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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쪽빠리 새끼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죠. 그런데 뉴스에서는 또 일본시민단체회원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음 역시 나쁜 놈들은 일본 우익 놈들이지 모든 일본인들을 탓해선 안된다. 아무리 그들이 소수일지라도...'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본인들을 모두 '쪽빠리'로 매도한 저 자신에게 부끄러워 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일본 우익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죠. '저 놈들이 평범한 일본국민들까지 도맷금으로 욕 먹이는구나. 저들이야말로 일본을 두 번 죽이는 자들이다.'라구요.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국의 극우들도 일본의 극우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군요. 한국전쟁 당시 빨갱이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무참히 양민들을 학살했던 (물론 미제국주의자들에게 부역했던 지주계급과 우익들과 관련된 양민들 역시 인민군에 의해서 결딴이 났죠. 저는 현재 북한 역시 미제국주의에 대한 철저한 저항적 민족국가주의로 보고 경제적으로야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갖추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김정일=국가 즉 전체주의 극우들이 득세한 국가로 봅니다.) 행위나 '베트남 파병' 당시 발생했던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을 전면 부정하는 모습, 또 이라크 파병을 주장하면서 미국의 이라크 민주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볼 때 과연 일본의 극우만큼 극성스러운 한국 극우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우리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일본의 우익들만 탓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오오에 겐자부로(大江建三郞)라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94년도에 노벨상을 수상해서 잘 알려진 소설가인데 제가 이 소설가를 처음 접한 것은 군복무 시절 읽었던 그의 소설 『세븐틴』를 통해서였습니다. 일본어 특유의 자연스러운 리듬을 깨뜨리는 듯한 거칠면서 단조로운 문체, 전통적 리얼리즘과는 구별되는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이런 어려운 말들은 무식한 저로서는 능력 바깥의 일이고 그저 '정신지체의 아들을 갖고 있는 소설가' 또는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고 덕분에 일본 극우로부터 테러 위협을 받은 소설가'라는 소문을 통해서 흥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어려울 것 같다는 선입견 때문에 선뜻 집어들지 못하다가 읽게된 『세븐틴』이라는 중·단편 소설은 저에게 크나큰 놀라움을 안겨주었습니다. 볼품없는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17세의 남자 고등학생이 국가와 '천황폐하'를 신봉하는 극우 청년 집단 황도파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묘사한 이 소설은 어린 시절 병약한 신체 때문에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가 후에 바디 빌딩으로 근육질 몸을 갖게 되면서 극우국가주의자가 된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빗대어 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게 놀라웠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제가 놀라움을 느꼈던 것은 중·고등학교 시절의 저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한국 남성들이 한번쯤은 부국강병. 강한 국가의 일원으로서의 '나'를 꿈꾸었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물론 남성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더군요. 은연중에 사회가 교육을 통해서 그런 것을 조장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심각한 경우가 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제가 바로 그런 경우였더군요. 저 같은 경우는 한단고기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사관에 깊게 경도 되었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현재의 한국인은 거대한 한민족의 하나의 분파에 불과하고 원래의 한민족은 유라시아 전역을 지배했던 기마민족이었으며 고대에는 한족漢族들을 지배했었지만 한족들의 간계와 사대주의자들 때문에 천천히 그 세력이 약화되어 현재의 한민족으로 전락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던 여진족들은 분명 우리민족이었건만 사대주의자들이 오랑캐라고 매도해서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일본 역시 우리 민족이었다는 것이죠.
이런 민족주의사관에서 영웅으로 숭배하는 자는 고대 중국 황제(黃帝) 헌원과 맞서 싸우던 치우(蚩尤)로서 헌원이 한족의 지도자였다면 전설 속의 치우는 쇠로 된 머리에 안개를 일으키는 괴물로 묘사되어 있지만 사실 배달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쇠로 된 머리란 발달한 철기 문화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치우는 단군(특정 개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의 단군이 아닌 종교적·정치적 지도자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의 단군) 중 하나인 자오지 단군이라는 것입니다. 중국 쪽 전설에서 헌원과 치우가 벌였던 탁록대전은 지남거를 만든 헌원의 승리로 끝나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사학자들은 사실은 치우가 승리한 것을 한족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치우는 치우천왕이라는 이름으로 2002년 월드컵때 다시 등장하더군요. 그리고 퇴마록을 썼던 이우혁이라는 작가에 의해서 환타지 소설로 거듭났습니다.
이 치우천왕이 바로 저의 '천황'이었습니다. 본받아야 할 영웅이며 간악한 한족들의 역사왜곡을 분쇄하여 치우천왕에게 괴물 치우가 아닌 본래의 민족영웅으로서의 치우천왕의 자리를 다시 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진실을 추적하고 규명하는 행위 자체는 여전히 긍정하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바로 그 행위의 목적과 결과입니다. 그 목적이 자기 민족에 대한 우월감을 부추기는 동시에 어떤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 혹은 문명에 대한 집단적 적개심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그 문제는 매우 심각해집니다. 즉 자기 집단의 존재를 위협하는 다른 집단을 정벌하고 지배함으로서 자기 집단의 우월감을 확인하고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서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때의 저 역시 그런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습니다.
사실 이런 욕망은 꼭 우익이나 민족주의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욕망은 이런 공식들을 따릅니다. 이상적인 자아와 현실의 자아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를 찾아서 그 매개체에 몰두하는 것... 이 것을 모두 나쁜 것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목표에 대한 자아실현 역시 이런 공식을 따르고 많은 매니아 문화들 역시 이런 욕망의 공식을 따릅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이상적인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그 매개체와는 이질적인 것에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은 정말 경계되어야 할 부분들입니다.
소설 『세븐틴』은 이런 욕망의 공식이 극우 국가주의와 결합했을 때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욕망의 공식과 극우 국가주의와의 결합이 일본 혹은 독일 극우주의자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전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이라면 모두 볼 수 있는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한국의 극우가 일본 극우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난하는 것을 그저 예쁘게만 봐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안치된 자들을 애초부터 사악한 인간들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들 역시 국가와 민족의 이름을 빌린 헛된 욕망에 의해 희생된 희생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안에는 희생자들을 만들어낸 헛된 욕망의 주체들도 안치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그들 역시 헛된 욕망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런 희생자들을 발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비단 일본 국민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민족 혹은 국가의 이름을 빌린 헛된 욕망을 깊게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헛된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측면에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비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 역시 그런 헛된 욕망을 갖고 있는 한국의 극우가 일본 극우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난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밑의 글은 진중권씨가 쓴 『시칠리아의 암소』라는 책 중 「너희 안의 파시즘」이라는 섹션의 '정치적 자살에 관하여'라는 장章의 일부분을 가져온 것입니다. 저의 횡설수설을 '동일시 열망'과 '국가주의'라는 측면에서 아주 잘 보완해주며 현재 일본 극우와 한국 극우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폭로한 텍스트라고 생각되어 저자의 허락도 없이 함부로 인용했습니다.
국권과 민권
주권. 미시마 유키오는 '주권'을 위해 죽었다. 자기의 주권이 아니라 국가의 주권, 즉 조국 일본이 타국과 공평하게 '전쟁'을 할 권리를 위해서. 전태일 역시 '주권'을 위해 죽었다. 하지만 국가의 주권이 아니라 국가에 저당 잡힌 국민의 기본권을 위해서. 미시마의 자살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을 '위한' 죽음이었다면, 전태일의 자살은 리바이어던에 '반(反)하는' 죽음이었다. 미시마의 자살이 민중의 권리를 '국가'에 반납하려는 죽음이었다면, 전태일의 그것은 '국가'가 약탕한 민중의 권리를 되돌려 받으려는 죽음이었다.
'정체성' 문제와 관련시켜 얘기하자면, 미시마의 자살은 국가라는 허구적 공동체를 위해 개인이 자신을 지우는 '자아소외'의 행위였다. 반면 전태일의 죽음은 국가가 압수한 개인을 되찾으려는 '자아회복'의 행위였다. 미시마의 자살에선 개인이 국가에 자기의 권리를 반납하고 이 절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령 '나=위대한 일본!' 반면 전태일의 자살에서는 개인이 국가로 환원되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외려 '나=국가'라는 동일성의 환상을 깨뜨려버린다.
국가에 정체성을 반납한 개인들은 국가가 무슨 짓을 해도 그 행로를 교정할 수가 없기에, 미시마가 섬기던 '국가'는 한때 학살기계가 되어야 했다. 이렇게 호전적인 자들은 평시에는 '경제'를 '전쟁'으로 간주하는 법이다. 그리하여 쇼와유신의 정신적 세례를 받았던 한 일본군 장교가 다스리던 나라 대한민국은 20세기에 졸지에 산업적 병영사회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때 산업전사 전태일은 이 병영에서 제 존재를 철수해버림으로써, 우리에게 '나라의 발전'이 반드시 '나의 발전의 근본'인 건 아니라는 메시지를 남겼던 것이다.
동일시 열망
집단과의 동일시 열망. 이건 정신연령이 낮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소아병이다. 제 존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어떤 것과의 동일시 속에서만 편안함을 느낀다. 가령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우연히 자기와 국적이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존재의 위안을 느끼는 분들, 국적이 같다고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미국 프로야구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는 분들, 같은 이유로 열심히 응원했던 골프 선수가 국적을 바꾸려 한다는 소문에 배신감을 느끼고 흥분하는 분들…….
하지만 이건 애교가 있는 경우고, 정작 문제는 이게 정치성을 띈 경우다. 가령 얼마 전에 일본에서 나온 『전쟁론』이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최근 자살자가 많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죽는 자뿐이다.' 이어서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죽을 수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다음의 논리가 재미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란 곧 '사랑하는 자를 낳고 길러준 나라를 위해서'와 상당히 비슷한 뜻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위해서'를 넘어선 곳에 '公=國'이 나타난다. 한마디로 나라를 위해서 죽으라는 얘기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가관이다. 남경대학살은 공산당의 조작이며, 일본군이 아시아를 해방시켯으며, 태평양전쟁은 정의의 전쟁이었으며, 전쟁을 일으킨 도조는 승자 재판의 희생자이며, '일본군=악마'는 연합군 측의 정치선전이며, 이 선전에 모든 일본 국민이 세뇌를 당하고 있으며, 나라를 위해 죽은 우리 선조들을 모욕하지 말 것이며, 외려 그들에게 감사를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 이 할아버지들의 성욕 해소를 도와준 정신대 여인들의 충절에도 고개 숙여 감사를 해야 한다 등등.
국가주의
이런 것을 수입해다 팔아먹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란 없다. …… 우리 국가가 어떤 것이라는 국적성, 그래서 그 국적성 때문에 진리 자체가 변할 수 있다는 생각.'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류철균(=이인화) 교수님의 생각이다. 한마디로 '참/거짓의 기준은 국가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정의하는 것은 국가다, 결국 극가가 하는 짓은 모든 게 옳다, 고로 국가란 논리적으로 잘못을 범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이런 것을 철학에서는 자살테제라 부른다.
보라, 실제로 국적이 달라지니까 남경대학살은 조작이 되고, 일본은 해방군이 되고, 학살자는 영웅이 되고, 정신대는 자원봉사가 되지 않는가. 류철균 교수님의 말씀. '솔직히 말하면 쿠데타를 포함해서 그 분이 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저는 그 분이 유신을 한 것이나 그 밖에 모든 게 다 옳았다고 생각해요.' 박정희는 참/거짓의 기준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잘못을 범할 수가 없다. 고로 그가 하는 짓은 무슨 짓이든 옳다. 이런 얘기다.
이런 분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개인은 그저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의 기계 속의 부품이 되고 만다. 국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그건 애국질이 되고, 그 지하다 죽으면 졸지에 호국의 영령이 된다. 이 우익 전체주의를 '국가주의'라 부른다. 19세기 일본에서 발생해서 결국 일본을 태평양전쟁으로 몰고간 그 이념이다. 이 낡아빠진 일제 이념을 선전하는 신문사가 있다. '국가주의는 건전한 공민의 윤리.' 조선일보의 조갑제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