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공파(良景公派)의 인맥(人脈)으로는 공민왕(恭愍王) 때 일기도주(一岐島主)의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 정승(都僉義政丞)이 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휘(暉)의 아들 희계(熙啓)가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훈공을 세워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으며, 그의 현손(玄孫) 승조(承祖)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으로 성종(成宗)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검열(檢閱)에 재직 중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스승인 김종직은 사사(賜死)되고, 그는 곽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진력했다.
주자학(朱子學)의 충효양전(忠孝兩全)을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때에 효(孝)를 버리고 충(忠)을 택했던 발(撥)은
부산진 첨사(釜山鎭僉使)로 나가면서 늙고 병들었던 어머니에게 허락을 청했다.
이에 어머니 남궁씨(南宮氏)는 아들의 등을 쓰다듬으며 충(忠) 속에 효(孝)가 들어있다면서 개념말고 나라를 위하라고 타일렀다.
[기재잡기(寄齋雜記)]와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의하면 임진년에 왜군이 늑병(勒兵) 25만 명과 병선 4만여 척을 거느리고 부산을 쳐들어왔다.
이에 아군은 혼비백산하여 거의 도주하였으나 발(撥)을 중심으로 한 정예군만이 용기를 내어 활을 쏘아 무수한 적을 죽여 세 곳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화살이 다하자 한 비장(裨將)이 발(撥)에게 도주할 것을 종용하자
"도망갈 것을 종용하는 자는 중벌하겠다'하고 백병전에 돌입했다가 발은 총에 맞아 장렬하게 순절했다.
발(撥)의 아들 흔(昕)은 정유재란 때 조정에서 복수청(復讐廳)을 창설하여 젊은 장정(壯丁)을 모집하자 나라에 은혜를 보답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모집에 응하고는 가산(家産)을 털어 군수(軍需)에 힘썼으며, 사량만호(蛇梁萬戶)가 되어 왜군을 섬멸하여 전라 수사(全羅水使)에 승진되었고 첨정(僉正)과 정선 현감(旌善縣監) 등을 역임했다.
그외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돌격대장이 되어 당포(唐浦).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선 300여 척을 대파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던 호(浩)와 인조(仁祖) 때 강화(講和)에
항거하다가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어 화원(花源)에 살았던 응신(應莘), 숙조(肅宗) 때 <오사인(五士人)>의 한 사람으로 4대신(4대신: 조태채.김창집.이건명.이이명)과 더불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수호했던 인중(麟重), 학행(學行)이 탁월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시휘(時輝)와 동윤(東潤)등이 양경공파(良景公派)를 대표했다.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금실(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던 이기( 奇)의 후손에서는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올랐던 구(龜)의 아들 광업(光業)과 홍업(弘業) 형제가
유명했다.
선조(宣祖) 때 제용감 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했던 광업(光業)은 임진왜란 때 숙부 원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그의 아우 홍업(弘業)은 학행(學行)으로 이름났었다.
1581년(선조 9)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공청(公淸)은 진도 군수(珍島郡守)를 역임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호신(好臣)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안강(安康). 경주(慶州). 울산(蔚山). 동래(東萊)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무공을 떨쳤다.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던 손경(遜卿)의 둘째 아들 극온(克溫)은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북벌남정(北伐南征)에 대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랐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판삼사 참지정사(判三司參知政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필(弼)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한림학사(翰林學士). 평장사(平章事) 등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사후(死後)에 계림군(鷄林君)에 추봉되었다.
한편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果川). 의성(義城)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했던 기(其)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에 추증되었으며, 슬하에 아들 5형제가 크게 현달하여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중추적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때 학행으로 천거되어 언양 현감(彦陽縣監)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던 차온(次溫)은 상주 판관(尙州判官)을 거쳐 권농병마절도사(勸農兵馬節度使)를 지냈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평양 판관(平壤判官)을 마다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생강학에 진력했으며, 그이 아우 차량(次良)은 부호군(副護軍)을지냈다.
기(其)의 셋째 아들 차공(次恭)은 세종(世宗) 때 등과(登科)하여 영천 군수(永川郡守)와 평산
도호부사(平山都護府使)를 지내고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봉직되었으며, 기의 넷째 아들 차검(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했다.
청백수절(淸白守節)은 정(貞)이요 정직무사(正直無邪)는 간(簡)이라하여 정간(貞簡)으로 시호(諡號)를 받았던 차양(次讓)은 1452년(문종2)에 학해으로 봉직랑(奉直郞)에 천거되어 해남 현감(海南縣監)을 지냈으며,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형(兄)들과 더불어 5형제가 모두 관직에 올랐다가 고향에 돌아오면서 함께
다리를 건너왔는데, 세상사람들은 이 다리를 <오영교(五榮橋)>라 불렀다. 그밖의 인물로는
견(堅)의 아들 대영(大英)이 임진왜란 때 사촌동생 대방(大方: 후의 아들)과 더불어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대방(大方)은 대구 팔공산(八公山)에서 권 제(權 濟). 최 입(崔 笠). 조호익(曺好益).
정경세(鄭經世) 등 31명과 회맹(會盟)하고 전투에 임하여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는 대영(大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방어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선조때 음성 현감(陰城縣監)을 지냈던 구(構)와 함께 경주 정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남한(南韓)에 총 70,645가구, 300,7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