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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찬바람이 불면서 전선의 치열한 공방전 못지 않게 에너지 전쟁도 더욱 가열되는 분위기다. 상대의 에너지 인프라를 파괴해 겨울철에 수요가 느는 전기와 가스 등 에너지원을 차단하고, 사회적 불안 심리와 민심 이반을 부추기는 하이브리드 전쟁의 일환이다. 에너지 전쟁은 곧 겨울나기에 들어가야 하는 양국 국민들의 마음을 더 얼어붙게 만들고 있다.
개전후 처음 맞은 겨울 정전사태로 암흑지대로 변한 우크라이나/사진출처:나사 위성 사진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에 조만간 '가장 혹독한 겨울'이 닥칠 것이라는 분석이 10월 들어 점점 더 잦아지고 있다. 이고르 테레호프 하르코프(하르키우) 시장은 이달 초 "전쟁 3년 만에 가장 힘든 겨울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했고, 에너지 전문가들도 러시아가 올 겨울 우크라이나를 짙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을 것으로 우려했다.
러시아의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후 3년 8개월 동안 가장 힘든 겨울 시즌으로는 2022년 말~ 2023년 초가 꼽힌다. 당시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정전 사태로 장기 비상 조치가 발령됐다. 이후 두 번의 겨울 나기는 그나마 수월했다고 한다.
다시 전쟁 이후 가장 혹독할 겨울이 닥칠 것이라는 예측은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단체장들로부터 나오니, 주민들의 불안감은 짙어진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조차 올겨울 전력 수급에 대한 질문에 다소 모호한 답변을 내놓으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키웠다.
스트라나.ua는 올겨울이 이전보다 모든 상황이 더 나빠질 것으로 보는 이유로 △에너지 인프라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강화와 △우크라이나의 가스 생산및 재고 부족 △반복된 공습에 따른 인프라의 복원 능력 저하 등 세 가지를 들었다.
가장 큰 요인은 역시 러시아군이 개량된 미사일과 드론을 더 많이 동원해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을 파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샤헤드'로 알려진 러시아의 제라늄 계열 공격용 드론이 거의 동시에 발사되는 대수가 과거에는 수십 대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수백 대로 늘어났다. 한 번에 최대 500대를 동시에 발사하는 경우도 있다.
AFP 통신은 러시아의 공습 규모가 지난 9월부터 전반적으로 증가했다고 확인했다. 우크라이나 공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9월 들어 전월(8월)보다 장거리 드론(5,638대)과 미사일(185대)을 36%나 더 많이 쏘았다. 9월 7일 밤에는 무려 810대의 드론을 띄워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러시아 전승절 군사퍼레이드에 등장한 드론들/사진출처:크렘린.ru
이에 반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은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여름부터 '드론을 요격하는 드론'(요격 드론)의 생산을 시작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를 믿는 현지 전문가들은 드물다. 실제로 러시아 샤헤드 드론의 격추율이 공식적으로 개선되지도 않았다. 대낮에도 수도 키예프(키이우) 상공을 날아다니는 드론 때문에 도시가 몇시간 동안 공습 경보로 마비되는 게 현실이다.
현지 여성 언론인 예카테리나 코베르니크는 지난 2일 소셜 미디어(SNS)에 글을 올려 "대통령부터 국방 분야 조달청장까지 모든 관계자들이 초가을에는 요격 드론의 양산을 시작할 것이라며 계약 체결을 주장했는데, 정작 생산업체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고 꼬집었다.
러시아 미사일·드론의 성능 개량도 우크라이나의 대응을 어렵게 만든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지난 2일 "러시아 미사일 의 업그레이드로 우크라이나의 겨울철 정전 위협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런던의 정보 복원 센터(Centre for Information Resilience)의 자료를 인용, "우크라이나의 탄도 미사일 요격률은 지난 8월 37%에서 9월 6%로 급락했으며, 요격 미사일의 발사도 줄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 전문가들은 FT에 "러시아가 미국산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을 피하기 위해 이스칸데르 순항미사일과 킨잘 극초음속 미사일을 마지막 순간에 궤도를 바꾸도록 개량했다"고 말했다. 한 우크라이나 전 관리는 "이것이 러시아 (미사일 공격)의 전환점이 됐다"고 주장했다.
올해 4월~6월 러시아군의 공습 상황을 분석한 미 국방부 정보감찰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군의 전술 변경으로 탄도 미사일을 요격하는 패트리어트 방공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미사일이 기존의 탄도 궤적을 따라 날아오는 게 아니라 궤도를 바꿔가며 비행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 6월 28일 러시아의 탄도 미사일 7기 중 단 1기만 요격되고, 7월 9일에는 미사일 13기 중 7기가 격추되거나 억제됐다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방어에 나선 패트리어트 시스템도 러시아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일부 손상됐다. 당시 시스템을 운용하는 전문 요원들이 부상하고, 데니스 사쿤 중령은 공습 후 장비를 회수하려다 사망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에 도착한 미군산 패트리어트 미사일/사진출처:우크라 국방부
우크라이나의 가스 부족도 겨울철 에너지 위기를 초래할 원인의 하나다. 우크라이나는 올해 초부터 러시아 천연가스를 유럽으로 보내는 자국 통과 가스관의 운영을 중단했다. 그 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가스 생산 인프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면서 우크라이나 가스 생산량이 60% 줄었다.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러시아 가스도 끊기고, 자체 생산량도 줄어들었으니, 가스 부족 현상이 심화할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에서 화력 발전소와 지역 난방에 사용되는 가스가 부족하니, 전력 소비량은 상대적으로 늘어나고, 결과적으로 가뜩이나 부족한 전력 사정은 더욱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마지막으로 지난 3년간 에너지 부문에 가해진 러시아 공습의 누적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타격이 가해질 때마다 에너지 시스템은 점점 더 노후화하고 취약해지고, 시스템 복구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올겨울에 중요한 변수가 또 하나 있다. 날씨다. 추운 겨울은 가뜩이나 수급 상황이 나쁜 에너지 문제를 더욱 벼랑으로 몰 수 있다.
러시아군이 겨냥하는 주 공격 대상은 우크라이나 화력발전소와 수력발전소다. 에너지 인프라는 기본적으로 발전소를 중심으로 송·배전망, 변전소로 연결되고, 정유및 주유소, 유류고 등 석유·가스 저장시설, 통합 에너지 관리 시스템 등도 주요 인프라다. 특히 화력및 수력발전소는 전력 수급에 따라 생산 자체를 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중요하다. 원자력 발전소는 용량 조절이 불가능하다.
화력·수력 발전소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결과는 정보 보호 차원에서 잘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의회)는 화력발전소와 수력 발전소 일부가 완전히 가동 중단됐다고 밝혔다. 러시아군의 화력및 수력 발전소 공습은 정기적으로 계속되고 있으니, 향후 전망조차 밝지 않다.
우크라이나에게 화력·수력 발전소에 대한 러시아 공습에 대응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하나 뿐이다. 소규모 발전 시설을 여러 곳에서 대량으로 가동하는 것. 시설 은폐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군이 곳곳에 산재한 모든 발전 시설을 찾아내 파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동안 발전소 분산 프로젝트에 관한 논의가 많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소형 발전소의 건설을 시도했던 우크라이나 업체들은 스트라나.ua에 실질적으로 정부 지원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관료 사회 특유의 장애물에 직면해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러시아는 꾸준히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를 공격해 왔지만, 올겨울 시즌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공습에 나선 것은 10월 초다.
스트라나.ua는 지난 2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를 붕괴시킬까?'("Положит" ли Россия украинскую энергетику)라는 코너에서 "러시아는 1, 2일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에 대한 공습을 계속했다"며 "러시아 드론의 변전소 공격으로 키예프주(州, 키예프 외곽 지역)에 정전 사태가 벌어졌고, 인근 체르니코프(체르니히우)주와 북부 수미주, 남부 오데사주에서도 전기가 끊겼다"고 전했다.
피해 지역의 일부 주민은 당국과 지역 전력회사의 정전및 긴급 복구 계획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12시간만에 전기가 한 시간 들어오니, 샤워도 휴대폰 충전도 못 할 판", "사전 공지에 따르면 오후 8시부터 정전이라고 했는데, 오후 4시부터 전기가 나갔다", "오후 9시부터 정전이라더니, 벌써 전기가 나갔다. 24시간 전기가 안 들어올 것 같다"는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러시아군의 에너지 기반 시설 공격으로 우크라이나가 당혹해하는 것은 또 있다. 철도에 전력을 공급하는 변전소가 파괴돼 전기 기관차가 멈춰서는 경우다. 철도 시설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니, 철도 물류가 막혀버린다. 러시아 공습의 또 하나 목표가 우크라이나군의 철도 물류를 마비시키는 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우크라이나 전기 기관차가 멈춰섰다/사진출처:텔레그램
10월 초에 시작된 러시아군의 에너지 인프라 공습은 이후 최고 규모의 기록을 계속 갈아치웠다.
스트라나.ua는 10일 9일 밤~10일 새벽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에너지 부문에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공습을 감행했다고 보도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3년 전(2022년 10월 10일) 러시아군의 첫 번째 대규모 공습과 겹쳤다고 한다.
이날 러시아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수도 키예프 등 무려 10개 지역에 정전이 발생했다. 지난 겨울의 막바지인 올해 2월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당연히 키예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피해갔다. 러시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우크라이나 발전소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이론적으로 효과가 낮은 법이다. 멀리서 날아온 미사일은 비교적 격추하기가 쉽고, 장거리 드론은 화력발전소와 같은 견고한 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가스 생산 시설의 파괴도 우크라이나에게는 치명적이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9일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가 최근 며칠 동안 우크라이나 가스 생산량의 60%를 파괴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내년 3월 말까지 연간 소비량의 약 20%에 해당하는 44억㎥ (입방미터)의 가스 수입이 불가피하고, 19억 유로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트라나.ua도 이에 앞서 지난주(1, 2일) 러시아의 공습 이후 가스 생산및 저장 시설에 대한 가스 흐름이 급격히 둔화됐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매체는 "난방 시즌에는 날씨와 피해 복구의 속도에 따라 약 20억~30억㎥의 가스 수요가 추가로 발생할 것"이라며 "현재 시세로는 8억~12억 유로가 필요하다"고 계산했다.
발전소와 변전소 외에 주유소 등 에너지 저장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은 그 전부터 시작됐다.
스트라나.ua는 지난달(9월) 19일 "우크라이나 주유소에 대한 러시아군의 드론 공격이 최근 빈번해졌다"며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추세는 최근 더욱 뚜렷해졌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 중에서 가장 취약한 곳이 주유소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개전 초기 주유소 등 저장 시설에 대한 러시아군의 공습 이후, 연료 저장 시설을 여러 곳에 분산 배치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정된 시설이 많아 러시아군의 정기적인 공격 목표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정유 시설은 러시아 보다 훨씬 적고, 최대 규모의 크레멘추크 정유공장 등 일부 시설들은 이미 파괴된 상태다.
우크라 드론에 의해 화재가 발생한 러시아 정유소/사진출처:델피 라트비아 러시아어 사이트
문제는 주유소 파괴가 민생과 직결된다는 점. 군사적 용도의 에너지는 특수 물자 공급 방식으로 이뤄져 주유소 파괴가 전선 혹은 전황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낮다. 러시아가 가급적 주유소 공격을 피해온 이유다.
하지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정유및 주유 시설(주유소)에 대한 드론 공격을 강화하자, 전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하긴 전쟁 중에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로 입씨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느 한 쪽이 공격하면, 다른 쪽은 보복 차원에서 더 강력하게 대응하고, 그런 식으로 확전될 뿐이다.
러시아군의 대응도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석유 산업에 얼마나 피해를 끼치느냐에 따라 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푸틴 대통령은 10월 초 발다이 국제클럽 포럼에서 "러시아군의 주유 시설 공습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 시설 공격에 대한 대응"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러-우크라 간 에너지 전쟁은 정유및 주유소에 대한 상호 파괴로 정점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군의 본격적인 우크라이나 정유및 주유 시설 공격은 2022년 겨울 정전 사태에 버금가는 심각한 사회적 긴장과 경제적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우크라이나에게는 러시아 정유및 주유 시설에 대한 공격의 효율성이 높다. 러시아에는 수백 개의 주유소가 있고, 전체를 드론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적은 비용으로 러시아에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저명한 드론 및 전자전 전문가 세르히 베스크레스트노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정유소, 유류및 가스 저장고, 항구의 석유 터미널에 대한 공격에 집중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드론 한두 대가 해당 시설에 떨어지면 큰 화재와 함께 대규모 장비가 불타는 결과가 난다. 기존 산업 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은 그같은 효과를 내지 못하며, 시설 운영에 큰 차질을 빚지도 않는다."
실제로 우크라이나군은 접경지역인 쿠르스크주와 벨고로드주, 돈바스 지역의 정유및 주유소를 정기적으로 타격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지난 9일 "우크라이나 에너지 부문이 공격받을 경우, 러시아에도 정전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로 날아오는 미사일, 폭탄 드론의 발사지는 벨고로드 지역"이라며 "우리도 아주 공평하게 되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우크라 간의 상호 보복 추세가 지속된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에너지 부문을 최대한 마비시키려 할 게 분명하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능한 곳에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으려면 우크라이나는 미국 등 서방으로부터 방공 전력을 크게 늘려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근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토마호크 미사일 확보에 집착하다, 방공 시스템과 대공미사일 부문에서도 미국 측의 약속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방측의 대(對)우크라 방공 시스템 제공과 관련된 자료는 아직 공개된 게 없다.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우크라이나는 미사일에 비해 드론이 훨씬 많아 에너지 공격이래야 가스및 석유 정제, 저장 시설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드론 공격으로 화력발전소와 같은 견고한 시설에 치명적 결과를 입힐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은 러시아에게 상당한 피해를 남겼다.
서방 언론이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러시아의 휘발유 품귀 현상을 본격적으로 보도한 것은 지난 8월 말부터다. 미국 CNN 방송이 앞장섰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내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이 크게 늘면서 러시아의 휘발유 품귀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 가격도 연초 대비 50% 이상 급등한 것으로 파악됐다. CNN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8월에만 드론으로 러시아의 핵심 에너지 시설을 최소 10곳 이상 공격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연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보국은 한 술 더 떴다. 우크라이나 드론의 공격을 받은 러시아 정유시설의 정제 능력은 연 4천400만t 이상으로, 러시아 전체의 10% 이상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남부 최대 정유시설인 볼고그라드의 루코일 정유공장을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실제로 8월 14일 새벽 루코일 정유공장 주변에서는 거대한 연기 구름이 포착됐다. 이 공장은 닷새 후에 또 공격을 받았다. 러시아 남부 사라토프의 대형 정유소도, 로스토프 정유시설도 여러 차례 우크라이나의 드론 공격에 노출된 것으로 전해졌다.
러시아 가스 시설과 화학공장도 우크라이나 드론을 피해가지 못한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볼고르라드주(州) 코로보코프스키 가스 처리 공장이 지난 9일 밤 공격을 받았다. 볼고그라드 주지사는 우크라이나군의 공격 사실과 에너지 부문 시설 중 한 곳에서 발생한 화재를 확인했다.
앞서 2일에는 페름의 한 지역이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베레즈냐키에 있는 아조트 공장이 일시적으로 가동을 중단했다. 아조트 공장은 러시아 최대의 비료 생산업체 중 하나다.
러시아에서 이같은 우크라이나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정유 시설의 38%가 가동 중단 상태에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10월 초다. 러시아 언론 매체 rbc가 정량 데이터 분석 기관인 시알라(Siala)를 인용, 지난 1일 처음 보도했다.
뒤이어 유력 경제지 코메르산트가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 정유사들이 지난 9월 휘발유 생산량을 100만 톤 줄였으며, 이에 따라 러시아 시장의 부족 물량이 소비량의 20%에 달했다고 전했다. 당초 생산 계획보다 10~11%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휘발유 부족 현상은 역시 전선에서 가까운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에서 가장 심각했다. 주유소의 약 절반 가량이 판매를 중단했고, 휘발유 가격의 고정 및 판매 제한 조치가 긴급 도입됐다.
휘발유 감산 통계에 대한 반박도 있다. 카네기 재단 베를린 센터의 연구원이자 경제학자 세르게이 바쿨렌코는 이 수치가 크게 부풀려졌으며 잘못된 계산 방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통계는 지난 8월 이후 공격을 받은 모든 정유소의 정제 용량을 합한 뒤 이를 총 용량에서 빼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드론 공격으로 정유 시설 전체가 마비되는 경우는 드물며, 피해 중 일부는 이미 복구되었을 수도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우크라이나군의 러시아 정유소 공격/사진출처: meduza.io
또 러시아 정유 시설은 원래 전체 용량의 약 22%를 가동하지 않고 있는데, 피해 규모를 계산할 때 전체 시설 용량을 합산하는 오류를 범했다고도 했다. 그는 "러시아는 국내 소비에 필요한 경유의 거의 두 배, 휘발유의 16% 이상을 생산해 수출도 한다"며 "러시아는 필요한 경우 수출 물량을 국내 시장으로 돌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즈음 젤렌스키 대통령이 나섰다. 그는 3일 아예 모스크바에도 정전 사태를 일으키겠다고 엄포를 놨다. 전날(2일)에는 안드레이 그나토프 우크라이나 참모총장도 비슷한 협박을 가했다. 그나토프 총장은 "적의 공격에 대칭적으로 보복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무기를 확보해 작전에 들어갈 것"이라며 "러시아가 이런 식(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 공격/편집자)으로는 이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들에게 미사일이 더 많을 지 모르지만, 우리는 미사일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덧붙였다.
때맞춰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대러 에너지 시설 공격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미 월스트리트 저널(WSJ)은 2일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대(對)러 에너지 인프라 공격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정보기관과 국방부가 키예프의 러시아 공습을 지원하도록 했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러시아 영토 깊숙이 위치한 에너지 시설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미사일·드론 공격을 지원한 첫 사례"라고 주장했다.
비슷한 논조의 미 NBC 뉴스에 이어 12일에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도 같은 기사를 썼다. 미국 정보부가 키예프에 각종 정보를 제공해 러시아 후방의 정유소와 기타 에너지 시설을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 FT는 "미국은 우크라이나 드론의 경로, 고도, 시점, 비행 전술을 결정하는데 도움을 줌으로써 러시아의 방공 시스템을 회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가 공격 표적을 선정하면, 미국은 이 표적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했다.
실제로 러시아 석유 및 가스 시설과 파이프라인(송유및 가스관)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 강도는 8월, 9월에 크게 증가했다. 에너지 컨설팅 업체 에너지 애스펙츠(Energy Aspects)에 따르면, 러시아의 38개 정유소 중 최소 16개가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백악관은 개입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전직 장성)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영토 깊숙이 공습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면서 "그러나 토마호크 미사일의 (키예프) 이전은 아직 승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의 대(對)우크라 토마호크 미사일 제공은 사실상 물건너 간 상태다.
미국의 도움을 확보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에너지 시설에 얼마나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을까?
우크라이나는 그동안 장거리 드론으로 러시아 에너지 시설을 꾸준히 공격해 왔다. 우크라이나 공격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주로 최전선 지역(국경 지역)의 화력발전소와 변전소, 정유시설, 석유 터미널(주유소), 연료 저장소(유류고) 등이 공격 대상이었다. 이는 러시아 본토를 흔드는 게 아니라 국경 지역에만 한정된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현재 보유한 서방 미사일, 즉 하이마르(HAIMAR), 에티태큼스(ATACMS), 스톰 섀도(Storm Shadow) 등을 이용하면 이론적으로 최전선 인근의 러시아 본토를 공격할 수 있다.그러나 미국은 하이마르 공격만 공식 승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유형의 미사일 공격 승인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최근에야 언론에 워싱턴이 장거리 미사일의 공격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는 비공식 보도(WSJ 10월 22일)가 나왔을 정도다. 러시아 본토 깊숙한 곳에는 드론 공격만 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우크라이나산 미사일을 이용하면, 언제든지 러시아 본토 공격이 가능하다. 우크라이나가 넵튠, 삽산, 플라밍고 와 같은 장거리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는 보도가 주기적으로 나오지만, 러시아 본토내 목표물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보고는 없다. 플라밍고 등 자체 미사일의 대량 생산에 자금이 부족하다는 보도(WSJ 10월 1일)도 나온다.
우크라이나의 장거리 공격에는 주로 드론이 이용된다. 우크라이나가 가연성 정유 시설과 연료 저장소, 특정 화학 생산 시설을 공격하는 이유다. 장거리 드론으로는 방공망이 구축된 목표물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러시아 발전소 대부분은 소련 시절 나토(NATO)와의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다. 드론으로는 큰 손상을 입히는 게 불가능하고, 미사일을 이용하더라도 여러 기가 필요하다. 또 100% 성공을 보장할 수도 없다. 러시아가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전력망을 계속 공격해왔지만, 완전히 파괴하는 데는 실패한 걸 보면 우크라이나는 엄두조차 내기 힘들어 보인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이 토마호크 미사일이다. 석유 및 가스 시설에 도착하면, 드론에 비할 수 없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미국은 토마호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제공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누차 핵전쟁 운운하며 토마호크 공격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일부 의원들은 에너지 시설에 대한 보복적인 반복 공격에 의구심을 표명하기도 했다. 집권 '국민의 종' 소속의 유력 의원인 다닐로 헤트만체프 지난 10일의 대규모 공습이후 중국이 참여하는 우크라이나 평화 회담과 외교적 수단을 통한 전쟁 종식을 촉구했다. 그는 제3차 세계 대전의 위험을 언급하며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협상을 주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을 막기 위해 사마라 정유 시설을 그물망으로 둘러싼 모습/영상 캡처
러시아도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러시아 사마라 정유 시설을 안티드론 그물로 감싼 사진이 지난 9월 말 인터넷에 공개됐다. 이어 지난 22일에는 블라디미르 침랸스키 러시아 참모본부 대변인이 정유소와 기타 인프라 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지역 예비군을 배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역 예비군이 방공 부대로 파견돼 우크라이나 드론 격추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수천 명의 병력이 에너지 시설 방어에 투입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같은 시스템은 이미 우크라이나에도 존재한다.
효과는 있을까?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러시아 에너지 시설 방어에 대한 미스터리는 두 가지다. 에너지 시설 방어는 정교한 방공 시스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날아오는 저속 드론을 중기관총이나 원시적인 대공포로도 격추할 수 있다. 따라서 수십 개의 주요 러시아 정유소와 가스 플랜트에 대한 방공망을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많은 에너지 시설이 최소한의 기본적인 방공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했는지 의아하다.
또 하나는 조직적인 문제다. 누가 드론으로부터 인프라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지 불분명하다.
일부 텔레그램은 지난 2023년 정유 시설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장 소유주들의 자금 지원을 받는 민간 군사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퍼뜨렸다. 주로 군사기업 '바그너 그룹'과 가까운 텔레그램이었다. 이들은 나중에 러시아 당국이 이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크렘린은 이미 '바그너 그룹'을 이끄는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을 경험했다. 바그너 그룹은 자체 방공 시스템도 갖추고 있었는데, 군사반란 당시, 러시아 군용기를 격추하는 등 화력을 과시했다.
크렘린은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기업들이 '바그너 그룹'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군용기를 격추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찾아낸 방안이 지역 예비군 투입이다. 이론적으로는 주요 시설 주변에 24시간 드론을 요격할 수 있는 병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느리게 움직이는 드론은 예비군들에게 어려운 목표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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