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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9월21일 수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써내려가는 나의 복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에페 4,1-7.11-13
† 복음 마태 9,9-13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
(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마태 9,9 참조). ‘그곳’은 마태오 복음 9장 1절에 따라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마을’이며 ‘예수님께서
사시는 마을’ 카파르나움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사도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전합니다(마르 2,14).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하느님의 선물’인 마태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인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고, 부정한 사람인 죄인들과 어울려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왜 예수님께서
품위 없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지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그들의 비판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영적 의사’이며
‘죄인을 구원하는 구세주’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부정한 로마의 돈을 만진
마태오의 손은 정화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뚜렷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산상 설교, 선교사들에 대한 가르침, 하늘 나라의 비유들,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위한 권고들이 메시아의 입에서 나올
때마다 그 가르침들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였고, 후일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마태오 사도의 열정은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 미사 -
◈ [인천] 사랑의 실천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2016년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어제 순교자 현양대회는 많은 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신자들이 2,500명 정도 오셨고, 많은 분들이 기쁨과
함께 좋은 시간 그리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어제는 감사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주교님을 비롯한
많은 신부님들, 갑곶성지 성가대를 비롯한 성지 봉사자들, 새벽부터
나와서 밤늦게까지 일한 성지 직원 등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조용히 묵상 중에 기억해보니 눈에
띄지는 않지만 정말로 고마운 분들이 계속해서 떠올려지더군요.
“신부님, 저는 힘이 없어서 그냥 기도만 열심히 할게요.”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현양대회 짐을 나르도록 화물차를 가지고
오셔서 함께 날러주신 형제님, 의자 하나라도 날라서 보탬이
되겠다면서 의자를 번쩍 드시는 자매님, 말없이 행사장 주변의
쓰레기를 줍는 분, 화장실에서 손을 닦으신 뒤에 사방에 튄 물을
다음 사람을 위해서 정성껏 세면대를 닦아주시는 분 등등 고마운
분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솔직히 이런 분들은 눈에 잘 띄지 않지요. 그러나 순교자 현양대회를
잘 마칠 수 있도록 해주신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신 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세 아들에게 엽전 한 냥을 주면서 방 안을 가득
채울 만한 물건을 구해서 오늘 중으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낡은 집단을 사왔지만 방의 한 켠 밖에 채우지 못했지요. 둘째는
쌀을 사왔지만 역시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는 초를
사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초는 방 안을 가득 빛으로 채웠지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촛불로 방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작은 행동 그리고 정성어린 말 한 마디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눈에 잘
띄지 않았던 봉사자들처럼 어쩌면 주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세리였던 마태오를 부르셨지요. 그런데 그 부르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자신의 모든 것, 재산 뿐 아니라 가족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은 엄청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역할은 사실 자그마한
말과 행동으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채울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우리들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거창하고 대단한 것만을 떠올려서 주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못하고, 그냥 세속의 흐름에 나를 맡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랑의 실천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백 권의 책에 쓰인 말보다 성실한 마음이 사람을 더 크게
움직인다(벤저민 프랭클린).
순교자 현양대회 제대입니다.
남녀 사이의 차이
남성은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다.
- 감정의 언어보다 논리의 언어를 더 편안하게 느낀다.
- 스트레스에 덜 민감하게 반응한다.
- 다른 사람의 부정성에 에너지를 덜 뺏긴다.
- 남들에게 더 쉽게 한계를 정한다.
- 문제를 풀 때는 결과 지향적이며 해결까지 가는 동안 감정에는
관심을 덜 둔다.
- 이해하고 느끼는 것보다 행동에 강하게 끌린다.
여성은 다음과 같은 경향이 있다.
- 직관을 더 편안하게 느낀다.
- 본능적으로 더 마음이 가는 대로 따른다.
- 상대방의 감정에 더 잘 공감하고 인내심을 더 잘 발휘한다.
- 기꺼이 더 많이 감정을 표현한다.
- 문제를 해결할 때 감정도 함께 다뤄지길 바란다.
- 행동보다 이해하고 느끼는 것에 강하게 끌린다.
남성과 여성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차이를 잘
이해한다면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어.”라는 말로 상대방의 차이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이 더 상식적이지 못한데 말이지요.
현양대회 미사 전, 고해성사 중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써내려가는 나의 복음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Saint Matthew - Guido Reni
사랑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써내려가는 나의 복음
오늘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듣는 성경말씀들은 거룩한
부르심과 우리의 소명에 대해 되돌아보도록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르십니다(9,9). 단순히 스승 노릇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명을 같이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마태오는 당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동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여 로마
총독에게 바침으로써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세리들을 경멸하고
상종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종교적인
금기였기에 종교생활에서 소외된 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습니다(루카 19,9-10).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인들은 물론
제자들의 눈에도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그토록 중대한 사명을 위해
하필 공적 죄인으로 여겨지던 그를 부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영적으로 탁월한
이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뽑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까닭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의 학교’의 제자로 뽑아
사랑의 교육을 하신 다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비와 선과 정의를 선포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오를 부르신 것도 죄인인 그에게 자비를 체험할 가능성을
열어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기 전에 세관에 앉아 있는 그를
“보십니다.”(9,9) 그냥 외모를 보신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내모는
덫과 같고 탐욕이 솟아오르는 샘과 같은 세관에 붙들려있는 그의
어두운 영혼, 현세 재물에 찌든 마음의 그림자를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바로 그런 끝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주어짐을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시려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세리들과 어울리는 처사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빌론 탈무드, 브라콧 43b) 바리사이들의 해묵은 편견을
뛰어넘어 사랑에 가득 찬 눈길로 소외된 그를 바라보시고 내면의
변화에로 이끄신 것이지요.
사실 마태오는 죄인 취급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할 정도로 강한 자아와 재물에
대한 탐욕과 명예욕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강한 하느님의 사랑 앞에 그는 곧바로 일어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눈길로 마태오를 바라보시고, 사랑으로
부르심으로써 그의 어두운 영혼에 빛을 비춰주시자 그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뀝니다. 그렇게 사랑에 사로잡힌 그는 이제 영원을
향한 사랑의 길을 걷게 되고, 주님 사랑의 발자취와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겨주었고 주님을 위해 순교하기에
이릅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사랑의 부르심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에페 4,1).
곧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4,2-3).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매순간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어주시며, 내 영혼의 어둠을 밝혀주시기 위해 자비의
손길로 초대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을 자각하고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나아가 비록 연약하고 자주 넘어지지만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주님의 그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투신함으로써
내 삶으로 '제5복음서'를 써내려가는 오늘의 사도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마태 9,9)
이스라엘 군대가 강한 이유가 지도자가 항상 선봉에 서서
백성들에게 "나를 따라라!" 한다는데 있다고
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아마도 모세에서부터 시작한 이스라엘 지도자상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도 마태오를 그렇게 부르시네요.
"나를 따라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이 스승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스승이 자신을 택하였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잘 나서 혹은 내가 자곅이 있어서
내 능력으로 좋은 선생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분의 자비와 판단으로 우리를 선택해 주시고
소명을 나누어 주신다는 것이지요.
많은 신자들이 교회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내 성에 차지 않고
나의 영육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고 교회를 떠나 냉담합니다.
이들은 내가 갈 길에 도움되는 것만 찾으며
내 중심적인 길을 가려고 합니다.
제자도의 길은 스승의 뒤를 따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대충 배워서 내 길을 닦아 내 제자를 만들어 내 뒤를 따라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랍비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답니다.
마태오는 당시 죄인으로 공공연하게 취급되는 세리였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냥 두말않고 "예"하며 따라 나섭니다.
우리도 어떤 죄중에 있다하여도 그분이 부르실 때
그냥 "예" 하며 그분 뒤를 따라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을 깊이 때리는
오늘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한상우 바오로 신부|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 9)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주님 사랑안에서 알게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 그대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금의 모습으로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는 조건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부르심이며 다시 새롭게 하는 것이
부르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으로 마태오는 새로워집니다.
따라야 할 분이 진정 누군지를 알게된 것입니다.
우리 삶에 계시는 예수님을 이제야 만나게된 것입니다.
부르심의 역사안에는 부끄러운 죄인의 모습도
병들고 허약한 아픔의 모습도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필요로하십니다.
죄인들을 부르시는 자비의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이란 사그라들지 않는 희망과 가능성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시는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시며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뿐임을
모든 부르심안에서 다시 깨닫게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서울]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2016년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 9,9-13
상봉 역 스크린 도어에서 아름다운 시를 보았습니다. 제목은
‘녹차’입니다.
“산봉우리로 밀려온 바다의 노래
마디게 자란 차나무 몸으로 스민다.
그저 찻물이 아니다.
꽃이었고
바람이었고
파도였고
햇살이었고
눈물이었다.
나무의 혼이었다.
붉은 목구멍을 넘어가는 도반이여!”
매일 아침 묵상을 하면서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서
제가 마시는 차가 단순히 찻잎을 물에 타서 마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차밭을 가꾸는 사람의 정성, 바람, 파도, 햇살,
차나무의 생명을 함께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마시는
차는 저와 함께하는 도반이었습니다. 예전에 광화문의 글판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2011년 정현종의
‘방문객’ 중에서 발췌) 제가 마시는 녹차가 많은 것을 품고 있다면
제가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을까요?
세리였던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온 우주를 품고 있는
분을 만난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추구하던 마태오는 하느님나라를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질을 받던 죄인에서 천국에서
빛나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예수님의 탄생, 표징, 가르침,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마태오 사도의 기억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게 되었습니다. 참된 행복은
무엇인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하느님 안에 하나인 것입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바람과 햇살은 누구의 편도 아니잖아요.’
라는 글이 있습니다. 세리였던 마태오는 사도가 되었고, 죄를
지었던 여인은 부활한 주님을 처음으로 보았고, 돌아온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죄인일지라도, 부족할지라도,
실패해서 넘어졌을지라도 주님을 만나면 치유되고, 용서받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얻습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나의 희망
2016년 다해 9월21일 수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복음: 마태오 9,9-13
하나의 희망
왕년의 미네소타 트윈스의 슈퍼스타였던 야구 선수 커비 퍽켓은
1987년에 그의 팀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어린 시절부터
품어 왔던 꿈을 이루었습니다.
누군가가 트윈스의 유격수 그렉 게인에게 그날 라커룸에서
벌어졌던 장면을 묘사해 주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선수들이
서로 껴안고, 소리 지르고, 서로의 머리 위에 샴페인을 끼얹고,
트로피를 쳐들어 보였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일은, 평상시 열정이 넘치던 퍽켓이 단
10분 정도만 축하 분위기에 합류했다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한 걸상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게인은 퍽켓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퍽켓은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말했습니다.
“이것이 전부라면, 인생은 너무도 허무해….”
사람은 각자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인생의 목표가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행복에 대한 믿음이
희망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각자 모든 사람이 다 잘못된 희망을
지니도록 우리를 속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행복의 소유주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희망이든
텅 빈 허무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것에 희망을 두고 거기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 완전한
빈털터리가 되어버립니다.
고골리라는 사람이 쓴 단편소설 ‘외투’라는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 러시아의 수도인 페체르부르크에
아까끼에비치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노인에게
“당신의 평생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묻기라도 하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매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아주 고급 외투를 갖는 것이오.”
그 노인은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평생 동안 일하고
저축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80루블의 돈을 저축하여 꿈에
그리던 그 외투를 샀습니다. 그 날은 노인에게 성공한 날이자 목적을
이룬 날이었기에 큰 기대감과 흥분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외투를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강도를 만나서 비싼 고급 외투를 강탈당했습니다. 그 날 이후
그 노인은 좌절의 늪에 빠졌고 너무 속상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세상 것들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종말이 대부분
이럴 것입니다. 속지 않으려면 우리의 희망을 바로잡아야합니다.
사람들이 행복을 향해 지닌 희망은 그 사람 수만큼 다양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희망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한 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령
한 분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1,13)
인간이 청할 수 있는 것 중 성령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이고 기쁨이고 평화이고
행복입니다. 행복의 열매를 맺는 원천은 유일하게 성령밖에는
없습니다.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돈과 쾌락이 삶의
목표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 하나를 위해 자신이 죄인이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한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희망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참 행복입니다. 만약 우리가 참 믿음이 있다면
단 한 분이 주시는 단 하나의 희망만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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