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友堂李公墓碣銘 幷序 (상우당 이공 묘갈명 병서)
臨汝齋(柳규)先生
尙友堂李公諱瑞翼字駕雲。상우당 이공 휘는 서익(瑞翼) 자가 가운(駕雲) 호는 상우(尙友),
其先眞寶人。 선조는 진보인 이요,
中移于禮安溫溪村。 예안 온계 마을에서 이거(曾祖父 冲) 하여,
五世祖諱堣官參判號松齋 5대조 휘는 우(堣)요 관직 이조참판 자는 명중(明仲) 호는 송재(松齋),
實爲退溪先生叔父。실로 퇴계(退溪)선생의 숙부이며,
配享淸溪啓賢祠。청계서원 계현사(啓賢祠)에 배향되고,
高祖諱壽苓察訪。고조부의 휘는 수령(壽苓) 황산도(黃山道) 찰방을 지냈으며,
曾祖諱冲修義副尉。증조부 휘는 충(冲)로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냈다.
始自禮安移居于醴泉郡南, 예안에서 시작하여 예천군 남쪽으로 이거,
祖諱揆道贈參議。조부 휘는 규도(揆道) 참의(參議)로 증직 ,
考諱之馥。선고의 휘는 지복(之馥),
妣英陽南氏。고비는 영양 남씨이며,
副正諱燮之女。부정 휘(諱) 섭(燮)의 여식으로,
以萬曆癸丑月日生公。공은 1613년에 태어나고.
幼有異質。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
己未母夫人歿 신미년(1619년)에 모친이 돌아가시고,
天啓丁卯先考公棄背。천계 정유년(1627년) 선고께서 세상을 버리시니,
公年甫十五。공의 나이 15세,
出入含恤。슬픔과 출입을 머금고,
泣血三年。피눈물 삼년을,
及有室。집에서,
痛不逮養。봉양치 못한 아픔으로,
乃曰祭之以禮四字。이에 제는 예로써 지낸다는 넉자,
爲可以少伸吾至痛 그런가 하여 나의 지극히 애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어
每當祭祀。언제나 제삿날이 되면,
備品謹齊。비품을 삼가 가지런히 하여,
愛愨俱至。지극한 성실함으로,
性喜竆玩。놀이를 좋아하는 성품으로,
日會心於先正理窟之書。마음 맞는 날 모이면 이치의 탐구한 글 먼저 정하고,
亦肄公車業 다시 과거 보려 노력하지만,
未及成名。명성을 올리지 못하였고,
値崇禎運訖。숭정에 운이 내리막길에 걸맞게 ,
不復蹈荊圍一步地。한 걸음 거리 가시밭길에 에워 쌓여 다시 올 수 없었으니.
時年二十四。이때 나이 24세,
丁亥移卜于孤山之下。정해년(1647년) 고산 아래로 옮겨와 ,
旣立廟治第。이미 옛날에 지었던 곳에 사당을 짓고,
又就北谷靜僻處。또 북쪽 골짜기 고요하고 후미진 곳,
爲藏修所。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滿壁圖書。벽에 서책 가득하고,
前爲蓮池。앞에는 연꽃과,
雜植花卉。꽃나무 섞어 심어,
俯仰思讀之暇。우러러 굽어보며 책 읽을 틈을 내서,
嘯咏以自娛。 즐겁게 읊조리고 ,
顔其堂曰尙友。살면서 그 집에 상우라는 편액과 ,
爲詩以見志。시를 지어 뜻을 나타내고,
又自號曰默翁。또 스스로 호를 묵옹(默翁)으로 지어,
其閒遠之趣。그사이 멀어진 뜻 ,
鞱晦之量。 헤아려 숨겨,
蓋有人不及知者。남들은 미처 알지 못하였으니,
良辰美景。좋은 때 아름다운 풍경에,
率族人爲黃北山故事 족인을 거느려고 황북 산에 유서 깊은 일을 위해 ,
以講敦睦。화목함을 다지고
後進之向學有誠者。후진이 나아갈 방향 배움의 성의가 있어,
愛悅而奬勸之。라끼고 장려하여 권하는 것이,
必要其成就。 필요한 그 성취함이니,
公治家嚴密。공은 집안 다스림이 엄밀하여,
奉先諸節。선조를 받드는 여러 가지 예절이,
本之退溪家禮。 퇴계 선생 가례의 근본이요,
參用金鶴沙祭墓儀。김학사(金應祖)의 제묘법에 참고하여,
洞洞屬屬。몸가짐 신중하고 신실해야 하며.
老而不懈。늙어서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嘗有詩曰待客無禮門戶俗。일찍이 시에 손님을 대접하여 무례한 문호에 예가 없다 라고 하였으니.
奉祀不誠子孫微。제사 받드는 것이 불성실하면 자손이 미약함이니
其貽謨深切如此。그 후손에게 간절함이 이와 같음이라,
明陵辛未十二月日。명릉 신미년(1691년 )12월,
考終于寢。침소에서 운명하시니,
享年七十九。향년 79세,
方疾革時 병이 위중할 때도,
默誦平生所讀書。묵묵히 평소 읽은 글을 암송하여,
臨絶聲不能出口而諦聽之。절성(絶聲)에 나아갈 때마다 입을 열지 못하고 자세히 듣지 못하였는데.
乃魯論也。바로 노나라 논어 얘기였네,
朝家例授通政階。조정에서 통정대부 내려,
帖到於喪後。 첩은 상후,
而月日在未喪前。상전 일이 아닌 어느 날이었으니,
壬申某月日。1692년 모한 날에,
葬于孤山之東麓。고산 동쪽에 장례하고,
有所著祭儀詩集若干編藏于家。 제사의식이 기록된 시집 몇 편의 책을 편찬 집에 보관 하였네.
配淑夫人安東權氏。배위 숙부인 안동 권씨
同中樞止善女。동충추 권선의 여,
淑愼有婦德。정숙하고 신중한 부덕이 있어,
葬于同原而祔後。 부제를 지난 뒤 같은 언덕에 장례,
生三男。아들 삼형제,
曰漢標先公歿。한표 부친 돌아가시고,
曰萬標曰時標護軍。만표, 시표는 호군,
四女金卓一,朴道恒,李秉恒,文道器其壻也。네 자매 김탁일,박도항, 이병항, 문도기 사위이다.
漢標有二男。한표는 두 남매,
台兼以行誼聞。태겸 행의로 들었고,
次達兼。차남은 달겸,
萬標有五男。만표는 오남,
百兼通德郞,智兼,信兼,千兼,三兼。백겸은 통덕랑, 지겸, 신겸, 선겸, 삼겸,
時標有二男思兼,五兼。庶子哲兼。餘不錄。시표는 두 형제 사겸, 오겸, 서자 철겸은 기록 하지 않았다.
玄孫鎭九述家狀。현손 진구가 찬술한 가장에,
兼錄李孤山,李懶隱記行若干條。아울러 이 고산, 이 난은은 약간조 기행을 아울러 기록하였으며,
抵不佞曰。나에게 와서 이르길,
先王考旣除公喪。 할아버지께서 공이 돌아가셨을 때 ,
卽治碣石。 이미 비석 돌을 손질하여,
題其面而空其後。그 앞면에 머리말을 뒤에는 비워,
其意有在。그 뜻한 바가 물론 있어,
子其書諸陰。아들은 모두 글을 음각으로,
以卒吾先志。 내 선인 마지막 뜻,
不佞敬受而讀之曰。불녕하게 공경히 읽어,
論人當論其大節。당론을 논하는 크게 빛나는 절조이니,
公之崇禎後不赴擧一事。공은 숭정 뒤 어떤 일로 과거에 나아가지 못하여도,
乎其卓操 탁월함을 가졌으니,
而泯乎其跡。그 자취를 없앨 수 있겠는가?
其視丙丁節義之煒煌者。그 병,정의 눈부신 절도와 의리를 보면,
特顯隱之異致耳。특별히 드러내고 숨는 것을 달리 한 것이다.
八旬隱求。팔순에 숨을 곳 구하여,
所造必深。이른 경지 반드시 깊게,
而始終鞱鏟。 끝까지 감추어 다스려,
人鮮知之。사람들은 알기가 드물어,
今於百載之後。지금부터 백 년 뒤에 드러내려,
只從一二先輩贊述文字。 열두 분 선배를 글자로 글을 써,
有以想像其潛懿。상상으로써 그 잠의를 천명하여,
而爲墓道揄揚之地。기리는 땅의 무덤길이.
豈不悲哉。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鎭九文行雅飭。 신중한 진구의 행하는 글,
庶幾能世其業。그 가업의 대를 바라 건데,
銘曰。쓰기를,
嘐嘐者志。위대한 뜻을,
人不知而自信。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默以爲守。홀로 말없이 지키려니,
寧有悔吝。후회하고 한탄함이 있으리요.
八旬丘樊。팔순에 초야,
一味幽貞。그윽하고 곧은 본질은 같아,
請刻于石曰。돌에 새기기를,
惟崇禎逸士之塋 오직 숭정 편안한 선비에 묘에서만.
위의 묘갈명은 예천 고미 고암(李沖)공의 증손으로 현재 고미에 있는 상우당 정자의 주인으로서 그정자가 언제 지어 졌는지 알지 못하여 묘갈명에 찾으니 최초 1647년에 지어졌으며, 후에 중수(1849년) 한번 이건(1958년)을 하여 현재에 이르렀으니 이 묘갈명으로 정자의 연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