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사회에 권력에 대한 논쟁과 논란이 많다.
뭔가 권력의 진행이 원활하지 않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논쟁의 핵심에 '권력의 속성'이 있다.
권력은 나누어 가질 수 없는 단 하나의 <절대적 유일성>만 허용한다는 것이고,
권력을 분점하려 한 모든 시도는 예외 없이 비극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역사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권력을 나누려고 할 때 권력에 이상이 생기기에 권력은 냉혹하게 유지되어야 하며,
거기에는 아군도 우군도 적군도 친척도 지인도 없다는 냉혹한 역사적 교훈을 되씹으며,
권력이 과연 순탄하게 흘러갈 것인가?
그 권력의 분점 혹은 이양을 둘러싸고 정치·사회적인 소용돌이가 일어나지는 않는가? 하는
불안이 이런 논쟁이나 논란을 유발하는 것 같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과정을 잠시 들춰 보자.
1392년 7월 12일에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恭讓王)은 이성계의 집으로 거동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같이 국정을 잘 운영하자는 일종의 동맹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달려가
지금 임금을 폐한다는 교지를 강제로 받고는 궁으로 달려가 교지를 선포한다.
이에 공양왕은 할 수 없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른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이내 울어 눈물이 두서너 줄기 흘러내렸다.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가버리자,
백관(百官)들은 국새(國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올리고 왕위를 물려받도록 한다.
피를 보지는 않았지만 전임자를 강제로 내쫓고 정권을 인수한 것이다.
그렇게 정권을 잡은 태조 이성계도 왕권을 둘러싼 분쟁으로
그가 사랑하던 두 아들이 방원이라는 왕자에게 죽임을 당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권력을 내놓고 만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태종이 친족의 피를 흘리게 하고는 3대 왕으로 올라선다.
그런데 친족의 피를 흘리고 왕위에 오른 태종도 자식을 둔 아비로서는
지극히 약한 모습이었으며, 때로는 죄인이었다.
태종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등극한 후
곧바로 맏아들 양녕을 세자로 세워 놓았으나, 양녕이 이상하리만큼 여색을 밝혀
궁중 안팎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중에 재상의 첩인 어리를 범하고 궁중에까지 데려와 큰 물의를 일으킨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거니와, 이러한 전말을 『조선왕조실록』은 냉정하게도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다루는 기록으로서 실록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왕조의 사관들이야말로
가장 냉정한 리얼리스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어리를 둘러싼 양녕대군의 내적인 갈등,
그리고 이러한 문제 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셋째 아들을 세자로 세웠다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고부터이다.
양녕이 어리를 알게 되고 이를 궁중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양녕이 어리에게 매혹당한 순간을 실록은 이렇게 양녕의 입을 통해 기록하고 있다.
세자가 일찍이 금상(今上)더러 이르기를,
“어리의 아름다움을 들은 적이 오래였으나, 그가 성 밖에 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친히 그 집에 가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 숨기고 내보내지 않으므로, 내가 강요했더니,
어리가 마지못해 나왔는데, 머리에 녹두분이 묻고 세수도 하지 아니했으나,
그러나 한 번 봐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 집 사람더러 말을 대령하여 태우라고 했으나,
그 집 사람이 좋아하지 않는 태도였었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탄 말에 태우고 나는 걸어가겠다.’고 했더니,
그 집 사람이 마지못해 말을 대령했다.
그래서 나는 어리의 옷소매를 끌어 말을 타게 하니, 어리는 말하기를,
‘비록 나를 붙들어 올리지 않더라도 나는 탈 작정이다.’ 하고 곧 말을 탔다.
그때 온 마을 사람들이 삼대(麻)같이 모여 구경하였다.
그날 밤에 광통교(廣通橋) 가에 있는 오막집에 와서 자고,
이튿날에 어리는 머리를 감고 연지·분을 바르고 저물녘에 말을 타고 내 뒤를 따라
함께 궁으로 들어오는데, 어렴풋이 비치는 불빛 아래 그 얼굴을 바라보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세종실록』 1년(1419년) 1월 30일)
이런 기록은 양녕이 서울에서 가까운 양평 지역에 거주 제한을 받고
관원들의 감시 속에 있다가 담을 넘어 도망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슬쩍 끼워 넣은 것인데,
양녕이 동생인 충녕에게 한 말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돼 있을까
생각해 보면 양녕이 사관들에게 이 말을 했을 턱이 없고,
결국은 세종이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한 것일 텐데 이를 적어 놓았다가 훨씬 뒤
정작 큰 사건이 터지니 이를 끼워 넣어 후세에 진실을 알린 사관의 기지가 놀랍다고 하겠다.
며칠 뒤 상왕인 태종은 큰아들 양녕을 처리하는 방법을 고심 끝에 신하들에게 밝힌다.
이때는 도망간 양녕을 잡아 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대령하도록 한 자리에서였다.
상왕이 편전에 좌정하니, 임금은 시종하고 양녕도 곁에 있었다.
상왕은 병조 판서 조말생·참판 이명덕·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
좌대언(左代言) 김익정(金益精)·좌부대언(左副代言) 윤회(尹淮)를 불러 앉히고 이르기를,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양녕을 처우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이제야 단안을 얻었다.
경(卿)들은 다 고금을 통달한 선비들이니, 나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양녕의 하는 짓이 광태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 즉 여흥 부원군)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녕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 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 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미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그러나 세자로 봉하는 날에 있어서는 다만 적자요 장자인 때문으로 양녕을 봉한 것이며,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정을 두었겠느냐.
양녕이 그동안 동궁에 있으면서 행동이 착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불효한 것은 차마 말할 수가 없으니,
이 뒤로는 양녕을 의정부에 회부하건 육조에 회부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또 만약 법을 범한다면, 의정부가 잡아 오건 육조가 잡아 오건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결같이 국가의 처분만을 따를 것이며,
내시나 궁첩(宮妾)들이 감히 사정을 두고 양녕의 일을 들어 나에게 고한다면,
나는 단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니, 그때 가서 나더러 잔인하다는 말은 하지 말 것이다.
다만 연중의 정지세시(正至歲時, 정월 초하루와 동지 등 명절) 같은 명절에
부모를 보고자 하여 대궐 문밖에 와 있다면, 마땅히 불러 볼 것이며,
양녕의 몸에 만약 병이 있어 위급하여 빈사 상태에 빠졌다면,
또한 나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나와 양녕은 부자지간이라, 정리상 차마 어쩌지 못할 일이 있거니와,
임금과 신하에 있어서는 이와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해 진실로 명분을 범한다면, 죽음을 내리는 법이 있을 따름이니,
양녕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지만 어찌 모르겠느냐.
옛적에 당 명황(唐明皇)이 하루에 아들 셋을 죽였기로
사가(史氏)들이 어질지 못한 일이라고 꾸짖었지만, 이것은 세 아들이 죄가 없는데,
당 명황이 남의 중상하는 말을 듣고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참으로 죄가 있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1년(1419년) 2월 3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당시 태종이 왕이어서 왕자들을 키울 때
별 고생이 없었을 것으로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젊어서 태종은 그저 아버지 이성계를 따르는 무인이었을 뿐이니,
자식을 키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 집 저 집에 자식들을 맡기고,
그 아들들이 잘되라고 업어 주고 안아 주고 무릎에 앉히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여염집에서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이렇게 키운 아들이 세자가 된 후 경우도 없이 말썽만 피우니
아버지 태종의 얼굴에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던 것이리라.
그 자리에서 태종은 다시 큰아들에게 직접 말한다. 양녕을 보고 말하기를,
“네가 도망해 갔을 적에, 나나 대비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늘 눈물을 흘리니,
주상이 곁에 있어 역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네 몸은 편안한데, 아우들이 연고가 있다면, 너는 주상과 같이 행동하겠느냐.
주상은 효도와 우애가 참으로 지극하여, 너희 형제가 다 같이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이 없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도주하여 불행했다면,
후일에 어찌 네가 광망(狂妄)해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랴.”하며,
말하기를,
“어리의 죽음은 진실로 슬프고 민망하다. 어리 자신이 양녕에게 들어온 것이 아니고,
양녕이 재상의 첩을 탈취한 것이며, 또 양녕이 달아난 것도 어찌 어리 때문이겠느냐.”고 하며,
또 말하기를,
“이제 양녕에게 매(鷹子) 2연(連)과 말 3필을 주어 매사냥이나 하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하였다.
(『세종실록』 1년(1419년) 2월 3일)
실로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로 지극한 데가 있다.
아마도 태종처럼 큰아들을 위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양녕이 마음이 어려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신하들에게 변명하면서
그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자식의 잘못을 꾸짖으면서도 자식을 위해 또 변명해 준다.
진실로 이것이 우리가 아는 태종의 참모습일 것인가?
왕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종실과 신하들과 사돈네 집안까지
피로 물들인 태종의 속마음이란 말인가?
우리는 실록의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참으로
천륜이라는 것이 무섭구나 하는 것을 다시 느낀다.
일반 가정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엄한 군주일수록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는 데서
과연 부모는 자식에게 영원한 보호자이며 죄인일 수밖에 없는 '천륜'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 속에서 엄하기로 유명한 태종 이방원의 눈물을 엿보게 된다.
태종 이방원의 눈물을 아버지의 눈물이기에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할 것이다.
자신은 이복이건 아니건 간에 형제 사이에 피를 보는 투쟁을 벌였고,
그것으로써 태조 이성계는 현세에 환멸을 느끼고 함흥으로 떠나지 않았던가?
물론 이성계도 말년에는 달리 혼자만 있을 방도가 없어 서울로 돌아와
궁 안에서 불교에 귀의해 말년을 보냈거니와,
그나마 태종 이방원은 세종과 같은 효자를 두었기에 생전에는
그 이상의 피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곧바로 삼촌이 조카를 죽이고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피의 정변이 계속 이어지니,
참으로 왕권이라는 것은 무섭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요즘 세대에는 정권을 잡는 싸움뿐 아니라 재벌들의 경제권 싸움으로 확대되면서
도처에서 형제간, 가족 간의 싸움과 이로 인한 자살까지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권력이라는 것은 그것이 돈에 관한 것이건 통치에 관한 것이건 무섭기에
가까이하는 것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이기에 자기 자식을 위한 부모의 마음만 소중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러한 권력의 승계 과정에서 벌어지는 피의 투쟁을 막는 방법을 인류 나름대로
강구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겠지만, 그 해결은 아직도 요원하다고 하겠다.
아니,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그런 고민들로 인해 현대에는 갖가지 방법이나 불문율이 마련돼 있다.
예전처럼 꼭 피를 보지 않고도 가능해진 것이다. 그만큼 발전된 것이라고 해야 하나?
정치 지도자나 공직자, 또는 재벌들도 자녀 문제가 언론에 오르내릴 수 있고,
그 부모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상속 문제가 잘 해결되면 좋겠지만 잘 안되어 여전히 다투는 사례도 있다.
사실 권력이나 돈이 많은 어버이들은 어느 경우든 그것을 넘기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정치나 경제 지도자들이 자기 아들이나 딸 때문에
골치를 앓은 적이 꽤나 많았다.
아들딸에게는 단호하게 대하기가 어려운 것이지만,
그것을 잘하는 것이 본인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종으로 만든 태종의 결단,
그리고 정권의 평화적인 이양과 인수를 위한 그의 고뇌를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