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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나도 악평의 대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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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7.09 05:36
- 나도 악평의 대가?
아시다시피 마태오복음은 5-7장이 산상수훈,
곧 율법과는 다른 주님의 가르침 모음입니다.
그리고 8-9장은 주님의 갖가지 치유 모음인데
오늘 복음은 치유 얘기들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구마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오는데
군중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이 정반대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되지요.
어떻게 같은 것을 보고 이렇게 다른 반응이 나오는지.
그것은 겸손한 군중과 교만한 바리사이들의 차이일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교만은 자기가 최고이고 자기만 선하기에
자기 밖의 모든 사람을 무시하고 악하다고 단정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군중에 대해서는 율법도 모르는 족속이라고 곧 무식한 사람이라고 무시하고
주님께 대해서는 마귀 우두머리의 졸개일 뿐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악평합니다.
주님께 대해서도 이렇게 간단하게 악으로 평가하니
그들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을 자들이다.”라고 저주하고,
안식일 법과 정결례 법을 어긴다고 다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니
오늘 주님께서 한탄하시듯 군중은 그들 밑에서 다 기가 꺾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한편으로는 저 자신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를 보며 저도 주님처럼 가엾은 마음도 가집니다.
정말 저 자신에 깨어있지 않으면 저도 악평의 대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주님께도 깨어있어야 하지만
제가 얼마나 뼛속부터 교만한지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가엾게 생각합니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 안에서 모든 사람이 기가 꺾여 있기 때문입니다.
회의할 때 보면 이것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지.
그런데 그것이 상처를 줘야겠다고 작심하고 주는 것이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상처를 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경쟁 사회의 부지불식의 교만 때문입니다.
부지불식이란 알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의식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지요.
자기도 모르게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러는 겁니다.
경쟁 사회 안에서는 남을 깎아내리고 내리누르고 악평해야
자기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안에 박혀 있고,
그러는 가운데 터무니없는 우월감과 교만이 역시 부지불식간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교만하고 악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부지불식의 교만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서로 기를 꺾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기를 살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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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대학을 다니는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고 있는 이 학생들은 남들을 도와주려는 이타적인 마음을 일반 학생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길에 쓰러져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물론 100%는 아니라 63%였지만, 일반 사람보다는 훨씬 높은 수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똑같이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늦으면 감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도움을 줄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얼마나 도움을 주었을까요? 63%에서 10%로 도움을 주는 수치가 떨어졌습니다.
아무리 근본적으로 착한 성향을 보여도 상황에 따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을 외면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착한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착함을 드러내기 힘든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종 방송에서 난처한 상황에서 무관심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듯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무관심하다고 악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 상황에서 외면할 수밖에 없는 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상황을 이겨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무관심으로 대처한다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역시 잘못이 아닐까요?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냈고 이 사람은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놀라운 일이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봤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은 마귀를 쫓아낸 예수님을 향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면서 반대의 뜻을 취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실 마귀를 쫓아내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 못 하는 이가 말하게 되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그런 일이 없었지만, 사랑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말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서 반대하는 모습, 어쩌면 앞서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무관심의 태도를 취했다고 비판하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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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현명한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배를 멀리한다면 '전한'과 같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음이요. 소인배를 가까이하고, 현명한 신하를 멀리한다면 '후한'과 같이 나라가 기울게 될 것이다(제갈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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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마태오복음사가는 5~7장의 산상설교에 이어, 8~9장에서 10개의 기적 이야기를 모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마지막 이야기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이를 치유하신 이야기’와 ‘추수할 일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 못한 이를 치유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었기 때문이다.”(마태 9,36)
착한 목자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를 그냥 둘 수 없는 당신의 마음입니다.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마음이 상해서 못 견디시는 마음입니다. 가만 두고는 차마 못 베기는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온몸으로 몸서리치게 겪고 있으면서도 놓쳐버리지는 말아야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나신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 길은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에게서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음”을 놓치지 않는 일입니다. 그를 못 본 척 하지 않고, 모른 척 하지 않는 일입니다. 무관심하지 않는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고 우리 중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가 보지 못함은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달리는 이들”, 힘이 없어 시달리고, 가진 게 없어서 시달리고, 무능해서 시달리고, 고통과 슬픔, 질병과 가난, 근심과 절망에 시달리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기가 꺾여있는 이들”, 인정해주지 않아서 고용해주지 않아서 거리에서 집에도 못 들어가는 기 꺾인 이들, 돈이 없어 자녀들에게도 기 꺾여 사는 이들, 고국을 떠나와 이방인이 되어 기가 꺾여 살아가는 바로 내 형제 내 이웃의 모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마태 9,38)
어쩌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꾼이 적어서가 아니라, 일꾼들이 제 할 일을 안 하는 데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벌거벗고 굶주린 채로 길거리에서 벌벌 떨고 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그는 화가 치밀어서 하느님을 성토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왜 두고만 보십니까? 왜 아무 것도 안 하시는 겁니까?” 하느님께서는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불현듯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안 했다니, 너를 만들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시어 우리 안에 이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굶주린 소녀, “시달리며 기가 꺾여있는 이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우리가 일꾼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 가운데 바람막이로 보내셨습니다.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에 제 마음을 심으소서.
제 마음이 그들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기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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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꾼들을 보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봉사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수확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 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곳간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의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 됩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영의 비취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합시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 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길 빕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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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3박 4일’의 교구사제모임을 마치고 신부님들은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날에 신부님들은 교구장님과 대화 하면서 몇 가지 의견을 이야기했습니다. 미주지역에도 ‘미사 도우미 사제’를 파견해 달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작년부터 ‘미사 도우미 사제’라는 직책을 신설했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은 비자 갱신 때문에 한국에 가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피정이나 휴가를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 겁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거나, 대도시에 있는 신부님들은 그나마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지만 소도시의 작은 규모의 성당에서 사목하는 신부님들은 미사를 도와줄 사제를 구하기 어렵습니다. 도움을 청한다 하더라도 한 달 가까이 미사를 도와준다면 그에 대한 사례비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있다면, 해외 교포 사목의 경험이 있는 사제라면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는 신부님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원하면 고백성사를 줄 수 있습니다. 교구장님은 머물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다면 미사 도우미 사제의 파견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장소에 대한 의견도 있었습니다. 현행의 장소 선정은 4개 본당이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홀리 엔젤스 성당, 워싱턴 DC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타코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입니다. 4곳 모두 성당의 규모가 큰 편이고, 보좌 신부님이 있습니다.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성당입니다. 신부님들은 규모가 작은 성당에서도, 남미에서 선교하는 성당에서도 교구사제모임을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공항에서의 이동을 대중교통이나 우버를 이용하고, 피정의 집을 숙소로 정하면 본당의 규모와 상관없이 개최할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하루는 피정의 집에서 성체조배와 피정을 하고, 하루는 교구사제들이 친교를 나누고, 마지막 날에는 사목의 체험을 공유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포 사목 성당도 고령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교우들의 봉사와 도움을 받기보다는 사제들이 스스로 모임을 꾸려 가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사제들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2026년의 교구사제모임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교구장님은 선교 사제들, 유학 사제들, 본당 재정이 힘든 사제들에게 특별히 격려금을 주셨습니다.
교구사제모임의 대표를 교구장님이 임명하고, 공문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표가 활동할 수 있도록 재정지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미주지역에 있는 사제들을 하나의 지구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에 있는 지구장 제도를 미주지역에도 도입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미주지역이 워낙 이동거리가 멀기 때문에 본당 사목을 하면서 지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미사 도우미 사제가 지구장과 대표를 겸임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재정 지원을 받기 보다는 미주지역의 본당에서 재원을 마련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주 지역에서 고백성사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서는 각 교구에 미리 허락을 받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지구장 제도의 도입과 재정지원은 다른 지역(유럽, 아시아, 호주)과의 형평성도 있기 때문에 검토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현임 대표신부님이 내년에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에 새로운 대표를 선출해야 했습니다. 관례상 서품 연도가 가장 빠른 사제가 대표가 되었기에 제가 대표로 추대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는 경쟁과 성과를 이야기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추구합니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윤을 위해서는 양심을 속이기고 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사랑해야 할 가족들마저 외면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엉킨 매듭을 풀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성격이 급해서 엉킨 매듭을 천천히 풀지 못하는 편입니다. 종교란, 신앙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생기는 엉킨 매듭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덮어버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지하게 내면을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교회는 옷에 흙이 묻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지금의 시대에도 자아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일구어가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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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의 반대편에 늘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빌런’, 즉 악역입니다.
복음의 주인공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바로 성경 속의 ‘빌런’입니다.
주로 바리사이들이 그 악역을 맡아 합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말 못 하는 사람을 말할 수 있도록 치유하십니다. 고을을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에 목자를 청하는 기도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모습을 보고 있었던 바리시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배가 아팠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관심과 칭송을 자기들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고을에서 태어나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니 배가 아팠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에게 더 이상 하느님은 없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들의 사리사욕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은총과 기적은 하느님이 그곳의 중심일 때 일어납니다.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났고 바리사이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의 중심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도 하느님이 아닌 나의 사리사욕이 중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리사이가 아닌 주님을 중심으로 그분의 말씀 안에서 은총을 누기를 군중의 모습을 닮아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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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절이
5월의 어느 날 지인분께서 겉절이를 해다 주셨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하셨는지 그 맛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다이어트 중이었습니다.
미용을 위한 다이어트는 아닌 건강을 위한 다이어트였습니다.
그런데 강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름은 겉절이….
겉절이는 칼국수와 단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겉절이는 수육과도 단짝입니다.
큰일 났습니다. 겉절이만으로도 강적인데 그 강적이 더 강한 강적을 함께 불러들이고 있었습니다.
뭐…. 별수 있나요.
그날을 다이어트 쉬는 날로 선포했습니다. 누구에게? 저 스스로 말입니다.
겉절이와 수육, 겉절이와 칼국수…. 여러분은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오늘은 잠시 쉬어가세요. 다이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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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은 영적 전쟁이다
“우리는 주님의 전사, 복음의 전사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요한10,14)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착한 목자 예수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인터넷이나 유투브를 열면 온통 전쟁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삶은 영적 전쟁입니다. 모두가 치열한 생존경쟁의 전쟁상태를 살아갑니다. 정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느님을 믿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신원은 “주님의 전사”입니다. 사랑의 주님으로 무장하고 영적전쟁을 수행해 가는 믿는 우리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요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수도생활 만 42년, 초창기부터 참으로 선호했던 말마디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수도생활은 예로부터 영적전쟁이라 칭하는데 영적전쟁 42년채가 되지만 영원한 현역의 수도자입니다. 혼자가 아닌 형제들과 더불어의 전우애(戰友愛)가 동반한 영적전쟁입니다.
주님의 전사의 빛나는 모범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입니다. 두 분 뿐 아니라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작금의 87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영적전쟁을 수행할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주님의 전사들이 영적전쟁에 항구할 수 있음은, 또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음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을 궁극의 희망이자 꿈, 비전으로 모신 삶이기에 가능한 평생 영적전투에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우상들과 치열한 전투에 얼마나 통쾌한 승리를 거뒀는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그들은 은과 금으로, 신상들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망하려고 한 짓일 뿐이다. 송아지 신상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온 것,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결코 하느님이 아니다. 정녕 사마리아의 송아지는,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었으니,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줄기에 이삭이 패지 못하니, 알곡이 생길리 없다.
그들이 제단들을 많이도 만들었지만,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그 제단들은 죄짓는 제단일 뿐이다. 그들은 희생제물을 좋아하여 그들을 바치고, 그 고기를 먹지만, 주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할 때 우상들의 정체는 폭로되고 그들이 얼마나 헛된 존재들이요 우리를 노예화한 것들인 지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은 무지의 삶으로 인해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유형무형의 우상들에 빠져 노예의 삶을 살아가는지요!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투철할 때 예수님처럼, 아모스 예언자처럼 하루하루 날마다 삶의 제자리에서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의 삶은 없을 것이니 주님의 전사는 그대로 복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 치유의 전사, 구원의 전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마귀들려 말못하는 사람에게서 마귀를 축출하자 말못하는 이는 말을 합니다. 마귀에 대한 통쾌한 영적승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하늘나라의 전사 예수님이요 이에 놀란 군중들의 반응입니다.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반영하는 고백과는 달리 똑같은 현실을 두고도 어떻게 다음과 같은 반대의 반응을 보일 수 있는지 바리사이들의 왜곡된 견해가 충격적입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무지에 눈멀면 이토록 완고해집니다. 흡사 극우나 극좌 이념에 매몰된 극단의 맹신이나 광신의 무지한 사람들을 연상케 합니다.
이어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모습을 통해 복음의 전사로서, 평화와 치유의 전사로서, 또 착한 목자로서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하느님의 마음과 사랑에 정통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는지 확연히 이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를 모두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온전히 봉헌된 하루의 삶이 참 아름답습니다. 다음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연민의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과 이리도 흡사한지요! 예나 이제나 변함없이 죄와 병으로 얼룩진 인간 현실같습니다. 첨단 문명을 구가하는 시대에도 인간불행은 지속됩니다. 궁극의 원인은 단하나! 하느님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잃고 표류하는 영적 난민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당신 제자들에 대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정말 주님의 참 일꾼들인 주님의 전사가, 주님의 목자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아니 우리 각자 솔선수범 분발하여 내 복음선포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참 좋은 일꾼이 되어 살도록 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시편115,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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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홀로와 함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
홀로
모으는
함께이니
홀로
할 수 있는
이는
함께이어도
할 수 있지만
함께
이루는
홀로이니
함께
하지 못하는
이는
홀로이어도
할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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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9,35)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없이 여기시다
어떤 선동자가 나서서 군중을 흔들어 놓지도 않았습니다. 재난괴 혼란이 그들을 괴롭혀 무력한 존재로 만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보시고 가없은 마음이 드셨을까요?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물의 열매는 참으로 풍성히 준비되어 있었는데 아직 아무도 그것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영의 선물은 그것을 받은 이들을 그 풍성함으로 압도합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그 풍성함은 조금도 줄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이가 많으면 좋으므로, 주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보내 주십시고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기도와 훈계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일어남은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기도 한다. 속살을 얻고자 한다면, 껍데기를 깨뜨려야 한다. 엑카르트가 말하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분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실로, 우리 내면의 핵은 하느님만이 들어올 수 있을 만큼 깊고 신적이다. 그리고 우리 내면의 핵으로 들어오려면, 하느님까지도 신을 벗어야 한다. 자신의 순수한 신적 본성에 의해서만 하느님은 거기로 들어갈 수 있다.
일어남과 깨어남이라는 주제는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그 정도로 중요하다. 그는 루카 복음 8장의 구절을 본문으로 삼아 이와 유사한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본 설교에서도 루카 복음 8장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회당장의 딸인 여자 아이를 죽음에서 소생시킨다. 그녀의 부모와 주위 사람들은
“모두들 울면서 아이 때문에 가슴을 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울지 마시오.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 하셨다. 사랍들은 아이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얘야, 일어나거라’ 하고 소리치셨다. 그러자 곧 영이 되돌아와 아이가 일어섰다(루카 8,52-55).(200)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예수님, 세상을 새롭게 하신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세상의 구원자이신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세상을 구속하신 당신을 믿나이다!
예수님, 원죄에서 보호되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와 함께 당신을 흠숭하나이다. 당신은 세상을 구속하셨나이다. 마리아한테서 최초로 구원의 결실을 보신 당신께 영광과 찬미를 드립니다.
예수님, 어머니의 영혼이 처음으로 존재한 그 순간 하느님의 사랑이 아름답게 빛났으니 감사드립니다. 성모님의 마음과 영혼은 처음 생겨난 그 순간부터 은총으로 가득했으며 그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깨진 관계가 회복되었으니 그 영혼과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고 영화롭습니다! 예수님, 마리아께서 '더 좋은 날’을 새롭게 알리는 새벽이 되셨으니 당신을 찬미합니다. 그날은 마리아를 통하여 당신이 오신 날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머무시기에 좋은 자리를 찾으셨으니 감사합니다.
0 예수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와 함께 당신을 홈숭하나이다!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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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하고 말하였다.” (9, 32~33)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삼 말이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는 말이란 말을 늘려서 발음하면 ‘마알’이 되는데 이를 풀이하면 ‘마음의 알갱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이는 말이란 곧 마음을 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란 마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소리요, 뜻을 나타내는 음성적인 부호입니다. 이처럼 말은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이 말할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다른 동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뇌의 발달과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되기 때문입니다. 뇌는 성장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데 이를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없다면 뇌는 스스로 진화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인간에게는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에 뇌가 만들어 내는 생각들을 세상에 영속적으로 전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뇌의 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할 말도 많아지게 되고, 할 말이 많아지다 보니 자연 세상에 할 일도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인간과 세상을 잇는 다리의 시발이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만이 갖는 엄청난 축복이며 능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9,33)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물론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지신 분들을 만난 적이 많습니다만 저 역시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은 아직껏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마귀 들려 헛소리나 괴성을 질러대는 사람 여러 명은 보았습니다. 만일 마귀 들린 사람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어떤 말들을 하였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부드러운 말을 할까? 남을 칭찬하는 말을 할까? 남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할까? 아니면 남을 욕하는 말을 할까? 남을 흉보고 멸시하는 말을 할까? 남의 흠을 잡고 비난하고 모욕하는 말을 할까? 아마도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을 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 들린 사람이,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벙어리로 있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니 어쩌면 그 역시도 즈카리야처럼 말문이 열리자, 하느님을 향한 감사와 찬미의 소리가 터져 나왔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마귀를 쫓아내 주었는데도 이에 대한 느낌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겁니다. 만일 그가 찬미와 감사를 표현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돌들과 나무들과 하늘을 나는 새들이 찬미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귀 들린 사람이 말 못하였다는 표현은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오신 분들도, 영적 지도 후 자연스럽게 개인 기도를 하라고 하면 손사랫짓하면서 거절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감사 기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느끼지 못했으며 그러기에 감사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을 헐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흉보는 말은 잘하는데 주님을 찬미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 앞에서 자기 자랑은 잘하면서 기도하라면 벙어리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말하는 법도 배워야 하듯이 기도 말도 배워야 합니다. 어린아이가 하루아침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 하면서 말을 배워가는 것처럼 기도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 말도 꾸준히 배워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의 언어이기에 사랑을 느끼고 체험할 때, 기도 말을 자연스럽게 잘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경험이 없으면 사랑한다, 는 말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어떻게 사랑의 언어인 기도 곧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때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9,33)라고 감탄하며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놀랍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9,34)하고 모욕하며 예수님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지켜봅니다. 군중들은 하느님의 일에 대해 지극히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을, 치유 받은 그 사람과 함께 기뻐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놀라워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의 시선 곧 마음의 태도는 일어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된 삶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 시대의 지도자들이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로 인해 당대는 민중들이 그 피해를 입었고, 현재는 국민들이 그 부담을 겪으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는데 그 까닭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입니다.”(9,36)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일꾼이 없어서 지금 세상이 하느님 포도밭에서 수확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 안에 제대로 된 일꾼들이 많지 않기에 예수님께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9,38)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10,1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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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 추수할 일꾼의 역할은 행복 전도사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7&id=2099075&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08 ㅣNo.174037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치셨다. 군중을 보시고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있었기에.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가서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최근 들어 신앙생활을 멀리하는 교우가 많아졌단다. 신앙이 짐스럽고 또 귀찮게 느껴지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때로는 있을 게다. ‘저 이는 진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는구나. 저 가정에는 정말 하느님의 보호가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게 많아져야 한다. 그들이 진정한 이 시대의 ‘주님의 일꾼’이니까. 누가 뭐래도 믿음의 본질은 기쁨이다. 우리는 참 행복을 얻으려 주님께로 나아간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전혀 기쁨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건 문제이다.
사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무엇보다 밝고 기쁜 마음으로 찾고 가까이하는 거다. 그렇게 그분은 삶의 행복을 알리시려고 우리를 가까이 부르셨다. 그러므로 그분 은총에서 보람 찾는 신앙인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늘 힘 있는 선교도 일상에서의 삶에서 기꺼이 기쁨을 찾을 수 있을 게다. 보면서도 믿으려하지 않기에, 하느님과 이웃과도 소통할 줄 모르는 기쁨을 잃은 이들이다.
예수님께서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단다. 가엾은 마음은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기며 공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출발점이다. 그분께서는 우리와 소통하시고 공감하시려고 오셨다. 그리고 더 많은 이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우리 모두에게 ‘추수할 일꾼’이 되라신다. 정말 일할 곳은 많은데 추수할 이가 부족하다는 예수님의 아쉬움을 듣는다. 그 일꾼은 그분 사랑을 널리 알려야 할 게다.
어쩜 두 가지 상반된 시각 중 올바른 것을 가려내는 건 참으로 어려울 게다. 예수님께서 말 못하는 이의 마귀를 쫓아내시자, 그가 말을 하였다. 말문이 터져 이제는 생각과 느낌을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단다. 이건 분명 기적이었고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일에 경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를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일이라고 모함하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신다. 그러면서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음을 보신다. 마치 야뽁 건널목을 건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야곱의 모습으로 비쳐진다. 이런 비참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격려하고 보살필 일꾼들을 보내 달라 청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게 쉬운 것 같지만 결코 간단치 않으리라. 일생 단 한명만이라도 주님께 인도해도 대단한 일이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기쁘게 살기를 바라신다. 현세에서 기쁘게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힘들 것이란다. 기쁘게 살면서 다른 이도 그렇게 살게 하는 게 정녕 주님 일꾼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방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가끔 신심 깊은 이가 엉뚱하게 휘말려 교회를 멀리하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예수님시대의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그 백성을 묶으려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율법만이 믿음의 족쇄가 아니라신다. 우리는 강요가 아닌 자유 의지로 그분의 참 일꾼이 되었다. 우리들 삶에서의 기쁨으로 행복 나누는 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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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9.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청하여라’의 뜻으로 쓰인 그리스 말은 ‘청하다’ 또는 ‘요구하다’의 뜻도 있지만, ‘기도하다’의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아 일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 일합시다!”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일꾼들이 부족하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합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교회의 봉사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잘못 가운데 하나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고도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사라진 봉사는 겉으로는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열심인 신앙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결국 하느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전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눈여겨봅시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인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기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합니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이면서도 영적으로 눈이 멀어 버린 신앙인,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분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신앙인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님께 예외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곳을 두루 다니시며 당신 은총이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또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기도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지 않게 합시다. 먼저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모든 일에 앞서게 합시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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