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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0년 역사적인 논쟁이 라스 카사스와 세풀베다Juan Gines de Sepúlveda 사이에 일어났다. 세풀베다는 철학자이자 신학자로 원주민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찬성한 것으로 유명했다.
Bartolome de Las Casas vs Juan Gines de Sepúlveda
어떤 학자는 그 논쟁을 “제국 권리의 정당성과 그 제국 정치활동의 기본 윤리에 대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중대한 힘의 가장 확실한 실례”라고 부르고 있다(참조 : 같은 책 87). 두 사람은 원주민 전도 활동을 후원했고 교회를 위해 그들을 이해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라스 카사스는 그 과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세풀베다도 단지 원주민들이 이교도이기 때문에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정복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의 주장은 그들의 낮은 문명 수준과 야만적인 관습이 그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주장은 복음전도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전에는 일부 스페인 사람의 감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건전한 이론-인디언과의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이론-의 실질적 적용에서 일어나는 환경이나 어려움은 주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실행하는 지혜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세풀베다는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더욱 관련이 있는 것은 인디언과의 전쟁이 신학적으로 정당한지를 보여줄 수 있느냐에 본질적 문제였다. 실제로 그런 전쟁은 그것에 관여된 사람들에게 재난이고 복음전파에 해롭다고 라스 카사스는 절대적으로 확신하였다. 그의 견해에서 아메리카의 상황은 “너무 급격하고 너무 포괄적이어서 그 문제에 관해 냉정하고 인론적인 탐구는 오히려 무책임하고 경솔하고 충격적인 것처럼 보였다.”(참조 : Rafael Alvira and Alfredo Cruz, "The Controversy Between Las Casas and Sepúlveda at Valladolid," in White, ed., Hispanic Philosophy, 93) 라스 카사스는 인간본성이 나약하다고 가정하면, 원주민에 대한 무력사용의 부정적 결과는 생득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강압의 사용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라스 카사스는 믿음을 강제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세풀베다가 허락하였던 전도를 위한 평화로운 환경을 창조하려는 시도에 있어서도 강압을 금지했다. 한편으로 비토리아는 몇몇 제한된 경우에 원주민들에 대한 정당한 부력사용을 허락했다-예컨대 그들의 토착문화의 야만적 관습에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때가 그렇다. 라스 카사스에게 이 주장은 탐욕스럽고 무력적인 사람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容認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위해 제한이 없는 그 용인을 분명 남용할 것이었다. 세풀베다와의 유명한 논쟁에서, 그는 반대자의 입장에 맞서 논증의 긴 목록을 제공한 후에, 세풀베다가 아무리 옳다고 가정한다해도 그의 반대자는 자신(라스 카사스)의 견해를 고수해야 한다고 적었다. 두 명의 현대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세풀베다가 일으켰던 스캔들과 그가 무력적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영향 때문에 라스 카사스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느꼈다. 의도적이었든 의도적이지 않았든 수많은 전쟁의 결과는, [전쟁의 목적이] 아무리 고통 당하고 있는 원주민들을 돕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도움의 효과는 상쇄될 것이라고 라스 카사스는 믿었다-그것은 오늘날 현대의 인도주의적 군사개입에 대한 비판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디언들에 대한 모든 폭력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라스 카사스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들과의 모든 전쟁이 공정하지 않다고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고 현대의 연구에서는 말한다. 그 이유로 그는 전쟁을 제한하고자 전쟁을 공공연하게 적법한 선택으로 보는 어떠한 주장이라도 그것을 전복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라스 카사스가 품고 있던 그런 분쟁해결 방침은 분명 전도(선교)에 들이는 노력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무장한 사람들의 존재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침략자들과 맞서는 원주민들의 의지와 智力을 해제하기 때문이었다.(참조 : Andujar, "Bartolomé de Las Casas and Juan Ginés Sepúlveda," 84.) 선교사들은 “온화하고 거룩한 말로 그리고 성스러운 삶의 본보기와 업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수행하고자 했다. 라스 카사스는 지속적이고 진지한 노력을 통해 원주민들이 그리스도교 문명의 일부가 될 수 있을 것이며 노예상태 혹은 다른 강제는 모두 부당하고 역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오직 평화로운 상호관계만이 개종을 선택한 사람들 사이에 신실한 자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설교를 하고 정치적 선동을 일으키는 사이에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의 편에서 그들의 취급에 있어서의 개혁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너무 많은 학대를 버젓이 행하는 엥코미엔다encomienda 시스템에 반대하면서 반세기를 바쳤다. 라스 카사스는 신대륙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행동에 나타나는 불공정의 중요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다.
encomienda
엥코멘데로encomendero(식민지에서 칙허에 따라 원주민을 보호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친다는 조건 하에 오히려 원주민을 착취하는 사람들)는 원주민들을 [물건처럼] 배당 받았다.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종교적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다. 엥코미엔다 시스템 안에 있는 원주민들은 그 대가로 엥코멘데로에게 공물을 바쳐야 했다. 엥코미엔다는 본래 원주민들에 대한 정치적 통치권의 허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종종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필수적인 공물은 강제노역에 의해 너무 자주 가혹해졌다. 한때 본인이 직접 엥코미엔다를 소유하였던 라스 카사스는 그 시스템의 불공정성과 착취를 직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엄청난 악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을 중지시키기 위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1564년 원주민들을 위해 일했던 몇 십 년을 회상하면서, 라스 카사스는 자신의 유언장에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선함과 자비 안에서, 비록 내가 하잘 것 없어도 모든 인디언들, 즉 자신들의 왕국과 땅의 소유자들을 위해 전에 들어본 적도 없는 스페인 사람들에게서 받는 부당함과 침해에 대항하여 변호하도록 그리고 그들이 부당하게 빼앗긴 소박한 자유를 그들에게 반환시켜주기 위해 신이 나를 자신의 성직자로 선택한 것이 옳았다고 여겼다. ……나는 인도에서 카스티야로, 다시 카스티야에서 인도로 여러 번 들락거리며 1514년 이후 거의 50년을 카스티야 왕실에서 일해 왔다. 신을 위해서 일했고 그렇게 많은 이성적인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느끼는 동정 때문에 일했다. 그들은 가정적이고 겸손하고 유순하고 순박한 사람들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알맞은 그리고 좋은 관습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참조 : Watner, "All Mankind Is One,'" 303-04에서 인용) 오늘날까지 라스 카사스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거의 성인으로 여겨져 있으며 용기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의 노력은 계속 떠받들어지고 있다. 유일한 도덕적 규칙이 모든 사람을 속박한다는 것을 가르쳐준 그의 가톨릭 신념은 그로 하여금 엄격한 불공정의 풍조 속에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행동을 판단하도록 해주었다. 루이스 한케Lewis Hanke 교수에 따르면, “라스 카사스의 주장은 그가 살던 시대에 살던 모든 사람들의 노력을 강화했고 그 이후 몇 백 년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가능성과 책임감을 가진 인간이라는 믿음 속에서 움직여 갔다.”(참조 : Lewis H. Hanke, Bartoloé de Las casas: An Interpretation of His Life and Writings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51>, 87) 지금까지 우리는 국제법, 즉 국가 간의 행동을 규제하는 기준의 초기 발전에 대해 말해 왔다. 국제법 강화의 어려움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스페인 신학자들의 임무로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두었다.(참조 : Cf. Carlos G. Noreña, "Francisco Suárez on Democracy and International Law," in White, ed., Hispanic Philosophy, 271) 비토리아의 해답은 정당한 전쟁 아이디어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즉 만약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의 상호관계에서 국제법의 규준을 위반한다면, 상대 국가는 그 나라와의 정당한 전쟁 근거를 갖게 된다. 우리는 스페인 신학자들이 UN과 유사한 기관을 지지했을 거라고 경솔하게 가정해서는 안 된다. 국제법 시스템이 해결하려했던 본래의 문제를 기억해보자. 17세기 영국 철학자 홉스Thomas Hobbes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의 중재자로 기능할 수 있는 정부가 없는 인간사회는 혼란상태와 시민전쟁이 일어나도록 되어있다. 홉스의 견해로 볼 때, 질서유지와 법 준수 강화를 우선 기능으로 하는 자주정부 창조는 우리가 자연 상태의 만성적 불안전과 무질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메커니즘이다. 같은 맥락에서 때때로 일종의 세계정부의 부재 속에서 세계의 국가들은, 마치 한 국가의 개개인이 자신들의 정부가 생기기 전처럼, 서로 대립하게 되는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고들 말한다. 홉스의 분석은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통치권의 확립이 없으면, 우리가 시민정부의 부재 속에서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갈등과 국가 간 무질서를 기대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렇다고 정부확립이 홉스가 묘사한 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그 문제를 다른 수준으로 변화시킬 뿐이다. 정부는 평화를 강화할 수 있고, 정부가 통치하는 국민들 사이의 불공정을 예방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자체에 비하여 사람들은 미개상태에 있다. 왜냐하면 정부와 사람 위에 공통된 중재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가 홉스가 권고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옳고 그름에 관해, 시민과 정부자체 사이의 논쟁의 판결에 관해서도 끝까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홉스는 민주주의를 믿었지만, 단순한 투표가 그런 재도를 제한할 거라고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만약 정부와 사람들 위에 존재하는 파워가, 정부가 그 정부의 힘을 남용하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확립된다면, 그것은 문제를 다른 수준으로 밀어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이 새로운 힘 위에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제법 강화를 위한 강제적인 힘을 가진 국제기구와 관련된 아이디어의 문제이다. 국제기구 아이디어의 제안자들은 그런 권위가 홉스식의 미개상태로부터 세상에 있는 국가들을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권위의 설립으로도 불안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들은 그 새로운 권위에 비해 그들의 행동을 제한할 수 없는 미개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국제법의 강화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한 국제기구의 확립은 홉스식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변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아직 다른 선택이 있다. 결국 선진국들은 30년 전쟁(1618-1648)이후 200년 동안 소위 개화된 싸움의 규칙을 가까스로 준수했다. 도편추방제ostrakismos(고대 아테네의 정치 관습. 세력가가 국가의 안정을 위협할 때 그를 고발하지 않고도 추방할 수 있는 제도)로의 위험은 진짜 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제법의 실질적 어려움이 무엇이든지간에,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유발된 철학적 토론의 결과로서, 비록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국제법에 관한 아이디어의 등장은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각 국가가 도덕적 집단이 아니라 개화된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기본원칙에 따른 행동과 관계됨을 시사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도덕적으로 자율적이지 않다. 16세기 초 마키아벨리는 그의 짧은 책 『군주론』(1513)에서 현대국가의 도래를 예언했다. 마키아벨리에게 국가는 실로 도덕적으로 자율적인 제도였다. 국가 자신의 보존을 위해 그 제도의 행동은 교황의 칙령이든 도덕적 원칙이든 외부적인 기준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 교회는 당연히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철학을 아주 신랄하게 비난했다. 스페인의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들이 아주 단호하게 부인한 것이 바로 이 견해였다. 그들에 따르면, 국가는 그 국가에 외부적인 원칙에 따라 실제로 평가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도덕적 원칙이 그 과정에 짓밟아진다면 단순한 편의성과 한정된 이익을 토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결국 16세기 스페인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문명행동을 비판적으로 조사하여 그것의 부족함을 발견했다. 그들은 자연권에 있어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도 동등하고 이교도 국가도 그리스도교 유럽 국가들이 서로 대하는 똑같은 대우를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서양문명에 철학적 도구를 주었다. 그것으로 동등성을 가지고 비서구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꽤 이상한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건전한 역사적 판단으로 발견의 시대를 고려해 보면, 우리는 분명 객관적으로 이런 외국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공통된 인간성을 인정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능력이 작은 업적이 아니었다고 결론짓는다. 특히 다른 민족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어느 한 민족의 생각을 종종 특징지은 파벌주의에 반대하여 평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편견 없는 공평함이 아메리카 인디언 문화를 발전시킬 것이라고는 예측 못했을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역사가 모리스Samuel Eliot Morison은 “같은 지역 혹은 같은 언어집단의 인디언들은 공통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각 부족은 ‘우리’라는 뜻의 말로 스스로를 불렀다. 그리고 ‘야만인’ ‘암캐새끼son of she-dog' 혹은 모욕적인 뭔가의 의미를 가진 단어로 이웃을 의미했다.”고 설명한다(참조 : Samuel Eliot Morison, The Owford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vol. 1, Prehistory to 1789 <New York: Meridian, 1994[1965]>, 40.). 이로쿼 연맹Iroquois Confederation(미국 식민지 시대의 인디언 연맹으로 모호크族, 오나이다族, 오논다가族, 카유가族, 세네카族 5개 부족연맹이었다가 1722년 투스카로리族이 합류하여 6개 부족연맹이 되었다.)과 같은 반례反例가 곧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다. 크든 작든, 문명의 수준이 다르든 세련됨에 차이가 나든, 동등성의 원칙을 토대로 운영되는 국제질서의 개념은 아주 좁은 쇼비니즘의 한 가운데에서는 비옥한 토양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의 근본적 단일성의 가톨릭 개념은, 국가관계를 통제해야만 하는 보편원리를 주장한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의 지나침을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스페인의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해 제공된 도덕적 도구 덕택이다.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는 신대륙 원주민들과 유럽 사람들의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은 견해로 적었다.
Mario Vargas Llosa 라스 카사스 신부는, 비록 인디언들에게 가해지는 학대에 반항하는 유일한 사람-당시 사회의 일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어떤 원칙보다 더 상위인 도덕적 원칙의 이름 하에 자신의 동료들과 국가 정책에 맞서 투쟁했다. 이런 자기 결단력은 잉카문화나 혹은 마야문화에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인들에게는 낯선 다른 어떤 위대한 역사문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런 문화에서도 역시 개인이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조직체에 도덕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개인은 오직 그 조직체의 절대 필요한 원자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국가의 명령은 도덕성과 분리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질문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 첫 번째 문화, 즉 전체를 개인-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개인-으로 분해한 첫 번째 문화는 그 알려지지 않은 실행, 즉 자유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문명이 될 수 있었다.(참조 : Robert C. Royal, Columbus On Trial: 1492 v. 1992. 2nd ed. <Herndon, Va.:Young America's Foundation, 1993>, 23-24에서 인용.) 부당한 행위가 신대륙 정복에서 범해졌다는 것을 진지하게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성직자들은 그것을 연대순으로 기록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히 발견의 시대동안 신대륙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던 비극의 한가운데에서 약간의 밝은 희망과 완화요인을 발견해야한다. 그리고 그 작은 희망이란 이런 사람들 사이의 충돌이 도덕주의자들에게 사람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관리해야만 하는 근본원칙에 대해 토의하고 개발하기 위한 적당한 시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임무에서 그들은 스페인의 대학에서 가르치는 가톨릭신학자들의 힘겨운 도덕적 분석의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참조 : Cf. C Brown, "Old World v. New: Culture Shock in 1492," Peninsula [Harvard], Sept. 1992, 11). 한케는 올바르게 결론을 내렸다. “일부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을 개척하였을 때, 현실에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은, 모든 사람들도 삶의 권리가 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행동을 위한 공정한 방법이 발견될 것이고, 본질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라고 사람들이 믿는 한, 그들은 희망적인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참조 : Hanke, The Spanish Struggle for Justice, 178-79) 이러한 것들은 서양이 수세기 동안 규명해온 아이디어이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들은 가톨릭 사상의 정점에서 직접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톨릭교회에 의해 확립된 서양문명의 또 다른 기둥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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