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 5일(월)부터 6월 10일(토)까지
6일간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아랍 연합국 사이의 전쟁을
3차 중동전쟁 또는 6일 전쟁이라 부른다.
1967년 5월 소련은 중동의 친소 국가로서 지지해 온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게
이스라엘이 곧 시리아를 공격할 것이라는 미확인 정보를 제공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시리아에 이를 전달하는 한편
유사시 시리아를 지원할 목적으로 이스라엘과의 국경 시나이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전진 배치했다.
또한 이스라엘 선박의 홍해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인근 해상을 봉쇄하고 수에즈 운하 사건 후 이스라엘-이집트 분쟁 재발을 방지할 목적으로
이집트에 주둔해 온 유엔 평화유지군 UNEF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집트의 이러한 조치들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자극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에 대한 이집트의 공격이 임박한 것으로 판단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 공군은
시나이반도에 집중된 이집트 공군을 선제적으로 공격하여 무력화시키고,
곧바로 지상군을 투입하여 남쪽으로는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북쪽으로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을 점령했다.
또한 북쪽으로 진격하여 골란고원(Golan Heights)을 점령하고
국경 지역 일대의 시리아군을 격파했다.
이스라엘은 공격을 시작한 지 단 6일 만에 1948년 건국 시 영토를 3배로 확장했다.
이스라엘의 전격 작전에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으며,
서방 국가들도 이스라엘군의 기민하면서도 막강한 전력에 혀를 내둘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회의를 열고 휴전과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아랍 연합국은 더 이상의 전투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6월 11일 현 상황에서 전쟁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휴전에 합의했다.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점령으로 이 지역 아랍인 30만 명이 요르단 등으로 피난했다.
1967년 11월 유엔은 전후 질서 회복을 위한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채택했다.
결의안은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에서 즉시 철수하고,
모든 당사국은 상호 주권과 영토를 보장하며, 평화로운 공존과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에 공동으로 노력하기를 촉구했다.
안보리 결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가 보장되기 이전에는
점령지에서 철수할 수 없다며 철군을 거부했다.
이스라엘은 오히려 점령지에 자국민을 이주시켜 거주토록 하는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정착촌과 정착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계속 주둔시켰다.
철군이 아니라 점령의 고착화를 추진했다.
특히 골란고원을 점령한 것은 이스라엘로서는 큰 소득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스라엘은 진즉부터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넘보고 있었다.
골란고원은 시리아의 남쪽 국경을 이루고 있는 해발 1.000m 상당의 고지대로
주변의 사막지대를 관측하고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다.
이스라엘은 1∼2차 전쟁의 경험상 시리아를 포함한 북쪽 아랍 국가들로부터
자국의 안보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했으며,
자국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인 요르단강의 발원지가
바로 골란고원이라는 점에서도 골란고원에 대해 집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반면, 시리아로서는 수도 다마스쿠스와 60km 상당의 근거리에 있는 골란고원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이를 빼앗기는 것은 앞마당을 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골란고원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모사드 정보요원 엘리 코헨(Eli Cohen)의 역할과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코헨은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인 1961년경 시리아계 아르헨티나 사업가로 위장하고
시리아에 정착하며 군부 고위층과 친분을 쌓고 군사 기밀을 수집하여 이스라엘에 제공해 왔다.
그는 시리아군의 지휘 체계, 작전 개념 등을 소상히 파악하여 이스라엘에 송신했는데,
그가 수년 동안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시리아에 쉽게 발각되지 않은 것은
그의 비범한 관찰력과 기억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시리아 장교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골란고원 시찰에 동행할 수 있는 허락을 얻어냈다.
그는 헬기에서 골란고원을 내려다보고 장교들의 설명을 들은 것을 바탕으로
골란고원의 구조와 방어선, 대공포 등 배치된 무기의 위치와 수량, 병력 배치 상황 등을
그대로 기억하여 이를 정확히 지도에 그려 넣어 이스라엘로 보고했다.
그는 시리아 장교들에게 골란고원을 지키는 병사들이 더위에 지치지 않도록
그늘을 만들어 주자며 나무를 심자고 제안했다.
시리아 군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요새 주변에 유칼립투스 나무를 심었는데,
이 나무들은 골란고원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감시와 추적을 용이하게 했다.
1965년 시리아 정보기관은 군 고위 인사들에 대한 방첩 활동 과정에서
코헨의 정체를 의심하고 추적한 끝에
그의 무선 송신 주파수를 탐지하고 그가 이스라엘의 간첩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시리아 정부는 코헨을 다마스쿠스 시내 광장에서 공개 처형하고
그의 시신을 반이스라엘 메시지가 적힌 현수막 아래에 한나절 동안 매달았다.
코헨에 의해 골란고원의 군사정보가 누출되었다고 판단한 시리아는
이후 골란고원의 방어체계를 재편하려 노력했으나
워낙에 큰 큰 작업이 되다 보니 2년 후 6일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도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코헨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6일 전쟁에서
이틀 만에 골란고원을 장악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코헨을 6일 전쟁의 숨은 영웅으로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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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 Cohen / אֱלִיָּהוּ בֵּן שָׁאוּל כֹּהֵן
1924년 12월 26일 ~ 1965년 5월 18일 (향년 40세)
이스라엘의 전설적인 스파이.
본명은 엘리 샤울 코헨. 중동전쟁에서 큰 공을 거둔 인물이자 시리아 제2공화국 ~ 바트주의 시리아 시기까지
감쪽같이 신분을 속인 스파이로서 유명하다.
당연히 이스라엘에서는 영웅, 아랍에서는 원수 취급이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아랍계 유대인으로 1950년대에 이집트에서 스파이로서 활동했을 정도로
철저한 아랍어 및 현지적응력을 보였으나 결국 이집트 경찰에게 걸려서 신나게 두들겨맞고 국외추방당했다.
그나마 이집트에선 별다른 활약을 못 했기 때문에 용케도 안 죽고 추방으로 끝난 것이다.
이후 남미를 거쳐 카말 아민 사베트라는 가짜 이름으로 철저하게 신분을 속인 그는
시리아 바트당에 가입하고 비행기 조종을 할 줄 아는
시리아 거부로 시리아 제2공화국 군부에 접근하여 온갖 처신으로 시리아 군부에서 입지를 다졌다.
시리아에선 이집트와 다르게 바트당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 결과 시리아가 요르단강의 물길을 돌림으로써 이스라엘로의 물 공급을 막으려는 계획을 알아냈다.
그는 또한 게릴라전을 통해
이스라엘 북쪽을 강타하려던 PLO(팔레스타인 민족 해방운동) 세부 계획 정보를 이스라엘에 제공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스라엘군은 단, 다프나, 세알 야슈브를 파괴하려던 시리아를 막고 먼저 시리아내 거점을 폭격했다.
1964년 바트당의 신설된 최고위직에 올라 골란 고원의 전략적 요새들을 촬영한 사진을 손에 넣었다.
이 정보를 비밀리에 이스라엘로 보내어 마침내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난공불락이라고 하던 골란 고원을 이스라엘이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 코헨 덕분이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연전연패에 이가 갈리던 시리아는 혹시나 하여 자국 내 인사들의 뒷조사를 면밀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코헨이 보내던 무선통신이 결국 들키고 만다.
1965년 1월, 바트주의 시리아 정부는 소련의 기술협조로 결국 그를 잡았는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 코헨은 국방차관까지 오른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거저 저런 고위직에 오른 건 아니다.
위에 나온 대로 엄청난 부자로 행세하면서 막대한 돈을 시리아 아랍군 및 정계에 풀면서 승진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막대한 자금력을 통해,
바꿔 말하면 돈만 있으면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시리아 정계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리아군·정계는 난리가 났다.
국방차관이 알고 보니 이스라엘의 스파이라는 게 드러났으니
코헨과 친했던 시리아군·정계 인사들까지 면밀조사가 이뤄졌는데,
당시 시리아 국방장관이던 하페즈 알아사드도 차관인 코헨과 얽히면서 하마터면 숙청당할 뻔했다.
결국 연루된 게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그는 이스라엘군을 교란시킬 거짓 정보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는데 당시 중동에서 정치 및 종교범의 인권은 없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그냥 사형도 아니고 본보기로 5월 18일 수만여 시리아 군중 앞에서 야유 속에 다마스쿠스에 있는
마르제 광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은 그를 구하고자 막대한 돈을 준다느니,
시리아 스파이 10명과 교환하자느니, 별별 제의를 하며 매달렸지만 거절당했다.
미국이나 프랑스는 물론 교황청에서도 중재에 나섰으나
그동안 아랍 스파이에 대하여 미국이나 프랑스가 나선 적 있냐는 아랍권의 비아냥과 조롱만 받았다.
미국은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에게 그를 하다못해 무기징역으로라도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으나,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조차 불가능하다고 매몰차게 거부했다.
워낙 간첩 행위의 스케일이 커서 별 수가 없다는 이유.
모사드 요원이던 아우 모리스 코헨(1927~2006)이나 1959년에 결혼한 그의 아내인 나디아 마잘드 코헨은
그저 TV로 생중계되는 교수형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은 시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시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자체 매장해 버렸다.
그에게는 2녀 1남 자식들이 있었는데 장녀 소피, 차녀 이리트, 둘째 샤이 코헨이 있었지만
다들 어릴 적에 아버지를 봐서 기억도 하지 못한다고.
소피조차도 아버지가 죽을 때 4살이었고 샤이는 채 1살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죽기 사흘 전인 5월 15일에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고 이 편지는 이스라엘로 전달되어 아내가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