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92]조선 최고의 신물 ‘금척’을 아시는지요?
요 며칠 아주 흥미로운 책 2권을 독파했습니다. 『금척金尺』(김종록 장편소설, 2018년 다산북스 펴냄, 451쪽, 14800원)과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최홍 지음, 밀물 2005년 펴냄, 297쪽)이 그것입니다. 이 책들을 읽게 된 계기는, 지난 9일 진안 마이산의 <천지기도 산신대제>를 다녀와서입니다. 어릴 적부터 익히 봐왔던 마이산의 석탑군을 보면서, 저 탑들을 진짜 이갑룡 처사라는 분이 쌓았을까? 쌓았다면 어떻게, 무슨 이유로? 등이 궁금해져 서재에서 이 책들을 발견했습니다. 먼저 『금척』에 대한 대강의 줄거리와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보겠습니다. ‘한민족 최고의 비기’라는 부제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비기는 祕記일 터인데, 비기는 무엇이고, 금척은 무엇인지 마음이 급했습니다.
금척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악학궤범樂學軌範』(1493년 성종때 성현 등이 편찬한 음악이론서)에 실려 있다는 금척이 책표지 뒤에 사진으로 실려 있더군요. 설명인즉슨, 정도전에 의해 만들어져 궁중무용(정재呈才)의 도구로 쓰였다면서, 이성계가 무학대사로부터(혹은 꿈에서) 받은 지휘봉이자 칼 모양의 황금자(金尺)라고 했습니다. 작가의 해설이 더 신기합니다. “금척은 백성을 통솔하는 국가통치술이자 바른 식습관과 의약의 신기술이었다. 또한 정도에서 벗어난 자를 베는 정의의 칼이 되기도 했다. 금척은 세상 어느 문명에도 등장하지 않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자 겨레의 혼”이라는 것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은 더 이어집니다. 1909년 9월 15일자 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신문 <신한민보> 3면 머릿기사에 삽화 두 장이 좌우로 나란히 실렸는데, 두 장 모두 내용이 너무 도발적이고 선정적입니다. 두 삽화를 자세히 보십시오. 오른쪽 삽화는, 전통 혼례복 차림의 수줍은 한국 새색시에게 일본 헌병장교가 돈봉투를 내밀며 유혹하는 장면인데, 해설 내용이 가관입니다. <한국 계집이 일본 사내에게 반해 나중에는 벌거벗은 몸뚱이까지 되고 말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보호해주는 보람이 있다>고 쓰여 있으니, 조선인이라면 누군들 피가 거꾸로 솟지 않겠습니까? 한편 왼쪽 삽화는, 건장한 한국청년 ‘김척金尺’이 게다짝을 신은 왜소한 일본여인 ‘욱일旭日’을 권총으로 쏘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몸통에는 한반도 지도를, 머리에는 모자 대신 권총을 그렸고, 총구에서 막 불이 뿜어져 나오지 않습니까?
더 놀라운 것은, 안중근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삔에서 ‘일본의 심장’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다음날, 러시아 신문 <노바야 지즈니>에 실린 “암살사건에 참여한 한국인은 모두 26인이다. 그들은 이토공이 통과하는 철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사입니다. 그들은 무슨 근거로 이런 기사를 썼을까요? 그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만, <신한민보>와 <노바야 지즈니>에 이 삽화와 기사가 실린 것은 명백한 팩트(fact)라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가짜뉴스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팩트이니까 믿어야겠으나,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뉴스입니다.
작가는 이 두가지 팩트를 가지고 긴 소설을 썼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는 고종이 진두지휘한 첫 번째 <금척 프로젝트>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의사는 고종이 만든 <특파독립대>의 26번째 대원이라는 것이죠. 일제가 철저히 묻어버린 숨겨진 진실일까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튼, 고종황제가 1900년 4월 만든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이 <금척대훈장>입니다. ‘금척’이라는 말이 갑자기 만들어진 게 아니고, 조선초부터 이성계의 ‘설화(?)’로 정도전이 노래를 만들었고, 궁중무용 1호로 연주된 게 <몽금척夢金尺>이었으니, 그 역사가 500년을 넘은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조선왕조실록>에도 금척 이야기가 실려 있지 않은 까닭은왜일까요? 태종 이방원이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전북 진안과 임실을 사냥 핑계로 다녀간 사실은 실록에 기록돼 있지만, 그 이유는 정작 밝히지 않습니다. 진안과 마이산馬耳山이 이성계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조선의 정치적 성지’로 불렸을까요? 현존하는 마이산의 <천지음양탑>을 금척을 받은 이성계가 쌓았을까요? 숨겨진 역사는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입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퍼즐)를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지요. 마이산 자락에 쌓은 돌탑이 바로 그렇습니다. 기록 한 줄이 남아 있지 않기에 후대 사람들은 추정만 할 따름입니다.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의 저자는 조선초 누군가가 <천부경>의 원리대로 쌓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탑사의 주지 진성스님은 이갑룡 처사의 4대손인데, 자신의 할아버지가 20세기 초 직접 쌓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여러 설이 난무합니다만, 그 논란에 휩쓸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소설 『금척』의 내용만큼은 곰씹고, 되씹어볼 역사적 대목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뒤틀린 근대사의 비하인드 스토리라면 알아야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서 어쩌지도 못하다, 뒤늦게 ‘철든’ 고종(재위 44년)은 ‘금척’이라는 전설 아닌 전설에 몰입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몸부림을 친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금척대훈장’을 만든 것도 그런 뜻이었겠지요. 헤이크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나름대로 일제의 간악한 음모에 대항을 합니다. 그 일환이 이 소설에 나오는 ‘금척 프로젝트’로써, 비밀리에 특파독립대를 만들고 벨기에에 권총(벨기에제 FN 브라우닝 M1900)을 주문하여 안중근에게 전달함으로써 이토를 척살했다는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흥미로운 전개가 눈을 붙잡습니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 『달의 제국』 『소설 풍수』 『붓다의 십자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등이 그러하듯, 알아야 하는 것이 지나간 역사이긴 하나, 알 수 없는 것 또한 지나간 역사의 얼굴입니다. 그러기에 기록유산의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값으로 매기겠습니까? 그럴수록 작가들이 상상하고 그리는 서사敍事는 흥미롭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