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장산전망대 삼거리 ♧
맨밧골 버스정류장을 지나 약 9분 도로를 걸어 올라왔습니다.
고갯마루에는 마지막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아주 너른 헬기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이 장산전망대 삼거리입니다.
파주민보 기사를 읽어보니 이곳 장산은 임진나루까지 약 2km가량 높이가 같은 산이 임진강을 따라 길게 뻗었으므로 진동산 또는 장산(長山)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DMZ 평화의 길은 우측 임도를 걸어 내려가야 하지만 잠시 좌측길을 걸어 장산전망대를 들렀다가 되돌아와서 길을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임진왜란을 대비한 율곡의 선견지명
- 화석정에 얽힌 일화
율곡은 생전에 국방에 대한 건의가 좌절되자,몇 가지 대응책을 마련해 둔 것으로 보인다.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율곡은 관직생활로 바쁜 중에도 틈틈이 어릴 적 자랐던 파주로 가서 임진강 나루변에 있는 화석정에 들렀다고 한다.
화석정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재인데, 그는 수시로 이 정자의 기둥, 도리, 서까래에 들기름을 듬뿍듬뿍 먹여두었다고 한다.
화재로 소실될 위험을 생각한다면 기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율곡 사후 그의 말대로 10년이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남쪽부터 방어선이 줄줄이 무너지고, 한양에 가깝게 온 왜군을 피해 선조는 몽진을 떠나야 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밤중에 파천행렬이 임진강변에 다다랐을 때는 방향을 가늠키 어려워 강을 건널 수 없었으나 뒤에서는 왜군이 쫒아오고 있어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때 선조를 호위하던 이항복은 율곡의 화석정을 떠올렸다. 생전에 율곡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화석정에다 기름칠 해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석정에 불을 놓자,과연 기름을 먹은 정자는 관솔마냥 폭우에도 끄덕 않고 활활 타올랐다. 덕분에 선조는 그 불빛에 의지해 무사히 강을 건너 의주까지 피난할 수 있었다. 화석정은 율곡이 임금을 위해 남겨둔 충심 어린 배려였던 것이다.
/ 옮겨 온 글입니다.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지략 뛰어난 조선의 제갈공명, 권력투쟁 불씨 뿌려
2022. 3. 18. 00:29
0
번역 설정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
송익필과 파주 심학산
경기도 파주시 심학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한강 하류. 심학산은 조선시대 정략가 송익필이 머문 곳이다. [사진 김정탁]
자유로를 타고 일산을 지나면 오른쪽 멀리에 나지막하게 누운 산을 발견한다. 파주출판문화단지 뒤쪽의 심학산(尋鶴山)이다. 이 산 중턱에 최근 음식점이 줄줄이 들어서고 둘레길까지 생겨나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다. 심학산 높이는 200m가 채 안 되는데 주위에 큰 산이 없어 멀리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시야로 한강 하류의 물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해의 낙조도 아름다워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반대편 동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교하가 눈앞에 들어오는데 광해군이 한때 새 도읍지로 정했던 곳이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구봉산(龜峰山)이다. 이 산을 자유로에서 보면 거북(龜) 모양을 하고, 서쪽 봉우리(峰)도 거북 머리와 같아서이다. 이 산 이름이 심학산으로 바뀐 건 조선 숙종 때다. 숙종이 애지중지하던 학 두 마리가 궁궐을 도망쳐 여기서 찾았다고 해 그 후로 학(鶴)을 찾은(尋) 산으로 불리었다. 그런데도 구봉산 이름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건 이 산 밑에 살았던 송익필(宋翼弼·1534~1599)의 호가 구봉이어서다. 구봉 송익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
「 조선의 정치이념 주도한 송익필
왜란·호란 이후 예법 강화 주창
심학산에 살며 주변 서인 이끌어
‘당쟁기획자’‘노론설계자’ 비판도
이념·형식만 남은 주자학의 폐해
지금 한국정치 비추는 거울 같아
」
정도전 버금가는 이데올로그 평가
자유로에서 바라본 심학산 정경. [사진 김정탁]
그는 조선 예학(禮學)의 창시자로 정도전에 버금가는 조선의 이데올로그이다. 그의 예학은 제자 김장생으로 이어지면서 17세기 이후 내리 조선의 정치 이념을 주도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난을 겪고 난 후 조선을 이끈 선비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보다 국가기강이 해이해지고 사회질서가 혼란해진 것을 오히려 문제 삼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예법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런 두 차례 난이라면 왕조가 무너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조선왕조가 300년 가까이 더 지속할 수 있었던 건 예학 말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조선의 예학은 얼마 가지 않아 권력투쟁의 도구가 됐다. 현종과 숙종 때 벌어진 예송논쟁이 단적인 예다. 이에 예의 참뜻은 사라지고 예의 형식만 남았다. 중국 예학을 집대성한 주자도 예를 “자연의 원리가 적절하게 행해진 것이고, 인간 만사의 의식과 법칙이다(天理之節文 人事之儀則)”라고 정의하면서 인위적인 형식보다 자연스러운 실질을 중요시했다. 그런데 주자를 신봉했던 송시열과 송종길 그리고 이들을 추종했던 서인, 그중에서도 노론은 주자의 예학 정신과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학이 권력투쟁의 도구로 변질됐다는 증거다.
심학산 아래 송익필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지역. 현재 175년 된 정읍 김동수씨 작은댁의 사랑채가 옮겨와 있다. [사진 김정탁]
예학의 이런 일탈은 송익필이 죽은 뒤 벌어졌기에 그로선 억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씨앗은 이미 송익필에 의해서 뿌려졌다. 송익필은 살아생전 정철·이이·성혼 등과 가깝게 교유했는데, 이들은 초기에 서인 당론을 이끌던 핵심인사들이다. 이들끼리 긴밀한 교유가 가능했던 건 심학산이 위치한 파주에 모두 모여 살아서이다. 이이는 임진강변 율곡리가 고향이고, 성혼은 그 근처 파주읍에 살았고, 정철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고양에 살았다. 그리고 임진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화석정(花石亭)은 이들의 단골 모임터였다.
송강 정철
화석정 모임의 주인공은 단연 송익필이다. 서인의 제갈공명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글과 지략은 물론이고 인물과 자태도 뛰어났다. 송익필의 지략은 이순신조차 탄복해 마지않았다. 율곡의 소개로 구봉산으로 송익필을 찾아갔을 때 이순신은 방안 병풍 속 학이 자신이 상상했던 거북선의 모양과 비슷해 여기에 네 개 구멍을 뚫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송익필이 화를 내기는커녕 총 48개의 구멍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자 이에 느낀 바가 있어 이순신은 밤새 용병과 진법을 물었다고 한다.
평생을 음지에서 보낸 서얼 출신
심학산 정상에 있는 정자. 이곳에서 보는 서해 낙조가 일품이다. [사진 김정탁]
그런데 송익필은 서얼 신분이라 거의 평생을 음지에서 보내야 했다. 송익필의 외증조할아버지 안돈후는 고려 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안향의 직계 후손으로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버지이다. 안돈후는 노비에게서 딸을 낳고, 그 딸은 평범한 군인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송익필의 아버지 송사련이다. 그러니 송사련의 노비 출신 어머니와 안당은 배다른 남매간이다. 안당은 송사련을 서얼이라 차별하지 않고 그가 정5품 벼슬인 관상감 판관까지 지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후 송사련은 안당의 아들이자 자신과는 외사촌 형제인 안처겸·안처근 형제를 역모죄로 고발했다. 송사련의 고변으로 안당과 세 아들은 처형되고, 집안의 재산과 노비는 모두 송사련이 차지했다. 또 송사련의 벼슬도 정3품 당상관에 올랐다. 이런 일은 송익필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으므로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당상관 자제로 유복하게 성장했다.
송시열
그런데 명종 말 사림파가 힘을 쓰면서 송익필에게 화가 미쳤다. 안당 일가의 억울함을 풀어주자는 공론이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서다. 결국 안당 집안에 잘못이 없음이 밝혀지면서 신원이 복권되고 직첩도 환급됐다. 반면 송익필 일가에게는 재앙이 되어 재산은 안당 집에 환수되고, 집안 식구들은 안당 일가의 노비로 전락했다. 이때 송익필은 동인 이산해로부터 율곡을 비난하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는데 이를 거절하고 그를 풍자하는 시를 지어 이산해의 분노를 샀다. 이로써 송익필은 동인에게 공공의 적이 됐다.
파주시 임진강변에 위치한 화석정. [사진 김정탁]
서인의 반전은 곧이어 터진 정여립 역모와 관련한 기축옥사로 이루어졌다. 기축옥사로 1000명 가까운 동인과 그 관련자가 희생되면서 동인은 서인과 경쟁에서 크게 패퇴했다. 이 옥사를 진행한 사람은 정철이었는데, 정철의 배후에 송익필이 있다는 설이 파다했다. 또 송익필의 개인적 원한이 옥사를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는 말도 있었다. 송익필을 두고 당쟁의 기획자, 노론 집권을 설계한 책략가라는 부정적 시각은 이래서 생겨났다. 이에 송익필의 처지는 양지로 바뀌었는데 이런 양지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인이 선조의 아킬레스인 건저 문제를 잘못 건드려서 실각했기 때문이다.
송익필의 복권은 그가 죽은 지 24년 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이루어졌다. 인조반정은 사실상 서인에 의한 쿠데타였다. 게다가 인조반정의 두 주역 중 하나인 이귀는 송익필 제자였으며 또 다른 주역인 김류는 송익필에게 잠시 글을 배웠고, 그의 아버지 김여물도 송익필 제자였다. 더욱이 인조반정의 명분이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바로잡으면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분명히 하는 거였다. 이에 따라 예법이 강조되며 송익필의 예학도 주목을 받았다.
모난 데 깎다가 모를 더 낸 당쟁
파주 화석정 시비. 이율곡이 8살에 지었다는 한시가 새겨져 있다. [사진 김정탁]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산림에 있으면서 서인의 구심적 역할을 했던 김장생은 인조에게 건의해 자신의 스승인 송익필을 복권시켰다. 또 김장생의 제자 송시열은 송준길과 의논해 그의 묘비문을 짓고 비석을 세웠다. 그 후 영조 때 송익필은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증직되고, 급기야 1910년에는 종2품 홍문각 제학에 추증되면서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는 조선왕조가 망하기 한 달 전 일인데 노론이 앞세운 예학이 권력투쟁의 선봉에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사계 김장생
장자는 “도(道)와 인(仁)은 원통 자재한데 모난 데를 깎아 둥글게 하다 보면 더욱 모가 난다”라고 말한다. 예도 마찬가지여서 부족하다고 더욱 받들면 본질이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다. 조선의 예법도 이런 길을 걸었다. 이는 당쟁에 앞장선 선비들이 저지른 모순된 행동이다.
이런 모순됨이 과거로만 제한될까. 지금 정치권에서도 ‘예법’이 ‘이념’으로만 바뀌었을 뿐 이런 모순됨을 끝없이 만든다. 오로지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기에 극단적 주장만이 활개를 펴서이다. 모난 데를 깎아 둥글게 하려다 더 모난 원을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심학산
구봉산 정상에서 한강 하류로 굽이쳐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면서 물의 여유로움과 원만함으로 내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러면서 송익필은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도 좀체 가시지 않는다.
김정탁 노장사상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여행]서울·강릉도 아닌 파주에도 '율곡'이 있다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2014. 6. 6. 05:16
0
음성으로 듣기
번역 설정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송세진의 On the Road / 파주 이이 유적
이이는 조선 중기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학자로 대성하고, 관료로서 업적을 쌓았고, 제자양성도 성공했다. 다른 이들이 이 중 한 가지에 치우친 반면 이이는 어느 것도 부족함 없이 일가를 이뤘다. 이이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서울도 강릉도 아닌 파주로 간다.
◆율곡리에 율곡이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00원권 지폐 속 인물,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십만양병설. 어렵게 3가지를 떠올리고 나니 말이 막힌다. 이이는 유명하지만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화폐에 나올 정도면 분명히 뭐가 있을 텐데 사실 십만양병설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이는 군인인가? 이이는 조선시대의 대표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였고, 앞서 말한 십만양병설을 비롯해 대동법, 사창의 설치 등 정치·경제·사회에 두루 변화를 주장한 정치개혁가다.
그러면 이이의 고향은 강릉인가? 아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다.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고 신사임당이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라 하여 남편의 동의를 얻어 강릉에 머물렀다. 이후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이율곡이 율곡리로 왔다? 그렇다. 이이의 호 '율곡'은 동네 이름에서 온 것이다. 한글로 율곡은 '밤나무골'이다. 그러니까 율곡은 '밤나무골 이이 선생'인 것이다. 율곡은 평생 동안 강릉뿐 아니라 금강산, 한양, 황해도 해주 등 여러 곳에 머물지만 사후에는 이곳 율곡리에 영면했다.
성리학자 율곡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16세에 어머니 별세 후 3년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에 입문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도 큰 시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부한 불교의 선학이 후에 자신의 성리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반면 성리학자로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이력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는 11가지 조항으로 된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고 수신했다. 이 때문인지 율곡 이이의 졸기를 보면 '성품이 탁월하고, 수양이 깊어서 명랑하고 화기에 찼으며… 대인 접물에서 오직 성신으로 일관했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고, 그가 건의한 정책은 후에 모두 채택됐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명랑하고 화기에 찼다'는 내용이다. 그는 진지한 학자였고, 때로는 강하게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가였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명랑한 사람이었나 보다. 요즘 말로 하면 성격 좋고, 공부 잘 하고, 글 잘 쓰고, 놀 줄도 아는 '엄친아'. 매력적인 천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 자운서원 |
| 율곡 이이 가족 묘 |
◆그분의 묘, 그분의 서원
율곡 이이 유적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위쪽으로 이이 가족묘역이 있고, 왼편 아래쪽에 자운서원, 입구 가까이에 율곡기념관이 있다. 제일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은 묘다. 천천히 경사가 생기는데, 양쪽으로 키 큰 소나무 숲이 상쾌하다. 묘역에 오르면 14기의 묘가 있는데, 율곡 선생을 비롯한 그 가족들 묘다.
특이한 점은 가장 높은 곳에 이이가 있고, 바로 아래에 부인 곡산노씨 묘가 있다. 그 아래로 율곡의 맏형네 묘가 있고, 그 아래로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 묘가 있다. 가장 아래엔 율곡 아들네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출세 순인가? 묘의 위치를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조선 중기 이전만 해도 자식이 현달하면 서열에 관계없이 묘를 쓰던 고려 때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가장 높이 있는 율곡 선생의 묘에 참배하고 나서는 반드시 뒤를 한번 돌아봐야 한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점점 급해진 경사는 마침내 작은 언덕 하나를 다 오른 셈이 되고, 그 만큼의 높이가 된다. 그러니 멋진 풍경을 즐겨야 맛이다. 파주의 논과 밭, 개천과 저수지, 마을, 멀리 보이는 산까지 확실한 원근감으로 눈에 들어온다. 율곡 선생 앞에서 이 좋은 기운을 함께 받아가야 하지 않겠나.
자운서원은 이율곡, 김장생, 박세채를 배향한 곳이다. 광해군 7년(1615년) 유림들에 의해 창건됐고, 효종 원년(1650년)에 '자운'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이이는 학문적으로 큰 존경을 받은 만큼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됐다. 자운서원 풍경의 백미는 강인당 양쪽에 자리잡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이다. 400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들은 복원된 서원의 어색함을 한방에 날려준다.
잠시 서원을 둘러보며 율곡 선생의 책 < 격몽요결 > 의 내용을 떠올려 본다. '내가 오래도록 인순(因循)하게 됨을 걱정하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
인순은 지금 말로 게으름, 매너리즘을 뜻한다. 율곡 선생이 이 책을 집필한 42세 때는 이미 여러 가지를 이뤘을 시기인데,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다잡고 경계했다. 선생이 존경 받는 이유를 알겠다.
자운서원 안팎으로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 김수증이 쓴 '자운서원 묘정비'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쓴 '율곡 이이 신도비'가 있어 율곡 선생의 위상을 한번 더 증명한다. 생각보다 부지가 넓은 이 유적은 작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각 유적을 연결하는 산책로와 연못, 꽃과 의자, 솟대들은 그저 뜻 모르고 가도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 화석정 |
| 율곡 이이 유적 |
◆흥망성쇠를 간직한 화석정
화석정은 정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알려준다. 앞으로는 임진강이, 한쪽으로는 서울의 삼각산이, 저 멀리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높지 않은 곳에 이런 풍경이 있으니 여행자는 편한 호흡으로 주변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이이가 성장기에 학문을 익혔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들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또 율곡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황홍헌이 칙사로 왔을 때 화석정에 와서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도 한다. 정자 안에는 8줄짜리 한시가 적힌 편액이 있는데, 내용은 이이가 여덟살 때 지었다는 시다.
화석정은 평화로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꽤 모진 풍파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갈 때였다. 한밤중에 강을 건너려고 하자 강가는 칠흙처럼 어두웠고, 이들은 화석정을 불 태워 주위를 밝혔다고 한다. 이이는 일찍이 왜의 침략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왕이 바로 선조다. 7년 후 전란이 닥치자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피난길을 밝히기 위해 충언을 했던 신하의 정자를 불태웠다. 이후에도 화석정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다. 지금의 정자는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다. 화석정 옆으로는 560년 된 느티나무가 높게 자라 그 동안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여행을 할수록 우리 역사를 참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5000원권으로만 기억하던 율곡 이이는 20살에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을 수신했고, 사람들에게 유쾌한 에너지를 나눠 줄줄 아는 매력적인 엘리트였고, 스승이었다. 지금 우리는 존경하는 어른이 있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겸손함이 있나? 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있나? 율곡리에서 만난 큰 선생은 여행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하고 있다.
---------------------------------------
[여행]서울·강릉도 아닌 파주에도 '율곡'이 있다
송세진 여행칼럼니스트2014. 6. 6. 05:16
0
음성으로 듣기
번역 설정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송세진의 On the Road / 파주 이이 유적
이이는 조선 중기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학자로 대성하고, 관료로서 업적을 쌓았고, 제자양성도 성공했다. 다른 이들이 이 중 한 가지에 치우친 반면 이이는 어느 것도 부족함 없이 일가를 이뤘다. 이이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서울도 강릉도 아닌 파주로 간다.
◆율곡리에 율곡이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00원권 지폐 속 인물,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십만양병설. 어렵게 3가지를 떠올리고 나니 말이 막힌다. 이이는 유명하지만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화폐에 나올 정도면 분명히 뭐가 있을 텐데 사실 십만양병설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이는 군인인가? 이이는 조선시대의 대표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였고, 앞서 말한 십만양병설을 비롯해 대동법, 사창의 설치 등 정치·경제·사회에 두루 변화를 주장한 정치개혁가다.
그러면 이이의 고향은 강릉인가? 아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다.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고 신사임당이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라 하여 남편의 동의를 얻어 강릉에 머물렀다. 이후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이율곡이 율곡리로 왔다? 그렇다. 이이의 호 '율곡'은 동네 이름에서 온 것이다. 한글로 율곡은 '밤나무골'이다. 그러니까 율곡은 '밤나무골 이이 선생'인 것이다. 율곡은 평생 동안 강릉뿐 아니라 금강산, 한양, 황해도 해주 등 여러 곳에 머물지만 사후에는 이곳 율곡리에 영면했다.
성리학자 율곡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16세에 어머니 별세 후 3년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에 입문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도 큰 시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부한 불교의 선학이 후에 자신의 성리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반면 성리학자로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이력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는 11가지 조항으로 된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고 수신했다. 이 때문인지 율곡 이이의 졸기를 보면 '성품이 탁월하고, 수양이 깊어서 명랑하고 화기에 찼으며… 대인 접물에서 오직 성신으로 일관했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고, 그가 건의한 정책은 후에 모두 채택됐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명랑하고 화기에 찼다'는 내용이다. 그는 진지한 학자였고, 때로는 강하게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가였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명랑한 사람이었나 보다. 요즘 말로 하면 성격 좋고, 공부 잘 하고, 글 잘 쓰고, 놀 줄도 아는 '엄친아'. 매력적인 천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 자운서원 |
| 율곡 이이 가족 묘 |
◆그분의 묘, 그분의 서원
율곡 이이 유적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위쪽으로 이이 가족묘역이 있고, 왼편 아래쪽에 자운서원, 입구 가까이에 율곡기념관이 있다. 제일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은 묘다. 천천히 경사가 생기는데, 양쪽으로 키 큰 소나무 숲이 상쾌하다. 묘역에 오르면 14기의 묘가 있는데, 율곡 선생을 비롯한 그 가족들 묘다.
특이한 점은 가장 높은 곳에 이이가 있고, 바로 아래에 부인 곡산노씨 묘가 있다. 그 아래로 율곡의 맏형네 묘가 있고, 그 아래로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 묘가 있다. 가장 아래엔 율곡 아들네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출세 순인가? 묘의 위치를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조선 중기 이전만 해도 자식이 현달하면 서열에 관계없이 묘를 쓰던 고려 때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가장 높이 있는 율곡 선생의 묘에 참배하고 나서는 반드시 뒤를 한번 돌아봐야 한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점점 급해진 경사는 마침내 작은 언덕 하나를 다 오른 셈이 되고, 그 만큼의 높이가 된다. 그러니 멋진 풍경을 즐겨야 맛이다. 파주의 논과 밭, 개천과 저수지, 마을, 멀리 보이는 산까지 확실한 원근감으로 눈에 들어온다. 율곡 선생 앞에서 이 좋은 기운을 함께 받아가야 하지 않겠나.
자운서원은 이율곡, 김장생, 박세채를 배향한 곳이다. 광해군 7년(1615년) 유림들에 의해 창건됐고, 효종 원년(1650년)에 '자운'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이이는 학문적으로 큰 존경을 받은 만큼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됐다. 자운서원 풍경의 백미는 강인당 양쪽에 자리잡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이다. 400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들은 복원된 서원의 어색함을 한방에 날려준다.
잠시 서원을 둘러보며 율곡 선생의 책 < 격몽요결 > 의 내용을 떠올려 본다. '내가 오래도록 인순(因循)하게 됨을 걱정하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
인순은 지금 말로 게으름, 매너리즘을 뜻한다. 율곡 선생이 이 책을 집필한 42세 때는 이미 여러 가지를 이뤘을 시기인데,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다잡고 경계했다. 선생이 존경 받는 이유를 알겠다.
자운서원 안팎으로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 김수증이 쓴 '자운서원 묘정비'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쓴 '율곡 이이 신도비'가 있어 율곡 선생의 위상을 한번 더 증명한다. 생각보다 부지가 넓은 이 유적은 작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각 유적을 연결하는 산책로와 연못, 꽃과 의자, 솟대들은 그저 뜻 모르고 가도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 화석정 |
| 율곡 이이 유적 |
◆흥망성쇠를 간직한 화석정
화석정은 정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알려준다. 앞으로는 임진강이, 한쪽으로는 서울의 삼각산이, 저 멀리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높지 않은 곳에 이런 풍경이 있으니 여행자는 편한 호흡으로 주변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이이가 성장기에 학문을 익혔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들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또 율곡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황홍헌이 칙사로 왔을 때 화석정에 와서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도 한다. 정자 안에는 8줄짜리 한시가 적힌 편액이 있는데, 내용은 이이가 여덟살 때 지었다는 시다.
화석정은 평화로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꽤 모진 풍파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갈 때였다. 한밤중에 강을 건너려고 하자 강가는 칠흙처럼 어두웠고, 이들은 화석정을 불 태워 주위를 밝혔다고 한다. 이이는 일찍이 왜의 침략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왕이 바로 선조다. 7년 후 전란이 닥치자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피난길을 밝히기 위해 충언을 했던 신하의 정자를 불태웠다. 이후에도 화석정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다. 지금의 정자는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다. 화석정 옆으로는 560년 된 느티나무가 높게 자라 그 동안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여행을 할수록 우리 역사를 참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5000원권으로만 기억하던 율곡 이이는 20살에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을 수신했고, 사람들에게 유쾌한 에너지를 나눠 줄줄 아는 매력적인 엘리트였고, 스승이었다. 지금 우리는 존경하는 어른이 있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겸손함이 있나? 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있나? 율곡리에서 만난 큰 선생은 여행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하고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