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 있는 세계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반값 라디오'로 집집마다
히틀러의 메시지 퍼뜨렸죠
언론사 낙방 거듭하던 청년 괴벨스, 히틀러 연설에 매료돼 참모진 합류
선전·선동 맡아 나치 지명도 올려… 나치에 도움 되면 '가짜 뉴스'도 유포…
폭력적인 집회도 숱하게 열었어요
나치 패망하자 가족과 함께 목숨 끊어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 목록)에서 제외하는 작업을 주도한 사람 중 하나가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입니다.
세코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 시절(2005년) 자민당 공보본부장대리를 지냈어요. 자민당의 선거 전략과 홍보를 맡는 자리입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처음 집권했을 때(2006년)는 총리보좌관을 지냈고요. 자기 세력을 위해선 어떤 논리든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어,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자민당의 괴벨스'란 별명을 붙였어요. 세코 자신은 이 별명을 질색한다고 합니다. 괴벨스가 누구길래 그럴까요?
◇히틀러의 입, 괴벨스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이에요. 그는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한평생 다리가 불편했고, 신체적 열등감이 심했어요.
▲ 파울 요제프 괴벨스(오른쪽 끝)는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을 총괄했던 히틀러의 오른팔입니다. 아내 마그다 괴벨스(왼쪽 둘째) 역시 열렬한 히틀러 신봉자였습니다. |
그는 자신의 콤플렉스를 지적 우월감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어요. 학교에서 누군가 자신보다 더 아는 걸 견디지 못했다고 해요.
괴벨스는 23세 때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취업난에 시달렸어요. 당시 독일은 1차대전 패전의 충격으로 경제난이 심각했어요.
괴벨스는 언론사 취업은 물론 작가가 되는 데도 실패했어요. 그는 이 과정에서 반유대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유대인이야말로 물질주의의 화신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덕에 구체적으로 책임이 있는 존재'라는 위험천만하고 편협한 사상이었어요.
◇괴벨스, 히틀러에 매료되다
이 무렵 괴벨스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어요. 그는 1925년 나치에 입당해 히틀러와 가까워집니다. 당시 일기를 보면 괴벨스가 얼마나 히틀러에게 매료됐는지 드러납니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괴벨스는 히틀러가 독일의 부흥을 이끌 인물이라 믿었어요. 히틀러도 괴벨스의 출중한 글솜씨와 연설 실력을 알아보고 그를 핵심 참모로 삼았죠.
1928년 5월 선거에서 득표율 3%였던 나치당은 1932년 7월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37%로 크게 오르며 원내 1당이 됩니다. 이 과정에서 괴벨스는 선전·선동을 맡아 나치의 지명도를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웁니다.
그는 나치에 도움이 된다면 '가짜 뉴스'도 서슴지 않고 유포했어요.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멸종시켜야 할 존재'이자 '도살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고, 폭력적인 집회를 숱하게 조직했어요. 히틀러는 1933년 총리가 되자마자 그런 괴벨스를 선전부 장관에 임명합니다.
◇'괴벨스의 주둥이'라 불린 보급형 라디오
선전장관이 된 뒤 괴벨스는 우선 신문을 통제했어요. 그는 "언론은 국가가 원하는 곡을 연주하는 피아노"라고 믿었지요.
괴벨스는 또 라디오에 주목했어요. 그땐 라디오가 요즘 유튜브처럼 '새로 뜨는 인기 미디어'였거든요. 그는 라디오를 통해 '히틀러는 구세주이자 천재이고 구국의 영웅'이란 메시지를 퍼뜨렸어요.
더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는 아예 '국민수신기'라는 76마르크짜리 라디오를 대량생산하게 했어요. 당시 일반 라디오의 반값이었어요. 일반 노동자 2주치 급료 수준이었죠. 독일 인구가 8000만명이던 시절, 이 라디오는 5년 만에 무려 1000만 대가 팔려나갔다고 합니다. 독일 국민은 이 라디오를 '괴벨스의 주둥이'라고 불렀다고 해요.
하지만 2차대전이 길어지면서 독일 국민은 회의에 젖게 됩니다. 괴벨스는 날마다 '독일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하루하루 패색이 짙어졌으니까요.
마침내 나치가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히틀러는 베를린의 벙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다른 측근들이 도망가는 와중에도 괴벨스는 끝까지 히틀러 곁에 남아 아내와 여섯 아이와 함께 집단자살 했답니다.
[그 자신도 다리 불편했으면서 장애인 학살 정책 지지했어요]
나치는 1933년부터 '유전적 질환의 자손 예방법'이라면서 유전 질환을 앓는 40만명을 대상으로 강제 불임 시술을 했어요. 이후 1939년에는 'T4 작전(Aktion T4)'이란 이름으로 장애인과 정신 질환자를 학살했어요. 괴벨스는 이 정책을 지지한 핵심 인사 중 하나였어요. 그 자신이 장애인이었는데도요.
참고로 괴벨스의 아내 마그다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습니다. 마그다는 나치 패망 후 아이들과 집단 자살하면서 '총통과 나치즘 이후에 오는 세계는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편지를 남겼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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