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710. 묵상글 (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성소와 소명, 영광일까? 부담일까?. 등 )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성소와 소명, 영광일까? 부담일까?
성소(聖召)와 소명(召命)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제자에서 사도가 됩니다.
제자가 자기가 스승을 선택한 측면이 있다면
사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선택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제가 결론처럼 말씀드리면 우리도 제자에서 사도가 되어야 하고,
성소를 받아 소명을 살아가는 사도가 돼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저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얘기합니까?
왜 이것을 강조하여 얘기합니까?
제가 이러지 않았기 때문이고,
여전히 이러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명을 잘 살려면 성소부터 잘 받아야 합니다.
부르심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기이고,
소명을 잘살지 못한다면 이 첫걸음을 잘못 떼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머리에서 성소를 받아들이고,
중요한 때 성소로 받아들인 것은 오래되었지만
마음으로부터 그리고 늘 성소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아직도 완성을 향해 현재진행 중입니다.
저의 경우 처음엔 내가 주님을 스승으로 선택했다가
스승을 포기한 뒤에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내가 주님을 선택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음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해야
그때 주님은 진정 나의 주님이시고 나는 그분의 진정한 종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진정 나의 주님이라면,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의 종이라면
성소 의식뿐 아니라 소명 의식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주인이 종을 옆에 끼고 살려고 부릅니까? 일을 시키려고 부르지!
옆에 끼고 사는 것은 제자이거나 애인이지 종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를 당신께 가까이 부르신 것은
왕비처럼 애지중지하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을 시키기 위해 곧 소명을 주기 위해 부르신 것이고,
가까이 두고 가르치신 것도 사도로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주님께 가르침도 받고
소명까지 받은 종을 일컬어 사도라고 하는데
받은 소명이 뭐냐 하면 길 잃은 주님의 양들을 한데 모으는 것이고,
여기저기 흩어진 주님의 양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와 달리 사도란 이런 존재입니다.
주님께 갔다가 이웃에게 가는 존재이고,
주님께 받아서 이웃에게 주는 존재이며,
주님께 받은 가르침을 이웃에게 나눠주는 존재이고,
자기가 받은 가르침을 이웃도 주님께 받으라고 이웃을 모으는 존재입니다.
이제 관건은 이것입니다.
제자입니까? 사도입니까?
내게 소명은 무엇입니까?
영광입니까? 부담입니까?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보잉에서 30년 넘게 일하던 멀덜리는 포드모터컴퍼니 설립자의 증손자인 빌 포드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위기에 있는 포드모터컴퍼니 대표를 맡아 사회 회생 작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2006년에 멀덜리가 포드를 맡았을 때, 그 해에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예상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처음 최고위 임원들과 사업 계획 검토를 위한 주간 회의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각 임원이 맡고 있는 주요 프로젝트 5개씩을 3가지 색깔로 표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녹색은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고, 노란색은 일부 문제가 있으나 해결책을 찾아 작업중이라는 뜻이고, 빨간색은 문제가 생겼고 해결책도 찾지 못한 상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임원들의 프로젝트 보고에서 제일 많은 색깔은 무슨 색이었을까요? 그 해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모두 빨간색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색깔이 녹색이었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잘못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임원들은 문제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임 대표에게 잘못 보이면 안 된다는 임원들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를 찾아야지만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숨기려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직장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의 옳음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문제를 발견한 사람만이 빨간색을 녹색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 성소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새영세자의 숫자보다 냉담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이를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모습에서 방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악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관심사는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따랐고 성공적으로 전교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과연 어디에 있어야 우리 교회가 더 주님께서 원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의 편에 서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으로 인간에게 가까워진다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우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우리는 어제까지 <마태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준 기적 이야기들을 들어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제 10장의 “파견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또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일을 하는데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십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해 주시는 동시에, 그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은 신적권위와 능력, 곧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은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처럼, “사도”란 “파견 받은 자”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한 분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파견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견 받은 자의 재능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파견 받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야할 곳을 말씀해주십니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라.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의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마태 10,5-6)
이러한 전도의 대상 지역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키는 것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곧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의 우선순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뽑으시면서 “먼저” 사도에 합당한 당신의 권위와 힘을 주셨다는 사실로, 이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이곳에 모여 살기에 합당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직무나 소임을 받았다면, 이미 그에 합당한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재능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는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먼저” 그 복음전파의 대상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흘러넘쳐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동시에,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파견하신 예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제자요, 사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김없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를 불러주신 분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한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뽑아서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자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마태오라는 사람도 있고, 급진적인 열성 당원인 시몬도 있으며 요한 세례자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됨으로써 죽음을 불사하는 증거자들이 되었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우리가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7대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였던 26대 사목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에 온 지도 5개월이 되었습니다. 27대 사목회 회장단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서 요셉, 박 에드워드, 김 다윗, 홍 고스마” 본당에는 회장단과 더불어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전례, 구역, 친교, 선교, 새 신자, 청소년, 교육, 홍보, 정보기술, 여성, 사회 사목 분과가 있습니다. 세대별 모임도 있고, 주일학교와 한국학교 담당자도 있습니다. 사목회와 함께 종신 부제, 수도자, 성직자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27대 사목회가 해야 할 사명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겁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러운 영’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이웃의 의견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을 꼴찌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했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있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아쉬운 것이 없다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여인 중에 복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로 넣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면, 희생의 마음을 지닌다면, 가난한 마음을 지닌다면, 굳건한 믿음의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는 능히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줄 수 있습니다. 27대 사목회가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분명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27대 사목회가 성과와 결실을 먼저 얻으려고 하면 시련과 고통이라는 장애물을 만날 것입니다. 27대 사목회가 더러운 영을 먼저 물리칠 수 있다면 겸손과 희생 그리고 가난과 믿음의 마음으로 무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실 겁니다. 주님! 27대 사목회를 축복해 주시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되게 하소서.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진종오라는 유명한 사격 선수가 있습니다. 올림픽이라는 큰 무대에서 사격 시합을 하는 그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었습니다.
사격 경기를 보다 보면 모두가 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총을 장전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을 충분히 활용해 과녁을 조준합니다. 숨을 죽이고 과녁이 조준되면 방아쇠를 당깁니다.
선수 중 과녁 즉, 목표를 보지 않거나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 선수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오늘 주님도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제자들이 가야 하는 곳이 어디인지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이 가야 하는 목적지,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목적지, 그들이 하늘나라에 관해 말해야 하는 목적지는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파견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다른 말로 ‘신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가 바로 제자들의 목적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려오는 소리가 바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제자들은 그렇게 우리를 향해 파견되었고 그 제자들은 다시 우리를 파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 이스라엘 민족’은 서로가 서로에게 복음이 되어주고 하늘나라를 선포하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한 사람만이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의 제자이고 우리가 모두 파견된 사람입니다.
오늘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주세요. 서로가 서로에게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주세요.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
전시회
지난 5월에 ‘전시회’를 했습니다. 제가 그린 이콘 몇 점과 이곳에서 이콘 그리기를 배우는 분들의 작품을 모아서 진행했습니다.
사실 처음 이콘을 접할 때 전시회까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의 취미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저는 매년 무언가에 도전합니다.
사제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생동감을 가질 수 있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 삶의 기쁨과 의미는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화 그리기에 도전했었고 그 덕에 전시회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시회를 해서 기뻤던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도전해서 결과를 얻었다는 것에 기뻤습니다.
삶의 작은 기쁨을 위해 도전하세요.
삶의 작은 생동감을 위해 도전하세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어떤 것이든 좋습니다.
그 안에서 기쁨과 의욕의 피어남을 느낀다면 말입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언제나 주님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ㄴ.4ㄴ)
오늘 화답송 시편 두 구절이 참 멋지고 은혜로워 마음에 와닿습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주님을 찾아 만날 때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을 때 기쁨이요 우리 믿는 이들이 언제나 찾을 바 주님의 얼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저절로 목말라 주님을 찾게 되고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 희망에 기쁨입니다.
내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제 사제서품 35주년이 되는 날이네요. 수도사제 생활 초창기부터 참 많이 강조해온 삶의 중심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이며,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임을 참으로 많이 강조했습니다. 이 넷은 우리 삶의 필수 요소입니다.
삶의 중심, 삶의 의미,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없이 어떻게 광야 인생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또 하느님 대신 이 자리에 누구를, 무엇을 놓을 수 있을런지요! 살아갈수록 사람됨에 얼마나 본질적이요 필수적 네 요소인지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삶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인 겸손과 진실, 안정과 평화, 위로와 치유, 희망과 기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참된 삶이요 두려움과 불안도 점차 약화됩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도 좋습니다.
“어른의 사과는 품위에 손상을 주는 것이 아닌
품격을 높이는 것이다.”<다산>
이런 겸손한 어른이야 말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정주의 삶입니다. 이래야 뿌리 없이, 중심 없이 방황하거나 표류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뿌리 없이, 중심 없이 표류, 방황하는 이들을 얼마나 많은 세상인지요!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의 자랑이자 축복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과 더불어 삶의 질서입니다. 이래야 안정과 평화요 건강한 심신에 영육의 삶입니다. 그래서 수도원 일과표도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상징하는 미사가 하루 삶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기도와 노동, 독서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수도생활이 아니더라도 건강한 영성생활을 위해서 나름대로 균형과 조화의 일과표에 따른 삶을 권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기 위한 삶의 세 요소를 많이 강조합니다.
1.기도하라.
2.일하라.
3.공부하라.
여기에 하나를 첨가한다면,
4.걸어라.
‘걸어라.’ 운동역시 필수이며 가장 좋은 운동은 걷기입니다. 운동이자 동시에 기도가 될 수 있는 걷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생활화하는데 필수적 4대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사도로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원도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안으로는 배우고 관상하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파견되어 선교 활동하는 주님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사도로 파견하셨듯이 주님은 날마다 당신 제자로 뽑으신 우리를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이자 사도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십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죄와 병으로 얼룩진 삶의 현실이기에 더러운 영들의 축출과 병과 허약함의 치유는 필수요 교회의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르신 열두 사도의 면면이 독특합니다. 혼자만의 제자요 사도가 아니라 더불어 교회공동체에 속한 제자요 사도의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획일성의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일치 교회 공동체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당시 주님의 제자들이자 사도들에게 주신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가서 길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이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듯 우리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그대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이 됩니다. 저절로 복음 선포의 선교요 길잃은 이들도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이끌게 됩니다. 예나 이제나 길을 잃고, 희망과 꿈을, 빛을 잃고 절망의 어둠중에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의 제자요 사도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한 하늘 나라 꿈의 실현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회개를 촉구하는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었을 때 우상숭배로 인한 그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그대로 정의의 예언자 호세아가 전하는 하느님의 심판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들도 많이 만들고, 땅이 좋아질수록 기념 기둥들도 좋게 만들었다.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하니, 이제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분께서 제단들을 부수시고, 그 기념 기둥들을 허물어 버리시리라. 사마리아는 망하리라. 그 임금은 물 위에 뜬 나뭇가지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죄악인, 아웬의 산당들은 무너지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그 제단들 위까지 올라가리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떠날 때 내외적 비참한 상황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무질서하고 혼란한 삶인지요! 하느님이 아닌 스스로 하느님 중심을 잃어 자초한 심판 현실이요, 우리에게는 회개의 촉구가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호세아를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희망을 북돋아 주시며 우리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십니다.
참사람의 원형이요 예수님의 예표같은 호세아가 참 멋집니다. 참으로 멋진 하느님에, 멋진 호세아 예언자입니다. 정의와 심판의 예언자이지만 동시에 희망과 위로의 예언자 호세아의 반갑고도 고마운 말씀이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그대로 회개 실천의 구체적 내용이 참 아름답습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호세10,12). 아멘.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마태 10,1)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마태 10,5)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당신이
될 수 있는
데까지
가까이
더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당신의
사람이고
싶으니
당신을
나눌 수 없는
데까지
멀리
더 멀리
아득히 멀리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가서 선포하여라
사도들의 직무기 유례없이 위대한 것이었음을 아시겠습니까? 사도들의 존귀함을 아시겠습니까? 그들은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세나 예언자들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신기한 것들에 관해 말했습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은 지상의 일시적 약속에 대해 말했지만, 제자들은 하늘 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이 전하는 말씀의 우월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겸손한 순종 때문에 예언자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과 달리 자신의 임무를 꺼리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장차 겪을 위험과 싸움과 견디기 어려운 재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장차 올 나라의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8
영성은 깨어남이다
젊은이, 내가 이르노니, 일어나거라(루카 7,14).
이 구절에서 예수는 잠을 자는 것과 죽은 것의 차이를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본 설교의 기초를 이루는 루카 복음 7장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사람들을 잠과 죽음에서 일으킨다는 증거를 얻게 된다. 여자 아이를 잠, 곧 죽음에서 일으킨 것을 바탕으로 한 설교에서, 엑카르트는 “일어남”을 네 가지로설명한다.
“영혼은 네 단계를 거쳐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첫째 단계는 두려움과 희망과 갈망이 영혼 안에서 자라는 단계입니다. 영혼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둘째 단계는 두려움과 희망과 갈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는 영혼이 모든 시간적인 것을 잊는 단계입니다. 넷째 단계는 영혼이 하느님께로 나아가,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영혼은 시간적인 것과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하느님 안으로 녹아 들고, 하느님은 영혼 안으로 녹아듭니다. 그러면 영혼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느님 안에서 하게 됩니다(200).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6절: 청빈운동, 이단과 이단 신문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11∼12세기의 수도자 개혁은 원시교회의 사도적 청빈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사도적 생활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순회 설교가의 생활을 한다는 이상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었다 사도적 생활에 대한 이 욕구는 십지군의 감명으로 전 서구를 사로잡은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비단 성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만이 아니라 고향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구세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그들을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자극하였다.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을 가졌다. 수도자와 성직자들은 성서를 읽는 데 몰두하였다. 일반 평신도들도 조그마한 모임에 함께 모여 성서를 읽고 그 해석을 들었다. 그들은 직접 성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을 알려고 하였다. 그리스도교 백성은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나 노르베르토 같은 위대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멀리서 무리지어 모여들었다.
물론 예수의 가난한 생활과 당시 현상과의 비교를 통해서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반대로 쉽게 발전할 수 있었다. 중세의 봉건적인 교회는 주교들이 동시에 영주였던 독일만이 아니라 프랑스 • 영국 • 이탈리아에서도 돈이 많았다. 어디에서나 교구와 수도원들은 귀족이나 권력가들의 수중에 있었다.
성직자는 영적 생활을 결정하였고, 또 그는 봉건군주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번영하기 시작한 도시들에서 자각한 시민계층이 성장하였고, 이 계층은 성직자의 지도에 더이상 순순히 자신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각성하고, 종교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판단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평신도가 성서를 손에 들게 되었다. 이러한 탐구가 교회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고, 진지한 내적 개혁에 유용하다면 그것은 축복에 찬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과 결부되어 화가 생길 위험도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과연 교회가 그 운동을 장악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것이 교회를 배반하게 되느냐에 있었다.(224)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10,6~7)
어제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풀이 죽은 듯 보이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9,36~38) 예수님께서 언급한 ‘수확할 일꾼’이란 처음부터 씨를 뿌리고 모를 내는 일꾼이 아니라 이미 주인이 시작해서 농사지어 놓으셨고, 다만 수확할 것을 거두어 드릴 일꾼이 적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확할 것을 거두어 드릴 일꾼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일꾼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들이는 일인데, 예수님께서 하시고 이루신 일은 곧 사람을 살리는 일 곧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강생과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요19, 30)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루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승할 일꾼들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완성해 놓으신 인류 구원 사업을 계속할 열두 사도들을 뽑으셔서 삶을 통해 가르치시고 파견하셨습니다. 구원 사업에 부르심받은 이들은 많지만, 예수님이 하신 방법대로 수확할 일꾼은 많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22,14) 분명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말 그들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고 했지, 예수님 방식대로 수확을 거두어들이려는 일꾼은 오직 예수님께서 선택한 소수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하였지만, 정말 믿을만할 예수님의 일꾼은 많지 않았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꾼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 먼저 홀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시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아버지의 뜻을 지속해서 실천할 사도들을 하나하나 이름 불러 뽑으셨습니다. (10,2~4) 제자들이 예수님을 뽑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뽑으셨습니다. (요한15,16 참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14-15)라는 점입니다. 즉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점은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과 몸과 마음이 함께 머물면서 삶을 통한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육은 이념적 교육이 아니라 스승이신 주님과 함께 삶을 통해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터득되고 내면화되어가는 삶의 교육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삶의 교육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처럼 군중들을 가엾은 마음에서 대하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엾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병자들을 고쳐줄 수 있는 능력 가지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영과 마음으로 충만할 때 수확할 힘을 길러내고, 수확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선택하고 양성시키신 다음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10,6)하고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열두 제자의 명단(10,2~4)을 유심히 살펴보면, 가장 인상적이고 특징적인 점은 이들 선택된 제자들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사람,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부르심 받고 선택받은 것은 우리 역시도 제자들과 마찬가지 혹 어쩌면 더 부족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분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코린1,26.29) 라고 설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택 기준은 그들이 부르심 받기 이전의 출신 성분, 교육 정도, 성격, 직업의 상태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미래에 ‘그 무엇이 될 가능성’을 꿰뚫어 보시고 또한 하느님의 은총에 얼마나 순응하고 조화할 수 있는 사람들인가를 보고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라 봅니다. 그러므로 제자로 부르심 받은 이들은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차츰차츰 변화되고 성숙 되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양성 과정을 통해 사도들은 자신들의 지식, 능력 그리고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탁하면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10,6.7)라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로써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에 의존하고,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갈 단순하고 순박한 믿음을 지닌 하느님의 사람, 복음 선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사람 곧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하느님과 함께 머물고, 머물면서 체험한 바를 삶을 통해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존재가 되어가도록 노력하며 살아갑시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 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시34,9)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 열세 번째 일꾼으로 부르심 받은 우리는 /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6&id=2099144&menu=4770
박윤식 [big-llight] 2024-07-09 ㅣNo.174069
예수님은 기도하는 가운데 열두 제자를 뽑으시며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라고 말씀하신다. 어쩌면 그들은 기득권과 정통성이 없는 변방에서 고통만 받는 이들이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렵고 가난한 삶을 꾸리며 하루하루 겨우 한숨으로 연명해 가는 이들이리라. 따라서 예수님의 복음 선포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너무 미약하고 부족한 것 같은 이들이다.
특히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한 수장 베드로, 백성들의 세금을 수탈하던 마태오, 그와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하던 열혈당원 시몬, 어머니의 도움으로 첫째와 둘째 자리를 탐냈던 야고보와 요한 등, 하나같이 어디 든든한 구석이라곤 한군데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즉시 응답했기에, 열두 사도로 교회의 기둥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길 잃은 양’은 누구일까? 우리가 종종 본당에서 말하듯 단순히 비신자나 냉담 교우만을 일컫지는 않는다. 주위에는 말 못할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이 참 많다. 조당에 걸려 교회 생활이 정상적이지 못하는 이들, 죄인 취급을 당하며 살아야 하는 에이즈 환자들과 동성애자들, 인종적 차별을 받는 이주 노동자들, 한때의 실수로 저지른 범죄로 인해 전과자가 된 이들, 여러 연유로 결손 가정이 되어 끼니 걱정하는 이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들은 이 시대의 ‘길 잃은 양’으로 몰리면서, 함께 살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단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어, 온 인류에게 복음을 전할 도구로 삼고자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부르시어 당신 제자로 삼으셨다. 이렇게 그분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마치 들판에 나가는 아기 사슴들처럼, 예수님의 보호로 힘겹게 그 첫발을 내딛었다. 그 첫 걸음은 비록 미약했지만, 지금의 교회 모습을 있게 한 발걸음이요, 또한 마지막 날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의 디딤돌이 될게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이렇게 ‘부르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저마다의 개인마다 그 고유함을 잊지 않으시고 당신 일을 하도록 각별히 부르셨기에, 그 이유가 자신만의 뛰어남과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할게다. 그래야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믿는 대단한 일이, 사실은 주님께서 하실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명심하고 행동하리라. 세례 받은 우리 또한 같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스스로를 ‘주님의 도구’로 기꺼이 내어놓는 마음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에 개입하시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음을 믿는 이들이다. 그분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자 하셨다. 그래서 열둘을 부르시어 세상 속에서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되게 하셨다. 이 명에 따라 그들은 이스라엘 집안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길 잃은 양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우리는 그분 도구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 선포의 권한을 부여받은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렇게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일구는 새 사명을 부여받은 일꾼으로 매김 되면서 그분의 자랑스러운 열세 번째 제자가 되었다. 세례 받은 이들은 다 예수님 제자이다. 허물이 있건 없건, 죄 경험이 있건 없건 그분께서 부르신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 안에도 그분 능력이 있다. 그러니 포기하지를 말자. 그런 열세 번째 제자인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 이끄심을 잊지 말아야 할게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느님을 잘 알고 있고, 하느님께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 구원의 역사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에도 익숙하였고, 회개하는 삶이 무엇인지도,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1,11)라는 요한 복음서의 말씀처럼, 이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움직이나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나요?
아니면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또한 그분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분과 상관없이 사는 삶에 더 익숙하지는 않나요?
익숙하거나 매우 잘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비록 함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먼 관계일 수 있음을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들음’이 사라진 관계를 하느님과 맺지 마십시오.
들음이 끊긴 삶은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 할지라도 서로 멀어지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지금 자신이 그분에게서 멀리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아멘.
----------------------------------------------------
==========================================================
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15)
==========================================================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며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셨던 것과 똑같습니다.
당신께서 하시던 일을
이제 제자들이 이어서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것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도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파견된 제자들은 이제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게 됩니다.
물론 마태오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든 민족에게 파견하십니다.
하지만 파견의 첫 대상은
사마리아인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제한됩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믿고 기다려온 사람들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메시아로서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니지만
메시아에게서 권한을 받아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파견의 사명을 살아가는 데
그것을 원하는 이들과 함께한다면
그 삶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거부의 경험보다는
수용의 경험이 더 클 것이라 예상되어
우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하신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수용의 경험은 제자들에게 중요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만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별 볼 일 없는 나이지만
예수님께 받은 권한 덕분에
예수님 덕분에
사람들이 나를 받아준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길을 꾸준히 걷는데
충분한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도
그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주님의 파견을 살아갑니다.
그 파견을 살아가는 힘은
우리 역시 수용에서 올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에서 오는 힘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 하고 외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면서,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제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예였겠습니까?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종신서원때, 사제수품식때,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나 수도원 양성 책임자는 회중들 앞에서
저희의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잔뜩 긴장해있던 저희는 이름이 불려지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 주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과 죄 투성이인 저를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나,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면서, 또 다시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사도를 부르신다.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 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결국은 유다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변화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므로 복음이 전해지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비교’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여야 합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가정의 복음화’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1) 열두 사도의 명단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의 이름을 지우고 ‘마티아’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순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세속의 역사 기록에서는 부끄러운 일들을 그런 식으로 감추고 덮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렇게 감추고 덮어버린 것들을 후세의 학자들이 다시 찾아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한 책이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라고 복음서 저자들에게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부끄럽다고 해서 감추고 덮어버렸다면, 그래서 성경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하나라도 들어 있다면, 바로 그 하나 때문에 성경 전체가 권위와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간문에,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고,
유다는 영원히 ‘배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그가 배반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뽑으셨는지,
모르셔서 뽑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일에 아시면서도 뽑으셨다면, 유다에게 배반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되고, 모르셔서 뽑으셨다면 주님의 ‘전지전능’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 문제는 세상 종말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이 기도는, 주님께서 유다에게 사도 직무를 맡기신 일은 취소되지 않았지만, 그 직무는 유다 자신이 ‘내버림으로써’ 마티아에게로 넘어갔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은 사람 쪽에서 그 은총 속에서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내버린다면, 그 사람은 은총을 잃게 되고, 그 은총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2)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그 ‘나중’은 ‘성령 강림 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ㄱ).”, 또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ㄴ).”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그냥 ‘유대인들’이라는 뜻입니다.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앞의 9장 36절에 있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가는 것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유대인들에게만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뽑으셨습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만’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먼저 뽑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2) 사도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는 믿음과 용기로 가득 차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지만, 성령 강림 전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3) 이방인들 쪽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선 먼저 하느님부터 믿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예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지는 않고 예수님의 복음부터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놓아두고, 즉 자기 가족을 놓아두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인데, 우선 먼저 자기 가족부터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의 복음화’가 세상의 복음화보다 먼저입니다.>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할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보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가 당신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 동안 어떤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겠는지를 보셨지요. 여기서 중심이 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온전히 머무르며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그분 뜻을 충실히 따를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을 위해, 그분 뜻에 따라 쓸 의지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신 겁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그렇게 당신 곁으로 부르신 제자들 중 열 둘을 ‘사도’로 뽑으십니다. 사도는 제자와는 엄연히 다릅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머무르며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이를 뜻하지만, 사도는 그 스승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이로써 특별한 소명을 받고 파견되며, 그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과 권한까지 받은 사람을 가리키지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각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대사는 파견되어 근무하는 그 나라에서만큼은 본국의 대통령과도 같은 권한과 책임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당신 또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의 구원이라는 특별한 소명을 받고 파견되신 존재임을 천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이처럼 사도들은 자신이 파견되어 활동하는 그곳에서만큼은 주님께서 맡기신 특별한 책임과 소명을 다하는 존재로서 그분과 ‘하나’로 일치되어 있기에, 그들은 영광스럽게도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과정에서 보여주신 것과 동등한 권한과 능력을 부여받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포함으로써, 그것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곧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며 회개하도록 이끌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자신들이 부여받은 능력과 권한을 과시하거나 뽐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마치 권력처럼 휘두르며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들어서도 안됩니다. 자신에게 그런 권한과 능력을 주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봉사하는데에 전념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매 미사가 끝날 때마다 사제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세상으로 ‘파견’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과 그분 뜻을 알려야 할 ‘사도’로서의 소명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적당히 대충 살아서는 안되지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야 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는가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데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로 가는게 아니라, 나아갈 길을 잃고 방황하며 슬픔과 절망에 빠진 이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
240710.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삶
<2024.7.10> 아침을 여는 묵상 (렘 31:1~9절)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삶❞
❚ 우리를 향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온전히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영원히 노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1~3절).
앞장에서 시작된 이스라엘의 회복의 내용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때를 가리키며, ‘이스라엘의 모든 종족’은 이스라엘 12지파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적용될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 “원수의 칼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을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을 편안히 쉬게 하겠다...”(2절,쉬운성경)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이방 국가에서의 포로 생활이라는 준엄한 징계에 처하게 하셨지만, 그들을 사랑하시므로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정한 기한에 이르러 다시 회복 시키시겠다(3절) 선언하십니다. 즉,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불변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 대신 평강을 주고, 무거운 짐 대신에 참된 안식을 가져다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누리게 된 것이 오늘 내 자신에게는 가장 큰 축복임을 고백합니다. 나아가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할지라도 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함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까지도 품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실아 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영원한 사랑과 은혜는 바로 ‘복음’입니다. 이처럼 놀라운 은혜를 입었기에 하나님을 영원히 노래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4~6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처녀 이스라엘아’로 부르시면서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춤추며 나오리라...’(4절)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감사와 기쁨으로 반응하며 그분의 구원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사마리아 산으로 돌아와 다시 경작을 하며 소출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5절).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이 도시의 회복은 결국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에서는 파수꾼이 예배의 나팔을 불 것이며, 백성들은 시온으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6절)입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끈 우상숭배의 온상이었던 단이나 벧엘이 아닌 ‘시온’이 예배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거하는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탄식 대신 즐거움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상처로 인한 고통 대신에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참된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줄 수 없고,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과 복음은 오직 하나님이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신을 당신의 자녀로 세워 주신 그 은혜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의 말과 행동, 삶의 모든 부분에서 원망과 불평, 탄식을 몰아내고 주님의 은혜를 노래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7~9절).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약속을 들은 자들은 기뻐하고 노래하면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라며 열방이 들을 수 있도록 외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7절).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북쪽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흩어진 땅 끝에서도 모으실 것입니다. 돌아오는 사람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도 포함 되어 있습니다(8절).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은 장소나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애통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계곡과 곧은 길을 통과해서 무사히 귀환 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처럼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을 나의 장자...’(9절)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와 같은 인생을 긍휼히 여기셔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고, 하나님 나라의 주인 되는 특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내 인생은 세상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겉모습과 소유물에 따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여 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리를 구원하여 자녀 삼아 주시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 분으로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내 자신의 모습과 삶이 비록 초라해 보이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음을 잊지 말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며 살아가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영원한 사랑의 증거인 복음 안에서 참된 구원의 기쁨과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만나든지 우리를 양자로 삼아 주시고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렘 31:1~9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