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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량이 많아서 크루즈 배 승선 전, 승선, 하선 후 탐방한 국가를 나누어 게재합니다.
남미 크루즈 승선 전에 탐방한 국가
일시:2017년 2월 9일 목요일~15일 수요일
탐방 국가:멕시코, 페루, 칠레
남미 크루즈 7개국 전체 일정
일시:2017년 2월 9일 요일~3월 7일 요일 26박 27일
탐방국가:멕시코,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포클랜드(영국령),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2017년 2월 9일 목요일 한국 인천공항, 미국LA공항, 멕시코시티
* 한국 인천공항 출발
오늘부터 며칠간 춥다고 한다. 쌀쌀한 겨울 날씨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5시 미팅이다. 두 아들 가족과는 집에서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 받았다. 짐을 부치고 10번 게이트로 나갔다. 보딩타임은 오후 7시 30분이다. 오후 8시 LA행이다. 우리 부부 좌석은 39A, 39B로 앞쪽 창가다. 보령문협 회장으로 김유제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손광야 선생님으로부터 카톡으로 연락 받았다. 보령은 내 고향이고, 나는 출향문인으로 활동하기에 궁금했는데 소식을 듣고 가게 되어 좋았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남미 크루즈 긴 여정이다. 우리 부부가 꼭 탐방하고 싶었던 여행이어서 금년에 성사되어 가게 되어 참 기쁘다. 인솔자도 두바이 크루즈 같이 갔던 김혜진 실장이어서 좋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워 갈 것이다.
* 한국 인천공항에서 미국 LA공항 기내 항로
대한항공 LA5011이다. LA까지는 11시간 소요된다. 태평양을 횡단하여 간다. 오디오 음악, 들으며, 영화를 보며 간다. 기내영화로 한국영화 '봉이 김선달'을 보았다. 선달이란 단어는 과거급제를 하고도 출세하지 않은 자를 뜻한다. 두둑한 배포와 수려한 외모까지 갖춘 희대의 천재 사기꾼 김선달(유승호)은 온갖 기상천외한 사기행각을 벌이며 조선팔도에서 명성을 펼친다. 당대 최고의 권력가 서대련(조재현)을 속이기 위해 주인 없는 대동강을 미끼로 인생 최대의 판을 꾸민다. 상영시간 121분, 감독 박대민, 출연자 유승호, 조재현, 라미란 등이다. 매우 통쾌하고 의미있는 영화다. 기내식으로 2회가 나왔다. 석식으로 쇠고기 요리, 조식으로 오믈렛을 먹었다. 한국시간 조식으로 먹은 것이 미국시간으로는 중식인 셈이다. 이륙하기 2시간 전, 미국시각 낮 12시에 먹었다. 미국 LA와 한국과의 시차는 -17시간이다. 인천에서 저녁 8시에 출발하여 밤 시간을 잠깐 거쳐 바로 낮으로 이어진다. 창문을 내리고 몇 시간 눈을 붙였다. 미주여행은 밤에 출발하면 밤을 금새 건너 낮으로 이어져 피곤한 여정이다. 유럽쪽은 밤에 출발하면 다시 밥을 만나 잘 수 있어 좀 편안한 여정이다. 그러나 세계여행은 언제나 신비롭고 가슴 벅차게 하는 보람된 여정이다.
* 미국 서부 LA공항 상공
청청한 하늘이다. 이제 곧 착륙한다. 태평양을 완전히 횡단했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LA공항은 기온이 16도, 약간 안개가 끼었단다. LA에 가까워지자 우람한 산줄기가 줄지어 서 있다. 고봉 설산이 장관이다. 비행기 장엄한 날개 위로 하늘과 만나 비경을 이룬다. 비행기에서 기막힌 풍경을 노는 순간이다.
* 미국 LA 공항에서 멕시코시티행 환승
미국 LA공항에 14:00시에 도착하였다. 안개 낀 LA공항에 사뿐히 착륙했다. 기장님께 감사하다. 이 공항은 인천에서 LA를 거쳐 멕시코시티까지 짐을 부쳤어도, LA공항에서 각자 짐을 찾아 검색 후 다시 부쳐야 한다. 그 절차를 마치고, 신발을 벗고 몸과 핸드백을 검색 후 환승 게이트 23번으로 갔다. 멕시코시티행 17:45분 AM643 항공으로 환승한다. 멕시코시티 공항까지는 3시간 40분 소요된다. 일행 중 남자 한 분이 먼저 가서 찾느라 좀 늦게 왔다. 환승하기 위해 공항 밖으로 나와서 도보로 제2 터미널로 갔다. 공항은 상당히 크다. 우리는 델타항공을 탄다. 보딩타임이 16:55분이다. 탑승하여 정시에 이륙하였다. 태평양 상공의 노을이 붉다. 저 너머 내 조국의 화사한 날을 선사하기 위해 떠나는 태양의 후광이 참 곱다. 비행기 날개와 미국 남부 태평양 해변의 도시와 바다와 하늘이 그려내는 걸작 명화다. 여기는 점점 깊어가는 밥이다.
* 멕시코 공항 도착
지상의 멕시코가 불바다다. 23:25분 정시에 멕시코시티 공항에 도착했다. 석식으로 기내에서 간단한 샌드위치와 배즙, 초콜릿, 피넛츠, 쥬스 등을 먹었기 때문에 호텔레 가서 잠을 자면 된다.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가이드를 미팅했다. 공항 기온은 15도다. 수색견이 내 손가방을 냄새 맡는다. 아마도 그 안에 든 사탕의 달콤한 향기가 좋았나보다. 호텔로 이동했다. 우리 부부의 방은 626호실이다. 크리스탈 그랜드 특급 호텔로 넓고 좋다. 북아메리카 남서쪽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 멕시코의 공식 국명은 멕시코 합중국(United Mexican States)이다. 국토 면적은 1,964,375㎢로 한반도의 약 아홉배 크기이며, 남한의 20배 크기로 중부 아메리카 최대의 연방 공화국이다. 북쪽으로는 미국 국경과 닿아 있고, 남쪽으로는 과테말라와 벨리즈, 서쪽으로는 태평양, 동쪽으로는 멕시코 만을 접하고 있다. 수도는 멕시코 시티로 멕시코의 정치, 경제,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인구는 1억 1500만명으로 과반수가 중앙 고원에 몰려 살고 있다. 세계 10위 경제수준의 국가다. 경제수준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앞선 상황이다. 국가는 가난하지 않은데 국민 45%는 극빈층으로 가난하단다. 격차가 매우 심하단다. 현지 가이드는 한국도 그렇게 흐르는 것 같다고 염려했다. 멕시코시티의 외곽 거주자는 낮에 시내에 와서 저임금의 노동을 하여 생계를 유지한단다. 마약자들도 많단다. 대략 마약자가 국민의 30%라고 한다.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단다. 요즈음 멕시코 물가가 오르고 있어 문제란다. 멕시코시티는 2016년 세계 53개 도시 중 1위로 가 보아야 할 곳으로 선정 되었다. 관광수입이 세계 9위인 국가다. 국가산업 수입이 2백만 조, 관광수입이 3백만 조, 미국에 있는 근로자들 수입이 3백5십만 조란다. 정말 관광수입이 대단한 비중을 치지한다. 박물관이 100개 이상 있는 도시다. 미술, 건축이 세계적인 수준이어서 미술과 건축의 도시로 칭한다. 세계에서 이탈리아, 스페인, 멕시코 순서로 문화유산이 많다. 7만 개의 세계문화유산이 유네스코에 등재 된 나라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다. 멕시코는 스페인 300년 지배 유적이 남아 있고, 멕시코시티는 프랑스 모습도 많이 담긴 도시다. 우리 부부는 멕시코에 두 번째로 왔다. 이번에는 좀더 세밀하게 볼 것이다. 행복한 여정이다.
2017년 2월 10일 금요일 멕시코시티 삼문화 광장, 과달루페 성당,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 멕시코시티 호텔
호텔 주변에 나무가 울창하다. 조식으로 과일, 빵 중심으로 나왔다. 이곳의 조식은 이렇게 먹는단다. 나는 과일을 좋아하기에 좋은 식단으로 과일을 많이 먹었다. 잠시 호텔 주변을 돌아보고 9시부터 관광한다. 한국과의 시치는 -15시간이다. 오늘 일정은 뜰라뗄꼬 유적지, 삼문화 광장, 과달루페 성당, 타오타우아칸, 선인장 농장이다. 멕시코가 지금은 건기다. 6월초부터 12월은 우기다. 지금은 여행하기 좋은 시기다. 멕시코시티는 멕시코의 수도로 스페인어로는 ‘메히코’라고 핚다. 멕시코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멕시코 고원 중앙부의 해발고도 2,240m에 있는 고지도시이다. 열대에 위치하나 고지에 있기 때문에 월평균 기온이 최고인 5월에도 17℃, 최저인 1월은 12℃ 정도이다. 고원의 경작지와 목장, 계곡과 산록의 삼린에 둘러싸여 열대 고원도시로는 가장 살기 좋은 곳이다. 상쾌한 아침이 이방인을 반긴다.
* 멕시코시티 틀라텔롤코 유적지
틀라텔롤코(Tlatelolco) 유적지는 삼문화 광장 바로 곁에 있다. 유적지 주변은 1985년 대지진이 났을 때 가장 피해가 많은 지역으로 아픔이 서린 곳이다. 도로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자 큰 자락으로 돌로 크고 작은 높이로 쌓은 흔적의 유적지가 나왔다. 허물어졌지만 그 원래의 기본 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소깔로 광장에서도 가까운 위치다. 아스텍 제 2의 도시로서 세워졌다. 중앙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물류유통 센터였다. 고대 멕시코 아스텍(Aztec)의 수도이며 제1의 도시였던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이 있던 섬에 위치한 도시였다. 테노치티틀란과 같은 양식의 대신전과 광대한 시장이 있으며 아스텍 기(15~16세기 초)의 커다란 상업중심지였다. 아스텍 제국에는 시장이 발달되어 있었다. 테노츠티틀란의 상설시장에서는 온갖 물품을 거래했고, 마을 단위까지 정기적으로 시장이 섰다. 상인도 일반상인과 사치품과 귀중품을 취급하는 장거리 상인이 있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않아 육상에서는 등짐으로 모든 물건을 운반했으며, 테노츠티틀란에서는 카누로 운송했다. 거래방법은 기본적으로 물물교환이었다. 아스텍에서 시장이 활성화된 배경에는 공물이 있었다. 정복지 주민이 공물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구입하는 곳도 시장이고, 아스텍 주민이 공물로 받은 물품을 생필품이나 사치품으로 바꾸는 곳도 시장이었다. 시장을 둘러본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놀라고 감탄했지만, 그 이면에는 공물을 바치는 정복지 주민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틀라텔롤코 유적지에는 두 개의 신전과 두 개의 겹쳐진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세운 산티아고 성당도 바로 앞에 있다. 이 신전의 돌로 지은 성당이다. 16세기에 아즈텍 왕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유적 위에 스페인 사람들이 세운 지금의 멕시코 시티(Mexico City)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이다. 폐허였던 자리에 5개의 아즈텍 신전들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 그리고 19세기~20세기에 정교하게 지은 건축물인 팔라시오 데 발라스 아르테스(Palacio de las Bellas Artes)가 있다. 틀라텔로코 유적지 앞에는 1521년에 저항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비석도 있다. 그 바로 앞에는 산티아고 성당이 있다. 현재 유적의 일부가 발굴되고 있으나 파괴가 심하다. 이 유적은 식민지시대의 성당, 현대건축과 이웃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삼문화 광장과 산티아고 성당도 함께 볼 것이다.
* 멕시코시티 삼문화 광장
삼문화 광장은 틀라텔로코 유적지와 나란히 븥어 있다.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지은 산티아고 성당이 또한 바로 곁에 붙어 있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게 뻗어나간 광장이 이 두 유적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고대의 피라미드 등이 있는 틀라텔로코 유적과 식민지 시대의 산티아고 성당과 주변의 고층 현대식 빌딩 등이 둘러싸여 있다. 즉 아즈텍과 스페인과 현대, 이 세 가지 문화의 상징들이 한곳에 모여 있어서 이곳 광장을 삼문화 광장(三文化.plaza de tres culturas)으로 부른다. 틀라텔로코광장이라 부르기도 한다. 멕시코의 역사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으로 당시 멕시코 계곡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다. 1609년 정복자들은 신전의 중요성을 들며 피라미드를 파괴하고 성당과 수도원을 세우고, 산티아고 성당을 건립했다. 멕시코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비문이 광장에 있다. 이곳은 피서린 광장이다. 제19회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려 할 때, 며칠 앞둔 10월 2일 학생들의 데모가 있었다. 국립멕시코대학 학생들을 중심으로 교육제도의 민주화와 자유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였다. 그것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무장헬기와 장갑차를 동원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군경과 유혈 충돌로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언론 보도상으로는 당시 1천여 명의 학생들이 집단학살 당한 곳이다. 그러나 현지 가이드는 사망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처참한 학살사건이라 했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사살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아무도 정확한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가이드는 사망자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처참한 학살사건이라 했다. 지금까지도 아무도 정확한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참으로 비참한 광경이 서린 피맺힌 삼문화 광장이다.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 당시 멕시코는 활발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1968년에 제3세계 국가로는 최초로 제19회 하계올림픽을 유치했다. 그러나 올림픽 개막을 며칠 앞두고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은 고교생들의 사소한 패싸움에서 시작되었다. 이의 진압을 위해 출동한 군경은 학생과 교사들을 사정없이 매질하며 과잉진압을 펼쳤고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숨졌다. 이로 인해서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학생들이 단합하여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날은 7월 26일이었는데, 쿠바의 카스트로가 15년 전인 1953년에 쿠바군의 제2의 기지였던 몬카다 병영을 공격하여 혁명의 기치를 높인 날이기도 했다. 기념일 행사를 펼치던 학생 행렬이 또다시 과잉진압을 당해서 학생 4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고 체포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주말을 기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바리케이드를 친 채 농성에 돌입했다. 정부는 폭동 진압을 위한 정예부대인 그라나데로스를 출동시켜 화염병으로 맞서는 학생들에게 바주카포를 퍼부어 수십 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다. 사태가 커지자 고등학생들은 마침내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UNAM) 내 좌익학생 단체들과 손을 잡고 수업 거부를 단행했다.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경제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 특히 자부심이 강하고 평소에 엘리트층이 너무 두터워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던 국립자치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에 일반 국민 역시 동조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8월 27일, 대통령궁 앞 소칼로 광장에는 약 40~50만 명이 모여 침묵시위를 벌였다. 군경은 이튿날 새벽까지 남아 있던 일부 과격분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9월 19일 군경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에 진입해 교내에서 농성 중이던 학생, 교직원과 학부모 등 수천 명을 체포했다. 이렇게 학생운동이 탄압에 대한 항의를 넘어서 국가의 권위주의, 일당 독재, 부패를 성토하는 형태를 띠게 되자, 농민, 빈민촌 거주자, 노동자 등 하층민과 젊은 성직자까지도 이에 동조했다. 올림픽이 시작되기 열흘 전인 10월 2일, 학생들은 멕시코 시의 틀라텔롤코 광장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주동자들은 정부가 강력한 경고로 맞서자 시위계획을 포기했지만, 그때 행진을 벌인 일부 노동자, 농민 시위대가 광장에 도착할 무렵 광장을 포위하고 있던 군경이 발포한 총탄에 시위대에 있던 몇 명의 노동자, 농민들이 쓰러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광장에는 300구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사망자가 49명, 부상자가 500명으로 발표되었지만 멕시코 언론은 정확한 사상자 숫자를 보도하지 않았다. 영국의 더 가디언(The Guardian)은 325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또 다른 비공식 통계가 500명 사망, 2,500명 부상 그리고 1,500명 체포로 전하기도 했다. 멕시코 정부가 이렇게 무력진압으로 나온 것은, 노동자, 농민 그리고 학생 간의 제휴가 급기야 계급투쟁으로 발전해 전국적인 반란으로 발전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올림픽을 유치해 멕시코가 근대국가로 성장했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던 멕시코 정부는, 이른바 도스 데 옥투브레(Dos de Octubre, 10월 2일) 학살사건으로 거의 50년간이나 유지되어왔던 정치적 안정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시 미국언론은 이 사태를 '동맥경화증에 걸린 멕시코 정권이 과잉반응을 나타낸 것'이라고 분석하기까지 했다. 해마다 10월 2일에는 학생들이 그날을 기리고자 행진을 한다.
멕시코시티의 도심 삼문화 광장에는 커다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 멕시코시티 삼문화 광장 주변 건물
삼문화 광장 주변에는 고층 아파트가 곳곳에 오롯하다. 그런데 아파트 이름이 '혁명 1910'이라는 독특하게 지은 아파트가 있다. 멕시코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상당히 좋아한다. 수없이 일어났던 혁명 중에서 1910년이라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지름 지은 것 같다. 아파트 옥상 꼭대기에 씌여진 글씨가 있는데 그 뜻이 '혁명 1910'이란다. 멕시코의 역사를 느끼게 하는, 그리고 시민들의 역사에 대한 시각을 알게 하는 참으로 독특한 이름의 아파트를 보았다. 1910년 멕시코 혁명에 대한 2004년 11월 9일자 동아닷컴 뉴스보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초 멕시코의 정정(政情)은 혼란스러웠다. 1876년 집권한 프로피리오 디아스 대통령은 겉으로 멕시코의 민주화를 바란다고 이야기하면서도 7번째 연임을 노리고 있었다. 결국 반대파의 리더이던 프란시스코 마데로를 투옥하고 1910년 6월 부정선거를 통해 스스로 당선자라고 선언한다.
감옥에서 나온 마데로는 미국 텍사스의 샌안토니오에서 선거 무효를 주장했다. 그리고 민중에게 1910년 11월 20일 오후 6시에 정부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산루이스포토시 계획’을 발표했다. 20세기의 첫 사회혁명으로 꼽히는 멕시코혁명의 시작이었다. 재집권 저지가 1차 목표였지만
멕시코 혁명은 민족주의적인 농민혁명이었고 다수의 지도자에 의해 여기저기서 일어난 민중의 폭발이었다고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말했다. 혁명의 싹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라고 있었다.
디아스 대통령 시절 멕시코의 부(富)와 권력은 광대한 땅을 소유한 일부에게 편중됐다. 일반 민중은 교육 받을 기회조차 없이 가난에 허덕였다. 무장 반란이 계속되자 이듬해 5월 디아스는 결국 물러났다. 마데로의 집권, 쿠데타, 내전이 이어진 끝에 1917년 혁명정부가 수립됐다. 정부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을 위해 대규모 농지 개혁과 기업의 국유화,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결국 바라던 세상이 왔을까.
혁명의 이념을 제도화하겠다는 제도혁명당. 하지만 70년 넘게 집권하면서 혁명의 이념은 점점 빛이 바랬다. 대통령이 초헌법적인 존재로 군림했고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했다. 대물림되는 절대 권력의 그늘에서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랐다. “정부 예산 밖에서 살면 불행한 인생”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와 구조화된 가난이 찾아왔다. 2000년 7월 2일 다시 혁명이 일어났다. 야당 후보인 비센테 폭스 케사다가 사상 처음으로 집권당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폭스는 “이제 21세기 혁명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기업인 출신인 대통령은 자신이 호화스러운 생활로 구설에 올랐다. 경제는 침체됐고 정치권에선 여전히 부패 스캔들이 툭툭 불거진다.
“승리가 달성되면 혁명은 그 자신을 배반하게 된다”는 문호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말에 예외는 없는 것일까.
국민들은 어느 나라든 평화롭고, 자유와 민주적이길 소망한다. 정권이 바뀌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이지만, 대부분 그리 큰 변화는 없다. 멕시코 역시 1910년 혁명에 대한 기대만큼 큰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멕시코 최초의 혁명이란 점에서 멕시코시티 시민들은 기억하고 싶은가보다.
* 멕시코 산티아고 성당의 후안디에고와 성모
틀라텔롤코를 유적지 바로 앞에 있는 성당이다. 곁에는 삼문화 광장이 성당과 붙어 있다. 산티아고 성당은 역사적으로는 스페인이 점령하여 테노치티틀란에서 파과했던 것처럼 이곳 틀라텔롤코에 와서도 신전과 시장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스페인의 종교 건축물을 세웠다. 그때 스페인이 이곳에 건설한 종교 건축물이 바로 산티아고 성당이다. 산티아고는 야고보와 같은 뜻이다. 파란만장한 멕시코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아담한 성당이다. 그러나 이 성당은 또다른 종교 역사가 서려 있다. 1531년 후안디에고(Juan Diego)라는 원주민 인디언이 그의 숙부를 살리고자 맨처음 달려왔던 성당이다. 나는 예전에 멕시코에 왔을 때도 후안디에고에 대하여 들었다. 이번에 두 번째로 그에 대하여 들으니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깊이 박힌다. 그는 부모가 일찍 죽어 숙부와 살았다. 어느 날 숙부가 저녁에 갑자기 아파해서 언덕을 넘어 1시간 걸려 이곳 성당에 왔다. 신부에게 숙부를 살려달라고 모시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산언덕에서 성모를 만났다. 12월로 겨울인데 갑지기 산언덕에 장미가 피고 성모가 나타난 것이다. 그 자세한 것은 과달루페 성당에 가서 배울 것이다. 아무튼 이곳 성당은 순진하고 착한 후안디에고 원주민 인디언이 처음 찾아온 곳이라는 점에서 멕시코의 종교역사가 배어 있다. 나는 후안디에고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간적인 면에서, 종교적인 면에서 그가 내 가슴속에 깊게 자리하게 되었다. 성당 내부 관람이 가능하고, 사진촬영까지 허락해주 어서 많은 자료를 보고, 배우고, 담아왔다. 성당 안에서 동상이지만 후안디에고를 만났다. 겨울 장미와 성모도 만났다. 훈훈한 전설을 만난 오늘 나는 참 행복하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바깥 벽면의 성모
멕시코시티의 과달루페 성당은 두 번째 온 곳이다. 이번은 전에 들온 곳과는 다른 문으로 들어왔다. 먼저 성당 건물을 만나고 곧바로 바깥의 아담한 벽면에 부착되어 있는 성모를 만났다. 갈색 피부의 후안디에고가 만난 갈색 피부의 인디언 성모 그림이다. 성스러운 성모 그림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모여든다. 과달루페 성당은 후안디에고의 성모 발현을 인정 받아 성모에게 봉헌하는 뜻으로 지은 성당이다. 후안디에고라는 젊은 남자 인디언이 산티아고 성당의 신부에게 숙부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가는 과정에서 성모를 만났다.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저 파란 산언덕을 넘어서 산티아고 성당으로 달렸을 것이다. 그때 산언덕에서 성모를 두 번 만났다. 성당으로 갈 때도 만났고, 성당에서 집으로 갈 때도 만났다. 그때마다 '나는 너의 여원한 어머니다. 이곳에 교회를 건축하라'는 것이었다. 후안디에고는 자기와는 너무 먼 이야기라 여기고 그냥 성당으로 갔다. 갈 때는 성모를 만나지 않으려고 반대쪽으로 돌아가는데 또 성모를 만났다. 후안디에고는 성당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 신부는 후안디에고의 가슴팍 옷자락에 새겨진 장미를 보았다. 겨울에 필 수 없는 장미가 새겨져 있던 것이다. 옷을 벗겨보니 후안디에고 가슴에 성모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후일 후안디에고의 옷에 새겨진 장미 그림의 염료는 우주에서는 만들 수 없는 색상으로 판명이 나서 성모 출현으로 인정 받았다. 이렇게 성모 출현을 인정 받은 포르투칼의 파티마 성당도 있다. 나는 그곳 성당에도 가 보았다. 이곳의 성모는 원주민 인디언 닮은 갈색 피부와 검은 머리의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여인 그림이다. 광채가 나는 성모의 그림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성모는 검은 리본을 쥐고 있다. 그것은 임신 중임을 상징한다. 생명존중의 의미다. 그 당시 스페인이 퍼뜨린 질병으로 20년간 멕시코 국민 2천만 명이 사망했다. 그런 시대상황에 맞춰 그림을 그렸다. 초록색 별이 42개가 있다. 그날 밤 본 별의 축소 그림이다. 그래서 이 성모 그림에서 멕시코 국기 유래되었고 초록과 빨간색으로 탄생되었다. 성모는 달을 밟고 서 있다. 고대 아즈텍의 문양도 새겨져 있다. 정감이 가는 성모 앞에서 붉은 마음으로 마주하여 은혜로운 시간이었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교황 동상
과달루페 성당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 북쪽에 있는 라빌라데과달루페에 위치한 가톨릭 성당이다. 정확히는 멕시코 누에보레온주 과달루페에 위치한 과달루페 성당이다.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곳이다. 구성당만 있었는데 신도들이 늘고, 성당이 노후되어 신성당을 다시 건축하였다. 그래서 구성당과 신성당이 나란히 있는데 두 성당 사이에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동상이 세어져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로마 바티칸시국 그 먼 곳에서 생전 교황 재임 중에 멀고 먼 이곳 과달루페 성당을 5회나 방문하였다. 그래서 그를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세운 것이다. 1531년 동정녀 마리아가 후안디에고라는 인디언 개종자에게 두 번 발현하여 동정녀 마리아에 헌정한 곳이다. 두 번째로 발현했던 동정녀 마리아의 모습을 그린 그림 ‘과달루페의 동정녀 마리아’가 있는 성당이다. 2002년 로마 교황청은 중남미 지역의 대표적인 가톨릭 성지로 정식 공표하였다. 1531년 12월 동정녀 마리아가 후안디에고(Juan Diego)라는 인디언 개종자에게 두 번 발현하여 교회를 세우라고 했던 그 언덕 가까운 곳에 있다. 교황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다섯 차례나 방문하였다고 하니 은총 가득한 성당 앞에서 교황도 만나고 흐뭇하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외경
멕시코 과달루페 성당Basilica de Guadalupe은 두 개다. 구성당과 신성당이 있는데 나란히 같이 있고 큰 광장도 있다. 광장 끝에는 시계탑이 있다. 원래의 교회는 16세기에 건축된 구성당인데 지반 침하로 붕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로 인하여 1974년부터 1976년 구 성당 옆에 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양식의 새로운 신성당이 건축되었다. 과달루페 사원은 멕시코시티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멕시코의 수호신 과달루페 성모를 기리는 성당이다. 1531년 이곳에서 한 농부가 금으로 장식한 푸른 외투를 입은 여자의 형상을 보고 신부에게 얘기하여 건립하게 된 성당으로 수세기 동안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했다. 구성당은 1533년에 완공되었다. 예전의 사원은 붕괴의 위험이 있어 현재는 현대 기술을 이용해 1974년부터 1976년에 걸쳐 완공한 신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이 새 성당은 국립인류학 박물관을 건축한 페드로 라미레즈 바스께스(Pedro Ramirez Vasquez)가 디자인한 것이다. 성당 내부는 둥근 원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모가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이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12월 12일 과달루페 성모의 날에는 많은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사원이다. '과달루페의 동정녀 마리아' 원본 그림은 새롭게 건립된 신성당 건물에 보관되어 있다. 신성당은 둥근 형태의 건물로 독특한 구조 양식이다. 과달루페 성당은 매년 수십만 명의 순례자들이 방문하는 성지다. 12월 12일 동정녀 마리아 축일에는 수많은 신도들이 무릎으로 기어서 교회로 오르는 고행을 하기도 한다. 멕시코 각처에서 며칠에서부터 몇 달, 몇 년까지 걸려 여기 온다. 드넓은 광장에서 두 성당을 살펴 보았다. 푸른 색상 지붕의 신성당과 붉은 빛이 도는 구성당의 외경이 아주 조화롭고 아름답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후안디에고 동상
과달루페 성당 광장에서 후엔디에고가 성모를 만난 언덕으로 가려는데 두 사람의 동상이 있다. 후안디에고와 신부의 동상이다. 후안디에고의 옷자락에는 겨울 장미가 놓여 있고 신부는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습이다. 젊은 인디원 원주민 청년 후안디에고는 굉장히 착하고 효성스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모가 그 앞에 출현 한 것일 것이다. 천진한 얼굴이 동상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몇 백년 전 그를 만난듯 반갑고 거룩한 순간이었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후안디에고 집
동상 곁에서 조금 걸어가니 후안디에고가 살던 집이 있다. 그가 산티아고 성당에 찾아가던 그날의 일들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는 이 집에서 17년 거주하다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집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성당이 있고, 그 곁에 그가 살던 집이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여기가 후안디에고의 숨결이 고인 곳이라니, 시선이 고정되어 발길이 돌아서지지 않는다. 순수하고, 착하고, 효성지극한 청년을 이 시대에도 본받아야 한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받아가고 싶다. 그렇게 살고 싶다. 멕시코에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발현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인디언이 많이 증가하였다. 후안디에고는 사망 후 이곳 과달루페 성당에 묻혔다. 여기 살다 여기 묻힌 인디언 후안디에고의 거룩한 삶이 빛나고 있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곁 우물성당
광장 뒤에 있는 언덕으로 향하던 중 작은 성당이을 만났다. 아담한 우물 성당이다. 저 울물이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서 우물을 그대로 보존하여 지은 성당이다. 성당의 문 바로 앞에 우물이 보인다.
* 멕시코 과달루페성당 후안디에고 산언덕
멕시코 과달루페 테페야크 언덕이 후안디에고가 성모를 만난 곳이다. 지금 나는 그곳에 와 있다. 꿈 같은 현실이다. 성모 발현 언덕은 과달루페 성당 바로 뒤로 이어져 있다. 아늑한 산길이 보인다. 멕시코의 여름인 지금 파란 식물들이 활기차게 산언덕을 채운다. 언덕 낮은 곳에 멕시코의 커다란 국기가 꽂혀 있다. 거기에서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연못과 동상들이 줄지어 있다. 성모를 만나려는 동상들이다. 1531년 멕시코 과달루페에서 발현한 성모다. 성모는 그날 밤 후안디에고의 병을 바로 치유해줬다. 후안디에고가 숙부가 아파서 신부님을 데리러 간다고 말하자 성모는 '가라, 숙부는 다 나았다'라고 했다. 집에 와 보닌 진짜 숙부는 방안에서 걸어다니고 있었다. 후안디에고는 그 당시 부모가 죽고 숙부와 살고 있었는데 효성이 지극하였다. 순수한 농부로 숙부와 살았다. 매일 산티아고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다. 그날 밤 숙부가 아파서 1시간이나 걸리는 산티아고 성당까지 이 언덕을 넘어 달려가려고 하는데 여기 언덕에서 성모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언덕에 겨울이어서 불가능한데 장미가 가득 피었다. 나는 너의 영원한 어머니라고, 이곳에 교회를 지으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인디언 청년은 자기와는 먼 얘기로 듣고 그냥 산티아고 성당으로 내달렸다. 성당에 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믿지도 않고, 헛소리로 듣고 신부도 못나게 하고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성모를 만지지 않으려고 언덕을 지날 때 빙 에둘러서 딴길로 오는데 또 언덕에서 성모가 나타났다. 아까와 같은 이야기를 했다. 인디언 청년은 다시 산티아고 성당으로 내려와 신부에게 그 사실을 고하였다. 그때 신부가 보니 옷에 겨울 장미가 한아름 안겨 있고, 인디언 청년 후안디에고의 가슴팍에 성모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서야 성모 발현 사실을 귀담아 들었다. 지금 들어도 가슴 훈훈한 전설의 기막힌 이야기다. 연못을 따라 걸어올라가서 산언덕으로 오르는 길로 가니 언덕 중턱 위에 성모가 빛을 발하며 발현 당일의 형상으로 서 있고, 인디언 원주민들이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성모를 만나려 줄지어 선 동상 군락이 있다. 멕시코 종교역사의 생생한 재현의 현장이다. 저 언덕 정상에 올라가면 소깔로를 비롯한 멕시코시티의 전경이 보인다는데 우리는 시간 관계로 오르진 않았다. 말한다. 멕시코는 그 당시 고유의 발전된 아즈텍 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태양신을 숭배했다. 스페인이 멕시코를 지배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지만 원주민들은잘 받아들이지 않앗다. 형식적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였을 뿐 토착신을 숭배하고 있었다. 가톨릭 교단에서는 그리스도교 전파가 힘든 사실을 알고 가톨릭 신앙과 현지 종교와 종교적 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의 한 사례가 바로 이곳 과달루페의 성모 발현이다. 1900년대에 들어와 후안디에고의 실존 여부를 놓고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후안디에고를 믿는다. 그의 효심과 순진한 마음을 품고 가련다. 몇 년 이곳에 왔을 때는 과달루페 성당만 보고 갔는데 이번에는 후안디에고 언덕과 살 던 집, 동상 등을 보고 간다. 무엇보다 기쁘고 보람되고 흐뭇한 여정이다.
* 멕시코 과달루페 성당의 성모
과달루페 신성당에 입장하여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총격으로 휘어진 십자가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예배실을 지나 성모가 부착되어 있는 벽 앞으로 갔다. 무빙워크를 타고 흐르며 성모를 조망한다. 성모가 발현한 기적의 성모상 그림이 있는 이곳 신성당은 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 지은 성당이다. 성모상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그림 아래로 자동으로 움직이는 무빙 길을 설치했다. 세계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타고 흐르며 성모를 눈으로, 가슴으로 만난다. 1531년 12월 성당 뒤 언덕에서 두 번째로 후안디에고가 만나던 모습의 성모다. 원래 지어졌던 옛 성당은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지금 많이 기울어져 있어 다시 지은 것이다. 광장 입구에는 아즈텍 태양의 달력을 상징하는 문을 만들어 놓았다. 과달루페 성당은 카톨릭 종교만이 아닌 멕시코 토착 신앙과도 융합하는 곳이다. 이 그림은 멕시코의 수호성인으로 멕시코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축일은 12월 12일이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지는 멕시코의 과달루페, 프랑스의 파리, 라 살레트, 루르드, 퐁멩, 아일랜드의 노크, 포르투갈의 파티마, 벨기에의 보랭, 바뇌 등이며, 성모 발현지에는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다. 나는 포르투갈 파티마에서도 성모 발현 성당에 가 보았다. 이곳은 더 큰 규모로 성모 발현을 재현시키며 많은 감동을 준다.
* 멕시코 변두리 산마을
멕시코시테에서 테오티우아칸 유적지로 가며 본 변두리 산마을이다. 한국의 경기도격인 곳이다. 분홍, 빨강, 초록, 노랑, 하양, 파랑, 남색 등 다양한 색상의 가난한 집들이 산언덕을 타고 오른다. 저곳에 사는 가난한 자들은 낮에 멕시코시티 시내에 나가 노동하며 저임금을 받아 생활한다. 용역업체, 청소원, 아파트경비 등 3D 업종에 종사한다. 도시의 빈민들이 사는 마을이다. 이곳이 생활비가 적게 들어서 산다. 시내는 집값, 생화비 등이 비싸서 여기 산다. 멕시코의 학교는 공립은 무료다. 그런데 교육의 질이 떨어져서 공립은 안 보낸다. 하지만 사립은 교육비가 너무 비싸다. 그 대신 교육의 질은 좋다. 부자는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유학파가 정치권에서 득세한다. 이런 이야기가 이곳 사람들에게 들릴까 싶다. 산마을 규모가 어머어마하다. 이곳 저곳 산마다 어떤 산은 정상까지 울긋불긋 그림 같은 작은 집들이 줄지어 있다. 멕시코시티와는 엄청나게 다른 주택 모양이다. 차도에 가까운 산마을을 지날 때 자세히 보니 그야말로 가난이 뚝뚝 흐르는 아주 작은 집이다. 집이라기보다 지붕만 있는 허술한 창고 같은 거주지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모습이 보인다. 멕시코의 극심한 빈부차이를 짧은 시간 차이로 눈앞에서 전개되는 현장이다.
* 멕시코 전통식당 중식
테오티우아칸 가까이에 위치한 전통식당이다. 우리 부부는 예전에 왔을 때도 이곳 식당에서 식사를 했기에 낯이 익었다. 매우 크고 식단도 다양하여 좋다. 한쪽 코너에서는 멕시코 전통 음식을 즉석에서 만들어 준다. 만두처럼 여러 음식재료를 밀전병 같은 곳에 올려놓고 말아서 익혀준다. 맛있다. 식사할 때 원주민들이 와서 악기연주와 함께 음악을 선사한다. 한국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도 부른다. 춤도 추는 사람이 있다 흥겨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정원을 산책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이제 우리는 타오티우아칸으로 간다.
* 멕시코 거대한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은
신이 머물던 도시란 뜻이다. 조금 전에 중식을 한 식당이 그란 테오 칼리였다. 여기서 그란은 큰, 테오는 신, 칼리는 집으로 큰 신의 집이라는 식당이다. 테오티우아칸에서 테오는 신, 티는 의, 우아칸은 도시로 즉 신들의 도시로 해석된다. 해발 2,300m 멕시코 고원에 있는 고대도시다. 멕시코 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2㎞ 떨어져 있다. 테오티우아칸은 주변이 언덕으로 둘러싸인 약 260평방킬로미터의 분지 속에 있었다. 곳곳에 마르지 않는 샘과 수량이 풍부한 하천이 있어서 농업이 발달했으며, 또한 분지 밖으로 자연스럽게 난 길로 교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 같다. 도시는 죽은 자의 거리 양쪽으로 갈비뼈처럼 펼쳐진 도로를 따라 넓어지며, 직각으로 꺾어져 흐르는 산 후안 강은 운하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세기경 건설되기 시작하여, 기원 후 4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맞았다. 전성기 인구는 대략 12만명에서 20만명으로 추정된다. 건설 초기부터 완벽한 구상하에 계획되었으며 종교적 상징성이 강하다.
도시 전체를 관통하는 넓은 길은 ‘죽은 자의 길’이라 분리며 이 길 좌우로 많은 석조 구조물, 피라미드와 사원, 광장, 주택 등이 건설되었고, 그 끝에 사람의 심장과 피를 바쳤던 달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신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600년 뒤, 폐허가 된 이곳을 찾아 정착한 아즈텍인들이 이 유적은 인간이 아닌 신이 지은 도시라 생각하고 숭배하며, 붙인 이름이다. 기원 전부터 거주했다. 4세기에 18만 명이 살아던 거대한 도시다. 도시의 한 길이가 23Km였다. 로마에 버금가는 도시였다. 너무 규모가 커서 사람이 산 곳은 아니고, 신들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테오티우아칸이다. 현재는 그 당시 규모의 9%만 보일 뿐이다. 나머지는 아직 미발굴이다. 물이 흐르는 계획적인 도시였다. 그런데 680년에 이곳에 살던 18만 명이 돌연히 사라졌다. 지진 떄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정확히는 왜, 어디로 이주했는지모른다. 그후 680년부터 1320년까지 이 도시는 묻혀 있었다. 집터가 많다. 가뭄에는 신전에 올라가서 비 오라고 기원했다. 3명을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고 기도했는데 비가 안 오면 100명, 200명씩 제물로 바쳤다. 그래도 비가 안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족장의 권위가 무너지고 도시는 멸망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가뭄의 원인은 건푹구조에 있었다. 선인장 즙을 섞어 벽에 석회를 발라서 칼라풀한 벽화를 많이 그렸다. 석회석을 가열해야 가루가 되는데 가열할 때 많은 나무가 필요하여 주변의 엄청난 나무를 소멸시켰다. 정설은 아니지만 그래서 자업자득으로 멸망했다고 하는 학설도 있다. 스페인이 1521년 멕시코에 오기 전에는 이곳에 질병이 없었다. 그래서 질병으로 이곳이 멸망한 것은 아니다. 스페인들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있지만 인디언들은 저항력이 없어서 천연두 등의 전염병에 다량 감염되어 사망했다. 20년만에 50%의 인구가 감소할 정도였다.
테오티우아칸은 지금 보아도 거대한 자락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런 놀라운 도시를 건설했던 테오티우아칸의 주민들은 8세기 중반 돌연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테오티우아칸의 구조에 대한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또 주민들이 왜 도시를 버리고 일제히 사라져버렸는지도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11세기경, 후에 아스텍 문명의 주역이 된 톨텍족이 테오티우아칸을 발견했을 때 도시는 폐허 상태였고, 그 유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성지로 삼아 자신들의 묘지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조사를 통해 테오티우아칸를 건설한 사람들은 톨텍족과 아스텍족이 사용했던 나와틀어를 말할 수 있었던 어떤 한 종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기이한 유적지를 보기 위해 세계인이 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 Archeological Zone)은 멕시코에서 가장 보존이 잘된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 도시로 손꼽힌다. 북미대륙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멕시코의 동쪽에 위치한 거대한 고대도시이다. AD 150년경에 세워져 1908년 복원된 70m 높이에 248계단인 해의 피라미드을 비롯해 많은 피라미드들이 산재해 있다. 야간에 테오티우아칸을 방문하면 조명 장치를 통해 더욱 아름답고 웅장한 장관을 연출하면 피라미드를 볼 수 있다. 1987년에 유네스코 세 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재규어 사원
테오티우아칸에 도착하여 달의 피라미드, 해의 피라미드로 가는 길에 먼저 들른 곳이다. 테오티우아칸 유적 내에 있는 신전이다. 신전 마당에 들어서니 곳곳에 돌로 건설했던 도시의 유적들이 많이 산새해 있다. 멕시코의 뜨거운 태양이 내리 쪼인다. 재규어는 그 당시 아즈텍 문명에서 신성시하던 동물이고 재규어를 숭상하였다. 신전 입구에 재규어 모양을 그린 천을 걸어 장식해 놓았다. 재규어 사원에 입장하여 둘러보았다. 재규어 사원은 내부 벽면에 다양한 색채의 도료들로 다양한 문양의 그림을 그려놓았다. 재규어의 모습도 그려놓았다. 그 당시의 생활상도 그려 놓았다. 옥수수도 그림 속에 있다. 신전이나 피라미드 곳곳에도 재규어를 그려놓은 벽화들을 만날 수 있다. 재규어 사원의 벽화에서 조금은 그 당시의 생활상을 알게 되었다.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달의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 유적지 언덕에 오르니 들넓게 자리한 고대 도시의 흔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이곳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많은 피라미드다. 이곳 피라미드들도 중남미 전역에서 발견되는 커다란 계단식이다. 오롯하게 달의 피라미드가 훤히 보인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눈앞에 우람하게 전체의 모습이 다가온다. 전에 왔을 때는 저 달의 피라미드 게단에 조금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여기서 조망하였다. 어떻게 저토록 큰 규모로 돌을 쌓아 피라미드를 건축하였는지 놀라운 광경이다. 달의 피라미드는 바닥 한 변 길이 146m, 높이 46m로 해의 피라미드보다 작지만, 인신공희(人身供犧)가 이루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이곳 무덤에서 다량의 유해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제물로 저 신전 정상에서 심장을 꺼내 붉은 피와 함께 바쳤다. 달의 피라미드는 제물로 바쳐지려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던 죽은 자의 길 끝에 있다. 4층으로 이루어진 달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Moon)은 해의 피라미드보다 크기가 작지만, 해의 피라미드보다 높은 지역에 위치하여 높이 솟아있어 테오티우아칸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전망을 선사한다. 고대의 인신공희는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지거나 동물의 피를 바치는 것으로 대체되었으나, 유독 이곳 중남미 지역에서는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세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심장과 피를 신에게 바쳐야 한다고 믿었다. 16세기 에스파냐가 점령한 뒤에야 이 의식이 사라졌다. 이들은 전성기로 추정되는 7세기 무렵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할 뿐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이들이 어떤 언어를 썼는지조차 밝히지 못했다. 그러나 피라미드 축조술을 비롯한 문화적 전통만은 마야인에게 전해져 사라지지 않았다. ‘신들의 도시’를 의미하는 테오티우아칸이라는 도시 이름마저도 600년 뒤 폐허가 된 이곳을 찾아 정착한 아스텍인들이 붙인 것이다. 아스텍인들은 이 웅장한 유적을 보고 인간이 아닌 신이 지은 도시라고 생각하여 숭배했던 것이다. ‘죽은 자의 길’, ‘해의 피라미드’ 등 건물 명칭들도 마찬가지다. 전성기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이는 당시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2만 명을 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테오티우아칸 유적은 멕시코 국민에게도 상당히 친숙한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높은 지명도만큼이나 그 이면에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도 적지 않다. 다른 유적과 달리 어떤 민족이 이 놀라운 고대 도시를 건설했는지조차도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멕시코의 자랑인 동시에 중부아메리카 최대 유적인 테오티우아칸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다. 거리 북쪽 끝에는 궁전과 광장, 달의 피라미드 등이 있었으며, 남쪽 끝에는 케찰코아틀(날개 달린 뱀)의 신전과 대광장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달의 피라미드에서 죽은 자의 길을 따라 걸어서 해의 피라미드를 만날 것이다.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죽은 자의 길
테오티우아칸은 정밀한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규모의 고대도시다. 조사 결과, 테오티우아칸은 완벽한 계획 도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시의 주도로인 죽은 자의 거리가 사람의 등뼈처럼 도시를 남북으로 관통하고, 중앙에는 태양의 피라미드와 기둥이 줄지어 선 광장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2.5km에 달해는 테오티우아칸의 중심거리인 죽음의 길(The Avenue of the Dead)은 테오티우아칸을 두 개로 확연히 구분짓고 있다. 피라미드는 이 길을 중심으로 양쪽에 건설되었고, 전체적인 도시의 윤곽이 이 길을 시작으로 설계되었다. 달의 피라미드 앞에서 죽은 자의 길을 따라 걸었다. 폭도 넓고 길이는 아득하다. 그 끝에 있는 태양의 피라미드까지 간다. 주변에는 유적들이 남아있다. 고대의 비밀로 간직되고 있는 신들의 도시 중앙 통로를 관통하고 있다는 신비로움이 믿기지 않는다. 제물로 죽임을 당하려 줄지어 서 있던 무서운 길인데 처연하게 화보하며 걷고 있다. 달의 피라미드 정상에서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제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에 서 있다가 죽었다. 심장을 꺼내 붉은 피와 함께 신에게 바쳤다. 하루에 제물로 바쳐지는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몇 명에서, 몇 십명, 몇백 명씩 죽임을 당했다.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렇게 잔인하게 인신공희를 했지만 비가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도 비가 오지 않아 족장의 권위가 흔들려 멸망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니 참 서러운 이야기가 서린 소슬한 길이다.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해의 피라미드
테오티우아칸에는 거대한 규모의 달의 피라미드와 태양의 피라미드가 남아 있다. 그외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있는데 피라미드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피라미드는 해의 피라미드다. 이를 완성하는 데 연간 약 1만 명이 동원되었고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조금 작은 달의 피라미드와는 죽은 자의 길로 이어져 있다.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m, 높이 66m에 248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올멕 문명에 이어 서기 2세기경 테오티와칸 문명이, 지금의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멕시코 중부고원 지역에 등장했다. '테오티와칸'이라는 말은 '신(神)들이 계신 곳' 혹은 '신으로 되는 곳'을 의미한다. 전설에 의하면 5개의 태양 중 3개는 이미 사라지고 네 번째 태양이 테오티와칸을 비추다가 죽었는데, 신들에게 경배를 드리던 인간도 모두 죽게 되었다고 한다. 절망에 빠진 신들은 테오티와칸에 모여 의논한 끝에 신들 중 하나는 태양으로, 또 다른 하나는 달로 변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변한 태양과 달이 지금까지 살아서 비추고 있다는 것이다. AD 2세기에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해의 피라미드(Pyramid of the Sun)은 세계에서 가장 크기가 큰 피라미드 중의 하나이다. 볕에 말린 벽돌과 흙으로 만들어졌고, 그 위는 자갈과 돌이 덮고 있으며 밝은 색의 치장 회반죽이 피라미드의 특이한 빛을 발산한다. 피라미드 내부는 미로처럼 방과 터널들이 이어져 있다.
이 도시의 총 면적은 20제곱킬로미터며, 전성기인 서기 350년~650년경에는 인구가 약 20만 명을 넘었다. 당시에 거대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제외하고는 유럽의 그 어떤 도시도 인구가 2만 명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20만 명의 인구를 거느렸던 테오티우아칸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태양의 피라미드는 고대 도시 테오티우아칸을 상징하는 대피라미드였다. 현재 멕시코시티 중심부에 세워져 있는 대피라미드는 1910년 멕시코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고고학자 레오폴드 파드레스가 중심이 되어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 이 피라미드는 고대 중앙아메리카의 최대 건축물로 그 높이가 65미터에 달하고, 기단부의 폭만도 224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며, 정상에는 목조 신전이 있었다.
대피라미드의 배치가 태양의 운행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아스텍인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에 태양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달의 피라미드 역시 아스텍인들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형태상 태양 피라미드와 대칭을 이루는 건축물이었다. 테오티우아칸에서 다수의 유적이 발굴되었지만,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고대 도시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정한 기획하에 도시의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도시 전체가 천문학에 바탕을 둔 일정한 법칙에 따라 계획되었으며, 건물들도 그 원리에 따라 배치되었다고 전해진다. 해의 피라미드에 다다르니 아득한 높이로 오롯하다. 가파른 계단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갔다. 그런데 바람과 햇살로 힘든 오름길이어서 도중에 내려왔다. 조망하는 것만으로도 그 위용을 느낄 수 있고, 멕시코 고대도시의 숨결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 멕시코 테오티우아칸 기념품 상가
테오티우아칸 해의 피라미드 앞에는 기념품 상가가 길게 늘어서 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모자는 예전에 여기 왔을 때 이곳 상가에서 산 것이다. 그래서 더욱 정겨운 풍경이다. 그 상가를 찾아 보려 했으나 더웁고, 상가가 너무 많아서 찾을수 가 없었다. 대충 저 부근의 상가였다고, 우리 부부는 짐작하고 그날을 회억했다.
* 멕시코 선인장
선인장 농장에 탐방 왔다. 커다란 선인장이 주차장 바로 앞에 있다. 한 남자 직원이 나와서 선인장 크고 긴 줄기를 잘라 실을 적출하여 한 가닥씩 준다. 종이가 나오는 과정도 보여주면 종이를 나누어 준다. 그리고 선인장 중앙에 기구를 놓고 즙을 흡입시킨다. 그 즙을 발효시켜 만든 것이 멕시코의 술 데낄라다. 자리를 옮게 데낄라 술을 시음했다. 매우 독하다. 멕시코에서는 선인장이 많아 식용으로 쓰는 것도 있고, 선인장을 이용한 여러 가지 물품을 만들기도 한다. 오늘 중식에서도 선인장 요리를 먹었다. 기념품 상가도 둘러보고 돌아왔다. 들녘에도 선인장이 많다. 멋진 풍경이다.
* 멕시코시티 외곽 시가지 풍경
테오티우아칸에서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올 때 본 외곽 시가지 풍경이다. 갈 때도 보았지만 지금은 아주 눈앞에서 가까이 본다. 산자락 아래, 또는 산줄기를 타고 아담한 집들이 많다. 퇴근 무렵이어서 많은 차들이 멕시코시티를 빠져나간다. 멀리 도심에 있는 과달루페 성당이 아련하게 솟구쳐 올라있다.
* 멕시코시티 혁명기념탑
호텔로 돌아와서 30분 정도 휴식하고 석식 식당으로 가며 보았다. 석양 빛을 받아 그윽하다. 기둥이 네 개이며 붉은 돔지붕과 살빛 벽면이 아름답다. 사각으로 된 네 개의 기둥 상단에는 사람의 동상이 있다. 개혁, 농민, 노동자, 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다. 조각상 하단은 4개의 기둥이 구조물을 받치고 있다. 1910년에 일어난 농민과 노동자들의 시위 혁명을 기념하는 탑이다. 1900년대 초부터 건축하기 시작하여 다양한 우여 곡절끝에 1938년 완공된 멕시코 혁명의 상징물이다. 처음 건축할 때에는 독재자였던 프로피리오 디아스가 지었지만 혁명 전쟁을 거치며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건축가 오베르곤이 이어받아 완성시켰다. 혁명 기념탑에는 멕시코 혁명 영웅인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판초 비야(Pancho Villa ) 등의 유해가 담겨져 있다. 시간 관계로 내려서 보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멕시코의 혁명에 대하여 그 상징물을 보았으니 흐뭇하다.
* 멕시코시티 메트로버스
붉은 색 긴 메트로버스가 멕시코 도심을 달린다. 고운 색상이고 긴 몸체가 시선을 이끈다. 메트로버스는 멕시코시티의 주요 대중교통 수단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이동할 수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 멕시코시티 저녁 무렵에 본 독립기념탑
멕시코시티 중앙도로에 아주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석식식당으로 가는 길에 보아서 저녁 풍경이다. 파세오 델라 레포르마(Paseo de la Reforma) 대로에 위치한다. 코린트 기둥 같은 36m의 탑 꼭대기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천사상이 올려져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앙헬(Ángel)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10년 당시의 멕시코 대통령인 포르피리오 디아스에 의해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대좌의 네 모퉁이에 세워진 형상은 법, 정의, 전쟁, 평화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들 형상은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이달고 신부, 모렐로스, 게레로 등의 영웅을 상징하기도 하며 대좌 안에는 그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주변에는 고층 건물들이 많다. 버스에서 내려 식당으로 걸어가면서도, 나는 한동안 뒤돌아보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른 기둥 위의 천사를 바라보았다. 오늘 석식은 한식식당에서 먹었다. 불고기, 김치찌개, 김치, 부침개 등 풍성한 식단에 고마웠다. 식후에는 멕시코시티 도심의 밤길을 30분 정도 걸어서 호텔로 왔다. 조금 힘들었지만 젊은이들이 활보하는 멕시코시티의 밤 풍경을 보며 산책한 것도 이색 체험이다.
2017년 2월 11일 토요일 멕시코시티 소깔로광장, 메트로폴리나 대성당 대통령궁
* 멕시코시티 호텔 주변 풍경과 동상
멕시코시티에는 곳곳에 동상이 많다. 전에 왔을 때도 참 많이 보았다. 이번에도 호텔 앞에서 동상을 만났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콜럼버스 동상도 전에 왔을 때 거리에서 보았다. 그런데 중남미에서는 콜럼버스를 나쁜 쪽 인물로 생각한다. 먼저 번에 현지 가이드로부터 곧 콜럼버스 동상을 철거할 계획이라는 말을 들었다. 궁금하여 이번 현지 가이드에게 철거했냐고 물었더니, 그게 그렇게 쉽겠느냐고 단문으로 답했다. 시가지에 동상이 많은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역사적 위인이나 애국자, 문화인, 문학인 등을 저렇게 동상으로 세워서 기리는 것도 그 나라를 알리는데 큰 몫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멕시코시티 호텔 출발
모닝콜을 7시에 받고 일어났다. 15시간 늦은 이곳의 시차 관계로 좀 피곤하지만 이제 조금씩 적은되어 가고 있다. 전에 멕시코에 왔을 때는 2400m 고지의 도시라서 힘들어 고산증 약을 먹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별다른 증상 없이 잘 적응되어 좋다. 멕시코는 아침식사는 샐러드는 안 먹는다. 대신 빵과 과일을 많이 먹는다. 오늘 호텔 뷔페식당의 메뉴도 그런 식으로 나왔는데 생각보다 풍성한 식단이다. 빵, 과일, 요플레, 소시지, 고기, 차 등으로 맛있게 잘 먹었다. 옆자리에 아프리카인으로 보이는 흑인 남자와 일행이 있어 함께 먹었다. 오늘은 이 호텔을 아주 떠나는 날이다. 그래서 모든 짐을 가지고 나왔다. 아주 크고 웅장한 호텔이다. 이제 우리 부부가 멕시코에 언제 또 올까, 하는 아쉬움으로 곧곧을 돌아보았다.
* 멕시코시티 소깔로광장 주변 문화유산 지구
지금 우리는 소깔로 광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버스에서 좀 일찍 내려 소깔로 광장 주변의 문화유산 지구를 걸으며 간다. 소깔로 광장 주변은 모두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먼저 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며 멕시코 중앙은행과 우체국 건물을 보았다. 그리고 1826년 건축한 청색 타일 건물을 보았다. 오래 된 건축물들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고풍스런 거리가 중세풍의 낭만을 자아낸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물이 대부분이어서 유럽풍의 향수에 젖는 풍경들이다.
* 멕시코시티 내려앉은 성당
아름다운 구조의 건축물이 한쪽으로 기울어 내려앉았다. 멕시코시티는 원래 호수 위의 도시였고, 그래서 저렇게 물의 피해도 입은 것이다. 지금은 성당인데 아즈텍 시대에는 동물원이던 건물이다. 이렇게 망가져 가는 건축물을 허물어 다시 짓지 않고 보존하는 것도 문화유산으로 훌륭한 풍경이다.
* 멕시코시티 다리를 건너 들어가는 성당
이 성당도 물이 차서 내려앉아 있다. 그래서 들어가는 입구에 다리를 놓았다. 작은 다리를 건너서 사람들이 들어간다. 이 성당은 원주민과 백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성당이다. 입장하는 문만 다르게 구별해 놓았다.
*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
소칼로Zocalo Square 광장은 주변 지역 모두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기반석'이라는 뜻의 소칼로는 사방 240m의 넓은 광장으로 1520년에 꼬르떼스가 만들었다. 광장 주변의 파괴된 아즈텍 건물에서 가져온 돌로 포장을 하였다. 원래 이름은 리얼 광장(Plaza Real)였으나 1843년 산타 안나(Santa Anna)대통령이 독립기념탑의 기반석을 놓으면서 이름을 소칼로 광장으로 바꾸었다. 소칼로 광장은 세계에서 두번째로 넓은 광장이다. 사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보다 조금 작을 뿐이다. 중앙에는 멕시코 국기가 휘날리고,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Cathedral Metropolitana)와, 대통령궁(Palacio Nacioal)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 주위에는 역사적인 건축물 외에도 공공건물, 레스토랑, 호텔들이 자리잡고 있어 아주 웅장한 분위기다. 마제스틱 호텔에서는 소칼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은 라틴 아메리카의 유명한 성당 건축물 중 하나이고, 대통령궁에서는 멕시코 역사를 보여주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드넓은 광장이 아침 햇살을 받고 있다. 광장에는 메트로폴리탄 대성당과 대통령 궁(국립궁전), 호텔 등 주요 건물들이 세워져 있다. 국립궁전은 현재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된다. 아주 큰 규모로 광장 한쪽 면을 차지하고 있다. 광장 중앙에는 멕시코 국기가 크고 높게 걸려 있다. 멕시코의 중심 광장으로 역사적으로도 깊은 뜻이 담긴 곳이다. 소칼로란 이름을 가진 광장은 멕시코 도시들의 중앙에 있는 광장의 일반적인 이름이다. 특히 멕시코시티의 중앙에 있는 이곳 광장이 유명하고 정식명칭은 헌법광장이다. 멕시코시티에서 중심부라고 하면 이 소칼로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은 일찍이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 있었던 곳이다. 14세기 중엽 아스텍족이 아직 가난한 유랑민이던 시절에 부족신의 신탁에 의해 '독수리가 사보텐(테노치틀리) 위에 내려 앉아 뱀을 먹고 있는' 곳에 신전과 도시를 건설했던 바로 그곳이다. 당시에는 큰 호수의 서쪽 습지대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고 한다. 이후로 아스텍, 에스파냐 식민지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멕시코의 심장부로서 다양한 인간들의 애환을 보여 왔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곳인 소칼로 광장은, 스페인 지배 당시 세워진 건물로 둘러싸여 있어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소칼로라는 말은 원래 '기반'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현재는 멕시코의 도시마다 하나씩 있는 중앙 광장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광장은 과거 멕시코의 독재자 안토니오 로페스가 멕시코 독립기념물을 세우려고 했으나 계획이 취소되며 기반만 남게 되어 결국 소칼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정식명칭은 헌법광장이다. 아즈텍 문명이 서린 곳인데 그 원래의 모습은 아니지만 잘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기도 하고 여러 문화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메트로폴리탄 성당 앞에서 사방을 조망하며 살펴보았다.
*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에서 본 대통령궁
아침 햇살을 역광으로 받아서 건물이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거대한 위용으로 길게 소칼로 광장에 있다. 이곳에서는 국립 궁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소칼로 광장 동쪽에 위치한 국립 궁전National Palace of Mexico은 1562년 스페인 총톡의 거주지였다. 현재는 대통령 집무실과 행정부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1800년대 말 의회 장소로 쓰였던 홀도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해마다 9월 15일 멕시코 독립기념일 축제가 성대하게 치러지는 곳이다. 현재까지도 독립기념일이 되면 많은 시민들이 나와 멕시코 만세(Viva Mexico)를 외친다. 1927년에는 재설계되어 3층이 추가되었다. 이후부터 대통령실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중요한 대통령의 연설은 이 건물의 발코니에서 이루어진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궁전 내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내부까지 탐방할 예정이다.
* 멕시코시티 소깔로광장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메트로폴리탄 대성당Mexico City Metropolitan Cathedral 은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다. 멕시코시티 중앙광장인 소칼로 광장 중심에 우뚝 쏟아 있다. 오늘은 일요일어서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중이다. 문 밖에서 전경을 조망하고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성당 앞 거리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과 시민들들로 복잡하다. 성지 순례로 오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 앞 소칼로 광장과 이어지는 곳에 나무도 있어 아름다운 풍경이다. 성당 안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다는데 한 남자가 거리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메고 연주한다. 낮은 쇠창살로 담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스페인 지배 당시 건축물이어서 스페인에서 본 성당 분위기다.
메트로폴리타나 대성당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교회다. 1524년 건축을 시작한 이곳은 오랜 시간 동안 지어진 만큼 고딕, 바로크, 르네상스 등의 건축양식이 자연스럽게 혼합되어 있다. 3세기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여러가지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300년 동안 계속 공사를 오래 끌게된 이유는 건축양식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스페인의 르네상스와 프랑스의 네오클래시즘에 의해 지배되었던 영향 때문이다. 이 성당은 과거 호수였던 곳에 건립되어 지층이 부드러워 서서히 내려앉고 있기 때문에 성당을 안정시키기 위해 만든 지하 터널이 붕괴를 막고 있다.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성당이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교회다. 외경을 보고 문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잠시 살펴보았다. 정면에는 두 개의 화려한 종탑이 있으며 가운데 중앙출입구 퍼사드에는 화려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건물의 좌측에는 측면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다. 내부의 왕의 제단으로 이름지어진 제단은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데, 에스파냐식 바로크 양식의 섬세한 조각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중앙 출입구 옆으로는 대성당 부속건물인 바로크 양식의 성당이 있는데 이곳 정면 벽에는 성인들의 모습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성당의 내부는 천장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아치형의 기둥이 솟아 있어 강한 힘이 느껴진다. 14개의 예배당과 5개의 중앙 제단이 마주보고 길게 늘어서 있다. 다섯개의 통로는 다소 야해보이는 형상과 정교한 조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바닥은 대리석이 깔려 있다. 대성당은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건축물 중 하나이다.이 성당은 맥시코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앙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지배의 잔재물이지만 잘 보존하여 오늘날 후손들에게 그날의 종교 역사유적을 보고 배울 수 있어서 훌륭한 사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 앞에는 아즈텍 시대에 인신공희 했던 유골이 유리창 바닥 밑에 있다. 테오티우아칸 달의 피라미드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던 그 의식의 역사적 유물을 이곳에서 본다. 잘 보이진 않지만 소슬한 광경이다.
*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 원주민들 공연풍경
대성당을 지나 아즈텍 유적지를 보러 가는데 원주민 이인디오들이 그들 전통의 의상 차림으로 갈아 입고 공연한다. 이곳 소칼로 광장은 낮에도, 밤에도 이렇게 각종 문화공연을 하는 곳이다. 조금은 무섭게 차렸지만 그 옛날 이즈텍 문명을 재현하는 원주민들 공연이 보기 좋았다.
* 멕시코시칼 소칼로광장 유적지
메트로폴리탄 대성당 곁에 아즈텍 문명의 유적지가 있다. 멕시코시티 도심 중앙광장인데 허물어진 유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현장이다. 아직 발굴 중이어서 그렇단다. 이곳은 아즈텍 시대의 아주 중요한 도시였다. 그 옛날의 웅장한 도시 청사진이 벽면에 설치되어 있다.
*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입장
소칼로 광장에서 벗어나 길을 따라 대통령 궁으로 갔다. 조금 많이 걸어간 곳에서 대통령 입장 문을 만났다.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정원이 나온다. 멕시코의 주요 식물인 선인장을 비롯한 열대 식물이 아름답다. 궁 안으로 들어서자 아치형 문들이 3층으로 열을 지어 들어서 있다. 정원 중앙에는 분수대가 있다. 아침 시간이어서 햇살이 내리는 곳과 내리지 않는 곳의 빛과 그늘이 이중으로 조명된다. 그윽한 풍경이다. 지금은 이곳에 대통령은 거주하지 않는다. 시청사 업무만 담당하는 건물이다. 대통령궁에 꼭 들어와 보고 싶었는데, 전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입장하지 못했지만 이번 여행에서 입장하게되어 참 기쁘다.
*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벽화
이곳에 대통령궁은 외경도 중요하지만 내경을 꼭 보아야 하는 곳이다. 2층에 복도 벽면에 멕시코의 역사 벽화가 있기 때문이다. 국립궁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실내로 입장하여 그림 벽화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모두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거대한 벽화다. 그것은 궁전 2층의 중앙 계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작품은 멕시코의 대표적인 화가인 디에고 리베라가 1929년에 그리기 시작하여 1951년에 완성한 것이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의 작품이다. 장대한 멕시코 역사를 모두 담아내고 적절하게 조화 시켜, 표현의 공간을 믿을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뛰어나게 이용하였다. 오른쪽 벽으로부터 멕시코 밸리(Valley of Mexico)시대의 화려함 시작으로 테오티와칸, 툴라 등의 고대도시의 이상적인 모습, 멕시코 역사를 통해 거쳐온 혁명, 독립, 전쟁, 식민시대, 종교 등의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멕시코 원주민의 부흥과 스페인 침략, 멕시코 독립에 관한 주요 사건들이 담겨 있다. 화가 디에고 리베라는 원래 2층에서 3층 벽면 전체까지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죽어서 중지한 것이다. 중앙 계단에서부터 2층 복도 벽면 반 정도만 채워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웅장한 규모다. 화폭도 크고 상당히 넓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다양한 색채로 인디오, 아즈텍, 스페인 지배 시절 등의 멕시코 역사 사실을 아주 섬세하게 잘 그렸다. 그날의 현장에 데려가는 듯한 벽화들이 사람들을 흡입한다. 디에고 리베라는 러시아 사람인데 소련시절 스페인으로 망명 온 사람이다. 러시아 혁명의 대표자이어서 죽이려 해서 멕시코로 피신한 것이다. 3년을 멕시코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는 바람둥이였다. 그로인해 그의 아내 후리다 칼로는 고통이 심했다. 아내도 나중에는 트로치키라는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는 그의 아내를 창녀로 표현하며 이곳 벽화에 그려 넣었다. 자기도 바람둥이면서 아내의 외도는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많은 시간을 벽화 앞에서 감상하며, 설명 들으며 보고 배웠다.
*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주변 거리
대통령 궁 벽화를 관람하고 다시 퇴장하여 길로 나왔다. 웅장한 것은 대통령궁만이 아니다. 거리의 건물 모두 유럽풍으로 중세 낭만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이곳은 아즈텍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소칼로 거리다. 주변이 온통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멕시코시티 소깔로광장 주변의 선인장
소칼로 광장에서 떠나 시가지 거리로 나오니 선인장 정원이 반긴다. 아주 큰 자락으로 선인장을 심어 놓았다. 도심에서 보는 멕시코 선인장이 참 반갑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소칼로 광장 주변 시가지는 프랑스 파리만큼 커졌단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고 멕시코 상징의 식물 선인장까지 심어 놓은 소칼로 광장 주변은 대단히 아름다운 조경이다.
* 멕시코시티 분홍색 택시
멕시코 여정은 소칼로 광장에서 마치고 서둘러 중식식당으로 갔다. 한식식당에서 중식으로 비빔밥을 먹고 페루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멕시코시티 공항으로 이동했다. 도심 거리에 분홍색 택시가 곱다. 어제 테오키우아칸 갈 때 산마을 집들에서 많이 본 색상이다. 분홍, 보라 등은 멕시코의 존통 색상이다. 화려하면서도 우아하다. 시내버스도 아직 멕시코 전통색상으로 내려오고 있다.
* 멕시코시티 공항 출발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페루 리마공항으로 간다. 15:35분 비행기다.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우리 부부는 25F, 25H다. 혼자 온 여자 일행이 옆에 앉아서 이야기 하며 갔다. 이제 페루로 가서 꼭 가고 싶었던 마추픽추를 갈 예정이다. 비행기를 많이 타서 조금 힘은 들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 페루 리마 공항 도착
페루 리마에 밤 늦은 시간에 도착다. 현지시각으로 22:25분에 정시 착륙인데 조금 이른 밤 10시경 착륙했다. 멕시코와는 시차가 -1시간이다. 한국과는 -14시간이다. 페루는 지금 한여름이다. 밤인데도 여름 기온으로 훈훈하다. 지금은 밤으로 캄캄하다. 페루 리마 공항은 아주 세련된 공항이다. 확 트인 공항인데 아늑하고 정감이 서려있다. 멕시코시티 공항에서 5시간 50분을 날아서 왔다. 현지 가이드를 미팅하여 호텔로 왔다. 공항에서 호텔까지는 25분 걸린다. 쉐라톤 호텔이다. 호텔까지 가면서 여러 가지 페루에 대한 안내사항을 들었다.
페루는 여행객에게 위험한 곳이다. 우리가 유숙하는 쉐라톤 호텔은 우리나라 대통령이 머무는 곳인데도 도둑이 기승을 부린단다. 그래서 호텔에서 가방을 조심하란다. 페루, 칠레가 그래도 치안이 좋은 곳인데도 그렇단다. 한국여권이 1만 불, 한화로 1천만 원, 높은 가격이어서 그렇다. 한국여권으로는 세계 다 갈 수 있어서 노린다. 페루는 후진국이다. 차가 사람보다 우선이다. 그래서 항상 교통을 조심해야 한다. 멈추는 것을 보고 건너가야 한다. 우리는 내일 쿠스코로 간다. 쿠스코는 해발 3400m 고지다. 쿠스코 공항이 그곳에 있다. 쿠스코는 춥다. 산악지대라서 그렇다. 투어는 3800m까지 한다. 우리가 타고 온 LA, 란 항공은 칠레와 브라질이 공동 운영하는 항공이다. 페루는 인구가 3200만 명이다. 남한의 20배 크기인 나라다. 페루는 국토의 60%가 밀림지대다. 30%는 산악지대다. 10%는 사막지대다. 사막지대는 주로 해안가다. 관광하기 좋은 나라다. 리마는 사막지대에 있다. 리마에 1100만 명 거주한다. 리마는 서울의 4배 크기다. 교민이 1500명 산다. 금, 은 등 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내일은 쿠스코 여행으로 많이 걷는다. 2만보 정도 걷는단다. 유적지에 버스 진입을 막아서 그렇단다. 우산을 꼭 준비하란다. 우기라서 급변하는 날씨란다. 잠바도 준비하란다. 내일은 고지를 여행하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야 한다. 호흡이 중요하단다. 심호흡을 주기적으로 해줘야 한다. 복식호흡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산소 부족으로 잠 잘 때 머리가 아프다. 꼭 깊은 심호흡하라고 한다. 내일 쿠스코 300m 고지의 여행에서 적응하는 몸이면 우유니 사막 3800m, 티티카카 호수 3800m 여기도 갈 수 있다. 나는 내일의 여정이 가장 걱정이 된다. 고산증으로 오기를 망설였던 페루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 꼭 마지막 여행지 3800m 고지까지 갈 것이라고 다짐해본다. 내일은 5시 모닝콜, 6시 조식, 7시 출발이다. 일정이 많아서 그렇다. 페루에 온 것이 꿈만 같다. 보람되고 행복한 여정이다.
2017년 2월 12일 일요일 페루 리마, 쿠스코
* 페루 리마 호텔
아침 일찍 일어나 창 밖을 보니 고풍스런 건물들이 보인다. 여기는 중미 페루다. 한번도 와 보지 못한 신비로운 나라다. 잉카제국의 문화와 역사를 많이 보고, 많이 배우고 갈 것이다. 호텔 주변에서부터 느낌이 잉키제국이라는 독특한 분위기로 다가온다. 회색 톤의 칙칙한 건물에서부터 그렇다.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느낌을 준다. 도시의 한 블럭은 푸른 물결이다. 해뜨는 리마의 아침이다. 오늘은 09:40분 쿠스코행 비행기를 타러 간다.공항까지는 20분 소요된다. 쿠스코에 도착하여 3400m, 3500m, 3600m, 3800m까지 버스를 타고 오르며 잉키제국의 유적지를 탐방한다. 멕시코는 아즈텍 문명이고, 페루는 잉키 문명이다. 600년 전 발달된 문명이다. 발달된 문명은 8개 정도다. 인구 10명의 제국이 인구 1천만 명으로 번성했다. 스페인은 500년 전에 들어왔다.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 12세기 무렵 콘도르가 살았다. 날개가 3m나 된다. 먹이 앞에서 서로 양보하는 새다. 페루의 신전 그림 속에 콘도르, 퓨마, 뱀이 있다. 잉카제국 사람들은 하늘에는 콘드로, 땅에는 퓨마, 지하에는 뱀이 산다고 믿었다. 내일은 2000m를 기차 타고 우루밤바까지 하산했다가 다시 400m 올라가서 마추픽추를 본다. 이런 저런 페루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공항에 도착했다.
* 페루 리마 공항 출발
페루 리마 공항에서 09:45분 쿠스코랭 란 항공 LA2075 비행기를 탑승할 것이다. 수속을 모두 마치고 게이트로 왔다 상당히 넓고 쾌적하여서 좋다. 사람들이 많다. 페루는 관광객이 많다는 것이 증명되는 대목이다.
* 페루 상공
페루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조금 날아가자 상공이 온통 산이다. 하얀 구름과 함께 비경을 이룬다. 페루는 산악지대가 30%라는 말이 실감난다. 쿠스코까지는 1시간 35분 소요된다. 낮 시간을 날아서 가므로 아름다운 상공과 지상의 풍경을 모두 조망하면서 간다. 쿠스코에 가까울 수록 산은 점점 더 길게, 그리고 점점 더 높은 고산지대로 진입한다. 페루의 짙푸른 여름 산의 풍경이 장관이다.
* 페루 쿠스코 공항 도착
비행기가 착륙하는 쿠스코 공항은 그야말로 산 바로 곁에 있다. 참으로 기이한 정경이다. 활주로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민가로 보이는 건물들이 들어서 줄지어 있다. 산과 비행기와 사람이 한데 모여 살고 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하여 달릴 때 산 바로 아래로 나아간다. 그 어떤 공항에서도 보지 못한 순간의 신비로움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3400m 고지의 공항 쿠스코에 내렸다. 날씨가 청명하다. 쿠스코 공항 건물이 길게 들어서서 외객을 반긴다. 몸이 약간 불편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그런데 화장실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좀 멍해졌다. 예전에 멕시코시키에서 먹엇던 고산증 약을 먹었다. 그리고 볼일을 마치고 짐벨트에 내려가니 개운해졌다. 고산증 증세가 가라앉은 것이다. 기분도 상쾌하다. 아름다운 쿠스코, 그토록 오기를 기다렸던 여기 왔다는 것에 마냥 행복하기만 하다.
* 페루 쿠스코 산토도밍고 대성당과 코리칸차 유적지
쿠스코 공항에서 쿠스코 시가지로 이동한다. 먼저 중식을 하자고 중식식당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산토도밍고 대성당과 코리칸차 유적지를 잠시 보았다. 나는 여기 오기 전 한국에서 쿠스코를 공부할 때 보았던 낯익은 장면에서 금새 그 유적지임을 알수 있었다. 고풍스런 붉은 색 성당과 잉키제국의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 터가 파란 잔디 위에 남아있다. 이 두 유적에 대하여는 중식 후 더 자세히 보고 글을 쓸 것이다.
* 페루 쿠스코 시가지에서 본 페루 국화
산토도밍고 대성당 바로 아래 언덕길을 내려가는데 붉은 색 꽃이 있다. 꽃나무인데 빨간 색 종모양의 꽃들이 많이 피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이 꽃은 페루와 볼리비아에서 국화로 여기는 꽃이다. 이름은 카투아Catua, 또는 카투아타Katuata로 부른다. 현지 가이드는 카투타라고 부른다. 잉키제국시대에는 신에 대한 의식이나 중요한 행사 때 사용했다. 그때는 아주 신성한 꽃으로 여기던 꽃이다. 그러나 스페인이 침략하면서 그런 전통은 사라졌다. 잉키제국이 멸망하면서 점점 국화의 깊은 뜻은 잊혀져 갔다. 지금은 페루 국화가 해바라기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 카투타 붉은 꽃은 페루 여행 중 곳곳에서 많이 보았다. 아직도 잉카제국의 번영했던 시절이 고스란히 살아있다고 붉은 입술로 읊도리는 듯하다.
* 페루 쿠스코 시가지
중미의 페루 쿠스코Cusco 고지의 도시는 청청한 하늘이 머리 위에 내려온다. 어쩌면 이리도 청청할까. 거기에 하얀 구름이 뭉실뭉실 떠 있어 비경이다. 시가지는 아담하고 소박하다. 이곳이 세계각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명한 관광지인데 이곳 사람들은 그와는 관계 없이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사는 느낌이다. 잉키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싫은 것일지도 모른다.
페루의 면적은 약 128만㎢로 한반도의 6배다. 인구는 약 3000만 명이다. 수도는 리마Lima다.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수도였다. 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있는 나라로, 15세기 케추아족의 잉카 제국이 탄생한 곳이다. 1532년 에스파냐의 피사로에게 정복된 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았다. 1821년 독립 선언 후 1824년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였다. 북쪽으로 에콰도르,·콜롬비아, 동쪽으로 브라질, 남동쪽으로 볼리비아, 남쪽으로 칠레와 국경을 이루고 서쪽으로 태평양에 접해 있다. 아마존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둘러싸고,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던 페루 부왕령에 같이 속했던 에콰도르와 독립 이후부터 영토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고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다. 다인종국가로, 고대 잉카 문명의 꽃을 피웠던 인디오가 전체 인구의 50% 가까이 되지만 정치·경제의 실권은 전체 인구의 12%에 불과한 백인이 장악하고 있다.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중앙에 있는 쿠스코는 페루 남부의 고원도시로 잉카제국(15세기 초~1532)의 수도였다. 잉카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으며 해발 3400m 고지에 위치해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쿠스코는 잉카 제국의 정치, 행정, 종교의 중심지였다.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세워진 많은 신전, 궁전지의 석벽이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쿠스코 북쪽에 있는 우루밤바 계곡에는 피사크, 올란타이탐보, 위냐이와이나, 마추픽추 등의 유적군이 있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Pachacútec, 1438∼1471) 시대의 도시로 종교적 기능을 잦춘 독특하고 복합적인 중심 도시였다. 농업, 수공업, 공업 구역은 중심부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산업 구역이 도시를 둘러싼 형태였다. 스페인은 16세기에 이곳을 정복한 후, 도시의 기본 구조를 보존하면서 잉카 도시의 폐허 위에 바로크 양식 교회와 궁전을 건설하였다.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썼던 케추아 어로 ‘배꼽’이란 뜻을 갖고 있다. 쿠스코에 건설된 광장과 궁전, 황금으로 장식된 정원 등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의 침략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살해되고 엄청난 보물이 사라진 지금의 쿠스코는 잉카인들이 살았던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황금의 도시 쿠스코를 점령한 에스파냐군은 엄청난 보물을 빼앗고 잉카인들이 지은 건물을 파괴한 뒤, 그 위에 자신들의 건물을 세웠다. 오늘날 쿠스코에서 볼 수 있는 광장, 교회, 수도원 등은 에스파냐 사람들이 새롭게 건설한 유적지다. 다행스럽게도 주춧돌을 비롯한 잉카 유적지 일부가 보존되어 있고, 잉카 문화와 에스파냐 문화가 만나 새로운 유적지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곳 쿠스코에 온 것이 참으로 기쁘고 흐뭇하다. 고산증이 무서워 여행을 많이도 망설였던 나라다. 우리 부부는 이번에 큰 용기를 내어 온 만큼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페루 쿠스코 약국
이곳 약국에 온 것은 고산증 약을 사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는 전에 멕시코에 올 때 사 두었던 고산증 약을 가지고 와서 여기서는 사지 않았다. 쿠스코 약국에서는 하얀 색 알약을 판매한다. 어떤 나이 드신 분이 한 통을 사서 한 알씩 나누어 주었다. 약은 그리 비싸지 않다. 한 알에 한화로 1천원 정도란다. 그런데 큰 통을 통째로 사서 그보다 더 싸다고 했다. 나의 작은 아들은 한국에서 약사다. 그래서 나는 세계여행 중에 만나는 약국을 아주 소중히 바라본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기도 하고 사진에 담아가기도 한다. 지금은 약국 안에 들어왔기에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남자 약사이고, 약에 관한 물품들을 아주 질서정연하게 깨끗한 분위기로 잘 진열해 놓았다. 참으로 정감이 가는 쿠스코 약국이다.
* 페루 쿠스코 전통식당 중식
중식 중식을 하기 위해 식당에 왔다. 그런데 원주민 인디오 세 남자가 페루의 전통악기를 연주한다. 독특한 소리를 내는 약간 투박한 악기 연주가 참 아름답다. 나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먹었다. 그들이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엘 콘도 파사'를 연주할 때는 절창이었다. 안데스 산맥에 서식하는 콘도르 새에 대한 노래이며 또한 이곳 지방의 전통민요다. 콘도르는 잉카인들에게는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로 여긴다. 나는 일부의 연주 장면을 동영상으로 담아왔다.
* 페루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
아르마스 광장은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그 나라의 중앙광장으로 수도에 건설했다. 그리고 페루도, 칠레도 그 광장 이름이 아르마스로 각 나라가 다 같다. 이곳 쿠스코 아르마스 광장도 잉카의 수도였던 곳이므로 아르마스 광장을 수도 중앙에 세운 것이다. 먼저 잔디로 조성된 파란 융단 위에 색색의 고운 꽃들이 외객을 반긴다. 그리 넓지는 않지만 곳곳에 휴식의자도 많고, 아름다운 광장이다. 안데스 산맥과 그 주위에 들어선 고운 집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더해준다. 광장 중앙에는 파차쿠텍 왕 동상이 있다. 파차쿠텍 왕은 잉카제국 9대 왕이다. 3대까지 100년간 국왕을 이었다. 그 100년 동안 10만 명의 인구에서 100만 명의 인구로 번영했다. 페루는 1821년에 독립한 국가다. 쿠스코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9대 왕 파차쿠텍 왕부터다. 파차쿠텍이 찬키족을 물리치고 잉카제국을 세웠다. 9대 파차쿠텍 왕과 10대 토파 유판키 왕이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서 넓은 영토를 얻었다. 들판의 돌들이 전사로 돌변하여 적을 물리쳤단다. 이 돌들을 신전에 모아 놓았다. 파차쿠텍은 쿠스코의 태양 신전을 재건했다. 파차쿠텍은 페루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잉카는 11세기경 안데스의 한 부족 족장을 잉카라고 부른데서 유래했다. 이 부족이 티티카카 호수 부근에서 발원하여 페루 쿠스코 주변에 정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잉카 족장을 태양신의 후손이라 믿었다. 전설로는 티티카카 호수 근처에서 태양신에게서 받은 황금 지팡이를 던졌는데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던 황금 지팡이가 지금의 쿠스코에 떨어졌다. 땅속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든데 지팡이가 들어간 그 자리가 쿠스코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이다. 15세기 무렵에는 콜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까지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한반도의 4배 크기였고 잉카 제국의 인구도 1천만으로 추정한다. 쿠스코는 우리 몸의 중심인 배꼽이란 뜻이지만, 세상의 중심이란 뜻도 내포한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도로 건설로 로마처럼 주요 도로를 쿠스코와 연결했다. 쿠스코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연결된 도로는 세상의 중심을 알게 했다. 광장 중심에 선 파차쿠텍 왕의 동상은 긴 창을 들고 페루의 국화인 카투아 꽃 모양 탑 위에 서 있다. 바로 아래에는 콘도르 새인지 하얀 새 동상이 몇 마리 있다. 그 앞에는 페루 국기가 크고 높게 솟구쳐 펄럭인다. 국기에 있는 적색은 피를 상징한다. 백색은 비쿠냐라는 낙타과의 동물을 상징한다. 광장 주변에 대성당, 횃불성당 등 주요 건물들이 있다.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며 잉카의 문명을 눈으로 가슴으로 체험했다.
* 페루 쿠스코 칸코 12각 돌
아르마스 광장에서 골목길을 따라 조금 걸어간 곳에서 잉카의 놀라운 석조 기술을 보여주는 12각의 돌을 만났다. 잉카의 제국의 장엄한 석벽이 양쪽으로 장관이다. 돌과 돌 사이는 종이 한 장 들어갈 수 없다 틈이 전혀 없이 돌을 다듬어 쌓아 벽을 건축했다. 돌 조각 기술이 세계최고였다. 쿠스코가 잉카의 수도가 된 것은 13세기 경 태양의 신전 코리카차를 건축하면 부터다. 콜롬비아에서 칠레까지 남북 4000Km의 대제국었다. 1553년 스페인 상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침략했을 때 그를 전설의 창조주로 믿었다. 백색 피부의 창조주가 온다고 믿었었다. 그로인해 피사로는 180명의 병사로 7만의 병사를 제압했다. 잉카 황제를 볼모로 잡은 피사로는 그의 몸값으로 큰 방에 황금을 가득 채우라고 했다. 가로 6.7m, 세로 5.2m, 높이 2.6m의 방을 황금 6000Kg, 은 12000Kg으로 채웠는데도 황제는 처형당했다. 스페인의 400년에 걸친 지배로 잉카 문명은 끝났다. 24,000Kmdml 도로를 건설히고, 수로까지 완벽하게 건설했던 문명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기 그 찬란한 유적이 오롯한 석벽으로 남아 빛나고 있다. 석벽 중 칸코 12각 돌은 모서리가 12개다. 그렇게 많은 모서리를 가진 돌이 어떻게 주변 돌과 융합하여 벽을 이루는지 정말 놀라울 뿐이다. 잉카의 각진 모서리를 자꾸 세어 보며 잉카의 숨결을 느꼈다. 쿠스크의 오후 햇살이 유난히도 12각 돌을 화사하게 조명해준다.
* 페루 쿠스코 기념품가게 전통의상
칸코 12각 돌을 보고 근처의 기념품 상가에 들렀다. 현지 가이드는 나를 잉카 여인의 모델로 세우고 주인은 나에게 전통의상을 입혔다. 치마와 둘러싼 웃도리 천, 모자까지 이제 나는 완벽한 잉키의 여인으로 변신했다. 뜻깊은 체험이다.
* 페루 쿠스코 골목길 여인과 야마
칸코의 석벽 사이에서 원주민 여인과 야마를 만났다. 그는 야마에게 풀을 먹이며 이곳의 생활모습을 재현한다.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며 그것이 하나의 삶의 수단이지만 사라진 잉키의 문명, 그 한 마디를 전사한다.
* 페루 쿠스코 퓨마와 뱀 모양 건축 돌담길
칸코의 골목길에서 꺾어져 내려온 골목길에서 또 상가를 만났다. 상가에는 석벽에 새겨진 퓨마와 뱀 그림이 있고 위에 화살표로 맞은 편 석벽을 가리킨다. 이 상가의 맞은 편 돌담 벽에 퓨마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단다. 쿠스코는 잉카제국의 수도로 안데스 산맥 해발 3400m의 분지에 위치하고 1백만 명이 거주했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이다. 잉카인들은 하늘은 독수리, 땅은 퓨마, 땅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쿠스코 도시 모양도 퓨마 모양으로 건설했다. 이곳 석벽에도 그날의 퓨마가 새겨져 있다는데, 육안으로 판독하기는 어렵다. 참으로 신비로운 문명이고 오늘까지 유적으로 남아 강인했던 그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 페루 쿠스코 원주민 생활모습
골목길 곳곳에서 원주민 여인들이 돌아다니거나, 앉아서 그들의 생활모습을 전시한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 1달러를 줘야한다. 돈벌이겠지만 이것도 페루 쿠스코의 옛 풍경을 재현하는 것으로 여행객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된다.
* 페루 쿠스코 스페인이 돌을 쌓아 보수한 유적지
쿠스코 시가지 석벽 골목길을 걷다보니 엉성한 석벽이 나온다. 스페인들이 침략하여 무너져내린 벽을 보수한 벽이다. 돌 사이에 회칠을 하여 쌓았다. 종이 한 장 들어가지 못하는 잉카의 석벽과는 전혀 다른 모양이다. 그 만큼 잉카의 돌 기술이 훌륭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쿠스코 여행의 출발점인 아르마스 광장을 지나 석벽을 지나 이제 스페인 식민 시대의 건축물인 산토도밍고 성당으로 이동하고 있다.
* 페루 쿠스코 코리칸차 산토도밍고 대성당
페루 쿠스코의 유적지는 대부분 스페인이 잉카 유적을 파괴하고 다시 세운 것들이다. 아르마스 광장은 잉카 제국 시대에 건설한 대광장이다. 아르마스 광장을 바라보고 있는 대성당은 코리칸차 신전 자리였다. 코리는 케추아어로 ‘황금’, 칸차는 ‘있는 곳’을 뜻한다. 스페인은 황금으로 덮여 있던 태양의 신전 코리칸차를 부수고 산토도밍고 대성당을 세웠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에스파냐 군대는 코리칸차 신전의 황금을 모두 빼앗아 갔다. 이 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황금 장식을 모두 녹여 막대 형태로 스페인에 실려 갔다. 이 황금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로 인해 유럽에 인플레가 왔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의 건물들은 1650년 대지진으로 모두 무너졌는데 잉카인들이 지은 태양의 신전 주춧돌과 벽은 대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코리칸차 신전 석벽은 뒤틀림 하나 생기지 않았다. 지금의 산토도밍고 대성당과 코리칸차 고고학 박물관은 지진 이후에 다시 건설한 것이다. 에스파냐 침략자들은 약탈하고 파괴한 것이 아니라, 잉카 원주민들에게 생소한 질병인 천연두를 전염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전염병으로 희생된 사람이 에스파냐 군대에 전사한사람보다 수십 배 많았다. 또한 그들의 종교인 가톨릭교를 강요하였는데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원주민도 수없이 많았다. 산토도밍고 대성당의 입장 문은 오롯하게 솟구쳐 오르고 아무렇지 않은듯 처연하다.
* 페루 쿠스코 코리칸차 박물관
코리칸차 박물관은 산토도밍고 대성당 안에 있다. 잉카 제국 당시 건설된 유적지와 유물이 남아 있다. 코리칸차 태양신전의 안뜰에 해당하는 곳이다. 태양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장소다. 중앙에 제단으로 사용했던 바위가 있고 사방이 돌로 둘러싸여 있다. 석벽은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이 없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리던 방,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방, 왕의 미라가 발견된 방, 천체 관측소로 추정되는 방 등 완벽한 건축술의 잔재다. 태양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방에는 4개의 사다리꼴 모양의 창이 있다. 무지개 신전, 천둥번개 신전 등의 이름으로 부른다. 천둥번개 신전은 돌 위에 올라가서 작은 사각형 구멍으로도 조망했다. 신전 벽면 아래 전시한 돌들이 많다. 신전의 벽면 내부를 무너지지 않도록 정교하게 건설한 것들이다. 코리칸차 신전 내부도 관람했다. 여기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다. 스페인이 말을 타고 와서 잉카인들을 정복시키는 그림도 있다. 천장, 벽면이 모두 황금으로 장식했는데 스페인들이 모두 가져갔다. 2Kg 마대로 700개를 가져 갔단다. 잉카인의 신앙심으로 벽의 일부와 정원까지도 황금으로 장식했는데 모두 빠앗겼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영혼은 살아서 여기 숨쉬고 있다.
* 페루 쿠스코 코리칸차 태양신전 터
산토도밍고 대성당은 코리칸차Coricancha 잉카제국의 신전이 있던 곳이다. 잉카인들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태양신앙이 국가종교가 되어 곳곳에 태양신전을 건립했다. 그 중심이 이곳 쿠스코의 태양신전 코리칸차다.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있는 쿠스코Cuzco는 잉카 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Pachacútec, 1438∼1471) 시대의 도시로 종교적·행정적 기능을 갖춘 중심도시였다. 농업과 수공업, 공업 구역은 중심부와 확실하게 구분되어, 산업 구역이 도시를 둘러싼 형태였다. 스페인은 16세기에 이곳을 정복한 후, 도시의 기본 구조를 보존하면서 잉카 도시의 폐허 위에 바로크 양식 교회와 궁전을 건설하였다. 이곳 코리칸차 신전 광장에는 금으로 된 샘에서 물이 흘렀다. 건축물의 문과 지붕, 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금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금은 스페인인에게 빼앗겼고, 건물도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코리칸차 유적에 세운 산토도밍고 대성당 토대 일부에 태양신전 원형의 벽이 이용되어 일부가 남아 있다. 1650년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산토도밍고 성당은 무너졌지만, 코리칸차 초석은 지진을 이겼다. 잉카 건축술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 태양 빛이 신전을 가득 채우고,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곳이다. 아직도 세계 여러의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 사용한다. 외벽 앞에서 태양 빛이 과학적으로 들어오도록 설계한 것을 보고 놀랐다. 모두 관람하고 화장실에 갔을 때삭 저 아래ㅐ로 파란 잔디 광장이 보인다. 여기가 코리칸차의 태양신전 터라고 생각하니 잉카제국의 심장과 마주한듯 했다. 멀리 안데스 산맥이 장엄하게 솟구쳐 오르고 그 아래 쿠스코 시가지가 옛 면모를 드러내며 찬란하다. 나는 지금 잉카를 만나고, 잉카인을 만나고, 그 유적 앞에서 뜻깊고 흐뭇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제 잉카의 유적 사이와만 잉카요새, 탐보마차이를 볼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여정이다.
* 페루 쿠스코 도심 시가지
페루 쿠스코는 한때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이던 시가지다. 고도 3400m의 산소가 부족한 고지다. 그러나 맑은 공기. 청청한 하늘. 순순한 일렁임이 서린 하얀 구름 등 자연 환경이 비경이다. 안데스 산맥의 능선들이 도시를 감싸고 있어 더욱 정겹다. 고대 잉카 제국의 수도였던 쿠스코는 세계의 배꼽이자 우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이어진 광대한 영토에 800만 명의 인구를 거느렸던 대제국의 수도였다. 쿠스코는 100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던 대도시로 잉카인들이 신성시 여긴 퓨마의 형상으로 세워졌다. 그곳에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가슴 훈훈한 순간이다. 도심 거리의 작은 로터리에 원주민 인디언의 얼굴 두 개가 부착되어 있다. 그 옛날의 용사인 것 같다. 시가지 건물들이 아담하고 예쁘다.
* 페루 안데스산맥 아래 퓨마 모양으로 건설한 쿠스코 시가지
다음 유적지로 이동할 때 버스가 고지로 달려 쿠스크 시가지가 한 눈에 담긴다. 안데스 산맥 줄기가 길게 뻗어 있고 쿠스코가 그 품에 안겨 있다. 한 동안을 달리며 차에소 본 풍경은 비경을 이룬다. 쿠스코는 퓨마 모양으로 건설했다. 땅은 퓨마가 다스린다고 믿었던 잉카 시대에 그렇게 도시를 건설했다. 정말 길게 드러 누운 퓨마 형상이다.
* 페루 쿠스코 삭사이와만 잉카 요새 입구풍경
쿠스코의 북쪽으로 오면 삭사이우아만과 켄코, 푸카푸카라, 탐보 마차이와 같은 잉카의 유적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지금 우리는 그 첫번 째로 삭사이와만 잉카 요새 입구를 지난다. 드넓은 들판의 파란 풀밭에 자가용을 받쳐 놓고 가족들이 놀고 있다. 들판 오롯항 언덕에는 예수가 리오데자네이루의 예수상처럼 하얀 동상으로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모두 아름다운 정경이다. 여기서 하차하면 많이 걷기 때문에 우리 버스는 요새 가까이 다가가는 길로 갔다.
* 페루 쿠스코 삭사이와만 잉카 요새
삭사아와만Saksaywaman 잉카 요새는 3500m 고지에 있다. 거대한 돌로 둥글게 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엄창나게 큰 자락이다. 구슬을 놓고 무거운 돌들을 운반했다. 잉카의 석벽의 기술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삭사이와만 잉카 요새는 쿠스코의 동쪽을 지키는 최대의 요새다. 퓨마 형태의 쿠스코에서 머리 부분에 해당한다. 성채를 중심으로 3중 벽으로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18m, 한쪽 면의 길이가 300m, 전체 둘레는 1100m 거대한 요새다. 큰 돌은 한 개의 무게가 120톤이고 높이도 5m가 넘는다. 건설에 동원된 인원은 3만 명이고, 공사 기간은 83년이 걸렸다. 하지만 아직도 풀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건축물이다. 밝혀진 것은 유적지 거석들을 근처의 석회암 광산에서 밧줄과 구슬을 이용하여 가져왔다는 것뿐이다. 철기와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건설된 장엄한 이 유적지는 인간의 한계는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과학의 힘으로도 100톤이 넘는 바위를 광산에서 이동시켜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건축물에 한치의 틈이 전혀 없이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것은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잉카 문명을 보려면 잉카의 마지막 도피처인 밀림속의 비밀도시 빌카밤바, 황금신전인 코리칸차, 태양신전이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 삭사이우아만에 가야 한다. 그 중에서보 삭사아와만 요새가 가장 웅장한 유적이다. 남미의 3대 축제라는 태양의 축제가 매년 6월 24일에 이곳에서 열린다. 갑자기 비가 많이 온다. 점점 더 우렁찬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소나기에 요새의 돌 아래로 몸을 피했다. 이곳은 종종 이런 날씨를 보인단다. 그러나 곧 비는 그칠 것이라 한다. 한참을 기다려도 이번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쉽지만 위로는 올라가지 못하고 아랫 쪽만 살펴보고 나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잉키 요새의 웅장한 규모와 훌륭한 석조기술을 잠작할 수 있었다.
* 페루 쿠스코 켄코
켄코는 외견상으로는 바위 군락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동굴 같은 형태다. 큰 돌 하나를 구멍 뚫어서 만든 신전이다. 이곳은 3500m~3600m 사이의 고지다. 비가 오라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기우제 지내던 신전이다. 돌판 위에 제사장이 올라가서 기도했다. 돌 속 기우제 제사 신전을 탐방하고 밖으로 나왔다. 참으로 기이한 잉키의 유적이다.
* 페루 퓨마를 닮은 쿠스코 시가지 전경
켄코 유적지에서 나와 산언덕에 내려다보니 안데스 산맥에 자리 잡은 옛 잉카의 수도 쿠스코의 전경이 눈앞에 다가온다. 쿠스코 시가지 전경이 매우 아름답다. 잉카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파차쿠텍과 토파 유판키 왕이 뛰어난 건축가와 장인들을 불러 도시의 전체 틀을 마련하고 건설했다. 도시 전체를 돌로 만들었다. 신에게 의식을 올렸던 장소는 물론, 왕족과 귀족들이 살았던 궁전과 저택,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고 물건을 교환했던 광장과 시장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길과 골목, 그리고 사람들의 집까지 돌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 없다. 길이와 높이가 1~3m에 이르는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지은 건물과 벽은 바늘 하나도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지었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는 말만 있었을 뿐 문자가 없었다. 그래서 쿠스코를 건설하는 데 동원된 인원과 공사 기간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기호와 여러 자료를 근거로 5만여 명이 20년 동안 공사를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퓨마를 닮은 쿠스코가 그날을 읊조리듯 산과 산 사이로 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쿠스떠나기 싫은 고운 정경이다.
* 페루 쿠스코 푸카푸카라
푸카푸카라는 붉은 요새다. 전령사 차스키가 쉬기도 하고 전하기도 하던 곳이다. 이런 요새가 곳곳에 많이 있다. 비가 와서 우리는 버스 안에서 조망했다. 들녘 가운데 붉은 돌담이 둥글게 둘러 진을 쳐놓았다.
* 페루 쿠스코 3800m 고지의 탐보마차이 오르는 길
여기는 3800m고지의 잉카 유적이다. 탐보마차이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에서 내려 400m 정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탐보마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입장문에 들어섰다. 파란 풀밭 위에 하얀 양들이 풀을 뜩고 있다. 그 곁에는 주인 원주민 여인이 모델처럼 앉아있다. 역시 사진을 함께 찍어주고 약간의 돈을 받는다. 잉카의 생활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산소가 부족하여 오르는 길이 좀 힘든다. 몸이 붕 뜬 것 같고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래서 걸음이 내 마음 같지 않게 비틀거리려 한다. 올라가는 중에 의자가 있어 일행과 함께 쉬면서 갔다. 이곳은 거의 산정에 가까운 고산이다. 힘든 분들은 버스에 그대로 있다. 그래도 용기 내어 온 사람들은 함께 씩씩하게 걸어 올라갔다.
* 페루 쿠스코 3800m 고지의 탐보마차이
드디어 3800m고지의 탐보마치이에 도착했다. 신기할 정도로 내 몸이 고산증에 잘 적응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염려를 많이 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아마도 페루에 대한 그 동안의 오고 싶었던 열망이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큰 기쁨이어서 잘 견딜 수 있는 것 아닐까 싶다. 내 몸에게 정말 고마워서 어떻게 보상해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더 건강하도록 내가 지켜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지금 이 순간이 꿈 같다. 산정 가까운 곳에 돌로 정교하게 지은 3단 계단식 석벽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산언덕을 타고 물이 흐른다. 바닥에도 물길이 있다. 탐보마차이 유적지는 잉카인들의 뛰어난 수로 관개시설 보여주는 곳이다. 계단식 벽면도 웅장하고 어디에서 흘러내리는 물인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근처 어떤 샘에서 끌어온 것으로 추측만 할 뿐이다. 탐보마차이는 옛날 왕의 목욕탕이라고 여기지만 아직 정확히 그 용도를 모른다. 잉카인들이 물을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하지만 잉카인들이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 전 몸을 청결하게 씻던 장소이거나 귀족들의 목욕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은 산으로 둘러싸여 안온하다. 산 고랑으로도 물이 흘러 내려간다. 파란 풀들과 나무와 물줄기 풍경이 옛 잉카의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이제 여기서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하산하여 우루밤바의 숙소로 간다.
* 페루 쿠스코 탐보마차이 하산길
탐보마차이에서 다시 온 길을 따라 내려간다. 탐보마치이에서 떨어진 물이 도로변에 수로을 이루고 흐른다. 잉카제국 시대의 잘 발달된 수로 하나를 보는 기분이다. 도로변에는 원주민 장사꾼들이 많다. 여인네들이 노천가게에서 기념품을 판다. 날아갈듯 가볍고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걸어내려 왔다. 어떤 간절한 소망을 이룬 소녀처럼, 나의 남편 역시 소망을 이룬 소년처럼 훨훨 나는 새처럼 사뿐 사뿐 걷는다. 우리 부부에게 오늘 이 순간이 생애에서 가장 뜻깊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장엄하고 도도한 안데스 산맥의 고산증을 이기고 페루의 잉카제국 문명을 눈과 가슴에 담아가는 오늘의 여정은큰 일을 성취한 것이다. 여기서 고산증이 적응되는 사람은 티티카카 호수도, 우유니 사막도 갈 수 있다던 현지 가이드의 말에 용기가 생긴다. 우리 부부는 기회가 되면 그 두 곳도 가자고 했다. 나의 맘편은 고산증 약도 안 먹었는데 여기까지 잘 견뎠다. 장하다고 칭찬과 격려를 해주었다. 이번 여정에서 오늘의 일정이 정말 힘든 마디인데 그 마디를 아주 가뿐하게 아무 증상 없이 잘 넘었다는 것은 엄창난 자신감과 용기를 부여받은 것이다. 참으로 뜻깊고 보람된 순간이다.
* 페루 우루밤바 호텔도착 석식
탐보마치이 유적지를 떠나 밤 시간을 달려 우루밤바의 호텔에 왔다. 이곳 우루밤바는 2800m 고지다. 우루밤바는 '황토 평원'이라는 뜻이다. 비옥한 토양이다. 우루밤바 강을 따라 농사가 잘 된다. 그 상류에는 아마존 강이 있다. 탐보 마차이에서 계속 내려온 숙소다. 내일은 쿠스코 북쪽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마추픽추에 간다. 몸을 편안하게 조절을 잘 해야 한다. 호텔은 독특한 분위기다. 로비에 불이 활활 타오르는 낭만을 선사한다. 식당도 석벽으로 잉카의 문명이 서려있다. 오늘의 일정을 잘 소화한 것에 대하여 서로 위로와 자축을 하며 아름다운 석식을 했다. 숙소 주변이 참 좋다고, 내일 아침에 산책하란다. 페루 우루밤바의 포근한 품에 안긴 참 행복한 밤이다.
2017년 2월 13일 월요일 페루 우루밤바, 마추픽추
* 페루 우루밤바 호텔의 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창문으로 아침 풍경을 보니 안데스 산맥이 장엄하다. 붉은 살빛이 드러난 높은 산중턱에 차들이 가끔씩 그 아슬한 산길을 타고 다닌다.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안데스 고지의 생활에서 저런 도로에 익숙해진 것이리라. 붉은 지붕의 민가 주택이 가파른 산 옆구리에 드물게 있다. 저 고독한 산줄기에서 어찌 살까, 신비로운 정경이다. 그런데 금새 하얀 구름덩이가 산줄기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다. 또 하나의 비경을 더해준다. 뷔페 식당에는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앙키의 불꽃이 곱다. 그 곁에서 서둘러 조식을 마치고 산책을 하며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했다.
* 페루 우루밤바 호텔 울창한 숲길 산책
조식 후 호텔 주변을 산책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안데스의 비경을 선사한다. 인공으로 가꾼 식물이 아니라 안데스 산맥 일부의 나무와 꽃과 식물들이 늘어선 호텔 뒤의 산책길이다. 산책로 곁에는 우루밤바 강이 있어 식물들이 매우 싱싱하고 짙푸르다.
* 페루 우루밤바 호텔에서 본 우루밤바 강
호텔 뒤편 산책길 옆으로 우루밤바 강이 흐른다. 안데스 산맥의 힘찬 기운을 받아 물빛도 가볍지 않은 색상으로 장엄하게 흐른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한국에서 여행을 준하며 공부할 때 이 우루밤바 강이 특히 나의 가슴속에 깊은 정감으로 파고 들었다. 오늘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바로 눈앞에서 우루밤바 강을 만나다니 참으로 큰 축복이다. 잉카제국은 멸망해서 소멸되었는데 저 우루밤바 강물을 여전히 그날의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잉키를 만나는 순간이다. 내가 잉카의 제국에 머문 순간이다. 생생한 저 강물 속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은 잉카의 영혼이 흐른다. 나는 두 눈과 가슴과 뇌리에 넘치도록 우루밤바 강을 담았다. 잉카의 숨결을 담았다. 이토록 황홀한 조우는 두고두고 회억하며 나의 남은 생을 더욱 행복하게 이끌 것이다.
* 페루 우루밤바 비옥한 땅
오늘은 마추픽추에 가는 일정이다. 호텔에서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기차역까지는 30분 걸린다. 버스가 오붓한 도로를 따라 농촌길을 달린다. 이곳 사람들은 옥수수와 감자가 주식이다. 들녘에는 옥수수, 감자 등 농작물이 파랗게 자라고 있다. 감자는 그 종류가 5300가지다. 그 중에서 4000 종류 이상을 페루에서 재배한다. 전 세계 최대의 감자 생산이 페루다. 그리고 멕시코도 많이 재배한다. 스페인의 피사로가 이 땅을 정복할 때 1천만 명 인구에서 300만 명이 죽고 700만 명의 잉카인이 남았다. 그들이 주식으로 먹고 살았을 옥수수와 감자가 아직도 그날의 목숨을 위해 들녘에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우루밤바 강의 물과 기름진 영토가 만나 풍요로운 들녘 풍경이다.
* 페루 우루밤바 아찔한 절벽호텔
우루밤바 평원을 달리다가 잠시 버스가 도로변에 멈춘다. 절벽 호텔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찔한 400m의 바위산 절벽에 호텔이 올라앉아 있다. 지상에서 보기에는 4개의 건물이 줄지어 나란히 도로를 향해 앉아있다. 온통 바위 산인데 어떻게 저 높은 곳에 건축했는지 경이롭다. 캡슐 호텔로 이름이 매우 길다. 스카이롯지 어드벤처 스위트(Skylodge Adventure Suites)호텔이다. 현지 가이드도 못 외운 다고 한다. 호텔 안에는 침대와 식사 공간, 욕실까지 모두 갖춰져 있다. 캡슐은 알루미늄 합금과 폴리카보네이트 재질이다. 창문 6개를 갖추고 있어 통풍도 잘 된다. 천장은 유리 재질로 만들어 침대에 누워 있으면 밤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 높은 지대에 만드는 콘도르 둥지와도 같은 체험이다. 버스에서 도로변에 내려 아슬한 절벽 호텔을 조망했다. 아득하여서 고개를 하늘 향해 들고 목이 아프도록 바라보아야 조망이 가능하다. 페루 쿠스코의 성스러운 사크레드 계곡(Sacred Valley) 높은 절벽 위 바위 군락에 물건처럼 올려져 있다. 얼마 전에 티브이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이 줄을 타고 힘겹게 위험한 바위산 옆구리를 타고 가는 것을 보았다. 케이블과 앵커, 사다리 등이 설치된 전용 절벽 등반 루트를 타고 오른다. 호텔로 들어가려면 다시 캡슐을 기어올라 위쪽에 있는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비수기에도 호텔 숙박료는 하루에 몇 십만원이란다. 그리도 몇 개월씩 예약이 밀려 있단다. 페루는 잉카의 유적도 그렇고, 현대의 저런 고귀한 진풍경이 세계인의 걸음을 끊임없이 이끄는 것 같다. 대단한 발상이며, 대단한 작업의 소산물이다.
* 페루 절벽호텔 앞 우루밤바 강 풍경
절벽 호텔 앞에 우루밤바 강을 만났다. 이건 크나큰 축복이다. 우르밤바의 어원은 우르는 물이고, 밤바는 지역이다. 즉, 우르밤바는 '물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아침에 호텔에서 본 물과 같다.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온 것이다. 고산과 평원, 강이 비경을 이룬다.
* 페루 우루밤바 마을 풍경
마추픽추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가다가 잠시 내렸다. 이곳에서 페루 쿠스코의 전통마을을 탐방하기 위해서다. 구름이 안데스 산맥을 휘감아 마을은 비경이다.
* 페루 민속마을 탐방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잠시 내려 민속마을을 탐방했다. 잉카의 유적을 재현한 돌담 골목길을 따라 마을의 어는 집으로 갔다. 내부까지 개방한 집으로 들러가 살펴보았다. 생활모습과 일상생활 도구가 그대로 현실의 풍경을 전시한다. 놀라운 것은 사람과 함께 거주하는 '꾸이'라는 동물이다. 우리네 닭처럼 집에서 기르다가 식용으로 잡아 먹는 가축이다. 우리나라에서 애완으로 기르는 몰모토와 유사하다. 신기해서 자꾸 보았다.
* 페루 오얀타이탐보 기차역
마츄피츄행 기차를 타기 위해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 역에 왔다. 쿠스코와 마추픽추 중간에는 있이다. 성스러운 계곡에 자리한 오얀타이탐보는 잉카제국시대에는 쿠스코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쿠스코에서 오얀타이탐보까지는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잉카 지배층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다. 그 당시 오얀타이탐보의 중심지에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곳에도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마추픽추로 가려면 오얀타이탐보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쿠스코에서 88킬로미터 떨어진 성스러운 계곡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아담한 도시다. 잉카제국 시대에는 숙소나 요새가 있던 도시다. 잉카 시대의 관개용 수로와 석벽이 그대로 남아있는 마을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잉카인들이 마추픽추로 향하던 길을 따라 가는 길을 트레킹할 때 이 마을을 거쳐 간다. 기념품 상가들이 즐비하다. 마추픽추 사진도 크게 걸려 있다. 기차를 타기 위해 탑승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 탑승
오얀타이탐보역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11시 15분 기차를 탑승했다. 우리 부부의 좌석은 B칸 29, 30번이다. 탑승할 때 여권도 제시해야 한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잉카의 마추픽추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렇다. 1시간 30분 소요된다. 우리가 유숙한 우루밤바 호텔에서 기차역까지 30분, 기차로 1시간 30분, 그래서 우루밤바에서 기차역까지는 2시간 정도 소요되는 셈이다. 기차 내부는 아담하고 옛 서정이 서린 고운 풍경이다. 철로 폭이 92m로 좁아서 기차가 돌아갈 때는 약간 흔들림이 있다. 마추픽추 행 기차는 세 개의 클래스로 나눠져 있다. 가장 고급 열차는 하이럼 빙엄 열차다. 보통 쿠스코에서 당일로 왕복하는 이들을 위한 기차로 티켓에 런치와 칵테일 디너, 영어 가이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등급은 가벼운 다과가 포함된 비스타돔, 마지막은 저예산 여행자들을 위한 백패커. 우리가 탄 열차는 비스타돔이다. 한국에서 같이 온 인솔자가 옥수수를 나와서 나누어 주어 먹으면서 간다. 기차에서는 망고 쥬스와 과자, 초코릿 등을 주었다. 같이 먹으며 간다. 마주 앉은 일행과 담소도 나무며 즐겁게 간다. 페루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참 흐뭇한 시간이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에서 본 마추픽추 산행 다리
기차 안에서 현지 여자 안내원이 바깥을 보며 영어로 설명한다. 그곳에는 우루밤바 강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너 마추픽추까지 산행하는 길의 시작이란다. 서행하는 기차 안에서 조망했다. 안데스 산길을 따라 오르는 산행길이 뽀얗게 드러난다. 마추픽추를 오르는 방법은 저렇게 트래킹으로도 가능하다. 잉카 트레킹은 하루 50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는 성수기에는 최소 6개월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루밤바 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산길을 만난다. 뽀얀 산길이 기차 안에서 보인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역 하차
드디어 페루 마추픽추에서 아주 가까운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중식을 하고 다시 마추픽추행 버스를 승차할 것이다. 벌써 하얀 구름이 안데스 산정에 내려와 장엄한 풍경으로 외객을 맞이 한다.
* 페루 마추픽추 우루밤바 강변 중식식당
기차에서 내려 조금 걸어간 곳에서 중식을 했다. 이 식당은 우루밤바 강변에 있다. 우리 일행은 창가에 앉아서 우루밤바 강을 바라보며 식사를 했다. 기막힌 순간이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 한국에서 우루밤바 강을 공부할 때 참으로 매력적인 강이었다. 잉카의 전설을 머금은 저 강, 그때나 지금이나 우루밤바 강은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뷔페로 전통음식을 먹었다. 나는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루밤바 강을 먹는다. 강물을 마신다.
* 페루 마추픽추 버스정류장 아름다운 풍경
중식을 서둘러 마치고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당히 아름다운 풍경이다. 안데스 고봉 설산과 우루밤바로 흘러가는 산 계곡의 시냇물이 만나 절경이다. 시냇가의 빨간 꽃이 잉카의 붉은 문명을 읊조듯 크고 화사한 꽃잎이다. 주변의 건물들이 허름하지만 잉카의 문명을 재현하고 있다. 식당 앞에 철길이 놓여 있다. 건너에는 마추픽추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기차가 지나간다. 페루 마추픽추의 신비로운 전설을 그렇게 서곡으로 울리고 있었다.
* 페루 마추픽추 버스정류장에서 마추픽추 올라가는 버스
중식 후 바로 철로 하나 건너에 있는 마추픽추행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마추픽추로 간다. 중식식당에서도 마추픽추를 왕래하는 이 버스가 보였다. 버스는 줄기차게 마추픽추을 오르내린다. 우리 부부도 버스에 승차했다. 세계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승차한다. 이제 그토록 기다리던 마추픽초로 간다.
* 페루 마추픽추 버스타고 오르며 본 절경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올라간다. 평지 산길을 조금 달리자 우루밤바 강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점점 산길로 오르기 시작한다. 지구상에서 600년 동안 알려지지 않은, 잃어버린 공중도시로 불리고 있는 마츄피츄를 만나기 위해 버스로 30분 동안 산길을 올라간다. 버스는 아슬아슬한 산길을 구불구불 올라간다. 계속 휘어지고 꺾어지는 산길이다. 아래로는 아득한 낭떠러지다. 길은 양호한 편이다. 두 상하 버스의 교행도 수월하게 진행된다. 안데스 산맥은 높이 고지로 올라갈 수록 하늘을 향해 솟구쳐오른 산봉우리를 드러내고 있다. 우루밤바 계곡도 함께 지상에서 드러내며 그야말로 아찔한 비경이다. 마추픽추를 발견한 자의 이름이 하이럼 빙엄인데 그의 이름을 최고 좋은 기차에도 붙였고, 이 도로의 이름도 하이럼 빙엄 도로다. 구름은 눈앞에서 하얗게 맴돌고, 짙푸른 안데스 산맥은 구름이 후감은 높고 낮은 봉우리들을 전시하고 저 아래로는 우루밤바 강이 산 계곡을 뱀처럼 하얗게 휘돌랑 흐르고, 버스는 등짝을 내어주는 안데스 산길을 쉼없이 빙그르, 또 빙그르, 또 다시 빙그르 가뿐 호흡으로 오르고, 어느 고지의 무릉도원에 다다르는 환상이다. 버스로 마추픽추를 오르며 본 산중 길은 장엄한 절경이다. 어찌보면 무섭고 두려운 낭떠러지 절경인데 오히려 무아의 경지에 이른 편안함이 눈과 가슴을 포근하게 다스린다. 나는 그저 여기 온 것만으로도 행복해서 안데스 산맥 고지의 풍경은 눈부신 절경, 평화로운 절경, 축복을 분무하는 절경이라고 크게 외치고 싶다.
* 페루 마추픽추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비경. 전체사진
페루는 우리 부부가 고산증에 대한 두려움으로 90여개 세계 국가를 탐방했으면서도 빼놓은 나라다. 그런데 이번에 페루에 여행 온 것은 대단한 용기로 출발했다. 우리 부부는 지금 60대 후반에 들어섰다.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페루 마추픽추Machu Picchu에 대한 미련은 버려지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 이미 포기했던 나라인데, 문득 떠오르면 도저히 페루를 접을 수가 없었다. 티브이 세계여행 프로 영상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자 다짐해도 그것을 가슴은 수용하지 않았다. 70대가 되기 전에 서둘러 가자고 굳게 마음먹고 온 세계여행 페루다. 그래도 조금은 수월한 크루즈 여행으로 택해서 온 것이 큰 위안을 준 것 같다. 다행히도 쿠스코 3800m 고지에서도 우리 부부에게 고산증은 나타나지 않았고 이렇게 넉넉한 평화로 2400m 고지의 마추픽추에 온 것이다. 자랑스럽고, 가슴 벅찬 순간들을 카메라에도 많이 담았지만, 스마트 폰으로도 담아 두 아들과 지인들에게 보내주었다. 특히 서초문협의 회장님이 금년에 임기가 끝나고 새로운 회장님이 추대되는데, 미리 우리 부부의 여행 일정을 보고는 하고 왔지만 폰사진으로 카톡방에 안부를 전해드렸다. 아무리 많이 찍어도 다 담아가지 못하는 마추픽추다. 보고 들었던 것보다 훨씬 그 규모가 장대하고, 넓고, 놀라운 건축물들이다. 먼 훗날 우리 부부는 오늘 만난 마추픽추의 웅장한 풍경들을 순간 순간 저장하여 담은 사진을 보며 행복할 것이다.
* 페루 마추픽추 버스에서 하차하여 입장
버스가 안데스 산정 공중도시 마추픽추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하차하자 바로 앞에 입장문이 보인다. 마추픽추 공중도시의 유적에 대한 안내판도 붙어 있다. 드디어 입장문으로 입장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고지의 산중이어서 수시로 날씨가 변하기 때문이다. 곧 맑아지기를 빌며 오랜 시간동안 열망해오던 그 마추픽추를 향해 걸어 올라간다.
* 페루 마추픽추 도보로 오르는 길
마추픽추에 입장하여 약간 가파른 길을 걸어서 갔다. 돌계단 길이다. 마추픽추를 등정한다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으로 힘들어도 참고 꿋꿋하게 올라갔다. 힘없는 나라여서 빼앗긴 잉카의 유물들이 많은데 이곳은 그런 서러운 바람이 침투하지 못했다. 미국 예일대학의 역사학자였던 빙엄은 잉카 최후의 황제가 우르밤바 강을 따라 빌카밤바로 이동했다는 전설을 토대로 밀림을 탐험하고 있었다. 어느날 아구아스칼레엔테스에 사는 11살 소년에게서 마추픽추 꼭대기에 폐허의 도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빙엄은 하루 일당을 지불하고 소년을 길잡이로 삼아 절벽을 기어 올라 이곳에 다다랐다. 다음해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부터 유적 발굴 자금을 받아 이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쳐 그는 토기, 보석, 유골 등 무려 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을 노새에 실어 날랐다. 페루 대통령에게 연구 목적으로 단기 반출 허가를 받았지만, 빙엄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빌려간 유물은 여전히 예일대 피바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페루 정부는 예일대를 상대로 유물 반환을 강력히 요구해 결국 미국은 반환을 합의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페루로 돌아온 유물은 없다고 한다. 핑계는 늘 같다. 페루가 귀중한 유물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보존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 긴 길은 아니지만 비가 오는 산길을 오르는 것은 힘이 든다. 그래도 곧 나타날 마추픽추를 떠올리며 힘차게 한 걸음씩 내어 디뎠다. 드디어 눈앞에 마추픽추의 서막이 전개된다. 구름은 쉬이 보지 말라고 장막을 치고 있다. 여기까지 온 것은 꿈 같은 환희다.
* 페루 마추픽추 전경
마추픽추의 전경이 눈앞에 와 있다. 꿈 같은 순간이다. 해발 2,430m, 보통 말하기는 2400m에 자리한 마추픽추Machu Picchu와 마주하고 있다. 잉카 제국의 절정기에 건설 놀라운 도시 창조물이다. 페루 남부 쿠스코의 북서쪽 우르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 제국의 창조물로, 해발 2300m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마추픽추는 ‘나이든 봉우리’라는 뜻인데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비밀의 공중도시’라고도 분린다. 잉카인들이 스페인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훈련을 하여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도시라고도 한다.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이곳을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로 떠났고, 이후 400년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1911년 미국 학자에 의해 발견 되었다. 마추픽추는 몇 백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서 잃어버린 도시, 공중도시라고 부른다. 마추픽추를 발견한 사람은 미국의 예일대 교수 히람 빙엄Hiram Bingham이다. 그의 부친은 목사였는데 엄격하여서 빙엄은 청소년기에 가출했다. 후에 그는 역사학자가 되었고, 상원의원까지 진출하여 성공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있던 마추픽추는 1911년, 미국 예일대학에서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가르치던 고고학자 히람 빙엄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히람 빙엄은 기록과 자료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안데스 산맥을 탐험하여, 숨어 있는 고대 유적지 마추픽추를 발견했다. 그가 마추픽추를 발견하던 당시 180구의 해골이 나왔는데 모두 여자였다. 그것으로 지금까지도 여러가지 추측을 한다. 마추픽추를 발견한 지 1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한 곳인지, 건설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다만 유적지와 유물, 자료를 토대로 학자들이 추측한 결과, 15세기 중반에 잉카인의 여름 궁전이나 왕의 은신처로 건설되었을 거라고 한다.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로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추픽추 유적지는 젊은 봉우리를 의미하는 와이나픽추와 늙은 봉우리인 마추픽추 봉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 유적지가 마추픽추로 불리게 된 것은 대부분의 유적지가 늙은 봉우리 아래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는 인간과 자연 환경의 상호작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유적의 거대한 벽, 테라스, 경사로는 마치 자연적으로 깎여서 형성된 절벽처럼 보인다. 안데스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있는 이곳의 자연 환경은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 아마존 강 상류의 분지를 에워싸고 있다.
마추픽추는 면적이 32,500㏊다. 페루(Peru)의 안데스 산맥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이다. 잉카 제국의 탁월한 건축적, 고고학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중 하나다.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자연환경과 완벽하게 융화되어 창조된 석조 건축물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 구조물 중 하나다. 1,000년 이상 계속해서 훌륭히 경작되어 온 주변 계곡은 인간이 땅과 맺은 생산적 관계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사례다. 마추픽추의 주민들은 지금도 감자, 옥수수, 라마(llama)를 기본으로 잉카 제국 시대 선조들의 생활 방식과 유사하게 살고 있다. 여러가지 특이한 동식물드로 많다. 콘도르condor 새도 안데스 산맥에 서식한다. 침식에 의해 깎여 나간 화강암 산꼭대기에 자리하여 뱀처럼 굽이쳐 흐르는 우루밤바 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추픽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 유적지이다. 치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이 놀라운 도시는 잉카 제국이 만들어 낸 가장 찬란한 창조물 중 하나이다. 이 도시가 만들어진 시기는 파차쿠텍(1438~1471)과 투팍(1472~1493)라는 위대한 두 잉카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인 쿠스코에서 적어도 100㎞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도시의 기능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검증된 기록이나 충분한 물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알 수 없다. 경사면을 일구어 공중 정원처럼 만든 거대한 테라스 부근에 농부구역, 산업구역, 왕실구역, 종교구역 등의 구역들이 있다. 그리고 여러 신전과 궁전을 중심으로 잉카인들이 살았던 주택, 곡식과 작물을 재배했던 계단식 경작지가 있다. 계단식 기단 제작, 바위 돌출부 평탄화 작업, 경사로와 계단 조성 등 산을 조각한 것처럼 만든 거대한 건축물 축조 등 엄청난 토목 공사를 통해 완성된 잉카 제국의 모습에서 그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지금까지도 정확히 누가 왜 건설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토록 신비롭고 아름다운 도시가 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는지가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잉카인들이 세웠고, 그들이 살았다는 것을 빼고는 모두 추측만 할뿐, 베일에 싸인 시간을 잃어버린 공중 도시다. 황금을 찾는 이들에게 쫓기고 쫓겨 도망친 잉카인들이 비밀도시를 건설하고 복수를 꿈꾸었다는 곳이라고도 한다. 어느날 갑자기 만 명이 넘던 도시의 주민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185구의 미라만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곳이다. 여성과 아이들을 땅에 묻고 사라진 그들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더 깊은 아마존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마존 어딘가에는 잉카의 후예들이 남아있을런지 모른다. 1911년에 하이럼 빙엄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도시다. 덕분에 그토록 오랫동안 남미 대륙을 휩쓴 탐욕스런 발길에도 훼손당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었다. 해발고도 2430미터의 산 정상에 자리 잡은 계단식 성곽 도시는 잉카 제국에서 유일하게 정복자의 손이 닿지 않은 도시다. 그래서 페루 원주민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사랑 받는 곳이기도 하다.
와이나픽추 거대한 산봉우리 아래 신의 도시가 장관이다. 다행히 마추픽추에 다다랐을 때는 비가 그쳐서 전경을 볼 수 있다. 하얀 구름이 산을 휘감아 길게 걸쳐 있다. 구름이 도시 유적까지는 내려오지 않아 잉카의 면모를 드러낸다. 올라 가면서 잉카제국이 머물렀던 신들의 도시를 조망했다. 바라보는 높이와 각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지만 분명한 것은 아직도 도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안데스 고지의 산정에 돌로 축조했던 건축물 들 옹기종기 모여 그날의 재현한다.
* 페루 마추픽추 구름 드리운 조망언덕
산길을 빙그르 돌아 마추픽추가 가장 잘 보인다는 조망 언덕에 왔다. 그런데 한떼의 구름 무리들이 내려와서 휘덮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잉카제국의 속살 마추픽추를 쉬이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풍경도 비경이다. 구름이 지나갈 기다리며 조망했다. 조금씩 벗겨지다가 또 가리운다. 이곳의 날씨는 변동이 심하단다. 이러다가도 해가 나온단다. 비가 그친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된다. 운무서린 마추픽추는 베일에 감춰둔 잉카의 문명 잔재를 꼭 움켜쥐고 있다.
* 페루 마추픽추 운무서린 풍경
비가 오다가 그치고, 구름이 진하게 끼었다가 지나간다. 이런 풍경을 계속 반복한다. 워낙 2400m의 고지대 산정이라서 평소에도 수시로 비가 내리고, 수시로 구름이 흘러간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지나가면 마추픽추와 와이나픽추가 드러난다. 우리는 그 시간을 기다리며 조망언덕에서 서성였다. 운무서린 마추픽추의 풍경도 상당히 아름답고 웅장하다. 신기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비가 그치고, 구름이 벗겨지고 와이나픽추 산봉우리가 드러난다. 계단을 내려가서 마추픽로 가까이 다가간다.
* 페루 마추픽추 정문 입성
조망언덕에서 조금 내려간 곳에서 마추픽추의 정문을 만났다. 돌로 축조한 직사각형의 성문이다. 잉카제국의 성문은 열려 있어서 감사한 마음으로 입성했다. 마추픽추는 유네스코의 세계복합문화 유산이다. 잉카의 유적과 다양한 동식물이 거주하는 안데스 산맥의 자연환경이 훌륭해서 등재되었다. 잉카 문명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것 유적이기도 하다. 마추픽추는 페루 원주민들에게는 크나큰 자부심이며,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있다. 정문으로 입성하니 긴돌담길이 외객을 반긴다.
* 페루 마추픽추 귀족 거주지
그 옛날 잉카시대에도 귀족과 평민은 구분하여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귀족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벌써 외형의 구조에서도 주택이었던 지붕 잔재가 매우 높다. 삼각 탑처럼 솟구쳐 올라 있다. 내부에는 창문 역할을 하던 구멍이 벽면 곳곳에 사다리꼴 모양으로 뚫려 있다. 그 당시 과학적으로 뛰어난 건축양식이다. 크고 작은 돌로만 쌓아 올린 집이 참으로 신기하다.
* 페루 마추픽추 왕녀의 궁전
마추픽추의 왕녀의 궁전은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2층으로 설계된 건물이다. 왕녀의 궁전은 왕녀가 사용한 곳이 맞는지, 왕녀가 존재 했는지, 정확히는 모른 다. 하지만 중요한 용도의 건물에서만 보여지는 2층의 설계 형태를 통해 신분이 높은 사람이 거주했으리라는 추측이다. 또한 태양의 신전 바로 옆에 위치한 점이 왕실이나 신성한 곳과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궁전 안쪽에는 물건을 놓을 수 있는 장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삼각 형태로 축조된 벽면을 통해 지붕의 모양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내려가지서 보지는 않았지만 높은 위치에서 자세히 보았다. 왕녀의 궁전 아래에는 계단식 밭이 길게 줄지어 늘어서 있다.
* 페루 마추픽추 태양의 신전
왕녀의 궁전에서 가까운 곳에 태양의 신전을 만났다. 마추픽추 유적지에 있는 200여 개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독특한 모양이다. 마추픽추의 유일한 곡선 건물이다. 외형이 달팽이처럼 안으로 점점 말려들어가는 구조다. 자연석 위에 석축 건물을 세웠다. 금과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다던 두 개의 동쪽 창은 텅 빈 채 남아있다. 동짓날 햇살이 이 창을 향해 들어오기 때문에 태양의 신전이라 불린다. 쿠스코 산토도밍고 대성당에서 본 코리칸차 즉 태양신전의 유적과 유사하다. 거대한 자연석 위에 탑의 형태로 우뚝 세워져 있다. 마추픽추의 심장이다. 잉카 제국의 새해는 1월 1일이 아니라, 해가 가장 긴 6월 21일이 새해다. 남아메리카 3대 축제로 손꼽히는 태양의 축제도 이 시기에 맞추어 열린다. 그날이 되면 태양의 빛이 신전 중앙의 창문으로 딱 맞추어 들어온다. 신전을 건축하는 데 있어 그런 부분까지 고려한 잉카인들의 지혜가 놀랍다. 잉카시대에는 태양신앙이 국가종교가 되어서 각지에 태양신전이 건립되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쿠스코의 태양신전 코리칸차(Coricancha)이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황금판으로 장식되고, 신상을 비롯해 수많은 황금제품이 들어있었는데, 정복자 스페인인에게 빼앗겨서 건물도 거의 파괴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 유적에 세워진 세인트 도밍고 수도원의 토대의 일부에 태양신전의 원형의 벽이 다시 이용되어 그 명성을 남기고 있다.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잉카인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한 태양의 신전이다. 커다란 바위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을 쌓은 탑 모습으로, 2개의 창문이 있다. 그 가운데 동남쪽 창문은 동짓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창문을 통과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태양의 신전은 태양의 후예라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던 잉카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일 년에 단 한 차례만 태양 빛이 신전을 가득 채우고, 천문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곳이다. 세계 여러 지역의 문화를 학습할 때 참고자료로도 사용되고 있다. 태양의 신전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다. 일명 왕릉으로 불리는데, 이 동굴이 어떤 곳이었는지에 관한 유물이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자연 동굴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을 보고 왕이나 절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위에서 태양의 신전을 조망했다. 오늘날이라면 저렇게 곡선으로 짓는 것이 쉽지만, 그 당시 돌만 쌓아서 건축했는데 저렇게 벽을 휘어지게 지었다는 것이 기막힌 기술이다.
* 페루 마추픽추 아슬한 계곡 공중도시
마추픽추에서는 어디를 보아도 산이다. 이보다 낮은 산도 많고 높은 산도 많다. 분명한 것은 마추픽추는 아슬한 계곡을 딛고 일어선 공중도시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크고 작은 석조 건축물들이 눈을 의심할 만큼 탄탄한 위용이고, 산줄기를 타고 내리막길을 달리며 만들어진 계단식 밭은 잉카 유적지 주변을 둘러싼 잔재의 절경이다. 장엄한 규모와 한 점 흐틀어짐 없이 아직도 무너져내리지 않고 잉카 도시의 면모를 지키고 있다. 15세기 초반에서 중반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마추픽추는 도시 대부분이 산의 가파른 경사면에 건설되어 있다. 유적의 주위는 높이 5m, 너비 1.8m의 견고한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잉카 제국에는 문자와 철기, 화약, 수레바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이 엄청난 양의 돌을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옮겨와 도시를 건설했는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어떻게 종이 한 장 들어갈 틈 없이 정교하게 돌들을 짜 맞출 수 있었는지 현대의 시각으로도 놀랍다. 무게가 수십 톤에 달하는 돌을 옮길 때 추와 지레를 이용했을 거라는 추측 정도만이 가능할 뿐, 아무 것도 알려진 사실이 없다. 공중도시를 걸으면서 곳곳에서 조명되는 잉카에 대하여 많이 보고 배우고 갈 것이다.
* 페루 마추픽추 채석장
이곳은 돌을 모아놓고 다듬던 곳이다. 아직 사용하지 않은 거친 돌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저 큰 덩의 바윗들들을 어떻게 이 고지의 산정에 올렸는지, 철제용구가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갈고 다듬었는지 기막힌 일이다.
* 페루 마추픽추 중앙 대광장
마추픽추의 중앙 대광장은 파란 잔디로 길게 직사각형 모양이다. 마추픽추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다. 주변에는 여러 신전과 궁전이 있다. 중앙광장 곁에 동글게 말려들어간 모양으로 생긴 태양의 신전과 2층 구조로 건설된 왕녀의 신전이 그 대표 신전이다. 잉카의 초대 황제인 만코 카팍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세 창문의 신전도 있다. 잉카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축조한 수로도 있다. 조금 위에는 해시계 인티우아타나가 있다. 신성한 광장은이라고도 부른다. 대광장 주변은 귀족들의 집이었던 석벽이 높이 솟구쳐 오른다. 이곳에서 잉카의 정치, 문화, 법질서 등이 논의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훈훈하기도 하고 두렵게도 보인다. 공중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마도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을 싶다. 지금은 평화롭게 파란 잔디 대광장이 전개되어 있어 고요한 영토다.
* 페루 마추픽추 산정 식물
페루의 안데스 산맥 주변은 여러가지 열대성 천연 식물들이 자란다. 특이한 동물들도 살고 있다. 산의 경사면을 깎아 일군 밭에 감자와 옥수수, 코카잎 등을 길러 생활을 유지했다. 그날의 식물들을 보존하는 군락이 있다.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 놓았다. 다른 식물은 잘 몰라도 코카잎을 생산하는 코카나무는 자세히 보았다. 작은 키에 잎이 많이 달렸다. 고산증을 다스린다는 코카차, 쿠스코 식당에서 마셨던, 그 차나무다. 키가 큰 나무도 있다
* 페루 마추픽추 화강암석 신전
이곳 신전은 화강암석 신전으로 아주 다부진 모습이다. 창문은 다른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사다리꼴 모양이다. 바닥도 아주 깨끗하고 안온한 분위기다.
* 페루 마추픽추 산정에서 본 우루밤바 강
마추픽추에서 절벽을 타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우루밤바 강이 보인다. 우루밤바 강이 흘러가는 마추픽추 주변 계곡의 풍경은 그야말로 비경을 이룬다. 우루밤바 강은 마추픽추 곳곳에서 보인다. 붉은 황토물빛이 잉키의 붉은 가슴팍을 열어 보이듯 주저함 없이 흐른다. 그날의 형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물의 색깍과 흐름을 본다는 것은 생애의 큰 환희다. 우리의 현지 페루 가이드와 다른 팀의 현지 페루 가이드 남자가 내 곁에서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다. 정면에서 나를 중심으로 할 때 나의 왼쪽에 앉아 나를 감싸주는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가 우리 가이드다. 잉카의 후예는 아주 친절하고 순박하고 잘 생겼다. 나는 잠시나마 잉카제국의 면모를 보는 순간이었다. 우루밤바 강은 그렇게 마추픽추 공중도시에서도 나의 가슴을 훈훈하게 달구었다.
* 페루 마추픽추 아슬한 계단식 밭
나는 한국에서 마추픽에 오기 전에는 계단식 밭이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공중도시 마추픽추도 이렇게 거대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공중도시와 계단식 밭의 면적은 비례한다. 그것은 그 당시 이곳에 살던 잉카인들은 저 밭에 감자, 옥수수, 코카차 등을 재배하며 살았기 때문에 인구에 비례하는 만큼의 경작지를 일군 것이다. 마추픽추 유적의 주변은 계단식 논과 성벽으로 둘러싸였다. 계단식 경작지는 마추픽추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 광대한 계단식 경작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이 계단식 경작지에서는 옥수수, 감자, 마약의 일종인 코카를 재배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일부 학자들은 왕실에서 사용했던 코카만을 재배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전체적인 의견은 아니랍니다.계단식 밭은 한 군데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산비탈 곳곳에 엄청나게 많다. 계단식 밭의 가장 큰 역할은 도시가 무너지지 않게 층층으로 받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농사를 짓는 역할이고, 다음으로는 적군이 오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잉키인의 지혜가 놀랍다.
* 페루 마추픽추 해시계 인티와타나
마추픽추 정상 그리 크지만 않지만 아담한 광장에서 해시계인 인티와타나Intihuatana를 만났다. 보호하기 위해 줄을 쳐 놓았다. 페루의 케추아어로 태양을 묶어 두는 돌,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 태양을 잇는 돌, 이라는 뜻이다. 높이 1.8m의 해시계는 마추피추의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돌기둥이다. 거대한 바윗돌을 갈고 다듬어 야마의 뿔 모양이 오롯하다. 야마 모양의 돌에 그림자가 질 때 그것으로 시간을 알아냈다. 그 만큼 계산하고 건설한 도시다. 이런 제단은 마추픽추의는 신을 모시던 도시로 조명되기도 한다. 태양을 숭배했던 잉카인들이 태양을 붙잡아 묶어두는 의식을 치루던 곳으로 본다. 우리가 사는 북반구의 12월 동지날이 남반구에서는 한여름이다. 그러므로 해가 긴 동지날 사제들은 그곳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을 묶어두는 의식으로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거라는 추측이다.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비추면 야마 뿔 모양의 꼭대기 그림자가 사라진다. 잉카인들은 이 해시계로 시간을 가늠한 것이다. 그런 사실에서 해시계나 천체관측소로 추측한다. 앞에는 와이나픽추가 불쑥 솟구쳐 오른다. 웅장한 산 아래로 절벽을 타고 시선이 내려간 끝에서 우루밤바 강이 뱀처럼 구불구불 흐른다. 계단식 밭이 경사면을 타고 찬란한 폭으로 내리 꽂힌다. 어떤 돌은 방위도 가리킨다. 현지 가이드가 나침반을 돌에 올리며 설명해준다. 마추픽추 유적은 모두 과학에 근거한 놀라운 유산이다.
* 페루 마추픽추 산정 신들의 도시
마추픽추는 정녕 사람이 살았던가 싶을 만큼 믿기지 않는 산정의 웅장함이 서리 있다. 신이 살았을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자는 그래서 마추픽추룰 신들의 도시로 부른다. 고봉 설산이 구름이 히나되어 하늘과 맞닿아 있다.
* 페루 마추픽추 산정에서 만난 야마
잉카의 유적으로 향하는 산정에서 야마들이 먼저 맞아준다. 하얀 야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라마를 야마라고도 한다. 계단식 밭 곳곳에서 풀을 뜯는다. 갈색 야마도 하산길에서 만났다. 안데스 산에서 사는 동물이다. 마추픽추에 방목하여 기르고 있다. 방문객에게 페루의 동물을 보야주는 것이다. 그 옛날 잉카의 숨결로 다가온다.
* 페루 마추픽추 야마의 집
마추픽추에 내려가는 길을 따라 한 동안 가니 야마의 집이 있다. 갈색 야마가 늙어서인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누워서 사람들을 바라본다. 전혀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함께 앉아서 휴식한다. 나는 '너도 나이 들어 힘이드는구나', 하고 한동안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 앉아 그래도 힘을 내라고 위로해 줬다.
* 페루 마추픽추 성스러운 바위
야마의 집 앞 마당에 안데스의 산줄기를 닮은 모양의 성스러운 바위Ceremonial rock가 있다. 아주 큰 비윗돌은 성스러운 신을 연상케 한다. 바위 바로 앞 마당에서 잉카의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보기도 한다. 잉카의 성스러운 기운을 받자고 사람들은 바위 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보호하기 위해 바위 앞에 줄을 쳐 놓았다.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지만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나는 잉카의 숨결을 느꼈다.
* 페루 마추픽추 곁의 와이나픽추 산봉우리
마추픽추 주변은 여러 종류의 형상으로 생성된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였다. 그 중에서도 마추픽추 곁에는 뭉툭하면서도 날카로운 형상으로 하늘로 솟구쳐 오른 와이나픽추Huayna Picchu 산봉우리가 오롯하게 서 있다. 이곳에 오르면 마추픽추의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와이나픽추는 2690m로 2400m의 마추픽초보다는 300여m가 높다. 하루에 500명만 올라갈 수 있는 제한이 있다.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 와이나픽추는 젊은 봉우리다. 성스러운 바위를 보고 조금 내려오니 바로 와이나픽추로 향하는 입구의 문이 있다. 입구에서 장부에 이름을 적고 오르는 관문이다. 이 산을 오르다 떨어져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어서 신분을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연령의 나이로 와이나픽추를 그냥 지나쳐 왔지만 가파른 오름길에는 좁은 돌계단이 놓여있단다. 40분 정도 오르면 정상이란다. 나도 젊었다면 오를 것이다. 그러나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한참을 바라보며 돌아섰다.
* 페루 마추픽추 하늘과 마주한 산정 도시
마추픽추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전혀 기록이 없어 사실이 밝혀지지 않으니 유적만 보며 연구하여서 그렇다. 그러나 어떤 설이 맞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과 마주한 기막힌 산정도시다. 어떤 학자는 마추피추는 잉카인들의 이중성 즉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이라는 믿음을 토대로 하는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선 마추피추는 와이나픽추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가지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마치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마치 안데스의 새 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잉카인들이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서 날고 있는 새의 모습으로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을 갖는 깃털의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로해준다고 한다. 마추피추는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그것은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이 마추피추를 외부 세계와 격리시키고 있는 데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의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마추피추를 건설한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영국의 클레멘 마크햄 등 일부 학자들은 파차쿠텍Pachautec 시대에 열대 밀림지대 야만인들의 쿠스코 공략을 저지하기 위해 마추피추라는 보루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빙엄도 초기에는 마추피추를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마존 강 상류지역 야만인의 무기가 별것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그와 같은 보루를 건설하였다는 것은 비상식적이라고 수정했다. 반면에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높은 건축지식으로 건설로 지은 도시는 기원이 어떠하든 마추피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m 아래에 있는 깊은 골짜기로부터 채취한 것으로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그야말로 악전고투하며 건설했음에 틀림없었다. 마추피추가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차츰 비밀이 알려지고 있다. 우선 마추피추는 제례 의식의 중심지로 약 1200 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며 테라스 형태의 농업 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뿐만 아니라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도 재배했고 가축을 따로 길렀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로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m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 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라는 식물 줄기로 덮었다.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지어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었다. 마추피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가 몇 미터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특히 중요한 건물의 경우 돌의 표면을 젖은 모래에 비벼서 매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에 종이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연결되어 있다.
마추피추는 고지에 위치하므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으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는 유적 중의 하나이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다. 그리고 추뇨, 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을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어놓았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그때 매달던 기둥들이 석벽 곳곳에 돌출되어 있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 신전,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일명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지상(현생),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주위로 왕의 궁전에는 식당은 물론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피추에서 유일하게 화장실이 있다. 그외 해시계 등 훌륭한 유적이 많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 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으며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적인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
빙엄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이 발견하였는데 그들 대다수는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185구의 미라 중 80%가 여자였으며, 그 중 나머지 20%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잉카 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금속, 섬유 등을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추피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 즉 군사 전략적 측면,또는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했다.
학자들은 대체로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로 세상의 개혁자로 불리는 파차쿠텍(재위 1438∼1471년)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에 3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망코 카팍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망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새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또한 빙엄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이전의 유물도 상당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전설에 따르면 최초의 잉카인인 네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는 파타리탐보라는 동굴에서 나타났으며 네 명의 남자 가운데 한 명이 망코 카팍이다.
학자들을 가장 혼동스럽게 만드는 것은 잉카인들이 갑자기 자신들의 근거지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또한 예고도 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페인 정복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보면 당시 침략자들은 마추피추에 도착하지 못했다. 즉 마추피추인들은 1553년 스페인인들이 잉카 제국을 정복하기 전에 이미 아름다운 공중 도시를 떠났다는 것이다. 불가사의한 마추피추의 운명에 대해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번째로 잉카인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승자가 패자들을 모두 몰살시키곤 했다. 잉카의 황제 와이나 카파크가 카란케 족을 물리쳤을 때 생존자 전원을 처형했다. 마추피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어떤 사제가 신성한 아크랴, 태양의 처녀 한 사람을 범했을지 모른다는 추정이다. 제니퍼 웨스티우드는 스페인인과 잉카 여왕 사이에 난 가르시라소 데 라 베거의 기록에 아크랴를 범한 자의 비극이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적혀있다고 말했다. '아크랴를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해짐은 물론 그의 신하, 친척, 이웃에서부터 그가 사는 마을의 주민과 가축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마을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없었다.' 세 번째 가능성은 하늘의 뜻이다. 현대인들은 하늘의 뜻으로 공중 도시를 철수했다는 것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당대의 잉카인들의 생각으로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그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마지막 가능성은 전염병이다. 1940년대에 말라리아가 이 지역을 덮치자 인구가 급감했다. 빙엄이 발견한 여자의 두개골에서 매독의 징후가 있었는데 전염병이 이 여자에게만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마을에 무서운 전염병이 번지자 통치자가 과감히 파기명령을 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마추피추는 손상이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소문이 무성했으나 학자들의 탐사는 계속되었다. 아직도 마추피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해 사용된 종교 중심지, 나아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 중심지 또는 당시 잉카 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마추피추가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 대치하는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추피추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 해발 3360m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른다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 오얀타이는 파차쿠텍 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양타이탐보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이 수 차례에 걸쳐 오얀타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승인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피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이기도 하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이므로 군대가 주둔했다. 그러므로 오얀타이탐보에는 군인들이 주둔했던 숙소, 종교시설은 물론 창고와 편의 시설이 있는데 외형적으로는 마추피추와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기찻길 옆으로 우루밤바 강이 흐르는데 이 강이 아마존 강의 원류이다. 기차에서 내리면 마추피추까지 수시로 버스가 운행하며 마추피추 유적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당초 기대한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어의 표지석이 있다. 1911년 빙엄이 왕궁과 신전 등을 발견한 후 1956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발굴과 복원이 1974년에 끝나 마추피추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고대 유적 관광지가 되었다. 2007년 신세계 7대 걸작품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마추피추는 매일 밀려드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자연붕괴가 아니라 인파로 파괴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자 유네스코는 페루 당국에 마추피추는 물론이고, 쿠스코를 출발해 걸어서 아프리막 계곡을 거쳐 마추피추에 이르는 이른바 ‘잉카 트레일’ 관광코스의 관광객 수를 대폭 통제하는 등 세계적인 유적지의 관리에 신중을 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더구나 재난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1970년대 유적지 내 헬기 착륙 허용으로 일부 손상을 입었다. 1997년에는 마추피추 유적지 인근 숲속에서 발생한 화재로 파손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인근 지역에서 생겨난 불길이 거세지면서 마추피추를 위협했는데 다행히 구조대원 수백 명이 출동해 불길을 잡았다. 2000년에는 맥주 광고선전을 촬영하던 중 마추피추 최고점에 있는 돌로 만든 해시계 즉 천문대 역할을 한 인티와타나Intihuatana 바윗돌 일부 깨지는 일까지 벌어졌다. 2001년 일본 동경대학 방재연구소도 마추피추 유적지의 뒤쪽 경사면이 한 달에 1Cm씩 아래 계곡으로 흘러내리고 있어 언제 붕괴할지 모를 정도로 지반이 취약한 상태라고 경고한 바 있다. 마추피추는 두 개의 산 능선 사이, 더 높은 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퇴적토양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물을 얻기 쉽고 곡식을 경작할 수 있지만 지반은 취약하다. 물론 페루 정부는 현재의 관광객 정도는 마추피추 유적지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면서도 유네스코의 우려에 대한 답변으로 관련 기관들을 통해 실태 조사를 실시하고 근간 산사태 예방 위성통제 시스템 등을 갖추고 하루 입장 관광객 숫자도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보존대책은 지역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마추피추 인근 주민들은 관광객 숫자를 제한할 경우 수입 감소로 생계에 큰 타격을 받는다며 정부의 보존 대책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문화재 보존이 먼저냐 생존이 먼저냐는 문제는 마추피추에서도 일어나고 있지만 사태가 악화되면 인간의 접촉이 거부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 부부는 잉카제국의 거대한 유산인 마추픽추를 전부 보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대견하고 가슴 벅찬 순간이다.
* 페루 마추픽추 기술자의 거주지
마추픽추를 둘러보는 중에 가슬자의 거주지에 들어섰다. 태양의 신전, 왕녀궁전, 신선한 광장, 해시계 태양의 불, 정의선,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 등을 건축한 기술자들이 살던 곳이다. 정원 중앙에는 원형 유적이 2개 있다. 줄로 보호하는 영역이다. 그들의 피나는 각고의 노력으로 오늘의 미추픽추가 있는 것이다. 남의 나라지만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페루 마추픽추 거대한 날개의 콘도르 신전
기술자 거주지를 지나 바위 사이의 길로 접어든 곳에더 거대한 콘돌 신전을 만났다. 바위를 깎아 콘도르를 새긴 조각 건축물이다. 그 지하에는 감옥이 있다. 감옥으로 향하는 입구의 문이 보인다. 콘도르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지에중에서는 가장 작은 신전이다. 하지만 천연석으로 이루어진 콘돌 신전은 마추픽추 유적 중에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유적이다. 바닥에는 콘도르 새의 부리와 머리 모양을 닮은 돌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을 중심으로 커다란 양 날개를 활짝 편펴고 솟구쳐 오르는 형상이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웅장한 날개는 마치 일부러 그려 넣은 듯한 다채로운 색상이 줄무늬처럼 들어가 있어 더욱 생동감을 더한다. 잉카인들은 콘도르를 신성한 동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상태로 신에게 바쳤을 거라는 추측이다. 콘도르는 남미와 북미에 사는 거대한 맹금류다. 아메리카대륙 특산종으로 5속 7종이 알려져 있다. 머리의 피부가 드러나 있으며 종류에 따라 붉은색·검정색·오렌지색·파란색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콘도르(Vulture gryphus)는 맹금류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서 몸길이 1.3m 이상, 몸무게 10kg에 이른다. 머리는 분홍빛이고, 수컷은 머리와 턱에 살 조각이 달려 있다. 목에는 흰색 솜털이 나 있으며 깃털은 검정색 또는 검은빛이 도는 갈색이고 날개의 일부가 흰색이다. 안데스산맥의 바위산에 살며 둥지는 바위 절벽에 틀고 흰알을 2개 낳아 암수 함께 55∼60일 동안 품는다. 먹이는 주로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거나 병든 양을 습격하여 잡아먹는다. 캘리포니아콘도르는 북아메리카에 널리 분포하였으나 차츰 줄어들어 서부 산악지대의 보호구역에서 약 40마리가 살아 있는 국제보호조이다. 주로 중남아메리카에 분포한다. 콘돌 신전 밑 지하에는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통로가 나 있는데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돌의자와 작은 공간이 존재한다. 그 안에 죄수를 가둬놓고 잔인한 고문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석벽을 타고 날아오르는 콘도르의 날개는 대단한 위용이다. 잉키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유적이다.
* 페루 마추픽추 돌로 정교하게 지은 가정집
마추픽추를 거의 돌아보고 마지막 지점 위치에서 가정집이엇던 석조건물 군락을 만났다. 이곳 가정집에서는 밥을 해 먹은 흔적이 없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런 추측은 부엌이 없었다는 것에서 나온 학설이다. 그래서 공동으로 취사생활을 했을 거라는 추측도 한다. 대소변은 집 한 구석에 항아리를 묻어서 해결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옛날 우물이 있었던 곳도 보았다.관대수로 시설이 발 발달된 페루가 이곳 고지대의 잉카 유적지에서도 어김없이 훌륭한 수로가 있다. 위에서부터 이곳 가정집 마을까지 수로가 관통하여 흐른다. 이금도 조금씩 흐른다. 빙엄은 이곳이 잉카 최후의 황제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저항하기 위해 만든 전설의 도시 빌카밤바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이곳이 어떤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설이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185구의 시체 중 109구가 여성이었기에 수도원이었거나 종교적 성소였다는 학설, 잉카 황제의 여름 별장이었을 거라는 학설,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피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는 학설 등이 난무한다. 계단식 밭 경작지 끝에는 보관창고가 있다. 식재료를 보관하기 위해 걸쳐두기 위해 사용하던 막대기도 벽 사이에 돌출하여 박혀 있다. 나무로 만든 기둥과 지붕을 받치며 돌쐐기 역할도 한다. 줄지어 이어진 여러 채의 가정집을 탐방하고 나왔다. 어딘가 구석에라도 그날의 잉카인이 '여기 있어요' 하고 툭 튀어나올 것 같다.
* 페루 마추픽추 수로
가정집 주변에 수로가 여러 곳에 있다. 잉카의 빼어난 수로시설이다. 잉카인들은 물과 돌을 이용하여 뛰어난 건축술을 보여준다. 바윗돌 유적 사이로 물이 흐르는 것은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돌을 이용하여 인공적으로 건설한 것이다. 마추픽추의 관개수로는 과학이 발달한 지금 보아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란다.
* 페루 마추픽추 계단식 밭에서 평화로이 풀을 뜯는 야마
마추픽추를 다 둘러보고 이제 가야 하는데 야마들이 배웅하듯 길목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라마라고 부르는 동물이다. 계단식 밭인 이곳은 경사면 산비탈인데 위, 아래 곳곳에서 하얀색과 갈색 야마가 평화로이 플을 뜯는다. 우리가 지나가는 계단식 밭의 한 길목에서 만난 야마의 뒷모습은 꼭 송아지 같다.
* 페루 마추픽추 하산 버스승차
마추픽추에서 총 둘레 1.8Km를 걸으며 태양의 신전, 왕녀궁전, 화강암 신전, 무지개 신전, 별의 신전, 신선한 광장, 해시계 태양의 불,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 계단식 밭 등을 다 보고 이제 하산 버스를 승차할 시간이다. 정류장에서 순서를 기다린다. 77세 나이로 혼자 오신 남자 일행이 마추픽추에서 쓰러져 마추픽추 내의 구급차가 와서 싣고 마추픽추 내의 병원 응급실로 갔단다. 그분을 기다리다가 좀 늦게 하산 버스를 탔다. 버스를 승차할 때는 직원들이 나와 철저하게 검색하고 보내준다. 마추픽추를 보존하는 일환으로 아주 엄격한 질서와 엄격한 조사를 거치고 있다. 안내 요원 남자직원이 우리의 먼저 다른 일행이 타도록 하던 사정을 알고는, 환자분이 오자마자 버스를 불러 우리 일행의 승차를 도와준다.
* 페루 마추픽추 하산길
예전에 이곳에 '굳바이 소년' 이곳 이름으로는 '차스키'라고 부르는 소년이 있었다. 버스가 하산할 때 갈지(之) 모양으로 꺾러지는 도로 곳곳에서 나타났다. 버스가 휘어진 도로를 돌아가는 시아 소년은 번개 같이 달려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것이다. 온몸이 땀으로 젖으며 마추픽추에서 달려서 버스를 따라 내려온 소년의 이야기는 적들이 쳐들어오던 때의 전령사에서 유래했다. 실제로 그 소년이 우루밤바 강 건너까지 따라오면 사람들이 돈을 주었다. 지금은 없어졌다. 이 가파르고 먼 산길을 달려서 버스를 따라 왔다니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 버스는 올라오던 그 길을 지금 내려가고 있다. 아슬한 도로도 있고 아주 평온한 길도 있다. 주변은 온통 안데스 산맥의 고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달려 내려와 관광객들을 놀라게 했다는 빠른 발의 소년들은 사라지고 없다. 달리기를 마치고 버스에 올라와 버는 돈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않는 소년들이 생겨 페루 정부에서 금지시켰다고 한다. 잉카 시대의 발 빠른 파발꾼들이었던 차스키는 쿠스코에서 에콰도르 키토까지의 2,000Km도 닷새 만에 달려갔다. 잉카 제국 구석구석을 잇던 길을 릴레이 형식으로 달렸던 그들의 빠른 발은 잉카 제국의 밑거름이었다. 차스키, 전령사인 그들이 있어 신속하게 군대 지휘 명령과 물자, 정보 등을 전달할 수 있었다. 하산길은 오를 때처럼 장엄한 비경을 선사한다. 안데스의 고산 산봉우리와 하얀 구름 너울, 우루밤바 강, 절벽 등이 버스의 사위를 감싼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역 우루밤바 강과 석식
마추픽추에 가지 전 중식을 했던 그 식당에서 석식을 했다. 곁에는 우루밤바 강이 흐른다. 이번에도 창가에 앉아서 강을 보며 먹는다. 페루 잉카의 주식이었던 감자와 고기, 밥을 먹었다. 나는 밥보다 더 아름다운 우루밤바 강의 비경을 섞어 먹는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역 주변상가
석식을 마친 후 잠시 사간을 내어 전통시장을 탐방했다. 물건을 사는 목적만은 아니고 생활상을 보여주는 시장을 돌아보았다. 색상이 화려한 페루의 전통 물건들이 많다. 상가가 수없이 많이 붙어 있다.
* 페루 마추픽추 기차역 출발
기차역으로 이동 후 저녁 7시 오얀타이 탐보행 기차를 탑승했다. 우루밤바의 호텔로 가기 위해서다. 오늘 걸은 걸음이 1만 1천보란다. 마추픽추에서 약 6Km를 걸었다. 어제 쿠스코에서는 1만 5천보, 약 10km 정도 걸었다. 이둠을 밟고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2017년 2월 14일 화요일 페루 우루밤바, 쿠스코, 리마
* 페루 우루밤바 호텔 출발
아침 일찍 새벽 3시 20분에 기상했다. 오늘은 이틀 밤을 품어준 우루밤바의 호텔을 떠난다. 이 호텔에서는 와이파이가 연결되어서 카톡을 주고 받을 수 있다. 한국과는 14시간 늦은 시차다. 그것을 감안하여 두 아들 가족과 문인들과 교류해왔다. 오늘도 버스가 출발하기 전 카톡으로 소식을 듣고 전하기 위해 로비로 나온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따뜻한 불 앞에서 폰을 열어 작업했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호텔 앞에서 흐르는 연못도, 호텔을 둘러 감싸안은 안데스 산줄기도, 잉키의 붉은 지붕도 모두 이별을 아쉬워 하는 순간이다. 이제 쿠스코로 가서 리마행 비행기를 탈 것이다.
* 페루 우루밤바 시가지와 안데스 산맥
안데스 산자락 아래 우루밤바 시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산과 페루, 산과 우우밤바, 산과 쿠스코는 떨어질 수 없는 소중한 끈이다. 고산 설봉이 구름을 만나 하나로 비경을 자아낸다. 우루밤바 시가지는 처연한 자태로 산녘을 채우며 고운 비경을 더하고 있다. 알래스카와 칠레 끝까지 고속도로가 27000Km로 연결되어 있다. 지구 둘레는 47500Km다. 지구 들레의 반 가까운 장엄한 고속도로다.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며 2400m 우르밤바에서 3800m고지를 넘어 3400m의 쿠스코로 갈 것이다.
* 페루 우루밤바 기름진 들녘 농작물
우루밤바는 그 단어 자체의 의미가 비옥한 토양, 비옥한 평원으로 해석된다. 우루밤바 들녘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충실하게 농작물을 잘 보듬어 기르고 있다. 감자, 옥수수, 유채 등이다. 자색감자는 자색꽃을 피우고, 유채꽃은 노란 색 꽃을 피워 들녘은 명화 걸적 그림풍경이다.
* 페루 우루밤바 들녘 동물과 사람
쿠스코와 안데스 산맥 지역에는 아직도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풍습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긴 댕기 머리 차림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는 여인이 종종 보이는 곳이다. 나는 그 장면을 ㅈ금 목격하고 있다. 한 여인이 아담한 키와 댕기머리로 괴나리봇짐을 지고 우루밤바 평원의 둔덕을 넘어가는 길로 오른다. 개 2마리도 따라간다. 페루의 전통관습을 본 뜻깊은 체험이다. 독일의 마리아 레이체라는 여인이 페루의 리스카 지역에 여행 왔다가 반해서 90세까지 노처녀로 살며 페루 유적지를 발굴했다. 라스카 지역의 그림을 글 것을 주로 발굴해 냈다. 아직도 페루는 저렇게 잉카의 사람과 동물과 산과 변하지 않는 관습으로 살고 있으니, 지금도 반하기에 충분한 나라다.
* 페루 쿠스코 안데스산맥 설봉과 농촌풍경
쿠스코로 달려가는 길인데 점점 안데스 산맥의 설봉이 눈앞에 다가온다. 이것이 페루라고, 잌카제국이었다고 외치듯 웅장한 기개다. 안데스의 만년설 설봉을 조망하며 달려간다. 4500m의 만년설 설봉이다. 페루에서 가장 높은 안데스 산은 6700m다. 그 아래에는 광활한 농토가 전개된다. 노란 유채꽃과 밀, 옥수수, 감자 등 농작물이 가득 차 있다. 여기는 남위 12~13도 선이다. 산은 산대로 절경이고, 들녘은 들녘대로 절경인데, 두 절경이 합하여진 이 풍경은 무어라 형언히기 어려운 걸작 명화다. 이런 풍경은 오래도록 버스의 이동과 함께 이어지며 비경을 선사했다. 길은 포장되어 있어서 좋다.
* 페루 쿠스코 3700m 고지 전망대에서 안데스산맥 설봉
비경의 들녘을 달리던 버스가 쿠스코 3700m 고지 전망대에 도칙했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을 눈앞에서 조망한다. 쿠스코 시가지가 산과 산 사이 계곡에서 얼굴을 내민다. 시가지를 둘러싼 안데스 산맥의 고산 설봉은 이곳에서 절창이다. 높고, 길게, 웅장하게 거대한 품사위로 눈을 안고, 구름을 보듬고 늠름한 기상으로 앉아 있다. 이곳 고지에서 적응되는 사람은 3800m의 티티카카 호수를 가 보란다. 티티카카 호수는 60%는 페루 영토이고, 40%는 볼리비아 영토다. 호수 길이가 168Km다. 배가 다니는 가장 고지의 호수다. 티티는 퓨마, 카카는 돌이란 뜻으로 즉 티티카카는 퓨마 돌이란 의미다. 나는 3800m고지에서도 적응된 몸이다. 기회가 되면 팉카카 호수에도 가 볼 것이다.
* 페루 쿠스코 전망대에서 만난 원주민들
전망대 광장에는 원주민 인디오 상인들이 물건을 판다. 가족들이 나와서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기도 한다. 여행객이 함께 사진을 찍으며 돈을 준다. 저들은 생계수단이다. 야마도 가족 곁에 있다. 들녘은 포장도로가 잘 나 있고 농장이 파랗게 전개되어 아름다운 풍경이다. 페루의 고지 사람들의 모습과 생활풍습을 보는 소중한 체험이다.
* 페루 쿠스코 전망대에서 본 들녘풍경
전망대 주변은 산자라가이다가, 둔덕이다가, 평원이다가 쿠스코의 들녘은 참으로 여러 가지의 많은 비경을 선사한다. 파란 들녘 풍경이 지금 여름이라고 큰 함성이다. 한국은 겨울인데 여기는 지금 여름이다. 양들도 풀을 뜯으며 고운 풍경을 더해준다. 전망대를 떠나 친체로 마을을 지난다. 이곳에 공항이 들어올 예정이란다. 그러면 쿠스코 공항이 조금 영향을 받을 것이란다. 이제 차츰 3400m의 쿠스코로 점점 내려간다. 현지 교포 남자 가이드는 어제 마추픽추에서 개무시를 당했다고 한다. 이곳 개는 잘 차려입은 사람은 안 무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람은 물고 짖는단다. 그런데 마추픽추에서 개가 가이드를 향해 짖고 물려고 하더란다. 참으로 웃으워서 버스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 페루 쿠스코 변두리 마을과 시장풍경
드디어 쿠스크 외곽지대 변두리 마을에 진입했다. 이제 쿠스코 도심을 거쳐 쿠스코 공항으로 이동한다. 도심 시가지에 레일이 있다. 예전에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던 철로란다. 산길이 험해서 지금은 운행이 정지 되었단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도 우리처럼 우루밤바에 가서 자고 오얀타이탐보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미추픽추에 간다. 2800m의 우루밤바에서 점점 고도를 높이며 3400m의 쿠스코에 온 것이다. 산자락에도 집들이 많다. 마을에는 시장이 우리 나라의 재래시장 격으로 열리고 있다. 과일, 채소, 생활용품 등 다양한 가게와 시장이 스쳐지나간다. 정겨운 모습이다.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은 정치를 잘 했단다. 치안을 잡았단다. 개헌해서 5년에 다시 5년을 더하여 10년을 연임했단다. 다시 또 5년을 연임하려고 부정을 저질러 찍혀서 늘러나 칠레로 망명하여 이주했다. 후지모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단다. 그 새마을 운동으로 페루를 부흥시켰다. 페루의 대통령은 5년 단임 후 1회 쉬고 다시 5년 연임이 가능하다. 그런데 후지모리는 3회를 연속연임하다가 재팜을 받았다. 여행 중에 북한의 김정남이 암살 당햇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에 기사가 떴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지시로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참 서글픈 한반도의 뉴스를 먼 타국에서 듣는다. 페루 쿠스코 변두리 마을과 시장은 사람들의 분주한 왕래로 활기차다.
* 페루 쿠스코 시가지 산마을 풍경
안데스 산맥의 낮은 줄기는 이미 사람들에게 등줄기를 내어주었다. 산 정상까지 집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어쩌겠는가. 안데스 산자락에서 코카차 나무를 재배하여 코카차를 마시는 산마을 사람들이다. 그런데 외부 사람들은 코카차를 사도 쿠스코 공항에서 통과가 안 된단다. 그들만의 독특한 차이어서 그런가보다. 코카는 코카 콜라의 원료이기도 하다. 산이 사람의 영토인 곳, 산과 인간이 공존해야만 하는 운명인 곳, 참으로 고운 진풍경이다.
* 페루 쿠스코 시가지 피차쿠텍왕 동상
쿠스코 시가지에 잉카제국의 9대 왕 파차쿠텍 동상이 있다.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며 거대하다. 둥근 돌탑 위에 긴 창을 들고 당당한 기세로 서 있다. 잉카 사람의 아담한 용모다. 파차쿠텍은 페루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잉카제국의 왕이다.
* 페루 쿠스코 시가지 산마르틴과 시몬볼리비아의 동상
쿠스코 시가지 도심에 두 사람의 동상이 마주보고 서 있다. 오른쪽 남자는 산마르틴 동상이고, 왼쪽 남자는 시몬볼리바르 동상이다. 둘이 회담하는 장면이다. 불리비아 국가의 지명도 이 시몬볼리바르에게서 지어진 이름이다. 산마르틴(1778 ~1850년)은 아르헨티나 사람으로 독립운동가다. 남아메리카 제국의 독립 운동 지도자. 독립 혁명군을 지휘하여 아르헨티나ㆍ칠레ㆍ페루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는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레를 해방시킨 후, 페루의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페루의 보호자'로 불리게 되었다. 산마르틴에 대하여 백고사전의 내용은 아래에 자세히 옮겨 싣는다.
1806년과 1807년, 라플라타(지금의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크리오요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을 몰아내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특히 자유무역을 지향하는 크리오요들은 스페인 상인의 독점을 지지했던 라플라타 부왕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스페인 본국에서 프랑스의 침공과 나폴레옹의 왕위찬탈 등이 일어나 정치적 공백이 생겼다. 이 틈을 타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은 1810년 라플라타의 부왕을 추방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을 장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의 지도자들은 라플라타 전 지역을 단일국가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반면에 그 이외의 지역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통치하고 있던 지역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려고 1816년 투쿠만에서 모여, 스페인으로부터의 완전 독립과 '라플라타 연합주'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러한 두 세력 간의 갈등은 아르헨티나의 정치사에 중앙집권주의자(부에노스아이레스 지역)와 연방주의자(내륙 13개 주) 간의 대립을 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앙집권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라플라타 부왕령 지역은 혼돈에 빠졌다. 이때 나타난 인물이 바로 '호세 데 산 마르틴'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산 마르틴은 어렸을 때부터 스페인에서 부모와 살면서 스페인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스페인 군대의 장교로 나폴레옹 전쟁과 아프리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는 라플라타 부왕령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페루와 알토 페루(지금의 볼리비아), 파라과이 등지에 남아 있던 스페인군과의 일전이 불가피했다. 페루의 공략에 고심하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는 1812년에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산 마르틴에게 이 위업을 맡겼다. 스페인에 있을 때 스페인군의 일원으로서 프랑스군과 싸운 적이 있었던 39세의 산 마르틴은, 스페인의 군대가 페루에 남아 있는 한 독립이 달성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에 먼저 칠레에 있는 스페인군을 남측에서부터 기습,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산 마르틴은 칠레의 접경지역에서 무기를 모으고 병력을 훈련시켰다. 그는 군사력 강화를 위해 특별세를 징수했고 병기창, 화약공장, 섬유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첩자 1명을 칠레에 보내, 아콩카과 산 정상 남측의 원주민 땅부터 공격할 것이라는 허위정보를 유포시켜서 스페인군을 혼란에 빠트렸다. 원주민들은 이 소문을 듣고 즉각 스페인군에 알렸다.
1817년 1월, 산 마르틴은 약 5,000명의 군대와 1,6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안데스산맥을 넘는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는 이 강행군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 판단하여 석공들, 빵 굽는 사람들, 물을 실은 마차들까지 동행시켰다. 산 마르틴의 군대는 남아메리카의 최고봉인 아콩카과 산을 통과하면서 바람, 얼음, 화산재와 맞서고, 또 한편으로는 고산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 강행군을 해야 했다. 무사히 산맥을 넘은 산 마르틴 군대는 마침내 새벽녘에 샤카부코에서 스페인군과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 1818년에 산 마르틴은 마이푸 전투에서 승리하여 칠레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의 시민들은 산 마르틴을 해방자로서 환영하고 칠레정부의 수반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이를 칠레 독립의 지도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양보하고, 자신의 최종 목표인 페루의 해방을 준비했다.
스페인의 관심이 비교적 적었던 라플라타 강 유역과는 달리, 페루 부왕령은 스페인 경제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때문에 스페인의 강력한 군대가 페루 부왕령에 버티고 있었다. 아울러 많은 수의 병력이 아타카마 사막을 지나 산티아고 북부에서 리마까지 행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산 마르틴은 칠레에서 페루까지 바다를 통해서 침입하기로 했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배를 사들이고 바다에서는 스페인 선박을 나포하면서 전력을 보강해나갔다. 영국과 북아메리카의 상인도 앞으로 좋은 조건으로 장사를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1820년, 드디어 산 마르틴이 지휘하는 함대가 칠레의 발파라이소 항을 떠나, 페루의 카야오 항 남쪽에 있던 피스코 항에 상륙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바로 리마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보다는 군사작전과 협상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가능한 한 무력충돌을 피하려 했다. 이는 아직도 페루가 스페인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고, 일찍이 페루에서 발생했던 무력 봉기가 스페인군에게 무참하게 진압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 마르틴의 군대는 적당한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스페인 본국에서 왕정체제에 반기를 든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이 발생했다. 더욱이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스페인 함대의 출항이 반란군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페루 리마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폭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마르틴은 이 기회를 틈타 1821년 리마로 진격하여 페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페루 부왕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산 마르틴의 군대는 페루의 일부 지역만을 장악했다.
'페루의 보호자'의 칭호를 받은 산 마르틴은 광산에서 원주민의 강제노동 폐지, 교역협정 체결, 금과 은의 수출 금지 등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해 신생 페루 독립국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확립했다. 그러나 페루의 지배층은 원주민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광산이나 대농장을 이탈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토지소유에 기반을 둔 식민지 체제는 와해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 마르틴은 이러한 식민지 기득권 세력의 뿌리 깊은 인식에 실망했다. 그는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볼리바르의 군사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과야킬에서 볼리바르와 만났다.
1822년, 볼리바르와 산 마르틴은 에콰도르의 과야킬에서 남미지역의 독립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었던 산 마르틴은 라틴아메리카의 독립만이 목표였고,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 나라가 '행운을 가진 한 명의 군인'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고, 강력한 지배자가 아닌 강력한 정부를 원했다. 이에 대해 볼리바르는 인종적인 불평등이 횡행하는 아메리카 대륙에 '효과적인 전제주의', 즉 법적인 평등을 강제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강력한 행정기관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비록 그들이 자유를 말하고 또 자유의 보장을 말하지만, 그것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하층계급의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에 있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지위만을 높이기 위해서 평등을 원한다"라고 말하면서 '지위, 직업, 부에 입각한 귀족정치'에 반대했다.
회담이 끝난 후, 산 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나는 내 과업을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라는 말을 남기고 아르헨티나 멘도사의 농장에서 은거하다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다시 돌아가서는 일체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후 1824년 딸과 함께 영국과 벨기에에서 살다가 자신이 해방시켰던 라틴아메리카에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한 채, 72세의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역사적인 과야킬 회담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회담은 라틴아메리카 전체를 하나의 나라로 묶는 강력한 대통령제 실시를 주장한 볼리바르와, 대통령제를 시행하기에는 아직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상황이 맞지 않다고 판단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한 산 마르틴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끝났다. 그 후 볼리바르는 산 마르틴의 당부에 따라 페루의 완전 독립을 위해 더욱 매진했다. 결국 1824년 12월,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페루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독립시켰다. 그리고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와 함께 알토 페루(Alto Perú, '높은 페루'라는 의미로 지금의 '볼리비아'에 해당한다)를 해방시켰다. 여기에서도 볼리바르는 페루와 알토 페루를 하나로 묶는 대 페루국 구상을 제시했으나, 결국 알토 페루의 크리오요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알토 페루는 볼리바르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라 부르게 되었다. 시몬볼리바르에 대해서도 백과사전의 내용을 아래에옮겨 싣는다.
시몬볼리바르는 아메리카의 독립운동지도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고 이를 합한 대 콜롬비아공화국과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했다. 에스파냐 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파나마회의를 개최했고 이는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해방자(el Liberator) 또는 국부로 숭앙되고 있다. 카라카스의 부유한 에스파냐 가계(家系)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와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811년 베네수엘라를, 1819년 뉴그라나다(New Granada:콜롬비아)를, 그리고 1822년 키토(Quito:에콰도르)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고, 3국을 합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823년 페루의 독립운동가 산 마르틴의 요청을 받고 페루로 건너가 1824년 페루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여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또 페루 북부(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부하 수크레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1825년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826년 에스파냐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의도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이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 가서 실의와 곤궁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아주 우연히 버스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남미의 영웅 두 사람의 동상을 만나고, 그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 페루 쿠스코 공항 출발
페루 쿠스코 공항은 3400m고지의 공항이다. 오늘은 쾌청한 날씨다. 지난번에 여기 도착하던 날에도 날씨가 좋았는데 오늘도 참 좋다. 10시 10분 LA2004, 란 항공 페루 리마행 비행기를 탑승한다. 11시 40분에 페루 리마에 도착예정이다. 1시간 30분 소요된다. 고산증은 이제 적응되어 모두들 괜찮다. 안데스 산맥이 바로 곁에서 산정을 드러내는 형상을 보여주는 우람한 공항이다.
* 페루 리마 공항 도착
페루의 리마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30도의 기온으로 덥다. 옷을 바꿔 입었다. 선선하던 쿠스코와는 다른 기후로 여름옷을 입었다. 이제 리마 아르마스 광장으로 간다.
* 페루 리마 시가지
리마는 페루의 수도다.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에 가서 대성당, 대통령궁, 시청사 등을 보고 중식할 것이다. 리마는 페루 중앙부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고도(古都)다. 적도 부근, 연안 사막지대에 위치하나 페루 해류의 영향을 받아 기온은 그리 높지 않다. 1535년 에스파냐인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제왕의 도읍으로 건설하였다. 19세기 초 남아메리카 각국이 에스파냐부터 독립할 때까지 남아메리카에 있는 에스파냐 영토 전체의 주도가 되었다. 리마는 지상철이 25Km 구간만 있다. 현재는 지하철 공사가 진행 중이다. 교통이 보잡한 도시다. 1721년 독립한 국가다. 구마나이라는 새의 똥을 비료로 수출하여 부자가 되었단다. 그 만큼 새가 많은 곳이다. 지금은 자원이 풍부한데도 3대에 걸쳐 대통령들 부정으로 못 사는 나라가 되었단다. 더워서 반팔 티셔츠로 바꿔 입었다. 페루와 칠레가 접해있는데 육지는 페루 영토이고, 남부 바다는 칠레 영토이었다. 현재는 칠레에서 다시 돌려받아 페루의 바다가 되었다. 페루보다 칠레가 더 잘 산다. 페루 경찰차는 쌍용차를 2500대 수입해서 사용한다. 하이패스 통행료제도를 한국에서 본 떠서 설치했다. 한국의 칩을 사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리마는 부왕령, 즉 왕들의 도시이어서 조각 설치물이 많다. 높은 첨탑, 동상들이 시가지에 많이 보인다. 페루는 지진이 많은 영토다. 수도인데도 그 대비책이 허술하다. 육안으로 본 리마 시가지는 아직 발전된 모습은 아니다. 고풍스런 낭만이 깃든 소박한 풍경이다. 그러나 신도시에 가면 전혀 다를 것이다.
*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 꽃
페루 리마 아르마스Lima Plaza de Armas 광장에 버스가 들어 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잔디 위에 심어놓은 꽃들이었다. 노란 색과 주황 색의 꽃들이 물결 무늬로 흐르고 있다. 그 주변은 야자수가 멋진 경관을 자아낸다. 푸르고 낭만적인 이 광장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리마 아르마스 광장은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건축물로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리마 구 시가지이며 이곳에는 대성당, 대통령궁, 시청사 등이 있다. 광장도 상당히 크고 식민지 시대의 유럽풍 건축물들로 아름답다. 원래 아르마스 광장은 무기광장이었다. 스페인 말로 아르마스는 무기란 뜻이다. 기원 전부터 침략 받아와서 중앙광장에 무기를 설치했었다. 아르마스 광장을 볼 때 정면의 북쪽 회색 건물은 대통령궁이다. 대통령궁의 오른편 동쪽 건물은 대성당이고, 왼쪽 노란색 건물에 국기가 게양된 곳은 시청사다. 광장을 한 한 바퀴 돌고 버스에서 하차하여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 대성당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의 대성당Catedral de Lima은 잉카 시대의 비라코차 신전 자리에 세워진 교회다. 100년에 걸쳐 지었다. 은 300톤을 부어 만든 제단은 카톨릭 교단과 정복자들의 탐욕을 드러낸다. 대성당을 등지고 왼쪽에 서 있는 교회는 라콤파니아데헤수스 교회다. 잉카 11대 황제 우아이나 카팍의 궁전을 부수고 세웠다. 리마에서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인 대성당은 페루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다. 스페인 용병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40년 페루를 정복한 후 성당과 교회, 광장을 세웠다. 이곳 대성당은 피사로가 직접 주춧돌을 놓았다. 당시 스페인의 주 양식이던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이다. 몇 차례의 대지진으로 피해을 입은 후 1755년 최종적으로 복구되었다. 아르마스 광장의 동쪽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규모다. 대성당은 당시 스페인 사람들의 가톨릭 신앙심을 그대로 반영했다.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통령 궁에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대담한 조각과 장식들로 그 위용이 대단하다. 대성당 앞 넓은 계단은 광장과 함께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다. 성당 내부에는 피사로의 초상화와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두 개의 종탑이 양쪽으로 오롯하고 중앙에는 아치형 입장 문이 있다. 야자수와 함께 매우 아름다운 정경이다.
*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 대통령궁
페루 대통령궁Palacio de Gobierno은 아르마스 광장 중앙 북쪽에 위치해 있다. 최초의 대통령 궁은 건축에 관심이 많았던 피사로가 직접 설계했다. 그 때문에 피사로 궁(Casa de Pizarro)이라는 별칭을 갖기도 했다. 이후 현재의 건물은 1937년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페루의 정부 청사 역할을 하고 있다. 궁 꼭대기에서 페루 국기가 펄럭인다. 날카로운 검은 철창이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은 시민들의 평화로운 휴식처이지만 대통령궁 앞에는 총칼을 차고 경호를 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잇다. 매일 정오에는 근위병 교대식이 있다. 궁을 드나드는 고위 간부와 대통령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대통령궁은 색상이 화려하지도 않고, 규모가 크지도 않고 소박하고 아담하다.
*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 시청사
아르마스 광장의 시창사 건물이 노란 색으로 아름답다. 하얀 색 장식과 검은 색 창살이 노란 색 건물과 조화를 이뤄 동화 속 궁전 같은 느낌이다. 건물 중앙에는 페루 국기가 꽂혀 있다. 페루의 국기는 빨강, 하양, ·빨강이 세로로 배치되어 있다. 관공서용에는 하얀 색 띠에 문장이 들어 있다. 민간용 국기에는 문장이 들어 있지 않은데 모두 공식 국기다. 최초의 국기인 1820년대의 것은 파랑 바탕에 노랑 태양이 들어 있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후 몇 년간 빨강과 하양을 기본으로 하여 수차례 형태가 바뀌었다. 그러다가 1825년 독립하여 국민의회가 시작될 때 현재의 새로운 국기를 제정하였다. 페루 독립의 영웅인 아르헨티나 장군 호세 산 마르틴의 군대가 스페인에 맞서기 위해 피스코에 상륙했을 때, 붉은 날개와 흰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새가 갑자기 날아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빨강과 하양은 이 새에서 유래한다. 시청사 1층은 아치형 문들이 열을 지어 있다. 주변은 야자수와 광장의 고운 꽃들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 페루 리마 아르마스 광장 주변풍경
아르마스 광장 주변에는 카페, 상가, 식당 등이 있고 매우 번화한 거리다. 마부가 관광용 말마차를 몰며 광장 주변을 돌아 중세의 환상을 재현시킨다. 경찰차도 주차되어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서 치안에 대한 준비태세로 보인다. 리마의 심장처럼 생기 있고 활기 넘치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 페루 리마 시가지
페루 리마는 서울의 4배 크기다. 인구는 1100만 명이다. 중남미에서는 인구 1천만 명 넘는 도시가 많지 않다. 라미는 큰 도시다. 페루는 기원전 8천년 전부터 농경사회가 시작되었다. 쿠스코는 원주민이 많이 산다. 리마는 혼혈족이 많이 산다. 쿠스코의 사람들과 리마의 사람들이 조금 다르다. 수탈의 역사라서 돈이 생기면 다 쓰며 즐긴다. 칠레의 어느 갑부 아버지가 유언을 했는데 돈을 쓸 수 있는 만큼 쓰며 즐기라고 했단다. 침략으로 빼았겨 본 아픔이 서린 민족의 서러운 이야기다. 봉급 받으면 다 쓰고 즐기는 풍습이다. 페루는 인종, 계급 차병이 없다. 지상낙원이라고 가이드는 말한다. 니금 우리는 중식식당으로 가고 있다. 중식 후 신시가로 갈 것이다. 그리스 신전 양식으로 지은 법원 건물도 지난다. 앞에는 투우 동상이 있다. 도로변에 높고 큰 동상도 있다. 오늘이 '우정의 날'이란다. 그래서 사람들이 리마 시가지에 많이 나왔다. 최저 임금이 30만원 규정의 월급이다. 거리의 상인들이 많다. 돋자리, 부채, 꽃, 풍선 등을 들고 차량 사이를 걸으며 사라고 권한다. 부촌 마을을 지나간다. 노른자 땅이란다. 깨끗하고 가로수가 아름답다. 페루는 법은 잘 되어 있는데 의료, 교육, 병원 등 시설이 없단다. 교육제도는 초등 6년, 중고 5년으로 11년 의무교육이다. 하지만 학비는 무료인데 공립 학교가 없다. 그래서 사립보낸다. 남미는 사후에 매장 문화다. 리마는 화장을 하기도 한다. 20대에 아기를 낳는다. 결혼하지 않고 아기만 생산하다. 예식장이 없다. 성당에서 처녀, 총각 증명을 받아 결혼식을 한다. 이런저런 페루의 이야기를 들으며 식당에 왔다.
* 페루 리마 중식식당 과일
중식은 한식으로 먹었다. 된장과 순두부 식단으로 좋다. 후식은 페루의 그라다비아라는 과일을 먹었다. 과일의 속안에 까만 씨앗이 박혀 있다. 맛은 좀 이상하지만, 나는 맛있게 잘 먹었다. 못 먹는 일행도 있었다.
* 페루 리마 해변 신시가지
리마의 해변 신시가지로 간다. 페루의 시골마을은 45세가 되면 마을 잔치한다. 어른 대접 받는 것이다. 평균 수명은 집계가 안 나와 모른단다. 시간 약속을 안 지키는 문화다. 집에 초대 받아도 1시간쯤늦게 가야 한다. 보통 약속시간보다 1시간 늦는 관습이다. 세계테마 기행으로 연예들이 페루 리마에 다녀간 후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온단다. 얼마 전 유희열, 이적, 윤상 세 남자가 나오는 것을 나도 봤다. 리마의 해변 신시가지는 고층 건물이 많다. 이곳 주변에는 센트럴 공원, 라 르꼬마르, 사랑의 공원 등이 있다. 리마 도심의 구시가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바다와 공원과 고층 건물들이 만나 현대풍의 낭만으로 비경으로 이룬다.
* 페루 리마 사랑의 공원
리마 신시가지 해변 사랑의 공원the Lover's Park, Miraflores , Parque del Amor은 두 남녀가 포옹며 키스하는 연인의 동상이 크게 세워져 있다. 붉은 알몸으로 키스하는 동상은 사랑의 공원을 상징하는 마스코트다. 기막힌 풍경의 명소다. 동상 앞에는 바다가 있고, 해변 산책길에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구엘공원처럼 타일로 장식한 아름다운 조형물도 있다. 사랑의 공원은 조경이 아름답고, 바다와 접하여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아주 좋은 공간이다. 곳곳에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고원 중앙에서 키스하는 연인상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저토록 열렬하게 사랑하는 두 남녀의 키스가 이곳을 찾는 연인들에게 사랑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나이 든 나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주변에는 여러 가지 꽃들과 멋진 조경으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 페루 리마 신시가지 센트럴 파크
사랑의 공원에서 산책로를 따라 걸어서 신시가지 도로로 지나 센트럴 파크로 갔다.
리마의 신시가지 미라플로레스 Miraflores 지구의 복합쇼핑몰이 있다. 리마 센트로 지구가 리마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면, 라미의 미라플로레스 지구는 리마의 현재를 보여 주는 곳이다. 이곳은 리마의 중요한 사회적 중심가로서 리마 센트로 지구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아 택시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리마의 제2의 번화가다. 신시가지 근처에는 카페, 상가, 공원, 바다 등이 있어 아파트가 비싸다. 고급 주택가인 미라플로레스 신시가지는백인이 많이 거주한다. 리마 센트로 지구에 비해 치안 유지가 잘 되어 있다. 레스토랑과 쇼핑가를 이용하기에 불편이 없다. 우리 부부도 쇼핑센터에 가서 페루 커피를 샀다. 해변 광장에는 카페와 식당 등 상가가 많다. 젊은이들이 많이 왕래한다. 바다를 조망하는 건물도 있어 올라가 보았다. 이곳은 모두가 현대풍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 페루 리마 신시가지 바다와 해변도로
리마 신시가지는 태평양 바다와 접해 있다. 칙칙한 리마 중심의 시가지와는 다른 비경을 선사한다. 절벽 아래로 해변도로가 길게 바다를 감싸고 있다. 바다 물빛은 탁하여서 아름답지 않지만 파도치는 풍경은 아름답다. 사랑의 공원과 센트럴 파크 등을 탐방하고 해안도로를 달려간다. 이제 페루의 여정은 이것으로 마무리 짓고 칠레로 가기 위해 리마 공항으로 간다.
* 페루 리마 시가지 그림과 거리 상인
리마 공항으로 이동하는 중에 도로에서 풍선을 파는 여인을 보았다. 저 여인 말고도 여러 곳에서 거리의 상인을 보았다. 리마에 오니 차도에서 물건을 들고 다니며 판매하는 상인들이 많다. 어른 뿐만 아니고 어린 아이들도 있다. 왜 저렇게 위험한 행위를 단속하지 않을까, 이상했다. 어느 도로변에서는 벽면 전체에 그려진 긴 그림을 보았다. 아마 페루 리마의 이야기를 도란거리는 정경이다. 리마 강 다리를 건너서 점점 공항 가까이로 간다.
* 페루 리마 공항 출발
페루 리마에서 칠레 산티아고 공항으로 간다. 공항 근처의 육교에 비행기 모형을 달아놓아 이곳이 공항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리마 공항은 주변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코카콜라 광고도 크게 하고, 파란 잔디가 고운 풍경이다. 공항 안 면세점 상가에 마추픽추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그 마추픽추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니, 정말 내가 지금 마추픽추에 서서 찍은 사진 같다. 19:13분 칠레 산티아고행 LA633, 란 항공 비행기를 탑승한다.
* 칠레 산티아고 공항 도착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00:40분에 도착했다. 도둑이 기승하는 곳이라고 조심하란다. 공항, 버스 안, 등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도둑을 맞는단다. 버스 안에 들어와 핸드폰을 꺼내 간 사건이 있었단다. 가방을 채 가기도 한단다. 주의 또 주의해야 한단다. 호텔까지는 30분 소요된다. 내일은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투어를 마치고 칠레의 발파라이소 항구에 가서 크루즈 배를 오후 3시까지 승선해야 한다. 그리고 크루즈 배는 오후 5시 출항이다.
2017년 2월 15일 수요일 칠레 산티아고,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크루즈 배 승선
* 칠레 산티아고 호텔
호텔의 뒤에는 산이 있고, 수영장도 있다. 조식 뷔페 식당이 이곳 수영장 바로 앞에 있다. 경치도 좋고, 시설도 좋은 호텔이다. 여기는 칠레 산티아고의 호텔이다.
* 칠레 산티아고 공영방송국과 시가지 풍경
오늘은 칠레Chile의 산티아고Santiago를 탐방한다. 대통령궁, 아르마스 광장, 대성당 등을 볼 예정이다. 칠레는 남아메리카의 남서쪽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나라다. 인구는 1700만 명이다. 수도는 산티아고이며 600만 명이 거주한다. 국토의 총 면적은 750,000㎢로 한반도의 3.5배다. 해안선의 길이가 6,435km로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이 특징다. 위도에 따라 기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북부는 건조하고, 남부는 한랭하다. 전인구의 4분의 3이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당한 중부지역에 거주하고 있다.지진다발 국가다. 언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가톨릭 종교가 대부분이다. 광산과 수산, 임산자원이 풍부하다. 세계 최데의 구리 수출국으로 세계 매장량의 26%다. 중남미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대부분의 국민이 스페인·독일·이탈리아 등 서구의 사회관습과 풍속을 가지고 있으며, 예술활동이 활발하며 남미에서 교육수준이 매우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1962년 6월 12일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1966년 11월 7일에 주칠레 한국대사관이, 1969년 11월 25일에 주한 칠레대사관이 개설되었다. 2005년 주 칠레 상주공관이 개설되어 있다.
호텔을 출발하여 시가지로 가는데 산티아고 공영방송국을 지나간다. 남산으로 부르는 산자락 아래에 있다. 남산 산정에는 하얀 예수상이 있다. 한국의 청계천 같은 마천강을 지나 간다. 안데스 산에서부터 오는 물이다. 칠레는 홍어를 많이 잡는다. 한국에 많이 수출한다. 와인 생산량도 많다. 칠레 와인은 좀 스위트하다. 한인마을을 지난다. 소박한 거리에 남다른 정감이 서려 있다. 강다리를 건너 간다. 강 옆에 공원이 있다. 강 건너에는 재래시장이 잇다. 시내 버스가 한국에서 도입해온 것으로 509번이라는 숫자를 그냥 달고 다닌다. 서울역 모양의 건물이 보이는데, 현재는 문화센터다. 지붕을 모두 구리로 지었다. 그 만큼 칠레의 구리 생산이 많다는 대목이다. 우리는 지금 대통령궁으로 가고 있다.
*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 근무교대식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은 모네다 궁전Palacio de la Moneda이라 부른다. 쿠데타의 역사를 품은 대통령 궁, 모네다 궁이다. 칠레의 대통령 궁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70년, 남아메리카에서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사회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하지만 1973년에 이에 반발한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아옌데는 이곳 모네다 궁전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쿠데타의 수장이었던 피노체트는 승승장구했고 마지막 보루였던 모네다 궁전이 화염에 휩싸이자 그 안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옌데는 항복을 할 바에야 죽음을 택하겠다고 하며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자살했다. 이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독재 정권이 17년 동안 이어졌고 그 기간은 어두운 억압과 압제의 기억과 함께 칠레의 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1805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원래 조폐국으로 사용되었다. 모네다(moneda)는 돈을 의미하는 스페인 어다. 1846년부터 대통령 관저로 이용되기 시작했으며 현재의 모네다 궁전 근처로는 많은 경비병들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다. 모네다 궁전 너머로는 헌법 광장(Plaza de la Constitución)이 있으며 광장 한 켠에 아옌데의 동상이 있다. 슬픈 역사를 품고 있는 대통령궁에 왔는데 마침 근위병 교대식 시간이어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했다. 모네다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은 이틀에 한 번씩 오전 10시부터 약 30분간 근위병 교대식이 펼쳐진다. 소규모 악단의 음악과 함께 절도 있는 동작의 근위병들이 행진을 하며 경계 임무를 인수하는 모습이다. 악대와 기마병과 근위병들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대통령궁의 정원을 채운다. 검은 개도 함께 들어온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 곳곳에서 관람한다. 대통령궁 옥상에는 칠레 국기가 펄럭인다.
* 칠레 산티아고 대통령궁 주변 건물
대통령궁 주변에는 시청사 등 국가 주요업무 건물들이 있다. 높고 웅장한 건물들이 궁을 에워싸고 있다. 한국의 명동과 같은 주변도로에는 차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한다.
* 칠레 산티아고 문화센터
대통령궁 주변에 있는 문화센터에 갔다. 지하로 들어가서 입장했다. 이곳은 여러 가지를 전시하고 있다. 시간 관계로 많이는 볼 수 없어 간단히 보았다. 복도에 역사 등의 전시물을 보았다.
* 칠레 산티아고 시가지 거리 풍경
산티아고(Santiago)는 칠레의 수도다. 칠레 중앙부 안데스 산맥과 해안산맥 사이의 분지 위에 있다. 높이 450~650m의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1541년 에스파냐의 페드로 데 발디비아에 의해 건설되었다. 최초의 요새가 산타루시아 언덕에 구축되었다. 이후, 지진, 홍수, 화재 등의 자연 재해로 파괴되었으나 기후가 양호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언제나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칠레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제조업체도 집중되어 있다. 섬유를 비롯하여 식품가공·피혁·피혁제품·화학약품·철강·기계·전기기구 등의 공장이 있다. 주변의 비옥한 중앙저지에서 산출되는 곡물·포도·채소 등을 집산한다. 시가의 중심부에는 근대적인 고층건물이 많다. 1647년 파괴되었다가 1748년에 재건되었다. 남아메리카 최대를 자랑하는 국립도서관, 국회의사당,·관청,·대통령관저,·국립박물관,·칠레대학, 가톨릭대학, 시립극장,·금융기관 등이 있다. 산티아고 시가지는 매우 웅장하고 깊은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다. 거리에 동상이 아름다운 조형으로 세워져 있다. 도심에 나무도 많아서 상큼하다. 말을 타고 순찰하는경찰도 있다.
* 칠레 산티아고 은행과 상가
칠레 산티아고의 역사 깊은 은행을 탐방했다. 그런데 근무하는 모습을 사진 찍으면 안 된다. 돈이 오가는 기관이어서 그렇다. 나의 남편은 우리은행 지점장을 역임했다. 그래서 남다를게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은행 건물을 지나자 실내 상가가 나온다. 화려하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많다.
* 칠레 산티아고 공원과 시가지
칠레 산티아고의 공원은 매우 짙푸른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휴식하는 시민들도 많다. 산티아고 시가지는 도로 바닥에서부터 매우 고풍스럽다. 시가지 건물들도 중세의 향기를 머금고 낭만적인 분위기다.
* 칠레 아르마스광장 원주민 동상
칠레에서도 페루 리마의 아르마스 광장과 동일한 이름의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Santiago Plaza de Armas을 탐방한다. 산티아고 시민들의 중앙 광장이다. 아르마스 광장은 산티아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장 주변으로 대성당, 중앙 우체국, 시청사 등 도시의 주요 건물들이 모여 있다. 원주민 동상도 있고,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많은 나무들로 녹음이 우거지고 그 아래의 벤치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이런 것들이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칠레의 모습이다. 저녁이 되면 광장 한 켠에서는 거리 예술가의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광장 공원 옆의 파세오 아우모다 거리(Paseo Ahumoda)는 보행자 전용 도로로 수많은 상점과 은행, 레스토랑 등이 밀집해 있다.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높은 조형물 위에 두상만 매달린 원주민 젊은 지도자 알론소 라우타로Alonso Lautaro 동상이다. 그의 동상과 대각선 방향으로는 그가 소년이었을 때인 1541년 마푸체족을 점령해서 산티아고의 기초를 닦은 스페인 페드로 데 발디비아(Pedro de Valdivia)의 동상이 있다. 칠레 원주민 마푸체 족의 알론소 라우타로는 유년기에 스페인 군에게 잡혀 칠레 총독이었던 발디비아의 시종이 되었다. 그는 발디비아의 말을 보살피고, 말타기 등 스페인의 전술을 체득했다. 스페인이 자신의 종족인 마푸체 족을 학대하자. 1550년 발디비아 군에게 대항하였다. 결국 1554년 발디비아 총독을 잡아 죽였다. 그로인해 1557년 원주민 알론소 라우타로도 스페인 군에게 잡혀 잔인하게 죽었다. 그의 용맹함이 두상에 드러나 있다. 목이 잘린 원주민 남자의 두싱만 아슬하게 걸려있다.
* 칠레 아르마스광장 대성당
칠레 신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는 산티아고 대성당Catedral de Santiago Chile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르마스 광장은 산티아고의 중심이며 칠레의 심장과도 같은 광장이다. 스페인 군이 칠레 지역을 점령하고 처음으로 시작한 일은 도시의 중앙에 성당을 짓는 것이었다. 모든 침략은 그리스도 교의 전도를 명분으로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점령지의 심장에 십자가를 드높이 세우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산티아고의 중심에 있는 이 대성당은 1541년 스페인 침략자 발디비아가 산티아고를 건설하면서 서운 성당이다. 1558년에 완공되었다. 그 규모가 칠레에서 가장 크다. 성당 안에는 300년이 넘은 은 램프가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신대륙에 풍부하게 채취되었던 은을 이용하여 20kg의 초대형 램프를 만든 것이다. 내부에도 들어가서 둘러 보았다. 외부와 함께 상당히 웅장하다. 스페인의 잔재로 유럽풍 성당이다. 그것이 칠레에게는 슬픈 역사인데 잘 보존되어 오늘날은 세계인을 부르는 명소가 되었다.
* 칠레 아르마스광장 중앙우체국
칠레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서 꼭 살펴봐야 할 것 증 하나가 중앙우체국 건물이다. 대성당 바로 옆에 있다. 매우 아름다운 외형으로 오래 전에 건축된 건물이다.
* 칠레 아르마스광장 옛 산티아고 동판
이것은 칠레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의 중앙우체국을 지나 나오는 중에 광장 길바닥에서 보았다. 칠레의 산티아고의 예전 모습을 새겨놓은 칠레 역사판 동판이다.
* 칠레 산티아고 아르마스광장 역사박물관
칠레의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에서 본 건물이다. 중앙우체국과 붙어 있다. 그런데 건축양식은 전혀 다르다. 색상도 노란 색으로 흰색의 우체국 건물과는 다르다. 아름다운 역사박물관이다.
* 칠레 산티아고 아르마스광장 발디비아 기마상
칠레 산티아고 아르마스 광장 한켠에 스페인 군인 발디비아 기마상이 있다. 울창한 나무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 광장의 대각선 공잔에는 이 사람과는 악연이었던 칠레 원주민 알론소 라우타로의 흉칙스런 두상이 걸려 있다. 빌디비아는 1541년 칠레를 정복한 사람이며 산티아고를 건설한 사람이다. 원주민에게 1554년에 먼저 처형된 사람이다. 그리고 스페인에게 원주민도 1557년에 처형되었다. 참 슬픈 악연인데 같은 아르마스 광장에 동상으로 둘이 서 있다. 어찌보면 산티아고를 건설했으니 칠레에게 지금 와서는 좋은 일을 했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 칠레 산티아고 시가지
칠레 산티아고는 수도이며 매우 발달된 도시다. 이동할 때 걸으며 곳곳을 보았다. 나무가 울창한 공원도 많고 고풍스런 건물들이 역사를 조명해준다. 현대식 건물도 조화롭게 들어 차 있어 더욱 아름다운 시가지다.
* 칠레 산티아고 수산시장
칠레의 수산시장을 탐방한다. 칠레는 태평양 바다와 길게 접한 국가라서 수산물이 많이 생산된다. 수산시장이 여러 종류의 해산물들로 매우 풍요롭다. 칠레의 회와 회무침, 멜론 등으로 해물중식을 하고 우리는 이제 산티아고를 떠나 발파라이소 항구를 간다.
* 칠레 들녘
이제 칠레 산티아고를 떠나 발파라이소 항구로 간다. 원래는 비냐 델 마르 해변을 탐방하기로 했는데 크루즈 배 승선 시간이 촉박해서 그냥 항구로 간다. 버스 안에서 본 칠레 들녘은 다양한 풍경을 선사한다. 우람하고 건조한 산과 들을 보여주다가. 칠레의 포도농장을 보여주기도 한다. 칠레산 포도주가 유명하기에 안데스 산맥 산자락 아래 포도밭 농장도 많다. 긴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칠레를 배우며 간다.
*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
칠레 발파리이소Valparaíso는 산티아고의 위성도이며 항구 도시다. 발파라이소는 2003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된 칠레 제 1의 항구 도시다.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크루즈 배 크라운 프린세스호를 승선하기 위해 왔다. 시간이 여유 있어서 시가지를 돌아 보았다. 산티아고의 서쪽 약 150km 지점에 있는 발파라이소는 산티아고의 외항이다. 종단 철도는 북쪽의 아키케에서 남쪽의 프에르토몬트까지 통하며, 발파라이소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통하는 안데스 횡단철도에도 연결되어 있다. 남서쪽의 교외 로스세리요스에는 공항이 있다. 발파라이소는 ‘천국과 같은 계곡’, 또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페인 군이 이 지역을 점령할 때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 시가지 도심에 볼리비아와 칠레 해전에서 사망한 군인들의 무덤과 동상이 있다. 맨 꼭대기 동상은 장군이고, 그 아래 네 명 동상은 그 당시 해군들이다. 동상 주변에는 해군본부도 있다. 영국 여왕의 허락을 받고 지은 최초의 빅토리아 호텔도 있다. 오래 된 도시의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산자락에 줄줄이 들어선 고운 집들이 매우 아름답다. 전철도 있고, 100년 된 버스도 있다. 해변의 항구로 갔다. 해변에는 기념품 상가가 즐비하다. 바다에 우리가 승선할 크루즈 배가 정박해 있다. 이제 곧 우리는 저 배에 승선할 것이다.
* 칠레 발파라이소 항구 크루즈 배 승선 터미널
크루즈 배에 승선하기 위해 발파라이소 항구 크루즈 배 승선 터미널로 왔다. 터미널은 세계에서 온 승선객들로 긴 행렬이다. 터미널 안에서 넘치는 줄이 터미널 바깥까지 장사진이다. 가방을 모두 바깥 한쪽에 나라끼리, 그룹끼리 모아놓고 승선 줄을 선다. 우리 부부도 그 중의 일원이 되어 세계인들 사이에 함께 줄을 섰다. 2시간 정도의 오랜 기다림 후에 터미널 안으로 진입했다. 이곳 터미널에서 승선 수속을 밟고 승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