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imgcaption>ⓒ 발견 </rimgcaption> |
비가 온다
전깃줄 같은 비가 뒤에서 와 목을 조른다
폐 없는 밤, 너는 썰물이 되어 떠나고
나는 방파제에 홀로 앉아 독약 탄 음악을 마신다
술잔엔 한 방울 두 방울 비의 눈망울
죽어서 옆으로 누운 자의 눈엔
수직으로 서 있는 바다, 벼랑이 되어 서 있는 밤하늘
벼랑 끝 너의 울음처럼
수평의 거마줄에 걸려 파닥거리는 나비
-136쪽, 함기석 ‘수직선=수평선’ 몇 토막
시 전문 계간지 <발견>이 오래 품고 있던 껍질을 깨고 마침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이 계절의 시인’으로 함기석을, ‘주목할 만한 오늘의 시집’ 기획좌담에 신덕룡, 이숭원, 최영철, 황학주가 나선 2013 여름호가 그 1호다. 시가 스스로 찾아와 놀기도 하고, 시를 찾아가 묻기도 하면서 시란 길을 함께 걷는 시인으로서 반가움에 손부터 덥석 내밀고 싶지만 걱정도 앞선다.
계간 문예지를 내는 일, 그것도 계간 시 전문지를 내는 일은 스스로 가시밭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우리 문단에는 그동안 월간 혹은 계간, 무크라는 이름을 내건 수많은 문예지와 수많은 시 전문지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 맥을 그대로 잇고 있는 잡지는 그리 많지 않다. 원고료도 문제지만 책이 아예 팔리지 않아 발목에 족쇄를 채우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 물을 부어도 잘 고이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문예지가 안고 있는 아픈 현실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이들이 문인들이다. 이러한 슬픈 현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시인 황학주가 새로운 문예지, 그것도 수명이 짧다는 시 전문지를 덜컥 이 세상에 내놓고 말았으니 이를 어쩌랴.
그래. 기왕 총을 들었으니 시라는 총알로 삶과 이 세상이라는 표적을 정확하게 꿰뚫어 우리 시단을 북극성처럼 환하게 빛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돈도 되지 않는’ 시에 침을 칵 뱉더라도, 계간 시 전문지를 조선시대에서 갑자기 날아온 낡고 헤진 책쯤으로 여기더라도 어쩌겠는가.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신경림, 농무)이듯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도 우리 시인들이지 않은가.
“한국시단에 무슨 족적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 전혀 없다”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해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볼러보네
애인의 꿈 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이, 숨 막히는 삶
-15쪽, 시인 강은교 ‘바리연가, 막다른 골목’ 모두
“시인이 시를 쓰면 발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시를 꼭 시집으로 묶거나 잡지에 발표해야 되는 것은 아니리라. 시의 보편적인 효용성이나 기능과는 별도로 시는 독자를 위해 쓰는 것만은 아니고,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시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시의 첫 번째 독자는 시인 자신일 텐데, 세상에 이 한 명의 독자만 있다 해도 시를 쓴 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6쪽, ‘머리말’ 몇 토막
“이 잡지가 한국시단에 무슨 족적을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 같은 건 전혀 없다. 좋은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을 조금이나마 응원하고자 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시 전문 계간지 <발견>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시인 황학주. 그는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 그래도 최소한 세 명의 진실한 독자쯤은 있어줘야 ‘시와 더불어 사는 일’에 흥이” 날 거라고 귀띔했다.
그래. 시인 황학주 말처럼 이번에 새로운 얼굴을 내민 <발견>은 “최소한의 독자들을 시인 곁에 데려다 앉히는 일”과 “저마다의 변방에서 홀로 시 쓰는 시인들이 운명적으로 감당해야 할 고독 옆에 미약하나마 지음(知音)의 자리를 놓는” 계간 시 전문지다. “시가 사양길로 접어든 이 척박한 시대에도 여전히 시를 쓰고 있는 시인들”이 너무 외로우면 안 되기 때문에.
|
<rimgcaption>ⓒ 발견 </rimgcaption> |
그들 멘토링은 우리들을 백치가 되게 만든다
“지겨운 멘토들. 한국사회 부박함의 극치. 그들의 소위 멘토링은 개인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끼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 백치가 되게 만든다. 개인적 요구와 사회적 요구에 대한 범주 개념이 없을 때 멘토링이 폭력이 된다는 걸 모른다. ‘각자 알아서 스스로 잘 돌파해야 해요. 그래야 저처럼 성공한답니다. 이리 와 봐요. 방법을 알려드리죠.’ 뻔뻔스러운 자기 상품화.” -150쪽, 김선우 ‘작가수첩’ 몇 토막
<발견> 창간호 ‘신작시’에는 ‘시인의 말’과 함께 강은교, 문인수, 김경미, 이경림, 김태형, 이수명, 조연호, 정재학, 김 언, 김 안, 정다운, 박순원, 황경숙, 황혜경, 송현경, 백은선, 이강숙이 쓴 시들이 까만 눈동자를 굴리고 있다. ‘작가수첩’은 시인 김선우, ‘시인에게 들었다’는 시인 김이듬, ‘이 계절의 연시’는 시인 신달자, ‘소설가가 읽은 시 이야기’는 소설가 김인숙, ‘박태희가 찍은 시인’에는 시인 오태환이 실려 있다.
좌담 ‘주목할 만한 오늘의 시집’에 나선 신덕룡 광주대 문창과 교수와 이숭원 서울여대 국문과 교수, 최영철·황학주 시인은 눈길을 끄는 첫 시집과 큰 열매를 거둔 시집을 내세우며, 그 시집이 지닌 핵을 톡톡 건드리고 있다.
눈길을 끄는 첫 시집으로 신덕룡은 시인 배옥주 <오후의 지퍼들>을, 이숭원은 우희숙 첫 시집 <도시의 쥐>를, 최영철은 전다형 <수선집 근처> 김용권 <수지도를 읽다> 이민아 <아왜나무 앞에서 울었다> 정온 <오 작위 작위꽃> 이주언 <꽃잎고래> 배옥주 <오후의 지퍼> 최동은 <술래>를 꼽았다. 황학주는 이잠 <해변의 개> 주하림 <비버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황혜경 <느낌 氏(씨)가 오고 있다> 한현수 <오래된 말>을 추천했다.
큰 열매를 거둔 시집으로 신덕룡은 박순원 <그런데 그런데>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류인서 <신호대기>를, 이숭원은 황동규 <사는 기쁨>을, 최영철도 황동규 <사는 기쁨>과 함께 오정환 <푸른 눈> 강영환 <물금나루>를, 황학주는 장옥관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를 내세웠다.
“나는 시인 김선우의 관능이 좋다”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알레지……
-226쪽, 김선우 ‘얼레지’ 몇 토막
소설가 김인숙은 ‘소설가가 읽은 시 이야기-피어라, 얼레지’에서 시인 김선우가 펴낸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2000년, 창비)에 실려 있는 시 ‘얼레지’를 읽으며 “나는 김선우의 관능이 좋다”고 쓴다. 왜? “시침을 떼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는 김선우의 몸과 관능은 머뭇거림이 없어 도도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얼레리 꼴레리’가 떠오르는 얼레지란 꽃도 마찬가지다. 그는 “김선우의 시를 읽기 전까지 그 꽃을 알지 못했었다”라며 “김선우가 시에서 그랬다. 얼레지의 꽃말이 바람난 여인이라고”라며 “바람 난 여인은 스스로 물을 주고, 스스로 피어나는 법”이기에 김선우가 쓰는 시는 “그녀가 원하는 곳마다 (얼레지처럼) 피어”나서 더욱 뜨겁다고 적었다.
김인숙은 시인 김선우가 쓴 글 가운데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도 떠올린다. 그 스스로 “평생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김선우의 글로 그 문장을 보니 새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꽃이 사람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며 “꽃은 꽃이어서 꽃이고 사람은 사람이어서 그냥 사람일 뿐”이며, “둘의 문장은 다르고 둘의 이야기도 다르다”고 귀띔했다.
<발견>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시인 황학주는 “무얼 만드는 일을 좋아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목수인 아버지를 도와 못 박고 대패질하고 사포질하며 자라서인지 모른다”며 “시를 꿈꾸므로 여전히 삶에 희망이 있다고 믿는 어딘가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이지만,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첫댓글 ㅎㅎ 수지도가 한 줄 중앙에서
그렇게 멀리만 보이던 시인들 틈에 제 이름이 끼여서................ㅠㅠㅠㅠ
축하드립니다. 더욱더 문운이 창대하시길 바랍니다.^^
참 아무것도 아닌 일로.................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