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14년 무오(1738) 2월 15일(정유) 맑음
14-02-15[11]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 민응수 등에 대한 관직 제수
정사가 있었다.
이비에, 행 판서 조현명(趙顯命)은 나왔고, 참판 이기진(李箕鎭)은 지방에 있고, 참의는 아직 차임되지 않았고, 행 도승지 정석오(鄭錫五)가 나왔다.
민응수(閔應洙)를 평안 감사로, 신택하(申宅夏)를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서명구(徐命九)를 좌부승지로, 이덕중(李德重)을 교리로, 정이검(鄭履儉)을 수찬으로, 오명신(吳命新)을 이조 참의로, 이종성(李宗城)을 부제학으로, 정익하(鄭益河)를 겸 중학 교수로, 오수채(吳遂采)를 겸 동학 교수로, 최창억(崔昌億)을 사도시 첨정으로, 임집(任)을 제천 현감(堤川縣監)으로, 박천(朴洤)을 준원전 참봉(濬源殿參奉)으로, 전익주(全翊周)를 인의(引儀)로 삼았다.
병비에, 판서 박문수(朴文秀)는 병이고, 참판 홍상빈(洪尙賓)은 칙사를 맞이하기 위한 습의에 나아갔고, 참의 이흡(李潝)은 병이고, 참지 유시모(柳時模)는 나왔고, 승지 조상명(趙尙命)이 나왔다.
이덕중(李德重)과 정이검(鄭履儉)을 부사직으로 삼았다.
[原文]
승정원일기 868책 (탈초본 47책) 영조 14년 2월 15일 정유 12/25 기사 1738년 乾隆(淸/高宗) 3년吏批의 관원현황
○ 吏批, 行判書趙顯命進, 參判李箕鎭在外, 參議未差, 行都承旨鄭錫五進。以閔應洙爲平安監司, 申宅夏爲義州府尹, 徐命九爲左副承旨, 李德重爲校理, 鄭履儉爲修撰, 吳命新爲吏曹參議, 李宗城爲副提學, 鄭益河爲兼中學敎授, 吳遂采爲兼東學敎授, 崔昌億爲司䆃僉正, 任爲堤川縣監, 朴洤爲濬源殿參奉, 全翊周爲引儀。
◎ 인의 [ 引儀 ]
정의
조선시대 통례원의 종6품 관직.
내용
초기의 정원은 8인이었으나 후기에는 6인으로 조정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의 관제제정 때 통례문에 종6품의 봉례랑(奉禮郎)과 겸봉례랑 각 10인을 두었던 것을 1466년(세조 12) 관제갱정 때 통례원으로 개칭하면서 봉례랑을 인의로 고치고 정원을 8인으로 하였다.
그 중의 1인은 한성부의 참군을 겸하게 하였다. 이들의 직무는 크고 작은 조회(朝會) 및 기타 의례행사에 여창(臚唱 : 식순을 적은 홀기에 따라 구령을 외치는 일)을 맡는 등의 의전업무였다. 업무가 과다하고 빈번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여 타관원을 행사 때마다 차출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중종 때 종9품의 겸인의와 가인의가 각기 6인씩 증치되었다. 겸인의에 결원이 생기면 가인의에서 임용차례대로 승진, 충원하였고, 근무일수 30개월을 채우면 6품직(참상관)으로 승진시켰다. 인의 8인 중에서 2인은 반드시 겸인의를 거치고 목청이 좋은 사람으로 임용하게 하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