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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비운의 왕비를 하면 마리앙뚜아네트를 생각했고 저도 그랬는데 제인그레이가 정말 비운의 여왕같네요...
(왕비랑 여왕은 물론 다르지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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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9일간의 여왕' 또는 '런던 탑의 비극'이라는 애절한 이야기로 전하여집니다.
제인 그레이 (Jane Grey, 1537-1554)
불행했던 어린시절
격한 부모를 내려주셨고 동시에 너무도 자상한 선생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 저는 말을 하든, 침 묵하든, 앉든, 일어서든, 가만 있든, 움직이든, 먹든, 마시든, 기쁘든, 슬프든, 바느질을 하든, 놀든, 춤추든, 무얼 하든간에 엄청난 중량감과 정
확함을 가지고 마치 신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완벽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독하고 무자비한 꾸지람을 듣게 되고 꼬집히
거나 찔리거나 매를 맞거나 아니면 그들의 명예를 위해 차마 말할 수 없는 방법들을 통해 벌을 받게 되므로 저는 스스로 지옥에 있는 듯한 기분
이 듭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 제가 Aylmer선생님 댁에 가 그분의 자상하고 친절하며 배움에의 열망을 자극시키는 수업을 들을 때면 저는 너
무나 기뻐 달리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면 저는 바닥에 주저않아 흐느끼곤 합니다. 공부이외
에 저에게 주어진 것은 괴로움과 공포와 냉대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인이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이자 당대의 석학이었던 Roger Ascham과 나눴던 대화 중에서(당시 13세)
재산을 탕진하곤 했던 그들은 메리-엘리자베스-제인의 모친에 이어 왕위계승서열 4위였던 장녀 제인을 국왕 에드워드의 왕비로 만들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만 관심이 있어 제인을 명문가의 규수로 만들기 위한 혹독하지만 애정없는 교육을 행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제인의 부친은 여러차례 제인을 왕비로 만든 다는 조건으로 다른곳에 팔아치웠다가 약속이 깨지자 되찾아오곤 하는 과정을 되풀이하기도 했다. 성장하면서 점점 제인이 왕비가 될 가망이 희박해짐에 따 라 제인에 대한 부모의 냉대도 점점 높아져 갔으며, 나중에 제인이 죽게 되었을 때조차 제인의 부모는 그녀를 살리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본 래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품이었던 제인에게 공부는 부모의 학대를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다.
9살이 되던 무렵 제인은 신분이 높은 친척에게 자녀의 교육을 위탁하던 당시의 관습에 따라 헨리8세의 마지막 왕비이자 당시의 여성들 중 가장 지적이고 세 련된 인물 중 하나였던 캐서린 파(Katherine Parr)에게 보내어져 몇년간 머물게 되었다. Parr의 저택은 당시 영국의 지적 중심지 중 하나였는데 제인은 여기 서 그녀의 일생에서 얼마 되지 않았던 행복의 순간을 누리게 된다. 그녀는 물만난 고기처럼 철학과 문학, 음악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특히 독실한 신교도였던 이모의 영향을 많이 받아 종교적 신념이 점점 깊어져 갔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총명함과 박식함에 혀를 내두르곤 했으며 도저히 어린 소 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녀는 5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으며 하프와 류트 등 몇 가지 악기를 다루는 데도 뛰어났다.
그러나 1552년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평소 병약하던 왕의 건강에 결정적인 적신호가 온 것이었다. 에드워드의 치세 동안 호강을 누리던 신교파 귀족들 사이 에는 비상이 걸렸다. 후사가 없는 왕이 죽을 경우 다음 왕위는 열렬한 구교도인 메리(후에 '피의 메리'라 불리우게 될 바로 그사람이다)에 의해 승계되도록 되 어 있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정적을 만들었던 더들리로서도 왕의 사후 자신의 권력을 보전할 방도를 강구하지 않으면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결국 그가 취한 특단의 조치는 왕위승계서열을 뒤바꿔 스스로 꼭두각시 왕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략의 희생양이 된 것이 바로 제인이었다.
더들리는 서둘러 행동에 착수했다. 우선 그는 제인의 부모를 만나 그녀를 자신의 아들 길드포드와 혼인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국왕과의 혼사가 실패로 돌아가 좌절하고 있던 제인의 부모는 반색을 하며 동의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제인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완강히 결혼을 거부했다.
그녀는 이 결혼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결혼, 특히 귀족들의 결혼은 본인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야심과 재물에 눈먼 부모의 협박과 매질 앞에 제인은 어쩔수없이 승낙해야만 했다. 결국 1553년 5월, 길드포드와 제인은 혼례를 올렸다. 이들은 최후까지 함께 지낸 날도, 서로에 대한 애정도 별로 없었던 명목상의 부부에 가까왔지만 어쨌든 자신의 장래를 보장해줄 수만 있다면 더들리에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제는 제인을 국왕으로 만드는 일이 남았다. 더들리는 죽어가는 국왕의 신앙심에 호소하였다. 신교를 영국에 뿌리내리는 것은 국왕의 신성한 의무로 무슨 일이 있어도 저주받은 구교도가 영국을 다스리게 놓아둘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렇찮아도 이점에 신경을 쓰던 독실한 신교도였던 어린 국왕은 순순히 더들리의 설득에 넘어갔다. 결국 그는 父王이 정한 승계서열을 어기고 후계자로 제인을 지목하는 조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 사실은 국왕이 죽기 직전까지도 공표되지 않았으나 6월 3일, 제인에게 그녀의 시어머니가 찾아와 자신이 차기국왕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제인은 그만 기절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15세의 어린 소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나 빠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사흘 후 에드워드 6세는 죽었다.
에드워드 6세의 죽음은 본래의 왕위 계승권자인 메리의 준동을 막기 위해 며칠간 비밀에 부쳐졌다. 더들리는 제인을 즉위시키기 전에 메리를 먼저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비밀이 새어나가 6월 9일, 노포크(norfolk)에서 메리는 스스로 왕을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같은 날 제인은 노섬버랜드 公의 저택으로 불려나가 한 옥좌로 안내되었다. 아직 국왕의 승하사실을 모르던 제인은 모인 사람들이 그녀에게 연신 절을 하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했으나 점차 사태를 깨닫자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마침내 더들리가 제인의 즉위사실을 공표하자 제인은 바닥에 쓰러져 흐느끼며 '저는 왕 자격이 없습니다. 메리가 왕입니다.' 하며 울먹였다. 한참 후 평정을 되찾은 그녀는 모인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대신 신의 가호를 비는 기도를 한 후 마지못해 옥좌에 앉았다.
런던 탑 (Tower of London)
다음날 제인은 런던 탑(Tower of London)으로의 입성식을 거행했다. 거리에 모인 군중의 반응은 물을 끼얹은 듯 차가왔다. 신교파 귀족들은 모르겠지만 영국 민중의 일반적인 감정은 폭군이었던 헨리 8세로부터 갖은 고난을 겪었던 메리에게 동정적이었으며 당연히 메리가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억지로 급조된 왕이 그들의 환영을 받을리가 만무했다. 이러한 광경은 제인의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궁전에 들어선 후 왕실의 재산관리인이 와서 왕관의 크기를 맞추기 위해 그녀의 머리에 씌우려 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 왕관을 치우라고 하였다. 왕관은 그녀에게 공포의 상징이었으며 한번 그것을 쓰는 순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옆에서 더들리가 2주 후 제인과 길드포드의 공동 즉위식을 거행할 것이라며 왕관을 써보라고 종용하자 마침내 제인의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은 더들리를 위해 왕이 된 것이 아니며 자신이 왕인 한 길드포드는 결코 왕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더들리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히 꼭두각시 왕이었다.
한편 런던 밖에서의 상황은 점점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민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메리는 급속도로 세력을 신장시키며 런던으로 진군중이었다. 더들리는 메리를 체포하기 위해 전함 6척을 파견했으나 이 전함들은 모두 메리의 편이 되었다. 결국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배신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출진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더들리는 3,000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런던을 떠났다.
더들리가 런던을 떠나자마자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잇따른 메리의 승리 소식에 초조해하던 왕실 고문들은 결국 메리를 영국왕으로 선포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6월 19일, 제인이 왕위에 오른지 9일만의 일이었다.
서포크 公 (duke of Suffolk) 펠리페 2세 (Felipe II)
제인의 아버지 서포크 公(duke of Suffolk, 1484-1545)은 일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메리의 추대선언서에 서명을 한 후 그날밤 딸에게 가서 폐위사실을 알려주고 함께 왕의 휘장을 걷어냈다. 제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부모님의 뜻에 순종한 것을 넘어 저는 막중한 죄를 지었습니다. 기쁜마음으로 왕관을 벗겠습니다. 이제 그만 집에 가도 되나요?' 서포크 公은 대답없이 묵묵히 돌아서서 성을 나갔다. 제인은 혼자 쓸쓸히 성에 버려졌다.
메리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까지 제인은 런던 탑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이내 체포되어 남편과 따로 투옥되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훗날 공포정치로 '피의 메리' 라는 불명예 스런 별명을 듣게 된 메리가 본래는 인정많고 여린 성품의 소유자였다는 점으로, 그녀는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더들리와 제인 夫婦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사면시켜 주었다. 왕 위찬탈자 제인에게는 당연히 사형이 구형되었으나 제인의 성품과 결백함을 잘 알고 있던 메리는 刑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제인의 결백과는 상관없이 국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선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권고하던 신하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어린 사촌 제인을 점차로 사면할 생각이었다. 메리의 측근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통보받은 제인은 안정을 되찾았으며 오히려 이제 지겨운 부모나 그 누구의 간섭에서도 벗어나 조용히 독서와 사색을 즐길 수 있게 된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삶에 처음으로 평화의 싹이 트는 듯 싶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 기구한 소녀를 끝내 내버려두지 않았다.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메리는 정치적 난관들에 부딪히게 되었다. 신교가 주류인 국가에 구교 왕이 등극했으니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칠 것임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메리는 영국을 다시 구교국가로 회귀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대륙의 카톨릭 강대국인 스페인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으며 따라서 자신과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 II, 1527-1598)와의 혼인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여왕이 외국인을 夫君으로 맞아들이는 것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고 나아가 신교도들은 이것을 스페인이 영국을 집어삼키려는 음모라고 선동하였다.
급기야 메리에게 반대하는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다. 문제는 한평생 제인에게 도움 된 적 없는 어리석은 아버지가 이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것이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제인의 아버지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인정을 베풀어 사면했는데도 자신에게 칼끝을 겨눈 서포크 公에 대한 메리의 배신감은 엄청난 것이었으며 그 불똥은 제인에게까지 튀었다. 제인을 죽이지 않으면 이러한 반란은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신하들의 설득은 이번에는 먹혀들었다. 메리는 제인의 처형 장(狀)에 서명했다.
형 확정 소식을 들은 제인은 담담했다. '제 불운한 날들을 끝마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부친과 두 동생, 그리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조용히 최후를 준비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아버지 덕분에 한많은 생애를 더욱 빨리 마감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썼다.
Although it hath pleased God to hasten my death by you, by whom my life should rather have been lengthened, yet can I patiently take it, that I yield God more hearty thanks for shortening my woeful days.
-사형선고 후 제인에게 용서를 비는 아버지 서포크공의 편지에 대한 답장 중, 1554,
"오히려 제 생명을 연장시켰어야 했을 당신에 의해 제 죽음이 앞당겨진 것이 신의 뜻이긴 하지만, 저는 이를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 한많은 삶을 단축시킬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전히 제인에 대한 연민의 정이 남아 있던 메리는 마지막으로 제인에게 목숨을 구할 조건을 제시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 살려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경건하고 자존심 강한 소녀에게 목숨을 살리기 위해 변절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노릇이었다. 사실 종교가 이데올로기보다도 더 강한 구속력을 지닌 시대에 改宗(conversion)을 빌미로 목숨을 구걸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철면피가 아닌 이상은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메리는 또 마지막으로 제인에게 남편의 얼굴을 한번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였으나 제인은 '우정이 보다 즐거울 수 있는 곳에서 다시 만나길 기다린다' 라며 이를 거부했다.
처형당하는 제인 그레이 (The execution of Lady Jane)
결국 1554년 2월 12일, 제인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자신의 처형 1시간 전 그는 자신의 방에서 남편 길드포드의 처형을 지켜보았는데, 같은 권력다툼의
희생양이라는 동병상련의 정을 느꼈는지 '아~아! 길드포드, 길드포드, 죽음이란 참으로 씁쓸하구나!'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마침내 제인의 때
가 되어 형장으로 끌려갔으나 그녀는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사형대에 이르러 그는 모인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연설을 하고 스스로 눈가리개를 한 후 참수대 위에 드러누우려 했으나 눈이 가려져서 참수대를 찾지 못했다. 당황한 그녀는 '어쩌지? 어디있지?' 하고 외쳤는데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관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붙잡고 형틀에 갖다 대었다.
이것이 바로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의 유명한 그림에 묘사된 장면이다. 얼마 후 제인은 도부수(刀斧手)의 도끼 아래 짧고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6세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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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6세...........................
....소름끼친다
불쌍해... 그놈의 권력이 뭐라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희생되는 사람들이 진짜 많군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헨리8세부터 엘리자베스1세까지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피의숙청과 종교갈등은 영국사에서 가장 복잡하고도 슬픈시절이었죠.제인그레이도 메리스튜어트도 꽃다운 나이에 왕위계승의 피해자...이게 다 헨리8세때문이다ㅜ.ㅜ
아 진짜............................... 그냥 넘길까하다 다 읽어봤는데 뭐라 할말이.....................
아 진짜 안됐네요 불쌍해요 ㅠㅠㅠㅠ
이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16살.............
정말 불쌍하네요...ㅜㅜㅜㅜ
죽지않았다면 어땠을지 궁금- 그림이 너무 아름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