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고방사주련
법상 스님의 사찰의 주련.
법보신문입력 2021.11.22
범종은 중생 성불 기원 위해
아침 종성게로 널리 통용된 게송
종소리엔 지옥 벗어날 서원 담겨
마음을 추슬러 본심 찾으라는 것
김천 고방사주련
/ 글씨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1913~1999).
聞鐘聲煩惱斷 智慧長菩提生
문종성번뇌단 지혜장보리생
離地獄出三界 願成佛度衆生
이지옥출삼계 원성불도중생
이 종소리 듣고 번뇌를 끊을지어다.
지혜가 자라고 보리심이 생기며
지옥과 삼계의 고통 벗어나
원하건대 모든 중생이 제도 되길 원합니다.
이 게송은 아침에 행하는 ‘종성게(鐘聲偈)’로 널리 통용된다.
명(明)나라 성기(性祇) 스님은 ‘화엄경’ 정행품과 밀교 경전의 게송,
주문을 선별하여 ‘비니일용록(毘尼日用錄)’을 편찬하였다.
청(淸)대에 이르러 견월독체(見月讀體 1601~1679) 율사가
이 책을 원문으로 하여 ‘비니일용절요기(毗尼日用切要記)’를 지었다.
그 후 청나라 불암서옥(佛庵書玉) 스님이 주석을 덧붙여
‘비니일용절요향유기(毗尼日用切要香乳記)’를 편찬했다.
후대에 홍찬(弘贊) 율사가 ‘사미율의요약증주(沙彌律儀要略增註)’를 썼는데
여기에도 종성게가 실려 있다.
중국 원문은 다음과 같다.
“聞鐘聲煩惱輕(문종성번뇌경)
智慧長菩提生(지혜장보리생)
離地獄出火坑(이지옥출화갱)
願成佛度衆生(원성불도중생),
이 종소리 듣는 자는 번뇌가 가벼워져
지혜가 자라고 보리심이 생겨나서
불구덩이와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
원하건대 모든 중생이 제도되길 원합니다.”
종소리가 들리거든 응당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바르게 하고
앉거나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모으고
경건한 마음으로 발원해야 한다. 종소리에는 번뇌를 가볍게 하면
지혜가 생겨날 것이고 이에 따라 지옥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서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화갱(火坑)은 ‘법화경’에 나오는 삼계화택(三界火宅) 비유를 말한다.
문(聞)은 문틈으로 귀를 대고 듣는 것이다.
범종 소리를 고요히 듣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을 치는 것이다.
중생을 미혹하게 만드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잡념으로 일어나는 망상이다.
망상이 곧 번뇌며 번뇌가 곧 망상이기에 이를 댕강하고 자르기를
염원하는 표현이다. 번뇌는 마음과 몸을 괴롭히는 욕망이나
분노 등 모든 망념을 이른다. 번뇌가 끊어지면 보리(菩提)가
저절로 솟아난다고 하였다. 보리는 깨달음의 지혜를 말한다.
사찰에서 만나는 법구(法具)는 무엇 하나라도 그냥 그저 매달린 게 없어서
모두 각자의 역할대로 말없이 법을 전하는 도구다.
그 가운데 하나인 범종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엄숙함이 스며든다.
종성게는 곧 번뇌를 끊으라는 다짐의 노래다.
성불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싶은가? 그러면 번뇌를 끊어라.
번뇌는 몸과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정신적인 작용이다.
지옥은 육도(六道)의 하나이며 또한 삼악도의 하나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서 너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을 중요시하는 불교에서는 극락도 지옥도 모두 이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범종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을 추슬러
본심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다.
삼계(三界)는 미혹한 중생이 윤회하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다. 삼계를 벗어나면 부처님 세계인 불지(佛地)에 이른다.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삼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다.
원효성사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통하여 삼계가 오직 일심에서
비롯되며 일심이 미혹하면 삼악도가 생겨나 윤회하므로
이를 삼계유일심(三界唯一心)이라고 하였다.
출삼계(出三界)에서 출(出)은 탈(脫)과 같기에 삼계에서
벗어나면 해탈이 되는 것이다.
지혜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달아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정신적인 능력이다. 지혜가 있어야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있다.
지혜가 자라면 보리에 이른다. 보리심이 자라면 부처를 이룬다.
범종은 신심의 보이지 않는 거름이 되고 불지로 나아가기를 독려하는 채찍이 된다.
범종의 목적은 마지막 게송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를 기원하기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
성불을 왜 하는지도 명확한 답을 세운다. 중생을 제도하고자 함이다.
제도는 괴로운 삶을 즐겁게 해주는 것, 고통의 바다에서 극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법상 스님 김해 정암사 주지 bbs4657@naver.com
[1610호 / 2021년 11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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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사[古方寺]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백마산(白馬山)에 있는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고방사(高方寺) 또는 고방사(古芳寺)라고도 한다.
경내에 있는 현판 기문에는 418년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적혀 있고,
일설에는 526년(신라 법흥왕 13)에 같은 이가 창건했다고도
한다. 이후 조선 중기까지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한때는 건물만 45동에 이르는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1636년(인조 14) 옥청(玉靑)이 적묵당,
현철(玄哲)이 설선당을 각각 중건하였다.
1656년(효종 7)에 학룡(學龍)이 청원루를 새로 지었고,
1719년(숙종 45) 수천(守天)이 중창하였다.
수천이 중창하면서 절을 새로 옮겨 지었는데,
본래의 위치는 현재의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에는 유명한 약수가 있었으나 빈대가 많아서 보광전만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나머지 전각은 모두 태웠다고 한다.
1923년 벽암(碧巖)이 중창하였으며, 1981년 법전이 주지로 부임하여
관음전과 삼성각·향로실·사천왕문·범종각·청원루 등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고 보광명전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보광명전 내에는 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제작기법이나
정교함으로 보아 고려말이나 조선초의 유물로 추정된다.
또 지름 1.8m에 이르는 대형 법고와 부식이 심해 판독하기 어려운
경판(經板)이 전해내려왔으나 법고는 파손되었다.
한편 보광명전 지붕에는 청기와 3장이 덮여 있는데,
이 청기와가 벼락을 막아 준다고 한다.
이밖에 관세음보살·약사불 등의 불상과 석등·범종·괘불·탱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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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암서예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74 (교동) |
전주시청 |
예향 또는 예도 전주의 분위기를 찾아보려면 '전주시 강암서예관'을 찾아보면 좋다.
전주를 상징하는 풍남문에서 경기전을 거쳐 동쪽으로
오목대, 향교, 한벽당 등이 이어있는 교동 전주천변에 1995년에 개관한
'전주시 강암서예관'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조상 때부터 서맥을 이어오고 있는 이 고장 출신으로 서예계의 거봉인
강암 송성용의 뜻으로 세워진 이 서예관에는,
추사 김정희, 창암 이삼만, 단원 김홍도의 작품과 다산 정약용의 간찰 등을
포함한 작품 등이 1,162점이나 전시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단일 서예전시관이다. 한편 '전주시 강암서예관'에서 200m 북쪽에
최근에 동학혁명을 기리는 동학혁명기념관이 세워져
동학혁명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
20세기 마지막 선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 1913~1999)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금강경 야보송(金剛經 冶父頌)’중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밑을 비추어도
물위엔 흔적조차 없네. ”
대숲에 이는 청량한 바람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서
시원한 마음의 모습이 저절로 드러나는 것 같다.
마치 대숲에 바람일 듯 시원함과 청량함이 가득 담겨져 있다.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선생은 20세기 호남을 대표하는 선비이자
서예가이다. 단순히 보이는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속까지도
모두 선비라는 말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리는 대쪽같은 선비였다.
마지막까지 한복을 곱게 입고 단정한 자세,
또렷한 정신으로 찍힌 사진들을 보면, 강암선생의 풍모를 다시 확인할 수가 있다.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선생 ‘왕유시(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강암선생은 전북 김제에서 구한말 호남의 유명한 유학자인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선생(1882~1956)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아석제인, 강암(剛菴)이라 했다.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으나,
부친이 서예가보다 학자가 되라는 권유로 공모전에 출품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에 처음으로 45세의 늦은 나이에
국전에 출품하여 연속해서 입선, 특선, 문공부장관상 등을 수상하였다.
국전에서 연속으로 서예, 사군자로 상을 받은 후 추천작가와
초대작가를 거쳐 심사 밎 운영위원도 역임하였으며,
각종공모전에서 20여회이상 심사를 하였고,
국내작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역사박물관에서 초대전을 가지기도 하였다.
또한 서예를 통한 교육사업을 위하여 연묵회를 창설하여 후진들을 가르쳤으며,
93년에는 재단법인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창설하여 소장작품과 재산을
전주시에 기부하고, 전주시에서는 ‘강암서예관(剛菴書藝館)’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95년에는 서울에서 ‘강암(剛菴)은 역사다.’ 는
동아일보회고전을 개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50세 이전까지는 주로 글씨를 즐겨 썼으나, 60세 이후부터는
글씨와 함께 사군자를 많이 그렸다. 사군자중에서도 대나무를 즐겨 그렸으며,
서예가이면서 대나무를 가장 잘 그리는 선비화가로 한국서단에 우뚝 서게 된다.
강암선생의 작품은 구도와 화제, 그리고, 농담과 기운 등이 잘 조화되어
특히 대나무에 관한 한 현대 한국의 문인화(文人畵)를 대표하고 있다.
옹골찬 산 계곡의 서늘한 바람처럼 강암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고 있으면,
마치 대숲에 있는 듯한 청량한 기운이 저절로 스며들게 된다.
강암선생 ‘묵죽도’
강암선생의 묵죽도는 특히 대나무 그림과 글씨가 참 잘 어울린다.
옹골찬 대와 강암선생의 올곧은 글씨가 다르지 않고,
특히 대나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대잎과 대속안의 텅빈 통영스러움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암선생의 묵죽도를 바라보면
대숲에 이는 청한(淸閑)한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시원해진다.
글씨와 그림이 잘 어울리고, 대잎으로 쓴 것 같은 꼿꼿함이 잘 드러나 보인다.
오랜만에 눈을 들어 벽에 걸린 강암선생의 묵죽도를 바라보니
대나무를 통해 피어나는 청한한 기운은 강암선생이 가신지
어언 이십여년이 되어가도 우리 주위에 가득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몇년전 가을 전주에 들러 강암선생의 서예관과 화랑에서 여러 진품들과
도록을 살펴 본 적이 있다. 특히 강암선생이 돌아가신 뒤 1년 후에 개최된
특별전도록을 통해본 강암선생의 세계는 정녕 이 시대 선비의 모습이 어떠하고,
어떻게 살아갔던가 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그것이 또한 곧 우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기에 더욱 가슴 깊이
와 닿게 된다. 그중에서도 화제로 쓴 글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 글씨중에 “기쁜 마음에는 시, 글씨, 그림이 있고, 지녀온 성품은 솔,
대나무, 매화와 같네.(怡情有詩書畵 秉性如松竹梅)”는 내용이 있다.
그처럼 강암선생은 시서화(詩書畵)를 즐기며, 선비처럼 살다 가셨다.
그리고, “글씨와 그림은 정신과 기개가 담겨 있어야 고귀하다.
(用筆用墨 貴在神來氣束)”는 말처럼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절조가 서린
글씨와 그림을 남기고 가셨다.
특히 그중에서도 대나무그림은 강암선생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진품들이다.
“대나무는 말할 줄 모르지만,
시원하게 온갖 시름 녹여준다(此君不解語 曠然銷百憂)”는 말처럼
강암선생에게 대나무는 누구보다도 변치 않는 군자였고,
평생을 같이한 친구였던 것 같다. 그리하여 대나무와 하나가 된
입장에서 대나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대나무의 본질적인 절개와 청한함, 그리고, 그런 절조가 있는 그림으로
그려낼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묵죽도의 화제중의 하나가
“대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마치 문장으로는 맹자의 호연장(浩然章)이요,
글씨로는 구양수의 솔경체(率更醴)와 예천명(醴泉銘)과 같다.
순전히 기골(氣骨)을 위주로 삼는 것이지, 그 비슷하게 모방해서는 안된다.
겉모습을 모방할 수는 있지만, 그 이야기를 어떻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畵之於竹 如文之有鄒經浩然章 如書之有歐陽率更醴泉銘字
純以氣骨爲主 非模擬形似者 形可彷彿 誰然談何容易)”
한 잔의 차를 마시며 눈앞에 펼쳐지는 강암선생의 묵죽도(墨竹圖)를 보면서,
사계절 늘 푸른 대나무처럼 곧은 절개가 우리 주위에 가득하기를 바라게 된다.
강암선생 ‘묵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