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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10월 16일
한국군 상록수부대
150여명 동티모르에 파병
1999년 10월 17일
호주 바우카우 공항에 c-130
수송기로 도착한 상록수부대 선발대가
부대 기를 앞세우고 걸어나오고 있다.
한국군 상록수부대 선발대 150명이
16일 동티모르에 처음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평화유지 활동에 착수했다.
지난달 30일 이후 호주 타운즈빌
에서 현지적응 훈련을 받아온 선발대는
호주 공군 C-130 수송기 세 대에 편승,
오전 6시 타운즈빌을 출발해 낮 12시쯤
동티모르 바우카오에 도착, 한국에서
갖고 간 전투식량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이어 세 개 제대로 나눠 1제대는 오후
1시 다국적군의 CH-53 대형 헬기 세
대에나눠 타고 평화유지 활동을 벌이게
될 동티모르 최동단 로스팔로스로 떠나
본대(본대)가 묵을 막사 등을 준비했다.
▶2014년 미국의 중국학자 데이비드 사망
▶2014년 러버덕 프로젝트가 서울 석촌호수에서 한달간 열림
▶2009년 인천대교 완공
https://youtu.be/YWlI7oq37jM
▶2006년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제8대 UN 사무총장으로 선출됨
▶2002년 신승남 검찰총장,동생 신승환의 이용호게이트 연루로 사퇴.
▶2002년 정몽준 의원 주도 푸른정치국민통합21 발기인대회 개최
▶ 2000년 한-미 미사일협상 타결로 사(射)거리 300km 미사일 생산 가능
▶ 1999년 이미자, 세종문화회관에서 가수생활 40년 기념공연
▶ 1999년 한국군 상록수부대 150여명 동티모르에 파병
▶ 1998년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영국경찰에 전격 체포
칠레의 전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82)가 신병 치료차 머물던 런던에서 1998년 10월 16일 영국 경찰에 전격 체포됐다. 영국 경찰의 피노체트 체포는 스페인 사법 당국의 특별 요청에 따른 것으로 1973년부터 1990년까지 칠레를 철권 통치했던 피노체트가 집권기간 중 칠레의 스페인 국민들을 살해했다며 영국당국에 피노체트 체포를 요청했었다.
피노체트 독재 정권하에서 정치적 이유로 살해된 희생자는 3천명 이상이며 1천2백여명이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칠레 정부는 17일 영국 정부의 피노체트 체포를 공식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런던 경찰의 피노체트 상원 의원 체포는 외교 면책특권을 무시한 것`이라고 항의했다. 피노체트는 자신의 군사정권 시절 통과된 헌법에 따라 3월 논란 속에 종신상원의원직에 취임했으며, 통상 면책 특권이 부여되는 외교 여권을 갖고 영국에 입국했었다.
영국 언론들과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피노체트 체포 결정이 `노동당 정부의 윤리적 외교정책의 결과`라고 강조했다. 스페인 정부는 영국에서 체포된 칠레의 전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신병을 인수받으려는 스페인 사법 당국의 움직임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1998년 북아일랜드의 존 흄-데이비드 트림블, 노벨평화상 수상
▶ 1995년 전파법시행령 개정
▶ 1994년 헬무트 콜, 독일 총제로 재 선임
▶ 1994년 장한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콩쿠르에서 최우수상 수상
▶ 1992년 과테말라 출신의 민권운동가인 리고베르타 멘추, 노벨평화상 수상
▶ 1990년 제2차 남북고위급회담, 평양서 개최
▶ 1984년 남아공의 흑인종교지도자 데스몬드 엠필로 투투 주교, 노벨평화상 수상
▶ 1984년 통신종합센터 준공
▶ 1982년 수하르토 인도 대통령 방한
▶ 1981년 세계식량의 날
"1981년 10월 16일은 제1회 세계 식량의 날이다.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FAO)는 인류를 기아와 영양실조 및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연례적으로 범세계적인 행사를 가짐으로써 식량에 대한 관심 및 인식을 환기시킬 목적으로 FAO 창립 36주년 기념일인 1981년 10월 16일을 제1회 세계 식량?날로 정했다.
오늘날의 식량 생산은 인구 증가에 대한 식량 생산의 상대적감소, 이상 기온으로 인한 작황의 부진, 공업화 및 도시화로 인한 농경지의 감소, 식생활 패턴의 고급화, 식량 생산국과 소비국간의 지역적 편재로 인한 식량 수급의 불균형, 식량의 무기화 추세, 농업을 경시하고 공업을 중요시하는 의식구조의 변화 등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으로 말미암아 매우 심각한 국면에 처해있으며, 앞으로의 장기적인 전망 역시 어떠한 획기적인 변화가 없는 한 밝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를 포함하는 개발도상국에는 약 5억의 기아 인구가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반면, 선진국은 영양 섭취의 과잉으로 인한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면도 존재하고 있다.
체신부에서는 세계 식량의 날을 맞아, 식량의 중요성에 대한 범국민적인 관심을 집중시킴과 동시에, 식량증산을 위한 농업 기술의 개발, 국민각자의 적극적인 식량 절약, 식생활 개선등을 통해 심각한 식량난을 타개해 나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기념우표를 발행한다."
▶ 1981년 동서고속도로(대전~광주 175km)기공, 후에 올림픽고속도로로 개명
▶ 1979년 서울 성수대교 개통
성수대교 개통 (11번째 한강 다리)
1979.10.16.
성수대교 붕괴 (49명 한강추락,32명사망!)
1994.10.21 오전7시
*교량의 내구연한은 잘은 모르겠지만 50년이상
이라던데.....
981년 오늘,
이스라엘의 군인이자 정치인 모세 다이얀 사망.(Moshe Dayan)
이스라엘 국방장관으로 '6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인물이며 이후 외무부 장관까지 오르게 된다. 1915년 5월 20일 출생
6일전쟁 :
수에즈전쟁 후 이스라엘과 아랍국들은 불안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집트대통령 나세르가 일방적으로 티란해협을 봉쇄하고 이스라엘선박 통과를 금지시키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이 전쟁에서 단 6일만에 세나라의 군대를 격파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이스라엘은 단 6일만에 기존 국토에 여섯배 점령지를 확보했다. (1967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 1979년 이광요 싱가포르 수상 내한
▶ 1979년 부마사태 시작 - 부산지역 대학생, 시민과 경찰 충돌
1979년 10월16일 부산지역 대학생ㆍ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됐다. 그 전날인 15일 부산대학교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면서 부산 시내 분위기는 이미 일촉즉발 상태였다. 대학생들이 시동을 건 반정부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민중폭동의 형태를 띠게 돼, 파출소ㆍ경찰서ㆍ세무서ㆍ방송국 등 유신체제의 손발 노릇을 하던 관공서들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시위는 18일과 19일 마산과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해 봄 김영삼이 야당 신민당의 새 지도자가 된 것은 박정희에게 불길한 징조였다. 박정희는 5월3일 전당대회에서 ‘중도통합론’이라는 태깔 좋은 구호로 3년 간 신민당을 이끌며 유신체제의 고분고분한 파트너 노릇을 했던 이철승의 당권 재창출을 음양으로 지원했으나, 가택연금 중이었던 김대중은 민주회복의 기치 아래 오랜 라이벌 김영삼을 지원함으로써 판세를 뒤바꾸어 놓았다.
김영삼은 그 해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원해 박정희의 비위를 건드린 이래 국제언론을 통해 유신체제를 가차없이 비판하며 박정희를 압박했고, 분노한 박정희는 휘하의 유정회ㆍ공화당과 법원을 동원해 9월8일 김영삼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에 이어 10월4일에는 의원직 박탈까지 이끌어냄으로써 부산ㆍ경남 지역 민심을 크게 자극했다.
▶ 1978년 요한 바오로 2세, 제265대 교황으로 즉위
▶ 1975년 스페인령 사하라서 모로코 35만명 평화행진
▶ 1974년 경주 98호 고분서 신라순금고배(高杯) 출토
▶ 1972년 자유학습의 날 실시
▶ 1964년 중국, 첫 원폭실험성공 세계5 번째.
2008년 중국이 공개한 비밀문건에 따르면 1954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가 중국 건국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
이 정상회담에서 마오쩌둥은 핵개발 의지를 강력히 보인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국가는 소련의 핵우산의 보호를 받을 수 있고 핵개발비용 또한 너무 많이든다는 이유로 굳이 원폭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고 설득한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핵 개발에 의지를 강력히 보이며 1955년 중국 공산당 확대회의에서 극비리에 핵개발을 결정하게 되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소련의 핵개발 의지를 강력히 어필하여 1957년 중,소 신기술 협정을 맺게됨. 그러나 중,소는 스탈린의 평가를 두고 사이가 벌어지게되며 중국 연해에 소련의 해군기지를 짓기를 원했으나 마오쩌둥은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게 됨으로 인해 소련의 핵기술 과학자들은 전원 철수하게 되며 소련의 지원이 끊기게 되었다. 이에 중국은 유학하고 있는 중국의
핵물리학자들을 대고 귀국시키며 중국 자력으로 원폭을 개발하게 되었다.
▶ 1963년 제5대 대통령선거, 박정희 당선
▶ 1963년 서독 아데나워 수상 사임, 후임에 부수상 에르하르트 취임
▶ 1962년 콩고 중앙정부군과 북부 카당가의 카당가군 휴전협정 조인
▶ 1962년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문학이론가 가스통 바슐라르 사망
바슐라르 [Bachelard, Gaston, 1884.6.27~1962.10.16]
구조주의의 선구자이며 시론·이미지론으로 유명한 가스통 바슐라르가 1962년 10월 16일 사망했다. 프랑스 현대 사상사의 독보적 존재로 평가받는 가스통 바슐라르는 과학적 진리의 객관성을 강조하는 실증주의적 과학관을 부정하고, 과학적 진리가 인간 이성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능동적 이상주의'를 내세워 과학인식론에 혁명을 가져온 과학철학자다.
바슐라르는 1938년 '불의 정신분석'을 출간, 과학적 인식론에서 출발해 문학에 관한 연구로 접어들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책을 경계로 바슐라르는 과학적 이성에서 시적 상상력으로 관심을 옮겨 상상력의 역동성과 창조성에 주목한다.
그는 이후 문학상상력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리는 연구서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현대문학비평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바슐라르의 후기 저술에 속하는 '공기와 꿈-운동에 관한 상상력'은 그 대표적인 저서이다. 이외에도 '공간의 시학' '물과 꿈' '몽상의 시학' '불의 정신분석' 등의 저서가 있다.
▶ 1962년 한국-사우디아라비아, 국교수립
▶ 1960년 작곡가 현제명 별세
▶ 1956년 제3세대 프로그래밍 언어 `포트란` 발표
▶ 1952년 채플린 영화 `라임 라이트` 개봉
▶ 1951년 남원에 공비출현, 기관차 전복시키고 200여명 납치
▶ 1951년 이집트, '1936년 조약' 파기를 주장하며 폭동, 반영(反英)감정 고조
▶ 1946년 2차대전 독일전범 립벤도로프 등 10명 교수형
▶ 1945년 이승만 박사 귀국
▶ 1942년 인도, 태풍으로 인한 홍수로 4만여명 사망
▶ 1934년 오늘,
중국 공산당 대장정시작!
지금의 중국공산당을 만들어준 일대사건.
대장정, 살아남는 것 자체가 승리!
368일 중 234일을 주간행군, 18일간 야간 행군, 평균 130km 이동 후 한 번의 휴식.
중국대륙을 남쪽으로 반 바퀴 돌면서
10,000km 행군을 감행하는데 이것은 미국 대륙을 2번 횡단한 거리다.
18개 산맥, 24개의 강, 12개 성을 통과, 62개의 마을과 도시를 점령하게 된다.
약9만의 병력으로 출발해 4/5가 죽거나
낙오, 여성 35명 만 살아남는 실로 살인적인 대장정이었다. 모택동의 두 번째 아내
허자정은 임신한 몸으로 대장정을 완수한다. 중국의 현 체제를 만들어 준 모택동의 운명을 건 대장정을 시작 결국 이 대장정의 성공으로 모택동은 중국의 국민당정부를 대만으로 몰아내고 공산정부를 수립한다.
국민당군(장개석) 쫓기며 1년 동안 11개 성 18개 산맥, 24개 대하를 가로지른 후퇴작전 해서 홍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소모해 가면서도 도중에 수억 백성에게 인심을 얻고 사회주의 중국의 미래상을 심어 붉은중국을 만드는 기본 이미지를 형성했다.
공산당의 홍군은 깨끗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방침을 실행했다.
바늘이나 실 하나도 주민으로부터 뺏지 말 것! 농가를 떠날때는 잠자던 멍석을 돌려주고, 문은 다시 붙여 줄 것!
물건을 살 때 속이지 말 것!
변소는 집으로부터 먼 곳에 설치하고 떠날 때는 그곳을 매꿀 것! 등 자질구레 하면서도 도덕적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행동을 실제로 실천에 옮김으로써 도덕적으로 평판이 좋지 못한 국민당군과 대조를 이루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는 역사적 흐름을 정확히 읽고 그에 맞는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산혁명이 진정한 사회혁명이었다는 사실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을 분기점으로 혁명 전에 중국과 혁명 후에 중국을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즉 공산혁명이 중국 사회적인, 외부적인 상태를 완전히 변화시킨 사회혁명이라는 점이 더욱 선명해진다.
▶ 1928년 독립운동가 박용만, 북경에서 피살
▶ 1923년 오늘,
월트디즈니사 설립 세계인에게 기쁨과 상상력을 주다.
▶ 1918년 허영숙(이광수 부인), 총독부시행 의사시험에 여자로서 최초 합격
▶ 1916년 2대 총독에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임명
▶ 1916년 마거릿 생어, 산아제한클리닉 개소
▶ 1908년 알바니아 최초의 공산주의자 국가원수인 호자 출생
▶ 1907년 지리학자 육지수 출생
▶ 1902년 프랑스에서 지문(指紋)이 범죄자 식별법으로 채택
▶ 1901년 혜민관 설치
▶ 1888년 미국의 극작가 유진 글래드스턴 오닐 출생. 1936년 노벨문학상 수상
▶ 1863년 영국의 정치가 오스틴 체임벌린 출생. 1925년 노벨평화상 수상
▶ 1854년 아일랜드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출생
▶ 역사 속 오늘[10월 16일 ]
1846년 오늘, 인류의 고통을 덜어주다,
모든 외과적수술에서(특히 '치과'^^!)
수술받는 환자들의 고통을 없애주다! 특히 '치통'!
윌리엄 모턴, 에테르마취 성공.
하버드 의과대학 부속병원인 mgh에서 아산화질소대신 에테르를 이용한 세계최초의 마취수술이 성공을 거두었다.
치과의사 윌리엄 모턴이 종양환자에게 솜에 묻힌 마취제를 흡입시켰고, 외과의사
존 콜린스 와렌이 칼로 종양을 도려냈다. 잠들어있던 환자는 얼마 후 깨어났고 mgh는 즉시 미국에서 가장 이름난 병원이 되었다. 그러나 에테르에는 냄새가 너무 고약하고 더군다나 기관지에도 해롭다는 결점이 발견되었다. 곧이어 1847년 영국 에딘버러에 심슨이 빅토리아여왕의 왕자출산때 클로로포름을 이용하여 무통분만에 성공함으로써 마취제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 후 에테르는 우수한 마취제로 소문이 나서 큰 외과수술을 할 경우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에테르를 이용한 수술법은 영국에도 전파되었는데 외과의사였던 심프슨James young Simpson(1811~1870)은 에테르를 이용하여 여성들이 고통없이 분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에테르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효과를 지닌 다른 마취제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클로로포름이었다!
▶ 1793년 프랑스 마리 앙트와네트 단두대 처형
ㆍ혁명 칼날에 사치스러운 삶 마감
머리카락이 잘리고 두 손이 묶인 여인을 태운 짐수레가 단두대가 놓인 광장으로 향했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과했다. 자신의 죄목에 대해서는 아니었다. 사형 집행인의 발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정오의 태양 아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죽음에 프랑스 민중은 환호성을 질렀다. 국왕 루이 16세가 참수당한 지 약 9개월 만이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혁명의 물결은 사치를 일삼아 국가재정을 파탄낸 왕실을 정조준했다. 왕과 가족들은 파리 튈르리 궁에 갇혔고, 어설픈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하면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오스트리아로 돈을 빼돌리고 군사정보를 내줬다, 남자관계가 복잡하다, 어린 아들과도 부적절한 관계다….’ 악의적 소문은 끝도 없이 부풀려져 왕비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세 때 프랑스 왕세자와 정략결혼했다. 1774년 남편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자 베르사유의 프티 트리아농 궁전을 개축하고 밤마다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당시 국민 평균소득의 300배에 달하는 15만 리브르의 예산이 매년 그녀의 드레스를 위해 지원됐지만, 50만 리브르의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녀를 ‘적자부인’이라고 조롱할 만했다. 상처받은 민심에 쐐기를 박은 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었다. 백작부인 일당이 왕비를 핑계로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여 160만 리브르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빼돌렸다. 잔금을 못 받은 보석상이 찾아오자 억울한 왕비는 추기경을 고소했지만, 사기꾼들의 증언을 믿는 사람이 더 많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실제 잘못 이상으로 미움을 받은 측면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녀를 향한 프랑스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그녀가 서민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증거로 회자되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요”라는 발언은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 잘못 알려졌다는 주장도 있다.
▶ 1435년 조선, 월식 발생
▶ 1434년 조선, 월식 발생
▶ 1426년 조선, 월식 발생
802년 오늘,
합천 해인사 창건(신라 애장왕)!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