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모임 새벽에서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을 만들게 되는데, 이는 노래팀으로서의 모임이 따로 생기거나 대중 문화공간에서의 장기적인 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일과성 음반취입이었다. 민중가요 중 심의를 통과하면서 음반을 내는 것이 중요했고, <그루터기>,<바람씽씽>,<내 눈길 닿는 곳 어디나> 등 70년대 메아리의 창작곡을 중심으로 만들게된다.
[노.찾.사]라는 팀이 만들어진 때는 87년이다. 87년 6월 투쟁을 겪으면서 합법적인 공개공연이 가능하리라는 판단 속에서, 당시 새벽을 중심으로 노래운동 선배들이 모여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합법적인 활동을 전담하는 팀을 만들기로 하고 의도적으로 [새벽]에서 분리시켜 10월 공연이후 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노.찾.사]는 기간 축적되어온 민중가요 중 대중문화 공간으로의 확산이 가능한 작품을 선별하여 재편곡·발표하는데, 대표적으로 <솔아, 푸르른 솔아> <광야에서> <잠들지 않는 남도> <그날이 오면>같은 당시 새벽의 창작곡이면서 대학가의 인기곡들, 예전에 발표되었으나 당시 민중가요의 주요한 작품경향에서는 좀 벗어나 있어서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공연용으로서 좋은 노래들, [한소리] [메아리] 등 대학노래패의 창작곡들, 새벽의 <사계> <귀례이야기> <대결> <이 산하에> <마른 잎 다시 살아나> <평등의 땅에> <뒤돌아 보아도>, 그 밖에 <녹두꽃> <진달래> <작업장> <오월 이야기><제발제발> 등 기간의 풍부한 노래운동의 자산을 바탕으로 활발한 공연활동과음반제작을 통해 민중가요의 성과를 대중문화공간을 통해 발표하여 공식화시키고, 미조직 중간계급에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노.찾.사]는 10여년동안 쌓아온 민중가요의 성과, 거기에 담겨있는 대학생·노동자 등 조직대중의 진보성, 그들의 인식과 정서·질감등을 대중문화의 공간에서 소화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도 그것을 따라잡는 것이 중요한 활동의 근거이자 과제였다.
대체로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나 때로 이에 미치지 못할 때에는 소시민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또 종종 대중문화적 소시민적 특성,기교주의,감상주의,정태적이고 나른하며 소극적인 분위기 등이 드러나기도 했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감상주의적이면서 나른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당당해졌으나 [노.찾.사]의 신곡중심(<그리운 이름>,<사랑노래>,<영원한 노동자> 등)으로 공연이 운영되어 민중가요 일반, 특히 80년대 후반 당시의 민중가요를 정리하여 보급하는 역할, 민중가요 전체의 대중문화의 창구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⑵ 노래마을
대중가요 작곡자 출신인 백창우를 중심으로 하여 84년 [노래마을 사람들]이라는 음반을 낸후 성남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활동을 하다가 [노.찾.사]의 대중적 성공에 힘입어 90년 이후 대중문화 공간에서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주로 백창우의 창작곡과 [노.찾.사]에서 소홀히했던 어린이들의 노래들 그리고 80년대 말 민중가요의 인기곡 등을 바탕으로 자리를 잡게된다. 대표곡으로는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줌 될 수 있다면>, <아기염소>,<백두산>,<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등이 있다.
⑶ 개인가수들
[노.찾.사]의 성공으로 진보적인 대중가요 가수들이 [노.찾.사]가 확보해 놓은 공간 주변에 포진하게 되면서 대중가요권의 진보진영으로 나름의 영역을확보하게된다.
이전까지는 좀 특이한 가수로만 알려져 있던 신형원, 한돌, 서유석, 김광석등이 진보적인 가수로서의 색깔을 가지게 되었고, {겨레의 노래}와 같은 행사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또한 노래운동권 출신으로 안치환, 정세현, 권진원 등이 개인가수로의 진출을 이루어내기도 한다. 이들은 노래운동권으로부터 대중가요권 사이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게 되는데 아쉬운 것은 아직 노래운동권 출신자들은 대중문화권에서 완전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정태춘의 경우 인기가수급의 대중가요 가수로부터 완전히 음악운동의 중심지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는 작품이 대중과의 적극적인 접촉으로 얼마나 급격하게 자기극복을 하며 예술적 경향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보여준다. 정태춘은 자신의 작품 세계의 특성을 살리면서 민중가요에서는 보기 드문 음유시와도 같은 긴 가사의 노래들을 만들어내어 민중가요의 자산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아 대한민국>,<배반의 병아리>, <우리들 세상>,<일어나라 열사여> 등
[새벽]의 변화와 고민
87년까지 많은 창작과 비합법테이프 제작 등으로 민중가요의 흐름에 발맞춰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으로의 대중화를 위해 활동하던 [새벽]은 88년에 들어오면서 작품의 경향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너를 위하여>,<선언1·2>,<오월의 노래3>,<노동자의 노래>,<불꽃이 되어> (이상 88년),<철의 기지>(89년),<바리케이트를 치며>(90년) 등의 작품을 보면 알 수있듯이 유럽 고급음악적 분위기와 유럽 혁명가의 질감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의 동기는 취미써클 출신인 노래운동 모임의 뿌리깊은 아마추어성의 극복과 음악적 전문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하게된다. 그러나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인류의 보편적 문화유산을 계승해야 한다는 취지의이러한 전문성의 획득이 새로운 형태의 전문성의 창출로 이어지지 못하고 기존의 고급음악적 전문성으로의 경도로 귀결된다.
[새벽]은 80년대 말이 이전까지의 민중가요의 경향으로부터 또 한단계의 변화·발전이 요구되는 시기이며, 그 발전의 방향은 노동자계급의 낙관성과 과학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작품의 경향에 그대로 반영되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80년대 중반까지의 나약함과 비극성은 청산되었으나 현실적인노동자들이 질감을 획득하지 못하고 관념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상을 만들어내면서 고급음악의 숭고한 낙관적 분위기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민중가요의 폭을 넓힌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노동자대중, 학생대중들이 향유할 수 있는 민중가요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따라부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작품 안에서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대중의 인식과 정서·질감이 담겨있지 않고 먼 나라 노동자들의 느낌,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자의 느낌, 먼 미래의 낙관적 지향 등이 두드러졌다는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까지 유일한 노래운동집단으로서 맡아야 할87년 이래 노동가요의 창작·보급을 하지 못하고, 그 결과 김호철의 노래가나오는 88년 말까지 노동가요는 거의 완전한 공백으로 있어야 했고, 그 후90년까지 김호철 한사람에게만 노동가요의 창작의존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이 시기 [새벽]은 우리 민중가요·노동가요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1920년대∼30년대 Hans Eisler등의 유럽 혁명가요의 전통을수용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사회적 맥락에 맞게 수용해내지 못했다는 한계를 나타내게 된다. 그러한 악곡의 전통이 유럽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유럽의 그것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문화적 맥락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급음악적 맥락은 식민지시대 이래 소시민적인 유학파 지식인들에 의해 유입·이식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의 혁명가요가 유럽에서 가졌던 진보성과는무관하게 우리나라의 고급음악이 가지는 비민중성·관념성·정태성·엘리트주의적인 영향을 받게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새벽]은 우리 현실의 노동자들의 삶의 구체적 현실성과 역동성등의 긍정성을 부각시킴으로써 그 양식의 한계를 극복해내고 그 의미를 새롭게 소화해내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90년에 들어 노동가요가 자리를 잡게되면서 [새벽]은 <해방을 향한 진군>,<다시 또 다시>등 기존 노동가요의 경향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바리케이트를 치며>,<노동자 전진이다> 등 이전의 작품경향을 따른 작품을 발표하기도한다.
당시 가장 중심적이며 역량있는 집단인 [새벽]의 활동을 일면 부정적으로평가할 수 있겠지만, 작품의 성과로서만 본다면 이들 노래가 민중가요의 자산을 풍부하게 만든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꾸준히 불리면서 이제 우리 대중의 정서로 많이 색깔이 덮씌워진 <선언2>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고급음악인들의 변화
노래운동과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의 만남은 80년대 중반 기존 음악계에 대한비판의식을 가지고 그러한 문제들이 일종의 사회적 산물임을 인정하는 작곡자, 평론가들 을 만나면서부터이다.
이 두진영의 만남은 상호충격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노래운동은 자신들이변화시키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비단 노래뿐이 아니라 우리의 음악문화전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진보적 고급음악인들은 아마추어 출신의 젊은이들이 음악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새로운 노래문화를 만들어온것에 비해 정작 고급음악인들은 대부분 미자각 상태에 있다는 데에 자책감과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조직화와 운동으로 발전시켜야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민족예술운동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86년경 이들의 제자 세대,80년대 민중가요의 확산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들이 졸업을 하면서 조직화가蝁시작되어 88년 [민족음악연구회]가 만들어지고, 87년에는 오페라연출가 문호근을 중심으로 [한국음악극연구소] 가 만들어진다.
⑴ 비평·음악사 연구
: 이건용, 노동은 등
⑵ [한국음악극연구소]
: 87년 오페라 소극장운동을 시작했고, 음악극 페스티발 등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주요공연작품으로는 87년 가을 <우리들의 사랑>, 88년 <구로동연가> 등 창작 노래극 공연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우리아이들의 나라>를 공연했다.
⑶ 민족음악연구회
: 음악대학을 졸업한 진보적 음악인들의 느슨한 협의체의 성격이 강하다.
(회원수는 많으나 중심활동가는 적음) 이건용, 노동은 등의 선생님들과 80학번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가장 중요한 활동으로는 여름과 겨울에 [민족음악 캠프]를 개최하여 고급음악인들에게 변화의 계기를 주는 것이다. 그동안 가창·연주분과에서 여러차례 공연을 했고, 비합법음반 {하나되는 땅},{백두산}, 합법음반 {하나되는 땅}을 만들었다. 창립직후에는 주로 일반 대중을 겨냥한 활동을 많이 했으나, 최근에는 고급음악계 내부를 겨냥한 작업에열중하고 있다.
이건용 <그렇지요>, 전경숙 <하나되는 땅>, 이민주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임을 위한 행진곡]>등은 민중가요와 고급음악을 잇는 성과로서 평가할 수있다.
전통음악인들의 독자적 조직화는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해오름] [다스름]등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전의 일반 대중을대상으로 국악적 감수성의 근저를 넓히며 국악의 진보적 현대화에 기여한 민요연구회나 풍물운동과 상호 보족적인 활동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있다.
지방의 노래운동과 그 성과
87년 이후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 그 지역의 특성에 맞게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서울에 비해 양적 역량이 떨어지고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한다. 마산 [소리새벽], 안양 [새힘], 부산 [노래야 나오너라] [희망새], 인천 [노래선언] 등은 대개 노동자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창작곡으로는 김봉철<들어나 봤나>, 이건 <달동네 부푼 꿈> 등이 있다.
광주에서는 서울에서 찾아보기 힘든 민요의 적극적 계승을 통해 대중적으로 호응을 얻는 성과를 내기도 한다. 국악도로 변신한 정세현을 중심으로 [친구]가 활동을 하게되고, 90년 정세현이 독립하여 [우리소리 연구회]을 만들어합법음반 {통일은 언제일까}를 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