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93]새장에 갇힌 새(籠かこのとり)
98세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심상소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겨우 다녔을 뿐이나, 국어國語로 일본어를 배우셨다. 워낙이 영특하셔 지금도 일본어를 줄줄줄 읽으신다. 지난 3월 결국(?) 보훈요양원에 입소했다. 한국전쟁 참전 경찰 덕분에 국가유공자가 되어 연금을 당당히 받는 덕분이다. 정부에서 직영하는 요양원이라 서비스나 시설, 급식 등이 다른 요양원보다 월등히 나은 것같다(간호사-보조간호사 3교대 근무). 전립선비대증만 악화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고향집에서 주간보호센터를 출퇴근하실 터인데, 유감이지만, 당신도 어쩔 수 없는지(입소 당시 소변줄을 차고 계셨다) 선선히 발걸음을 뗐다. 그래도 입소 전날밤 잠을 못이루시고 한숨이 깊었다. 그걸 바라보는 자식 입장도 고약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8개월이 넘었다. 한 달에 한번꼴 자식들이 번갈아 면회를 가는데, 이제는 보행이 불편해 외식을 하러 외출하기도 쉽지 않다. 가족사랑방에서 30여분 면회를 하는데,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이 귀에 박혔다. “내가 새장에 갇혔구나. 일본말로 카고노도리(籠かこのとり)다. 세 끼 주는 밥 꼬박꼬박 먹고 한없이 편한데, 이제는 정신도 산란해 ‘농판’(전북지역 방언으로 바보라는 뜻)이 됐다”고 하신다. 틀린 말씀이 아닌게 영락없이 ‘새장 속의 새’가 된 것이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지만, 여러 번 듣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관용구 'ㅋ고노도리'. 얼마 전 큰아들 집을 갔더니 앵무새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9살 손자의 유일한 친구, 녀석이 새를 보자마자 ‘자두’라고 이름을 지었다 한다. 센스 있는 예쁜 이름이다. 새장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씁쓸했다. ‘자두야, 너야말로 진짜 새장의 새구나. 그런데 사람도 늙으면 새장에 갇힌단다’ 중얼거렸다.
초고령에 급작스럽게 아프면 인지장애(치매癡呆)가 오기 쉽다더니, 아무리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에도 아버지라고 어찌 예외가 될 수 있으랴. 아직은 총생(슬하 자손)들을 못알아보지는 않아 다행이지만, 평생 금전출납부를 쓰신 양반이 돈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다고 혀를 차신다. 아버지 통장에서 자동적으로 빠져나가니 그런 걱정은 붙들어매고 잘만 계시라고 했지만, 내내 입맛은 썼다. 아버지는 그 긴 세월을 일곱 자식들을 위해 어머니와 똑같이 헌신했다. 요양원에 들어가는 비용 71만원과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약값(치매지연약, 보청기약, 전립선 치료약)까지 당신의 통장에서 해결한다. 그러고도 매달 얼마씩은 남는다(유공자 연금 두 종류 55만원, 기초연금 33만4810원).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에게 눈곱만큼도 ‘민페’를 끼치지 않으시는 거다. 구십 평생 오직 흙만 파 자식들을 가르친, 대한민국 일등 농사꾼이셨다. 자식들끼리 비용 분담을 둘러싼 갈등의 여지도 없앤 것이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당신의 뒤처리를 깔끔하게 하고 가실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고향집에 혼자 있는 넷째 자식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일체 다른 말 없이 “밥 먹어야제”라는 안부전화를 하는 것이다. 방금 하고도 10여분 있다 똑같은 전화를 하는데, 8개월째 ‘시달리는’ 넷째는 ‘죽을 맛’이다. '다른 아들 딸도 있는데, 왜 나만 갖고 그래?'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까닭은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내일모레 100세인 아버지의 문안전화를 받는단 말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까 싶다. 300개가 넘는다는 치매 중 ‘전화치매’에 걸리신 것이다. 소싯적 일이나 젊은 시절 이야기는 지금도 모두 기억하는데, 넷째가 밥을 굶지 않는지, 오직 그것만이 걱정인 모양이다. 다른 것은 전혀 묻거나 말하지 않는다. 오직 반복해서 하는 끼니 걱정, “밥 먹어야제?”. 먹었다고 대답해도 잠시 후 또 “밥 먹어야제”이니 아무 소용이 없다. 말하자면, 아버지로서는 특정 아들(위로 세 아들과 밑으로 세 딸에게는 하지 않는다)과 하루 대여섯 번 통화가 바깥세상과 이어지는 유일한 끈인 셈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섯 번 왔다. 요양원에 가시기 전 4년 동안 넷째와 둘이 고향집에서 살았기에, 더구나 며느리와 월말부부로 사는 넷째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지만, 나는 일본말 대신 영어로 ‘Please, don’t worry, be happy’를 되뇌일 수밖에 없다. 돌아가신 숙부도 전화치매로 고생했는데, 어찌 형제가 똑같이 그럴까? 유전자 때문일까? 신기한 일이다.
아무튼, 전화 담당자인 넷째는 전북말로 “숭시러 죽겠다”며 전화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돌아가시면 세상 어디에서도 아버지 목소리를 들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니 좀 성가셔도 부드럽게 받아 넘기라고 피붙이들을 비롯해 아내가 지청구를 주지만, 말처럼 그게 잘 안되는 게 문제이다. 오죽하면 9살 손자가 “왕할아버지 전화를 화난 듯 받지 말라”고 못난 할래비를 나무랬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막상 돌아가시면 아버지의 육성肉聲이 무척이나 그리울 것이고, 그때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러는가 싶으면, 정말 잘못한 짓이 아닌가 싶다. 오늘도 나는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