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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소리를 높여 외쳐라2
이사야40:1-11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시기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선포할 때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소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바벨론포로생활이 끝났다고 외칩니다.
포로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포로생활이 끝났다는 이 말보다 더 기쁘고 반가운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기쁜 소식이었기에 하나님은 그 소식을 전하는 자를 향하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이기에, 아름다운 소식이기에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높은 산에 올라 힘써 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갈 때 타고 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15일 동안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먹지도 못하고 절망가운데 빠져 있을 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다는 말씀을 듣고 힘차게 외칩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신다고 하셨기에 여러분의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희망을 갖고 용기를 갖읍시다. 살기위해서는 먹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먹을 것을 나눠주고 그들을 격려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처럼 어렵고 힘들 때 좌절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낙심하고 있는 자들에게 무엇인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종교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그냥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신앙이라면 그 종교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어려운 때에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종교가 참된 종교인 줄 믿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포로생활을 하면서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자에게 힘써 소리를 높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특별히 어려운 때에 그 역할이 더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복음을 외칠 수 있고 해결을 외칠 수 있고 소망과 희망을 외칠 수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외치하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외치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외치는 자를 향하여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고 외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입니다.
‘노역의 때가 끝났다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 이제 너희는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된다.’
이런 엄청난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 과연 누구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어서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님 밖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향하여서도 ‘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일어나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소리치신 분이십니다.
앉은뱅이를 향하여 ‘일어나 걸어라’, 눈먼 맹인을 향하여 ‘눈을 뜨라’,
나병환자를 향하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바람과 바다를 향하여 ‘잔잔하라.’ 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 명령 앞에 모든 것이 순종한 줄 믿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자들에게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선포해야 합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해방입니다.’
‘당신의 문제도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병도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 자녀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외쳐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소망을 갖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어려운 삶을 이겨내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답이요 하나님만이 해결자이심을 우리는 소리 높여 외쳐야 합니다.
둘째로,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을 외치라고 합니다.
3-5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으로 오실 때에
그 분은 큰 도로나 정상적인 도로로 오시지 않고
사막과 광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실 때 광야로 오시고 사막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하신 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때 당시의 중요한 교통로나 교역로를 사용하지 않고
광야 사막지대를 이용하신 것과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시고 누구도 알지 못했던
만나를 먹이시고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여러분, 사막이나 광야는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곳입니다.
살기가 어렵고 불편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그곳을 좋아하지 않고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곳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
사막과 광야와 같은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합니다.
칠정교회의 조00 목사님의 글 가운데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다니는 00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은 원래 부산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는지
대인기피증과 함께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00이의 부모님은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물 좋고 공기 좋다는
지리산 자락을 찾아 오셨고 00이는 가까이에 있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수업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던 00이는
어머니가 태워다주는 차를 타고 간신히 한 두 시간만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몇 개월째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중간고사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과 떨어져서 시험을 쳤지만 겨우 이름 석 자를 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때 중간고사 감독으로 들어갔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목사님과의 대화를 통해 00이의 마음이 열리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은 가지 않는 아이가 교회에 출석한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고
더 놀라운 것은 한 달이 안 되어 정상적으로 학교 수업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 년 만에 보는 중간고사에서 수학 100점을 맞았고
영어도 세 개밖에 안 틀릴 정도로 시험도 잘 보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충격과 우울증은 분명 사막과 광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충격의 사막에서, 그 우울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사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고 그 광야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막과 광야는 정말 쉬운 곳이 아닙니다.
좋은 곳이 아니고 어렵고 불편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곳이 될 수 있고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사막과 광야를 만난다고 해서 절대 절망해서는 안 되고 어떠한 위기에서도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능력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더욱 주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아울러 어렵고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이 하나님을 전해야 하고 외쳐야 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그 절망의 자리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사막에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광야와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에게 희망과 소망과 용기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날입니다.
성탄절을 맞으면서 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바라고 특별히
어려움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막과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자리임을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셋째로 모든 육체가 꽃과 같고 풀과 같다는 말을 외치라고 하십니다.
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거대한 제국 바벨론을 망하게 하셨습니다.
파사의 고레스 왕을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바벨론 제국, 그러나 그 제국도 하나님 앞에서는 들판의 풀이요 꽃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불자 시들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강대국은 없습니다.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나라도 없고 영원히 건강한 육체도 없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을 붙들고 살아갈 것이냐?
이것이 전부인양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인 양 그것에 매여서 그것에 목숨을 걸면서 그렇게 살 것인가?
아니면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 하는 도전입니다.
이 도전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톨스토이가 쓴 [참회록]에 실린 우화에는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이 맹수를 피하려고 우물 속으로 뛰어 들어가 넝클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우물 밑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그 사람이 떨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우물 위에서는 맹수가 그를 잡아먹으려고 기다리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붙잡힌 넝쿨 윗부분을 생쥐 두 마리가 갉아먹습니다.
넝쿨은 자꾸 약해지는데,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그는 자기가 붙잡은 넝쿨 줄기에서 떨어지는 벌꿀을 빨아 먹고 있었습니다.
꿀의 단맛 때문에 밑에 독사가 있다는 것, 위에 맹수가 있다는 것,
넝쿨이 끊어지고 있다는 것을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만약 그 줄에 매달린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무엇을 간구했겠습니까?
단물이 더 나오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얼마 있지 않으면 죽을 목숨이 단물을 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세상만 바라보며 세상에 만족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기 모습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하늘을 향해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일시적으로 주어지는 단물이 영원한 안식과 생명에 결코 비할 바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서는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자들에게 정말 진지하게 그러나 큰 소리로 외칠 말씀은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이제 두 주 남겨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고 우리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우리를 만나주셨고 진정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오심으로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모든 죄에서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가난 죽음 질병 분노 중독 압제 고통의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외쳐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오셨습니다.’
‘그에게 상급이 있고 그에게 보응이 있고 그에게 보호가 있고
그에게 안전이 있고 그에게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담대하게 알려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자세요 사명인 줄 믿습니다.
(2023.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