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전국을 강타했던 8월, 그리고 더위가 서서히 누그러지는 9월.
제대한 지는 한참 지났지만 이제서야 카메라를 뉘이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원래 잡았던 계획은 따로 있었지만 중간에 일행을 끼고,
대전에 자취중인 아는 동생이자 복학생이자 군대 동기까지 만나러 가면서 계획은 완전히 틀어진다.
사실상 계획이랄 것도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르는대로 몸이 따라갈 뿐.
첫 번째 여행, 그 이름은 '힐링 드라마'.
군생활에 그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여행, 머릿 속을 잠시 정리하며 즐거운 꿈을 꾸는 여행.
조금은 모자라고 서툴지 몰라도 따스한 감성으로 한아름 채워가는 여행을 만들고 싶었다.
치유하는 여행, 그 첫번째 여정지는 원주라는 곳이다.
추석 대보름의 달이 우리 곁을 다가오려는 전야제, 토요일 아침.
처음으로 차를 직접 모는 여행이었지만 그만큼 험난했다. 하필 추석 전으로 잡아서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7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8시에 수락산에서 일행을 싣고 바로 고속도로로 향했지만
퇴계원부터 막힌 차량은 만종분기점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 소시지 줄 잇기를 반복했다.
결국 남원주IC로 나와서 터미널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댄 시간은 12시 30분.
거기에 카메라까지 망가져 일행 DSLR을 빌리면서 이것저것 맞춰 보니 시간은 더욱 훌쩍 지나버렸다.
원주터미널은 2008년 초, 이전 직전 2009년 2월, 이전 직후 2009년 8월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4년만에 4번째로 온 이 곳은 꽤 많이 변해 있었다.
강원권 최초의 대형 백화점인 'AK플라자'가 들어온 것을 필두로 상당히 큰 상권이 자리를 이미 잡아버렸다.
시외버스터미널은 200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면서 강원권 최고를 자부하게 되었다.
두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충지임을 십분 활용하여 전국 각지의 버스를 한 몸에 끌어안고 있다.
마침 걸어가는 길에 춘천가는 버스가 승객을 싣고 유유히 바쁜 여정을 시작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예전의 낡고 초라한 건물을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발전이다.
4년 전에도 잠깐 온 적은 있었지만 그 때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잠깐 거쳐갔던 것인지라,
제대로 둘러보는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방금과는 또다른 금강고속 차량이 출발할 채비를 마친다.
여기 서있는 동안 이들 말고도 경북코치 KD 강원고속 심지어 함양지리산고속까지 보았을 정도로
전국 각지의 회사란 회사는 죄다 10분 안에 마주친 것 같다.
한때 미친 듯이 중독됐었던, 클럽에서 10분 안에 남자를 꼬시게 하는 이효리 텐미닛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10년 전만 해도 허허벌판이었던 이 곳이 지금은 원주 최대 상권 중심지로 발전했다.
비교적 한적한 주말 낮임에도 수많은 차량이 뒤엉켜 역세권이 굉장히 복잡하고,
AK플라자와 터미널 쇼핑몰 주변의 영세상가와 주점 모텔 등등 왠만한 것은 모두 갖추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버스터미널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는 골목길 하나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간의 골목길은 한 차선은 아예 택시가 점거해버렸고 나머지 차선으로 드나드는 차량도 매우 많다.
왔다갔다하는 사람까지 뒤엉켜 굉장히 복잡하고 한시도 쉴 틈이 없어보인다.
시외버스터미널 건물 규모는 상당히 커서 18mm 렌즈로도 한 번에 담기 힘들다.
그나마 도로 너머의 입구를 찍으려고 겨우 자리를 잡았지만 그마저도 실패다.
이미 거대한 건물 1층엔 롯데리아 스무디킹 뚜레쥬르 엔젤리너스 등등 메이커 매장이 줄을 잇고,
1층 입구에는 시내버스 정류장과 택시 승강장이 줄줄이 맞대고 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서 환승할 땐 옆의 조그만 후문으로 들어가면 된다.
다만 잘 눈에 띄지 않을 뿐더러 차량 통행이 많아 건널 때 주의가 필요하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후문으로 들어와서 본 터미널은 이렇게 생겼다.
양 옆으로 매장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야 매표소와 대합실이 나오는 생김새인데,
대합실 한복판에는 쇼핑몰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어 동선은 간단한 편이다.
동선이 무척 깔금한 대신 혼잡도는 말하기 힘들다.
쇼핑몰로 들어가는 사람과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이 겹치니 24시간 야전성시를 이루는 건 기본이다.
이전의 시외버스터미널도 마찬가지였지만, 규모가 커졌음에도 혼잡도는 변한 게 없는 것을 보니 뭔가 씁쓸하기도 하다.
시설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이전 시외버스터미널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특히 그럴 것이다.
상점은 기대도 할 수 없고 버스주차장 옆으로 흩어져 있는 낡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와는 도저히 비교불가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쇼핑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실내는 비교적 밝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 어두컴컴한 편이다.
건물 중앙에 매표소가 있어 정문 후문 할 것 없이 어렵지 않게 표를 살 수 있다.
다만 줄이 길어서 표를 끊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LCD 전광판이어서 예매하려고 하면 필히 인터넷으로 확인해야 한다.
기둥 옆에 시간표가 붙어있긴 하지만 모든게 작아 알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원주는 터미널 뿐만 아니라 모든게 강원도에서 가장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다.
같은 관문격인 기차역 또한 머지않은 미래에 이설할 예정이며, 시청과 같은 관공서도 전부 새로 만든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에 혁신도시와 기업도시가 들어서면서 홀로 독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시내의 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소도시 크기의 중앙시장 인근에서 모든걸 해결하는 추세였다면,
지금은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같은 할인마트가 모두 들어오고
유흥가와 쇼핑 기능이 단계동 쪽으로 옮겨오면서 점점 파이가 넓어지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힐링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릴 수도 있겠다.
'도시'라는 기능에선 가장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까.
낡은 것을 비워내고 새 것을 채우는게 무조건 좋은 일만은 아니라지만,
일부 도시처럼 큰 홍역을 치르지 않으면서도 빠르게 발전하는 것이 어쩌면 진정한 힐링일 것이다.
예전 버스터미널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가?
마땅히 탈 것이 버스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몰리기는 했지만 오는 사람마다 불평 일색이었다.
원주의 관문임에도 주변에 먹을 것이 없고 화장실 매표소 같은 기본 시설조차 너무 열약했던 그 시절.
무언가의 정겨움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수많은 불편함을 안고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 꺼림칙하던 시절은 다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수십대의 버스가 오가는 길 한복판을 무단횡단하며 아슬아슬 버스타기를 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정해진 홈에서 정해진 버스를 차례차례 탈 수 있어 훨씬 질서정연해졌다.
비록 고속버스터미널, 시청 등에 비해 한참 늦기는 했지만 어쨌든 몸살은 싹 사라졌다.
옮겨오는 과정에 있었던 시름도 이젠 모두 벗어내고 묵묵히 치유를 마쳤다.
독점하는 회사 하나 없이 전국 각지의 회사가 고루 들어오는 모습도 보기 좋고,
쇼핑몰과 연결되어 외지인들도 쉽게 원주의 상권을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참 편하다.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도 언젠가는 시름시름 앓다가 생을 마감하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최신 전자기기도 10년을 채 못 넘기고 고물이 된다.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이리저리 치이다 완전한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았으니 아마 지금이 가장 행복할 지도 모른다.
삭막하지만 풍성했던 버스터미널을 뒤로 하고 바로 옆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겨볼까.
- 2부에서 -
첫댓글 원주 터미널의 흐름과 현재 상황을 정말 잘 써주셨네요. 잘 보았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주 오랜만에 정겨운 글 입니다! 나이에 정말 놀랬습니다^^
허허 밝히지 말걸 그랬나요...ㅎㅎ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원주터미널에서 함지산고속을 목격하셨다고 하는 것은 아마 착각하신 듯... ㅎㅎㅎ
거창고속이랑 헷갈리긴 합니다만...; 음 제가 기억을 잘못하고 있는건지
오랫만에 터미널 여행기 다시보니 반갑네요
오랫만에 뵈서 저도 반갑습니다 ^^
반갑습니다...
몇 달 전에 조카 결혼식땜에 원주 터미널 갔었는데...
다시 보니 새롭군요.
잘 보았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오랜만에 정말 재밌게 보았습니다 나이 보고 깜놀하고 글쓰는거보고 두번 깜놀했네요 터미널기행 너무 재밌네요 자주자주 써주시고 앞으로 잘되길 바랄게요
자주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응원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연배에 비해 성숙한 필력이 부럽습니다. 아마도 함양지리산고속은 잘못 보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함양이 원주에 진출한 노선은 현재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슷한 도색을 하고 있는 업체가 또 있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들어보니 함양 거창 모두 원주와 인연이 없는 업체더군요. 그런데 제가 분명히 두 업체 중 하나를 본 기억이 있기에 추석 전 임시차나 뭐 그런게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사진을 아쉽게 찍지는 못하였지만 분명히 제 기억에 남아있거든요. 아무튼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나이야 무슨상관이 있습니까? 저 앞에 세명이 지나가면 그 중에 한명은 스승이 있다! 는 명언이 생각날 정도로 훌륭한 어휘력에 늘 감탄할뿐입니다. 예전 시외터미널에서 수원행은 지붕도 없고 승차홈도 없이 담벼락옆에서 출발했던걸로 기억이나네요.작년에 원주 ㅡ 영월간을 이용했었는데 조금은 어두운 조명이 아쉬웠습니다. 다음 터미널 기행기를 기대한다고는 하지않겠습니다.흐르는 강물처럼~~~~순리적으로 시간에 맡기겠습니다.
스승에까지 비유해주시니 제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네요...ㅎㅎ 예전에는 버스 이용 자체가 많이 고역이었죠. 주말만 되면 몰려드는 사람들에 치이고 수시로 왔다갔다하는 버스에 치이고... 실제로 사고도 몇 번 났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도 건물 크기에 비해 터미널 공간이 좁고 어두운건 여전하더군요. 다음 여행기 벌써 올라오긴 했는데 큰 기대 안하고 봐주시는게 더 좋을듯 싶어요. 감사합니다 ^^
스승이란 말에 너무 부담갖진 마시구요^^
부담이랄건 없습니다. 어차피 취미로 할 뿐인데요 ^^;
취미라도 좋은 취미를 갖고 계신것 같아서 보기 좋습니다. 전역 후 다시 글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박수를 보냅니다. 나이나 경험이란건 그리 중요하진 않죠.
그리고 원주에 안들어가는 회사 중에 전북권 시외업체 회사들도 노선이 없습니다. 전북(전주)/호남/대한/안전 은 전주나 전북권에서 원주로 운행하는 노선이 없습니다. 그나마 전북에서 강원고속과 공배로 전주 - 춘천 1일 2회 운행하고 있을 뿐이죠.(춘천발 오전 강원/오후 전북, 전주발 오전 전북/오후 강원). 현재 전주발 원주행 노선은 금강(원주 경유 속초행/오전 2회는 유성,원주,미시령 경유), 금남/대원(유성 경유 원주행 오후 1회씩 운행)에서 운행하고 있습니다.
원주가 강원권 최대 도시라고는 해도 타지역 중심도시에 비하면 아직 열세인 것은 사실이죠. 게다가 강원-호남권 교류가 애초에 많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전북권 시외업체들 회사 사정도 다들 좋은 편은 아니니깐요.. 노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