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SP레코드는 한 장의 양면에 각각 한 곡씩 녹음했는데, 윤심덕은 한 번에 10여 곡을 취입하기로 하고 1926년 7월 17일 ‘닛토’ 레코드 본사가 있는 오사카로 향했다. 경성역에는 조선축음기상회의 이기세, 작가 이서구, 동아일보 기자 남상일이 배웅 나왔다. “모두 즐거운 분위기였죠. ‘취입 잘하고 돌아올 때 선물로 고급 넥타이나 사오라’고 했더니, ‘죽어도 사와요?’ 하고 웃더군요.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이서구는 윤심덕과의 마지막일화를 회상했다.
오랫동안 한국 풍습은 가수를 광대패 취급했기 때문에 양가집 규수가 가수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에서 유학을 한 신여성 윤심덕이 가요곡을 취입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처지가 곤궁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 레코드 판이 정식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녀의 비극은 실제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신분적 장벽을 가진 러브스토리로 만들어지며 소비되었다.
사의 찬미는 4분 30초가 넘어가는 긴 곡이라 원래대로라면 12인치 레코드에 담아야 했으나, 12인치 레코드는 표준 10인치 레코드보다 비쌌기 때문에 판매량이 저조해질 것으로 예상한 닛토레코드는 억지로 10인치 레코드에 우겨넣어 음반을 발매하였다. 때문에 소리골의 간격이 좁아져 음질이 나빠지고 재생할때마다 소리골이 손상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음반들은 전부 영 상태가 좋지 못하다.
이 노래의 가사에 "이래도 한세상 / 저래도 한평생 / 돈도 명예도 / 사랑도 다 싫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 윤심덕이 부른 버전에 그런 가사는 없다. 다만 다른 가수들의 버전에는 이 구절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있다. "녹수 청산은 변함이 없건만 / 우리 인생은 나날이 변했다" 라는 구절이 있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