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아내들
권혁재
십팔 세기 열녀가 돌아왔다고
최신식 기계에 느슨해진 아내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문명에 바랜 애교를 한 세기로 앞당겨 놓고
돈 버는 노비로 전락한 남정네를
전란에 출정하는 전사로 치켜세우는
낭창낭창한 목소리의 아내가 돌아왔다
가족관계만 분명한 아내의 아내들이
억지 밥상을 함부로 차려내도
열녀문을 밀고 들어오는
새로운 아내들이 먼저 집을 장악했다
규방의 불빛 아래 나직이 속삭이는
아내들의 거짓 없는 시대가 왔다
--애지사화집 김선옥 외 {꽃밥}에서
그 옛날에는 전쟁이 일상사였고, 그 다음으로는 먹이사냥과 식량확보가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가 있다. 네것과 내것의 경계도 불분명했고, 오늘날과도 같은 국가도 없었기 때문에 전쟁과 먹이사냥과 식량확보는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수단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외부의 적과 싸우며 먹이사냥과 영토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여자는 아이들을 양육하며 문전옥답을 가꾸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든 도덕과 법과 가부장적인 권력은 남자에게 집중되었고, 여자는 일부종사와 여필종부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네것과 내것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국가와 국가의 영토도 분명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소유권의 분쟁과 전쟁은 일상사가 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산업혁명과 농업의 발전에 따라 먹이사냥과 식량확보도 대부분이 해결되었고, 어느덧 남녀평등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여성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참정권을 획득하며 사회적 지도자로서의 수직 상승을 하는 동안, 남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형편없이 추락했고, ‘명령하는 아내’와 ‘복종하는 남편’의 관계가 보편적인 관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소위 남녀의 사회적 지위가 역전된 것이고, 오늘날의 남편이란 ‘저출산-고령화 현상’과 함께, ‘토사구팽의 노비’의 신세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절대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어 있고, 오늘날은 ‘여성상위시대’의 빈틈을 헤집고 권혁재의 시에서처럼 [AI 아내들]이 등장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AI 아내들]은 “십팔 세기 열녀”들처럼 일부종사와 여필종부를 맹세하고 그동안 “돈 버는 노비로 전락한 남정네”들을 천하무적의 전사로 치켜세운다. 요컨대 인공지능의 아내들의 출현을 너무나도 잘 인식하지 못했던 여성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낭창낭창한 목소리”로 “열녀문을 밀고 들어오는/ 새로운 아내들”의 침공을 막을 수는 없게 된 것이다. [AI 아내들]은 말대답을 모르고, 그 어떠한 어려운 문제와 짜증나는 일을 시켜도 단번에 다 해결해준다. 그 어느 현자보다도 만배는 더 뛰어나지만, 언제, 어느 때나 묻는대로만 대답하고, 바가지를 긁을 줄도 모른다. 동서양의 역사와 전통과 고전들을 다 섭렵했지만,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빼돌리지도 않으며, 주인의 의사에 반하여 젊은 사내들과 연애를 하거나 주색잡기에 빠지지도 않는다.
[AI 아내들]은 플라톤적인 천사들이자 영원한 현모양처의 전범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린 아들과 딸 노릇을 할 수도 있고, 하녀 노릇과 정부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엄마와 할머니 노릇을 할 수도 있고, 최고급의 요리사와 세계적인 가수 노릇을 할 수도 있다. 언제, 어느 때나 상냥하고 친절한 안내양 노릇을 할 수도 있고, 피곤하고 지친 남편을 위해 자장가를 불러줄 수도 있다. 사회적인 성공과 출세의 보증수표를 마련해 줄 수도 있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사생결단식의 전투를 끝낼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AI 아내들]은 “가족관계만 분명한 아내의 아내들이” 아닌 “거짓 없는” 아내이며, 영원한 현모양처이자 전지전능한 수호천사라고 할 수가 있다.
--김선옥 외 {꽃밥}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