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金在益)이란 조용한 개혁주의자가 全斗煥이란 「요란한 개혁주의자」를 설득해간 과정은 5공역사의 가장 중요한 장(章)을 차지한다. 신군부의 개혁 태풍으로부터 시장경제체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정치민주화 과정을 가능케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90년 11월 월간조선>
全斗煥정권은 과도기 정권
지금 돌이켜 보면 全斗煥정권 역시 과도기 정권이었다. 40년간 계속돼 온 권위적 지배체제는 崔圭夏정부와 全斗煥정권이란 두 번의 완충을 거쳐 盧泰愚정권이란 민주화과정으로 넘어감으로써 외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발생한 혼란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全斗煥정권이 권위주의체제에서 민주정부로 가는 가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성장과 대통령임기의 단임 때문이었다. 1980년 봄의 민주화 열기를 일시 잠재우고 정권을 잡은 全斗煥그룹도 민주화의 대세를 거스르고는 정권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했고 그것은 단임 약속으로 나타났다.
독재자가 처음부터 자신의 권력을 한시적이라고 선언해 버림으로써 정권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全대통령은 한시적 정권의 취약성을 철권통치로써 보완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되었고 이 때문에 무리가 빚어지기도 했다. 안정적인 경제성장은 민주화의 진통을 견딜 수 있는 기초체력을 유지해 주었다. 경제불황 속에서는 한 달간 온 나라를 뒤흔든 6월사태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설사 일어났다고 해도 6·29선언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全斗煥그룹은 정권의 기틀을 놓는 과정에서 권력형 부정축재자수사·공무원 및 언론인 숙청·삼청교육·언론사 통폐합·과외금지 등 요란한 「개혁조치」를 펴나갔다. 대령급 장교들의 단순한 논리와 정서를 반영하는 이런 과격한 개혁조치는 경제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군인들에 의한 경제개혁은 계획경제의 강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독재체제의 고착을 뚯한다. 5공화국 출범기의 개혁바람으로부터 시장경제논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뒤 정치민주화라는 진정한 개혁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金在益이란 조용한 개혁주의자가 全斗煥이란 「요란한 개혁주의자」를 설득해간 과정은 5공화국 역사의 가장 중요한 장(章)을 차지해야 마땅하다.
金在益과 全斗煥의 운명적 만남
金在益 경제기획원 기획국장(당시 42세)이 全斗煥장군과 역사적인 인연을 맺게 된 과정에 대해서 관계자들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의 경제기획원 간부
『金씨가 全장군을 처음 만난 것은 국보위 발족을 며칠 앞둔 때였습니다. 許文道씨(정보부장서리 비서실장)가 연락을 해 와서 全장군에게 경제강의를 몇 번했고 그 강의가 워낙 설득력이 있어 국보위 경제분과위원장으로 발탁된 것으로 압니다』
당시 부총리 자문관 이었던 김기환(金基桓)씨(전 세종연구소 소장):
『사실 金국장은 국보위에 들어가기 직전 기획국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생각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경제기획원을 떠나 KDI(한국개발연구원)로 가려고 했습니다. 5월 하순의 어느 목요일로 기억이 나는데 金국장이 내방에 오더니 『부총리가 오늘 사직서를 접수했다. 다음주부터는 KDI로 가게 됐다』며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해요. 그런데 그날 오후인가, 다음날인가 김원기(金元基)부총리실을 통해 연락이 왔는데 토요일 아침까지 金국장더러 삼청동 어디로 인가로 출두하라고 했다더군요. 그래 토요일에 金국장은 뭔지 몰라 다소 불안해하며 삼청동으로 가고 강경식(姜慶植)차관보와 나는 점심 후에 퇴근을 않고 金국장을 기다렸다가 다시 만났더니, 全斗煥장군 앞에서 선서들을 했다면서 그 자리에서 「나는 사직서를 내서 이미 접수된 사람이니 여기서 일할 사람이 아니다」고 했는데도 저쪽에서 「그런 건 아무 상관없다. 월요일부터 무조건 나와라」고 했다며 도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고 서로 얘기하던 기억이 납니다』
고金在益씨의 미망인인 李淳子교수(숙명여대 도서관장):
『그이는 그때 심신이 다 피곤해 있었습니다. 어릴 때 류마티스성 열병을 앓아 심장판막증에 걸려 버렸지요. 과로를 하면 부정맥이 생기는 등 위험해지는 후천적 심장기형이었지요. 과로를 거듭하다가 보니 한때 앓았던 폐도 다시 활성화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80년 봄의 혼란기 속에서 경제정책에 관한 소신이 잘 먹혀들지 않은 데 대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KDI로 옮겨 공부를 좀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확정돼 사무실까지 정리한다고 하더니 국보위로 징발된 것입니다. 그이는 군사정권의 정통성 문제에 대해서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는데 그 정권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또 다른 갈등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이 되면서 연희동으로 매일 아침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全장군에게 경제강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지나자 全장군이 단순하고 순진한 분이며 경제에 대해서 무리한 정책을 쓰지 않을 것 같다면서 안도하더군요. 강의를 통해서 인간적인 신뢰가 굳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權正達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은 국보위의 산파역을 했었다. 權씨는 『그때 합수본부에서는 각 부처의 국장급들로 자문회의를 구성, 운영했었는데 이때 金在益국장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국보위의 경제과학분과위원장으로 추천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全장군의 뇌리에 그려 넣은 그림
金在益씨가 全장군을 사로잡게 된 비결은 그의 탁월한 설득력 덕분이었다. 金씨는 5년간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으로서 일하면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국내외에 설명하는 대변인 역할을 하였다. 외국에 나가서나 국제회의에서, 또는 국내의 공무원 연수장에서나 기자들에게 그는 아주 쉽게, 또 선명하게 설명을 해주는 요령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어려운 경제이론을 대중성 있게 설명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金씨의 어머니가 텔리비전을 보다가 『인플레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金씨는 『돈에 물을 탄 것입니다』면서 설명을 하더란 것이다. 金씨는 또 『모든 것에는 값이 있다. 사람의 물가가 바로 임금이다』는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는 아내에게 『당신이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경제 해설서를 쓰고 싶다』고도 했다.
金씨의 권유로 KBS 텔레비전에 나가 매일 저녁 「오늘의 경제」라는 해설 방송을 했던 그의 친구 이계익(李啓謚)씨(전 한국관광공사 사장)는 『그의 머리 속에는 커다란 4각형으로 둘러싸인 경제성장, 국제수지, 그리고 물가안정, 이렇게 세 개의 명제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경제성장, 국제수지의 개선, 물가안정이란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보조수단 내지 필요요건들이 마치 석유화학 계열 그림처럼 정연하게 그려져 있었다』는 것이다. 金씨는 도표를 요령 있게 그려 쉽게 경제정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李洪九 대통령특별보좌관은 金씨를 『머리가 좋고 사심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金씨는 그런 맑은 심성의 바탕에서 아주 겸손한 언동을 체질화함으로써 흔히 똑똑한 것이 거부감으로 이어지는 인간관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
李啓謚씨는 金씨를 「수정처럼 맑고 깃털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철처럼 단단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金씨는 속으로는 강인한 의지와 논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슬기롭게 표현할 수 있는 이였다. 뒤에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 된 金씨와 함께 청와대에서 근무하면서 때로는 상반된 입장에서 다투기도 했던 한 개혁주도 핵심 인물은 金씨를 이렇게 평했다. 『장인기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 사심 없이 순진한 열정과 고매한 이상으로써 몰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명석한 논리를 그런 정열이 뒷받침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항상 全대통령에게 자신의 논리를 주입시키려고 노력하더군요』 金씨는 경제지식이 약한 全장군에게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듯 교육을 해나갔다. 거시적인 경제모델을 도표로서 그려 보이면서 『나라가 망하려면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납니다』고 설명해 나갔다고 한다. 『인플레, 소득분배의 역진, 공무원 부패, 이 세 가지인데 뒤의 두 가지도 따지고 보면 인플레 때문이므로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물가안정으로 세 마리 토끼 겨냥
金씨는 또 『물가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수요·공급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므로 정부가 힘으로 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철저히 주입시켰다고 한다. 둘째로는 『나라 경제든 가계이든 흑자를 내야하고, 그러려면 고통을 참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했으며 「실질」의 개념도 강조했다. 임금을 아무리 올려 줘 봐야 물가가 올라버리면 실질 임금이 오히려 줄어드니까 아무 소용없다는 점을 확고하게 인식시켰다. 金씨는 『경제성장, 국제수지의 개선, 물가안정이란 세 마리 토끼는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물가를 잡으면 다른 두 마리 토끼도 같이 잡을 수 있습니다』고 했다.
즉 물가가 안정되면 원가가 줄어들어 상품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수출이 잘 돼 국제수지가 개선되며 실질 소득과 저축이 늘어나면 국내여신도 늘고 외채가 감소됨으로써 내수도 확대되니 물가안정 바탕 위의 성장도 가능해진다는 명쾌한 논리였다. 金씨는 1983년 10월9일 아웅산 사건으로 죽었지만 그가 全斗煥대통령의 뇌리에 찍어 넣은 물가안정이란 키워드는 지워지지 않았다. 全대통령은 그 뒤에도 특유의 우직함으로써 물가안정정책을 유지해갔다. 공무원 봉급인상률을 줄이고 예산팽창을 통제하며 통화공급을 규제하는 등 인기 없는 정책을 감행하다시피 하였다. 1985년 선거 때 선거용 사업으로서 민정당은 예산증액을 강경히 요구했으나 『선거에서 져도 좋으니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티기도 했었다.
金在益씨는 1980년의 경제위기를 물가라는 프리즘을 통해 파악했던 이였다. 1980년 1\4분기 도매물가 상승률은 전년동기대비 37.7%였다. 金씨는 통화증발을 요구하는 기업인과 일부 경제관료의 압력에 대하여 『살기 위해 죽어야지 죽기 위해 살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물가상승의 고질적 악순환이 계속되면 수출경쟁력은 약화될 것이고 생산의욕은 떨어질 것이며 대외신용은 타격을 받고 더 근본적으로는 국민들의 소득분배구조가 악화될 것이고 이는 경제적 불안정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걷잡기 힘든 불안이 잠재돼 갈 것이라고 보았다.
고질화된 인플레이션 체질을 고치려면 마약을 끊는 뒤의 금단증상을 각오하고서라도 통화증발 등 진통제적 처방을 중지하고 근원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안정화시책으로 불리는 경제개혁의 뜻을 다져왔던 金씨는 강력한 실력자로 등장하는 全斗煥장군에게서 자신의 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발견했던 것이다. 金在益의 꿈과 全斗煥의 힘이 맺어진 곳에서 5공화국 경제정책의 출발선이 그어졌던 것이다.
전자교환기 도입의 용기
金在益은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라는 핵심적인 관직에 있으면서 여러 번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도, 또 좌절하기도 해보았던 이였다. 「조용한 경제 개혁주의자」로서 金在益씨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은 1976년에 주도한 전자교환기 도입이었다. 당시 체신부가 금성사와 동양정밀을 통해서 구입하여 쓰고 있던 서독 지멘스사 등의 기계식 교환기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전화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1970년대에 사회문제로까지 제기된 전화적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몇 번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추진하였으나 체신부의 반대와 독점공급업체 측의 로비에 부딪쳐 성사되지 못하였다. 특히 럭키·금성그룹의 정치적 대변자였던 구태회(具泰會)공화당 정책위의장이 서독 지멘스의 독점체제를 보호하는 데 앞장섰었다고 한다.
체신부가 반대한 것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관료적 속성 때문이었다. 기술자들은 모두 기계식 교환기의 운영기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전자식이 들어오면 새 기술을 배워야 했으므로 반대했고 일부 관리직에서는 교환기공급업체와의 오랜 유착으로 얽히고 설켜 자연히 업체와 이해관계를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관산(官産)유착구조를 깨뜨린 이가 金在益기획국장이었다. 그는 전자교환기를 쓰는 나라들의 실태를 현장시찰한 다음 전자교환기의 도입만이 전화적체의 해소는 물론이고 다가오는 정보화사회의 기반이 되는 대량공급의 능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金씨의 미망인 李淳子교수는 『원래 그이는 기계를 좋아해서 뜯어보고 수리하기를 즐겼는데 전자 교환기의 시스템을 연구하느라고 엔지니어처럼 몰두했었다』고 기억한다.
金기획국장의 발의에 따라 1976년 2월 경제장관회의에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에 전자교환기도입의 타당성 검토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KIST에서 이 검토작업을 책임졌던 경상현박사는 金在益국장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KIST는 76년9월에 완성한 보고서에서 전자교환기가 도입가격, 전화시설비, 유지보수비, 기술적 성능 등 모든 면에서 기계식보다 월등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지보수인력 면에서 반전자식은 기계식의 31%, 전(全)전자식은 기계식의 29%만 필요하고, 시설면적 면에서는 반전자식이 기계식의 39.6%, 전전자식은 17.5%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정부는 체신부와 기존업계의 반발을 논리적으로 누르고 우선 반전자교환기의 국제경쟁입찰을 시행하였다. 1959년 기계식 교환기의 경쟁입찰이 있은 지 실로 17년만에 처음으로 이뤄진 경쟁입찰이었다. 이 첫 입찰에서 벨기에 BTM사의 M10CN교환기가 선정됨으로써 지멘스의 독과점체제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金在益기획국장은 단순히 전자교환기의 도입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단 턴 키 베이스로 전자교환기를 들여와 이를 운영하면서 그 시스템의 생리를 우리 것으로 소화한 바탕 위에서 전자교환기를 자체개발 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그 계획을 위해 한국통신기술연구소를 체신부 산하에 설치하였다. 체신부는 그 뒤 2백48억 원의 연구비를 들여 세계에서 열 번째로 전(全)전자교환기 TDX-1의 개발에 성공, 1985년부터 납품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소련으로 수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 교환기 개발에 의한 수익은 벌써 1천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내년에는 전기통신공사가 구매할 교환기 중 TDX-1이 62%를 차지할 전망이다.
민주화 재촉한 정보유통의 활성
金기획국장의 개혁적인 발상에 관료적 집단이기주의로 대응하였던 체신부의 간부들도 지금은 『그때 전자식으로 전환한 것이 한국사회의 정보통신체제를 현대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몇 년만 늦었더라면 돈이 몇 배나 들었을 것이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관계자는 『기존공급업체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기계식을 계속 쓰게 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을 더디게 한 죄과는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고도 했다. 최근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교환기정책의 영향 및 효과분석』이란 평가보고서를 펴냈다. 이것에 따르면 전자교환기의 도입으로 전화통화량이 76년 이후 연평균 30.18%씩 증가하여 88년에는 79년 총 통화량의 약 4배에 달했다는 것이다. 즉, 10년 사이에 전화를 이용한 정보 전달 량이 네 배나 늘었음을 뜻한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민주화·개방화·자율화의 전제조건임을 감안한다면 전화보급의 확대는 1980년대의 한국사회를 민주화 쪽으로 변모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1976년에 전화가입자는 1백27만에 불과했는데 지난해에는 1천3백만을 돌파, 한국은 전화가입자수에서 세계10위의 국가가 되었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신청즉시가설국가가 되었다. 전화선은 팩시밀리, 전산망 등 다른 정보통신기기의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시설이므로 정보사회의 근간이다. 전자교환기 덕분에 전화수익은 증대하고 전화료는 내려갔으며 고장 률도 지난 8년 사이에 6분의 1로 떨어졌다. 산업연관 효과 면에서는 1980년대에 이루어진 전자교환기의 총매출액이 약2조3천억 원에 달함으로써 교환기생산업체와 부품업체의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1980∼2천년 사이에 전자교환기의 국내생산에 의한 고용창출효과는 매년 평균 4만 명에 이를 전망이다. 3만회선 용량의 전자교환기에는 8천4백30여종의 부품 6백70만개가 소요된다. 따라서 전자교환기의 채택으로 우리나라 통신전자산업의 기반이 크게 확충되었다.
세계적인 성공사례인 1980년대의 한국정보·통신혁명은 한 조용한 개혁주의자의 창조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강경식(姜慶植) 당시 기획원차관보는 『그런 발상은 직업관료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학자출신인 金씨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라고 했다. 그 당시의 다른 기획원관리는 『기존업체에서 金씨를 모함하려고 끈질기게 공작했던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당시의 한 경제기획원 출입기자는 『金국장의 발상을 지지하는 기사를 썼더니 업계 쪽에서 즉각 압력이 들어오더라』고 했다. 李淳子씨는 『집으로 협박전화가 오는 등 무섭게 시달렸다』고도 했다. 李교수는 『몇 년 전 전화를 신청하자마자 놓아주기에 吳明체신부장관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걸었더니 吳장관은 「그게 모두 金수석 덕분입니다」고 말하더라』고 한다.
경제개혁의 싹
全斗煥장군 그룹은 5·17직후 국보위를 통해서 정치 및 사회개혁을 무섭게 추진해갔으나 경제부문에 대한 복안은 구체적인 것을 갖고 있지 못했다. 개혁주도세력 중에 경제전문가가 없었고 당시의 경제상황이 최악이었으므로 어디서부터 어떤 방향으로 손대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쿠데타로 집권한 장교단은 어느 나라이든 계획경제로 기울거나 분배 쪽에 관심을 쏟는다. 全장군 측근에서도 이 무렵 정의사회란 말과 함께 복지사회란 말이 즐겨 쓰여졌다.
金在益씨와 함께 5공 초기의 경제정책수립에 핵심역할을 했던 姜慶植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차관보는 개혁주도세력이 주장하는 복지의 개념을 순화시키는 데 신경을 썼다고 한다. 『복지국가 건설이란 말이 자주 나왔는데 이론적으로 잘 정리돼 있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분배의 확대로 이해되었습니다. 복지정책을 잘못 쓰면 경제를 망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놀고먹는 풍조를 조장하는 복지가 아니라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주고 의료와 교육의 기회를 확대시키며 빈곤의 대물림이 안되도록 하는 정당한 경제의 규칙을 확립하는 것이 복지의 요체라는 방향으로 수용했습니다』 신군부에 밀착하여 계획경제를 강화하는 방향의 경제개혁을 주장한 경제학자나 관료들도 있었으나 그런 흐름이 구체화되지는 못했다.
金在益을 매개로 하여 신군부의 핵심 속에 심겨진 「물가안정에 의한 경제성장정책」은 시장경제의 기능강화라는 논리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런 정책의 흐름은 朴대통령 시대의 말기에 그 싹이 튼 것이었다. 『1978년의 대통령 연두순시 때 KDI가 1990년까지의 장기경제전망을 보고하는데 온통 장미빛 이었습니다. 기획국을 중심으로 한 우리라인에서는 성장위주정책의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이형구(李炯九)경제기획관을 실무책임자로 지정하여 한국경제의 전반을 총점검 하도록 시켰습니다.
이 작업에는 김만제(金滿堤)씨가 원장으로 있던 KDI연구진이 전부 투입되었습니다. 과학기술연구소 영빈관에서 합숙하다시피 하면서 작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코리아나 호텔에 방을 얻어놓고 밤새워 격론을 벌였습니다. 어떤 안에 대해서는 스물여덟 번을 고쳤습니다. 이런 공동작업의 과정을 통해서 경제정책 부서에서는 공감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경제운용의 방향을 1백80도 전환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가 큰일 나게 생겼다는 인식에 대한 확신이 선 것입니다』(姜慶植씨 증언)
소련시찰에서 경악
이런 작업이 진행중일 때인 78년9월 姜차관보는 申鉉碻 당시 보사부 장관을 수행하여 세계보건기구 회의가 열리고 있던 소련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申장관과 姜차관보는 계획경제의 폐해가 어떤 것인지 현장체험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과도한 수출금융지원, 수입규제, 재벌들의 독점체제, 무리한 가격통제 등 한국경제의 성장위주정책이 더 진행되면 계획경제의 모순 점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돌아온 직후인 12월 朴대통령은 申장관을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하였다. 朴대통령도 경제정책을 전환할 필요성을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제기획원은 78년의 경제현황 총점검을 토대로 하여 1979년 초에 朴대통령에게 경제안정화조치를 건의하였다. 朴대통령은 한국은행 등 다른 연구기관에도 정책검토를 맡겼는데 대충 같은 결론이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그해 3월말 경제기획원에 안정화시책의 추진을 지시하였고 그래서 나온 것이 「4·17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이었다.
수입자유화·중화학투자조정·물가와 임금 및 부동산 가격안정·수출금융축소 등 혁명적 발상의 안정화시책은 곧 기업과 실물경제팀, 그리고 성장론자들의 반발에 직면하였다. 朴대통령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 같았다. 한 경제기획원 간부는 『朴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성장정책, 그것도 성공적이었던 정책을 스스로 전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고 했다. 경제에 대해서는 늘 자신만만했던 朴대통령도 그 즈음 『이제는 경제도 잘 모르겠어』라고 푸념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었다. 더구나 1979년 중반부터 이란사태로 두 배나 뛴 국제 원유 값의 영향이 국내경제에 반영되면서 안정화 시책의 실천은 벽에 부딪치고 만다. 그러다가 10·26사건.
10·26사건은 朴대통령이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를 통제하는 데 한계를 보인 결과일 뿐만 아니라 경제의 측면에서도 관리능력을 잃어가기 시작할 때 닥친 사건이었다. 朴대통령의 시대적 사명이 끝나가던 시점에서 10·26사건이 터짐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나라나 朴正熙 개인을 위해서도 다행이 되었다는 느낌도 든다. 12·12사태, 5·17로 이어지는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 방황하던 안정화 시책팀은 金在益씨가 신군부에 의해 발탁됨으로써 全斗煥이란 든든한 후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姜慶植씨는 『全斗煥대통령이 안정화정책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은 1981년에 제5차 5개년 계획 브리핑을 통해서였다』고 했다. 1981년 초 全대통령은 안정정책에 대한 확신이 다소 흔들렸으나 5개년 계획 브리핑을 받으면서 생각을 굳혔다. 朴대통령은 한 시간 이상 5개년 계획 보고를 들은 적이 없었는데 全대통령은 열 번이나 들으면서 5공경제정책의 원칙을 머리에 새겼다는 것이다.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9706&C_CC=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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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월간조선 조갑제 대기자의 글입니다. 카페정서와 조금은 거리감이 있고 거친표현이 있지만 각하께서 혜안을 가지고 김재익 경제수석을 등용 함으로서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신 내용이라 글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