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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를 수 있도록.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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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리스도의 힘이 내게 머무를 수 있도록
메시아 콤플렉스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일종의 과대망상으로 자신을 메시아라고 믿기에
세상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가 나서야 한다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 나아졌지만 제게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도와줘야 한다거나
도와주는 정도를 넘어서 내가 해결해주거나 구해줘야 한다고 나섭니다.
이것이 북한 인민을 굶주림에서 구해주고,
북한 인민들도 하느님을 믿게 해줘야겠다는,
그래서 하루에 1,500이 먹을 수 있는 식당과 종합 복지관을
감히 평양에 짓겠다는 엄두도 내고 실행에 옮기게 하였지요.
그런데 겸손과 사랑과 만나면 이것이 순기능을 하지만
교만과 욕심과 만나면 과대망상 수준이 되곤 하였지요.
그러다가 제게 메시아 콤플렉스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의식하면서
그리고 그로 인해 잘못을 범한 경험과 반성이 반복되면서,
그리고 나이 먹어가며 힘이 달리면서 좀 나아졌던 거지요.
그런데 요즘 와서 다시 중요한 책임들을 맡으면서
이 병이 다시 도지는 것 아닌가 하는 자각을 근자에 했는데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정신 차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여인은 주님께 믿음이 장하다고 칭찬받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한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니
그의 영혼과 마음이 시편 51편의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라고 할 때의
그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과 영혼을 복음의 여인은 가진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오늘 감히 주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다가가서도 몸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겨우 옷자락에만 손을 댑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술에 손을 대었다.”
무엇이 그리 잘났다고 주님 앞에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나서는 저와 비교해
조심스럽게 주님께 뒤로 다가가 겨우 옷자락에만 손을 대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그런데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과 달리
그의 믿음은 누구보다 크고 강합니다.
어느 정도로 크고 강하냐 하면 주님의 옷자락만 자기에게 닿아도
초강력 진공청소기처럼 주님의 모든 기를 다 빨아들일 기세입니다.
그런가 봅니다.
영혼과 마음이 부서지고 낮추일수록
믿음은 더 커지고 더 강력해지나 봅니다.
그래서일까 어제 바오로 서간의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그리고 복음의 여인은 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응답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메시아 콤플렉스의 저처럼 내가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 않고,
복음의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한없이 나의 약점을 자랑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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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교에 들어가서 힘든 시간은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규칙적으로 기도해 본 적이 없었기에 익숙하지 않았고, 특히 시험 기간 중에 긴 시간을 기도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신학교는 무조건 규칙적인 생활이라 시험이라고 해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험 걱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기도하기란 더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적 독서를 하다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이 말씀이 와 닿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제단을 어디든 세울 수 있습니다.”
시험공부하느라, 또 학교 일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핑계였습니다. 제가 있는 모든 장소가 기도할 수 있는 제단이기 때문입니다. 거리를 걸을 때, 시장에 있을 때, 버스를 타고 있을 때, 일할 때, 공부할 때, 집안일을 할 때…. 그 모든 장소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마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바쁘다고, 어렵고 힘들다고 아예 기도를 내려놓았던 것이 아닐까요?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만 있다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서 기도하든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과 얼마나 소통하려고 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여인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치유를 받으려면 손을 얹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회당장도 딸의 죽음을 알리면서, 예수님께 손을 얹어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은총은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특별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주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 기도했습니다. 서거나 무릎꿇지 않고 누워서 기도했습니다. 그의 발이 차꼬에 묶여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워서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외면하셨을까요? 그는 비록 누워있었지만 뜨겁게 기도했기에, 그의 기도는 감옥을 흔들었고 땅을 요동치게 했으며, 간수와 그의 모든 가족을 참된 신앙으로 이끄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할 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이었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핑계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금 자기 상황이 기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이 주님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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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성공은 하루하루 반복해서 쏟는 작은 노력들의 총합이다(호버트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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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마태 9,22)
오늘 <복음>은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극적인 긴박감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장면이요, <또 하나>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에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곧 두 이야기 모두 이미 절망하고 포기되었어야 할 상태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이 불결한 병 때문에 이미 삶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겠지.”(9,20)라고 믿었습니다. “회당장” 역시 딸이 죽어 이미 생명이 끝나버린 상태이지만,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이다.”(9,18)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둘 다 “손”이라는 도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마침내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장” 역시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이라고 간청하였고,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는 곧 일어났습니다.
한편, 이 두 이야기에는 서로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곧 회당장의 죽은 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요, 하혈병을 앓던 여인에게 있어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앞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죽음을 생명으로 이끄는 권능의 도구라면, 뒤의 이야기에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끌어들인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의 이야기에서는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신 반면에, 뒤의 이야기에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뒷이야기에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9,22)라는 말씀이 덧붙여졌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깨우쳐줍니다. 사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보여 집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회당장의 믿음’ 역시 언뜻 보기에는 억지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분과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관장하시는 분이시며, 부정을 깨끗이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렇게 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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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나 우리의 협력이 필요하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는 생각을 지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여인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굴하지 않는 믿음, 창피함도 이겨내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실 수 있지만 준비된 마음 안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풍부하고 담을 그릇은 우리의 텅 빈 마음입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로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도 정성으로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으로 경탄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비웃을 것이며 구경거리로 삼고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믿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믿음의 승리를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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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구사제 모임 중에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을 하는 것은 보람이지만, 강론을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교구장님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을 대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대신 ‘주님’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에 대한 개념입니다. 미국에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아직 온전히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취업에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갈 수는 있지만 재입국이 거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시간의 특징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구원은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시간 경과를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의 긴장과 역동 속에 십자가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에 박제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생한 현실이며 오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하느님의 나라를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마지막 때를 사는 지금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사제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2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은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하혈하던 여인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하느님의 나라를 체신현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일어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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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살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것도 구원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조금 더 넓은 의미의 구원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회당장과 함께 딸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그런데 그 길 위에서 오랜 기간 하혈하며 모든 것을 약값으로 탕진한 여인을 만납니다.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의 옷자락을 잡으면 구원받겠지!’라고 말입니다. 왜 여인은 ‘저분의 옷자락을 잡으면 내 병이 났겠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원하는 것이 병에서 해방되는 것 아니었을까요?
여인은 모든 것을 탕진했습니다. 이제 삶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다. 나아도 살아갈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말을 하며 하늘나라에 들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구원을 주십니다. 즉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삶을, 그리고 새로운 희망을 그 여인에게 선물하십니다. 구원은 하늘나라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어 있는 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그 딸이 자고 있다고 표현하십니다. 그 의미는 모든 곳이 하느님의 나라라는 의미이며 이곳도 저곳도 하느님의 것이기에 딸이 자고 있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딸은 다시 잠에서 다시 일어서 생명을 살아갑니다. 하느님 안에서 말입니다.
구원을 바라시나요. 지금 그대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모든 희망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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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대화법
한 사람이 절망으로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삶의 희망을 나눌 사람도, 사랑을 나눌 사람도….
터덜터덜 걸으며 자살을 생각하던 그에게 난간에 달린 작은 전화기가 보였습니다.
‘언제든 전화하세요. 무엇이든 들어드릴게요.’라고 전화기 주변에 적혀있었습니다.
그는 그간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죽을 양으로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한참을 말했습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한참을 토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화기 너머의 이름 모를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냥저냥 한번 살아볼게요.
가장 좋은 대화법은 ‘경청’이라고 합니다.
‘경청’은 누군가를 죽음에서 구해내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서로 들어주세요. 그냥 들어주세요.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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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만남의 신비, 믿음의 여정, 치유의 여정
“믿음이 답이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새벽 휴게실에 들어서는 순간 책상 위 책 제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축성생활자와 성직자에게 주신 말씀 모음집인 “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세요1”라는, 참 멋진 제목이었습니다. 더불어 전 교황청 대사였던 성염 대사의 교황님에 대한 소감도 생각났습니다.
“내가 만났을 때 이야기를 하면 그는 나의 눈을 쳐다보며 경청하고 공감하는 공감능력자였다. 교회와 신도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항상 생각하고 같이 고민해 온 개방적인 분이다.”
과연 ‘만남의 신비학’을 살아가는 ‘만남의 대가’, ‘믿음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책에 대한 추천사중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짧은 언급에도 공감했습니다.
“자신의 뜻만 앞세우는 사례가 넘쳐 장상과 형제, 형제와 형제 서로 간의 충돌로 수도자들의 공동생활이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공동생활은 중요합니다. 현대세계에서는 뛰어난 한 개인의 카리스마보다 사람 사이에서 잘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묵묵히 믿음으로 사람 사이에서 잘 살아가는 지혜로운 이가 성인입니다. 공감합니다만 교황님과 같은 뛰어난 믿음의 카리스마를 지닌 종교 지도자들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삶의 기초입니다. 무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믿음의 반석위에 지어지는 견고한 인생집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믿음의 지혜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눈앞의 것을 좇느라 원대한 계획을 잊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과 꾸준함이다.”<다산>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이래서 공동생활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 제방향으로 더불어 가는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도모하지 말라. 서두르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좇으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논어>
믿음의 지혜요 믿음의 여정에 도움이 되는 옛 어른의 말씀들입니다.
믿음의 여정에 자리하고 있는 만남의 신비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이요, 우리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요 기도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만남의 기도요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믿음의 모범입니다.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간절한 기도가, 믿음이, 열망이 있어 주님을 만난 회당장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대로 회당장의 철석같은 믿음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믿음에 응답하여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십니다. 예수님 역시 제자들과 함께하는 믿음의 여정임을 보여줍니다. 이어 열두해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믿음도 빛납니다. 믿음의 갈망이 주님을 찾아 만나게 했고,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며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과 만남으로 온전히 치유받은 믿음의 여자입니다. 회당장의 집에 이른 예수님은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비웃는 믿음없는 이들을 내 쫓으신 다음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는 곧장 일어납니다. 아버지 회당장의 믿음 덕분에 주님을 만나 살아난 소녀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전인적 치유의 구원으로 부활의 삶을 살게 된 회당장 딸입니다.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자와 회당장의 딸은 생명의 주님을 만나 온전한 치유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새삼 온전함(wholeness)이 거룩함(holiness)이요 거룩함이 온전함임을 깨닫습니다. 영어 발음도 같습니다. 믿음으로 치유받을 때 거룩한 온전함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 역시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만나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광야 믿음의 여정중에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하나하나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며 은혜롭겠습니다. 그날이 오늘입니다.
“그날에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당신 백성을 한결같은 사랑의 대상인 아내처럼 생각한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만남이 깊어지면서 주님을 참으로 알게 될 것이고 이런 주님을 닮을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이요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거룩한 삶’이 될 것입니다. 새삼 믿음의 여정은 한결같은 기도를 통한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치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믿음의 여정중인 우리를 날로 주님을 닮아,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들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8-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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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 9,21)
당신께서 내게
오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내게
오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갈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보아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나를
보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을
볼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내게
말씀하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내게
말씀하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말씀드릴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당신께서 나를
잡아주신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비록
당신께서 나를
잡아주지 못하신다 해도
내가 당신께
손 내밀 수 있음만으로도
아무런 아쉬움이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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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주님의 행위는 말씀보다 더 힘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헐뜯던 자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번에 달려온 사람은 회당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태도 매우 심각했습니다. 막 피어나는 열두 살짜리 회당장의 외통딸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이를 살리신 것은, 그것도 곧바로 그렇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었습니다.
루카는 어떤 사람이 와서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스승님을 수고롭게 하지 마십시오”(루카 8,49)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라는 마태오 복음의 표현은 그 딸을 한 사람이 집을 떠나온 때로부터 흐른 시간을 헤아려 한 짐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회당장이 자신의 불행을 부풀려 이야기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부풀려 없는 사실을 보태서 이야기하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부탁하는 사람에게서 더 효과적인 응대를 얻어 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밖에 모르는 회당장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그는 갑자기 나타나 두 가지를,곧 그리스도께서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 주실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딸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집을 나섰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리아인 나아만이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고 투렬거련 일도 기억할 것입니다. 천성이 무딘 사람일수록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상상만 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며, 죽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엑카르트가 말한 깨어남과 일어남은 하느님을 의식하거나 아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맛보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신비 이면에 있는 신비, 사물의 핵 배후에 있는 핵을 더듬어 맛보아야 할 것이다.
“속살이 밖으로 나오려면 껍데기가 깨져야 할 것입니다. 속살을 얻고자 한다면, 껍데기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바탕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하고자 한다면, 비슷한 모든 것을 깨뜨리고, 더 깊이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존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입니다.(199)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의 날✝️
로마 9,19-29
하느님의 진노와 자비
이제 그대는,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사람을 여전히 책망하십니까? 사실 누가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아, 인간이여! 하느님께 말대답을 하는 그대는 정녕 누구인가?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하느님께서 당신의 진노를 보이시고 당신의 힘을 알리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하게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들을 큰 은혜로 참아 주셨다면,
그리고 영광을 받도록 미리 마련하신 자비의 그릇들에게 당신의 풍성한 영광을 알리려고 그리하셨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유다인 가운데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도 불러 주셨습니다.
이는 바로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사랑받지 못한 여인을 ‘사랑받는 여인’이라 부르리라.
그들에게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다.’ 하던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남은 자들만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온전히 또 조속히 세상에 실현시키실 것이다.”
이는 또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후손을 남겨 주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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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9,22)
음악 하는 사람들은 연주하는 이의 신들린 연주를 보면, ‘저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연주가가 자신이 연주한 곡과 완전히 혼연일체가 되어, 단순히 소리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연주자에게서 나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하더군요. 저는 오래전 방영한 ‘슈퍼 밴드’라는 프로를 보면서 젊은이들의 재능과 열정에 놀라면서 가끔 그들의 연주를 보고 들을 때 정말이지 단지 소리가 아닌 음악을 듣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저 사람은 그 안에 들어가 있다라는 말의 의미가 믿음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예수님 안에,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실체라고 봅니다. 믿음의 목적지는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특정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교리나 신조를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예수님께 맡기는 것이며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 곧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라본다면, 오늘 복음의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참된 믿음의 본보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아 왔다는 이야기는 한시적 기간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앓아왔고 혈루증으로 죽을 수도 있었던 불행한 여인이라는 점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5,25-26)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그녀의 질병과 그에 따른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해보지 않은 치료법이 없고, 만나보지 않은 의사가 없을 만큼 노력하다가 마침내는 시간도 재산도 가족도 다 잃어버린 그야말로 쪽박 신세였던 것입니다. 이보다 더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가 있었을까요? 그녀에겐 아무런 희망이 없고 오직 절망만이 남아 있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어찌 그녀만이 처한 상황일까요? 키에르게고르가 표현했듯 그녀의 절망처럼 모든 인간은 어쩌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고,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며 상황입니다. 곧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끌 수 있으며,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절망의 끝은 결국 희망의 시작으로 이어져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는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으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여자는 죽기 아니면 살기의 심정으로 군중을 뚫고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9,21)하고 만졌던 것입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낫겠지 라고 하지 않고 구원받겠지, 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해 주셨다, 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생명이신 예수를 만남으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이 생명이신 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사람 그녀만이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분을 온전히 믿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던 것입니다.
아무도 무슨 일이 예수님과 그 여인 사이에 일어난 일을 느끼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22)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믿음이란 무엇이라고요? 믿음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전부 드리고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며, 예수님의 인격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그녀가 한 행동 옷에 손을 대다. 만지다, 는 행위가 곧 믿음이 요구하는 전적인 내맡김의 다른 표현이며, 그 옷을 만짐으로, 만져진 존재와 만지는 존재 사이의 소통과 교류 그리고 친교의 표현으로 느끼며,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상징한다고 묵상해 봅니다. 우리 역시 주저함이나 망설임 없이 확고한 믿음으로 그분을 만집시다. 나는 오늘 누구를 만짐으로 그분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 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시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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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 손에 손을 잡고서(Hand in hand)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099026&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40707 22:04 ㅣNo.174011
‘지성이면 감천’이란다. 정성이 너무나 지극하면 하늘마저도 감동하게 된다는 뜻일 게다. 옛날부터 우리네 여인들은 정말 정성을 다했다. 남편이 먼 길 떠나면 아내는 새벽마다 정화수 떠 놓고 두 손 모아 빌고 또 빌었다. 자식에게 무슨 일 생길라치면, 그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 간절함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끝내 하늘마저도 움직이게 하리라. 이처럼 자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찾는다는 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야이로 회당장의 집에 가는 중에, 열두 해나 치료차 숱한 고생을 겪은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와 그분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그녀는 ‘저분에게 다가가 손을 대기만 하여도 자신은 구원을 받겠지.’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그녀를 보시며 ‘딸아, 네 믿음이 정녕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건강해져라.’하고 이르셨다. 그때에 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
이처럼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그분만이 자신의 병을 고칠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에 옷에 손을 대었다. 어쩌면 막장까지 다다른 판에 달리 의지할 곳이 그녀에게는 없었기에, 예수님을 기어이 만나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이렇게 우리는 오로지 믿음과 실천만이 단순한 치유를 넘어, 바라던 구원을 꼭 가져다줌을 발견한다.
또한 예수님께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열두 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일렀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시면서 ‘탈리타 쿰!’하고 말씀하시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두루 퍼졌다. 죽은 딸의 소생을 바란 회당장 야이로, 그는 딸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의 권위 속에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예수님을 찾은 것이다. 믿음이 있었기에.
어쩌면 야이로 회당장은 죽은 딸을 살려낼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여자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보았으리라. 그래서 모든 걸 체념하고 덤덤하게 살던 바로 그 삶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는 능력을 체험하였다. 희망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 같은 바로 그 순간에, 유일한 마지막 희망이신 그분님께 간절히 매달린 순간에 그들만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장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대로 어디 한번 그려 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모닥불을 비롯해 난로, 이불 등 갖가지를 그렸지만, 그 중에서 유독 한 아이가 ‘손’을 그렸다. 그 학생이 그린 손은 바로 그 ‘선생님의 손’이란다. 가난하지만 밝게 사는 그 아이를 선생님은 자주 쓰다듬었기에, 그 아이는 그 손길의 따뜻함을 순수한 마음으로 느꼈던 게다.
사실 ‘손’에 대한 말은 의외로 많다. 회당장 야이로는 죽었던 딸을 살리고자, 예수님께서 손만 올려도 살아날 거란다. 혈루증 앓는 여인도 예수님 옷에 손만 대어도 구원 받는단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누군가에게 손길을 주라신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가 아닌 두 손을 주셨다. 사실 ‘엄마 손은 약손!’이란 말을 수없이 듣고 자란 우리다. 이웃과 손잡고 다정히 살면, 그분께서도 손잡으리라. 내 손은 지금 무얼 잡는지? 하나는 하느님, 또 하나는 이웃이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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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려고 나서신 길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믿음을 담아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예수님께서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신 ‘계획 밖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다른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으십니다. 그러자 그가 죽음에서 일어나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 기적은 그의 아버지의 믿음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절망적인 순간이 닥칠 때마다 오늘 복음의 메시지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께 의지하며 내미는 우리 믿음의 손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분을 찾는 믿음입니다. 정작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여야 할 때 그분을 찾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보다는 자신의 인맥과 능력을 동원해서 그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상처와 아픔 앞에서 그분께 믿음으로 다가가기보다 분노하고 성을 냅니다.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그리고 그분께 믿음의 손을 내밉시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비록 그분의 계획 밖에 있거나, 죽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손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은총을 일으키는 힘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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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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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그때에는 마르코 복음으로 들었는데
오늘은 마태오 복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두 복음의 차이점은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회당장의 딸은
병으로 죽게 된 상황으로 나타나는데
마태오 복음에서 그녀는
이미 죽은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태오 복음은
상황을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을 보자면
마태오 복음은 회당장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며
되살아난 딸의 나이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 것이 중요하지
회당장의 이름이나 딸의 나이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관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특정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언급될 때는
이야기가 그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름이 없다면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됩니다.
누구나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나의 가족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상황에서 나도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청할 수 있는지
자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여기에서
마르코 복음보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합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할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달라고 청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결국 소녀는 죽게 되지만
처음부터 죽은 사람을 살려 달라는 청원은
조금은 무게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청할 수 있고
저것은 청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구분은
결국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야기를 조금 바꾸면서
그 이야기를 우리 각자의 이야기로 전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청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혹은 스스로 청하는 것을 구분하지는 않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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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절망하지만 주님은 희망하십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 대한 치유뿐 아니라, 이미 완전히 죽은 열두 살 소녀를 소생시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생명과 죽음조차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라는 표현이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성경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각별합니다.
‘완전함’ ‘꽉 찬’이라는 의미입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증세는 그 어떤 명의(名醫)도 더 이상 손써볼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중증이었던 것입니다.
극에 달한 통증, 극단적 고통, 따라서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는 방법이 없는, 다시 말해서 완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그런 상황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다 장례식때 등장하는 피리부는 이들까지 등장한 것을 봐서,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손에 이끌려 생명을 되찾은 회당장 딸의 나이도 열두 살이었습니다.
여기서도 12라는 숫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회당장의 딸 역시 사경을 헤맨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술로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상태, 완전히 끝난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생명의 주관자이자 완전하신 주님만이 소생시키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치유와 소생 사화를 통해 우리는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진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그분 앞에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하지만 그분은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만 그분은 다시 원점에서 다시 한번 출발하십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분, 낡은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 말라 죽은 고목에서도 새싹을 돋게 하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와 소생 사건 앞에서,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소생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그리도 간절히 반복해서 원하는 육체적 치유는 다분히 제한적이고 유한한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의 끝도 없는 치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더 가치있고 중요한 치유, 그래서 우리가 더 간절히 청해야 할 치유는 영적인 치유요, 내적인 치유입니다.
내면의 치유요, 마음의 치유입니다.
그릇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의 치유요, 고정관념의 치유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 땅 위에서 살것이라는 착각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는 오류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이라는 그릇된 신앙에 대한 치유가 필요합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허물어지는 그 날 말입니다.
그 때 우리는 평생토록 그리워했던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그 하느님과 더불어 수많은 성인성녀들, 의인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더 이상 병고도, 죽음도 없는 삶, 불사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런 희망을 안고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 앞에 당당히 맞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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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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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람과 희망의 차이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줍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이는 믿음은 하느님 능력을 말해줍니다.
“당신은 손만 대면 죽은 이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며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는 하느님 능력은 물론이요, 자비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능력자시요 자비로우신 분으로 여기게 되면 우리 마음에 생기는 것이 ‘희망’입니다.
믿음과 희망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생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과 희망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끕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분의 능력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칫 우리는 희망과 바람을 착각합니다. 희망은 믿음이고 바람은 인간적인 욕구입니다.
바람으로 구원되지는 못하지만, 희망으로는 구원에 이릅니다.
비디오 아티스트인 김형규 씨가 담배꽁초 20만 개로 실물 크기의 자동차를 만들어 금연 캠페인을
하였습니다.
담배꽁초 수집에만 2달, 분류하는 것만 2주가 걸려 거의 3달에 걸친 작업이었습니다.
작업이 끝나자 두드러기가 나서 병원에 가보니 면역체계가 무너졌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함께 작업한 30명 대동소이한 반응이었습니다.
그 중의 흡연자가 15명이었는데 모두 금연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한 달 뒤 15명 모두 다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희망한 것일까요, 아니면 원했던 것일까요? 인간적인 바람으로는 얻어지는 게 없습니다.
희망은 믿음과 함께하기에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고 끝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제가 유학 다녀와서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여러 병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해결책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레이저로 붉게 된 얼굴을 짖었습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한약도 먹어 보았습니다.
여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찾으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계면활성제에 대한 일부 의사의 소견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피부 속으로 스며들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10년째 비누를 쓰지 않습니다.
그때 시도해 보았더니 효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믿음과 하나입니다.
‘죽은 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얹으면,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나을 거야!’란 생각 안에 ‘방법’과 멈추지 않게 하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성녀 요셉피나 바키타는 어렸을 때 납치되어 매일 매를 안 맞는 날이 없는 노예 생활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쇠사슬에 묶여 900킬로를 걸어서 끌려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매일 때리고 그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아이는 자연을 만드신 분을 찾고 싶었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이 주인이 되었을 때 그에게 매달려 이탈리아로 넘어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시 수단으로 보내지려 할 때 그녀는 이탈리아 법정에까지 나아가 그들과 싸우며 자유를 쟁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녀원에 들어가 겸손하고 온화하고 위로하는 수녀님으로 47년을 삽니다.
그녀는 자기 삶에 관해 쓴 책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희망하는 삶입니다.
희망하는 삶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이유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선물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연옥의 한순간의 고통은 지상의 모든 고통을 합친 것보다 더 무섭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연옥에 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원하는 사람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희망하는 사람은 찾습니다.
연옥에 안 가게 하는 유일한 기도가 있습니다.
비르짓다의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사실 이것을 바치지 않는다면 원하기는 하지만,
희망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법을 찾고 꾸준할 수 있어야 기적의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희망이 단순한 바람과 다른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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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대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18-26).”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권한’이란, 무엇인가를 할 권한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생살여탈권’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한입니다.
병을 고쳐 주거나 고쳐 주지 않거나, 사람을 살리거나 살리지 않거나, 그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입니다.
<만일에 그 권한이 없다면, 주님이 아닙니다.>
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여자의 병이 치유되었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자에게 일어난 기적의 주체는
그 여자의 믿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의 원인은, 또는 기적을 일으킨 힘은, 바로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언제나 항상,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는 말씀을 하셨다.” 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에 관한 말씀의 뜻은, 작은 믿음이라도 있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이 없으신 주님을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음이 기적을 일으킨다.”로 오해하면, “믿기만 하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라는 그릇된 믿음으로 변질됩니다.
<사이비 종교 사람들이 흔히 그런 말을 합니다.>
또 병이 들어서 누워 있는 병자에게 가서, “너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너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라고 꾸짖는 말이나 하는,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3) 불치병에 걸려도 믿음만 있으면 그 병이 낫고,
죽어가던 사람도 믿음만 있으면 살아나는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ㄴ-9ㄴ).”
바오로 사도는 몸을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일으키는 어떤 병에 걸려서 평생 고생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는 그 병의 치유를 주님께 간청했는데, 주님께서는 그의 청을 들어 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외에도, 평생 병고를 겪다가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성인 성녀들이 많습니다.
<병이 낫지 않아서 고생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성인 성녀들이 믿음이 부족해서 여러 가지 질병을 앓는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아주 많은 것이 우리의 실제 현실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라고 말합니다.
어떤 병에 걸렸을 때, 또는 어떤 불행한 일을 만났을 때, 간절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당연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지만, 모든 결과는 주님 뜻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로 그 결과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기도는 올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바치되, 살든지 죽든지 주님 뜻에 맡기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주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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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8.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을 체험함으로써 믿음이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지켜보게 됩니다. 한 사람은 회당장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서는 함께 자기 집으로 가 주실 것과, 딸 아이의 몸에 손을 얹어주실 것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마저도 살리실 수 있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고 믿었으나, 아직 그 믿음이 약했기에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은 열 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입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는 자신의 부정한 처지 때문에 예수님 뒤로 몰래 다가가서는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그분께서 어떤 병이라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셨다고 믿었으나, 마찬가지로 아직 그 믿음이 약했기에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옷자락 술을 자기 믿음이 이루어지는 매개체로 삼으려 든 겁니다.
이처럼 이 두 사람의 믿음은 아직 부족하고 약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기적을 통해 그런 그들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먼저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 그녀를 괴롭히던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해주시는 한편, 정결에 관한 율법에 따라 ‘부정한 상태’였음에도 당신 몸에 몰래 손을 댄 잘못된 행동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녀에게 용기를 주시며 그녀가 당신에 대한 굳은 믿음과 용기있는 실행 을 통해 구원받아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가 되었음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해 주십니다. 그런 자상한 배려와 사랑 덕분에 그녀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보다 깊어지고 단단해졌지요.
한편, 회당장의 경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 후,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소녀는 죽음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회당장은 자신이 믿었던대로 주님께서는 죽은 이마저 되살리시는 놀라운 권능을 지니고 계심을 확인하는 동시에, 그분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죽음이라는 깊은 슬픔과 절망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음을, 주님께 대한 참된 믿음이 우리를 깊은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일으켜세워 다시 살게 함을 깨닫게 되지요. 그 깨달음을 통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만 믿는 어린 아이 같은 믿음에서, 보지 않고도 믿는 어른의 믿음으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란 모험이자 투신입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 이미 다 증명된 것은 그저 머리로 아는 대상이지 믿는 대상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결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자기 믿음이 가져오게 될 결과를 미리 알아보며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며 제대로 믿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가 믿는대로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과 자비가 넘치시는 주님께 아직 믿음이 부족하고 약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동안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단단해질 테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될 때까지 그저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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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6.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바라보는 삶
<2024.7.8>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0:1~11절)
❝구원과 회복의 약속을 바라보는 삶❞
❚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므로 구원과 회복 그리고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
✔ 어떠한 삶을 바라며 나아가야 합니까?
➲ 낙심치 말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1~3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심판을 받아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를 내리신 후에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는 백성을 위해 이 약속을 책에 기록하게 하셨습니다(1~2절). 때가 되면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킬 것이며, 그들의 조상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니 당신의 백성이 그 땅을 다시 차지할 것(3절)이라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충실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에만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죄를 회개하고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칠십 년이라는 포로 기간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정화하는 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은 기록된 말씀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말로다 할 수 없는 어둡고 답답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기억하시고 회복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을 만나도 낙심하지 말고 말씀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괴로워 말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해야 합니다(4~7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회복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위로의 메시지를 받아야 할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무서워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 소리는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5절). 하나님께서 들으신 소리는 마치 여인들의 해산하는 고통 소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여인들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것처럼 남자들이 그 고통으로 인하여 손으로 허리를 짚고 그 얼굴빛이 창백하여졌다는 것입니다(6절). 이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날이여...’, ‘야곱의 환난의 때’는 같은 날을 지칭하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때를 가리킵니다. 곧 앗수르와 바벨론에서의 포로기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처럼 최악의 상황에서도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온전한 회복의 날을 소망하며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영광에서 떠난 사람은 두려움과 절망만 남습니다. ‘샬롬’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샬롬’이 없다는 것은 안식과 번영이 없는 상태, 즉 하나님의 복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주시며 미래의 소망을 계획하고 계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평안을 누리지 못한 자들은 영적인 공포와 괴로움에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로 인하여 괴로워 하지 말고, 환난에서 건져내어 주신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의심치 말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평안을 간구해야 합니다(8~11절).
하나님은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 버리며 포박을 끊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나라 백성이 그들을 노예로 만들지 못할 것(8절)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그들에게 보내 줄 그들의 왕 다윗을 섬길 것(9절,쉬운성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의로운 가지이신(렘 23:5) 메시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는 궁극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귀환하는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과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를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두려워하니 말라, 놀라지 말라”고 약속하시면서 야곱 백성은 다시 태평과 안락을 누릴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절).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며 구원하겠으며, 여러 나라로 흩어 버렸지만 이제 그 나라들을 멸망시킬 지언정 택한 백성들만큼은 멸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너를 공정하게 심판하겠으며, 너는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11절,쉬운성경)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악을 참을 수 없으시며, 신실하시기에 약속의 말씀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공의로운 심판자이시며 자비로운 회복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공의와 사랑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분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죄를 벌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더욱 바른 인간으로 성화되며 더 큰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의 회복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온전한 회복의 시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일을 만나도, 어떠한 상황 가운데 처할지라도 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의심하지 말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평안을 간구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자녀를 기억하시고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 역시도 구원의 과정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기억하며 소망 중에 인내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렘 30:1~11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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