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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철학의 발전
중국 문화는 주(周)대에 이르러 성숙기에 접어들었다. 공자가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본받았으니, 빛나구나 문화여!”(周監于二代, 郁郁乎文哉!)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사회의 경제적 기초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되며, 사회 구조도 이에 따라 동요하게 되었다. 이에 지난날의 정체 제도는 어쩔 수 없이 붕괴되었고, 인민의 생활 또한 불안정하게 되었다. 사회 제도의 변동은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게 하였으며, 마침내 다양한 철학적 사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춘추 이전부터 춘추 초기까지는 학문적 지식이 복(卜)과 사(史)에 의해서 세습되었다. 그러나 귀족 집권자들 가운데에도 폭넓게 학문을 탐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춘추 중기에 오면 각국의 귀족과 경대부 가운데 박학과 지식으로 명망을 얻은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노(魯)나라에는 유하혜(柳下惠)와 장문중(臧文仲), 진(晋)나라에는 숙향(叔向), 정(鄭)나라에는 자산(子産), 제(齊)나라에는 안자(晏子), 오(吳)나라에는 계찰(季札) 등이 있었다. 이러한 귀족학자들은 모두 많은 견문과 빼어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독창적인 학설은 없었으며, 더욱이 체계적인 철학적 사상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철학의 창시자는 공자(孔子. 이름은 丘, 字는 仲尼)이다. 공자는 이전 또는 당시의 귀족학자들과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는 달랐다. 우선 공자는 자신만의 ‘도’(道)를 확립하고 있었고, 이를 천하에 실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공자는자신의 도와 이전까지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지식을 일반 인민에게까지 전해주고자 하였다. 공자는 과거의 학문 및 사상을 완성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연 사람이다. 그가 비록 “잇되 짓지는 않는다.”(述而不作)고 했지만, 실제로는 “옛것에 의거해 제도를 고쳤다.”(托古改制)고 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물론 자신은 옛 것에 의존해 제도를 바꾸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했다. 그는 이전부터 있었던 학문의 싹과 문화적 성과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자신이 확립한 하나의 일관된 원칙을 가지고 이전의 모든 성과를 종합했다. 그가 일관되게 유지한 원칙이 인(仁)이며, 또한 충(忠)과 서(恕)이다. 인(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이다. 송대의 주희(朱熹)는 충에 대해서는 ‘자신의 양심을 극진히 함’(盡己)이라 했고, 서에 대해서는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침’(推己及物)이라고 해석했다. 공자가 늘 가르친 것은 일상적인 삶 속에서의 올바른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비록 천에 대한 믿음도 가지고는 있었지만, 천도(天道)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특히 귀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정치적 방면에서 공자는 일종의 개량론자로서, 중앙집권을 주장했고, 상하의 각 계급들이 자신의 직분을 잘 수행함으로써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행각했다. 그는 평생 쉬지 않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과거 주나라와 같이 천하가 안정을 회복하기를 꾀했다. 공자는 무리를 모아 학문을 가쳤는데, 이로부터 학문을 가르치는 전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참고]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 : 공자는 스스로 ‘옛 것을 미루어 잇되 기이한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述而不作)고 했다. 이 말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술’(述)을 ‘옛 것을 전함’ 혹은 ‘옛 것을 좆음’이라는 뜻으로만 해석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술’(述)에는 ‘미루어 부연(敷衍)함’ 또는 ‘계승하여 발전시킴’의 뜻이 있다. <중용>(中庸)에서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근심 없는 자는 오직 문왕일진저. 왕계(王季)를 부모로 두고 무왕(武王)을 자식으로 삼았도다. 아버지는 지으셨고 자식은 이를 이었다. 무왕은 태왕(太王)과 왕계와 문왕의 실마리를 이어 오랑캐를 통일하고 천하를 소유했다.”(子曰, 無憂者其惟文王乎. 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父作之, 子述之. 武王纘太王王季文王之緖, 壹戎衣而有天下.)고 했다. 여기서 공자는 무왕이 문왕을 ‘술’(述)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무왕이 단순히 문왕의 옛것을 그대로 전수 받고, 따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왕은 “셋으로 나누어진 천하 가운데서 둘을 소유하였지만, 그 때까지도 은나라를 섬겼다.”(三分天下有其二, 以服事殷.). 그러나 무왕은 상(商)나라를 쳐서 천하를 소유했다. 무왕이 문왕의 덕업을 계승만 한 것이 아니라 더욱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용>에서는 또 “무왕과 주공은 지극한 효자일진저. 대저 효라는 것은 사람의 뜻을 잘 계승하고, 사람의 일을 잘 잇는 자이다.”(子曰, 武王周公其達孝矣乎. 父孝者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했다. ‘계지’(繼志)와 ‘술사’(述事)는 같은 뜻으로, 이른바 ‘술’(述)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계속 발전시켜서 완성한다는 뜻이다. <중용>에서는 또 “중니는 요와 순을 조술(祖述)하였다.”(仲尼祖述堯舜)고 했다. ‘술’(述)은 곧 ‘조술’(祖述), 즉 스승의 뜻을 본받아 서술하여 밝힌다는 뜻과 ‘앞의 일을 잇는다’는 뜻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난 옛것을 맹목적으로 좆기만 하여 더하거나 보태는 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논어>에는 공자가 원양(原壤)에게 “어려서는 공손하지도 형제간에 화목하지도 못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잇는 것이 없구나.”(幼而不遜悌, 長而無述焉.)라고 하면서 꾸짖는 대목이 있다. ‘무술’(無述)은 앞 사람이 이루어 놓은 것을 계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작’(作)은 ‘개창’, 즉 앞 사람의 것을 잇지 않고 새로운 경지를 연다는 뜻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은 곧 앞 사람의 길을 따라 더욱 진보적으로 발전시키되 따로 새로운 괴이(怪異)한 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작’(不作)이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새로운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이부작’은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가운데 성공한 경험을 받아들인 다음, 이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상황에 알맞은 좀 더 이상적인 방안을 마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맹자는 공자를 일러 ‘집대성’(集大成)했다고 했다. 이는 잇되 창작하지 않고 앞 사람이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을 모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말 역시 술이부작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대성’해 놓은 것을 ‘집’하는 행위 자체 속에 이미 ‘집’하는 사람의 의도가 반영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용>을 통해 <논어>를 살펴보면 술자의 뜻이 비로소 드러나며, 공자가 평생 한 일의 성격도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아울러 공자는 “옛 것을 익혀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이라고 했다. ‘온고’는 ‘술’ 또는 ‘조술’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온고라고만 하지 않고 ‘지신’(知新)을 함께 말하고 있다. 결국 온고하는 이유는 지신을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오직 옛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단순히 전하고 따르기만 했다면 공자는 기존의 지식을 전해주기만 하는 선생에 불과할 뿐이다. 이는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또 공자는 다만 “요와 순의 행적을 기술하고, 문왕과 무왕의 업적을 밝혔다.”(祖述堯舜, 憲章文武)고 하지만, 그가 기술한 요와 순, 문왕과 무왕은 실제로는 이미 공자에 의해 ‘이상화’(理想化)가 더해진 것으로서, ‘탁고개제’(托古改制, 옛 것에 의존해서 제도를 상황에 맞게 고침)의 경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동중서(董仲舒)가 “공자는 신왕의 도를 세웠다.”(孔子立新王之道.<春秋繁路, 玉杯>)고 한 것은 근거가 있는 말이다. <논어>에는 “자장이 묻기를, 10세를 알 수 있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를 따랐음으로 빼고 보탠 것을 알 수 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따랐음으로 빼고 보탠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주나라를 잇는다면 백세 뒤라도 알 수 있다.”(子張問十世可知也. 子曰, 殷人于夏禮, 所損益可知也. 周人于殷禮, 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數百世可知也. <爲政>)이라고 했다. 공자의 뜻은 실제로는 삼대(三代. 夏나라, 殷나라, 周나라)의 제도에 근거해서 덜고 더함을 보태면 완전한 제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한 편으로는 ‘집대성’(集大成)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입신왕지도’(立新王之道)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는 제자가 무척 많았다. 가장 기대를 가졌던 안연(顔淵, 이름은 回)은 불행하게도 일찍 죽었다. 공제 제자 가운데 이후 유학과 가장 관계가 깊은 이는 복자하(卜子夏. 이름은 商), 증자(曾子. 이름은 參) 두 사람이다. 자하는 경을 전했고, 증자는 충(忠)과 서(恕) 등의 사상을 전했다.
공자 이후의 두 번째 위대한 사상가는 스스로 하나의 학파를 이루고 유가와 대립한 묵자(墨子. 이름은 翟)이다. 공자는 귀족의 후예이지만 묵자는 완전한 평민 출신이다. 공자는 여전히 계급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묵자는 무차등적 겸애를 가르쳤다. 묵자는 공리(功利)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며, 국가와 인민의 이익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공자와 달리 스스로 고행(苦行)을 하면서, 모든 사치를 배척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스스로 극한의 고통을 감당했다. 그는 또 오직 천하를 이롭게 하는 데만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위해 온몸이 희생된다고 해도 아까와 하지 않았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전쟁의 중단을 고취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비와 방어의 방법을 가르치면서 약소국을 위해 성을 지키기도 했다. 묵자는 종교적 특성이 매우 강해서 하늘을 높이고 귀신을 믿었으며 유가의 귀신에 대한 회의를 반대했다. 그에게도 제자가 매우 많았으며, 아울러 견고한 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묵자가 죽은 후, 묵자를 계승한 우두머리를 거자(巨子)라고 불렀는데, 묵자학파은 이들 거자에 의해서 대대로 전해 내려갔다. 당시에는 유가와 묵가의 세력이 거의 비등했다.(<墨子>는 묵자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
공자 생존시에도 다양한 상을 가진 많은 은자들이 있었다. 다만 이들은 세상을 구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오직 자신의 평온만을 찾고자 하였다. 양주(楊朱)는 묵자가 죽은 후, 은자들의 사상을 근본으로 삼아 철학 이론을 만든 사람이다. 양주는 세상을 가벼이 여기고 자신의 몸을 귀하게 여겼으며, 자신을 위함을 주로 삼았기 때문에 털 한 올을 뽑아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그런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양주의 학설은 유가와 묵가가 적극적으로 세상의 혼란을 구제하고자 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으며, 이들도 당시에 매우 큰 세력을 이루었다.
유가는 양주나 묵적과 같은 반대 세력으로 말미암아 잠시 동안 침체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을 반박하고 공자를 추존하는 위대한 사상가가 나타났다. 이가 바로 맹자(孟子. 이름은 軻)이다. 맹자 또한 개량주의자로서 구제도(舊制度)를 옹호하기는 했지만, 새롭게 고치고 변경시킨 것도 매우 많다. 그는 인민이 소중한 존재이지 군주가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철학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인간의 삶을 범주로 삼았으며, 공자의 사상에 근거해서 이를 발전시키고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확대시켰다. 특히 그는 인성(人性)의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유가와 마찬가지로 인(仁)과 의(義)를 인성의 근본으로 삼았다. 삶에 있어 최고 경지는 마음을 극진히 하고 본성을 아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존재의 이치가 ‘나’에게 갖추어 지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철학은 공자나 묵자에 비해 형이상학적인 측면을 좀 더 많이 가진다.(<孟子>에는 맹자의 말과 행적이 담겨 있다.)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묵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학자가 있었는데 이가 곧 송견(宋鈃)이다. 그는 스스로 극단적인 고통을 감수했다. 또한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천하를 안정시켜 백성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求天下之安寧以活民命)고 호소했다. 동시대의 양주 일파인 화자(華子)는 생명을 중시하는 이론을 펼쳤다.(<呂氏春秋>에 나오는 華子는 莊子 雜篇에 나오는 華子와 동일 인물이며, 華는 아마도 姓일 것이다.)
[참고 : 순자는 일찍이 묵작(墨翟)과 송견을 함께 말하고 있지만, 송견은 실제로는 묵가에 속하는 학자가 아니다. 그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묵가와 도가의 중간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呂氏春秋, 去宥篇>에 송견의 학설이 담겨 있다.]
송견과 맹자의 사상도 인간의 현실적인 삶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맹자와 송견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이미 우주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존재를 관찰한 위대한 두 사상가가 있었다. 이들이 곧 노담(老聃)과 혜시(惠施)이다. 노담의 생존 시기는 맹자보다 조금 앞서고 혜시는 조금 늦다. 노자(老子. 姓은 李이고 이름은 耳. 老聃은 字이다.)는 “스스로 숨어서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소임으로 삼은”(以自隱無名爲務) 사람으로서, 방대하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공자보다 앞서 살았던 노팽(老彭)에 대해서 공자는 도를 아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노담과 노팽은 이름이 서로 비슷하다. 이로 말미암아 후대 사람들이 노담을 마침내 공자의 스승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오해는 대체로 전국 말년에 진나라가 막 통일을 이룰 시점에 나타나는데, 장자와 순자, 한비자 등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노자는 중국 우주론의 창시자로서 사상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자는 여전히 천(天)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묵자는 천에 대한 신앙이 더 심했다. 그러나 노담에 와서 천은 결코 존재의 근본이 아니며, 천보다 앞서서 천의 바탕이 먼저 있었다고 보았다. 이를 도(道)라고 했다. 노자는 우주 속의 모든 현상을 관조(觀照)한 다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복한다는 법칙을 찾아냈다. 삶에 있어서는 무위(無爲)와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주로 삼았으며, 허(虛)에 이르러 고요(靜)를 지킬 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모든 문명을 폐기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는 유가와 묵가의 인위적인 행위를 부정하는 것이며, 또한 양주 일파의 귀생주의(貴生主義) 역시 반대한 것이다.(老子는 <老子>를 썼으며, 대체로 노자의 語錄의 성격을 가진다.)
[참고: 老子라는 사람과 그의 책에 대해 지금까지 매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러한 논란 가운데는 노자가 묵자보다는 늦게, 맹자보다는 일찍 활동했다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진나라 이전의 여러 저작 가운데 <장자>와 <여씨춘추>는 모두 공자와 노자를 동시대 사람이라고 했다. <장자>에는 우언(寓言)이 많기 때문에 믿을 만한 근거는 되지 못하지만, <여씨춘추>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만을 기술하고 있다. 곽말약(郭沫若)은 <先秦時代 天道觀의 發展過程>에서 “노자가 곧 노담이며, 진나라 이전의 사람임이 분명하다.”고했다. 또 노자와 공자는 동시대 사람이며, 공자의 선생이라고 했다. 여씨 문하의 일단의 학자 또한 이러한 주장에 어떠한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곽말약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노자라는 책은 전국시대 전기에 만들어졌다. 그 속에는 노담의 학설이 담겨 있고, 여기에 후인들이 약간의 내용을 보탠 것이 현재의 <노자>이다.]
혜시는 우주 속에서의 모든 사물을 관조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우주를 모든 것을 포괄하는 ‘태일’(太一)이라고 했다. 이와 아울러 너무 작아 안이 없는 것을 ‘소일’(小一)이라고 했다. 혜시에 오면 천의 지위는 더욱 하락하게 된다. 그는 “천은 지와 더불어 똑 같이 낮다”(天與地卑)고 생각했다. 혜시는 대립되는 사물의 상호 전화 현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만물은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이라고 했다. 그는 보기에 만물이 독립된 별개의 것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두 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만물을 널리 사랑하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관점은 묵자의 인간에 대한 겸애를 만물에까지 확대시킬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울러 혜자의 가장 큰 특색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전의 공자나 묵자, 양주의 연구 대상은 인간에 머무를 뿐이었고, 노자에 오면서 우주에 대한 관심이 나타나지만, 여전히 객관적 대상에 대한 연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혜자는 대상을 그 자체로서 연구했다. 또한 그는 우주를 신비적인 도를 가지고 설명하기를 거부하고 태일(大一)과 소일(小一)이라는 개념을 통해 해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를 선진시대 최초의 유물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혜시는 또 궤변(詭辯)을 좋아했다. 객관적 대상을 중요시하고, 궤변을 좋아하는 그의 학풍은 당시 중국 사상계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 왔다.
[참고 : <관자(管子), 형세편(形勢篇)>에 “천은 그 일정한 법칙을 바꾸지 않고, 지는 그 규칙을 바꾸지 않는다.”(天不變其常, 地不易其則)이라고 했다. 천과 지에 대한 이러한 비교는 명백히 유물론적 관점이다. 그런데 <형세편>은 시기가 혜자보다 앞선다. 이러한 점에서 혜자를 선진시대 최초의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노자의 뒤를 이어 무위의 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학자 가운데 노자의 제자인 환연(環淵)이 있다. 환연과 동시대 사람인 신도(愼到)와 전병(田騈)도 노자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들의 학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들은 제물(齊物,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가 주장한 반대의 일치, 즉coincidentia oppositorum과 유사한 개념)을 최고로 삼고, 지혜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버릴 것을 주장했다. 또한 삶의 최고 경지는 지각능력이 없는 뭇사물과 같아지는 데 있다고 했다. 이들의 주장은 법가(法家)의 인간관 형성에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노담과 혜시의 학설을 종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체계를 이룬 사람이 장자(莊子, 이름은 周)이다. 장자가 혜시에게서 받은 영향이 매우 크기는 하지만, 그 중심 사상은 어디까지나 노자로 귀착된다. 그는 인위적인 것을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삶의 최고 목적은 천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행각했다. 이러한 장자의 학설은 일종의 신비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장자가 혜시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 편으로는 혜시의 궤변과 개념에 대한 번잡한 분석 등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리고 모든 감정을 버리고, 분별을 없앰으로써 직관(直觀, intuition)을 통해 참된 도를 깨달을 것을 강조했다. 장자에 와서 양주 이래의 도가적 사상이 비로소 완성을 이루게 된다.(莊子가 직겁 쓴 책에는 <莊子, 內篇>이 있다.)
혜시의 객관적 대상에 대한 관심과 변론을 좋아하는 태도는 변론가 혹은 명가(名家)의 학풍을 발생시켰다. 혜자 이후 다음으로 유명한 변론가에는 공손룡(公孫龍)이 있다. 공손룡의 공헌은 동일한 사물 속에도 상호 독립적이며 불변하는 요소가 있음을 찾아낸 데 있다. 공손룡은 이를 지(指)라고 했다. 지는 불변하며 지와 지는 상호 독립적이다. 이를 통해 그는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주장과 견백론을 주장한다. 혜시가 사물을 통합해서 보는 데 관심을 가지고, 대립되는 존재들의 상호 전화(轉化)에 주목했다면, 공손룡은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분해(分解)해서 보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이를 통해 동일한 사물 속에서도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존재가 제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나 공손룡과 같은 시대의 많은 변론가들은 결국은 궤변으로 흐르고 만다.(공손룡이 지은 책에는 <公孫龍子>가 있다.)
혜시와 공손룡은 상식에서 벗어난 주장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상식 자체를 부정해 버린다. 불은 뜨겁고, 눈으로는 사물을 본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이들 궤변론자들은 오히려 ‘불은 뜨겁지 않다’거나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상식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다. 인식의 문제를 비교적 올바른 방법으로 연구한 이들은 묵자학파였다. 전국시대에 오면 묵자는 이미 상리씨(相里氏)의 묵(墨), 상부(相夫)씨의 묵, 등릉(鄧陵)씨의 묵 등의 여러 학파로 갈라진다. 묵자 자신도 이미 수사학(修辭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후기의 묵가들은 궤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올바른 논증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연구 결과는 <묵경>(墨經) 및 ‘대취’(大取)와 ‘소취’(小取)에 담겨 있다. 그들은 상식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궤변론자들을 반박하였다. 그들은 인식 내용의 진리성을 긍정하고, 논증의 특성이나 방법 등에 대한 정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밖에도 후기 묵가들은 묵자의 겸애설(兼愛說)과 공리(功利)에 대한 사상에 있어서도 더욱 진보된 이론을 제시하였다.
이 시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파에는 음양가(陰陽家)가 있다. 이들의 대표자는 추연(鄒衍)이다. 그들은 땅의 모양이 역사의 흥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오덕(五德) 즉 오행(五行)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들의 인간의 이상적인 삶에 대한 입장은 유가와 매우 흡사하다. 그들의 생각이 비록 매우 미신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경험적 사물을 추론의 근거로 삼았고, 또한 그들의 지리학적 지식은 사실과 매우 근접하고 있다. 추연의 학설은 자연 현상과 인간의 역사에 대한 상호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그러나 황당한 미신적인 요소가 매우 많기 때문에 순수한 철학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진나라 이전의 철학을 극적으로 발전시킨 학자는 순자(荀子. 이름은 况, 字는 卿)가 있다. 순자는 공자는 존경했지만 맹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맹자는 유가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순자는 우주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철저한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철학을 확립했다. 그가 추구한 최고의 이상은 ‘하늘을 누르고 자연을 다스리며’(制天宰物), ‘사람이 하늘을 이김’(以人勝天)으로써 ‘하늘 및 땅과 더불어 가지런하게 되는’(與天地參) 데 있었다. 그는 외부의 자연, 즉 천을 극복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의 자연인 성(性)에 내재된 이기적 요소도 극복하고자 했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본성을 바꾸어야 하며, 이 때문에 예와 의를 통한 수련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순자도 노자와 장자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아 ‘마음을 비우고 통일하여 고요하게 할 것’(虛一而靜)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인본주의적인 ‘유위(有爲)의 철학’은 노장사상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위대한 유물론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혜시와는 달리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와 모든 존재에 대한 보편적 사랑에 대해서는 긍정하지 않고, 모든 존재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인간이 만물을 주재(主宰)할 것을 주장했다.(저술에는 <荀子>가 있다.)
[참고] 순자(荀子)는 중니(仲尼)와 자궁(子弓)을 늘 동렬(同列)에 놓는다. 자궁은 곧 공자의 제자인 중궁(仲弓)이다. 그러나 중궁이라고 하면 스승의 이름인 중니에 사용된 중을 거듭 쓰게 된다. 이 때문에 중궁을 자궁이라고 했던 것이다. 중궁을 자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로(子路)를 계로(季路)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공자는 늘 중궁을 일컬어 ‘가히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하다’(可以南面)이라고 했다. 이처럼 중궁의 학문적 경향은 정치와 실천에 있었기 때문에, 순자는 그를 으뜸으로 삼았다. 순자의 <비십이자>(非十二子)에서 무슨무슨 ‘자’(子)라고 하지만, 유독 자사(子思)와 맹가(孟軻)에 대해서는 “이는 자사와 맹가의 죄이다.”(是子思孟軻之罪也.)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순자의 태도는 매우 편협하며, 스승이 같은 데도 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격하는 데 힘을 쓴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순자의 생각은 자사와 맹자가 공자의 학문을 드러내는 데 많은 공이 있지만, 그러나 잘못도 있기 때문에 이러저러한 것은 죄라고 한 것일 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매우 많기 때문에 여기에 간략하게 언급해 놓는다.
진나라 이전의 철학은 밖으로는 법가(法家)의 청치 철학을 숭상하였다. 물론 다른 학파들에게도 정치사상이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정치에 대한 연구만을 수행한 학파는 법가이다. 법가의 유래는 공자보다 백여 년 앞선 관중(管仲)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 법가의 기초를 확립한 학자는 상앙(商鞅)과 신불해(申不害)이다. 그러나 법가 사상에 확실한 철학적 내용을 부여한 사람은 순자의 제자인 한비(韓非)이다. 신도(愼到)와 전병(田騈) 등의 사상에도 이미 법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지만, 한비가 이러한 것들을 찾아내고 체계화함으로써 하나의 온전한 학파가 성립될 수 있었다. 한비는 삶의 문제와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객관적 대상 세계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음의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韓非가 쓴 책에는 <韓非子>가 있다.)
순자 이후, 유가 가운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훌륭한 학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도 매우 많다. 그러한 업적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업적은 <역전>(易傳)이다. <역전>은 공자의 사상과 노담의 사상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고 있으며, 그 속에는 우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매우 방대하고 정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역전은 변화에 대해 깊이 관찰함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변화 가운데 있고,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세계가 영원히 지속해 나간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모든 변화는 서로 상반되는 존재가 상대방을 부정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며, 이러한 상반되는 존재를 음(陰)과 양(陽), 또는 유(柔)와 강(剛)이라고 했다. <역전>은 세계에 내재해 있는 오묘한 진리를 찾고자 했고, 아울러 다양한 변화 속에서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최고의 법칙을 찾고자 했다. <역전>은 주나라와 진나라의 우주론 가운데 최고로 발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역전>은 인간의 문제에 있어 강건(剛健)과 중정(中正)을 기본으로 삼고 자강일신(自强日新)할 것을 강조한다. 또한 자연의 오묘한 변화에 대해 연구하면서도, 편리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데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고] <역전>은 마땅히 <역대전>(易大傳)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계사전’(繫辭傳)은 <역대전>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계사전’은 혜자와 장자 이전에 이미 만들어졌으며, 당연히 순자보다 앞서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춘추(春秋)시대에서 전국(戰國)시대를 거치는 수백 년 간의 전란은 진(秦)나라의 통일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우선 언론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유가 경전이었던 시(詩)와 서(書)를 모두 태워버리고, 사상에 대해 제갈을 물려 버렸다. 모든 사상의 발전은 커다란 좌절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암흑 가운데서도 각 학파의 학설들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발전하고 있었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저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철학적 저작, 예컨대 <중용>(中庸), <대학>(大學), <예운>(禮運, 禮記의 篇名) 및 <역전>(易傳)의 일부, <장자> ‘외편’(外篇) 및 ‘잡편’(雜篇)의 일부는 대체로 진나라와 한나라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진나라는 학자들이 자유로운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막았다. 이로 말미암아 지은이들은 감히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없었다. 진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하고, 한나라가 천하를 통일을 한다. 한나라 초기 수십 년 동안 각 학파의 학문은 상당 수준 발전했으며, 그 가운데서도 도가 학파가 가장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당시에 이른바 황노학(黃老學)이라는 것이 나타났다. 이들은 군신(君臣) 및 상하의 분별이라는 덕목과 함께 양생(養生)이라는 도가의 사상을 중요시 했다. 이러한 황노학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생(黃生)과 사마담(司馬談) 등이 있다. 한나라 초기의 도가 사상은 <회남왕서>(淮南王書)에 의해 종합된다. 이 때 가의(賈誼)는 유가와 도가와 법가의 사상을 종합하고자 했지만, 아깝게도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한대는 춘추시대 이래의 사회적 대변동이 이미 끝나고, 새로운 사회 질서가 확립됨으로써 인민의 생활도 점차 안정되어갔을 뿐만 아니라, 사상에 대해서도 통일을 원하게 되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직 공자만을 존중하게 하고 나머지 학파들은 활동을 금지했다. 이로 말미암아 유가가 중국 사상사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직 유가만을 존중하게 함으로써 이후에도 중국 철학에서는 백가가 쟁명하는 기운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동중서는 유가 이외의 다른 여러 사상들을 부정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사상에는 유가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의 사상도 혼합되어 있었다. 그는 음양오행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고, 하늘의 변화와 인간의 일은 상응한다고 여겼다. 그의 사상 속에는 많은 미신적 요소가 내재해 있기 때문에 순수한 철학사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동중서의 영향은 매우 컸다. 중국의 사회 윤리가 된 삼강오륜(三綱五倫)은 그가 만들어 낸 것이다.(동중서의 글은 <春秋繁路>에 담겨 있다.)
유가와 음양가의 혼합은 서한(西漢) 사상의 특색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재이(災異)나 천인상응(天人相應)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다. 이는 사실 사상의 후퇴를 의미하는 징표이다. 서한 말기에 와서 유독 도가의 자연관을 중요시한 학자가 있었는데, 이가 양웅(揚雄. 字는 子云)이다. 양웅의 우주론에는 노자와 <역전>의 학설이 혼합되어 있지만, 인생론에서는 공자의 사상이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방만 했을 뿐이지 위대한 창조의 능력은 없었다.(양웅의 저술에는 <太玄經>과 <法言>이 있다.)
[참고] 양웅이 노자와 장자의 자연 사상을 숭상한 것은 엄군평(嚴君平)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서 <왕공량공포전>(王貢兩龔鮑傳)에 “촉(蜀)나라에 엄군평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군평은 성도(成都)에서 점을 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치는 일을 천한 일이라고 여겼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을 은혜롭게 대했다. 가끔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점을 치러 오는 사람이 있어도 시초(蓍)草와 귀갑(龜甲)에 기대어 이로움과 해로움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자식의 일에 대해서는 효도를 가지고 말하고, 형제들 사이의 일에 대해서는 순종을 가지고 말하고,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충을 가지고 말해 주면서, 각각 상황에 따라 그들을 인도해 주었다. 그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내 말을 좆는 자가 반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몇 사람만 점을 봐 주는데 살만큼만 벌면 가게문을 닫고 노자를 읽었다. 두루 널리 알아서 막히는 게 없었고, 노자와 장자의 뜻에 의거해 십만 여 언의 글을 남겼다. 양웅이 어릴 때 그에게서 배우고, 서울에서 벼슬을 살면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조정의 여러 어 이들이 모두 군평의 덕이라고 했다.”(蜀有嚴君平..... 君平卜筮于成都市, 以爲卜筮者賤業, 而可以惠衆. 人有邪惡非正之問, 則依蓍龜爲言利害. 與人子言, 依于孝, 與人弟言, 依于順, 與人臣言, 依于忠, 各因勢導之, 以善從吾言者已過半矣. 裁日閱數人, 得百錢足自養, 則閉肆下簾而授老子. 博覽亡不通, 依老子莊周之指, 著書十萬餘言. 揚雄少時從遊學, 以而仕京師顯名, 數爲朝廷在位賢者稱君平德.)라 했다. 엄군평의 학문은 노자와 장자를 기본으로 했지만 유가에서 말하는 충이나 효와 같은 여러 덕들도 부정하지 않았다. 또한 점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는 데서 <주역>에 대해서도 많은 이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양웅은 “경전은 역만 한 것이 없다.”(經莫大于易)이라고 했다. 또한 양웅은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공자와 맹자의 도덕을 숭상하였으며, 우주론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자연주의적인 사상을 근간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양웅 또한 엄군평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데, 이는 양웅이 엄군평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군평은 노자와 장자를 중시한 데 반해, 양웅은 공자와 맹자를 종주로 삼았다는 차이가 있다.
음양가의 사상이 흥성했던 결과, 마침내 허망한 풍조를 타파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가 바로 王充(字는 仲任)이다. 왕충은 양웅보다 약간 늦게 활동한 사상가였다. 그의 글은 그가 죽은 후 2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왕충은 당시 유학자들의 허위의식과 세속의 미신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도가의 자연철학이었다. 당시 사상계에 대한 왕충의 파괴적 비판은 많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을 펼치는 데 있어서는 그다지 뛰어난 것이 없었고, 아울러 새로운 철학적 사조(思潮)를 만들어내지도 못했다.(왕충이 쓴 책에는 <論衡>이 있다.)
후한(後漢) 중기의 대표적인 사상가에는 왕부(王符. 字는 節信)가 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을 분석하는 데 뛰어났으며, 우주론에 있어서는 도기이원론(道氣二元論)을 주장했다. 그의 이원론적 관점은 이후 송(宋)대 리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바탕이 되었다. 후한 말기의 사상가 가운데 왕부 이외에도 순열(荀悅. 字는 仲豫), 서간(徐干. 字는 偉長), 중장통(仲長統. 字는 公理)등과 같은 이들이 있었다. 순열은 ‘법’(法)과 ‘교’(敎)를 함께 중요시했으며, “천하와 국가는 한 몸”(天下國家一體)라는 입장을 펼쳤다. 서간은 순자를 추종하였으며, 덕(德)과 예(藝)의 합일을 주장했다. 중장통의 학문은 비록 유가를 근본으로 삼기는 했지만, 노자와 장자의 영향도 매우 많이 받았으며, 위진현학(魏晋玄學)의 선구가 된다.
전한(前漢)과 후한(後漢) 양한대(兩漢代)에는 경학(經學)이 매우 왕성하게 연구되었으며, 특히 후한에 와서는 예교(禮敎)를 강조하는 세력이 더욱 커졌다. 모든 것은 끝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오듯 위진시대에 오면 도가의 사상이 부흥하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도가 사상을 현학(玄學)이라고 불렀으며, 위진대의 현학은 하안(何晏, 字는 平叔)과 왕필(王弼, 字는 輔嗣)에 의해서 기초가 확립되었다. 그들은 ‘무’(無)를 모든 존재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이상적인 삶은 무위(無爲)에 있다고 했다. 천지가 만물을 자라나게 함에 있어 편견을 가지고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도 마땅히 인위적인 작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왕필의 업적이 하안보다 더 크지만, 애석하게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상을 마음껏 펼치지는 못했다. 하안 및 왕필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서 완적(阮籍, 字는 嗣宗)과 혜강(嵇康. 字는 叔夜) 등이 있다. 이들은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최선이라고 보고, 예(禮)나 교(敎)와 같은 인위적인 제도나 행위를 업신여겼다. 일상적인 삶도 아무 데도 구애되지 않고 호탕하였으며, 사회적 가치 체계 따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위진현학이 이루어 놓은 가장 큰 업적은 <장자주>(莊子注)이다. 이 책은 향수(向秀. 字는 子期)가 지었으며, 뒤에 곽상(郭象. 字는 子玄)이 다시 보완했는데, 그 속에는 많은 새로운 견해가 추가됨으로써 장자의 학문이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와서 장자의 도(道)는 다원론적인 입장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무위에 대해서도 무엇이든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지, 억지로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행위나 의식적으로 무위를 추구하는 행위는 반대했다.
[참고 1] 위진 현학은 오래전부터 그 실마리가 갖추어지고 있었다. 첫째는 왕충의 <논형>이 널리 읽히게 된 것과 관계가 있으며, 둘째는 중장통의 사상과도 관계가 있다. <후한서>(後漢書) ‘주’(注)에 인용된 <원산송거>(袁山松書)에, “왕충이 지은 논형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다가, 채옹(蔡邕)이 오(吳)나라에 들어가 처음으로 얻게 되어 늘 남몰래 읽으며 도움을 받았다. 그 뒤에 왕랑(王朗)이 회계태수(會稽太守)가 되었을 때 다시 그 책을 얻었다,...이 때부터 비로소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充所作論衡, 中土未有傳者, 蔡邕入吳始得之, 恒秘玩以爲談助. 其后王朗爲會稽太守, 又得其書.....由是遂見傳焉)고 하고 있다. 왕충이 도가의 자연주의적 입장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사실 한나라 말기에 발생한 사회적 조류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장통은 <낙지론>(樂志論)에서 “안방에 앉아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노자의 현허를 생각하며, 정화를 호흡하고, 지인의 경지 구한다.”(安神閨房, 思老氏之玄虛. 呼吸精和, 求至人之彷佛.)라 하고, 또 시(詩)를 써서 말하기를 “온갖 근심 무엇하랴, 나 없으면 그만인데. 번민일랑 하늘 위로 날려 버리고, 걱정은 땅속에 묻어버리자. 오경(五經)도 내버리고 풍아(風雅)도 없애리라.”(百慮何爲, 至要在我. 寄愁天上, 埋憂地下, 叛散五經, 滅棄風雅.)라고 하였다. 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이 중장통 이후에 활동한 하안과 완적의 선구가 되었다.
[참고 2] 지금까지 사람들은 곽상(郭象)의 <장자주>(莊子注)를 단순한 주석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주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철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위진(魏晋 시대의 사람들은 현리(玄理)뿐만 아니라 명리(名理)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명리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은 공자의 정명(正名)을 종주로 삼았지만, 분석을 중요시 하고 논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진나라 이전 명가(名家)학파와 비슷한 측면을 가진다. 위(魏)나라에는 유소(劉邵, 字는 孔才), 종회(鍾會. 字는 士季)와 같은 유명한 명리학자가 있었고, 진(晋)나라에는 배외(裴頠, 字는 逸民), 노승(魯勝. 字는 叔時)와 같은 명리학자가 있었다. 유소와 종회 등이 연구한 중요한 문제는 “재와 성이 같은가 다른가”(才性同異)에 대한 것이었다. 배외는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숭유론>(崇有論)이라는 책을 써서 현학자들이 무(無)만 숭상하고 유(儒)를 천대하는 사상에 대항했다. 노승은 일찍이 <묵경주>(墨經注)를 썼으며, 선진시대 묵가나 명가의 개념이나 논증에 대한 학설을 숭상했다. 진나라의 유학자에는 부현(傅玄, 字는 休奕)이 있다. 그는 유가를 중심으로 하여 법가의 학설을 종합했다. 또한 그는 “천하를 위해 이로움을 이르키자”(爲天下興利)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묵가의 공리주의적인 사상과도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 유소(劉劭)의 저서에 <인물지>(人物志)가 있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의 ‘재’(才)와 ‘성’(性)의 등급을 비교해서 논하고 있다. 유소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부하(傅嘏)가 있다. <삼국지>(三國志) ‘부하전’(傅嘏傳)에는 “부하는 늘 재(才)와 성(性)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해 말하곤 했는데, 종회가 이를 모아 자세하게 설명했다.”(嘏嘗論才性同異, 種會集而論之.)고 했다. <삼국지> ‘순욱전’(荀彧傳) 주에 何劭의 ‘순찬전’(荀粲傳)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부하와 이야기를 할 때, 부하는 명리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했으나 순찬은 상현(尙玄)에 대해서 말했다.”(與傅嘏談, 嘏善名理, 而粲尙玄還.)이라고 했다. <삼국지> ‘종회전’에는 “장성하여.....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명리에 대해 정밀하게 연구했고, 그 결과 명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 일찍이 ‘역무호체’(易無互體)와 ‘재성이동’(才性異同)에 대해서 연구했다. 종회가 죽은 후, 그의 집에서 책 20편을 찾았는데 이름은 <도론>(道論)이었지만, 사실은 형명가(刑名家)의 사상을 담고 있었는데, 그 글이 종회의 것과 흡사하였다.”(及壯.....精練名理, 以夜續晝, 由是獲聲譽. .......嘗論易無互體, 才性同異. 及會死, 後于會家得書二十篇, 名曰道論, 而實刑名家也, 其文似會.)고 했다. 진나라에 이르러 배외는 “명리에 대해 밝은 것”(善談名理)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世說新語>에 보인다.) <진서>(晋書) ‘배외전’에는, “당시의 사람들은 배외를 달변가(達辯家)라고 했다. ...... 그가 지은 책 <변재>(辨才)는 고금의 오묘한 이치를 모두 따져서 해설한다는 의미인데, 완성을 보지 못하고 화를 당했다.”(時人謂頠爲言談之林藪. ......又著辨才, 謂古今精義, 皆辨釋焉, 未成而遇禍.)고 했다. <진서> ‘노승전’(魯勝傳)에서 노승은 <묵변주>(墨辨注) 외에도 “또 여러 다양한 저술들을 모아 <형명>(刑名) 두 편을 써서 대략의 뜻을 설명했다.”(又采諸衆雜集爲刑名二篇, 略解指歸.)라고 했다. 이전에 순자는 “이름을 지어서 실재를 가리킴으로써 위로는 귀천이 분명해지고, 아래로는 같고 다름이 구별된다.”(制名以指實, 上以明貴賤, 下以辨同異.)라고 했다. 위진대의 명리가들도 귀천과 같고 다름, 이 두 가지 일을 함께 밝히고자 했지만, 사실은 귀천을 구별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재성동이’(才性同異), 즉 재와 성이 같은가 다른가의 문제는 인간의 선천적인 재질의 높고 낮음을 분별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부현(傅玄)은 <부자>(傅子)에서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은 위상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위상이 세워지지 않으면 명리도 무너진다.”(國典之墜, 猶位喪也. 位之不建, 名理廢也.)고 했다.(葉德輝의 편집본에서 인용함) 이름과 위상 사이의 질서 또한 명리의 범주에 속해 있다. 명리학파는 귀천과 다르고 같음을 밝히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현학가들은 제물(齊物)을 중요시하여 모든 구별을 초월하고자 했다. 이들이 당시 대립하던 중요한 두 학파였다.
현학(玄學)이 크게 유행할 때 외부로부터 새로운 사상이 도입되어 중국 사상에 변화를 가져 오게 되는데, 이 새로운 사조가 곧 불교이다. 불교가 처음 수입되었을 때는 이에 반대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華夷之辨)에 입각해서 이러한 외래 종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남북조(南北朝) 시기 불가(佛家)에 반대한 사람 가운데 논리가 가장 정밀했던 사람이 범진(范縝, 字는 子眞)이다. 그는 <신멸론>(神滅論)이라는 책을 통해 불교의 신불멸론(神不滅論)을 부정했다. 당시에는 신멸 문제에 대한 논쟁이 크게 유행했다. 이후 불교의 포괄적이면서도 정밀한 이론은 마침내 중국 사상계를 잠시 지배하게 되었고, 뛰어난 학자들이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에도 불교의 세력이 매우 왕성했지만, 최고의 전성기는 수(隋)나라와 당(唐)나라에서였다. 많은 중국의 승려, 예컨대 동진(東晋)의 승조(僧肇)와 도생(道生), 진(晋)나라와 수(隋)나라 교체기에 창립된 천태종(天台宗)의 지의(智顗), 당대(唐代) 유식(唯識)의 대가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광대화엄종(光大華嚴宗)의 법장(法藏) 및 선종(禪宗)의 혜능(慧能)과 신회(神會)는 모두 독창적인 사상가들로서,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고유한 이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도 그 이론은 불교의 경전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결코 불교라는 범주를 초월하지는 못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사상이 비록 중국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중국철학의 범주에는 들어올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인도(印度)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불교와 쌍벽을 이루었던 것이 도교이다. 도교는 불교의 사상을 충분히 흡수한 다음, 이를 더욱 발전시켜 새로운 체계를 만들고, 다시 불교와 대립했다. 그렇다고 해도 도교는 순수한 철학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큰 공헌을 하지는 못했다.
불교가 수백 년 동안 유교를 억압하자 마침내 불교에 대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한 편으로는 유가 사상의 부흥을 기도 했는데, 그 대표자가 한유(韓愈, 字는 退之)이다. 한유는 불교를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도교까지도 부정하면서 고대 유가의 적극적인 인본주의적 유위의 철학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렇다고 해도 한유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상 체계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그는 사상 운동의 지도자일 뿐, 철학자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의 제자인 이고(李翺. 字는 習之)는 불교와 유교를 융합하여 비교적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그는 유교보다는 불교의 요소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한유가 시도한 유교 부흥 운동과는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韓愈의 중요한 철학적 저작에는 <원도>(原道)와 <원성>(原性)이 있고, 李翺는 <복성서>(復性書)를 지었다.)
신유학이 제대로 자리를 잡은 것은 북송대에 와서이다. 신유학은 고대의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삼고, 노장 사상과 불교 사상, 도교 사상을 융합하여 새로운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신유학에서도 중국 철학에 전반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대대’(待對)와 ‘합일’(合一)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립’과 ‘통일’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신유학의 선구자에는 범중엄(范仲淹. 字는 希文), 손복(孫復. 字는 明復), 호원(胡瑗. 字는 翼之), 석개(石介. 字는 守道)와 같은 이가 있다. 범중엄은 학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호원과 손복, 석개 세 사람은 유학을 부흥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불교와 도교를 극력 배척하면서 유가의 경전을 높이고 밝히는 데 힘을 썼지만 체계적인 이론을 전개시키는 못했다. 제대로 독창적인 철학 체계로서의 ‘도학’(道學)을 확립한 사람은 주돈이(周敦頤), 소옹(邵雍), 장재(張載) 및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이다. 주돈이(周敦頤, 字는 茂叔. 濂溪先生이라고도 불렀음)와 소옹(邵雍, 字는 堯夫, 康節先生으로 부름)은 불교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그러나 철학 체계의 기본적인 얼개는 <주역>에 근원을 두고 있다. 주돈이는 태극과 음양을 가지고 우주를 설명하고자 했다.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성’(誠)을 위주로 삼았으며, ‘무욕’(無欲)과 ‘정’(靜)을 강조했다. 소옹은 상수학(象數學)을 연구했다. 그는 수를 가지고 우주 및 인간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했으며, 우주와 역사는 모두 수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옹의 철학은 매우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수(數)를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억지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주돈이는 <태극도설>(太極圖說), <통서>(通書)등을 썼고, 소옹은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저술하였다.)
장재(張載, 字는 子厚, 橫渠先生이라고 부름)의 학설은 그 취급 범위가 매우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내용 또한 깊고 풍부하다. 기(氣)와 태허(太虛)를 가지고 우주의 발생 과정을 설명했다. 우주 속에서의 모든 존재는 기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기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태허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기는 가장 미세하며, 스스로 운동하는 물질이고, 태허는 곧 기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이처럼 기와 태허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철학적 체계는 본질적으로 일종의 유물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둘이면서 하나, 즉 모든 존재는 대립과 통일을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고 보았다.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까닭에 변화의 미묘한 작용이 이루어 질 수 있고,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기도 하기 때문에 영원히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공자의 인(仁)과 묵자의 겸애(兼愛)를 종합하고, 맹자의 ‘진성’(盡性)과 순자의 ‘화성’(化性)을 종합하여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장재의 저서에는 <정몽>(正蒙), <경학리굴>(經學理窟), <역설>(易說), <어록>(語錄) 등이 있다.)
주돈이와 소옹, 장재가 신유학 혹은 도학의 창시자라고 한다면, 도학을 확립한 사람은 이정(二程) 형제이다. 이정 형제는 일찍이 주돈이에게서 공부를 했고, 소옹 및 장재와 더불어 사우(師友)의 사이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정 형제는 주돈이와 소옹, 장재의 사상을 흡수하여 더욱 진보된 철학적 체계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사상이 원숙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호(程顥, 字는 伯淳, 明道先生으로 불림)는 세계를 영원히 그치지 않는 거대한 흐름으로 파악하였으며, 만물은 본디 하나의 몸에 의존해 있고, 삶의 최고의 목적은 만물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정이(程頤, 字는 正叔, 伊川先生으로 불림)는 모든 존재가 ‘그렇게 존재하게 된 이유’(所以然之理)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존재를 형이상(形而上)의 존재와 형이하(形而下)의 존재로 나눈 다음, 형이상의 리(理)를 우주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삶의 목적을 거경궁리(居敬窮理, 경의 상태를 유지하여 이치를 탐구함)에 두고, 한 편으로는 경을 통한 수양의 공부를 행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격물을 통한 인식의 완성(格物致知)을 이룸으로써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 곧 리와 일체가 되는 경지를 추구했다. 이정 형제의 사상은 서로 비슷한 면도 있지만 매우 다른 면도 있다. 형인 정호는 경험적인 인식에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음에 반해, 동생 정이는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뿐만 아니라 정호에게 있어 삶의 최고의 목적은 만물과 일체가 되는 신비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지만, 정이는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수양을 통해 점진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을 강조했다.(이정에게는 <문집>(文集)과 <어록>(語錄)이 있는데, <어록>에는 <정씨유서>(程氏遺書)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천은 <역전>(易傳을) 저술했다.)
[참고 1] 송대의 도학이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기는 했어도 그들 만의 창조적인 요소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도학의 여러 개념과 이론은 모두 불교나 도교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의 경전이나 도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단편적인 용어만을 가지고 유가의 관념에 억지로 연결시킴으로써 신유가의 학설이 불교와 도교의 것을 이리저리 꿰어 맞춘 것에 불과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심지어 장재의 사상이 회교와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경우까지 있지만, 한마디로 근거 없는 소리이다. 최근에 와서 사람들은 ‘색은’(索隱)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소설뿐만 아니라 철학에 대해서까지도 그렇게 하는 데, 사실은 별 의미 없는 일이다. 어떤 철학자든, 비록 이전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자신만의 독창적인 견해에 입각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서 발전과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만약 이러한 창조능력이 없다면 철학적 체계를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참고 2] 북송오자(北宋五子)는 나이를 가지고 보았을 때, 소옹이 가장 나이가 많고, 주돈이가 그 다음이고, 장재가 또 그 다음이며, 이정은 장재보다 10여 세나 어리다. <송사>(宋史)는 주돈이, 이정, 장재, 소옹의 순서로 배열해 놓았고, <송원학안>(宋元學案)은 소옹, 주돈이, 이정, 장재의 순서로 배열해 놓았는데, 모두 옳지 못하다. 주돈이와 소옹, 장재는 아마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정은 일찍이 주돈이와 소옹, 장재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사상과 학설 통해 훌륭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주돈이가 가장 먼저 죽었고, 장재와 소옹은 같은 해에 죽었으며, 8년 뒤에 형인 정호가 죽었고, 13년 뒤에 아우인 정이가 죽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서 볼 때, 소옹과 장재의 사상이 이정보다 훨씬 이전에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정이 비록 일찍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는 했지만, 만년에 와서 확립된 것 또한 많기 때문이다. 대체로 장재는 겸손하고 사양하기를 좋아해서 그의 학문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지 않았지만, 이정은 스스로 선각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제자도 또한 가장 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도(門徒)들이 장재가 이정에게 배웠다는 날조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아우 정이는 이를 직접 부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정 문인의 후학들은 이들 다섯 학자의 선후를 말할 때는 모두 이정을 가장 앞에 놓고 장재를 뒤에 두었는데, 이는 한 학파의 사사로운 입장일 뿐이다. 이정의 학문이 왕성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정의 앞에 주돈이와 소옹, 장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 형제는 이들의 학설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 다른 여러 학자들의 장점을 채용하여 자신들이 학문적 체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앞뒤 발전 및 계승의 순서는 속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마광(司馬光, 字는 君實)은 소옹과 장재, 이정과 더불어 같은 시대의 사람으로 사상까지도 서로 매우 비슷한 학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독창적인 요소가 거의 없고, 또한 주장에 대한 일관된 체계도 갖추지 못했다. 그는 일개 정치가였을 뿐이며, 그것도 수구적인 정치이론가였을 따름이다. 북송대에는 장재와 이정, 사마광 등과는 대립되는 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이구(李覯, 字는 泰伯)와 왕안석(王安石, 字는 介甫. 臨川先生이라고도 부름)이다. 이구는 공리를 매우 중요시 했으며, 예악과 제도에 밝았다. 왕안석은 유위(有爲)를 중요시 하고, 사람의 노력을 통한 변혁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관된 철학적 체계를 확립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창조적인 혁신적 정치가이기는 했어도 철학자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사마광의 주요 저작에는 <잠허>(潜虛)가 있고, 이구와 왕안석에게도 각각 문집이 있다.)
주돈이와 소옹, 장재에게는 제자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정에게는 제자가 매우 많았고, 이후의 사상계는 거의 이정의 문도들에 의해서 장악되었다. 남송에 이정 문하의 학자들이 마침내 분열하여 두 개의 큰 파로 분리된다. 한 파는 정이의 입장을 지지해서 거경궁리를 종지(宗旨)로 삼았으며, 그 대표자는 주희(朱熹)이다. 또 다른 한 파는 정호의 사상을 계승하여 본심(本心)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을 중요시하였는데, 육구연(陸九淵)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주희(朱熹. 字는 元晦. 晦庵선생이라고도 부름)는 평생 학문 탐구에 매우 부지런하였으며, 다양한 분야의 학문에 대해 매우 높은 수준의 이해가 있었다. 또한 그는 문화의 체계적 정리자였다. 중국 문화사에 있어 공자 이외에 두 번째로 위대한 문화의 정리자가 바로 그이다. 그의 철학사상 또한 매우 포괄적이고 엄밀했다. 비록 정이(程頤)의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돈이와 소옹, 장재 및 정호의 사상까지도 포섭하고 있으며, 여타의 사상적 내용들까지 통합해서 하나의 엄밀한 체계를 확립했다. 그러나 자신의 독창적인 사고는 그리 많지 않다.(주희의 저작은 매우 많다. 철학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은 <사서집주>(四書集註)와 <혹문>(或問)이 있으며, 문인들이 편집한 <어류>(語類)와 <문집>이 있다.
육구연(陸九淵, 字는 子靜. 象山先生으로 불림)은 우주는 오직 하나의 리(一理)이며, 마음이 바로 이 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오직 마음을 공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가르치면서 책을 통한 공부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이론을 수립하는 데 대해서도 긍정하지 않았다. 그의 제자인 양간(楊簡, 字는 敬仲. 慈湖先生이라고 부름)은 그의 관념론적 입장을 더욱 발전시켜 광범위한 유심론 체계를 확립했다. 선진시대에는 주관유심주의에 입각한 우주론이 없었다. 주관유심주의는 불교의 수입과 더불어 나타나게 되었다. 양간은 중국인으로서 대체로 완전한 주관유심론적 철학을 창안해 낸 학자이다.(상산에게는 <문집>과 <어록>이 있고, 자호에게도 <문집>이 있다.)
남송 초기의 철학자 가운데 주자와 매우 비슷한 사상을 전개한 사람으로 장식(張栻, 字는 敬夫, 號는 南軒)이 있다. 아깝게도 일찍 죽었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는 성숙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주희와 육구연 이외에도 또 다른 유파(流派)가 있었다. 진량(陳亮, 字는 同甫), 섭적(葉適. 號는 水心) 등 공리(功利)적인 학설을 주장한 학자들이 바로 이들이다. 그들은 경제에 대한 연구와 실제적으로 민생에 도움이 되는 일에 대해 탐구했고, 우주의 오묘한 이치에 대한 탐구에는 반대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학파로서의 특색 있는 사상가들이었음은 분명하다. 학문적인 근원의 측면에서는 정이를 따르고 있다.(동보에게는 <문집>이 있고, 수심에게는 <학습기언>(學習記言)이 있다.)
남송 후기에 오면 진덕수(眞德秀. 字는 景元, 西山先生이라고 부름), 위료옹(魏了翁. 字는 華夫, 鶴山先生이라고 부름)과 같은 명유(名儒)가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주자를 계승하고 있으며, 독창적인 발전은 없다. 남송이 망하면서 주희의 학문은 북쪽으로 전해진다. 주희의 학문을 북방으로 전한 사람은 허형(許衡, 號는 魯齋)이며, 그는 원(元)대의 유학자들을 대표한다. 허형 이후 오징(吳澄. 號는 草廬)은 주자와 육상산의 학문을 종합하고자 시도 했다. 남송 이후 원대에 이르기까지 주희의 학문은 세력이 더욱 커지면서 정통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명(明)나라 초기에는 국가가 중심이 되어 주희의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주자학파의 세력은 더욱 증대되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유명한 유학자(儒學者)에는 조단(曹端. 號는 月川), 오여필(吳與弼. 號는 康齋), 설선(薛瑄. 號는 敬軒), 호거인(胡居仁, 號는 敬齋)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주자학을 종주로 삼고 깊이 연구했지만, 역시 독창적인 철학적 체계는 제시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궁극에 이르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듯, 반주자학적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여필의 제자인 진헌장(陳憲章. 字는 公甫, 白沙先生으로 부름)은 끝내 주자를 반대하고 육상산으로 들어갔다. 진헌장은 자연과 자득을 중시하고 ‘허’(虛)와 ‘정’(靜)을 으뜸으로 삼았으며, 선종(禪宗)의 특성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의 제자 담약수(湛若水, 號는 甘泉)는 스승의 가르침을 발전시켜서 스승보다 더 뛰어난 이론을 제시했다.(백사와 감천에게는 모두 <문집>과 <어록>이 있다.)
주관유심론은 왕수인(王守仁)에게서 최고의 발전을 이루게 된다. 왕수인(王守仁, 字는 伯安. 陽明先生으로 불림)은 인식론적 입장에서 볼 때, 마음과 사물은 둘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마음을 떠나서는 사물도 존재할 수 없음을 논증함으로써 주관유심론적 우주론을 확립했다.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으며,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삶에 있어 최고의 준칙은 치양지(致良知, 양지, 즉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한 점 티끌도 묻지 않은 순수한 도덕적 앎에 이름)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주관유심주의적 입장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인간관의 당연한 귀결이다. 사람들은 모두 완전히 자족적인 양지를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도덕적 행위의 근원으로서 선과 악을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 본래의 양지를 완전하게 얻는 것이 곧 지극한 선(至善)에 이르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서로 독립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면 제대로 된 인식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식 행위가 곧 실천적인 행위가 된다. 한 가지의 생각을 하는 것, 그것이 곧 하나의 실천적 행위가 되는 것이다. 왕수인의 철학은 중국 철학사에 있어 주관유심주의의 최고의 발전된 형태이다.(양명의 저작에는 <대학문>(大學問)과, 문인이 편찬한 <전습록>(傳習錄)이 있다.)
왕수인에 의해서 심학이 완성되자 주관유심론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왕수인이 죽은 후 학파가 분열된다. 추수익(鄒守益, 號는 東廓)과 라홍선(羅洪先, 號는 念庵)을 중심으로 한 우파(右派)는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고요(收斂寂靜)에 이르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왕기(王畿, 號는 龍溪)나 왕간(王艮, 號는 心齋)를 중심으로 하는 좌파(左派)는 양지(良知)는 그 자체로서 이미 완전한 것이며, 어떠한 부가적인 수양도 필요 없다고 했다. 누구든 양지의 명령에 따라 행위하면, 그것이 곧 지극히 선한 행위가 된다고 했다. 좌파 세력의 확대는 일종의 사상의 속박에서의 해방될 수 있도록 했다는 데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이들은 경전에 얽매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전통적 권위의 지배를 부정했다. 모든 사람은 양지를 가지고 있고, 이 양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누구든 이 양지에 입각해서 행동한다면 그 행동은 선한 행동이 된다. 나아가 왕간의 문인으로 이루어진 태주학파(泰州學派)는 행동에 있어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이 파는 결국 방탕으로 흐르게 되었다.
명대에는 유기(唯氣)적 사상을 편 학자도 있었다. 그가 바로는 라흠순(羅欽順, 號는 整庵)과 왕정상(王廷相, 號는 浚川)이 있었다. 라흠순은 “리는 기 가운데 있다”(理在氣中)는 점을 강조했고, 왕정상은 “리는 기 위에 실려 있을 뿐”(理載于氣)이라고 단언했다. 그들은 정주(程朱)와 육왕(陸王)의 학설 모두를 비판했다. 라흠순은 형이상과 형이하를 분리시키지 않았던 정명도의 관점을 취했고, 왕정상은 장횡거의 기철학을 계승했다.(라흠순에게는 <곤지기>(困知記)라는 저술이 있고, 왕정상에게는 <신언>(愼言)과 <아술>(雅述)이라는 저술이 있다.)
명나라 조정은 국정 혼란과 함께 자연 재해와 반란 등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전복됨으로써 만주의 귀족들이 중국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사상가들은 망국의 참상을 목도하고, 학문의 무력함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에 방탕해진 왕수인의 학문을 반대하고 경전과 역사의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고염무(顧炎武, 字는 甯人, 亭林先生이라고 부름)는 이러한 사조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고염무는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기초를 확립했다. 그는 왕수인의 학문은 경멸했지만, 정주학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시대의 사상가에는 황종희(黃宗羲, 字는 太冲, 梨洲先生이라고 부름)는 정치에 대해서 뛰어난 새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매우 정밀한 정치철학을 수립했다. 그의 기본적인 관점은 유심론이었으며, 양명 우파의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황종희의 주요 저작에는 <명유학안>(名儒學案)과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이 있다.
청나라 초기 위대한 유학자 가운데 철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에는 왕부지(王夫之, 字는 而農, 船山先生으로 불림)이 있다.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었던 장재의 기철학은 왕부지에 이르러 비로소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되었다. 왕부지는 매우 포괄적이고 정밀한 철학적 체계를 확립했다. 그는 도(道)가 기(氣)에 의존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분명한 유물론적 체계를 수립했다. 아울러 물질과 운동만이 근본적인 것이고, 무(無)와 정지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했다.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연과 무위를 부정하고 인간의 주체적 역동성을 강조하는 유위를 주장했다.(선산의 주요 저작에는 <주역외전>(周易外傳), <상서인의>(尙書引義, <正蒙注>, <思問錄>이 있다.
[참고] 청나라 초기의 학자 가운데 독창적인 사상을 제시한 학자로는 왕부지 이외에도 진확(陳確, 字는 乾初), 반평격(潘平格, 字는 用微), 여유량(呂留良, 字는 用晦, 號는 晩村)과 같은 이들이 있다. 진확은 천리와 인욕의 합일을 주장했는데, 이는 대진(戴震)의 주정철학(主情哲學)의 기초가 된다. 반평격은 송명대 도학의 대립상을 “주자는 도(道)이고, 상산은 선(禪)이다”라고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주자학은 도가(道家)와 가깝고 상산의 학문은 불가(佛家)에 가깝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학자가 바로 반평격이다. 반평격의 학설은 천지와 만물을 일체로 삼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도 북송 사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유량에게는 강력한 민족주의적 경향이 나타난다. 그는 ‘화’(華)와 ‘이’(夷)를 엄격하게 나누는 것이 군신의 질서를 확립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했다. 여유량도 기본적으로는 정주학을 추종하였다. 청초의 정주학파 가운데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자들에는 여유량 외에도 육세의(陸世儀, 字는 道威, 호는 桴亭)가 있다. 그는 예악과 함께 병법과 농업을 중시하는 실학(實學)을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조금 뒤의 안원(顔元)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청초의 사상 개혁 운동을 가장 철저하게 수행한 학자가 안원(顔元, 字는 渾然, 習齋先生이라고 부름)이다. 안원은 육왕심학과 정주리학을 반대하고, 동시에 훈고학(訓詁學)과 고증학(考證學)에도 반대하면서, 노동과 실천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을 전개했다. 우선 그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와 같은 전통적인 실학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경제와 백성들의 재물, 농업과 군사 등의 실용적 학문을 중요시 했다. 그는 현담(玄談), 즉 공리공담에 반대했으며, 추상적인 논리적 추론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은 논리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정밀하지 않다. 그의 우주론은 유물론이며, 리와 기는 도의 두 가지 존재 방식이고, 기를 떠나서는 리가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즉 리는 기에 의존하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주체적인 역동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의지적 활동에 의해서 세계가 발전한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아울러 그는 정(靜)을 강조하고, 공리(功利)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학문에 대해 비판했다. 안원이 죽은 후 그의 제자인 이공(李塨, 字는 剛主. 恕谷先生이라고 부름)이 그의 학문을 이어서 더욱 발전시켰다. (習齋의 저서에는 <사존편>(四存篇)이 있고, 恕谷의 저서에는 <주역전주>(周易傳注), <논어전주>(論語傳注), <전주문>(傳注問)이 있다.)
안원과 이공의 학문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는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또한 그 내용도 너무 번잡했기 때문에 그다지 성행하지는 못했다. 청대 학풍의 중요한 조류는 여전히 고증학이었다. 고증학도 학문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고, 대진(戴震, 字는 東原)은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기여를 했다. 대진의 철학 이론도 안원 및 이공과 같은 노선을 취했지만, 논리적인 측면에서 더욱 정밀해 졌다. 그 역시 유기론, 즉 일종의 유물론 철학을 주장하면서, 이정과 주희의 ‘리가 기보다 앞선다’는 주장을 반대했고, 육구연과 왕수인의 주관유심론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리가 사물과 별개의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물에 대한 정밀한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의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리의 독립적 실재성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 인간 문제에 대해서는 주정적(主情的)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송명 이래 ‘리’(理)와 ‘욕’(慾)을 엄격히 구분하려는 학문적 경향을 부정하고, 리는 ‘욕망이 일탈 없이 조화를 이룬 상태’라고 보았다.(대진의 중 철학적 저작에는 <원선>(原善), <맹자자의소증>(孟子字義疏證)이 있다.
왕부지와 안원, 대진의 학문은 완성도에 있어 주희나 왕수인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새로운 학문적 방향성을 제시했으며, 아울러 그들의 철학은 대체로 현대적인 사조와 일치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대진의 학문 또한 계승되지는 못했다. 다만 초순(焦循, 字는 里堂)만이 그의 학문을 조금이나마 발전적으로 계승했을 뿐이다. 청나라 말기에 오면 서양문화의 동점(東漸) 현상이 나타나며,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새로운 학문적 사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공양학파(公羊學派)이다. 이들은 <춘추>(春秋) ‘공양전’(公洋傳)에 의거해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켰다. 공양학파는 일종의 변법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서양에서 전래된 많은 새로운 사상들을 공자의 사상에 의거해서 설명함으로써 내용적인 면에서 광범위한 정치철학을 확립했다. 공양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에는 강유위(康有爲, 字는 長素), 료평(廖平, 字는 季平), 담사동(潭嗣同, 字는 復生) 등이 있다. 이들은 순수한 철학적인 연구에는 그다지 많은 성취를 이루지 못했으며, 청대의 사상은 이들을 마지막으로 종말을 고한다.
[참고] 강유위, 료평, 담사동의 사상은 실제로는 유가철학, 불가철학,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예수교 교리 등을 뒤섞어 놓은 것으로서, 중국 사상사에 있어 나름대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철학이론에 있어서는 독창적인 견해를 도출하지 못했다.
송나라에서 청나라에 이르는 철학사상에는 중요한 세 가지의 사조가 있다. 첫째는 유리론(唯理論)적 경향이다. 이는 정이(程頤)에서 시작해서 주희에게서 완성된다. 주희 이후, 이 학파는 매우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독창적인 사상가는 배출하지 못했으며, 다만 주희의 주장을 부연하는 데 그쳤다. 둘째는 주관유심론(主觀唯心論)적 경향으로, 정호(程顥)에서 시작되어 육구연과 왕수인에 의해서 완성을 이루었다. 이들은 왕수인 이후에 큰 세력을 떨쳤다. 셋째는 유기(唯氣)적 경향 또는 유물론(唯物論)적 경향이다. 장재가 시작했지만, 장재가 죽은 후에는 전해지지 않다가 명대의 왕정상과 청나라 초엽의 왕부지에 의해서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되었다. 안원과 대진의 사상 또한 이와 동일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안원은 정주학과 육왕학 모두를 반대했으며, 오직 장재에 대해서만 경의를 나타내었다. 대진은 장재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지만, 우주론에 대한 입장은 장재의 것을 그대로 따랐다. 이 세 학파는 북송(北宋) 시대에 동시적으로 발생했다. 남송(南宋), 원(元) 및 명(明)나라 초엽까지는 유리론(唯理論)이 크게 성행했고, 명나라 중엽에서 말엽까지는 주관유심론(主觀唯心論)이 크게 유행했다. 그리고 청대에 와서는 유물론적 입장이 비교적 큰 세력을 이루었다. 그러나 유물론적 조류는 결국 완전한 이론 체계를 확립하지 못했으며, 현대에 와서 비로소 결정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의 철학은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때가 가장 전성기였으며, 창조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훌륭했고, 내용면에 있어서도 매우 풍부했다. 그러나 이후의 철학은 주나라와 진나라 때에 미친 적이 없다. 한대(漢代)는 순수한 철학이 존재하지 않았고, 위진대(魏晋代)의 현학(玄學) 또한 충분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다. 후대에 있어 비교적 성숙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송명대(宋明代)의 도학이다. 그러나 이 또한 주나라와 진나라 때처럼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은 찾기 어렵다. 청대에 와서 왕부지와 안원, 대진과 같은 철학자들이 제시한 새로운 철학적 경향은 현대 사상의 선구가 되었다.
서양철학과 그 사상이 수입된 후, 잠시 동안 사람들은 서양철학의 위세에 눌려 있었지만, 새로운 철학에 대한 요구로 말미암아 선진시대의 찬란한 철학적 탐구가 다시 도래할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중국철학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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