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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도전투(硫黃島.이오지마전투)
태평양 전쟁 말기,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 동안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지마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이오지마는 도쿄 남쪽의 1,080킬로미터에,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어 '이오지마(硫黄島, 유황도)로 불렸다. 토양은 화산재라 보수성이 없었고, 물은 짠 우물물이나 빗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000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개전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3,700명 내지 3,8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당시 항공병 1,500명과 항공기 20기를 배치하고 있었다.
이오지마의 성조기1944년 2월, 미군은 마셜 제도를 점령하면서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대규모 공습을 실시했다. 이에 대항해 일본 대본영은 캐롤라인 제도와 마리아나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를 묶는 방어선을 '절대 국방권'으로 지정해 사수를 결정한다. 방위선 수비 병력으로서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가 지휘하는 제31군이 편성되었다. 그 밑에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 사령관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이 취임했다. 이오지마에는 3월부터 시작해 4월까지 증원부대가 도착해 총병력은 5,000명을 헤아리고 있었다.
1944년 여름, 미군은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했으며 11월부터는 B-29에 의한 일본 본토까지의 장거리 폭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로 향하는 B-29를 무선으로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 본토로 침입하는 미군의 침투를 미리 대비하고 있는 상황이 많이 발생해, 큰 타격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벌어졌다. 또한, 마리아나 제도와 일본 본토사이는 상당한 장거리이기 때문에 호위 전투기가 수반하지 못하고 일본 상공에서 피격받거나 고장난 B-29가 도착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역으로 일본군 폭격기는 이오지마를 경유해 미군의 마리아나 제도의 기지를 급습하면서 지상의 B-29에 타격을 주고 있었다. 특히 12월에는 11기의 B-29가 폭격당해 손실되었다.
미국 태평양 통합 작전 본부는 일본군 항공기 공격기지의 격멸, 일본군 조기 경보 시스템의 파괴, 이오지마를 피하기 위해 손실되는 작전 능률, 손상 폭격기의 중간 착륙장의 확보, 장거리 호위 전투기 기지의 확보를 위해 이오지마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1945년 2월 16일~1945년 3월 26일)는 태평양 전쟁 말기, 오가사와라 제도의 이오지마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태평양 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3월 17일에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3월 21일에 대일본제국 대본영은 3월 17일에 이오지마 섬에 있던 일본군이 '옥쇄'(玉砕)했다고 발표했다. 3월 26일,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 이하 남은 300명의 일본군이 마지막 돌격을 했으나 전멸했다. 이것으로 인해 조직적인 전투는 종결되었다.
2만 933명의 일본군 수비 병력 중, 2만 129명이 전사했다. 피해율은 96%였다. 한편, 미군은 전사자가 6821명, 부상자가 2만 1865명으로 집계되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수백 개의 섬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미군의 손해가 일본군의 피해를 넘어선 전투이다(단, 미군의 전사자와 부상자의 합계). 다만, 피해율은 약 40%이다.
☞ (주)
<유황도(硫黃島.이오섬)> : 서태평양상의 가산(火山) 열도에 있는 일본의 섬. 전설에 따르면 '악마의 섬'이라고 한다. 1945년 이곳에서는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미군이 미트 그라인더 힐이라 불렀던 북쪽의 고지와 남쪽의 스리바치(摺鉢) 사화산을 놓고 가장 치열하게 싸웠다.
미해병이 이곳에 성조기를 세우는 사진은 널리 보급되었고 이를 토대로 한 그림, 동상, 3센트짜리 우표 등이 나왔다. 2만 2,000명가량의 일본군이 죽거나 생포되었고 미군측도 4,500명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만 1,000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1951년 가산 열도는 미국의 점령하에 있다가 1968년 일본에 반환되어 도쿄도(東京都) 관할하에 들어갔다. 면적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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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휘(光輝), 분명한 존재가치(存在價値)에
[고국을 떠나온 지 몇 달이런가.
생사를 같이 하자는 이 말과 함께
적을 물리치며 지나온 그 산하(山河)……
잡고 있는 말고삐에 피가 통하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에서 널리 불렸던 국민가요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의 첫머리의 일절이다. 그리고 작사자(作詞者)인 구리바야시 다다미치(栗林忠道) 중장(中將)으로서는 ‘잡고 있는 말고삐에 피가 통하네’라는 구절이 특히 자랑이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 노래를 작사한 것은 그가 기병(騎兵) 대좌(大佐)로서 육군성(陸軍省) 마정과장(馬政課長)으로 있을 때였다. 이 한 구절에 기병의 본령인 ‘인마일체(人馬一體)’ 정신과 또한 무언의 전사(戰士)인 군마(軍馬)에 대한 정애(情愛)를 표현할 수 있었다고 만족했던 바, 딱딱한 어구가 없는 가사인데다가 멜로디가 경쾌하였으므로 노래는 널리 애창되었다.
구리바야시의 문명(文名)은 높아졌다. 원래 육군대학을 2등으로 졸업한 수재인데다가 미국과 캐나다에 주재무관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용자(容姿)도 단정하므로 당시의 육군 장교들 중에서 가장 멋쟁이 장군이자, 또한 소위 문인파(文人派)의 대표적 존재로 지목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리바야시 중장은 그 귀족적 기풍이라든가 문재(文才)로 뛰어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육군이 낳은 가장 과감한 지휘관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1944년 5월 27일부로 제109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제109사단은 새로 편성된 부대로서 오가사와라(小笠原) 집단의 주력이었다. 수비 범위는 오가사와라 군도(群島)의 지찌(父) 섬, 하하(母) 섬, 유황도(硫黃島), 미나미도리(南島) 섬까지 미쳤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오가사와라 지구 집단장을 겸했으므로 사령부는 지찌 섬에 두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구리바야시 중장은 고개를 저었다.
“오가사와라 제도 중에 유황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비행장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적의 목표도 틀림없이 유황도에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지휘관은 전장(戰場)의 초점에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후방의 편안한 곳을 찾는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자기의 지휘하에 있는 부대가 집결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6월 8일에 전속부관(專屬副官) 한 사람만 데리고 유황도로 부임하였다. 부임한 지 1주일만에 사이판 섬에 적이 상륙하였으므로 유황도도 견제 공습을 받았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으로 봐서는 최종적인 단계가 다가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1944년 12월경 일본 대본영(大本營)은 레이테의 패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다음 단계에 미군과 기타 연합군의 반격로(反擊路)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구리바야시의 부임처는 자연 최전선이 될 것으로 짐작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었다.
연말(年末) 일본은 미국의 다음 진공 예정 방향에 대해 필리핀을 공략한 후 중국 남부를 거쳐 그곳에 항공기지를 구축하고 나서 오키나와로 쳐들어오든가, 아니면 중국에는 상륙하지 않고 오가사와라 섬들을 공격하고는 섬을 따라서 오키나와나 대만으로 오든가 그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 유황도를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때 유황도에 세 개의 비행장과 유력한 방공감시 시설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 섬을 거점으로 하여 때때로 마리아나 군도의 미 항공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유황도는 오키나와와 대만에의 길목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그 전략적 가치가 크게 부각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 유황도가 함락된다면, 일본 본토의 위력은 급속히 증가되기 마련이었다. 미 해공군(海空軍)은 벌써 그러한 점에 착안하여 1944년 6월부터 이 섬에 대하여 포격과 폭격을 시작하고, 특히 12월 이후에는 대단한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유황도는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도쿄와 마리아나 중간 지점에 쇠고기 덩어리 같은 모양의 이 작은 섬은 제일 폭 넓은 곳이 겨우 2 마일밖에 안 되고, 그 길이 역시 5 마일에 불과한 태평양상의 콩알만한 섬이었다. 어느 정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있었는가. 마리아나 기지의 B29 폭격대 사령관 카티스 르메이의 말을 빌면 다음과 같다.
“이 섬은 아직 싸우지도 않았는데, 너무 지나치게 선전되어 버렸다. 그만큼 유명해진 섬이다.”
구리바야시가 지휘할 수 있는 부대는 작은 섬치고는 규모가 큰 것이었다. 제109사단의 보병 9개 대대를 근간으로 전차(戰車) 1개 연대 23대, 포병(砲兵) 2개 대대 약 40문, 속사포(速射砲) 5개 대대 약 70문, 박격포(迫擊砲) 5개 대대 약 110문이 있었고, 해군 병력 5천5백 명이 중포(重砲) 20문, 기관포 170문을 가지고 그에게 배속되었다.
이 병력만으로 일본 본토를 위협하고 침공하려는 막강의 대군을 맞아 유황도를 지켜야 했다. 구리바야시는 유황도를 돌아보고 구상과 계획에 골몰했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충용(忠勇)스러운 휘하 부대의 필사적인 항거의 필요성을 통삼하게 되었다.
한편, 미군은 이 섬을 빼앗기 위하여 물량적(物量的)인 대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강했다. 특히 옥쇄전법(玉碎戰法)으로 임하는 일본군의 '죽음작전‘은 이미 태평양 전역의 미군들을 벌벌 떨게 하고 있는 터였다. 강력한 포격으로 섬 전체의 방위력을 결정적으로 분쇄한 다음에 인명의 손실 없이 이 섬을 점령해야 했다.
이러한 사실을 구리바야시는 대충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완전히 전법에 대비할 수 있는 작전을 택하는 두더지식 계획을 뇌리에서 짜내기 시작했다.
‘어디 두고 보자. 이 자리에 있는 작은 섬을 적으로서의 일본군 결정적 전투장(戰鬪場)으로 만들어 보자.’
구리바야시는 유황도를 돌아보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만큼 이 섬의 전략적 가치는 높았던 것이다. 사이판 섬에 적이 상륙한 이상, 사이판과 도쿄의 중간에 있는 유황도의 비행장을 목표로 미군이 공격해 올 것은 자연스럽고 또한 시간적인 문제로 판단할 수 있었다. 사이판을 확보하였을 경우에 미군으로서는 유황도가 사이판으로부터 일본 본토로 가는 B29 폭격기의 불시착(不時着) 장소로, 또는 호위 전투기의 중계기지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측의 반격 기지를 소멸시킨다는 뜻에서도 그 공략이 절대로 필요하였다.
오가사와라 지구집단은 오가사와라 병단(兵團)으로 증강, 개편되었으며, 보병 제145연대, 전차 제26연대를 비롯하여 병단 병력의 대부분이 유황도로 이동하였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유황도를 일대 지하요새로 만들어서 적을 맞기로 결정하였다.
유황도는 비좁았다. 면적은 불과 20 평방킬로에 지나지 않았으며, 끝에서 끝까지 가장 긴 곳(북동에서 남서)이 약 8.3 킬로이고, 가장 비좁은 지시마(千鳥)의 남부 같은 곳은 약 8백 미터였다. 그 위에 남단(南端) 높이 169 미터의 스리바치((摺鉢山) 산이 솟아 잇을 뿐이지, 섬 전체는 거의 평탄했다. 이 평탄한 지형이 비행장의 적지(適地)로 되었던 것이지만, 전장(戰場)으로서는 매우 수비하기 어려운 장소였다. 지하호(地下壕) 진지에 의지하여 적의 격멸을 꾀하는 전술은, 말하자면, 지형상의 당연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실행은 지극히 곤란했다.
유황도의 생활 조건은 지극히 나빴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특히 깨끗한 것을 좋아했는데 숙사로 발을 들여놓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드기라는 그로테스크하고 불결한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글거리고 있었으며, 파리도 말할 때 입 속으로 날아들어올 만큼 새까맣게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개미도 많았다. 땅바닥은 말할 것도 없고 나무줄기나 집의 기둥에 새까맣게 기어다니고 있었으며, 밤에는 개미굴로 들어가는지 다소 줄어드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옷을 입은 채로 누워있으면 온몸을 기어다니는 감촉으로 하룻밤에 두세 번은 잠을 깬다. 구리바야시 중장으로서는 쓰레기통에서 사는 것처럼 싫었으며, 더욱이 그에게 쇼크를 준 것은 섬의 물 부족이었다.
유황도는 그 이름과 같이 화산열도(火山列島)에 속하므로 스리바치 산의 화산 활동은 끝났더라도 온 섬 여기저기에는 분연(噴煙)을 내뿜고 있었으며, 이곳저곳에 용출구(湧出口)가 벌어져서 유황(硫黃) 가스의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이 가스와 지열(地熱) 때문에 뱀이라든가 독충(毒蟲)은 없었으나, 그 대신 솟아나는 물도 없었다. 음료수는 가끔 찾아오는 스콜을 모은다든가, 분출하는 유황의 증기를 여과(濾過)해서 입수하는 길밖에 없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이 섬에 오던 날부터 세숫대야에 받아둔 물로 눈ㅇ만을 씻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했고, 그 다음에 부관이 얼굴을 닦으며, 다시 그것은 변소의 손을 씻는 물로 쓰였다. 야채는 모두 건조야채였으며, 나중에는 약간의 푸서우기를 재배하였으나 천구(天水)에도 유황분이 섞여 있는지 덜 끓이거나 바닷물을 이용하여 밥을 지으면 심한 설사를 하였다.
“별고 없는 줄로 생각하오, 나도 건강하게 지내고 잇소만, 지옥에서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소.”
이것은 구리바야시 중장이 7월 7일 그의 53세 생일날에 도쿄에 잇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부인에게는 어쨌든 간에 구리바야시 중장은 부하들 앞에서는 조금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황도의 나쁜 환경은 적탄 이상으로 중대한 위험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의 지하요새 구상은 철저한 것이었다. 지하호(地下壕) 진지는 지하 15 내지 20 미터 깊이로 파서 폭탄이라면 250킬로그램 이상, 포탄이라면 전함(戰艦)의 주포(主砲)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특히 스리바치 산과 북부 대지(臺地)의 모토(元) 산에 주진지(主陣地)를 만드는 데에 힘쓴다. 그리고 해안에는 반지하식 철근 콘크리트제 토치카를 배치하는 동시에 이들 토치카를 지하에서 연결시키는 것 외에도 스리바치 산과 모토 산과의 지하 연락로(連絡路), 다시 섬을 일주하는 지하도도 만들어서 어디서라도 적의 측배(側背)를 습격할 수 있는 태세를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유황도는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갱도(坑道) 작업에 부적당한 곳이리라. 지열이 높아서 지하 10미터에서는 섭씨 49도까지 올라갔다. 고무창으로 된 신발의 밑바닥이 녹을 정도였으며, 병사들은 훈도시(일본인 특유의 것으로 남자 음부를 가리는 폭이 좁고 긴 천)만 찬 채, 때로는 방독 마스크를 쓰고 곡괭이나 삽으로 파는 것이었으나, 1회의 작업시간은 3분 내지 5분으로 도저히 그 이상은 계속할 수가 없었다. 반나절 일하면 웬만큼 체력이 뛰어난 병사라도 나머지 반나절은 심한 두통과 싸우면서 다리가 비틀비틀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다가 섬 생활의 악조건이 겹치었다.
이러한 악조건 아래서 어떻게 하면 병사에게 방비진(防備陣)의 완성을 촉진시키고 적을 격멸하겠다는 전의(戰意)를 유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구리바야시 중장이 직면한 과제는 아마도 전사에 그 유래가 드문 곤란에 빠졌던 지휘관의 본보기였다고 할 수 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지휘관 진두, 군기숙정(軍紀肅正), 상하일체(上下一體)’의 세 가지 요목(要目)이 그 해답이라고 확신하였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잇따라 유황도 부대의 슬로건을 작성하였다.
실전본위(實戰本位), 경례엄정(敬禮嚴正), 시간엄수(時間嚴守), 명령의 속달즉행(速達卽行), 방심금물(放心禁物)은 구리바야시 중장이 맨 먼저 고안하고 섬에 새 부대가 도착할 때마다 지시한 요망 사항이었다. 그 외에 특히 정신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일본 정신의 기간(基幹)은 유구(悠久) 3천년의 존엄한 국체(國體)로부터 생겼다. 우리는 이 정신을 유린하는 적을 격멸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극복할 것을 맹세한다.”
라는 일본 정신 연성(鍊成) 5서(五誓)와 또 다음과 같은 감투(敢鬪)의 맹세도 만들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이 섬을 지키겠다. 우리는 각자가 적을 10명 죽이지 않고는 맹세코 죽지 않는다. 우리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게릴라가 되어 적을 괴롭히겠다.”
다시 1945년 초두(初頭)에 유황도 부대 2만933명(해군부대 7천347명 포함), 화포(火砲) 170문(해군 23문 포함)이 모두 모이자 구리바야시 중장은 새로 담(膽: 병단의 암호명)의 전투에 대한 마음가짐 15조를 배포하였다.
“팔방으로부터 습격해 오더라도 쓸 수 있는 진지를 만들라, 화망(火網)에 틈을 만들지 말고 전우가 쓰러지더라도… 넓고 드문드문 떨어지면 지휘 장악이 어렵다. 자진해서 간부의 지휘 밑으로 돌아가라. 한 사람의 용감함이 승리의 원인이 된다. 고전(苦戰)에 지쳐서 죽음을 서두르지 말라. 담(膽)의 사병들이여, 한 사람이라도 많이 죽이면 마침내 승리한다. 명예의 전사(戰死)란 10명을 죽이고 죽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격려의 말의 나열이 아니라 방비의 중점, 사격 요령, 접적(接敵)의 비결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야말로 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의 작사자다운 중장의 문재(文才)의 산물이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이러한 맹세와 마음가짐 등을 저작한 것은 이런 문장을 외움으로써 장병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반을 주려고 하였던 것인데, 중장은 더욱 명확하게 구체적인 지휘 통솔법을 보여주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특히 지휘관의 솔선과 상하 일체에 역점을 두고 감시를 엄격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중장은 산택을 겸해 섬 안을 한 바퀴 돌며 진지 구축, 지하호 파기, 전투훈련 상황을 살펴보았고, 오후에도 때로는 하루에 두서 번 순찰을 계속하였다.
“잠깐만 기다려. 그곳에 진지를 만들었을 경우 적이 이쪽에서 온다면……”
하고 중장은 갑자기 땅에 엎드리자 손에 들고 있던 눈금이 있는 지휘봉을 소총처럼 겨누고는,
“안 되겠어. 이쪽에 하나 더 기관총 진지를 만들어서 사각(死角)을 없애도록 하라!”
하고 지도하기도 하며, 또는 막대기를 모래에 꽂아 놓고,
“이래 가지고는 토치카가 너무 노출된단 말이야. 더 모래를 덮어씌우는 것이 좋다.”
라고 지시하는 등 그 시찰은 세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마도 장군께서 섬의 상황을 가장 잘 아시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갑자기 장군께서 예상도 하지 못했던 장소로부터 나타나시므로 언제나 놀라곤 했습니다.”
이것은 살아남은 대대장의 한 사람인 하라 미쓰아키(元光明) 소좌의 회상인데, 구리바야시 중장이 시찰의 주목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은 방비 상황과 동시에 병사들의 사기 특히 지휘관의 태도에 있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작업이나 훈련 중에는 상관이 순시하러 오더라도 경례할 필요가 없다고 명령하였으며, 또 복장도 동작에 편리하도록 하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한편 장교가 병사보다도 우아한 생활을 하는 것을 엄금하는 포고를 발표했었다.
“장교는 병사ㅡ이 식사에 전폭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장교의 식사만을 따로 만들며, 병사의 급식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일은 단연코 있을 수 없다.”
상하의 계급 차가 심한 근대에서는 자칫하면 장교와 병사와의 대우 차별이 생기고, 때로 그것이 뿌리 깊은 상하이간(上下離間)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하물며 물의 부족, 식량이 부족한 유황도에서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원한이 심해지면 일조유시사(一朝有事時)의 전력에 영향이 있을 것이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조건이 곤란할 경우 가장 필요한 것은 지휘관과 부하의 접촉이며, 그 접촉이 저하되면 될수록 부하의 사기는 침체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순시를 거르지 않았으며, 또한 전 장교 한 사람ㄷ고 빠짐없이 훈련과 축성(築城)에 매진할 것, 특히 사령부, 본부 등의 사무 처리를 철저히 간소화하고 각급 대장 은 항상 현장에 나가서 진두지휘를 철저히 하하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리바야시 중장은 각별히 지휘관의 태도에 주목하여 만일 사병들에게 상관에 대한 불평이 있을 경우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대장을 추궁하였다.
어느 날 시찰 도중, 한 사람의 대장이 세수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 구리바야시 중장은 매우 격노하였다. 그 대장은 세숫대야에 물을 조금 담아서 수건을 적셔가지고는 보물을 다루듯이 얼굴에 대고 있었던 것이지만, 중장은 화를 냈다. 물 한 방울은 피 한 방울만큼이나 귀중하게 여기고 있다. 스콜이 오면 비록 심야라 할지라도 전 장병은 알몸으로 뛰어나가서 모든 용기(容器)에 빗물을 받으며, 나뭇잎에 남아있는 물방울까지도 떨어서 저수(貯水)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구리바야시 중장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건을 적시다니, 당치도 않은 낭비가 아닌가. 구리바야시 중장은 문자 그대로 열화와 같이 대장을 꾸짖고, 그 좋지 못한 마음가짐을 책망하였다.
구리바야시 중장의 자세는 병사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유황도에는 벌써 적기(敵機)의 내습(來襲)이 빈번해졌으며, 저수(苧水) 탱크도 파괴되고 물자의 보급도 두절되어 식량 부족과 식수 부족은 더욱 심해졌다. 거듭되는 곤란을 견디다 못해 다른 부대의 식령을 훔친다든가 또는 소총으로 스스로 상처를 만들어 본국으로 후송을 바라는 병사들도 나오고 있었다. 첫째로 취사병, 둘째로 장교 당번병, 셋째로 경리병(經理兵), 넷째로 위생병(衛生兵)이라고 병사의 한 사람이 장교 당번병을 부러워했듯이 장교들 사이에도 공복을 견디다 못하여 그 특권을 행사하는 자도 있었다. 그때 구리바야시 중장의 준엄한 태도가 전해지자 병사들은 한결같이 중장에 대한 신뢰감이 강해졌다.
유황도의 장병들이 악조건에서도 사기를 유지하고 열기로 찌는 것만 같은 땅 속에 장대한 진지망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이 구리바야시 중장의 극기(克己)의 지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중장에게 주어진 이 장병들의 감분(感奮)은 전투에서도 그야말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황도에는 1945년 2월 19일, 미국 해병 제3ㆍ4ㆍ5 사단이 쇄도(殺到)하였다. 3개 사단의 병력은 7만5천145명, 75 밀리 이상의 화포(火砲)가 168문, 전차(戰車) 약 150대를 준비하였는데, 공략부대용의 함선 495 척 이외에 지원함정으로 구식 전함(戰艦) 7척, 중순양함(重巡洋艦) 4척, 구축함(驅逐艦) 15척, 호위항공모함(護衛航空母艦) 11척이 참가하였으며, 다시 대형 항공모함(航空母艦) 17척을 기간으로 하는 마크 미처 중장이 지휘하는 제58기동부대가 참가하였다.
총지휘관은 미 제5함대 사령장관 R 스프류안스 대장이었으며, 공략부대(攻略部隊)의 지휘관은 스미드 해병 중장, 그 밑에 제3ㆍ4ㆍ5 해병사단을 지휘하는 H 쉬미트 해병 소장의 제5 수륙양용군단(水陸兩用軍團)을 배치하는 조직이었다. 직접적인 전투 병력은 7만5천여 명이지만, 동행하는 해군부대 장병까지 합치면 11만1천3백 명에 달했으며, 그것을 위한 물자는 방대하였다. 탄약ㆍ식량ㆍ기타 공략부대만으로도 병사 1인당 1톤을 넘는 양(量)이 운반되었으며, 담배는 10억 개비, 캔디ㆍ면도ㆍ화장지 등 드럭 스토아 6천 점(店_)분의 잡화도 준비되어 있었다.
유황도 공략에 이어 오키나와(沖縄) 작전이 예저오디고 있었으며, 유황도 공략은 5일간으로 끝낼 수 있다고 예상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예상대로 달성될 수 있다고 공략부대 지휘관인 스미드 해병 중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유황도에는 사전 폭격을 충분히 가했으므로 전도(全島)는 거의 녹색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불타 버렸다. 상륙 직전의 포격과 폭격도 폭탄 124톤, 로켓탄 2,254발, 네이팜 소이탄(燒夷彈) 100 발을 하늘로부터 때려 넣었으며, 함정(艦艇)들은 16인치에서 5인치 포까지 합계 3만8천550발을 쏘았다. 남단(南端)에 있는 스리바치 산은 dir 7분의 1이 날아가 버렸으며, 섬 전체가 폭연(爆煙)에 휩싸여 생물이라고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황도의 장병들은 거의 대부분이 땅 속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도(地下道)는 예정했던 28킬로의 약 70퍼센트인 약 18킬로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상륙부대는 제4ㆍ5 해병사단이 주력이었고, 상륙 그 자체는 비교적 쉬웠지만, 해안으로부터 내륙에 이르는 사면(斜面)을 넘으려고 하는 순간에 일본군의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전투는 구리바야시 중장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미군 함포사격은 사흘 동안 숨돌릴 사이도 없이 계속되었다. 작은 섬은 연기와 모래구름, 그리고 작열광선(灼熱光線)을고 그 모양이 완전히 달라진 듯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가만히 있었다.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계획된 상륙은 해안까지 진출을 무난하게 해 주었다. 상륙 개시 첫날 미군은 오후 8시까지 동남(東南) 해안 기슭에 약 1만 명의 병력과 전차 약 200대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용이하지 않았다. 해안에서 더 높은 뭍으로 올라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총총히 쥐구멍처럼 자리잡은 구리바야시식 작전에 위한 반격은 불을 뿜었다.
상륙한 미군은 아주 대단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미군들은 연거푸 무전을 암호 아닌 생으로 보내야 했다.
“대손실을 업었다. 전차를 한꺼번에 보내지 말라.”
“아무것도 필요 없다. 위생대를 시급히 보내라.”
이런 아우성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연료집적소(燃料集積所)가 탔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나 역시 죽기를 각오한 싸움은 패전을 결론으로 했다. 그러나 구리바야시의 작전은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미군의 손실은 너무나 컸다. 미군측은 이외의 강경한 반항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쩌면 장기화(長期化)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쾌속기동함대를 일본 근해까지 보내 25일, 도쿄 부근의 비행장과 항공기 공장을 공격하고, 또 하지조오(八丈)) 섬도 공습을 가했다. 유황도 지역에 대한 일본 홍공대의 구원 작전을 방해하려고 한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병력이 파리떼처럼 몰려있는 곳에 한 번 일본 항공대가 와서 공격을 한다면 견딜 수 없을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
마군은 병력을 급히 증강시키면서 남쪽의 스리바치 산과 북부를 차단하며 공략전에 전력을 기울였다. 북방의 일본군 진지는 완전 파괴를 목적으로 하루에 3만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깊은 둥굴 진지는 그렇게 쉽사히 파괴되지 않았다. 그리고 구리바야시의 훈도로 완전히 사령(死靈)에 가까운 심리적인 상태에서 순국(殉國)(하겠다는 이 광적(狂的)이며 기 개 높은 일본군의 반격은 실로 말할 수 없는 전마(戰魔)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남쪽의 스리바치 산은 본대(本隊)와 차단되고 말았다. 유감천만이었다. 구리바야시 중장에게 있어서 가장 큰 타격은 스리바치 산과 모토 산을 연결하는 지하도로가 미완성이었기 때문에 스리바치 산이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 두 개의 고지가 지하로연결되어 있었더라면 모토 산으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스리바치 산으로 증병(增兵)하여 그 기슭에 모여있는 해병대를 섬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스리바치 산에는 유황도의 주력 화포인 해군의 14센티ㆍ12센티 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적의 함정이 접근해 오자 성급하게 발포를 하고 말았다. 구리바야시 중장은 적을 육지로 끌어올려 놓은 다음에 격멸할 방침을 지시하고 있었으나, 그 지시를 어겼기 때문에 포대의 위치를 적에게 알려준 결과가 되었으며, 해군 포대의 대부분은 적의 사전 포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스리바치 산은 2월 23일에 예상 외로 빨리 빼앗겼다.
그러나 그 후의 전투는 완전히 구리바야시 중장이 예상했던 지상 대 지하의 싸움이라고 하는, 미군으로서는 일찍이 본 일도 없는 양상을 나타냈으며, 미 해병 3개 사단은 공격에 지쳤다. 구리바야시 병단 2만 명은 당시의 부대 규율로 말하자면 30세 전후의 노령 소집병(老齡召集兵)이 많았으며, 정병(精兵)이라 하기는 곤란하였다. 그러나 구리바야시 중장의 물심양면에 걸친 지도는 그야말로 ;전투에 대한 마음가짐‘에서 강조한 바 있는 한 사람의 용감함이 승리의 원인이라는 각오를 몸에 익힌 전투 방법을 보여 주었다.
유황도는 실로 지옥행(地獄行) 교두보(橋頭堡)였다. 아끼고 아끼는 전타는 화산회(火山灰) 산중에 감추어져 있었고, 그 밖의 수많은 포진도 아주 튼튼했다. 구리바야시 중장이 심혼을 기울여 방비를 굳힌 유황도의 특징은 일본군 독특의 동굴 진지 축성법이었다. 많은 동굴 진지는 깊이가 40피트나 되는 것도 있어서 아무리 맹렬한 포화에도 난공불락이었다. 그러한즉 스프류안스 대장의 철두철미한 파괴 공격에도 거뜬히 견뎌 냈던 것이다.
상륙 때만 해도 이들은 비교적 안심하고 적응 저항으로 그칠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바로 모도야마 제1비행장으로 육박해 가려고 해안 언덕으로 올라갈 때 일본군은 맹렬한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뜻밖이었다. 무서운 박격포와 야포의 집중 포화가 미군의 상륙지점 해변을 두들겨 댔다. 이것이 게임 제일 세트였다. 실로 미국군이 겪은 태평양 전쟁 중의 모든 전투를 통해 필적할 수 없는 정도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이들 일본군은ㅇ 가능한 한 많은 미군을 죽이고 전원 옥쇄하겠다는 각오가 역력했던 것이다. 순식간에 해안 능선은 피의 바다로 화했다. 포고(標高) 656 피트의 스리바치 섬의 탈환에도 엄청난 희생을 내야 했다. 미국군은 일보일보 북진을 계속했으나 일본군의 저항은 어느 지점에서나 마찬가지 강도로 임해 왔다. 그것은 마치 무엇이든지 때려 부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력한 힘이 바위를 부딪쳐 오는 것과 같았다.
말과도 고삐를 통해 피가 통한다는 노래를 부른 구리바야시의 필사적인 각오는 이미 철두철미하게 일본 군인 말단까지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일본군이나 미군 전부가 전투가 끝날 때까지 죽어야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구리바야시 휘항릐 장병은 그 동굴 진지 내부에 대기하고 완강한 항전을 계속했다. 이들은 미국군이 기대하고 있었던 얕은 철학의 상징 같은 이른바 ‘반자이 돌격’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키는 곳을 무덤으로 생각한 이들의 거점을 하나하나 돌파하지 않으면 미군에게는 전진의 보장이 없었다.
지하 요새는 기묘했다. 수많은 입구가 있었다. 설사 입구 한두 개가 폐쇄되어도 그 안에 숨은 수비부대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이 동굴들은 상호간 연결이 되어 있어서 미군들의 지상전선을 조직적으로 이룰 수가 없었다. 고전, 혈전이 연일 계속되고 공격은 지지부진이었다. 미 해병대는 전면에 숨겨져 있는 지하로 진지를 하나라도 간과할 수가 없었다. 만약 간과하였을 경우에는 하룻밤 사이에 그 옆의 호에 있던 일본군이 파괴된 몇 개 호로 들어가서 해병대는 배후로부터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해병대의 전술은 어쩔 수없이 정형화(定型化)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아침 7시쯤 날이 밝으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전진하며, 오후 4시가 지나 해지기 전에 정지하고 본래의 진지로 돌아온다. 밤에는 끊임없이 조명탄을 쏘아올리고 철조망을 둘러치고,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린 진지 내에서 일본군의 야습(夜襲)을 경계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진전 거리는 하루에 몇 야드. 때로는 몇 인치라는 그야말로 몸을 약간 움직이는 데 지나지 않을 만큼 그 속도가 느렸다. 더욱이 그 몇 야드를 전진하는 데에도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3월 14일, 겨우 일본군의 조직적 저항이 배제되고 점령을 기록하는 성조기(星條旗) 게양식이 행하여졌을 때도 각 사단의 하루 평균 전진 거리는 최장이 70 야드였으며, 사상자는 하루 평균 120명이라고 보고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이 되자 구리바야시 병단의 거점은 섬의 북부와 동부의 한구석에 잔존할 뿐이었다.
3월 16일, 그 동부에 있던 니시다케 하지매(西竹一) 중좌(中佐)가 지휘하는 전차 제26연대의 잔병이 소탕되자, 그날 오후에 제3해병사단은 섬의 북단에 도달하였으며, 구리바야시 중장은 결별전(訣別電)을 대본영(大本營)에 보냈다.
[전국은 최후의 기로에 직면했음. 바야흐로 탄환은 떨어지고 물은 말랐으므로 전원이 반격하여 최후의; 감투(敢鬪)를 행하려고 함에 있어 황국(皇國)의 필승과 안태(安泰)를 기원하면서 영원히 이별을 고함.]
구리바야시 중장은 포위당한 사령부 호 속에서 여전히 지구전(持久戰)을 명령하다가 3월 26일 미명(未明)에 최후의 돌격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들은 대부분 부하들의 돌격을 앞에 두고 자결했으나, 구리바야시 중장은 흰 견대(肩帶)를 메고 군도(軍刀)를 휘두르며 ‘전진! 전지!’ 하며 선두에 섰다.
돌진, 그것이 바로 기병(騎兵)의 싸움이지 그것 이외에 기병 싸움은 없다는 것은 구리바야시 중장이 항상 말하던 바이다. 그리고 생활고에서나 죽음에서나 항상 선두에 서는 구리바야시 중장을 그 부하들도 따랐다. 중장은 부상을 당하면서도 돌격을 명령한 다음 참모인 나카네(中根) 중좌(中佐)로 하여금 머리를 쏘게 하여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황도의 미군의 손해는 해병 3개 사단만으로도 사상 2만5천851명이었으며, 일본측의 전사자는 1만9천9백 명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손실이 일본군의 손실보다 크게 상회한 희유(稀有)한 전례이기도 하다. 더욱이 포로 1,033명 중 설영대원(設營隊員)을 제외하고 부상을 당하지 않고 투항한 장병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출처] 유황도전투(硫黃島.이오지마전투) |작성자 재봉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