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슬픔의 거울』은 그에게 공쿠르상을 안겨 준 『오르부아르』와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화재의 색』을 이으며 20세기 전반의 역사를 관통하는 3부작의 대미를 이루는 작품이다. 『오르부아르』가 제1차 세계 대전을, 『화재의 색』이 전간기(戰間期)를 다룬다면, 『우리 슬픔의 거울』은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르메트르는 양차 세계 대전이라는 역사의 큰 그림을 자신의 3부작 안에 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적 의의나 성취를 뛰어넘어 『우리 슬픔의 거울』은 일단 재미있다. 탁월하다.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줄거리 전개와 적재적소에서 독자의 폐부를 찌르는 탁월한 대사 등이 잘 버무려져, 가장 비극적이어야 할 전쟁 이야기가 〈웃긴 동시에 어이가 없어서 기가 막히는〉 희극적인 이야기로 변모한다. 프랑스 유수의 언론들로부터 〈기교와 블랙 유머의 결정체〉(『르 피가로』), 〈악마 같은 플롯을 지닌 책!〉(『르 파리지앵』), 〈이것이 걸작이다. 이것이 예술이다〉(『베르시옹 페미나』)라고 극찬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절정에 이른 거장의 솜씨로 쓰인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재미와 쾌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뒤틀린 삶을 바로잡기 위해 내달리는 평범한 영웅들
그리고 비참한 피란길의 프레스코화
『우리 슬픔의 거울』은 여러 개성 강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뒤얽히며 진행된다. 루이즈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퇴근 후 집 앞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종업원으로, 어느 날 레스토랑의 단골손님에게 그냥 보기만 할 테니 자기 앞에서 옷을 벗어 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받는다. 가브리엘과 라울은 마지노선에서 근무하는 군인으로, 갑작스러운 독일군의 공격에 전선이 무너지며 탈영병 신세가 되고 만다. 기동 헌병대원 페르낭은 같이 피란을 가자는 아내의 청을 뿌리치고 파리에 남음으로써 엄청난 비밀이 담긴 가방을 얻게 되나, 그로 인해 아내와 연락이 끊기고 만다. 이 인물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인생이 뒤틀려 버리는 상황에 처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 평범한 인물들이 전쟁 통을 가로지르며 인생을 바로잡는 과정을 그린다.
이 인물들의 파란만장한 사연도 눈길을 끌지만 무엇보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피란길 그 자체의 모습이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목표를 위해 피란길에 합류하는데, 그럼으로써 독자들 또한 자연스럽게 전쟁과 피란길의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된다. 매트리스를 차 지붕에 이고 트렁크에 온갖 잡다한 물건을 실은 채 길에 나선 가족들, 아이의 기저귀가 없어 천 쪼가리를 구걸하고 다니는 여인들, 인파에 휩쓸려서 아이를 잃고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을 외치는 부모들……. 이를 통해 독자는 전쟁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유·무형의 희생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하게 된다.
희극과 비극을 교차시키는 아이러니의 미학
허술하고 실체 없는 〈권력〉과 〈시스템〉에 대하여
그러나 『우리 슬픔의 거울』이 전쟁의 비극에 집중함으로써 그 참상을 1차원적으로 보여 주는 소설은 아니다. 작가는 〈국가〉라는 거대 권력과 사회 시스템이 얼마나 모순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낱낱이 보여 주며 희화화함으로써, 이 소설은 오히려 끊임없이 코미디나 시트콤 같은 상황을 연출한다.
일당백이라도 거뜬할 것인 양 굴다가 막상 전쟁이 나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지휘관들, 적이 목전에 왔는데도 파리의 최고급 호텔을 본부로 삼아 조직의 안위를 위해 〈히틀러는 매독 환자이고 동성애자이며 성 불능증을 앓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공보부, 1천 명에 달하는 죄수들을 피란민들과 함께 이동시키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는 군인들……. 이 외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수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각색한 것이다.
이 거대 권력의 황당하고 무책임한 행동은 피란길에서 고통받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럼으로써 평범한 시민의 삶을 통제하고 제약하려 드는 권력과 시스템이 실은 얼마나 실체 없고 허술한지를 드러낸다.
거대하고도 야만적인 힘의 포로인
우리의 시대와 삶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우리와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여전히 지금 여기, 우리와 맞닿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입을 통해 슬쩍 얘기를 꺼낸다. 우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의, 거대한 권력과 역사의 포로가 아니겠느냐고.
「결국 자네와 난 언제나 포로 아니었어? 전에는 르 마얭베르그에서 포로였고, 지금은 여기에서 포로 신세지. 그리고 세 번째로 감옥을 바꿔서 독일 놈들 포로가 될 거야. 난 앞의 두 곳이 더 나을 것 같지만 뭐,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잖아.」
- 본문 580면
그러나 희망은 있다. 『우리 슬픔의 거울』의 등장인물들은 힘겨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결국 〈사람〉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다. 자신이 베풀었던 선의가 되돌아오거나, 타인의 작은 선의를 통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으로써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즉 이 소설은 우리에게 아주 당연하지만 소중한 진실을 제공한다. 전쟁이라는 재난을 자초하고 거대 권력을 부리며 수많은 이들을 고통에 내모는 것도 사람이지만, 그러한 비극 안에서 다시 희망을 만들어 내고 삶을 다시 살아 낼 용기를 주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오르부아르』와 『화재의 색』에 이어 『우리 슬픔의 거울』까지, 피에르 르메트르가 쓴 3부작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독자에게 읽힌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4주 전, 루이즈가 살짝 구운 아니스크렘을 가져다주는데, 그가 미소를 짓더니 그녀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한 가지 부탁을 하는 거였다. 만일 그가 동침을 제안했다면 루이즈는 접시를 내려놓고 따귀를 한 대 갈기고는 차분하게 다시 서빙을 시작했을 거고, 쥘 씨는 가장 오래된 단골 하나를 잃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성적인 부탁이 맞기는 했지만, 그것은……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당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해요.」
--- p.16
발전기들의 끊임없는 소음, 그러니까 그 철판들이 마치 미친놈이 울부짖는 것처럼 진동하며 내는 소리와 만성적인 습기에 섞인 경유 냄새 속에서, 9백 명이 넘는 병사들은 수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 아래에 묻힌 수 킬로미터의 지하 통로를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르 마얭베르그에 들어서면 몇 미터 앞부터 낮의 빛은 사라졌고, 대대로 내려오는 프랑스의 오랜 적이 출현할 경우 반경 25킬로미터 주변에 145밀리미터 포탄을 발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벙커들로 통하는 궤도차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길고 컴컴한 통로만이 희미하게 분간되었다.
--- p.40
「그래서 젊은이, 자넨 이 부서에서 자네가 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A, E, I, O, U라고 생각합니다.」 데지레가 대답했다.
알파벳을 잘 알고 있는 과장은 〈무슨 뜻이지?〉라고 묻는 눈빛을 던졌다. 데지레는 말을 이었다.
「분석하고, 기록하고, 영향을 주고, 관찰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Analyser, Enregistrer, Influencer, Observer, Utiliser). 시간적 순서에 따라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영향을 주기 위해 정보를 이용합니다. 프랑스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주기 위해 정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기를 최대한도로 높이기 위해서 말이죠.」
과장은 자기 밑에 알짜 중의 알짜가 들어왔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 pp.149~150
기동 헌병대원인 그가 속한 조(組)는 대성당 앞 광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엄숙한 얼굴로 센강의 다리들에까지 빽빽이 모여 있는 군중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메시아 대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금빛 제의(祭衣)에 주교관을 쓰고 손에는 주교장을 들고서 국무 장관, 각국 대사, 각부 장관, 그리고 달라디에를 영접하는 파리 교구 참사회장이었다. 페르낭으로서는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프리메이슨파를 망라한 이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이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몰려왔다는 사실부터가 너무나 놀라웠지만, 가장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화려한 제복 차림의 군 장성들이 상당수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페탱 원수, 카스텔노 장군, 구로 장군 같은 참모부의 핵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그는, 나라가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적에게 짓밟히고 있는 시기에 이 양반들은 이따위 미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 p.298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 pp.458~449
「보제르푀유 대령이 날 이틀간 빌려주었어. 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건대, 나도 자네들과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아…….」
「우리와 같은 신세라뇨?」
「그걸 말이라고 해? 독일 놈들 포로지 뭐야? 자, 됐어. 이제 일어나 봐!」
그는 책상을 대신하는 테이블로 가서 앉은 다음,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결국 자네와 난 언제나 포로 아니었어? 전에는 르 마얭베르그에서 포로였고, 지금은 여기에서 포로 신세지. 그리고 세 번째로 감옥을 바꿔서 독일 놈들 포로가 될 거야. 난 앞의 두 곳이 더 나을 것 같지만 뭐,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잖아.」
--- p.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