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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아마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비록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순례 여정이지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길을 떠난 수도자이지만, 오늘 복음 묵상할 때 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 사도는 수시로 예수님께 이런 고백을 되풀이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비록 그 장엄한 고백이 며칠 가지 않는 선언이라 할지라도, 그의 순수한 마음과 타오르는 열정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언약과 서원을 당신께 드리지만, 인간적 나약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 우리의 그 열정과 순수성을 크게 평가하시고, 우리의 결핍과 헛된 맹세조차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묵상하며 제 개인적으로 참 부끄러웠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우리들이기에 나중에 지키지는 못할망정, 일단 그리도 열렬히 그리고 용기 있게 선언하는 베드로 사도의 고백이 부럽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목청 높여 외치기는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세례 때에 저를 당신께 봉헌하도록 하셨으니, 당신을 보다 가까이 따르도록 저를 부르시는 당신의 아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빛과 힘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저는 온전한 자유로 당신께 저를 바치나이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주님 외에 모든 것을 버리겠노라고, 그리고 남아있는 삶과 젊음과 에너지 모두를 그분께 남김없이 바치겠노라고 금강석보다 더 단단한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버리고 바치기는커녕 끝도 없이 쌓아 올리느라 정신없었습니다. 교만과 허영의 탑이 이미 높이 쌓아 올려졌습니다. 쓸모없는 가지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허덕이며 살아왔습니다.
근사한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오래된 집은 허물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 성전을 건설하기 위해 높이 높이 쌓아 올린 거짓과 위선의 탑을 과감하게 허물어버려야겠습니다. 참 주님의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 아쉽지만 또다시 버리고 또 버려야겠습니다.
거짓말처럼 또다시 봄이 찾아왔습니다. 성령의 봄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합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기 위해서 몸집을 줄여야겠습니다.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습니다. 그래야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홀연히 날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렸다고 하지만 아직도 멀었습니다. 좀 더 버려야겠습니다. 주님의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기기 위해 좀 더 과감히 버려야겠습니다. 쓸데없는 자존심도 버리고,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교만함도 버려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쓰고 있던 위선과 거짓의 가면도 벗어 버려야겠습니다.
부단히 버리고 버림을 반복하던 어느 날 가벼워진 우리는 그토록 고대해왔던 강렬한 주님 현존을 체험할 것입니다. 버리고 또 버린 우리, 그래서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그저 주님 당신 밖에 없게 된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활짝 미소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왜 가톨릭 신자는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낄까?
최근에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살 곳이 있는데도 그냥 넣어서 감사하게도 10억 초반에 아파트를 분양받았고 그 아파트는 지금 30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는 너무 돈에 집착해서는 안 되니 너무 욕심내지 않으려 그냥 1억 정도의 웃돈만 받고 분양권을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아파트를 보며 후회합니다.
가톨릭 신자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부자가 되는 데 죄책감을 느끼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는 가난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어제 복음은 자기 재산을 다 팔 수 없었던 한 부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자였기에 우울했습니다. 그가 부자였기에 우울하였을까요? 그의 재산을 사랑을 위해 투자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돈을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돈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돈의 액수이지 돈에 집착하는 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라자로와 그 가족은 수천만 원짜리 향수를 쓰는 매우 큰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재산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받으십니다. 그들은 그러나 그 재산 모두를 예수님을 위해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려는 마음으로 게으름을 합리화하지 말고, 100배의 축복을 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형제, 자매의 관계는 물론이요, 집과 토지 등의 축복도 100배를 약속하십니다. 당신을 위해 포기한다면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부자가 되고 그것이 내세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오늘 복음을 따르면 집과 토지와 인맥까지도 백 배를 받는 방법을 아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는 길과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가톨릭 신앙으로 100배의 축복을 얻은 이들이 있지만, 두 현대인만을 소개합니다.
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는 필리핀 남부의 극심한 가난 속에서 태어나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님의 잦은 다툼과 별거로 인해 안정적인 가정을 꾸릴 수 없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거리에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그는 필리핀에서 대중적인 스포츠인 복싱을 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바꿔 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천부적인 재능과 강인한 투지를 발휘하여 점차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가 자신을 변화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파퀴아오 선수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나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큽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재능과 기회를 주셨고, 저는 그것을 잘 활용하려고 애썼을 뿐입니다” (ABS-CBN, 2013년 인터뷰)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경기 전후로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며, 대중 앞에서도 “제 모든 업적은 하느님께서 제 인생을 이끄시는 덕분입니다. 저는 그분께서 허락하신 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GMA News, 2019년 방송)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폭음과 도박, 여성 편력 등으로 인해 많은 논란을 빚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는 잘못된 삶을 살았지만, 고해성사와 미사에 참례하면서 조금씩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신앙이 없었다면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ABS-CBN, 2012년 인터뷰)라고 고백하며, 가톨릭 신앙이 자신의 삶을 바로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선수로서의 자세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훈련 스케줄과 철저한 식단 관리, 팀원들과의 협력을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몸과 재능을 더 잘 돌보려는 마음가짐”(동 인터뷰)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세계 복싱 사상 최초로 8체급을 석권하며 거액의 재산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그 재산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필리핀 빈민촌과 학교 설립, 장학금 지원 등에 사용하며 “이 모든 것은 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정치 활동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필리핀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빈곤층 복지 정책을 최우선으로 삼았으며, “더 나은 필리핀 사회 건설”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이에 대해 “가톨릭 신앙이 가르쳐 주는 형제애와 봉사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말하며 신앙이 자신이 품은 이상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처럼 매니 파퀴아오 선수의 삶은 가톨릭 신앙이 어떻게 한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그것이 다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톰 모나건(Tom Monaghan)은 미국 미시간주의 한 고아원에서 자라며 가난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톨릭 수녀회가 운영하는 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랐던 그는 “어릴 때는 무절제함과 반항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녀님들께서 제게 책임감과 절제를 강조하셨고, 미사와 기도를 통해 마음을 가다듬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자서전 『Pizza Tiger』, 1986)라고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실패하였고, 군 복무를 마친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작은 피자 가게를 인수하면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저는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시작했지만, 곧 이 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 번 돈은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것이 매일의 동기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피자 배달 시스템을 혁신하며 도미노 피자를 미국 전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980~90년대에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때는 호화 요트와 고급 자동차를 사들이며 사치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그는 같은 책에서 “제가 이룬 부가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이지, 제 마음대로 휘두를 것이 아니었습니다.”(『Pizza Tiger』)라고 회고하였습니다. 이 깨달음 이후 그는 고가의 수집품을 처분하고 대학교와 수도회, 가톨릭 자선 단체에 재산을 기부하는 데 집중하였습니다. 또한 직접 ‘아베 마리아 대학교 (Ave Maria University)’를 설립하여 신앙에 기반한 교육을 확산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쓰이지 않는 돈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1986년 Forbes 인터뷰)라고 강조하면서, “가톨릭 신앙이야말로 제가 삶의 목적을 다시 세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라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결국 그의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소속감을 넘어, 자신이 가진 재능과 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 나침반과 같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부유해지는 것보다 그 부를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갔습니다.
이처럼 톰 모나건의 삶 역시 가톨릭 신앙이 한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신앙이 단순히 내면의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로잡고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음을 그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하느님으로부터 재능과 돈을 받은 세 하인 중 하나는 자기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유일한 하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재물을 투자할 능력을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당신을 믿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됨으로써 이 세상에서부터 100배의 축복이 주어지는 법칙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10,28-31: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어제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하신다. 베드로가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28절). 예수님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무엇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나의 능력, 나의 재물 이 모든 것을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 자신만의 안위와 쾌락을 위하여 사용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모습으로 살려고 하는 나의 인간적인 모습을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나를 버리는 것이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이에 대한 보상은 세상에서도 갚아주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초대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보상을 많이 체험하였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재물이란 사용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 주인이 된다는 것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재물이란 자기의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보다는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 재산이 그를 불행하게 한다고 하셨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드리며, 나의 재능과 내가 지금 잠깐 관리하는 것들 모두가 하느님께서 나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맡겨주신 것임을 알고 그것들을 맡겨주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나의 관념이나 재물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은 재물이나 사상이나 관념의 노예가 되면 자신의 주변을 올바로 보지도 못하고, 이웃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게 된다. 주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주님 안에 복된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본당 수녀님께서 본원 행사로 인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습니다. 아마 수녀님께서는 본당 일에 차질을 빚지 않을까 걱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봉사자들이 잘하실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기가 자리를 비우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여기저기 구멍이 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곳이라면, 그 조직은 문제가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없어지는 위험을 피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조직이라면 정상적인 조직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없어도 잘 되는 곳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적절한 권한 위임과 책임 분산입니다. 이는 겸손한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자기 없으면 안 되는 곳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권한 위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책임 분산이 정착되지 않도록 방해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모습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람들과의 모임 안에서 리더의 역할이란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은 독재로 나아가게 해서 공동체의 발전에 큰 해가 될 뿐입니다.
예수님은 혼자서 충분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단을 만드시고 제자들에게 많은 은총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주님 안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단의 역할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진정한 겸손을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박해를 받더라도 당신을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아마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으니 인정해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것뿐 아니라, 박해를 받아야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나 없으면 된다는 교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낮추면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겸손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첫째가 최고고, 많은 것이 제일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꼴찌라 할지라도 자기를 낮추고 함께하는 사람을 첫째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가치를 모른다면 다른 사람이 그걸 알려줄 것이고, 그건 실제 가치보다 더 저렴할 것이다(버나드 홉킨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집회 35,6)
주님의 제단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는
나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고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걸어가야 한다네.
올곧은 이가
두 손에 들고 가는
경건한 자선은
진정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야 할
구원의 예물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첫째가 되려는 마음이 커지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 드러내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권력욕이 가득 차 있다면
명예심으로 가득 차 있다면
공명심에 젖어 있다면
그런 게 내 마음 안에 있으면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상처 되는 말 함부로 하는 그런 사람일 겁니다.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를 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다행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어서...
그래서 제가 행복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일부로 1등 안했어요. ㅎㅎ
종이 되는 삶,
내 이웃을 섬기는 삶,
가장 낮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삶,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이 담긴
말씀의 잔을 매일매일 마시는 삶.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때로는 바보처럼,
하느님과 예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제가 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기도를 청해 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35,1-15
1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제물을 많이 바치는 것이고
2 계명에 충실한 것이 구원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3 은혜를 갚는 것이 고운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이고
4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 악을 멀리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 속죄하는 것이다.
6 주님 앞에 빈손으로 나타나지 마라.
7 사실 이 모든 것은 계명에 따른 것이다.
8 의로운 이의 제물은 제단을 기름지게 하고
그 향기가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올라간다.
9 의로운 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그 기억은 잊히지 않으리라.
10 기꺼운 마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네 손의 첫 열매를 바치는 데에 인색하지 마라.
11 제물을 바칠 때는 언제나 즐거운 얼굴을 하고
십일조를 기쁘게 봉헌하여라.
12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네게 주신 대로 바치고
기꺼운 마음으로 능력껏 바쳐라.
13 주님께서는 갚아 주시는 분이시기에 일곱 배로 너에게 갚아 주시리라.
14 그분에게 뇌물을 바치지 마라. 받아 주지 않으신다.
15 불의한 제사에 기대를 갖지 마라.
주님께서는 심판자이시고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복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28-31
28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29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30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31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