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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화조선왕조가 고구려 태왕들에게 제사를 지낸 청나라와 일본에게 왜 침략을 당하고 항복하고 말았는가! 다 정신이 썩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썩으면 나라가 부패하여 망하고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것이다.
한권으로 편찬한『한단고기』는 『조대기(朝代記)』,『삼성밀기(三聖密記)』,『표훈천사(表訓天詞)』,『대변경(大辨經)』,『진역유기(震域留記)』,『삼한비기(三韓秘記)』,『고려비기(高麗秘記)』,『신지비사(神誌秘詞)』 등의 고서들을 담고 있다.
이중에서 『표훈천사』,『조대기』,『대변경』,『삼성밀기』 등은 조선시대 『세조실록』7, 3년5월 무자년조에 전국에서 수거하라는 책이름들이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위서라는 주장들은 소중화 식민사관론자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소중화조선왕조는 중국보다 한국문명과 역사가 위대하다고 기록한 고서들을 모두 수집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거미줄을 치게 만든 것이다.
강단에서 역사를 가르친다고 한다면 윤내현 정도의 역사의식은 가지고 있어야 진정한 대한민국 역사학자라 할 수 있다
윤내현 저/우리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내용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고대에 우리 민족의 대외진출은 어떠했나) (1)
"그 동안 통용된 국사 교과서나 국사 개설서들은
우리 민족의 국내 활동에 치중하여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대외활동은 소홀히 다룬 면이 없지 않다.
그 결과 우리는 옛날부터 소극적인 삶을 영위한 민족이었던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고대사를 보면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체를 아우른 큰 나라였고
그 뒤를 이은 여러 나라들은 대외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우리 민족의 일부를 이루었던
숙신족(肅愼族)의 일부는 연해주로 이주하여 읍루(揖婁)라는 나라를 세웠고
부여족(扶餘族)의 일부는 연해주 북쪽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두막루(豆莫婁)라는 나라를 세웠다.
우리 민족의 활동 영역이 동북쪽으로 연해주와 시베리아 지역까지 확장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동(遼東)에서 건국된 고구려는
산서성(山西省)의 태원(太原)까지 쳐들어간 적이 있으며,
고조선의 옛 땅이었던 지금의 요서(遼西)서부를 수복하여
북경 근처까지를 그 영토로 삼아 고조선의 천하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지금의 요하(遼河)까지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은
이민족의 침략을 방어만 한 피동적인 자세를 취했던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고구려는 동한과의 전쟁에서 자주 승리를 했으며,
큰 전쟁은 대개 고구려의 승리였다.
이러한 사실은
《후한서》<동아열전>과 《삼국사기》<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잘 기록되어 있다.
후대에 을지문덕 장군이
수(隋) 양제(煬帝)에게 승리한 전쟁은 수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는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포함한 거대한 영토를 가진 동방의 강국으로서
수나라는 이러한 고구려를 매우 두려워하였고
고구려를 그대로 두고는 자신들의 나라가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수 양제는 국운을 걸고라도 고구려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수나라의 상비군은 1백 13만여 명이었는데
이를 2백만 명이라고 과장해서 선전하는 한편,
그 두 배인 4백만 명을 징집하였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무려 5백 13만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동원했던 것이다.
5백 13만여 명의 장정을 동원했다면
아무리 인구가 많은 수나라라 하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건 전쟁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쟁에서
수 양제는 을지문덕 장군이 이끈 소수의 고구려 군사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내부적으로는 대운하 건설 등의 노역에 장정들이 자주 동원되어 농촌 경제는 피폐해 있었고,
이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가운데 고구려와의 전쟁에서도 참패를 당하자
수나라에서는 황실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수나라는 멸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을지문덕 장군의 승리는
단순히 수나라의 침략을 방어한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수나라를 멸망으로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소수의 병력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인원을 동원한 수나라를 물리친
전쟁 역사에 길이 남을 큰 승리를 이끌어냈던 것이다.
수나라가 건국되기 전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땅인 지금의 요서 지역을 수복하여
그 영토로 삼고 있었을 때 백제는 바다를 건너 중국의 동부해안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의 삼국시대[위(魏)?촉(蜀)?오(吳)]인 서기 246년에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丘儉)은 고구려를 침략하여
수도 환도성(丸都城)에 쳐들어 왔다.
이때 백제는 유주(幽州)가 비어 있는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에게 그곳을 치도록 하여
지금의 북경과 천진(天津)지역에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그 뒤 백제는 세력을 넓혀
남쪽으로 산동성(山東省)?강소성(江蘇省)?절강성(浙江省)지역까지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지역에도 진출하였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역 지배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직전까지 3백 40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백제가 수도를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웅진(지금의 공주), 그리고 사비(지금의 부여)로 옮기면서도
중국 동부해안 지역의 지배는 계속되었다.
아마도 백제는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대치하여 국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곳을 포기하고
한반도 남부와 중국 동부해안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가 강력한 해양국가였음을 알게 해준다."
윤내현 저/우리고대사 : “상상에서 현실로” 내용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고대에 우리 민족의 대외진출은 어떠했나) (2)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면서
백제는 중국 동부해안 지역에서 밀려나게 되었지만
그 뒤 당(唐)시대에는 그곳에 우리 민족의 후예가 독립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정기(李正己)장군의 치청번진(淄靑藩鎭)이 그것이다.
치청번진은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지역으로서
이정기 장군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이납(李納)과
이납의 아들 이사고(李師古)
그리고 이사고의 동생 이사도(李師道)에 이르기까지
55년동안 그의 일가가 지배하였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구려 사람 20여만 명을 중국 지역으로 분산 이주시킨 바 있는데
이정기 장군 가문은 그때 산동성 지역으로 이주되었던 것 같다.
이정기 장군은
‘안록산(安祿山)의 난’때 무공을 세워 이름을 떨쳤는데
뒤에 주위의 신망을 얻어 치청번진의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그는 당나라의 힘으로 절도사가 되었지만
치청번진에 독자적인 법과 제도를 시행하고 독립적으로 행동하면서 당나라 황실에 대항하였다.
그 후기에는 국명을 제(薺)라고 하였다.
중국 안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독립정권이었던 것이다.
치청번진은 당나라 황실과는 적대관계에 있었으면서도
발해와는 화친관계를 맺어 정치 교류와 경제 교역이 잦았다.
같은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와
대조영이 세운 치청번진과 발해가 서로 화친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당나라 황실에 대항했다면
이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로 힘을 합해 고구려의 웅대한 기상과 사상을 되살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치청번진은 55년 동안 존속하다가
당 헌종(憲宗) 때에 국력을 총동원한 당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나
신라의 장보고(張保皐)대사가 다시 이 지역에 진출하였다.
원래 장보고 대사는 지금의 완도 출신으로
중국에 건너가 무령군의 군중소장이라는 직위에 올라 있었는데,
신라인들이 중국 해적들에게 붙잡혀 팔려 가는 것을 보고
이를 막기 위하여 귀국한 뒤 서기 828년에 그의 고향인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였다.
장보고 대사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하여
일본열도의 남부와 중국의 동부해안 지역을 장악하고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일본열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왕국을 건설하였다.
장보고 대사는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제무역의 통로로 활용하였다.
이를 이용하여 멀리 아랍 지역과도 무역을 하였다.
국제적인 종합무역 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장보고 대사가 장악했던 중국의 동부해안 지역은
북쪽의 산동성에서 남쪽의 절강성(浙江省)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중심부는 산동성으로서
이정기 장군의 치청번진이 있었던 곳이며
그 앞서는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이었다.
이정기 장군이 치청번진을 당나라에 대항하는 독립세력으로 키울 수 있었던 것이라던가,
그 뒤를 이어 장보고 대사가 그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그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바탕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왜열도 진출도 매우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의 신석기 문화인 죠몽 문화[?文文化]에서는 우리 신석기 문화 요소가 많이 발견되어
죠몽 문화시대에 이미 우리 신석기 문화가 왜열도에 전달되었음을 알게 한다.
특히 서기 전 3세기 무렵부터 서기 후 3세기 무렵까지 존속되었던 야요이 문화[?生文化]는
우리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 벼농사 등이 전달되어 형성된 것이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정상적인 발전 과정을 거친 곳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먼저 등장하고
상당히 긴 세월이 지난 뒤에 철기 문화가 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와 만주에서는 서기 전 2500~2600년 무렵에 청동기 문화가 출현하였고
서기 전 800년 무렵에는 철기 문화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왜열도에서는 야요이 문화 시대에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가 동시에 출현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와 왜열도는 바다로 나뉘어져 있어서
우리 문화가 왜열도에 그때그때 전달되지 못하였고
어느 한 시기에 그동안 이루어진 문화가 한꺼번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서기 전 300년 무렵에 이르러
그 동안 우리 민족이 이루어 놓은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 그리고 벼농사 등이
한꺼번에 전달되는 현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 문화가 우리나라에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왜열도에서 출토되는 야요이 문화 초기의 청동기와 철기가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왜열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수입해 간 것이었다.
이러한 유물을 일본인들은 박재동기(舶載銅器), 박재철기(舶載鐵器)라 부른다.
아요이 문화의 중요한 요소인 고인돌과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와 질그릇들도
한국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왜열도의 야요이 문화는 우리 청동기 문화와 철기 문화가 전달되어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서기 전 300년부터 서기 후 300년까지는
우리 역사에서는 고조선 말기부터 고조선이 붕괴되어 형성된 열국시대까지로서
정치 상황이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왜열도에 진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의 진출 지역은 왜열도의 남부 지역인 규슈[九州]였으며
후기로 오면서 점차 북쪽으로 확대되었다.
야요이 문화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동일한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었음을
최근 일본의 연구팀이 밝혀냈다.
왜열도에서는 당시까지 국가가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서기 전 2333년에 이미 고조선이 건국되었으므로
우리나라에서 왜열도로 진출한 사람들은
오랜 기간 국가라는 조직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미 국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체험을 바탕으로 각 지역에 집단을 이루고 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해서 왜열도 여기 저기에 소국들인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나라를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야)라 하였다.
그 뒤 서기 4세기 무렵에
또다시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이주민들이 들어가 고분 문화(古墳文化)를 이루게 되는데
이전에 존재했던 소국들과 새로 이주해 온 집단들이 정치적으로 서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서기 7세기 무렵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왜열도에 정치세력이 등장하고 국가가 출현하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이 이주한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에 우리 민족은 대외활동이 매우 활발하였다.
그 영역이
동북쪽으로는 연해주와 시베리아에 이르렀고
서북쪽은 북경을 지나 태원(太原)에 이르렀으며
서쪽은 황해를 건너 중국의 동부해안 지역과 남부를 지배하였고
남동쪽은 왜열도에 진출하여 그곳에 우리 분국을 건설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 지역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면서
동시에 그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우리 해양업과 수산업 그리고 국제무역은 이러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내현교수]"우리 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중국 황하지역보다 훨씬 앞선다.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가장 먼저 민족을 출현시켰다.."
복식으로 우리의 역사를 더듬어 보는 상명대 박선희교수
http://www.youtube.com/watch?v=xYj8F1cXGeU
윤내현 저/우리고대사
(동아시아에서 맨 먼저 나라를 세우다)
- 우리민족의 청동기 사용은 기원전 2500~2600년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우리 민족의 능력이나 본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래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 고대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시대 우리 민족과 이웃 민족의 문화 수준 및 문화 성격의 차이를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민족과 비교하여 우리 민족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민족성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외래 문화가 들어오기 이전인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列國時代)를 연구하는 학자가 매우 적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불교가 고구려에서 공인된 것은 서기 372년으로 열국시대 말기에 해당한다.
그 뒤 불교는 백제와 신라에도 전파되었고 왕실과 지배층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이후의 사국시대나 남북국시대는 이미 외래 문화가 자리를 잡은 시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능력이나 본성을 알기 위해서는
비교적 순수하게 우리 문화를 가지고 살았던 고조선시대의 문화 내용과
그 수준을 이웃 중국?일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매우 유능했다.
우리 민족은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금속을 발명하여 사용하였다.
인류가 처음 사용한 금속은 청동인데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서기 전 2500~2600년 무렵에 이미 청동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황하 유역에서는 서기 전 2200년 무렵에,
시베리아 지역에서는 서기 전 1700년 무렵에,
왜열도에서는 서기 전 300년 무렵에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중국인들보다 3백여 년 전에,
시베리아인들보다 8백여 년 전에,
일본인들보다는 무려 2천 2백여 년 전에 청동기 문화시대에 진입했던 것이다.
청동기 문화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금속 문화로서
석기 문화에서 금속 문화로의 변화를 가져온 매우 큰 사건이었으며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대개 국가가 출현했다.
그러므로
청동기 문화의 개시는 인류 문화와 사회 발전이라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지난날에는 우리 청동기 문화 시작 연대를 서기 전 900~1000년 무렵으로 잡았다.
청동기시대가 서기 전 10세기 무렵에 시작되었다면
《삼국유사》<고조선(古朝鮮)>조와
《제왕운기》의 기록에 따라 계산된
서기 전 2333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청동기시대 이전은 신석기시대인데
신석기시대에 나라가 세워진 예는 없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고조선에 관한 기록을 불신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고고학의 연대는 유동적인 것이다.
그 연대는 새로 발굴된 유적을 기준으로 항상 앞당겨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에는 유적의 연대를 추측으로 정하는 상대편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법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와 만주의 청동기 문화 연대가 매우 빠르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전라남도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와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고인돌 유적은
서기 전 2500~2600년,
만주의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夏家店 下層文化)는 서기 전 2410년으로 확인되었다.
한반도 남단에서부터 중부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서기 전 2500여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황하 유역보다 앞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기록에 따라 산출된
서기 전 2333년이라는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우리 민족이 청동기 문화를 가진 뒤 1백 70여 년이 지나 국가를 세운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맨 먼저 나라를 세운 민족인 것이다.
중국의 하(夏)나라는 서기 전 2200년 무렵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오므로
고조선 건국은 그보다 1백 30여 년 앞섰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주변의 씨족과 종족들을 정복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아우르는 큰 나라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은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그 결과
한반도와 만주에 거주하던 모든 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속한다는 귀속의식을 갖게 되어
우리 민족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나라를 세웠고 가장 먼저 민족을 출현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