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굴비의 유래
'건석어'가 오늘날의 굴비라고 불려진 것은 일찍이 고려 인종때이다. 척신 이자겸이 정적에게 역신으로 몰려 전남 영광군 법성포로 귀양갔다가 칠산 앞바다에서 잡힌 조기가 너무 맛이 좋아서 자기 혼자 먹기에는 군왕께 죄스럽다 하여 궁리 끝에 소금에 간한 후 바위 위에 말려서 진상하게 되었는 바, 이것은 결코 자기죄를 사하기 위한 비굴한 아부가 아니고, 신하된 도리로서 변함 없는 충정과 자기의 옳은 뜻을 굴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라고 명명하여 올렸다고 한다. 임금께서는 진상한 굴비를 잡수시고 대놓한 마음을 열어 귀양을 풀어 주었으나 끝내 이자겸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후사에 전해지니 혹시 굴비맛을 잊지 못해서 그랬을까요? 그때부터 영광굴비는 임금님 수라상에 빠짐없이 진상되고, 궁궐에서 부터 영광굴비가 명물로 취급 되었으며 온 백성들에게 진기한 맛으로 간직되어 오늘에 전하게 되었다.
2. 전골의 유래
상고시대에 군사들이 싸울때 쓰는 전립(벙거지)이 철로 만들어 썼기 때문에 진중에서는 기구도 변변치 못하였던 까닭에 자기들이 썼던 철관을 벗어 고기나 생선같은 음식들을 끌여 먹을때, 불규칙하게 끓여 먹는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 여염집에서도 냄비를 전립모양으로 만들어 고기, 채소 등 여러가지 끓여 먹는것을 전골이라 하여왔다. 혹으 이토정(1517~1578)이 항상 철로된 모자를 쓰고 다니다가 머리에 썼던 모자를 벗어 끓여 먹었다고 하여 선생의 별호를 철관자라 하였다고 한다.
3. 신선로의 유래
신선로는 15세기 조선조 연산군 때 사람인 정희량이 속세를 피하여 산 중에 은둔할 때, 수화기제의 이치로서 화로가 붙은 그릇을 만들어 거기에다 채소를 넣고 끓여 먹었는데 아침, 저녁에 밥을 먹었을 때에는 그릇이 하나만 남았다. 그는 신선의 기품이 있으므로 그가 죽으매 뒷날 세상 사람이 그 그릇을 '신선로'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4. 두부의 유래
두부는 중국 전한시대의 회남왕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원나라 때 평민 식품으로 일반화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두부는 콩으로 물에 적셔가며 맷돌에 갈아서 얻은 즙액에서 찌꺼기를 걸러낸 두유를 가열하여 간수를 넣어 만들어낸 것으로 우리나라나 중국의 두부는 단단한 것이 특징이나, 일본의 둡는 공으 맷돌에 갈아서 바로 가열한 다음 찌꺼기를 걷어 내므로 한결 연한 것이 특징이다.
5. 만두의 유래
우리나라에서도 고기만두, 앙금만두 등 중화만두로써 인기가 있는 중국만두도 빵의 일종이다. 이란 고원을 발상지로 하는 밀(소맥)이 서방으로 전해져 굽는 빵으로서 빵 문명을 만들었는데 동쪽인 중국에 전달 되면서는 만두가 되었다. 굽는 것과 찌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발효를 시킨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빵이라 할 수 있다. 좁쌀이나 피를 주식으로 하던 중국에서는 쪄서 먹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만두 기원은 <삼국지>로 유명한 제갈공명이 만들어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간 어느날 강물이 출렁대어 강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의 신에게 제물을 바치게 되었는데, 산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대신에 제갈공명이 생각해 낸 것이 고기만두를 바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국식 만두국에 대한 유래는 중국에서 어느 젊은이가 공부하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갔다. 주인이 음식이 떨어졌으니 줄 것이 없다고 하였지만, 젊은이가 계속 배가 고파 죽겠다고 해서 밀가루를 밀고, 속에 고기를 넣어 국물에 넣고 끓여 주었다고 한다. 하도 맛이 있어 이게 무슨 요리냐고 물으니 주인은 처음 만든 요리가 되서 대답을 못하니, 그 옆에 당신은 왜 멍청히 하고 있소? 했다. "중국말로 '호엔드엔' 그 후 이 요리가 호엔드엔이 되었는데, 이 만두국을 먹은 사람이 후에 과거급제하여 광동말로 '운탄'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