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사업 추진위원회의 신음이 커지고 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이 개정되면서 재건축의 경우 시공사 선정시기가 조합이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후(재개발은 조합설립 후)로 강화된 데다 시공사를 공동사업주체의 지위에서 배제함에 따라 추진위 단계에서 시공사의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현행 주거정비법은 경과조치로 지난 2002년 8월 9일 이전에 토지등소유자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얻어 시공사를 선정한 경우에 한해 시공사 지위를 인정해줌으로써 기존 시공사를 선정했던 일부 추진위조차 시공사로부터의 자금지원이 끊기게 됐다.
반면 추진위의 운영자금에 대해서는 토지등소유자가 납부하는 경비 또는 금융기관 및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로부터의 차입 외에 마땅한 방향을 제시하지 않아 추진위의 자금 조달은 사실상 막혀있는 상태다.
∥추진위원들이 경비 갹출
가칭 후암1구역 단독주택재건축정비사업 추진위는 지난해 11월 추진위 설립총회에서 2700만원의 차입금을 보고했다.
이날 보고된 2700만원의 차입금은 추진위원 54명이 50만원씩 갹출해 조성됐다.
2006년 6월부터 11월까지 수입·지출을 결산한 결과 차입금을 더한 수입 2850만원 중 인건비, 임차료 등 지출을 제외하고도 766만원이 남았다.
지난 연말 추진위 승인 신청을 한 후암1구역은 현재까지도 외부 차입금 없이 추진위 살림을 꾸려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추진위 승인 후 정비계획 수립 과정에서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막대한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 등으로부터의 차입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가칭 추진위 단계에서나마 외부 차입 없이 추진위를 꾸려 온 것만으로도 후암1구역의 사례는 업계에서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주택재건축조합 설립 결의 총회를 가진 고덕 주공2단지 재건축조합설립추진위원회는 주목할 만한 실험에 나섰다. 주민들을 상대로 1인당 최대 2억원의 자금 수혈을 받기로 한 것.
추진위는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분양시 동·호 우선 부여, 홈 네트워크 시스템 무상 설치, 최고 평형 수준의 마감재 지원 중 한 가지를 택하게 했다.
실험은 일단 성과를 냈다. 주민 10명으로부터 20억원의 자금이 조성된 것이다.
추진위가 이처럼 주민들을 상대로 자금 수혈에 나선 것은 추진위 단계에서는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거정비법은 주민들이 추진위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분담하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업기간 중 분담금을 내는 주민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추진위 출범 초기에는 그나마 일부 주민이 작은 금액을 모아주기도 하지만 실제 경비에는 턱없이 모자란다. 이 조차도 주민 전체의 지원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조합 설립을 위한 동의를 받기도 어려운 마당에 누가 운영비를 내겠느냐”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사업을 마친 후 조합원 분담금을 정산해 왔던 정비사업의 오랜 관행도 주민들이 미리 경비를 내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이유다.
∥추진위는 대출 대상 안 돼
추진위 운영규정은 추진위 재원과 관련해 토지등소유자가 납부하는 경비 외에 금융기관 및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로부터의 차입과 특별시장·광역시장 또는 시장이 융자하는 융자금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주거정비법은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특별시장·광역시장 또는 시장이 도시계획세 또는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에 의한 개발부담금 등을 재원으로 ‘도시·주거환경정비기금’을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자체가 정비기금을 법에 따라 적립하지 않는 데다 적립한다 하더라도 정비기금의 용도가 정비사업 외에 임대주택의 건설·관리, 임차인의 주거안정 지원, 재건축 부담금의 부과·징수 등으로 포괄적이어서 정비사업 조합·추진위에 대한 기금 지원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로 법에 지자체가 하도록 명시되어 있는 정비구역 지정조차 민간에 떠넘겨진 실정이다.
제도 금융권에서도 추진위는 대출가능영역 밖에 있다.
국민은행은 토지매입비, 현금청산 자금에 대해서 PF(Project Financing) 형태로 정비사업 대출을 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재건축조합이 조합 총회의 의결을 거친 후에나 가능하다. 따라서 추진위는 대출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사업부지 매입, 현금청산 등이 조합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대출규정은 어느 금융회사나 마찬가지이다. 금융회사들은 추진위에 대한 대출을 꺼리는 데 대해 “환수에 대한 부담”을 이유로 들고 있다. 추진위 단계에서의 사업 무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더욱이 일반 운영자금 대출은 추진위는 물론 조합도 어려운 실정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총회의 의결이 있으면 조합 운영자금 대출도 가능하다”고 밝혔으나, 실제 대출은 총회의 결의 외에 시공사의 연대보증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비사업에 필수적인 이주비 조차 시공사의 연대보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부동산을 담보로 한 조합 대출도 현행법에서는 불가능하다. 다올부동산신탁 관계자는 “재건축조합이 결성되면 조합원은 조합에 주택을 신탁해야 하는데 이후 재신탁이 금지돼 있다”며 “정비사업은 신탁이 낄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정비사업체 지원은 ‘탁상공론’
현행법에 근거해 추진위가 자금을 조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정비사업체로부터 차입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정비사업체가 추진위에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정비사업체의 법정 최소 자본금은 5억원이다. 그런데, 현행법에 따라 정비사업을 하려면 7∼8년이 거뜬히 소요된다. 추진위 입장에서는 가칭 추진위에서 조합설립까지 2∼3년이면 족하지만 정비사업체 입장에서는 한 사업장마다 7∼8년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다.
추진위 단계에서만 보더라도 1개 사업장에 인건비, 사무실 운영비 등 월 1500만원의 운영비를 지원하면 3년 동안 지원되는 금액이 자본금에 맞먹는 5억원을 훌쩍 뛰어 넘는다. 수입 면에서 보면 사업연면적 5만평에 평당 단가 3만원을 적용해도 15억원에 불과하다. 조합 설립시까지 60%를 받으면 9억원의 가용자금이 생긴다. 하지만 이는 가칭 추진위가 난립해 경쟁이 심한 현장에서 동의서를 받기 위해 동원하는 인력의 인건비수준에 불과한 금액이다.
여기서 추진위 운영비를 빼고 나면 고유 업무에 투입할 자금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정비계획 수립 등 용역비가 조합 설립후 시공사 선정 때까지 외상으로 넘겨지기 일쑤다.
한국도시정비전문관리협회(한정협)는 정비사업 용역단가로 평당 5만1800원을 권고하고 있다.
일부 사업구역의 경우 단가가 7만원을 상회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2∼3만원에 그치는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열악한 여건에서 한 정비사업체가 10개가 넘는 사업장을 관리하다보면 부담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결국 정비사업체가 추진위에 자금을 지원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추진위, 정비사업체, 시공사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
물론 시공사 선정이 공개경쟁입찰에 의한 총회 의결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러한 연결고리가 전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추진위, 그리고 추진위의 연장선에 있는 조합을 연결고리의 영향력 안에 두는 것은 충분하다.
추진위 단계에서의 비리 가능성을 포석에 둔 시공사 선정시기 규정 강화가 오히려 추진위의 자금난을 초래해 편법이 싹틀 여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행법상 건설업체가 시공사 선정 전에 추진위 또는 조합을 지원하는 것은 불법이다. 건설업체는 위험부담과 사업 장기화 때문에 자금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정비사업체들도 공식적으로는 시공사의 사전 지원은 없다고 못 박고 있다. 하지만 현재 여건에서 정비사업체가 다수의 추진위를 지원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
∥시공사 선정시기 앞당기자
추진위 단계에서의 자금난은 추진위가 자치단체의 승인을 받아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법적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시공사 선정이다.
추진위 승인요건이 주민 50% 동의에 불과해 대표성에 대한 문제가 거론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공사 선정이 조합설립 이후로 늦춰지면서 자금난은 물론 주민 동의와 이에 따른 사업 추진 지연을 초래하고 있다는 주장은 보다 현실적이다.
이에 대해 한정협 윤도선 회장(디피엠 대표)은 사견임을 전제로 “시공사 선정을 추진위 단계에서 가능하게 해야 한다”며 “대표성이 문제가 된다면 결의요건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제도를 보완하면 된다”고 말했다.
윤 회장은 이어 “부정은 투명화의 문제이지 시공사 선정 시기의 문제가 아니다. 시공사 선정을 늦춰 도움되는 게 없다”고 덧붙였다.
시공사 선정시기를 조정할 수 없다면 추진위 등 정비사업 초기의 자금조달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이를테면 사문화된 정비기금의 정비사업 지원을 강제하는 것 등이다. 다만 정비기금에 대해서는 공적기금이 민간사업을 지원하는 데 따른 사회적 합의와 관리의 어려움, 민간사업의 관에 의한 통제 등이 제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보다는 정비계획 수립만이라도 예산이 담당함으로써 정비계획 수립에 따른 주민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우선이다.
이와 관련 서울시는 정비구역 지정 예산을 시와 자치구가 공동 부담해 정비계획을 자치구가 직접 수립하도록 조례를 정비키로 한 바 있다.
이밖에 추진위 단계에서 PF, 주민 출자 등이 가능하도록 운영규정을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제도 금융권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운 추진위는 사금융 또는 일부 조합원의 출자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추진위마다 내부의 알력이 심하고 위원장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추진위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방법을 채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일 수밖에 없다.
고덕 주공2단지 변우택 추진위원장은 “주민 출자에 대한 보상조차 ‘법이 인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제안했다”며 “운영규정 등에서 다양한 자금 조달 방법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대안은 시비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추진위원회 재원에 대한 규정은?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제15조 제3항
제15조(추진위원회의 조직 및 운영)
③추진위원회는 운영규정에 따라 운영하여야 하며, 토지등소유자는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운영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납부하여야 한다.
「정비사업조합설립추진위원회 운영규정」 제32조 및 제33조
제32조(재원) 추진위원회의 운영 및 사업시행을 위한 자금은 다음 각호에 의하여 조달한다.
1. 토지등소유자가 납부하는 경비 2. 금융기관 및 정비사업전문관리업자 등으로부터의 차입금 3. 특별시장, 광역시장 또는 시장이 융자하는 융자금
제33조(운영경비의 부과 및 징수)
①추진위원회는 조합설립을 추진하기 위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토지등소유자에게 운영경비를 부과·징수할 수 있다.
②제1항의 규정에 의한 운영경비는 추진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부과할 수 있으며, 토지등소유자의 토지 및 건축물 등의 위치·면적·이용상황·환경 등 제반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공평하게 부과하여야 한다.
③추진위원회는 납부기한내에 운영경비를 납부하지 아니한 토지등소유자(추진위원회 구성에 찬성한 자에 한한다)에 대하여는 금융기관에서 적용하는 연체금리의 범위내에서 연체료를 부과할 수 있다.
정상표 기자 2007-03-14 16:58: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