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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여행 [J여동] 원문보기 글쓴이: 방랑객
고베 여행 1 - 고베에 이진칸과 이쿠타진자에 소라쿠엔과 지진박물관을 보다!
2024년 9월 21일 손주등 7명 가족은 오사카 텐노지 동남쪽에 있는 호스텔에서 아침밥을 지어
먹고는 렌터카에 올라 텐노지역을 지나 서쪽으로 달려 바다를 건너 고베로 갑니다.
그베는 과거 2번이나 여행을 다녀온 곳인데.... 첫 번째 갔을 때 북쪽 산자락에
위치한 외국인들의 거주지인 이진칸을 본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한신 희메지(姬路) 역에서 산요덴테쓰 혼센 山陽電鐵本線 (산양 전철본선)을 타고 1시간
만에 고베 神戶(신호) 한신 산노미야(阪神 三ノ宮驛) 역에 내려서
택시를 타니 언덕을 올라 키타노 이진칸(北野異人館) 에 내리니 요금은 900엔이 나옵니다.
광장에 있는 관광안내소에서 주변 지도를 챙기고는 밖으로 나와 또이레 トイレ( 화장실,
手洗い, 御手洗 ) 에 들르는데.... 유럽에서는 화장실을 찾기도 어렵고,
유료에다가 냄새도 심하니 호텔이나 음식점에서 나올때 반드시 화장실을 다녀옵니다.
일본에서는 도처에 화장실이 널렸는데다가 무료이고, 청결하여 이런 걱정은 덜어
배낭 여행자에게는 너무 좋은데..... 언덕으로 높이가 져서 극장
처럼 계단이 되어 있는 소광장은 작은 공연을 하기에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악기를 들고 있는 자그만 브론즈 동상들이 많이 있어 사진 찍기에는 그저 그만인데 멀리 앞바다
까지 전망이 좋은데.... 그래서인지 이 동네에는 외국인 저택이 지도에만도 13~4 군데가
나와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집인 풍향계가 지붕 꼭대기에 달린 가자미도리노칸 에
들어가서 보니 참으로서양풍인데..... 독일인이 호화판으로 해놓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때 스피커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매우 가파른 50 계단을 올라 신사에 들러니....
우리 마눌은 너무나도 가파른 계단에 질렸는지 올라올 엄두를 못내는데,
신사는 규모가 작지만 갖출것은 빠짐 없이 골고루 갖추었고 차라리 깜찍하기 까지 합니다.
자그만 무대를 만들어 젊은이들이 제20회 외국인거리 마쓰리를 하고 있는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적어 좀 썰렁하니, 이건 일반 일본인들이 참여하는 정식 축제는 아니고
이곳 이진칸을 찾는 관광객들이 중심인데, 외국인들에게는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가 본데.... 걸어 내려와 부두가 있는 해변 메리켄 파크로 갔던 기억이 납니다.
두 번때는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바로 고베로 갔는데, 난카이선이나 JR 기차를 타려면
윗층 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우린 버스를 타니 밖으로 나와 6번 정류소에서
고베 산노미야행 버스를 타는데 티켓은 자판기에서 1950엔 현금으로 구매합니다.
버스는 오사카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바다를 가로질러 해변에 고가 자동차 전용
도로를 달려서 1시간 10분 만에 고베 산노미야 神戸三宮(신호삼궁)
에 도착하니 호텔에 배낭을 넣고는 걸어서 이쿠타진자 生前神社 에 들렀습니다.
이쿠타진자 生前神社(생전신사) 는 고베 3대 신사로 연애와 결혼으로도 유명해 전통 혼례를
올리는 곳으로... 일본에 기독교도는 1% 인데 신도(神道)는 80% 국민이 믿으니
신앙을 뛰어넘어 "일본인들의 생활 자체" 라고 할수 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 신사를
찾아 신의 축복 을 청하고... 사람이 죽으면 절에 가서 장례식을 치르면서 극락왕생 을 빕니다.
1월 1일 아침에는 하츠모우데(初詣) 라고 해서 일본인들의 70% 이상이 신사를 찾아 신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며 축복을 비는데.... 고대에는 신사와 사찰이 거의 한 몸이니 절 안에 신사가 있고 신사안에
절이 있었으니 신불습합(神佛習合)인데 1868년 메이지유신후 일본은 강제로 신사와 절을 분리 시켰습니다.
일본인은 모든 것에 정령이 서려있다는 애니미즘 과 특정 자연물이나 상징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 토테미즘
등 민속신앙을 가졌으니 산과 바위 섬등을 숭배했는데 일본 최초의 신사 라는 나라현 사쿠라이시 오미와
신사 (大神神社) 는 신사 뒤에 있는 미와산(三輪山) 자체를 신체 로 모시며 후지산 등을 모시는 신사도 많습니다.
일본 고유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역사서는 712년 오노 야스마로 에 의해 편찬된 고사기(古事記) 와 720년
에 왕실에서 편찬한 일본서기(日本書紀) 가 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고사기는 1283년에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 에 그리고 일본서기는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에 비유할수 있는 오래된 역사서 입니다.
고사기(古事記)의 저자 오노 야스마로 (太安万侶)는 660년생으로 1879년 나라시 고노세정
동굴에서 무덤이 발견 되었는데.... 최인호 씨는 그가 663년 3만 5천명의 왜군이
백제 부흥군을 돕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가 백마강(금강) 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으로 대패하고 철수할 때 왜국으로 따라간 백제 유민의 아들 이라고 말했습니다.
차밭을 일구던 농민 다케니시 히데오에 의해 동굴에서 발견된 동(銅)으로 된 묘지명에 “좌경(左京) 4조(條) 4방
(坊) 종4위하(從四位下) 훈5등(勳五等) 오노 아손(太朝臣) 야스마로(安萬侶) 가 계해년(癸亥年: 723년) 7월
6일에 졸(卒) 하였다. 요로(養老) 7년(723) 12월 15일 을사(乙巳)”라 적혀있으니 전설이 사실로 판명 됐습니다.
고지키(古事記 고사기) 는 천지 창조에서 부터 33대 스이코천황(일왕) 까지 그리고 니혼시키(日本書紀
일본서기) 는 창세 신화로 부터 41대 지토천황(일왕) 까지를 기록했는데..... 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혼재하고 과장된 부분이 많지만 후대인 서기 500년 이후의 사실들은 믿을만한 기록 이 많습니다.
고지키에 일본의 건국신화 를 보면... 태초에 세상은 흐물흐물한 달걀 같은 상태였는데
음과 양이 나뉘면서 가볍고 깨끗한 것은 올라가 하늘 이 되고 무겁고 부정한
것은 가라앉아 땅 이 되었으며 하늘 다카마가하나(高天原) 에는 다섯 신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후 이자나기신 과 이자나미신 이 나오는데... 긴 창을 휘저어 거품을 일으켜 땅을 굳게 만들어 일본 열도 여러
섬을 만들었으며 그후에도 여럿을 만드니, 이자나미신은 불의 신 카구츠치 를 낳다가 데어서 죽어 황천
으로 가니 염려한 이자나기신이 쫓아오는지라 썩어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뿌리치니 악신이 태어납니다.
이자나기신이 눈을 씼으며 아마테라스신 (天照大神)이 태어나고 코를 씼으니 스사노오신(素戔嗚) 이
태어나는데 스사노오가 아마테라스여신의 벼논을 짓밟자 수치심을 느낀
아마테라스가 동굴에 숨으니 사람들이 동굴에 모여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도하며 노래(마쓰리?)하고 춤췄다는데 벼농사 시작 과 일식 에 대한 기억이 신화로 나타난 것이라!
스사노오는 바다를 건너 신라땅 으로 가서는 꼬리가 여덟개 달린 뱀을 물리치고 꼬리에서
검을 가져온게 초치검(쿠사나기) 이라는데... 오늘날 일왕의 즉위식에 필요한 3종의
신기인 곡옥과 거울 외에 “검”을 말하니... 현 아키히토 일왕이 아들 나루히토의
즉위식을 위해 이세 신사에서 바로 저 신기(?) 들을 꺼내 오는게 매스컴에서 보도 되었지요?
일본은 760년 와카(和歌) 4,536수를 모은 만요슈(萬葉集)등에 이두 가 쓰이다가 9세기에 한자를
모방한 "가나" 가 완성되어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같은 소설에 쓰입니다. 한국도
신라시대에 이두와 향찰로 향가(鄕歌) 가 씌여지니 일본의 4,536수 에 비하면
적지만 1075년 균여전에 11수, 1,283년 삼국유사에 14수 가 전해지며 1446년 한글이 제정됩니다.
이쿠타진자 신사 의 배전과 본전을 보고는 옆으로 돌아가니 숲과 연못 이 있는데
이 신사 주변에는 특이하게도 芸能上達・水の神 (연예 향상 물의신)
의 시저도 신사 (市杵島神社) 와 도하 신사 등 다른 신사도 함께 있다고 합니다.
본전을 보노라니 단체 촬영을 하는 사람들 중에 기모노를 입은 서양인 등 외국인들이 많이
보이고 연못을 구경하니 신관을 따라 줄지어 가는 사람들을 보는데 절에 템플 스테이
가 있듯이... 신사에도 비슷한 "일본문화 체험 프로그램" 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이쿠타진자 신사에서 행하는 제례는 홈페이지에서 보니 曲水の宴 (곡수노연) 과 春献茶祭(춘헌다제) 등
5개 제례가 나오는데, 그 외에 고베(神戸)시 의 이름인 神戸(신호) 도 이 신사에서 유래 했다고 하는데,
대동 원년(서기 806년) 에 조정에서 이 신사에 간베 かんべ 44호를 내려주어 신사를 모시고 돌보게
했는데..... "간베 かんべ" 가 "곤베 こんべ" 가 되어 현재의 "고베 神戸" 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하철로 현청(県庁) けんちょう 앞 역에 내려서 위로 올라와 언덕길을 조금 걸어
가니 바로 고베 소라쿠엔 相樂園(상락원) 이 보이는데... 도로를 건너
입장권을 사는데 300엔 이지만 간사이 쓰루패스를 보이니 10%를 할인해 줍니다.
소라쿠엔 相樂園(상락원) 은 전 고베 시장 고데라 켄키치의 아버지인 고데라 타이지로
의 저택 에 만들어진 정원 으로 메이지 시대인 1885년에 축조를
시작해서는 30년 후인 메이지시대 말기인 1905년경에야 완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쇼와시대인 1941년에 소유권이 고베시로 이전되어서는 중국 고서 ‘易經(역경)’ 의“서로 기뻐하며 함께 즐긴다”
라는 소절을 따서 소라쿠엔 相樂園(상락원) 이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일반에 공개 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헤이세이 시대 2006년 1월 26일 일본 등록기념물(명승지) 로 등록되었으며 6천평의 부지안에
정원은 지천회유식(地泉回遊式) 일본 정원으로 이요청석과 단바석등 고급의 돌을
사용한 징검돌이나 돌다리를 건너며 물의 흐름이나 폭포등 심산유곡의 풍경을 볼수 있습니다.
옛날 고데라 저택 시절 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로 만든 중후한 정문 을 들어
서는데 정문의 기와에는 고데라가의 가문인 이오리목코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덕수궁 석조전 처럼 유럽풍 건축인 구 고데라 마굿간(중요 문화재) 은 고데라 구키치가
가와이 고조에게 설계를 의뢰해 1910년경에 건축했다는데 원형의 옥탑, 급경사의
지붕과 지붕창 및 지붕장식이 다양하고 마차를 넣는 차고에 마방 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영국인 무역상 핫삼 이 메이지시대인 1902년경 이진칸 외국인 거리에 지어 생활했다는 핫삼
주택 은 목조2층 기와 우진각 지붕으로 일본식과 서양식이 절충된 건축물로 고베시가
기증을 받아 1963년 이축했으며 1874년에 이진칸에 설치되었던 가스등 2개 도 가져왔습니다.
후나야카타 는 에도시대 희메지 번주가 하천을 유람할때 사용했던 배 “가와고자부네”
의 집모양(가카타) 부분을 떼어 육지로 옮긴 것인데..... 만들어진
시기는 1700년경 이라고 하며 1980년에 보존을 위해 이곳으로 이축 했다고 합니다.
히노끼 껍질 목조 2츨 회피 맞배지붕 건축물 로 쇼기칸, 조단칸, 쓰기칸으로 3구분되며
나무는 춘경칠과 흑옻칠 로 나뉘고 서까래 부분은 금박을 입힌 쇠장석 을 사용
했으니 모양이 화려하고 섬세한데 일본에 현존하는 유일한 가와고자부네 라고 합니다.
정원에 등롱은 6각형인 가스가등롱 에 유키미등롱과 야마등롱등 27가지가 있으며
4각형 불을 켜는 곳이 주사위 눈 처럼 되어있는 것도 있고
그 외 초즈바치 는 몸을 깨끗이 하는 상징적인 것으로 쓰쿠바이 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300년전에 가고시마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소철원 은 암수 딴 그루로..... 암그루에는 주홍색 열매 가 열린
다는데 군집 식재된 소철에는 당시 고데라 저택을 소철원이라고 불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소철원 외에도 1567년에 아라키 무라시게가 하나쿠마성의 재난을 막기위해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으로 전해지는 큰 녹나무 는 장뇌성분이 포함된
수령이 긴 나무의 대표라고 하며 소나무 중에는 중국 북서부가 원산인 백송 도 있다고 합니다.
소라쿠엔은 사계절이 다 좋지만 그중에서 봄에 피는 철쭉 과 가을 국화와 단풍이 훌륭한
볼거리며 겨울 설경 도 멋있다는데 연못가 다실 유신테이 와 본관 은 미군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별채에 새로 지은 다실 간신테이 가 정원의 장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 소라쿠엔 은 지천회유식 일본 전통 정원 이니 연못에 놓인 다리와 정자 에
물속에 비친 잘 전지된 소나무 및 돌계단에 작은 폭포와 누운
큰 소나무와 백송에다가... 500년 된 녹나무 그리고 푸른색 바닥 돌 이 볼만합니다.
일본 3대 정원으로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金沢(금택) 시의 겐로쿠엔 兼六園(겸육원) 과 오카야마현
오카야마 岡山(강산)시의 고라쿠엔 後楽園 그리고 이바라기현 미토 水戶(수호)시의 가이라쿠엔
偕楽園(해락원)을 드는데 내가 둘러본 바로는 단연 가나자와의 겐로쿠엔 兼六園(겸육원) 이 으뜸입니다.
그외 직접 보았던 정원으로 교토시에 옛 오아(천황)이 살았던 궁궐인 교토고쇼(京都御所
경도어소) 와 히가시야마 동쪽에 쇼세이엔 (步成園 보성원) 에 나라의
일본식 정원 이스이엔 依水園(의수원) 과 요시키엔 吉城園(길성원) 에다가 비와
호숫가에 히코네성 4대 번주 이이 나오오키가 지은 겐큐엔 玄宮園(현궁원) 이 훌륭합니다.
그리고 교토에 도쿠가와씨의 궁전 니조성 (二条城) 정원과 절에 딸린 정원인 금각사와은각사,
료안지(竜安寺) 및 아모모리의 히로사키성의 정원 과 야마구치시의 오우치(大內)
씨사인 조에이지(常榮寺) 의 가레산수이 枯山水(고산수)식 셋슈테이
雪舟庭園 (상영사설주정원)도 볼만하며 그 외에도 절과 성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있습니다.
엣날일을 회상하는 새에 우리 레터카는 고베에 도착했기러 먼저 지진 박물관부터 보기로
하는데.... 지진 박물관의 이름은 阪神淡路大震災記念(판신담로대진재기념)
人と防災未來センタ-(인또방재미래 센타) 인도 동관과 서관 2개 빌딩에 들어 있습니다.
고베뿐만 아니라 오사카와 교토까지도 피해가 번졌기 때문에 한신- 아와지 대지진이라고도 하며 일본 지진
사상 제2차 세계 대전후 두번째로 강력했던 규모 7.3, 진도 7의 대지진이자 사망자 6,300여명, 총 피해액
1,970억 달러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큰 피해를 입힌 지진 중 하나 입니다.
이 지진으로 인해 잘 나가던 항구 고베는 일본에서도 최고의 부채를 안고 가는 도시로 몰락
했는데, 고베는 홍콩과 함께 동아시아 해운의 양대 허브항으로 군림하고 있었지만
시설 포화와 이용료 상승의 와중에 대지진까지 터지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고 허브항
의 지위를 한국의 부산항에 넘겨주었으니 부산항이 세계 3위 물동량의 항구로 성장하게 됩니다.
일본은 지진에 대한 철저한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니 위아래로
흔들리는 직하형 지진 특성상 진앙지가 도심에서 비교적 가까웠다는 점이었으니......
진앙지가 고베 남서쪽에 있는 아와지섬의 활성 단층이었고 아와지 섬의 단층과
고베의 단층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으며 고베는 400년 동안 지진이 없었습니다.
한신고속도로 고베선 고가가 옆으로 쓰러진 이유는 내진 기준이 강화되기 전의 구조물이었기 때문
이었는데, 때문에 고가도로를 지탱하는 기둥의 철근이 지면에서 1.5m 높이까지만 올라와 있었고
지진때 이 철근이 끝나는 부분이 부러지듯이 꺾여서 무너졌으며 1981년 6월 1일부터 시행된
'신내진기준'이 적용되어 지어진 고베 건물들은 지진당시 70% 이상이 경미 혹은 무피해로 끝났습니다.
'신내진기준' 적용 유무로 가장 대비되는 건물이 고베시청사 건물의 피해인데 1957년에 지어진 고베시청
구청사는 지진으로 6층 부분이 전체가 붕괴되어 내려앉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구청사 바로 옆 부지에
1989년 준공되어 1981년 '신내진기준' 을 적용받은 30층 고층빌딩인 신청사는 구조피해없이 멀쩡했습니다.
당시 간사이 지방은 재일 한국-조선인만 35만명에 달할 정도로 한국인 수가 많은 지역이었으며 특히 고베에는
8만 7천명의 동포가 살고 있었으니, 한국인 피해자도 많아 유학생, 재일동포 등이 100여명 이상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당해 한국 입장에서도 큰 사건 중 하나였고 언론에서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당시 사망자의 80% 인 5,000여명이 전통 목조주택에 깔려 사망했으며, 여기에 지진
발생 후 정전복구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명피해가 더욱 늘어났는데 화재로
인해 사망한 시체가 너무 많아 한 보따리에 60여명의 유골이 수습되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통 방식으로 지은 노후 재래식 목조주택과 달리 새로 지은 미국식 목조주택이나 복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 등은 무사한 등 피해 양상이 대조적이었으니, 철근 콘크리트 건축의 경우 철근과
콘크리트가 하나로 연결된 일체형 구조였기 때문에 건물이 분해되거나 붕괴되어 사람이
압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이는 부재간 연결철물의 사용이 많았던 미국식 목조주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못이나 철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장부에 홈을 파서 짜맞춤 방식으로 구성된 전통
가옥의 경우 큰 지진에 못이나 철물없이 연결된 부재가 분리되어 통째로 무너지거나
압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이 사건을 계기로 내진설계나 건축 기준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지진으로 고베항의 기반 시설이 무너지면서 환적 하물들이 대거 이탈하여 부산항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으니 횡재를 한 것인데...... 이 지진 이후 소니가
비상충전 기능이 있는 라디오인 ICF-B200 을 1995년에 발매했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지진 박물관을 보고 나와서는 고베 시내로 들어가서는 점심을 먹기 위해
딸이 구글 지도에서 검색했다는 일본 식당을 찾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