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김일연 편
석야 신웅순
기도하듯 읽으리라 생각한 작년에 깊숙이 모셔둔 시인의 시조집『꽃벼랑』을, 이제사 읽었다. 가을 바람과 함께 읽었다.
「꽃벼랑」하면 향가의 「헌화가」가 생각난다. 암소를 끌고 가다 수로부인에게 천야만야 꼭대기의 진달래꽃을 꺾어바쳤다는 어느 노인의 노래이다.
진달래 울음 속은 왜 저리 불이 타느냐고 노래했다. 벼랑 앞에 왜 섰느냐는 것이다. 화자는 꺾지 못하고 꽃벼랑만 바라만 보고 있다.
오늘은 시인에게 진달래꽃을 꺾어 바쳐야겠다.
시인의 시조에 반해버린, 필자의 제자가 좋아하는 시조이다.
그리움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밥 먹습니다
외로움이 내 마음을 쓰다듬으며 잠듭니다
평생을 그리움 외로움 나 셋이 살아갑니다
추상과 구상의 절묘한 만남. 그리움이 밥을 먹고 외로움이 잠이 들고 그리고 나와 셋이 평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움과 외로움과 내가 평생 살아간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어느날 제자에게 공부 자료로 이 시조를 소개해주었다. 그런데 이 시조가 제자에게는 평생 스승 같은 작품이 되었다. 시의 위대함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움과 외로움’은 추상이요 ‘나’는 구상이다. ‘그리움=외로움=나’ 가 명구가 되는 것은 언제나 그립고 외로운 것이 사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번 중국 한시 기행 때 제자는 시인이 되어 김일연 시인과 이백 상 앞에서 기념촬영까지 했다. 작품이 맺어준 아름다운 인연이다. 필자 또한 이백고리 비에서 덕분에 시인과 기념 촬영하는 기쁨까지 누렸다.
『꽃벼랑』은 전부가 3장 6구 12 소절인 우리 고유의 정형시로만 되어 있다. 70년대 이후 필자는 신춘문예에 단시조가 당선된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단시조가 당선되지 않았으니 단시조로 응모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연시조이어야만이 신춘문예에 당선할 수 있으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공모전, 백일장은 또 어떤가. 시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되물어야할 판이다.
단시조로 담을 수 있는 것을 다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시조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세상에는 다 자신에 맞는 그릇이 따로 있다. 시조의 그릇이 있고, 시의 그릇이 있고 소설, 수필의 그릇이 다 따로 있다. 김일연 시조는 시조는 무엇이어야하는가에 대한 대답에 다름 아니다.
캄캄한 바다에서
섬
하나가
걸어온다
희뿌옇게 떠 있는 마지막 노점의 불빛
등대를 어깨에 지고
섬
하나가
걸어간다.
-「야근하고 양말 사는 남자」
텍스트 속의 ‘섬이라는 남자’가 현상적 화자로 등장하고 있다. 텍스트 밖에서는 현상적 화자를 바라보는 함축적 화자가 또 등장하고 있다. 액자식 시조라 할까.
유성호는 이 시조를 사회학적 관점보다는 개인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야근’과 ‘양말’이라는 기표에서 오랜 시절 우리 사회를 관통해왔던 산업사회적 상상력과 가난의 생태학이 묻어난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치환하지 않고, 불가피하고 원형적 인 생의 형식으로 전환시킨다. 세상과 남자는 각각 ‘바다’와 ‘섬 하나’로 비유되고 있는데, 캄캄한 바다에서 걸오는 “섬/ 하나‘는 그래서 아득하고 외따로운 곳에 깃들인 우리의 삶을 환기한다. ”희 뿌옇게 떠 있는 마지막 노점의 불빛“은 아마도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사실적 풍경일터인 데, 거기서 시인은 그 남자가 ”등대를 어깨에 지고“걸어간다고 상상하고 있다.등대를 졌으니 가난 속에 침몰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희망으로 쏘리라.
등대는 현재 화자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는 중요한 소재이다. 이 시조의 키워드는 현실 속의 상실감이나 고독감이다. 현시대 희망의 기표인 ‘등대’와 지난 산업 사회의 기표인 ‘노점의 불빛’이 교차하는 지점, 개인과 세계가 만나는 곳이 바로 화자가 존재하는 지점이다. 지난날의 산업 사회와 지금의 신산업사회를 동시에 말해주고 있다.
3장 6구 12 소절이면 충분하지 여기에 2, 3연으로의 부연 설명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문장이 길면 주제가 흐려지고 말이 많으면 실수를 하게 된다. 덜도 말고 더도 만 거기쯤서 그쳐야하는 것이 시조이다.
어룽어룽 분홍 비
사분사분 하양 비
호젓한 길 모롱이
서늘한 목덜미에
가려나 하마 가려나
꽤 오는
가을비
- 「코스모스」
코스모스는 분홍과 하얀 색이 어우러져야제맛이다. 분홍 코스모스에 내리고 있으니 분홍비요 하얀 코스모스에 내리니 하양비이다. 코스모스가 가을비요 가을비가 코스모스이다. 가려나 하마 가려나 꽤 오는 가을비라 했다. 이 시조 한수만한 가을의 정취가 또 어디에 있는가. 시는 감성으로 디자인해가는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텍스트를 적시는 이 가을비는 저녁 산모롱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다 그냥 갔을 것이다. 독자들의 그리움까지 그려낸 명작이다.
시조는 여백이며 여유이다. 많은 것을 담아내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그 욕심을 절대로 받아지 않는 것이 시조이다. 시조는 글 잘 쓰는 사람의 마음이 아닌, 절제하는 사람의 마음 가짐이다. 시조의 맛은 이런 것이다.
못생기고
재미없고
배경없고
능력없는
나 만나 다 늙었다고 아내 등 쓸어줍니다
나 만나 고생했다고 남편 손 잡아줍니다
- 「성인」
아이러니이다. 제목은 성인이지만 평범한 노부부의 이야기이다. 노부부가 성인인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연상케한다. 시인의 「성인」도 내용의 뜻과는 전혀 다르다. 진술된 그 자체의 의미와 숨겨진 의미 사이에 모순이 일어난다.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버리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자식들이 떠난 어느 허름한 집에서 두 노부부가 살고 있다 .어촌이든 농촌이든 도시이든 상관없다. 자식들이 찾아오지 않나보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성인의 삶이 눈물겹다. 나 만나 늙었다고 나 만나 고생했다고 서로 위로해주고 살고있는 노부부는 다가올 우리 미래의 자화상들이다. 시린 등을 쓸어주고 마른 손을 잡아주는 노부부가 성인이라는 것이다.
좋고도 좋은 가락이다.
김일연은 1980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빈들의 집』외 5권, 시선집 『저 혼자 꽃이 필 때』,동화집『하늘 발자국』등이 있다. 한국시조작품상, 이영도 시조문학상 등을 받았다.
너는
나인 듯이
나는 너인 듯이 서서
해 났다 햇볕 쬐자 눈물 담고 웃는다
여기서 돌아가지 말자
산 언덕에
나란히
- 미나리아재비와 애기똥풀
이 꽃들은 노란 색으로 얼굴이 작은 게 모양새까지 비슷하다. 그래서 그런지 누가보아도 안쓰러워보인다. 너는 나인 듯 나는 너인 듯 의지하며 햇볕을 쬐자 눈물을 담고 서로 웃는다. 산언덕에 나란히 서서 여기서 돌아가지 말자고 둘이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소품이나 참으로 귀엽고도 예쁘다. 비가 내리고 그친 오전 11쯤일 것 같다. 햇볕에 눈물 비치며 서로 웃는 아이의 모습은 12 소절의 시조 아니면 표현해 낼 수가 없다. 시조가 수백년 동안 괜히 우리 조상들이 배가 아파 옥동자를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 밖에 없는 배달 겨례의 귀하고도 귀한 수백대에 걸친 독신 아들이다.
시조가 여백이라지만 그냥 여백이어서도 안된다. 물소리도 있어야하고 새소리도 있어야 한다. 부슬비도 있어야하고 때로는 눈발도 숨어있어야 한다.
시인은 행간에 외로움도 넣어두고 정도 넣어두고, 비도 바람 소리도 새겨두었다.
상성에서 하성으로
뚝, 지는
서도 소리
너 없이 못 살레라
차마 말을 못하고
한조각 붉은 마음을
모질게도
베었네
-「낙화」
서도소리는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 불렀던 민요․ 시창․ 잡가들을 말한다. 한숨이 많은 서도지역이라 길게 빼고 떠는 가락이 애련하고 청승맞으며 구슬프다.
중장의 ‘너 없이는 못 살레라/차마 말을 못하고’는 서도 소리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같다. 서도 소리는 수심이 많다. 단심을 모질게도 베었다니 동백꽃쯤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낙화를 서도 소리로 환치한 것이 놀랍다. 서도 소리와 낙화는 서러운 것이 많이도 닮아있다.
필자는 오래 전에 시조창을 공부하면서 무형문화재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 29호인 서도 소리 시창「관산융마」를 전수 받았다. 조선 후기 시인, 석북 신광수의 한시이다. 당시 평양 기생들에 의해 널리 알려지고 중국에까지 불리워진 노래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한류이다. 뚝 지는 낙화가 서도 가락이라니. 낙화를 서도 소리로 보았으니 시조라는 명칭이 석북 신광수에서 비롯되었으니 여기에서 석북 시인을 만난 것이 아닌가. 필자 또한 석북의 8손이니 이런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 것이다.
양이 살았단다
풀을 뜯어 먹었단다
뿌리를 파먹었단다
사막이 되었단다
사막을 먹으며 우는 양이 살고 있단다
-「양이야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인은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양을 사람으로 바꾸어 읽으면 더욱 맛이 난다. 어떻게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읽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사막은 우리가 사는 세상일지 모른다. 풀을 뜯어 먹고 뿌리까지 파먹었으면 세상은 사막이 될 수 밖에 없다. 환경의 파괴가 아니고, 정신의 황폐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문명의 이기가 반드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주는 것은 아니다. 이기만큼 불행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시조가 바로 우리에게 그런 경계심을 주고 있다. 여기에 눈이 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많은 시인들에게 회자된 시조「새벽달」이다.
만리 밖에 바람 보내고
서러운 건 보내고
내 뜨락
빈 가지에
금지환을 끼우며
녹슨 문
열어달라고
들어가고 싶다고
파란 하늘에 흰구름 몇 점이 가을을 끌고 간다. 가을비가 온다니 갑자기 기온도 낙화처럼 툭 떨어질 것 같다.
오늘은 시인의 시를 음미하며 석북의 시 서도창 「관산융마」를 불러봐야겠다. 구만장천 가는 저 흰구름이 잠시 머물며 내 노래 소리를 듣고 갈지도 모를 일이니 잘 불러야겠다. 아니다. 나보다는 김일연 시인의 낙화를 감상하고 갈 것이다.
함께 들려주어야할 필자가 휘호한 명구 하나가 있다.
두고 온 흙이 그리운
머나먼
강물 소리
-「귀」의 종장
- 서예문인화,2016.10,134-138쪽.
[출처] 김일연 편 -석야 신웅순|작성자 석야
첫댓글 시조는 여백이며 여유이다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오늘도 건강하신 가운데
건필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