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79
2월26일[사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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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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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ypsQs6Hgb8
[서울대교구 김광두 고스마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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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할 뿐입니다.>
사순절을 지내며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을 자주 묵상하게 됩니다. 활기찬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모습도 감동적이지만, 십자가상 예수님의 모습 역시 그에 못지않게 감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의 그 끔찍하고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역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명언 몇가지를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이른바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도 합니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오복음 27장 46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복음 22장 3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복음 23장 43절)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복음 23장 46절)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목마르다.”(요한복음 19장 28절)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 19장 30절)
여러 말씀 가운데 오늘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제 마음에 큰 반향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복음 22장 34절)
그토록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저런 말씀이 입에서 나올 수 있을까? 참으로 놀랍니다. 그 순간 저 말씀이 예수님 입에서 나온 그 자체가 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시라면 도저히 저런 표현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만일 십자가상 예수님이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묵상해봅니다. 욱하기 잘하고, 한 성깔 하는 제가 도저히 그냥 넘길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 아버지께 따졌을 것입니다.
“아버지, 아무리 인류 구원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저 인간들 하는 행동 한번 보십시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서 저게 할 짓입니까? 저는 저들의 치유와 구원, 행복과 영생을 위해 이 한목숨 불살랐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습니까? 무죄한 저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것도 모지라 저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제게 딱 3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 녀석들 제대로 손 좀 보고 다시 십자가 위로 올라오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함구하십니다. 철저히 침묵하십니다. 인간들의 무자비한 악행 앞에서도 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께 적대자들의 용서를 청하셨습니다. 참으로 크고도 놀라운 예수님의 인내요 사랑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마음에 깊이 새깁니다. 단죄와 심판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저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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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A8ppUXa3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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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되질할 되를 깨버린 이의 행복>
오늘 복음은 남을 심판하지 않으면 나도 심판받지 않는다는 주제입니다. 내가 자비로울 때 자비로운 기준으로 심판받습니다. 주는 대로 받습니다. 반면 남을 단죄하면 그것으로 나도 단죄받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와 엘레우시스 사이의 성스러운 길에 살았던 불량 대장장이이자 산적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손님에게도 완벽하게 맞을 것이라고 주장한 침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방법은 잔인했습니다. 여행자가 침대에 비해 키가 너무 작으면 선반에 눕혀 잡아 늘여 펴곤 했습니다. 여행자의 키가 너무 크면 다리를 잘라서 몸에 맞도록 만들었습니다.
테세우스는 처음으로 아테네를 여행하던 중 프로크루스테스를 만났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에게 가했던 것과 똑같은 잔인한 대우를 테세우스에게도 가할 생각으로 테세우스를 침대에 누워 쉬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제압하고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습니다. 그런 다음 프로크루스테스를 같은 방식으로 대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손님을 괴롭히던 바로 그 방법으로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며 나는 얼마나 부자유스럽습니까? 자기도 그렇게 못하면서 남에게 하도록 강요하면 다른 사람들 눈치가 있으므로 말도 실수할까 봐 제대로 못 하고 행동도 경직됩니다. 자기 판단의 감옥에 자신이 갇히는 것입니다.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자비를 원하면 남을 판단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우리 속담에 들어맞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 진리를 압니다. 내가 외로우면 다른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내가 짜증 나면 분명 다른 사람들을 짜증 나게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영화 <셰임(Shame)>에서 주인공 브랜든은 평범한 직장인지만 성에 대한 강박적인 중독으로 비밀스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당연히 그는 항상 고독하고 공허하고 외롭습니다. 여자를 자기 욕구의 충족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세상도 그를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브랜든의 여동생 시씨는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브랜든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브랜든은 시씨의 삶을 응원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상사 데이비드와 술집에 들렀을 때 시씨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데이비드는 그녀를 원하게 됩니다. 데이비드는 유부남임에도 브랜든의 집에서 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가집니다. 브랜든은 구토가 날 정도로 직장 상사가 밉지만, 그 화풀이를 동생에게 합니다.
오빠에게 쫓겨난 동생은 오빠에게 계속 전화하다가 자살 시도를 합니다. 동생을 품어줄 수 없었던 이유는 유부녀를 막론하고 흑심을 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가 직장 상사와 동생에게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이유는 자기를 먼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이 갈등의 굴레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받고 싶거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영화 <극한직업>에서는 형사들이 잠복근무하기 위해 치킨집을 차렸는데 의외로 장사가 잘된다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왜 장사가 잘됐을까요? 사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니 아무 생각 없이 퍼주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비슷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주방장이 주인이 미워서 양념을 팍팍 썼더니 장사가 더 잘되더라는 것입니다. 더 주려 하니까 더 받습니다.
이 진리를 알면 세상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 없고 가난할 수도 없습니다. 남을 건강하게 하는 트레이너가 몸이 안 좋아지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의 돈을 떼먹으려 하고 남의 명예를 도둑질하며 남을 아프게 합니다. 결국 그것이 자신에게 몇 배로 돌아올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행복해지고 싶거든 우리 안에 사랑을 방해하는 남을 심판하는 되를 깨버립시다. 저절로 심판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웁시다. 이웃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지만 생각합시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세상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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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나무를 옮겨 심으면 몇 달은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댈러스로 오면서 저도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지리를 파악해야 합니다. 성당까지는 걸어서 40분이면 가기에 걸어 다니려고 합니다. 꼭 가야할 곳을 알아야 합니다. 마트, 은행, 주유소, 식당, 미장원, 병원, 차량 정비소, 산책로 등을 알아 두면 좋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입니다. 본당의 봉사자들을 파악해야 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으니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직원들을 알아야 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쁠 때 함께 기뻐해 주고, 슬플 때 함께 마음 아파해 줄 사람을 아는 것은 복입니다. 셋째는 업무를 숙지해야 합니다. 12년 만에 본당 사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기에 미국 교회와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33년을 사제로 지내고 있지만 본당 사목은 늘 새롭고, 긴장이 됩니다. 본당 사목은 장기계획과 단기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댈러스 성당은 3년 후면 설립 50주년이 되기에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매년 본당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내년쯤에는 저도 이곳 댈러스에 뿌리를 내리고, 여유 있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국에서 오지 않고, 뉴욕에서 왔기에 좀 더 빨리 적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민등록과 비슷한 쇼셜넘버를 이미 받았기에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뉴욕에서 이미 받았기에 텍사스 면허로 바꾸기만 하면 됩니다. 은행 계좌도 이미 개설했기에 이용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린카드를 받았기에 비자 때문에 한국에 다녀오지 않아도 됩니다. 5년 전에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2달을 지냈습니다. 그때 만났던 분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니 마치 집에 온 것처럼 낯설지 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여행을 하면서 왔기 때문에 시차도 느끼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바로 옆 본당에 서울 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님이 있어서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순특강을 서로 바꾸어서 하기로 했습니다. 작년부터 서울 교구에서 보좌신부님을 파견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영어도 잘 하시고, 겸손하십니다. 부모님이 미국에서 살기 때문에 부모님을 만나기도 좋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함께 온 신부님들이 사제관의 불편함을 모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문도 열쇠 키에서 번호 키로 바꾸었습니다. 컴퓨터의 선도 모두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잘 지낼 방법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세력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나의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간’입니다.
둘째는 ‘청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셋째는 ‘선행’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이 10명만 있어도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한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아름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아간다면 어떤 악의 세력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를 도우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당신 이름 위하여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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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지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된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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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우리는 여러 관계 안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나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상처를 주지 않고 산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방은 나에게 무시당하였다고 느끼고, 수치감과 모욕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상처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느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압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가시 돋친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내가 먼저 준 상처의 대답은 아닌지,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그 사람처럼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스스로 깨달았다면, 그리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또한 상대를 용서할 힘을 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인식은 그 모든 것을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결코 기워 갚을 수 없는 많은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한다면,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언제나 기다려 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무나 쉽게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끝까지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거움을 잘 아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행복한 사람이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크게 느끼며, 체험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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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6-38)
이 말씀은,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싶으면 이웃을 용서하고, 심판을 안 받고 싶으면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황금률’과 비슷한 가르침이 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여기서 ‘남’은 하느님과 이웃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리고 “해 주어라.”는 사실상 “먼저 해 주어라.”입니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아버지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주시는 그것을 잘 받기 위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는 “주어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가 됩니다.(마태 10,8) ‘매정한 종의 비유’를 보면 바로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내가 ‘먼저’ 자비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응답으로 나도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받고 싶으면 먼저 주어라.”라는 가르침과 “너희가 이미 받았으니 너희도 남에게 주어라.”라는 가르침이 실제로는, 즉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는 ‘같은 가르침’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마음가짐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받기를 기대하면서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에게 베푸는 것, 둘 중 어느 쪽에 해당되든지 간에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푼다는 점에서는 똑같이 선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내가 아직 받은 것이 없는데, 남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라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먼저 받아야만 남에게 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많이 부족한 것이고, 속이 아주 좁은 것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경우에도, “그것은 내가 애써 노력해서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저 사람에게 무엇을 주란 말인가? 받고 싶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속이 좁은 태도인데, 그 경우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은총과 사랑을 체험한 것인지,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면서 마음이 너그러워지지 않고 왜 속이 좁은 채로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여간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베푸는 일은, 받는 쪽의 태도를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자비’는 아무 조건도 없이 무조건 베푸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라는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의 이 말씀과 베드로 사도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신 일은 모순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매고 푸는 권한’은 마음대로 사람들을 심판하고 단죄해도 되는 권한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임무입니다. 아무도, 사도들도 어떤 사람을 구원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권한은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잃은 양 하나’를 찾으려고 애쓰시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임무만 받았습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감히 하느님 행세를 하려고 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원, 심판, 단죄는 주님만의 권한입니다. 인간은 아무도 남을 구원하지 못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남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는 권한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9)라고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단죄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에서 ‘저주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자기들은 틀림없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고, ‘저 군중’은 율법을 모르니 구원받지 못한다고 멸시한 것인데, 그것은 교만죄를 짓는 말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를 짓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죄가 너무 커서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말하면서, 회개, 용서, 구원을 미리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인데, 인간이 스스로 포기해버리면, 주님께서도 그 사람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용서와 구원받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 자체도 주님의 권한과 사랑을 침해하는 큰 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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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루카 6,37) 사순절을 지내는 교회에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계속됩니다. 용서, 영원한 숙제이지요. 우리에게 해를 입힌 이에게 용서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먼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주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벗어났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이러한 죄인식은 용서와 자비를 실행하는 단계까지 가려면 그저 출발선에 불과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하느님의 용서와 자애, 자비를 믿는 것입니다. 다니엘 예언자가 하느님 앞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처절하고 통렬하게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는 힘은, 민족이 저질러 온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다니 9,4.9)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용서와 자비를 베풀 수 있기 위해서는 세 번째 단계, 즉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는 말씀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존재이기에 예수님은 우리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되어라 하십니다. 부전자전이라 하듯 무릇 자식은 아버지를 닮아야 한다는 말씀이겠지요!
그래서 하느님의 속성 세 가지를 주문하시는데, 그저께는 <거룩한 사람이 되라!>, <완전한 사람이 되라!> 하시더니만, 오늘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하시네요. 벤뎅이 소갈딱지 같은 우리 보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구요! 이미 여러 차례 용서를 실패한 체험을 지닌 우리에게 이 권고들이 과중하고 고통스럽고 때론 불가능하기까지 한 의무를 부과한다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용서하는 사람과 용서받는 사람 중에 더 혜택을 받는 쪽은 어디일까요? 실상 용서의 경우 더 혜택을 받는 쪽은, 용서받는 이보다는 용서를 한 사람일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지금 나에게 용서와 자비를 원하시고 요구하신다면, 그건 바로 나의 영혼이 먼저 평화를 회복하길 바라시는 것이니까요.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워지라는 권고에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해방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어린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 마음이 지옥 같고 분노가 들끓어, 용서가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 힘으로는 용서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세상사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도전을 받을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 스스로를 볶아대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당신에게서 자비를 거두지 않으실 것이니까요.
다만,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간직한 죄인으로서,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보려 죽음같은 자기 비움(버림)의 강을 건넌 이는 아직 거기까지 이르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용서와 자비라는 보화의 가치를 더 깊이 깨닫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용서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임을 체득했기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하느님과의 친밀감은 덤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혹시 아직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만 용서하라네요.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벗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랍니다. 안된다구요? 벗님은 자비와 용서의 대가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벗님은 그분을 닮은 아들이고 딸입니다. 벗님도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혹 그 너그러움이 내 가족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될 듯한 사람까지만 미치지는 않는지요? 하느님의 자비는 온 인류에게 미치고 온 삼라만상에까지 이르지요.
따라서 참 하느님 자녀는 자비의 폭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지새끼 귀한 줄 알고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에게 잘 하는 일은 비단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도 그렇게 하지요. 하느님 자녀는 그보다는 더 마음 씀씀이가 넓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비로운 사람은 손해 보는 길을 택하지만 언제나 넉넉합니다. 인색한 사람은 이익이 될 듯한 길을 택하지만 결국은 쫄딱 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 보고 너무 정확한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손익을 따지지 말라고 하시네요. 그냥 좀 손해 보고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만이 아니라 잘못 해 주는 사람들을 축복해주고 기도해주라네요. 남을 함부러 심판하지도 말고 용서하라고 하네요. 내 것 챙기려 애쓰지 말고 자꾸만 퍼주라고 하네요. 퍼주면 훨씬 후하게 받게 될 거라면서...
오늘 그렇게 한번 해 보실래요? 오늘은 좀 손해보는 날 됩시다. 오늘은 퍼주는 날 됩시다. 오늘은 따지지 말고 용서하는 날 됩시다. 후후 나중에 몇 배로 받게 될 그 날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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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6,36.38)
2016년 교회는 자비의 성년을 통해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풍성한 자비를 깊이 묵상하고 자비를 베푸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는 한 해였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1980년 선포하신 「자비의 회칙」 이후에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자비로운 교회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다시금 재조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용서)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봅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의 예수님의 만남에서 드러난 것처럼, 또한 다니엘 예언서에도 언급된 것처럼, 그것은 인간의 부끄러움과 하느님의 의로우심, 비참함과 자비하심의 극명한 간극間隙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비참함과 부끄러움은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때 하느님의 전지전능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볼 때 우리의 얼굴에는 부끄러움만 가득하지 않고 그 자비로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희망에서 솟아나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 자비로운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각성할 수 있게 됩니다.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에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라는 말씀을 들었고, 오늘 루카 복음에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36) 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누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함을 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완전함을 당신께서 친히 보여 주신 사랑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조금 더 아버지의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로13,10)고 했고, 교회 역시 「교회헌장 40항」에서 인간이 실현해야 하는 완전함은 바로 주님께서 실제로 모든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도록”(마르 12,30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함에(요13,34;15,12 참조)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태오와 루카의 관점이 상이하다고 보기보다 유사한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루카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새로운 모습을 새로운 어휘로써,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선포하기 이전, 이스라엘의 주된 관심사는 성과 속(=거룩함과 불경함), 정과 부정(=깨끗함과 불결함)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였지만, 이는 동전의 한 면에 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곧 자비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거룩함은 비판적이며 회의적으로, 거룩하지 않은(=죄인) 혹 깨끗하지 않은(=불결/부정) 사람들과 분리, 분열, 차별 그리고 적대 관계가 팽배하지만 이에 반해 자비함은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비록 그 존재가 거룩하지 않은 사람들 내지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해도 그들과의 관계에서 일치, 친교, 존경과 환대가 있으며 그들을 지지와 나눔이 우선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의 어떤 이미지를 갖고 사느냐는 단순히 의식의 문제만이 아니라 행동과 생활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거룩함을 우선시할 때 교회 안에서 의인과 죄인 그리고 깨끗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으로 구분되고, 심판과 단죄가 빈번하게 벌어지며 바리사이들처럼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종교인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미지를 사는 사람들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지금껏 의롭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지 않은 흔히 죄인이라고 해서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아버지시며 어머니시고, 거룩하시면서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흔히 말해서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다, 고 하는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자비로우심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닮아갈 때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며, 비록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그들과 우리 사이에 분열과 불목이 아닌 일치와 친교가, 단죄와 심판이 아닌 용서와 자비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리라 봅니다.
이렇게 우리 아버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 또한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를 베풀 때 하느님께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저희 품에 담아 주실 것”(6,38)을 저는 믿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우리 아버지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지 못해서 자비를 살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단죄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은 사람이며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전 메쥬고리아 성지 순례할 때, 미사 중에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라고 표현하자 그런 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양반 왈, 왜 불교 용어를 미사 중에 사용합니까?, 라는 항변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의 화신이며 육화입니다. 예수님은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존재 상황과 관계를 함께 나누시기 위한 사랑을 사셨는데 그 사랑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同體大悲, 同其塵(=티끌과도 하나됨)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사람인 우리와 모든 점에 있어서 같아지신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습니까? 이 사순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깨닫고 실천해야 할 우리 존재의 새로운 비전과 통찰은 다름 아닌 자비입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지만 특별히 자모이신 성교회가 되살려야 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자비이며, 이 자비가 교회 안에 넘쳐날 때 세상의 수많은 고통당하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이웃들의 피신처가 쉼터 그리고 품이 되리라 봅니다.
어느 분은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빵을 말썽 없이 나누려면 쪼갠 뒤에 먼저 골라잡게 하라, 고 말입니다. 어찌 빵뿐이겠습니까? 많은 부분에서 약자나 소수자에게 선택권을 양보하면 그 시점에서부터 관계와 소통이 그리고 화해와 친교가 일어날 것이며 이것이 오늘 복음의 자비라고 봅니다. 타인을 나와 다르다, 거룩함의 시선에서 의인과 죄인의 구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심판하는 사고 의식과 행동 양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닮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부단히 은총을 청해야 하리라 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자비를 바탕으로 자비를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 저희 죄대로 저희를 다루지 마소서.”(시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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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바람둥이 남자가 있습니다. 워낙 여자 문제를 많이 일으킨, 어느 날 동생이 형에게 “제발 정신 차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은 어릴 때, 동생에게 엄마의 사랑을 빼앗긴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엄마가 동생만 챙기는 바람에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떨었고, 결국 지금의 인간관계까지 망치고 있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이 남자의 바람기가 과연 어머니 때문일까요?
어떤 형제님은 어린 자녀에게 폭력을 자주 씁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말리자, 어렸을 때 자기 부모님께 맞았던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많이 맞은 경험이 자기 역시도 그렇게 폭력을 쓰는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형제님의 폭력성이 과연 부모 때문일까요?
이 두 사례 말고도 ‘~탓’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를 탓하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로써 자기의 문제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절대 바꿀 수가 없으니, 자신의 문제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나의 모든 문제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자기는 늘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은 지금 모습을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탓’만 하면서 지금 모습을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문제 없으니 그냥 이대로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도 문제를 넘기게 되어서 모두 힘들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선포하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하게 됩니다. 따라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지 않는 삶, 단죄하지 않는 삶, 용서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앞선 예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탓’을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면 자기도 그러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랑의 삶을 그대로 되갚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삶을 그저 따를 뿐인데도, 그런 삶을 살 때 더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탓’을 하는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비로우신 아버지’에 집중하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보고 또 이를 따르는데 철저한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문제 되는 것들을 과거의 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지금, 그리고 나 자신이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올바르게 지금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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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 그대 나>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하느님 그대 나>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
하느님 안에
나 있듯이
내 안에
하느님 계시고
하느님 안에
그대 있듯이
그대 안에
하느님 계시어
내 안에
그대 있고
그대 안에
나 있으니
나는 그대요
그대는 나일지니
나 볼 때
그대 보듯이
그대 볼 때
나 보듯이
그리하여
나와 그대는
그리하여
그대와 나는
서로 믿음이요
서로 희망이요
서로 사랑이요
서로 용서요
서로 자비요
서로 살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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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 하고 원고 없이 하면,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 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 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먼!” 하고 예화를 안 하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 하며, 부자와 가까이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 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누구에게 칭찬받는 것은 자기의 역할에 관계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을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 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판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판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 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험담은 무엇입니까? 남의 잘못된 점이나 흉을 들추어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험담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니며,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험담은 단 하나 상처만 깊게 남길 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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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
평생 과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근래 ‘시대의 스승’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장일순((1928-2010)과 신영복(1941-2016)을 꼽고 싶습니다. 두 분의 글씨도 참 깊고 독특하고 향기로운 예술입니다. 두 분의 평전도 감동적이라 보관중이며 가끔 읽고 있습니다. 장일순에 대한 평과 사례를 소개합니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 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은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고 꼽았던 사람, <사상의 은사>라는 리영희가 존경했던 분….”
무위당 장일순에게 감화를 받은 분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이분에 대한 찬사글도 끝없이 많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소개글 하나 나눕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그 일을 어떻게 할지를 소중하게 여기라 하며, 공무원에게는 민(民)을, 장사꾼에게는 손님을 하늘처럼 섬기며 정성을 다하라고 말했다. ‘자네 집에 밥 잡수러 오신 분들이 자네의 하느님이여. 그런 줄 알고 진짜 하느님이 오신 것처럼 요리를 해서 대접해야 해. 장사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생각은 일절 할 필요가 없어요. 하느님처럼 섬기면 하느님들이 알아서 다 먹여주신다 이 말이야.'
장일순은 길을 가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세세한 가정사를 묻고 어른들의 안부를 살폈다. 리어카를 끄는 사람이든 바구니 장사든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여러 가지 사연도 따랐다. 김지하의 말에 따르면 봉산동 집에서 20분이면 충분한 거리를 보통 2시간씩 걸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다운 참으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경청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입니다. 이분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생 과제를 제시합니다. 아버지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에 이은 결정판 같은 말씀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우리의 ‘거룩함(holiness)’은 하느님의 ‘온전함(wholeness)“을 보여줘야 합니다. 거룩함이 온전함이며 영어발음도 같습니다. 참으로 자비로운 삶이 거룩한, 온전한 삶입니다. <둥근 마음, 둥근 삶> 제 책명이 가리키는 바역시 자비로움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은 평지설교의 결론이자 우리의 평생과제를 제시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하느님의 얼굴도, 이름도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비”입니다.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로운 사람이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평생과제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그러니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의 궁극 목표는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어지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가르침에서 자비행의 구체적 지침을 주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바로 남을 심판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단죄하지 않는 사람이, 끊임없이 용서하고, 주는(giving) 사람이, 섬기는(serving) 사람이, 돌보는(caring) 사람이, 나누는(sharing) 사람이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교만하고 인색한 사람이 남을 심판하고 단죄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관대한, 지혜로운 자비의 사람은 결코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무조건 용서하고 주고 나누고 돌보고 섬깁니다.
새삼 자비로운 삶도 영적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비로운 삶을 선택하여 평생 훈련으로 습관화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지라 합니다. 마지막 천국문 통과시 주님께서 검사할 마음의 얼굴입니다. 얼마나 아버지를 닮은 자비로운 얼굴인지 말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언자 다니엘의 동포를 위한 기도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자비행에 앞서 이런 진실한 기도와 회개의 실천이, 훈련이 우리를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그러니 한결같은 자발적 자비행과 기도와 회개의 훈련 및 습관화입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훈련에 앞서 이런 철저한 기도와 회개가 우선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우러러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우선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회개가 없기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내로남불, 인면수심(人面獸心), 후안무치(厚顔無恥)의 괴물같은, 자기를 모르는 무지의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기본적 정서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자기인식을 전제로 한 겸손하고 자비로운 삶, 바로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중 날로 주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우리의 평생과제요 이런 사람이 진정 참사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자비의 훈련에 항구함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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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자비 남용, 용서 남용>
오늘 독서와 복음 모두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래서 저도 자비와 용서에 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오늘은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집중코자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제가 남용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자비 남용, 용서 남용, 이것이 저의 태도입니다.
자비란 죄를 지었는데 죄지은 나를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때 그 용서하시는 사랑을 특별히 일컬어 자비라고 하고,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용서해 주시는 사랑을 일컬어 자비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용서하실 때 저의 태도는 어떠해야겠습니까? 하느님께는 감사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반복하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하느님처럼 자비롭고 용서하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잘못된 태도들이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 자비와 용서를 우습게 여기는 가장 나쁜 태도가 있습니다.
교만한 자의 태도이거나 세상 권력자의 자비와 용서가 필요하지 하느님 자비와 용서는 필요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로 교만하지 않고, 세상 권력자들을 제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거나 용서할 사람이지 그들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을 정도로 저는 도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해 다음으로 잘못된 태도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것이 감사로 이어지지 않는 태도입니다.
복음에서 열 나병환자가 같이 치유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주님께 감사하고 하느님을 찬미한 것과 달리 정작 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하게 여겼기에 아무 감사를 드리지 않았지요.
저의 잘못된 태도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감사를 드리는 사람이긴 합니다. 그러나 잘못에서 돌아서지 않는 잘못을 또 범하는 것입니다.
저의 자비 남용과 용서 남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을 약의 남용과 비유하면 좋을 것입니다.
약이 좋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니, 믿는 정도가 아니라 과신합니다. 그래서 약만 믿고 나쁜 짓을 계속합니다. 간에 좋은 약을 믿고 술을 계속 먹는 다시 말해서 끊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계속 용서하실 거라고 하느님 자비를 믿습니다. 이 믿음은 철석같고 찰떡같고 확고하지만,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입니다.
과신이고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분명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내가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는 것이 과신이고 잘못입니다. 이는 부모의 사랑을 믿고 흥청망청 돈을 쓰고 나쁜 짓을 계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다니엘서는 이런 저와 같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한 반성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고, 주 저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통하여 저희 앞에 내놓으신 법에 따라 걷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잘못된 또 다른 태도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내가 위로부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받았으면 옆으로 그 자비와 용서를 이웃에게 베풀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자비를 그렇게 받았어도 아직도 하느님 자비가 부족한 것처럼 자비하지 않은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께서 더 자비를 베푸셔야 내가 자비로 가득 찰지!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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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
오늘 복음의 시작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그리고 끝은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심판이니 단죄니 용서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비결은 아버지로부터 자비를 받아서 되는 것인데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심판과 단죄는 하지 않고 용서할 때 그만큼 자비를 주신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 복음 말씀을 저는 수없이 묵상했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이렇게 묵상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보게 됐습니다.
전에는 단죄나 심판이나 용서를 사람끼리 주고받는 그런 차원에서 오늘 말씀을 주로 묵상했는데 이번에 더 명확히 성찰하게 된 것은 사람끼리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에게 줄 때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는 것은 이웃에게이고 받는 것은 하느님에게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저뿐 아니라 우리는 인간끼리 주고받으며 살고, 그러는 가운데서 조금 더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 현명한 사람은 떼 먹히는 일이 있을지라도 주는 사람이 받고 주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많이 줄수록 많이 받고 적게 주면 적게 받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받기 위해 주고 그래서 떼 먹힐 경우 상처를 받습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이 싫어서 아예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삽니다.
그런데 진정 현명하고 신앙적인 사람은 줘버리고 맙니다. 아예 받을 생각이 없고 그래서 떼 먹히지도 않고 하느님께로부터 받기에 하나의 사랑 라인이 형성됩니다.
사랑 라인이란 이번에 제가 만들어낸 말인데 영어로 하면 Love-Line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말의 내리사랑이라는 말과 비슷하고요.
사랑에는 기울기가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끼리는 기울기가 없어서 준만큼 받으려고 하는데 줘버리고 받지 않으려는 사랑은 기울기가 있는 사랑이고 하느님 사랑을 닮은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내리사랑이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그리고 그 자녀가 부모가 되어 또 자녀에게 이어지듯 신적인 내리사랑도 아버지인 하느님으로부터 우리에게로 그리고 우리가 다시 사랑의 아버지가 됨으로써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다시 명심해야할 것은 받는 것은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인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주는 것은 내가 사랑과 용서의 아버지가 되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자녀에서 사랑하는 아비가 되기로 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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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오늘 복음(루카 6,36-38)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매순간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허물(죄)이 많습니다. 더욱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까지 내어주신 하느님의 큰사랑 앞에서 보면, 우리는 언제나 허물이 많은 죄인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오늘 독서(다니 9,4ㄴ-10)의 말씀처럼 언제나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 9,5.7)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면 언제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다시 살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73권)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언제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니, 이젠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복음이 전하는 말씀처럼, 너를 심판하지 말아야 하고, 너를 단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를 용서해야 하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후하게 받았으니 우리도 너에게 후하게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8)
오늘도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고백합시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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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7RKlbmko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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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 37)
어두운 마음을
밝히는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말씀입니다.
심판을
멈추어야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결코
심판으로는
가까워질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자비의 실천이
없기에
용서의 체험도
없습니다.
심판의 끝은
죽음이지만
용서의 끝은
우리 모두의
자유입니다.
하느님으로 인해
우리는
자비와 용서를
얻습니다.
먼저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밝히는 것은
마음입니다.
자비도
용서도
평화도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이
우리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심판과 단죄가
없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자기의 소중함을
올바로 아는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것은
심판이 아닌
자비이며
용서입니다.
자신의 아픔에만
골몰하면
타인의 십자가를
볼 수도 없고
동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구원을 체험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움이 아닌
용서를 통해
용서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의 참된
정신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랑이 심판을
이기며
자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사람이 필요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를
묻는 사순의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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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 37)
행복해지는 첫 걸음은 용서하는 마음이다.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를 용서하는 것이다. 창조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용서의 삶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삶으로 다시 피어나게 하는 것 또한 다름 아닌 용서이다. 용서의 마음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 나라의 마음이다. 평화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용서의 관계는 자기 반성이라는 내적 의미를 만나는 시간이다. 지나친 욕망의 충족이 미움과 증오로 위선과 거짓으로 서로를 내몰았다. 진정한 의미의 관계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실천하는 용서의 사순이다.
삶이 있기에 십자가가 있고 고통이 있기에 용서가 있다. 용서는 회개를 바탕으로 서로를 일으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진심 어린 기도이다.
기도가 쌓여 용서가 되고 용서가 쌓여 새로운 삶이 된다. 새로운 삶이란 고통을 덜어주는 용서의 삶이다. 주고받아야 함께 살 수 있는 용서이다.
수도 공동체도 용서를 주고 받아야 존재할 수 있는 용서의 공동체이다. 마음을 살리는 것이 용서이다. 용서의 현주소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용서의 새날이다.
용서는 상황을 탓 하지 않는다. 오히려 척박한 십자가에서 새롭게 움을 틔우는 용서의 힘이다. 사람이 발전하는 것은 용서로 나아가려 노력하는 기도에 있기 때문이다.
용서가 삶의 부활이며 참된 사랑이다. 그 사랑을 실천할 용기를 청하는 용서의 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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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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