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재판관 후보의 가슴 아픈 사연 '정계선 판사'
- 서울대 의대 포기 후 법대로 변경
- 영화를 보다 '정의 생각하고' 진로를 바꾸다!
- 일자리를 잃은 아버지 '고정된 성 역할 이데올로기' 고민
[사진=연합뉴스]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계선 서울서부지방법원장의 헌법재판소 재판관 후보의 인사청문회가 있었다. 그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발언한 인사말은 많은 청소년들에게 진로, 진학, 삶의 목표 등의 관점에서 귀감이 돼 소개하고자 한다.
정계선 후보자(55·사법연수원 27기)는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에서 태어났다. 1988년 충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인권 변호사인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진로변경을 결심해, 이듬해인 1989년 다시 대입시험을 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1995년 제37회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가 청문회에 출석해 발언한 인사말이다.
존경하는 인사청문특별위원회 박지원 위원장님, 그리고 위원님 여러분 여러 의정 활동과 시급한 상황으로 바쁘신 가운데에도 귀중한 시간을 내어 인사 청문회를 준비해 주신 위원장님과 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청문회는 국민의 대표이신 위원님들께서 헌법재판관으로서 저의 자질과 능력이 충분한지를 검증하는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저라는 사람에 대해서 위원님들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1969년 충북 충주에서 2녀1남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님은 유머러스하고 교육열이 강하신 분이셨고, 어머님은 부지런하고 헌신적인 분이셨습니다. 가난했지만 화목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상황은 아버님이 실직하신 후 바뀌었습니다. 어머님이 한복 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지게 되어 아버님은 생전 해보시지 않은 가사 일을 일부 하시게 되었지만 그 역할을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셨습니다.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는 무력감은 때로 폭력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가부장제, 정상 가족, 고정된 성 역할 이데올로기가 여성뿐 아니라 남성을 얼마나 억압하고 화목한 가정을 망가뜨리는지 저는 보았습니다. 양성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할 혼인과 가족생활은 가사 노동의 가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탈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의 모습을 사회가 수용하고 지원하여야 한다는 지금의 제 생각은 성장 과정의 경험과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1987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상경하였습니다.
주변의 권고로 의대에 진학하였습니다만 수업에 들어가지도 당시 학교 곳곳에서 열리던 집회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방황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후생관 한 구석의 영화 상영관에서 보냈습니다.
그때 본 영화 중 하나가 알파치노 주연의 ‘모두에게 정의를’ 입니다.
최종 변론에서 알파치노는 이렇게 외칩니다. '저스티스' 그 순간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되뇌게 되었고, 법을 공부하면 정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여 법대 진학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88년 저는 법대에 들어갔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은 제게 사법시험을 준비할 힘을 주었습니다. 법을 사람을 위한 따뜻한 것, 실제로 작동하여 정의를 실현시키는 것으로 만드는 법조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사법연수원 생활을 하면서 법관이 되는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을 굳힐 때쯤 수업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판사란 만들어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고, 실정법에 충실하게 재판을 하였을 뿐인데, 불의한 정권에 협력했다고 할 수 있는가?
막 판사가 되려고 하는 자에게 던져진 묵직한 질문이었습니다.
법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비판적 사유와 성찰이 없다면 주어진 상황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여도 어느 순간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두려운 교훈을 주었습니다.
저는 1998년 서울지방법원 소속 예비 판사를 시작으로 26년 넘게 법원에 근무하면서 민사, 형사, 행정 등 여러 분야의 재판을 하였습니다. 사법연수원 교수와 법원장으로서 교육과 사법행정 업무도 수행한 적이 있습니다. 동료, 선후배, 법관들, 함께 근무한 직원들로부터 너무 큰 가르침과 배려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규정을 마음에 새기고 재판에 임하였습니다. 법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끊임없이 연구하고 균형 있는 자세로 당사자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타당한 결론을 내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다만 항상 똑같은 정도로 그러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처음에 10년은 많이 힘들었습니다. 혼인, 출산, 육아와 거의 동시에 시작한 일에 대한 사명감이 조금씩 시들해져 갔습니다. 박완서 선생의 말처럼 여러 다른 여성의 희생 하에 고군분투하였지만 숙고할 시간은 부족했고, 정보는 얻기 어려웠습니다.
당시 법원의 업무량은 배우자의 헌신적인 내조를 받는 남성 법관을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어 이를 감당하기 벅차하는 여성 법관을 마치 모자란 사람처럼 바라보면서 일정한 업무에서는 배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유용한 지식과 정보는 회식 장소와 흡연실 등에서 주로 유통되어 그런 자리에 참석하기 어려운 여성 법관에까지 닿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모아 선배 법관들이 마련해 준 공간이 젠더법 연구회입니다.
저는 연구회 활동을 바탕으로 사법부로서는 여성 법관이 존재함으로 인하여 사회적 현상을 다각도에서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는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라는 방향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2010년부터 2년간 헌법재판소에서 파견 근무 연구관으로 근무한 경험도 소중합니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한일 협정 사건을 연구하면서 조약에 대한 무지를 절감하고 2011년 말 막 법원 내에 설립된 국제인권법연구회에 가입하게 됩니다.
국제인권법 연구회는 장애인, 아동, 여성, 난민, 소수자 등에 관한 국제 인권규범과 판례를 연구함으로써 국제 인권규범이 재판 규범으로 법원이 인권 보장 기관으로 실질적으로 자리 잡도록 하는 데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연구 모임입니다.
그 외에도 저는 헌법연구회, 외국 사법제도 연구회,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 등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시간을 쪼개 더 나은 재판을 위해 연구와 토론을 게을리 하지 않는 동료들에 대한 존경심과 그런 법관들이 근무하는 법원에 대한 자긍심이 제가 오랜 기간 근무할 수 있었던 동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점은 이런 동료들 덕에 청년 시절 막연하게 꿈꾸었던 따뜻한 법, 정의로운 법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위원장님, 위원님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 속에서 탄생한 현행 헌법으로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는 이제 우리 사회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헌법적 가치를 선언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충실하게 보장하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하는 보루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성별, 나이, 지역 이념, 경제적 격차에 의한 갈등 외에도 저출생, 고령화에 따른 인구 변화,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오른 기후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공지능 기반의 4차 산업혁명에 적응해야 하면서도 불안정한 국제 정세와 혼란한 정치 상황을 슬기롭게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사 청문회 준비 과정을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기면서 처음 법관이 되려는 저에게 던져졌던 질문과 교훈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초심을 잃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며 헌법 질서를 수호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헌법재판소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여 사회 통합을 달성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치열히 고민하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저는 오늘 청문회에서 솔직하고 겸허한 자세로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그 과정에서 위원님들께서 주시는 소중한 충고와 당부의 말씀을 국민께서 주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깊이 새기겠습니다.
위원장님과 여러 위원님들 그리고 헌법재판소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청문회를 지켜보시는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