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적 감사의 노래
시편 119:49-56
땅에서 얻은 온갖 열매들을 이렇게 강단 위에 쌓아놓고 보니 마음이 정말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오늘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교우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시간이 참 좋습니다.
힘겹고 낙심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공자는 인생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삼락”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첫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때마다 배우고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둘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셋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누가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라 할 만하지 않은가.
세 가지 즐거움, 과거의 경험이나 생각에 매이지 않고, 때마다 항상 뭔가를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언제나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 있고, 또 그 벗이 먼 거리를 마다않고 찾아준다면 그 사람은 잘 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속상해하거나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정신의 독립을 이룬 사람, 곧 성인, 군자라 할 만합니다. 배우려는 열린 마음, 남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훈훈한 마음,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정신적 자유의 마음, 바로 이것이 즐거운 삶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보다도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더 깊은 도리가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인생은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저금통장의 잔고가 늘어도 감사의 창고가 비면 인생은 쓸쓸해지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원망의 말이 많아지고, 얼굴은 점점 굳어집니다. 삶의 달인들은 “감사의 창고”를 채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누구를 대하든 뺄셈 부호보다는 덧셈 부호를 즐겨 사용하면 됩니다.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 좋은 점을 보아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은 대개 삶에 지쳐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일 수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 다음가는 정신문화의 원천으로 평가되는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배울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족할 줄 아는 사람이 제일 부자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다 더 보태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장 건강한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예수 잘 믿는 사람이다.”
어느 외과의사가 참으로 마음 아픈 수술을 집도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설암(舌癌), 곧 혀에 암이 생겨 혀를 잘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혀를 자르지 않으면 목숨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괴롭지만 혀를 자르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사는 수술 전에 환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고 나면 영영 말을 못하게 됩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십시오.” 여인은 젖은 눈을 감고 떨리는 입술로 하나님 앞에 조용히 기도합니다. 이윽고 고개를 들더니 “주님 감사합니다.” 하고는 의사한테 결연히 말합니다. “됐습니다. 이제 혀를 자르세요.”
감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만족해서 기쁨으로 하는 감사가 있고, 그 다음에는 눈물로 드리는 감사가 있습니다. 두 번째 감사, 내가 비록 가진 것이 없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생각하면서 눈물로 드리는 감사야말로 가장 값진 감사일 것입니다. 기쁨의 감사, 눈물의 감사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행복은 감사에 달려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말, 감사하는 행위 그 자체가 곧 행복입니다. 종이 울려야 소리가 나듯이 행복은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야 행복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해도 그것으로 족한 줄 모르고, 더 못 가진 것으로 불평하고 원망하고 싸운다면 행복이 아닙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아무리 모든 일에 형통하다 해도 여전히 부족하다 여기고 불만 가운데 있다면 행복이 아닙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고, 감사하는 말이 입 밖에 절로 흘러나와야 행복일 수 있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원망의 문으로 나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감사할 때에 행복이 들어오고, 원망할 때에 행복은 나갑니다.
감사는 참 좋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3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웃는 낯에 침 뱉을 사람 없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시기가 많고 다툼이 많은 세상이라지만, 그 누구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은 나한테도 좋고 남한테도 좋은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더없이 좋은 말이 “감사합니다.”입니다.
미국의 명문대학인 노스웨스턴대학교가 자랑하는 졸업생 중에 에드워드 스펜서(Edward Spenc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860년 9월,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노스웨스턴대학교 근방에 있는 미시간 호수에서 여객선이 풍랑에 침몰하여 18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스펜서는 수영선수였습니다. 그 때 학교에 있었던 스펜서는 사람들이 살려 달라는 아우성 소리를 듣고 육지에서 800m 떨어진 침몰 현장을 16차례나 헤엄쳐 오가며 17명을 구조했습니다.
800m 떨어진 곳을 한번 다녀올 때마다 왕복 1600m. 열일곱 번을 다녀왔으면 얼마나 먼 거리를 헤엄쳐 다닌 것입니까? 그것도 한 사람씩 옆에 끼고 수영했으니 사람이 남아나겠습니까? 구조가 끝난 뒤 스펜서는 탈진하여 쓰러졌습니다. 물속에서 너무 무리하게 몸을 썼기에 후유증으로 몸이 망가져서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스펜서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지만 자신은 일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적인 일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이렇게 슬픈 일입니다. 스펜서는 장애자의 몸으로 80세를 살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합니다.
“옛날 사고 당시 내가 구출해 준 17명 가운데 훗날 나를 찾아와 감사를 표시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일이 육신이 아픈 것보다 저를 더 아프게 했습니다.” 스펜서가 선행을 하면서 치른 대가는 육체의 불구가 된 것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큰 것이었습니다. 스팬서가 받은 마음의 상처란 어떤 것입니까? 자기에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감사가 없었다는 것, 그것이 휠체어에서 평생을 살았던 스펜서의 지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영등포역 철도원인 김행균 씨가 열차가 영등포역에 들어 올 때 선로에 떨어진 아이를 구하고, 자신은 두 발목이 잘리는 참사를 당했습니다. 병원으로 실려와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어 장애자로 평생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씨의 선행은 시간마다 방송되고 신문에 보도되면서 의로운 행동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팬클럽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일은 정작 아이와 부모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김행균 씨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발목을 잘린 철도원에게 미안하기도 했을 테고, 야단맞을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를 위해서 두 발목이 절단된 그 사람에게 찾아와 “감사합니다!”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닙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안 나타났을까? 미안해서일까? 혹 나타나면 보상이라도 하라고 할까봐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닐까? 가난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감사를 해도 손해 안보는 감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여러분, 미국의 스펜서와 한국의 철도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말로만 감사하는 인사치레의 감사, 적어도 뭔가 물질이나 어떤 손해를 보면서는 보상하고 싶지 않은 인색한 감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에 퍽 인색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한 주간 내내 두 단어만 생각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과분한 은혜를 입고, 또 많은 분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제대로 감사의 표현을 못하고 살아온 것을 회개하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이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한번 해 보실까요?
감사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 철학적인 감사입니다. 생각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고 해서 감사합니다. 어릴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6․25를 겪은 사람은 무슨 일에든지 불평할 자격이 없다.” 그 시절에는 워낙 못 살았으니까 그때보다 나은 지금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생각하고,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생각해본 나머지 상대적인 감사를 유출해내는 것입니다.
둘째, 충족하는 데서 오는 감사입니다. 배가 고팠다가 먹으면 만족합니다. 먹게 된 것이 참 고맙습니다. 욕망 충족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순간적이요 일시적입니다. 지금은 배불리 잘 먹었지만 내일이면 다시 배가 고픕니다. 그때가 지나면 효용이 없어집니다.
셋째, 은총적 감사입니다. 이것은 절대적 감사입니다. 본질과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입니다. 찬송가 305장의 가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가사처럼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나, 하나님과 원수 된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의 사랑을 확증해주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래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 사함 받은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는 영원한 것이요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적 감사요 그리스도인의 감사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은총적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말씀으로 자기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50입니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그는 교만한 사람들의 조롱과 모욕을 당했습니다.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는 좌절의 순간도 겪었습니다. 인생을 포기해버릴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 그를 지켜주었습니다.
시편 119::51입니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편 119:105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발 앞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말씀과 함께 인생길을 걷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편 12:6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여러분, 든든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제게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옵니다. “너는 내 것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고난과 시련의 때는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절망의 늪에 빠져 들어갈 때 들려오는 이런 말씀 한마디는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여름에, 갑자기 불어난 물로 인해 고립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소방관들이 강물 위에 “밧줄”을 걸고 구조하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범람하는 강물 위에 걸린 “밧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사람은 이 거친 세상 물살에 절대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시편 119:55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시인은 밤에도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킬 수 있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둔 밤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살아갈 용기가 사라지고, 인생이 온통 허무한 것만 같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시들해지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하며 자기를 내던지듯 처신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공격적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인생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주의 법도를 떠나지 않습니다. 영혼의 어둔 밤이 지나고 어슴푸레 새벽빛이 비칠 무렵, 그는 하나님의 말씀 덕분에 그 어려운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시편 119:5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저는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그 사람의 운명이 된다고 믿습니다. 슬프고 애상에 찬 어두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결국 슬픔으로 마감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둡고 서글픈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은 노랫말처럼 일찍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시절에 가수 배호가 그랬고, 김정호, 김현식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밝고 긍정적인 노래를 즐기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가 됩니다.
찬송 시인인 송명희 씨는 <나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노래가 되시는 하나님을 내가 종일토록 찬양함은 /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 내가 그를 먼저 사랑한 것 아니요, 나를 그가 먼저 사랑하시고 / 그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치 않아서 나를 사랑하시니 / 내가 가장 좋은 것으로 그에게 드리고 싶어라.
중증 뇌성마비 환자인 송명희 시인의 마음은 이처럼 깨끗합니다. 삶의 악조건 속에서도 밝음을 잃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픈 열망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 요청할 것만 있는 사람과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고픈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 없습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삶이 고마움임을 알고, 사랑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아닙니까?.
무엇 무엇을 소유했기에, 누렸기에 감사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감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법도를 우리의 노래로 삼아 살아간다는 사실, 우리가 당신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초대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설사 우리가 지쳐 쓰러진다 해도 우리가 쓰러진 자리에서 희망의 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아름다운 가을에 우리가 부르는 감사의 노래, 희망의 노래가 이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는 등불로 활활 타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추수감사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추수감사주일은 원래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에게서 유래되었습니다. 청교도들은 미국으로 건너간 첫해에 곡식을 거둬들여,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날이 시초가 되어서 지금의 추수감사절이 있게 된 것입니다.
1620년 12월 26일, 미국 동북부 플리머스에 상륙한 146명의 영국의 청교도들은 상륙 즉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180톤밖에 안 되는 작은 배이지만, 배를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그 배의 속력은 평균시속 2마일 이어서 어떤 때에는 걷는 것보다 느립니다. 그러나 117일 간을 항해하여 무사히 약속의 땅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을 감사합니다.
항해 중에 여러 명이 죽었지만 새로 아기가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큰 풍랑을 만났으나 배가 파선되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미국 땅, 원주민들의 방해로 한 달여 항구를 배회했으나 마침내 그들의 호의를 얻어 무사히 상륙한 것을 감사하고, 삼 개월 반 동안의 고통스런 항해에도 고향으로 되돌아가자고 원망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야말로 감사 일색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항해에도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해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고, 주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는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감사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은혜요 최대의 전도입니다. 불평과 원망 속에서 전도해봐야 헛일입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인해 기쁩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습니다. 이 한마디가 가장 으뜸 전도가 됩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웅변입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사람의 마음 문을 열게 됩니다.
이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드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감사로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그 감사가 저와 여러분의 미래를 희망차게 해줄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