부통치기간이었다. 국민들의 삶에 어두웠다. 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루과이도 시민 민주정치가 회복된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경제적 쇠퇴와 파벌 싸움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역경들은 많은 우루과이인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이민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우루과이 작가 갈레아노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수출한다,라고 지적했다. 독립광장은 독립한 날을 기념하는 7.18도로와도 연결되고 있다. 많은 박물관과 역사유적 있는 몬테비데오에는 매년 세계각국에서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방문한다.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건설된 역사지구와 푼타델에스테 같은 해변 휴양지들도 관광명소로 유명하다. 우리는 지금 몬테비데오의 역사가 저장됭 독립광장을 지나 그 푼타델에스테 해변 휴양도시로 가고 있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7.18거리
독립광장을 거쳐서 7월 18일거리를 지나간다. 7월 18일의 우루과이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거리다. 이 거리를 통과해서 간다. 오른 쪽에 시청이 있다. 시청의 엘리베이터가 건물 밖에 있다. 가우초, 즉 양치기 나라여서 거리에 가우초 동상이 많다. 미켈란젤로 동상도 있다. 7.18거리는 1830년 헌법 공포일을 기념해 명명 된 이 거리다. 독립광장을 기점으로 몬테비데오를 관통한다. 몬테비데오의 명동으로도 불리는 거리다. 도로가 그리 넓진 않은데 주변에는 상점, 영화관이 집중되어 있고 쇼핑이나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다. 이 거리에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광장들도 이어지고 있어서 항상 사람들의 걸음이 고이는 곳이다. 이 거리의 한 블록 남쪽에는 상점 및 서민적 분위기의 식당 등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몬테비데오는 1830년에 우루과이의 수도가 되었다. 몬테비데오 인구는 148만명 정도이다. 국가 총 인구의 42.5%가 이 수도인 몬테비데오에 거주하고 있다. 1726년 에스파냐인이 성채를 건설 한 뒤 무역 기지로 번영하면서 우루과이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72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서 이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세운 도시였다. 초기에는 주로 스페인 수비대의 주둔지로 쓰였다. 식민시대 말기에 들어서면서 무역이 발달했고 이에 따라 성장한 몬테비데오의 상인층은 우루과이의 독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7~1830년 영국, 스페인,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브라질 군대에게 번갈아 점령당하면서 무역은 쇠퇴했고 인구는 줄어들었다. 1830년 우루과이는 독립했지만 정국은 안정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3국 사이의 복잡한 세력관계의 상호작용이 벌어졌다. 1843~1851년에 이르는 9년 동안 몬테비데오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연합군에 의해 포위되기도 했다. 그러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몬테비데오 수비대를 도와 몬테비데오는 포위된 동안 번성하여 라플라타 강의 주요항구가 되었다. 라플라타 강을 남쪽 경계로 한다. 규모면에서는 우루과이에서 가장 작지만 인구밀도가 가장 높고 중요한 주이다. 수도인 몬테비데오도 이곳에 있다. 몬테비데오시가 발전함에 따라 도시화되고 공업화되었다. 대서양 연안에는 새로운 휴양지가 개발되었다. 어느 국가든 지배 역사는 있음을 본다. 그러나 그 아픔을 딛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사는 우루과이의 오늘을 본다. 싱그러운 7.18거리는 한 동안 이어졌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해변근처의 숲이 많은 시가지
이곳은 부자 동네다. 바다 해변 근처라서 그렇다. 건물이 깨끗하다. 몬테비데오는 1726년 에스파냐인이 성채를 건설한 뒤 무역기지로서 번영하면서 우루과이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1830년 수도가 되었다. 박물관, 미술관이 많다. 우루과이의 고등교육기관은 수도인 몬테비데오에만 있다. 1894년에 세워진 대학과 1878년 세워진 산업교육 대학교가 있다. 1856년 개관한 솔리스 극장이 아직도 남아 있다. 미식축구 경기장이 있는 공원을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공원들과 동쪽으로 푼타델에스테 시까지 뻗어 있는 대서양 연안의 해변 등이 휴양지로 아름다운 나라다. 7.18거리를 지나 숲이 울창한 해변 근처의 시가지를 지나간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해변 시가지 풍경
해변의 시가지에는 높은 건물이 많다. 고층 아파트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노란 첨탑의 해양 박물관도 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계 백인이 인구의 90%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상대적으로 개방된 정책과 낮은 인구밀도는 우루과이의 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828년 독립국가가 된 이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강한 유대를 형성했던 우루과이는 20세기 내내 라틴 아메리카 내 진보국가로 발전했다. 특히 정치적 안정, 선진화된 복지정책, 상대적으로 두터운 중간계층 등이 주목할 만하다. 말발굽처럼 생긴 천연의 항구을 중심으로 발달한 구시가지가 오늘날까지 상업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시가지의 동쪽 해안을 낀 거리에는 주택과 아파트가 늘어서 있고 가로수가 잘 정비되어 있다. 남아메리카의 작은 파리 라고 하는 아름다운 도시다. 도심 가까이에서 만나는 바다가 참 신비롭고 아름답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해변 풍경
몬테비데오는 라플라타 강 어귀의 북부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도시다. 대서양과 접하며 바다 풍경이 비경이이다. 지금은 2월말인데 이곳은 여름 날씨로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즐긴다. 해변에는 사람들이 많다.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공동묘지
해변도로변에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는 잘 보이지 않지만 파란 잔디의 언덕 위로 사람이 보인다. 다이빙하다가 사망한 사람의 무덤도 있다고 한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한국이 기증한 동상
몬테비데오 시가지 외곽 해변도로에서 한국에서 한국식의 인사를 하는 커다란 남자 동상을 보았다. 한국에서 기증한 동상이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형상이다. 먼 나라 우루과이에서 내 조국의 동상으로부터 인사를 받는 느낌이 들어 훈훈했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아름다운 시가지
지금 몬테비데오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부자들과 유명인들이 거주하던 오래 된 집들이 있다. 부자였던 남편이 죽자 우루과이 아내가 기증한 땅이다. 저택들 사이로 숲이 울창하다. 호텔은 유명인들이 머물던 곳이다. 회색 호텔 건물이 웅장하다. 꼭 공공 건물 같다. 발코니 집도 있다. 옛날에는 발코니에서 강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건물들로 가려져 있다.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유칼립투스 나무군락
호주에서 들여온 유칼립투스 나무 군락이다. 나무가 환경에 강해서 들여온 것이란다. 호주에서 많이 보았던 나무를 이곳에서 만나니 신기했다. 이곳은 유칼립투스가 큰 군락을 이루고 있지만, 푼타델에스테 휴양지에 오가는 동안 곳곳에서 이런 나무 숲이 보였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공항
유럽과 미국을 직항하는 국제공항이다. 작지만 아름다운 공항이다. 도로변 야트막한 언덕 위로 아치형 하얀 건물이 아름다운 조형이다. 활주로에 비행기들이 있다.
* 우루과이 들녘 풍경
몬테비데오에서 몬테는 산, 비데오는 여섯번째라는 뜻이다. 포르투갈 사람이 바다를 통해 왔을 때, 언덕 같이 보이는 곳을 보고 '산을 봤다'고 외쳐서 유래된 지명이다. 100m가 가장 높은 곳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섯번째 산'이란 뜻도 있다. 우루과이는 한국의 여수 앞바다에서 땅을 파면 만난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사이에 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아온 나라다. 2010년~2015년에 통치한 호세보이카 대통령이 유명하다. 월급의 90%를 기증했다. 청렴, 검소했고 군정에서 민정으로 정치를 바꾼 사람이다. 14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 후 52%로 당선 되었다. 실업, 빈곤을 해결했다. 소통을 잘 한 대통령이다. 2015년 퇴임시 65%~70%의 지지를 유지했다. 인권옹호자이며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다. 1994년 한국과 수교를 맺은 국가다. 2007년 대통령이 처음 방문했다. 들녘 풍경을 보며 우루과이에 대하여 배우며 푼타델에스테로 간다. 이 나라 말로는 말도나도라고 한다. 도로변에 울창한 나무들이 많다. 유칼립투스 나무도 많다. 광활한 농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는다. 말들도 길가 목장에 모여 있다. 강은 맑은 물이 흐른다. 몬테비데오는 19개 주가 있다. 주의 경계선을 지금 넘어가고 있다. 우루과이는 가우초의 나라다. 목장이 많다. 양, 소, 말 등 동물이 많다. 레몬나무도 많다. 남부는 올리브를 생산한다. 몬테비데오에서 동쪽으로 150Km 왔다. 푼타델에스테는 이곳 말로 말도바도라고 부른다. 우루과이 총 인구는 약 350만이며, 국토의 총 면적은 한반도의 4/5 크기다. 전 국토의 85%가 경작 및 목축이 가능한 굴곡이 맋은 평야지대지만 실제 경작 면적은 8.8%에 불과하다. 우루과이의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지도상 커다란 이웃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는 우루과이는 매우 작아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덴마크보다 5배나 큰 국토를 가지고 있고 인구는 1/5 정도이다. 우리는 일본보다 더 넓은 경작지를 가졌고, 인구는 1/40 정도이다'라고 언급했다. 한반도와 비교해도 면적에 비하여 인구가 적은 편이다. 그래서일까. 광활한 들녘으로 보인다.
* 우루과이 들녘의 슈가로프산
멀리 산이 보인다. 걸어서만 오르는 낮은 슈가로프산이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보았던 그곳의 산 이름과 동일하다. 빵산이라고 한다. 산 위에 십자가가 있다. 조금 더 가자 산 곁으로 지나간다. 우루과이는 가장 높은 산이 500m다. 산이라해도 언덕 수준이다. 국토의 78%가 초지인 나라다. 들녘 가운데 우뚝 솟은 산 하나가 독특한 풍경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공항
푼타델에스테는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휴양도시다. 치안이 안전하다. 세계 부호들이 산다. 부호들은 공항에서 제트기를 타고 이동한다. 아담한 공항 활주로 곳곳에 크고 작은 비행기들이 있다. 한국과 우루과이 라운드를 이곳에서 협약을 맺었다. 푼테델에스테라는 지명이 어려워서 '우루과이 라운드'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가는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서 우루과이라운드가탄생되었다고 하니 참으로 역사적인 곳에 왔다. 보람되고 흐뭇한 여정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해변 하얀집
푼타델에스테 해안 절벽에 있는 하얀 성채 같은 건물은 카사푸에블로다. 스페인어로 대중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건축물이다. 1958년에 착공하여 완공된 이 건물은 우루과이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카를로스 파에스 빌라로가 직접 설계한 작업실 겸 자택이다. 박물관과 호텔로도 쓰이고 있다. 빌라로는 회화, 조각, 건축, 문학 등 다방면 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아온 인물로 우루과이 사람들에게는 우루과이 예술의 상징으로 여겨질 정도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서 하얀집을 조망했다. 하얀집은 직선은 없고 곡선으로만 건설한 집이다. 일몰이 비경인 집이다. 콘서트도 열린다. 현재는 박물관이다. 오후에는 시가지에 있는 미술관도 입장할 것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해변 풍경
이곳의 바다는 두 군데가 있다. 잔잔한 바다는 만사해수욕장이고, 대서양의 브라마 해변은 거친 바다로 해양스포츠를 하는 곳이다. 칠레 조각가가 세운 손가락 동상도 있다. 그 동상은 푼타델에스테의 랜드마크다. 우리는 시간 관계로 가 보지는 못하고 아쉽지만 그냥 간다. 돌고래 언덕을 지나서 간다. 청색 안내판 글씨는 하얀집을 설계한 조각가로 우루과이 건축가다. 바다 건너 푼타델에스테 시가지가 보인다. 비경이다. 크루즈 배도 들어와 있다. 여기는 반도지형이다. 바다가 아니고 라플라타 강이다. 섬도 있다. 생태계로 중요한 섬이다. 어떤 사람이 산림을 조림했다. 전쟁시에는 병원이나 군사기지로 사용하던 섬이다. 1940년대 말도나도 베이에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영국과 독일 함대가 격전을 벌였다. 독일 함대 슈페호가 침몰되었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돌고래 언덕을 지나서 시가지로 이동한다. 멀리 바다 끝에 슈가로프산, 빵산이 보인다. 들녘을 달릴 때 지나온 산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시가지 건물
푼타델에스테(Punta del Este)는 인구 1만 명의 도시다. 이곳은 우루과이 남동부 말도나도 주 남부의 도시이며 해변 휴양지다. 해변과 사구가 발달한 탄탄한 해안지대로 아름다운 해변이 유명하다. 사철 기후가 온난하며 관광산업이 발달하였고 해변 카지노, 호테르 골프장 등 다양한 관광시설이 있다. 사철 기후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온다. 지금은 여름이다. 겨울에도 별로 춥지 않다. 휴양도시로 멋진 호텔을 조성해 놓았다. 매년 영화제가 열리는 곳이다.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변에 큰 호텔이 잇는데 웨딩케익 모양이어서 웨딩케익 호텔로 불린다.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동쪽 150km지점에 있다. 푼타델에스테는 우루과이 남동부에 위치한 말도나도 주의 도시로 도시가 신설된 시기는 1907년이다. 도시 이름은 스페인어로 동쪽의 곶을 뜻한다. 대서양 연안과 접한 휴양 도시이며 많은 관광객들이 몰린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동쪽에 대서양 쪽으로 돌출한 반도에 있다. 본래 산들바람이 부는 여름에 이끌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에서 온 가족들과 해변가에 지은 스위스풍의 별장들이 도시의 특징을 이룬다. 우루과이 정부의 특별 배려로 완벽하다고 할 정도의 치안과 신변안정이 보장되어 전세계 부호와 명사들의 별장이 많은데 세계적인 휴양지가 되었다. 나중에 새 호텔과 카지노,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칸테그릴 컨트리 클럽이 생기면서 도시는 남아메리카의 주요 행락지가 되었다. 1961년의 아메리카 대륙간 경제·사회 회의와, 1967년의 아메리카 공화국 대통령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다.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킨 무역 협상인 우루과이 라운드가 개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시가지 건물들이 웅장하고 아름답다. 휴양도시의 면모와 역사적인 회의장소였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며 아름다운 시가지 건물들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현지 중식식당
푼타델에스테의 현지 레스토랑에서 중식을 한다. 해변가의 식당이다. 식당 이름이 '차르와 식당' 인데 차르와는 오래 전 이곳에 살았던 부족 이름이다. 식당 건물 안에는 에어컨도 선풍기도 없다. 매우 덥다. 식사를 하는데 온통 땀으로 젖는다. 상당히 더워서 고통스럽게 식사를 하였다. 식당에는 우리 버스 일행도 세계인들인데, 또 다른 세계 각국의 외국인들이 많다. 여기는 우루과이 최대의 관광 휴양지라서 그렇다. 몬테비데오로부터 브라질과의 국경에 이르는 라플라타 강변이다. 해산물 요리점이 유명하다. 몬테비데오로부터 버스로 약 2시간이 소요되는 곳이다. 시가지와 바다. 식당 등 곳곳이 외국관광객으로 매우 복잡한 도시다. 4월~11월간은 비수기다. 지금은 2월말로 성수기에 들어간다. 호텔이나 카지노, 레스토랑 등은 토, 일, 공휴일만 영업한다. 오늘은 2월 27일 월요일이다. 날씨가 더워서 좀 힘들지만 우루과이 최대의 관광도시에 왔다는 것이 참 기쁘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해수욕장 풍경
중식을 마치고 우리 부부는 해수욕장으로 갔다. 식당 건물 뒷편에 긴 목조 다리를 걸어가며 해수욕장 풍경을 조망했다. 사람도, 바다도, 풍경도 비경이다. 인구 1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인 푼타델에스테의 대표적인 관광자원은 해변이다. 대서양에 돌출한 좁은 곶에 있다. 만 안쪽으로는 훌륭한 해수욕장이다. 연중 평균기온 22℃로 기후가 쾌적하다. 예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나 몬테비데오에서 많은 휴양객이 모여들어 호텔, 별장 등이 많은 휴양 도시이다. 각 국의 셀러브리티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의 서부 만사해변은 라플라타강의 영향을 받아 물결이 잔잔하고 모래의 질이 좋다. 양도 풍부하여 바다의 풍광이 절경이다. 여러 해수욕장이 있으며 사시사철 관광객이 온다. 도시 동부의 브리바 해변은 대서양의 영향으로 파도가 높고 물살이 거칠어 요트, 파도타기 등 수상 레포츠의 명소다. 점심식사 후 우리 부부는 해변으로 가서 비경을 조망하였다.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아름답다. 시간상 손가락 동상이 있는 곳에는 가지 못한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시가지 풍경
푼타 델에스테(Punta del Este) 식당에서 중식을 하고 시가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루과이 남동부 말도나도 주 남부의 도시이며 해변 휴양지로 수도인 몬테비데오 동쪽 150km지점에 있다.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 동쪽에 대서양 쪽으로 돌출한 반도에 있다. 해변가에 지은 스위스풍의 별장들이 도시의 특징을 이룬다. 호텔과 카지노,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칸테그릴 컨트리 클럽이 생기면서 도시는 남아메리카의 주요 행락지가 되었다. 아름다운 꽃들이 도시를 수놓고 있어서 더욱 환상적인 풍경이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미술관
푼타델에스테의 랄리 미술관도 관람할 것이다. 남미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푼타델에스테를 찾는 사람들은 꼭 들리는 명소다.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더욱 유명한 박물관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운영한다. 작품을 중시한다. 입장료가 없다. 해설사도 없다. 대신 문을 닫는 날이 많다. 랄리 뮤지엄은 이탈리아 금융가 집안의 랄리 재단에서 세웠다. 우루과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두 군데, 스페인, 독일에도 미술관을 지었다. 세계에 다섯 개의 미술관이 있다. 이곳 미술관에는 남미 작가를 우선하여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그림들이 모두 독특하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미술관 야외 조각작품들
랄리는 우루과이 조각가다. 정원에 그의 검은 돌 조각상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사방은 고운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고, 잔디 정원 곳곳에는 검은 돌로 조각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주로 사람들의 특이한 형상의 동작들을 조각해 놓았다.
* 우루과이 푼타델에스테 시가지 부자동네
미곳 미술관 근처에는 부자들이 산다. 자존심 관계로 누가 사는지는 공개되지 않아 아무도 모른다. 울창한 나무들이 동네를 감싸고 있다. 집들이 그리 큰 것은 아닌데 조경이 매우 아름답다.
* 우루과이 들녘 포도밭과 슈가로프산 풍경
오전에 푼타델에스테로 갈 때 보았던 슈가로프산을 또 만났다. 들녘에 오롯하게 솟은 산이다. 그리고 그 산자락 아래 포도밭 농장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들녘에서 시장출하용 채소농장, 포도원, 목장, 양계장, 상업용 원예원 등에서 나는 생산물을 몬테비데오 수도에 공급한다. 도로변에 있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잘 조망하였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시가지 진입
몬테비데오 시가지에 들어왔다. 곳곳에 CASA라는 단어가 건물에서 보인다. 이것은 집이라는 뜻의 단어다. 공립병원도 있다. 올림픽 경기장도 있고 시민공원도 있다. 이제 시내를 지나서 크루즈 배가 있는 항구로 간다. 어제 파도가 높아서 1시간 늦게 기항하여 일정이 바빴다. 거기에 더하여 오늘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힘들었다. 150Km의 거리인 푼타델에스테까지 왕복 300Km를 갔다 온 것이다. 그러나 지난번 우루과이 여행에서는 몬테비데오를 주로 봤지만 이번 여행에서 우리 부부는 멀리 휴영도시 푼타델에스테까지 다녀왔으니 뜻깊은 여정이다. 오가며 왕복 4시간 동안 우루과이의 순수한 영토를 본 것도 큰 보람이다.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구 출항
우리가 배에 승선하자마자 6시경 몬테비데오 항구를 출항한다. 뷔페식당에 가서 과일 중심으로 석식을 했다. 이제 아르헨티나만 탐방하며 크루즈 배에서 하선해야 한다. 그날이 내일 모레다. 그래서 1차로 짐을 싸 놓았다. 먼 나라의 여정이고, 오랜 기간의 여정이어서 짐이 많다. 몬테비데오 항구를 출항한다. 배가 항구를 떠날 때의 풍경은 언제나 비경을 선사한다. 몬테비데오도 마찬가지다. 아기자기한 시가지와 바다가 절창을 이룬다. 전에 우리 부부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왔을 때 보았던 두바이 호텔 모양의 건물과 해변 조망언덕과 그리고 하늘에 수놓은 하얀 구름이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아쉬움에 오랜 시간 동안 선실 발코니에서 바라보았다.
2017년 2월 28일 화요일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항구 기항
아침 7시에 모닝콜, 8시에 조식을 했다. 오전 8시에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기항한다. 기항하는 풍경이 장관이다. 배가 입항한 곳은 바다가 아니고 라플라타 강이다. 라플라타강에서 라플라타의 뜻은 '은'이란 뜻으로 은의 강이다. 이과수에서 세 개의 강이 모여 흐르는 강이다. ‘남미의 파리’라는 별명에 걸맞게 매우 아름다운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관통하는 라플라타 강의 하구에 위치하며, 광활한 평원인 팜파스에 자리하여 해발고도는 25m로 낮다. 오늘이 가항지 관광은 마지막 날이다. 내일은 하선하여 비행기로 아르헨티나 이과수 공항으로 간다. 오늘 예상 기온이 25~33도 더운 날씨다. 브에노스아이레스 이곳 항구는 배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게이트로 이동한다. 브에노스 아이레스 시내 로 이동하여 관광한다. 대통령궁, 대성당, 7월 9일의 대로, 5월의 광장, 시청, 국립은행, 국회의사당 (차창 관광), 탱고를 잉태한 항구였던 보카 지구등을 탐방할 것이다. 배에서 제공하는 버스로 나가서 우리 한국팀만 대절버스로 갈아 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리오델 라플라타 부왕령의 수도였던 곳이다.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관통하는 라플라타 강의 하구에 위치하며, 광활한 평원인 팜파스에 자리하여 해발고도는 25m로 낮다. 고온 다습한 아열대 기후로 여름 평균 기온은 23~25°C, 겨울 평균은 10°C 정도로 영하권은 아니지만 강풍을 동반하여 체감 온도는 낮다. 우리 부부는 아르헨티나에도 두 번째로 왔다. 전에 남미 육로여행으로 탐방했었다. 이번에도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워갈 것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와 영국시계탑
아르헨티나는 한국의 28배 크기다. 인구는 4700만명이다. 브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는 한국의 5배 크기로 1300만명이 거주한다. 대부분 소들이 사는 땅이다. 인구는 4700만명인데 소들은 5000만 마리 이상이다. 쇠고기 천국이란다. 독립되지 않고 통일된 나라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36년 창건되었으나, 인디오의 공격을 받아 1541년까지 방치되다, 1580년 재건되었다. 18세기 식민지 수도가 되면서부터 크게 발전하여, 1810년 이후 독립 전쟁때에는 요새가 되어 독립쟁취에 중요핚 역할을 하였다. 주민은 주로 이탈리아계와 에스파냐계 이민의 자손이다. 1536년 스페인 귀족 출신이 최초로 정착하여 도시 건설을 시도했으나, 식량 부족과 선주민 차루아족의 침입으로 거주민이 흩어졌다가, 1580년 재건되었다. 식민지 시대 라플라타 강 하구의 주요 무역항으로 성장했으며, 특히 1776년 스페인 왕실의 식민 정부인 리오델라플라타 부왕령의수도가 되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와 칠레 영토 일부를 다스렸다. 1816년 독립 후 브에노스아이레스주의 주도였다가, 1880년 아르헨티나의 수도가 되었다. 브에노스아이레스주에 귀속된 도시가 아니며, 독립된 연방 특별구라는 별도 지위를 가진다. 백인이 90%의 다수를 차지하고, 6%는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이며, 아시아인과 흑인이 2%, 선주민 비율은 다른 라틴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2%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이탈리아,스페인을 선두로 독일, 폴란드를 포함한 유럽국가들에서 유입된 이민자들의 후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엽까지 급성장을 이룬 시기와 두 차례의세계 대전은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유럽인을 이주시켰다. 국교는 카톨릭이지만,상대적으로 실행 비율은 높지 않으며,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들도 18%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라플라타 강을 끼고 있어 식민지 시대에 무역항으로 개발되었으며, 라틴아메리카 동북부 물류의 허브 지역이다. 아르헨티나 총 생산량의 4분의1 규모의경제력을 가진다. 1880~1914년까지 농축산업의 발전과 수송 및 냉동 기술의 발전으로 비약적인 경제성장을이루었는데, 노동력 부족으로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이 시기에 도시는 농축산물의 수출항이자 이민자들의 관문이었다. 20세기 중반부터 산업의 국유화와 노동자 권익 신장을외친 페론정권과 1980년대까지 계속된 군부 독재로 성장세가 둔화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주요 산업은 거의 수도에 몰려 있으며, 육류, 어류, 곡류 등 식품 가공업과 금속세공업, 자동차 조립업, 원유정제업, 인쇄업, 석유, 종이화학제품을 생산하는 대도시이다. 시가지에 아름다운 구조의 주황색과 하얀 색상의 시계탑이 보인다. 저 시계탑은 영국에서 세워준 탑이다. 이 도시에는 영국과 친할 때 지어준 건물이 세개 있다. 이 부근은 강이었는데 매립해서 도시를 조성했다. 강은 오른편으로 밀려났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투어를 시작한다. 오전에 북부의 국립대학, 묘지, 서점을 탐방하고 오후엔 보카지구 등 남부를 탐방한다. 먼 남미의 국가 아르헨티나 여정이 시작되고 가슴은 벌써 벅차오른다.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많이 담아갈 것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대학 법대건물
유엔 공원 바로 곁에 있는 웅장한 건물의 대학이다. 노벨수상자를 배출한 대학이다. 학비가 무료다. 프란시스코 교황은 이 나라 사람이다. 체게바라는 이 나라 브에노스아이레스 의대출신이다. 세계적인 축구선수 메시도 이 나라 사람이다. 그 동안 잘 몰랐던 인물과 대학에 대하여 배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유엔공원
세계에서 가장 큰 공원이다. 파란 잔디와 울창한 나무 공원에 아르헨티나의 국화인 꽃 모양으로 조각하여 세워놓은 조각품이 매우 아름답다. 꽃잎은 모두 6장이다. 1장의 무게가 3500Kg으로 엄청난 무게다. 꽃 조각작품 앞에는 큰 연못이 있다. 아르헨티나 국화는 분홍색 꽃인데 이곳 공원에도 나무에 피어 있다. 큰 나무에 분홍색 꽃이 많이 피어 있다. 꽃나무는 분홍색 꽃이 피는 것과 노랑색 꽃이 피는 것 두 종류가 있는데 노랑은 뚱뚱해진 꽃이다. 나누어준 설명서에서 1번에 그 설명이 잇다. 현지 교포 가이드가 아르헨티나 특산품인 마떼 차를 가지고 와서 시음했다. 카페인이 많다고, 카페인이 안 받는 사람은 반 컵만 마시라고 하여, 나는 조금 마셨다. 주변에 가장 유명한 호텔도 있다. 한국의 노*현 대통령이 머문 곳이란다. 주변이 모두 부자 동네다. 그러나 명품이 잘 안 팔리는 나라다. 가장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아래와 주변에는 사람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나무를 만지면 복이 온다하여 우리 부부도 만져보았다. 재미있는 체험도 하고 유엔공원은 참으로 크고 우람한 풍경의 고원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스페인식 성당
브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형 도시다. 스페인식 성당은 브에노스아이레스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웅장한 성당이다. 아르헨티나가 전쟁이 아니었으면 잘 살았을 것이다. 포클랜드 섬이 아르헨티나 소유였는데 지금은 영국령이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와 브라질은 서로 사이가 안 좋다. 스페인 지배 당시의 소슬한 유적인데 지금에 와서는 값진 역사유적이 되었다. 내부도 공개하고 사진도 허락하여 잘 보고 담아왔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유럽 향기가 배인 아름다운 성당이다. 스페인식 성당을 보고 묘지로 간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 국립묘지
레골레타Recoleta 국립 묘지는 입구의 문에서부터 어느 웅장한 역사유적지 같은 분위기다. 이 묘지는 아르헨티나에서 1926년~1936년에 분양했다. 묘지 1평당 가격이 5억이었다. 묘지는 최소한 2평은 사용해야 묘가 된다. 국가에서 돈을 벌기 위해 조성하기 시작했다. 1800년 중후반에 대통령이 나무를 심고 가꾼 도시다. 공원이 22개가 연결된다. 공원에는 조각상이 많다. 레골레타 묘지에는 역대 대통령13명과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으며 각종조각과 전통적인 장식 혹은 종교적인 장식으로 꾸며져 있는 고급 공동납골당이다. 70개의 묘지가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페론 전 대통령의 부인인 에바페론(에비타)이 잠들어 있는 묘에는 늘 조문객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에바페론 생가에 불을 지른 사람 ARAMBURU상도 있다. 묘지에는 4600개의 가문이 들어와 있다. 그 중에서 1300개의 묘지는 가문에서 관리가 소홀하여 국가에서 기본관리만 한다. 에바 페론 묘가 있다. 시장묘도 있다. 빨레르모 지역은 땅의 1/3이 공원이다. 부자동네다. 공동묘지는 1만 3천 평이다. 우리는 오늘 반만 본다. 돔지붕에 예수 승천하는 상이 조각된 가장 부자 묘지도 보았다. 검은 색 조각상은 아르헨티나 중요입지를 차지하는데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 대통령묘(Julio Argentino Roca. 1843 ~ 1914)다. 묘지의 지하에 관이 층층이 쌓여 있다. 교육가 대통령 묘지도 오벨리스크와 함께 있다. UN공원을 조성한 사람이다. 교육의무화도 실행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아우른 대통령으로 존경 받았다. 슬픈 소녀상도 있다. 3일장 된 유래가 서려있다. 이곳 공동 묘지에 지금은 들어오고 싶어도 못들어온다. 웅장한 이곳 공동묘지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묘지라고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조각공원이다. 죽어서도 이런 곳에 묻힌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의 고운 햇살이 내려 더욱 아름다운 정경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레골레타 국립묘지 에바페론 무덤
에바 페론을 포함한 정치인, 예술가, 대통령 등이 안장되어 있는 레콜라타 묘지다. 세계의 사람들의 걸음을 이곳 묘지로 이끄는 것은 묘지의 독특한 웅장함도 있지만 에바페론의 무덤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에바 페론(1919~1952)은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1895.10.8 ~ 1974)의 부인이다. 1919년 남부 대지주의 사생아로 태어나서 1946.06 제29대 아르헨티나 대통령 영부인이 되었다. 빈민층의 딸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의 인생은 연극 같다. 퍼스트레이디가 된 후 남편과 함께 노동자와 서민들을 위해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내놓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성녀'로 존경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정권유지를 위한 선심성 정책으로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평가와 한편으로는 아르헨티나 몰락의 단초라는 너무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Don't cry for me Argentina.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나는 그대를 떠나지 않아요) 란 가사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유명한 노래는 미국 브로드웨이의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78년 초연된 뮤지컬 [에비타]에서 여주인공 에비타가 부르는 노래이다. 뮤지컬 [에비타]의 여주인공은 바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이다. 에비타는 에바 페론의 애칭이다. 머나먼 남미의 퍼스트레이디를 미국의 공연계의 거장이 주목한 이유는 그녀가 한 시기를 가장 극적으로 살아냈던 여인이며 그 인생 역정 또한 남다르기 때문이었다. 에바 페론은 시골 빈민층의 사생아로 태어나 삶의 온갖 역경을 다 겪었지만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퍼스트레이디가 된 인물이다. 선동가로서, 정치가로서, 봉사자로서,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성녀’라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또한 너무나 극적이게도 30대 초반 나이에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그녀는 또한 팜파스의 사생아이기도 하다.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의 드넓은 초원지대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인근의 농장 주인의 정부였다. 에바 페론은 어머니와 농장 주인 사이에서 태어난 5명의 아이 중 4번째 사생아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식들을 법적인 딸로 인정하지 않았다. 출생부터 불우했으며 아버지에게서 버림 받은 에바 페론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현실을 잊기 위해 어린 에바 페론은 대중잡지의 기사를 읽으며 도시로 나가 화려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하는 연극과 연주회 등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 나이 15살 무렵 에바 페론은 가출했다. 고향 팜파스의 흙먼지를 떨치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왔다.
그녀는 남자들 품을 전전하는 삼류배우였다. 가진 것 없는 시골의 소녀가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에바 페론은 어린 나이부터 성공을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는 잔혹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녀 에바 페론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것,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몸’이었다. 에바 페론은 자기의 앞길을 이끌어 줄 것 같아 보이는 남자와 스스럼없이 관계를 가졌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실속이 없으면 가차없이 떠났다. 에바 페론은 여러 명의 남자 품을 전전하며 삼류극단의 삼류 배우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살기 위해 여러 남자의 품을 떠도는 비애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귀엽고 순진하게 꾸미고 싶어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에비타라고 불렀다. 에비타는 꼬마 에바라는 뜻이다. 성공을 향한 불물을 가리지 않은 노력 덕분에, 그녀는 삼류 연극배우부터 시작해 영화배우, 라디오 성우 등으로 차츰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리고 1940년경 마침내 에바 페론은 어느 정도 유명한 연예인으로 그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후안 데에고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지 10년 만인 1944년 에바 페론은 큰 행운을 잡았다. 당대 실력자인 ‘통일 장교단’의 리더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이다. 1944년 산후안에서 6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당시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 마련에 앞장섰다. 이때 이 구호기금 운동에 연예인 자격으로 동참한 것이 에바 페론이었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이용가치를 본능적으로 감지하였다. 첫 번째 부인을 잃고 독신으로 살던 후안 페론은 에바 페론의 젊음과 미모에 빠져들었으며, 에바 페론은 후안 페론이 자신에게 가져다 줄 부와 명예를 한 순간에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함께 살기 시작했다. 당시 후안 페론은 페론주의라는 새로운 기치를 걸고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페론주의는 산업의 국유화, 외국 자본의 축출, 노동자 위주의 사회 정책 등 국가 사회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페론주의의 기치는 참신해 보였지만 당시의 아르헨티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군부에 의지하는 성격이 강해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많았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이 동거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후안 페론에게는 정치적 시련이 닥쳤다. 반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획득한 후 후안 페론을 구금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뜻밖에도 기회가 되었다. 에바 페론의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이 이를 계기로 한 순간에 발현된 것이다. 단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연예인으로만 생각되었던 에바 페론에게는 뜻밖에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힘이 있었다. 정치적이며 선동적이고 남을 설득할 줄 아는 그녀의 재능이 애인 후안 페론의 석방운동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팜파스의 가난한 딸이라는 그녀의 출생과 비루한 인생 역정이 빈민과 노동자들에게 동질감을 안겨주었다. 에바 페론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연설은 민중의 마음을 움직였다. 에바 페론은 구금된 후안 페론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추겨 총파업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업 10일 만에 후안 페론은 노동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전격 석방되었다. 에바 페론의 도움으로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후안 페론은 이런 선물을 가져다 준 에바 페론에 감사하듯이 1945년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포퓰리즘을 이용한 사람이다. 포플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에 아부하여 인기 몰이를 하지만 실은 대중을 기만하고 인기를 정치적인 입지 확보에만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포퓰리즘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들로 평가되고 있다. 194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의 선거 유세 자리에 동행하며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비타라는 애칭이 전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에바 페론의 인기 덕에 후안 페론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대통령이 된 후안 페론은 대중이 좋아할 만한 정책을 내세우며 정권유지를 도모했다. 후안 페론의 뒤에는 에바 페론이 있었다. 더욱 정교화 된 '페론주의' 하에서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의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획기적인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개혁들은 일부는 좋은 평가를 내릴만 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은 대중의 인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일 뿐 실질적으로 나라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후안 페론 정권은 겉으로는 노동자와 여성 등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 혜택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는 허세와 기만의 정권이었다. 외면적으로는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인기의 이면에는 페론 부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세력에 대한 끊임없는 탄압이 감춰져 있었다. 비판세력의 제거로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경직되었고 후안 페론과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 속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한편, 에바 페론은 아르헨티나 전역을 다니며 복지사업과 봉사활동을 벌이며 성녀를 자처하였지만 실제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그것은 페론 정권이 내건 정책들이 기본적인 사회개혁 아니라 대중을 사탕발림으로 마비시킨 후 기존의 지배구조는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적 인기를 더욱 더 이끌어내기 위해 에바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과 자신의 우상화 작업을 시작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고 기리는 글짓기를 하도록 하였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 페론 본인의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페론 정권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하향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그러나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비판세력을 제거한 아르헨티나에서 나라 돈을 자기 것처럼 마음대로 썼다. 에바 페론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 횡령한 많은 돈이 스위스 은행의 비밀계좌에 입금되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는서로 상반되게 엇갈린다. 에바 페론은 9년 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였다. 그녀는 1952년 34세의 나이로 척수 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대중들은 에바 페론의 죽음을 광적으로 애도했다. 한달 간의 장례식은 국민들이 바치는 꽃으로 뒤덮혔다. 에바 페론의 죽음 이후 그간에 숨겨왔던 페론 정권의 문제점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무리한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끊임없는 인플레이션과 실업, 노동자의 동요 등등 에바 페론이라는 방패를 잃어버린 후안 페론은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결국 군부마저도 후안 페론에게 등을 돌려 후안 페론은 군부 쿠데타로 쫓겨나 해외로 망명하였다. 후안 페론의 망명으로 에바 페론의 시신도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한때는 페론주의의 부활을 염려한 아르헨티나 군부에 의해 에바 페론의 시신이 탈취되어 이탈리아에 숨겨지기도 하였다. 에바 페론은 죽었고 그녀가 실제적으로 남긴 혜택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생전에 그녀를 좋아했던 수많은 노동자, 여성, 빈민들은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했다. 후안 페론은 죽은 아내 에바 페론의 후광을 등에 업고 십 수년 만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1973년 다시금 대통령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때 에바 페론의 시신도 아르헨티나로 다시 돌아왔다. 에바 페론의 후광은 후안 페론이 재혼한 이사벨 페론에게까지 미쳐 이사벨 페론은 남편 후안 페론이 대통령이 된 후 10개월 만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죽은 뒤에도 그 인기 탓에 편히 눈을 감지 못하던 에바 페론의 시신은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죽은 지 24년 만의 일이었다. 에바 페론, 혹은 에비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에바 페론의 인생은 공연 작품거리가 될 만큼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 이후 아르헨티나와 남미의 여러 나라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페론주의와 포퓰리즘의 그늘에 놓여 있어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러한 엇갈린 평판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많은 대중들은 아직도 에바 페론을 그리워하고 그녀를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시골 농가에는 아직도 에바 페론의 초상화가 걸린 집이 종종 있다고 하니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에바 페론의 묘는 그의 가문 가족의 묘지에 있다. 웅장한 철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깆는 못한다. 전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묘지가 있는 골목도 좁아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하다가 보곤 한다. 왜 이런 유명한 사람의 묘지가 이렇게 좁은 골목에 있냐고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예전에 그녀의 친정 가문에서 그녀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줄 모르고 사 놓은 것이라서 그렇단다. 그녀를 애도하는 사람들이 대문 앞에 꽃도 갖다 놓고, 철대문에 종이로 만든 작품을 부착해 놓기도 했다. 한 시대의 많은 사랑을 받고 간 여인, 젊은 나이에 사망한 비운의 여인, 그러나 엇갈린 평가 속에서 고통도 받았던 여인, 지금은 모두 잠들었으나 그녀를 애도하는 물결이 아직도 식지 않고 찾아와 외롭지 않은 영혼의 여인이다. 소슬한 묘지의 철대문 앞에서 한 동안 머물며 여러 가지 상념들이 회오리침을 느꼈다. 그래도 불쌍한 여인이라고, 나라를 위해 고생한 여인이라고 정리가 되며 발걸음을 돌렸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가장 아름다운 서점
브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에서 만난 아테네오 서점이다. 입구의 문 위에 조각상도 있다. 대리석 건축으로 웅장하고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술적 향기가 배인 구조다. 내부 구조가 유럽형이다. 책을 배치한 책장도 곳곳에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1,2층 구조인데 천정이 하나로 뚫려 있어 서점의 실내가 매우 높아 시원한 분위기다. 1층 안쪽에는 무대와 같은 장소가 있다. 이곳 오페라 무대는 차와 커피도 마시며 책을 보는 곳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앉아 책을 보기도 한다.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둥근 원형 구조로 서가를 설치하여 책을 꽂아 놓았다. 다양한 분야의 무척 많은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서점은 가르시아 가문이 인수하여 이탈리아 건축가 만쵸니가 건축했다. 1층에서 객석을 배경으로 사진 찍으면 비경이다. 2층에서 오페라 무대를 배경으로 사진 찍으면 더욱 비경이다. 서점 안을 돌아보며 잠시나마 지적인 휴식시간을 가졌다.
* 아르헨티나 전통음식 아사도 중식
아르헨티나 전통식당에서 전통요리인 아사도로 중식을 했다. 브라질에서는 슈라스코다. 브라질과 동일하게 고기를 구워서 갖다가 잘라 주는 고기 요리다. 소가 사람보다 많다는 나라이니 이 나라에서 쇠고기 요리는 그리 비싸지 않은 음식이다. 다음 여행지인 브라질에 가서도 이런 고기요리를 먹을 것이란다. 쇠고기를 불에 구어서 먹는 요리다. 전통음식 아사도를 한 덩이씩 가져다 먹었다. 우리나라 곱창 대부분이 이 나라에서 가져간 것이란다. 가우초들은 뼈에 붙은 고기만 구워 먹었는데 그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 아사도 요리란다. 그때 마떼차를 마신단다. 식당은 매우 큰 규모다. 쇠고기 외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음식이 많다. 과일까지 맛있게 먹었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잔디공원
중식을 하고 이동한다. 푸른 나무 시이로 회색 교육청 건물이 지나간다. 지붕에 국기가 걸려있다. 아르헨티나에 한인이 2만 5천 명이 거주한다. 브라질인은 4만 명이다. 한인들이 많다. 농업 이민으로 왔다가 지금은 의류업을 한다. 대부분 성공하여 잘 산다. 배추, 무, 파 등이 재배되는 나라다. 영국이 지어준 웅장한 주황색 수도국 건물이 지나간다. 한가오룬 시가지의 잔디공원 주변에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많다. 싱그러운 잔디공원이다. 저런 공원에서 아이들은 추구를 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며 지나왔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보카지구
탱고의 발상지 보카지구에 왔다. 보카는 항구의 입이란 뜻이다. 유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항구에 들어와서 일찍부터 보헤미안이나 예술가들이 모이는 이국적 정서가 넘치는 곳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탈리아인이 70~80%로 많다. 탱고는 선원들이 창녀와 추던 춤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 동화가 그때 나온 것이다. 탱고가 프랑스로 건너 가서 발전했다. 거리 곳곳에서 또는 카페 안에서 탱고를 추는 남녀들이 있다. 끝날듯, 안 끝나는 춤이다. 2초 후에 박수를 쳐야한다. 남자가 여자를 잘 이끌어 나가야 춤을 잘 추는 사람이다. 여자가 얼마나 잘 따라 가느냐도 중요하다. 19세기 후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항구인 라보카 지구의 선술집에서 이민자들이 추던 춤에서 탱고가 탄생되었다. 20세기 음악가, 문학가, 무용가들에 의해 재현되어 예술로 성장했다. ‘탱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카를로스 가르델에 의해 음악 장르로 발전하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결혼 적령기의 남자 수에 비해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남자가 월등히 많은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큰 돈벌이가 되는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탱고가 매음굴에서 발생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에 아르헨티나 중상류층은 탱고를 철저히 외면하였다. 또한 당시 아르헨티나는 여자 수가 적은 상태에서 각종 성범죄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여성을 연상시키는 남자들의 화려한 원색의 옷 차림새, 그리고 몸을 좌우로 흔드는 걸음걸이 등 남자들끼리의 탱고 경쟁은 동성애 상대를 찾기 위한 비밀스러운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기념품 상가 많다. 이곳에서 미술가를 많이 탄생시켰다. 그림을 전시하고 판매한다. 이탈리아인들이 많다. 자기 집을 마크로 배를 칠한 염료로 집을 단장한다. 보카지구는 형형색색 색칠이 유명한 곳이다. 원색으로 페인트칠 되어있는 주택들과, 미술관, 기념품 상점, 화랑들이 아름답다. 이러한 이민자들로 북적거렸던 곳 중의 하나가 보카다. 보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쪽에 위치한 항구이다. 옛날에는 조선소가 있었고 외국의 대형선박들이 정박하는 항구로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요한 경제권을 형성하였던 곳이다. 그래서 보카는 많은 이민자들의 일자리가 있는 곳이자 그들의 생활 터전이기도 했다. 보카를 소개하는 책에는 어김없이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으로 벽을 칠한 집들이 나온다. 보카 항구에 있던 조선소에서 배에 칠하다 남은 페인트로 칠한 집들이다. 지금은 항구로서의 기능은 모두 다른 외항에 빼앗겼다. 지저분한 항구에 떠 있는 유람선만이 남아 과거의 항구를 나타낼 뿐이다. 벽화에서나 과거의 보카를 상상하게 해준다. 맨 처음 이탈리아인들이 페인트 칠한 집을 보았다. 색상이 참 예쁘다. 위에 모자를 쓴 남자가 있다. 도로의 코너 건물 2층 난간에 1948년에 세운 교황 동상이 있다. 하얀 색으로 가슴에는 십자가도 있다. 식당 앞 유럽형 고층건물도 아름답다. 보카 지구의 입구 건물 위에 세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사진의 왼쪽이 마라도나, 가운데가 에바페론, 오른쪽이 탱고의 아버지 카를로스다. 그 세 개의 인형은 보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었다. 지난날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머나먼 낯선 땅 아르헨티나로 왔다. 그들은 타국에서의 애환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해 친한 친구들과 모여 그들이 고향에서 즐겼던 운동인 축구를 했다. 그리고 항구에 있는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날의 정서가 아직도 흐르는 곳이 이곳 보카다. 아르헨티나의 국화인 분홍색 꽃나무도 보았다. 철길도 있다. 이곳 철길에서 오른쪽에 우리를 기다리는 버스가 있고, 우리는 3시까지 승차해야 해서 여기 철길이 있는 곳으로 온 것이다. 보카에서 동서남북으로 4개의 기차, 전철역이 있다. 이 근처에 마라도나가 축구하던 잔디구장도 있다. 전에 왔을 때는 보았다. 축구가 있는 날은 이 근처 교통이 통제된다. 경기가 있는 날은 살벌하다. 마라도나가 19세 때 보카 주니어스 구단에 입단했다. 약 100년 전에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5명의 젊은 친구들이 모여 창단한 축구 클럽이 보카 주니어스이다. 보카 주니어스 축구 선수들의 유니폼은 노란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당시 보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스웨덴 국적의 선박에 걸려 있던 스웨덴 국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 제1의 축구 클럽인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의 연고지다. 1시간 정도 자유시간으로 보카지구의 탱고카페, 상가, 골목, 그림, 에바 동상 가게 등을 돌아보았다. 에베페론 가게에서는 벨트가 많았고, 탱고를 추는 남녀의 조각상도 많았다. 우리 부부는 아이쇼핑만 했다. 19세기 아르헨티나 이주민들의 설움과 애환을 씻어 냈던 애절한 리듬. 이민의 역사가 곧 아르헨티나의 역사이기도 한 아르헨티나를 이해하려는 측면에서 탱고는 매우 중요한 연결 고리이다. 보카지구에서 잠시나마 옛 향수에 젖으며 탱고의 낭만에 젖으며 함께 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배우며 행복했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보카항구
한때는 이민자들이 들어오던 보카 항구가 지금은 버려진 항구다. 누추하고 지저분한 항구에 버려진 배도 많다. 이것도 예술이라고 그냥 둔단다. 큰고 웅장한 범선 모양의 배도 멈춰 있다. 세계일주를 세번이나 한 남자의 배다. 여인의 다리도 있다. 탱고를 추는 여인의 구두 모양으로 건설한 다리다. 여인의 다리를 건너면 도로명이 모두 여인의 이름이란다. 비싼 고층 아파트들이 많은데 70평형이 한화로 약 100억 정도란다. 한국인은 주재원만 거주한단다. 여인의 다리를 왔다갔다 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 조형물을 남성 성기로 생각하면서 여인의 다리를 걷는단다. 여인의 다리는 여자가 다리를 쭉 뻗은 모양 같기도 하다. 또한 여자 구두를 거꾸로 놓은 듯한 모양 같기도 하다. 자유시간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길거리에서 춤꾼이 함께 사진찍기을 요구하기도 한다. 8불이란다. 기념품도 이곳은 싼 편이다. 축구에 열광하는 나라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 마라도나는 그의 이름을 붙인 마라도나 다리가 생길 정도로 축구 영웅이다. 그는 영국을 이겼다. 지금 사는 부인이 네 번째란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마라도나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존경한단다. 보카지구에서 보카 항구를 따라 도로를 달려온 이곳에서 하차하여 여러 가지 풍경을 보고 담아간다. 애련한 그리움과 낭만이 깃든 정경으로 저장된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변두리 시가지
보카는 가난한 동네다. 빈민가를 통과하여 지나간다. 빈민가의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하며 산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든 저런 풍경은 있으리라. 보카항구 주변의 허름한 빈민가 변두리 시가지가 내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우리 나라에도 저런 서러움이 서린 곳이 분명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세계 곳곳의 모든 어려운 분들이 어떤 곳에서든 행복하길 빌었다. 가난하다해도 마음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가지면 그래도 훈훈한 인정의 삶이 되리라 믿는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도심 시가지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심 시가지를 지난간다. 이 나라 부자들은 삼성, 엘지 제품을 사용한다. 부품을 한국에서 사다가 조립해서 파는데 비싸다. 이 나라는 금, 토, 일, 월, 화요일 5일은 연휴다. 오늘은 화요일로 연휴일이다. 주말엔 카니발이 열린다. 구형아파트는 주차장이 없다. 월 15만원 주차료 내면 밖에 주차할 수 있다. 수도요금이 평수대로 매겨진다. 1만원에서 1민 5천원 정도다. 이 나라는 게을러서 오후 2시경이나 중식을 한다. 카톨릭대학교는 사립이라 교육비가 비싸다. 두번째로 유명한 대학이다. 네덜란드 왕비가 탄생한 대학이다. 그녀는 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재자다. 독재자의 딸이다. 결혼식 때 독자재인 장인은 불참하기로 하고 결혼했다. 나무 사이로 검은 색 사다리꽃 지붕의 국방부 건물도 지나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보며 아르헨티나에 대하여 공부했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대통령궁
대통령궁은 5월 광장에 있다. 분홍색 고운 색상의 대통령궁이다. 에바 페론이 10만 군중을 마주했던 대통령 궁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통령 궁은 이곳 말로 카사 로사다(Casa Rosada)다. 대통령이 사는 분홍빛 집이다. 카사 로사다는 스페인 어로 ‘분홍빛 집’이라는 뜻이다. 대통령궁이 잇는 곳은 위치상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도심의 한가운데 광장 곁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스페인 로코코 양식으로 19세기 말에 건축되었다. 원래는 영토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던 곳이다. 1873년 건설을 시작한 후 94년 동안 지어졌다. 처음에는 대통령 관저가 아닌 영해를 지키는 요새 역할을 하기 위해 지어졌다. 착공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사르미엔토 때부터 건물을 분홍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분홍빛 저택'이라는 뜻의 카사로사다라는 명칭으로 불려왔다. 이곳은 무기는 장착되어 있지 않지만 곳곳에 레이더 센서가 달려 있고 옥상에는 헬리포트가 있어 지금도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정면에서는 2층 건물이지만, 뒤편으로 돌아가 보면 4층 건물이다. 항구 근처의 비스듬한 언덕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카사 로사다 박물관 지하에는 라플라타 강을 향한 포와 포문이 있다. 카사 로사다 박물관 또는 정부 박물관은 건물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카사로사다는 대통령궁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함은 물론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 마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에비타’의 주요 무대일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로코코 건축 양식을 간직한 분홍색 건물이다. ‘분홍빛 저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궁 앞의 깃대에는 아르헨티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대통령궁 근위대에 의해 하루 2회 이루어지는 국기 게양식과 강하식도 거행된다. 국기 옆에는 아르헨티나 독립 영웅인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옥상에서 헬리코터 비행기가 뜨고 내릴수 있다니 충분한 요새였고, 지금은 대통령궁으로서의 사명을 충분히 하는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겉으로 봐서는 그저 아름다운 색상의 대통령궁인데 그렇게 깊은 역사와 그렇게 심오한 장치가 설계되었다니 놀라웠다. 저녁 석양에 더운 눈부신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5월 광장 바로 곁에 브에노스아이레스의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edral Metropolitana de Buenos Aires)이 있다. 이 성당은 아르헨티나 종교의 중심지로 약 450년 전에 건설되었다. 내부에는 남미의 독립 영웅인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 안장되어 있다. 대성당 외벽에는 산마르틴 장군을 기리기 위해 횃불이 꺼지지 않고 타고 있다. 대통령 궁과도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1700년대 중반부터 약 70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27년에 완성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성당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네오 클래식 양식의 성당이다. 정면에 보이는 12개의 기둥이 웅장하다. 12사도를 의미한다. 2013년 3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가 제266대 교황으로 취임하기 전 미사를 집전했던 곳기도 하다 그후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을 찾는 관광객의 수가 증가하였다. 외부 벽면 윗쪽에 빨간 불꽃이 활활 타오른다. 빨간 불꽃은 완공 이후 지금까지 산마르틴을 기리며 한번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것이란다. 대성당의 내부에는 남아메리카 독립해방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General Jos de San Martin)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장미석을 심장에 박았다. 유명한 보석이다. 성당 안으로 입장하며 먼저 남미의 독립 영웅인 산마르틴 유해가 관에 담겨 묘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 갔다. 독립군의 제복을 입은 호위병들이 산 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잠들어 있는 방을 지키고 있다. 더 관 앞으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산마르틴은 남미 해방의 영웅로 추앙받는 장군이다, 예배당에서 앉아도 성스러운 분위기에 젖어도 보고, 곳곳을 둘러보고 조용한 걸음으로 나왔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산마르틴 묘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에는 호세 산마르틴(1778~1850)의 묘가 있어서 세계인의 걸음이 더욱 고이는 곳이다ㅣ 우리도 역시 산마르틴 묘를 먼저 보았다. 남미 해방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산마르틴 장군의 유해가 성당 안에 안치 되어 있고 호위병 두 명이 지키고 있다. 산마르틴은 남미의 영웅이다. 아르헨티나인으로 남아메리카 제국의 독립 운동 지도자다. 독립 혁명군을 지휘하여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켰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장군이며 페루의 정치가이다. 호세 데 산마르틴은 당시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남아메리카 남부 지역의 독립 운동을 전개하여 성공시켰다. 그는 어머니를 시골에 두고 7살의 어린 나이로 에스파냐 마드리드의 귀족 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때부터 그는 칠레 출신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친구가 된다. 1808년, 에스파냐군에 입대하여 프랑스와 싸웠으며, 전투 등에 참가하면서 남아메리카 독립 지지자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1812년 그는 영국에서 브에노스아이레스로 와서 남아메리카합중국, 오늘날의 아르헨티나에 투신했다. 1813년 산 로렌소 전투 이후 1814년 북부군을 지휘하기도 하면서 그는 리마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 계획에는 쿠요에서 처음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칠레를 해방시켜 바다로 리마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1817년 그는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로 갔다. 그리고 에스파냐 군대를 물리치고 1819년 칠레의 독립과, 1820년 페루의 독립을 성공시켰다. 산마르틴은 1822년 이곳 부왕령의 수도를 부분적으로 장악했으며, 페루의 보호자가 된다. 페루의 독립 선언은 공식적으로 1821년에 이루어졌다. 1822년 페루를 완전 해방하는 과업을 맡는다. 산마르틴은 갑작스레 페루를 떠나 군대 지휘관직을 그만두고 정계와 군대에서 물러났다. 그는 1824년 프랑스로 갔다. 7월 22일 회담의 내막은 이후 역사가들의 논쟁거리가 된다. 또 한때 라틴아메리카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고국에서 중앙 집권론자의 비난을 받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가난한 생활을 하던 끝에 볼로뉴에서 사망하였다. 시몬 볼리바르와 함께 에스파냐로부터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 영웅이자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로 높이 추앙받고 있다. 그를 기린 해방자 산마르틴 장군 훈장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훈장이다. 성당 안에 유해가 안치된 곳에서 한 동안 머물며 그의 생애를 조명해보았다. 이 나라 후손들은 그를 추앙하며 그의 영혼을 받들고 있다. 호위병 남자 두 사람등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는데 탐방객들과 기념사진도 함께 찍어준다. 그로 인하여 남미가 해방되었다니 성당과 묘역이 한 정경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
이곳 5월 광장Plaza de Mayo 변에는 대통령궁전과 대성당을 비롯하여 좌측으로 하얀 총독부 건물도 있고, 우측으로 중앙은행 경제부 건물 등 많은 주요 기관의 건물들이 있다. 7월9일대로와도 가까워서 조금만 가면 바로 연결된다. 골목길 끝에 7월9일대로의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대통령 궁 앞에 위치한 드넓은 광장이 바로 5월 광장이다. 브에노스아이레스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스페인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르헨티나 립의 첫걸음이 된 18세기초의 5월혁명을 비롯하여 파란만장한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어 왔다. 현재도 이곳에서는 대통령 취임식 등 다양한 정치적 주요 행사가 열린다. 사로사다 대통령궁 앞에 펼쳐진 5월 광장은 브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이자 휴식처이다. 810년 5월 25일 이 광장에서는 자치 정부 설치와 독립 선언이 있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독립의 기쁨에 환호했던 5월 혁명이 있었다. 요새 광장, 총리 광장 등의 옛 이름을 거쳐 이 혁명 이후로 5월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5월 혁명의 1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5월의 탑(Piramide de Mayo)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다. 탑 속에는 아르헨티나 각지에서 수집한 상징적인 흙이 탑 속에 보관되어 있다. 이 광장은 우리나라의 서울 시청과 같은 역할을 한다. 국가의 큰 행사, 정치 집회 등이 있을 때마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는 머리에 하얀 수건을 둘러맨 어머니들을 광장에 모인다. 1982년,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을 일으켰다. 포클랜드는 이보다 앞서 탐방하고 왔다. 그곳에서도 아픈 역사를 기념하는 기념탑과 희생당한 사람들의 넋을 기리는 현장을 보았다. 스페인 지배 역사의 슬픈 산물이다. 그때 민중을 철저하게 탄압하였고, 3만여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렇게 행방불명된 청년들의 어머니들이 하얀 두건을 쓰고 매주 목요일 3시에서 4시 사이에 ‘실종된 자신들의 자식과 손자를 찾아 달라고’ 집회를 열어 오고 있다. 그 집회 장소가 바로 여기 5월 광장이다. 뼈아픈 역사가 전시되는 곳이다.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의 인권 탄압을 수십 년간의 침묵 시위로 세계에 고발한 ‘5월 광장의 어머니들(Madres de Plaza Mayo)’이다. 그들은 1977년 4월 13일, 국가에 의해 강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아기 기저귀 천으로 만든 흰 수건을 쓰고 원을 그리며 광장을 돌았다. 어머니회의 일원이 납치, 실종되는 와중에도 30년간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바닥에는 흰 수건을 의미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광장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를 좌우한 중요한 공간이기도 하다. 1810년 5월에 이루어진 독립 선언은 바로 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현재와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5월 광장은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집회 장소로 활용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광장 곳곳에는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현수막 등이 걸려 있다. 아르헨티나 독립운동 당시의 영웅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의 기마상이 있으며 옆에는 대통령궁의 근위병 교대식이 매일 열린다. 이제 모두 잠든 5월 광장에는 비둘기도 날아와 시민들과 함께 평화를 선사한다. 해는 석양에 기울고 바쁜 일정으로 더 머물지 못하고 떠남이 이쉬웠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5월광장 주변 건물들
5월 광장을 중심으로 해서 그 주변에는 대통령궁인 카사 로사다와 450년 전에 건설된 대성당을 비롯한 주요 기관들이 많이 있다. 이 광장은 브에노스아이레스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옛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를 위한 총독부·입법부·경제부로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있다. 현재는 지멘스 등 외국계 회사와 은행들이 광장 주변으로 들어서면서 5월의 광장은 아르헨티나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파리’라는 별명처럼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며, 노벨문학상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출신지로 유명하다. 시내 중심부인센트로 지역이 관광의 기점이다. 오페라 극장인 '콜론 극장' 및 ‘분홍색 집’이라는 뜻의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와 그 앞의 ‘5월의 광장’은 시민의 휴식처이자공원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과 콜로니얼 시대의 건축물 및 금융 기관들이 몰려있다. 5월혁명 박물관,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박물관 까빌도 (Cabildo)도 있다.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중심 광장인 5월의 광장에 면해 있는 대성당의 배치 구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이 정복자가 그려 놓은 도시 배치 그대로이다. 옛날 도면의 0번은 정복자가 살던 숙소로 지금의 카사 로사다이고, 1번은 대광장인 5월의 광장, 2번은 대성당이다. 옛날에 총독부였던 51번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의 의회인 카빌도가 있고, 36번에는 성 마르틴 병원이 있다. 이 광장을 중심으로 구시가지 지역은 대부분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다. 도로가 격자형으로 발달해 있는 것이다. 도시의 중심에 광장이 있고 도로가 격자형으로 발달해 있다는 것은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즉,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바로 유럽 인들, 특히 에스파냐 인들이다.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은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는 모두 그 유산으로 이러한 도시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 도시들은 에스파냐의 도시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에스파냐 인들은 성문화된 법령에 따라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에스파냐와 유럽의 도시 계획 전통은 중세까지, 멀리는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중앙의 대광장이 초점이 되는 격자형 가로를 계획하고 거기에 맞춰 도시를 건설하였다. 대광장 주변에는 종교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뿐만 아니라 에스파냐의 식민 통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물을 세웠다. 즉, 대성당과 시청 등의 관공서들이 들어서게 했다. 브에노스아이레스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남미 크루즈를 하며 거쳐온 나라들 칠레, 페루 등 남미 국가들의 주요 광장 주변에는 성당과 대통령궁과 주요기관등 이런 형태릐 건물들이 있었다. 이것이 스페인 정복의 소산물이라니 소슬한 역사를 배워간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
오늘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브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를 탐방했다. 중식도 브에노스아이레스 중신 시가지에서 아르헨티나 전통식사 아사도를 먹었다. 버스로 이동 중, 또는 중식식당 근처의 시가지를 살펴보았다. 구간마다 다르지만 건물들이 육중한 느낌이 든다. 아파트도 중세풍으로 지어져 낭만이 흐른다. 아마도 스페인 지배 영향인 듯하다. 외곽지대로 가면 그곳은 아르헨티나의 독특한 향수가 흐르기도 한다.모두 아름다운 시가지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7월9일 대로 오벨리스크
브에노스아이레스의 7월9일 대로는 세계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다. 도로의 이름은 아르헨티나의 독립 기념일인 1816년 7월 9일을 의미한다. 1911년에 건설되었다. 도로 중앙의 분기점에 높이 67.5m의 오벨리스크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이 오벨리스크 주변의 도로가 가장 폭이 넓다. 34차선까지 있는 도로로 폭이 143m다. 버스로 대로를 가로질러 건너서 지나가며 보았다. 차선이 엄창나게 많아 건너가는데 아득하다. 우리의 버스가 지나가는 이곳에는 22차선까지 있다. 1911년에 레굴라타 공동묘지의 문을 설계한 시장이 건설했다. 그때는 욕을 많이 먹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잘 했다고 한다. 만든 가장 긴 도로를 지나가며 보았다. 이 도로는 엄창나게 넓다. 파란불 보며 10Km 거리를 신호을 안 받고 갈 수 있는 도로다. 일정 속도를 유지해야 가능하다. 거주는 1~2시간 소요되는 거리에서 한다. 국화인 노란 색 뚱뚱한 나무도 있다. 7월9일대로 주변의 버스정류장은 한국의 이*박 대통령 때 보고 설치한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인식이 좋다. 드라마, 케이팝 등을 선호한다. 국기에서 파란 색은 하늘, 하얀색은 구름, 그리고 태양을 상징한다. 도로의 다리 밑에 죽어간 영혼들이 있다. 포클랜드 전쟁 때 참여를 반대한 청소년들이다. 전에 왔을 때는 이 도로를 먼 발치에서만 바라보았는데 오늘은 이 도로를 관통하며 지나감에 자세히 볼 수 있어서 보람되고 흐뭇했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 생각하는 사람 동상
브에노스아이레스 국회의사당Parliament House은 5월 광장에서 시작되는 5월 대도로의 서쪽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어서 5월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7월9일 대로를 건너서 이곳에 금새 왔다. 그 건물도 웅장하지만 건물 앞에 있는 조각상이 매우 독특하여서 시선을 먼저 끌어 들인다. 국회의사당 문 앞에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진품이 세워져 있다. 세계 13개 진품 중 하나다. 생각을 많이 하고 정치를 하라는 뜻이란다. 국회의사당 건물은 그레코로만 양식의 석조 건물로 1863년에 지어졌다. 화려한 외형 건축물 구조와 함께 원통 기둥 위에 세워진 웅장한 녹색의 돔이 특징이다. 원통 기둥 위에 세워진 웅장한 녹색의 돔은 높이가 무려 96m나 된다. 정면에는 국회의사당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이 광장에는 노예 폐지를 찬양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이밖에도 분수, 테라스 등이 갖추어져 있다. 드넓은 잔디 광장과 웅장한 건물과 조각상이 매우 숙연한 분위기이고, 오늘날의 모든 국가의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자가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시가지 공원
브에노스아이레스의 시가지에는 크고 작은 공원이 많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곳곳에서 공원을 만났다. 산마르틴 공원도 지나간다. 그곳에는 산마르틴 동상이 있다. 나무 사이에 하얀 동상도 있다. 울창한 숲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드넓은 국가의 매력이 그대로 배여 있는 풍경이다.
*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항구 크루즈 배 재승선
이제 기항지 관광은 이곳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아쉽고 그리운 시간들을 접고 오후 5시까지 배에 재승선했다. 이 배는 오늘 떠나지 않고 이곳 항구에서 정박하며 오버나잇한다. 내일은 오전 7시에 미팅한다. 아르헨티나 공항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오늘 정찬은 오픈식이다. 자유의 좌석에서 자유롭게 식사한다. 룸에 들어와서 라플라타강의 브에노스아이레스 항구 풍경을 눈과 가슴에 담았다. 먼 훗날, 오늘이 그리울 것이다. 그땐 내 카페에서 사진과 글을 보며 행복한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 크루즈 배 대극장 마지막 공연-탱고
우리 부부는 뷔페식당에서 석식을 하고 공연을 관람했다. 오늘은 크루즈 배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다. 탱고 공연으로 꼭 봐야할 아르헨티나에서의 선물이다. 그리고 우리들을 먼 항로를 따라 태우고 다녔던 고마운 크루즈 배는 오늘밤 이곳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정박하여 오버나잇 한다. 오후 7시, 9시, 2회 공연하는데 우리 부부는 7시 공연을 보았다. 아르헨티나의 전통 춤 탱고는 애련한 남녀의 사람이 담긴 춤으로 가슴을 훈훈하게 해준다. 공연 관람을 마치고 방으로 와서 짐을 모두 챙겼다. 내일은 오전 6시 50분까지 짐을 챙겨가지고 5층으로 모여 미팅하여 하선하기 때문이다. 크루즈 배에서 자는 마지막 밤의 여정이다. 배에서 20여일 가까이 우리들을 위해 수고해주신 선장과 승무원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그리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