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중반은 삼국 모두에게 정치적 혼란기였는데요. 이런 위기를 극복한 것은 삼국 중 신라뿐이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경우 642년 정변에 의해 연개소문의 독재정권이 성립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발생한 내분 때문에 당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강경파였던 연개소문의 정변 후 3년만에 당태종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었지요. 이 때 요동지방의 일부 성과 군대가 당군에게 투항했고 당군을 격퇴한 안시성주도 사실은 연개소문에 대한 반발세력이었습니다. 이러한 내분 요소는 갈수록 심화되어 연개소문의 사망으로 폭발하게 되었는데요.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귀족들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고 그러던 중 동생에게 권력을 잃은 남생이 국내성 일대를 바치며 당에게 투항하면서 고구려 침략을 도왔다고 합니다. 어제의 동지가 적군에게 돌아서서 정보를 제공하였으니 고구려의 방어선이 무너질 수 밖에 없었겠지요.물론 지도층의 반목과 갈등으로 군사력이 약화된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결국 고구려의 멸망은 내분으로 인한 자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요. 대신라 강경책을 표방한 의자왕이 왕족 41명에게 관직을 내리는 등 전제적인 체제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이라는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반면 신라는 비담의 난으로 대표되는 귀족들간의 알력을 탁월하게 극복해 냈는데요. 비담의 난이란 비담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과 김춘추와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흥귀족세력간의 갈등이 여왕 문제로 인해 폭발한 사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신흥세력이 승리하게 되고 김춘추가 즉위하게 된 것이지요.
물론 나당 연합을 통해 삼국의 관계에 당이 개입하게 되고 심지어 고구려와의 전쟁은 당이 단독으로 수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내적 갈등이 없었다면 멸망이라는 결과가 발생했을까 하는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특히 고구려의 경우 이런 의문이 더욱 강하게 되지요. 또 신라의 경우 내분을 극복하고 체제를 유지하다가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규합하여 연합군을 구성하고 전쟁을 통해 당의 지배 야욕을 저지하면서 유민들과의 일체감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은 했다고 봅니다. 당과의 연합 당시에는 백제 멸망에 대한 의지 뿐이었지 외세에 의해 통일을 할 생각은 없었으며 나당전쟁을 통해 자주성을 높이고 민족 차원의 일체감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기신라 이후에 연합 당시의 약속대로 당의 관제와 지명 등을 사용한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는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