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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이유 1
내가 집사람과 결혼을 하게된 것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을 한 펜팔이 인연이 되어서이다.
겨울이면 언제나 하는 과수원 전지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 대학시절의 후배 한명을 데리고 금촌이라는 곳에 가서 사과 과수원의 전지 일을 하던중에 눈이 와서 눈이 녹을때까지 몇일 일을 할수가 없게 되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빈둥빈둥 놀기가 싫어서 후배와 함께 눈이 녹으면 다시 오겠다고하고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타고 있던 뻐스의 라디오에서 한국인과 펜팔을 원하는 일본의 여고생이 있다고하는 방송을 듣고 서울에 내려서 국제우체국 뒤에 있는 펜팔소개 회사에 가서 가입금을 내고 소개를 받은 것이 집사람이다.
나는 당시 과수원에 관한 책을 읽기 위해서 선친께 일본말을 배우고 있었지만 실력이라는게 겨우 책에 있는 한문만을 읽어 내려 가면서 어렴푸시 이런 말이 쓰여 있구나 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처음 집사람과 펜팔을 시작을 했을때는 내가 한글로 편지를 써서 선친께 번역을 부탁드려서 그것을 다시 내손으로 그려서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계속 편지를 주고 받다가 펜팔을 시작을 한지 4년후에 대학생이 된 집사람이 서울에 관광을 오게 되어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때에도 통역으로 선친을 모시고 갔으니 젊은 남녀의 대화를 통역을 해주신 선친도 참으로 딱하셨다고 지금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러구러 첫 대면이 끝나고 나도 집사람의 인상이 퍽 좋게 생각을 했었고, 선친께서도 퍽 예쁘게 보셨고, 집사람도 나의 인상이 별로 나쁘지 않었는지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다가 대학을 졸업한후에 대한항공 동경지점에 입사를 해서 자주 서울에 놀러 왔다가곤 했었다.
그러는 사이에 내 나이가 결혼 적령기가 되니 여기저기에서 결혼 이야기가 들어 왔지만 번번히 거절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집사람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에 정이 들었지만 서로의 입장 때문에 결혼을 하자는 이야기는 입밖에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만나면 이천 집으로 데리고 와서 하룻밤을 재우곤 다시 동경으로 돌려 보내곤 했었다.
상상으로는 집사람과 결혼을 했으면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농가의 장남으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 자신도 애써 그런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을 했고 또 어른들에게도 말도 못꺼내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중에 하루는 선친께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시더니 “넌 도대체 장가를 갈 생각이냐 안 갈 생각이냐?” 고 물으신다.
그래서 머뭇머뭇하고 있으니까 “네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라도 있는게냐?”고 또 물으신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다시는 일본인과 결혼 같은 이야기는 입밖에 꺼낼수가 없겠다고 생각을 하고 “사실은 지금 사귀고 있는 일본애와 결혼을 했으면하는 생각은 있지만 지금 제 입장이 그렇지가 못해서 말씀을 못드리고 있는 겁니다.조금더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정리가 되면 결혼을 하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잠시 아무말씀도 하시지 않고 담배만 피우시던 선친께서 “그럼 너는 그애와 꼭 결혼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는게냐?그리고 또 그애의 생각은 어떠냐?”고 재차 물으신다.
“저는 사정만 허락을 한다면 그여자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애의 생각은 아직 확인을 해보지 않었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인간의 일생 만사중에서 가장 중요한게 결혼이라는게다. 너 만약에 그애와 결혼을 한다면 책임을 질수가 있겠느냐?”고 또 물으신다.
그때 만약에 책임을 못진다고 하면 이야기는 끝장이 나는데 설사 내일 책임을 못질 일이 벌어 진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책임을 진다고 할수 밖에 없는 입장이 아닌가.
“네 책임을 지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남자가 책임을 진다는건 대단히 무겁고 또 중요한거다.그런데 네가 책임을 진다고하면 애비는 네 에미와도 이야기를 했지만 너와 그애와의 결혼을 허가 하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속담에 십년묵은 체증이 싹 가신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그때 나의 기분은 그것보다 몇백배 기분이 좋았었다.
그당시 촌에는 전화가 없을 때였기 때문에 다음날 서울로 올라가서 동경으로 전화를 해서 나와 결혼을 하자고 했더니 집사람이 첫마디에 그러겠다고 한다.
그래서 1973년에 우리들은 이천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은 했지만 내가 농업기술연수차 일본에 가서 1년간 연수를 받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사람은 동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1년간 연수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할때 집사람을 데리고 귀국을 해서 전기 수도 까스 하나도 없는 순 깡촌에서 순한국식으로 생활을 함께 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때가 되면 뒷밭에 나가서 야채를 뜯어다가 반찬을 만들고,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짖고, 겨울에 시냇물에 가서 얼음물에 빨래를 빠는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스트레스가 쌓여서 점점 건강이 좋지 않게 되어갔다.
처음에는 일시적이려니 하고 생각을 했었는데 점점 상태가 나빠져서 지금까지 다니던 이천의 조그만 병원이 아니라 서울의 큰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까 스트레스에서 오는 저혈압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주지 않으면 완치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참으로 딱하기가 짝이 없이 딱하게 생겼다.
집사람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방법으로는 집사람을 일본으로 보내는 방법밖엔 없는데 일시적으로 친정에 보냈다가 돌아오는 식으로는 도저히 완치가 될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내가 함께 일본에 가서 살수도 없는 노릇이고 환장을 하게 생겼다.
선친이 그 눈치를 채시고 나더러 어떻게 할것이냐고 물으신다.
집사람의 병명과 치료법등을 자세히 말씀을 드린후에 “저는 이집의 장남으로 부모님을 두고 일본으로 갈수는 없는 노릇이고,그렇다고 일시적으로 친정에 보내는 정도로는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 아무래도 제가 집사람과 헤어지는수 밖엔 없을것 같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때까지 아무 말씀없이 담배만 피우시던 선친께서 벽력 같이 고함을 치시면서 “이놈아 네가 처음에 너 처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할때 내가 네게 책임을 질수 있겠냐고 했을때 넌 책임을 진다고 분면히 내게 말을 했는데, 사내 자식의 책임을 지는 방법이 겨우 그런게냐? 난 그런식으로 자식을 교육 시키지 않었다”고 하신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으시겠습니까?”라고 여쭈니까 “네 외에도 아들이 둘이나 더 있다.그러니까 집안 대 끊길 걱정일랑 말고 네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거라. 그래서 네처의 몸이 완전히 낳았다고 판단이 서거든 다시 돌아 오거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렇게해서 내가 일본으로 온지 1년 반후에 선친께서는 간장암으로 세상을 뜨시고 말었다.
당시 일본의 비자를 받기 위해서 한 일이라던가 선친의 간장암을 고쳐 보려고 당시 일본의 정계의 흑막으로 유명하던 S라는 분을 만났던 이야기랑, 그분의 소개로 박대통령 주치의였던 서울대학교 민헌기박사님과의 만남 등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또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의 일본의 생활을 이렇게 시작을 한거다.
2008.06.27
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이유 2(여권과 비자 발급에 관한 이야기)|
아버님의 허가가 떨어지고 나서 우선 집사람과 딸애를 일본으로 보내고 그 다음에 내가 일본으로 오기 위한 수속을 밟는데 이게 보통 힘이드는게 아니였다.
이번에는 내가 어렵사리 여권과 비자를 받게된 내력을 이야기해 보겠다.
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아직 우리나라는 해외여행이 자유화가 되기 이전이라서 그당시 여권을 받어본 사람이면 잘 알겠지만 여권을 발급 받는다는 것이 보통 힘이드는게 아니였다.
또 어렵사리 여권을 받어도 발급일로 부터 6개월 이내에 출국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외무부 여권과에 가서 여권의 유효확인을 받어야 되는데 이게 또 무슨서류를 갖어 와라 무슨 서류가 모자란다 하면서 사람의 애를 말리는거다.
내가 사는 곳이 이천이라서 여권이나 비자 수속을 밟기 위해서 일일히 서울을 드나들기도 힘이 들거니와 한번에 일이 끝나는게 아니라 같은 곳을 수도 없이 많이 다녀야 되기 때문에 외무부여권과 근처의 소위 여행사라고하는 부로커들에게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내 여권을 발급 받아 달라고 상담을 했더니 내가 외국에 갈려고하는 이유를 물어보고선 한다는 소리가 그런 사정으로는 여권을 받을수가 없다고 하며 선듯 나서는 부로커가 없었다.
그래서 오기가 발동하여 모든 소속을 내가 직접 하였기 때문에 불필요한 경비는 한푼도 들지가 않었다.
유여곡절 끝에 여권은 발급을 받었지만 이제 부터가 본격적으로 힘이드는 일본의 비자를 발급 받는 일이 남어 있었다.
비자도 일본대사관 근처의 난다긴다하는 부로커들이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바람에 내가 직접 수속을 했다.
그당시에는 일본이라는 나라도 퍽 고루한 나라라서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네 집에 가서 살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지배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의 남편인 나를 비롯한 외국적의 남편들에게 장기적으로 일본에 체류를 할수있는 비자라는게 존재를 하지 않었었다.(지금은 부부가 평등하다고하여 남편들에게 쉽게 장기비자가 발급이 되고 있다)
일본 동경에서는 내처가 어린애를 업고서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법무성 입구에 가서 일본의 법률의 부당함을 규탄하는 1인 데모를 1개월 정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지위가 높은분(그분의 성함과 직함은 알지만 혹시 누가 될까봐 밝히지 않는다)이 내 처에게 따라 오라고 하더니 자기의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내처가 그분에게 일본은 민주국가이고 거주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이 되어 있는데 어째서 결혼을 하면 여자가 남자측으로 가서 살어야만 되는가?라고 물으면서 나와의 관계를 설명을 하고 남편이 일본으로 올수 있도록 협조를 해 달라고 했더니 그분 말씀이 당신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를 한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입국 목적에 처와 동거를 하기 위해 발급을 하는 남편의 장기비자는 존재가 하지 않으니까 곤난하다고 하면서 한참 생각을 하더니 편법을 가르쳐 줄테니 그대로 하라고 이르면서 하는 말이 당신 남편이 서울에서 비자 신청을하면 틀림없이 그 서류가 나에게 오도록 되어 있다.그러나 먼저 이야기 한대로 합법적인 비자의 종류가 없으니까 일본국내의 어느 회사와 고용계약을 맺어서 취업을 하는 형식으로 서류를 접수 시키면 장기 비자를 내어 주겠다고 하는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자, 그 다음이 말은 쉽지만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람과 고용계약을 맺어줄 회사가 흔하지 않은거다.
다행히 집사람이 한국에 가기 전까지 대한항공 일본지사 예약쎈터에서 근무를 했기 때문에(지금은 예약업무를 모두 콤퓨터로 처리를 하지만 그 당시에는 예약쎈터에서 직접 전화로 예약을 받었다고 한다) 그당시 친하게 지내던 여행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사정이야기를 하였더니 그중에 주식회사 일한관광(日韓觀光)이라고하는 여행사의 사장이 처의 이야기를 듣고 나와의 고용계약서를 작성을 해 주어서 일본에 입국을 할수가 있게 되었다.
내가 일본에 입국을 한후 집사람이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편협한 국가인가를 비판을 하고, 남녀 평등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인 남편을 일본에 오도록 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 하는 내용을 자세히 투고를 했다.
그 투고문이 계제된 신문이 발행이 되고 몇일이 지나자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기 시작을 하는거다.
자기들 부부들도 우리 부부와 똑같은 사정인데 지금까지 비자를 받을 길이 없어서 애를 태우고 있는 중인데 자세한 길을 가르쳐 줄수가 있겠는냐는 전화였다.
그때마다 우리 부부는 그 사람들과 만나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고 일본이라는 국가는 전례(前例)만 있으면 무엇이건 해결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설명대로 수속을 하여 모두들 입국을 할수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일본에 입국을 한 가정이 10가정이 되어 여명회(黎明會)라고 하는 친목회를 만들어서 1년에 몇번씩 가족 전부가 모여서 즐기곤 했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멤버들 중에도 반 이상이나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었지만 지금도 남어 있는 사람들끼리 가끔씩 만나서 즐기곤 한다.
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이유 3(이상한 인연들)
내가 일본으로 와서 살게된후 1년반쯤 지난 어느날이였다.
근무를하던 여행사에서 대한항공에 갈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다가 우편함을 열어 보니 나에게 큰누님과 동생의 편지가 두통이나 와 있었다.
보통 같으면 한통씩 오는 편지가 두통이 한꺼번에 왔다는게 조금 이상했지만 아무생각 없이 편지를 가방에 집어 넣고 차를 운전을 하고 가다가 신호 대기를 하는 도중에 무심코 편지를 뜯어서 읽기 시작을 했다.
그 편지는 큰누님에게서 온 편지로 아버님이 간장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일본의 마루야마왁친이라는게 잘 듣는다고하니 그 약을 구해서 급히 귀국을 하라는 내용이였다.
그때까지는 말로만 듣던대로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감이 들어갔다.
서둘러서 일을 끝내고 회사에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도대체가 믿어지지가 않는 거다.
우선 아버님이 간장암이라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가 않느거고 또 시판도 하지 않는 마루야마왁친이라는 약을 어디서 어떻게 구입을 해야 옳을지가 판단이 서지가 않는거다.(요즈음 같으면 콤퓨터로 두들기면 금방 해결이 되는 세상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었었다)
그때 어핏 머리에 떠 오르는게 당시 일본의 정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계시는 분중에 S라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대단한 휴메니스트로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되던 않되던 물에 빠진놈이 지푸라기라도 움켜쥔다는 식으로 그분이 회장으로 계시다고 들은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에 나온 비서에게 사정이야기를하고 회장님을 꼭좀 뵙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다가 비서가 하는 소리가 지금 당장에 그 사무실로 올수가 있느냐고 한다.
다행히 내가 근무를 하던 여행사와 그분의 사무실이 그리 멀지가 않았으므로 한달음에 그분의 사무실로 가니 그분은 마침 미국의 주간지인 타임의 대만인 기자와 기자회견을 하고 있던 중이였는데 그기자에게 인명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니까 기자 회견을 잠시 중단을하고 이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자고 말씀을하고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하신다.
당시 아직 일본의 생활이 짧았던 까닭에 아주 서툴은 일본말로 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내력이랑 한국인의 부모에 대한 효의 개념을 이야기한후 현재 나의 아버지가 간장암으로 위독하다고하며 나더러 마루야마왁친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어듸에서 구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 왔노라고 했더니 그분 말씀이 마루야마왁친이란 일본의대(日本醫大)의 교수로 계시는 마루야마박사가 만드는 약인데 현재 시판은 하지 않고 시용품으로 나누어 주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자기는 일본의대와는 관련이 없어서 미안하지만 도와 줄수가 없고, 그 대신 다까사끼의대(高崎醫大)의 사또(佐藤)이라고 하는 교수가 있는데 그분이 암의 권위자로 그분의 연구를 돕고 있으므로 당신의 아버지를 일본으로 모시고 올수가 있으면 자기가 책임을 지고 다까사끼의대에서 치료를 받도록 협조를 해 줄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주치의로 계시던 서울대학교병원의 민헌기박사에게 소개장을 써줄테니 서울에 가거든 그분과 의논을 하라고 하시며 그 자리에서 직접 서울대학교로 전화를하여 내 이야기를 하고 수일내에 찾어 갈테니 잘 부탁을 한다는 말을 해주셨다.
그때 내 이야기를 곁에서 듣고 있던 장이라고 하는 대만인 기자가 나에게 꼭 마루야마 왁친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는 만약에 그 약이 효과가 없다손 치더라도 자식된 도리로 꼭 그약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잠시 전화를 빌려 달라고 해서 어디론가 중국어로 전화를 걸더니 나보고 자기의 친구가 마루야마교수의 조수로 있는데 그에게 이곳으로 그 약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을 했으니까 좀 있으면 그 약이 도착을 할거니까 안심을 하라고 말을 한다.
도대체가 어떻게된 영문인지 예상치도 않던 방향으로 일이 흘러서 마루야마 왁친을 그것도 보통은 30일분 밖에는 배포를 하지 않는 것을 60일분이나 입수를 하게 되었다.
이러구러 마루야마 왁친을 입수를하고 집으로 와서 곧바로 서울로 전화를 해서 큰누님에게 내일 몇시에 김포에 도착을 할테니 아버님이 병원에서 간장암이라고 진찰을 받은 카르테를 가지고 김포로 나오라고 연락을 했다.
다음날 김포에서 택시를 타고 곧바로 서울대학병원으로 가서 민헌기박사를 만나뵙고 아버님의 카르테를 보여 주니 그분 말씀이 대단히 정확하게 진찰을 했기 때문에 다시 진찰을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하면서 자기의 진단으로는 여명이 길어야 앞으로 3개월 정도로 밖에는 없을것 같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서 바닥에 무릅을 꿇고 나의 아버지를 의학의 재료로 써 주어도 좋으니까 나중에 원이나 없도록 수술만이라도 해 주십사고 사정을 했더니 그분 말씀이 자기도 부모님을 뫼시고 있기 때문에 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꼭 그러는 것이 효가 아니며 그 길은 당신 아버님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단순히 당신들 아들딸들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시며 어차피 돌아가실 분에게 왜 불필요한 아픔을 드릴려고 하느냐 그것은 대단한 불효라고 하신다.
그래서 S선생에게 들은 다까사끼의대의 사또교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만약에 일본에 모시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현재의 암에 대한 의학의 수준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하다고 하시며 옛날말에 호랑이도 자기의 굴에서 최후를 맞이한다고 하는데 왜 아버님을 객사를 시켜드릴려고 하느냐고 하시며 당신이 S선생과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 대단한분과 교류를 하고 있으니 그분과의 인연을 중요시하라고 하며 그분의 부탁이기 때문에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해 주고 싶지만 현재의 상태로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고 하신다.
민박사님과 헤어져서 집으로 가서 1년반만에 뵙는 아버님의 모습은 나와 헤어질때의 모습은 간데없고 참으로 초최하기 짝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버님이 돌아가실때까지만이라도 모시고 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사정으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후 1개월반후에 아버님은 가지고 간 마루야마 왁친을 전부 써 보지도 못하신채 운명을 하시고 말었다.
오늘 이야기에는 더욱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등장을 하시는 분들이 모두 실존하시던 분들이라서 이이상 자세한 표현은 그분들께 누가 되겠기에 생략을 하지만 30수년이 지난 지금 생각을 해 보아도 그때 무슨 뱃장으로 전혀 면식도 없는 S선생에게 막말로 천둥에 개 뛰어들듯 찾아 가서 중언부언 도와 달라고 요청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수가 없고, 또 기자회견을 중단을 하면서까지 나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생각할수도 없을 정도로 나를 도와 주실려고 노력을 해 주신 S선생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힘이든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 나에게 너무나도 고맙게 해 주신 S선생도, 중국인 장이라고하는 타임의 기자도, 그리고 서울대학교의 박정희대통령의 주치의로 계시던 민헌기박사님도 모두 이세상의 분들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며 삼가 그분들의 명복을 빈다.
추기:본문중에 내가 많은 신세를 진 분의 성함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S라는 이니셜로 밝혀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미 작고하신 분의 실명을 거론하는 것은 실례가 될것 같고, 또 그분의 장남께서 현재 중의원의원(衆議員議員)의 중진의원으로 많은 활약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께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부득히 이니셜로 썼음을 밝힌다.
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이유 4 (마지막회)
선친께서 세상을 뜨셨다는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귀국을 해 보니 이 잘난 불효 막심한 아들이지만 소왈 장남이라고 아직까지 염도 하지 않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없이 장례를 모시고 나니 머리에 만감이 교차를 한다.
선친의 허락하에 일본으로 떠났다고는 하지만 장남으로서 부모님을 모시지 않었다는 죄책감과 그 보다도 선친의 임종을 못지켜드렸다는 죄의식이 머리에 꽉 차는거다.
그때 일본의 생활을 정리하고 처와 딸을 데리고 다시 귀국을 할까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아직 처의 건강상태가 완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귀국을하면 또 그 다음이 문제가 되는 거였다.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 와서 지내면서도 머리솎에는 언제나 고향의 어머님과 선친께서 남겨 놓으신 재산을 어떤식으로 처리를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가를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내 마음으로는 이유야 어찌 되었던 결과적으로 불효를 저질렀다는 죄책감에 고향의 재산은 손을 대고 싶지가 않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집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몰라서 그 이야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않은채 어정쩡한 생활을 하던중에 하루는 집사람이 나에게 할말이 있다고 한다.
뭐냐고 물었더니 집사람 하는 소리가 이천의 재산의 상속을 어떤식으로 할 생각인지 자세히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아하, 선친이 돌아가신지 1년도 되기 전에 상속 이야기를 꺼내는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애써서 감정을 숨기고 내가 이야기 하기전에 당신의 어떤식으로 처리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 줄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어떤 말을 해도 화를 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면 자기의 본심을 이야기 하겠다고 한다.
화를 내지 않는다고 약속을 하니까 처가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일본에서 태어 나아서 자랐지만 당신과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은후 부터 한국의 풍습, 가족제도, 그리고 한국인의 효에 대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했는데 자기 생각으로는 당신은 아버님께 큰 불효를 했다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님이 반대를 하시는 것을 뿌리치고 당신이 일본에 오게 된 것이 아니라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일본에 보내셨는데 당신은 그런 아버님에 대해서 아무런 보답을 해 드리지 못하지 않었느냐?
또 아버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친딸과 같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아버님의 재산을 상속을 받으면 평생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살어야 될것 같은 생각이 들어간다.그래서 자기 생각으로는 이천의 재산을 당신은 상속을 받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 부부는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 노력을 하면 먹고 살수야 있지 않겠는냐고 한다.
사실은 처에게 이런말을 듣기 전에 나 자신도 이천의 재산은 상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처에게 어떤 형식으로 이런 이야기를 꺼내야 될까 싶어서 혼자서 고심을 하고 있던차에 처가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니 고맙기가 짝이 없이 고마운거다.
그말을 듣고 집사람에게 사실은 나도 당신과 같은 생각이였는데 당신이 뭐라고 할지 몰라서 재산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던 차라고 말을 하고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
내 생각으로는 형제 5남매가 재산을 분활을 받는것 보다는 어머님 앞으로 반을 상속을 시켜 드리고 나머지는 어머님를 모시고 이천집을 지키고 있는 막내동생에게 상속을 시켜 주고 싶다고 했더니 좋은 생각이지만 누님들과 바로 밑의 동생이 당신의 뜻을 따르겠느냐고 묻는다.
하기는 내뜻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 밑의 동생이 자기도 같은 형제인데 왜 자기는 빼놓느냐고 하면 곤난하고 또 아무리 출가외인이라고는 하지만 누님들도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마음만 가지고 일을 처리할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나의 마음을 정한 후에도 국내의 형제들에게는 재산의 이야기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지내다가 선친의 소상때 귀국을 해서 5남매가 모인 자리에서 의논을 시작을 했다.
우선 나는 장남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했으므로 상속권을 전부 포기하겠다고 서두를 꺼내면서 내 생각으로는 재산은 반을 어머님 명의로 상속을 해 드리고 나머지 반을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을 지키고 있는 막내에게 상속을 시켜주고 싶다고 말을 꺼내면서 대단히 드리기 죄송한 말이지만 누님들도 현재 지내시기에 그리 불편을 느끼시지 않는 형편이니까 상속권을 포기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바로 밑의 동생에게는 너는 현재 서울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니까 그당시 얼마되지 않는 고향의 재산 상속을 포기 해 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러자 누님들이 네가 상속을 포기하는 마당에 자기들이 상속을 받겠다는건 도리가 되지 않으니까 자기들도 상속을 포기하겠다고 기분좋게 응해 주셨다.
바로 밑의 동생도 형님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니 자기도 형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상속을 포기하는데 응해 주어서 나의 처음 계획대로 재산의 반을 어머님 명의로 상속을 시켜드리고 나머지 반을 막내동생 앞으로 상속을 시켜 주면서 어머님 앞으로 상속이 된 재산은 나중에 어머님을 끝까지 모신 자식이 상속을 받기로 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후 전혀 모르고 지내던 충북 괴산의 선조님들의 부동산이 친척들의 도움으로 상속을 받게 되어 바로 밑의 동생에게 상속을 시켜 주어 그 애에게도 섭섭함을 달래 줄수가 있게 되었다.
재산을 상속 받고 싶어서 껄떡하다가 못 받았으면 감정이 생기 겠지만 스스로 동생에게 물려 주고 나니까 지금도 귀국을 하면 선조님들의 재산이 모두 내몫으로 되어 있는듯한 감이 들어서 기분이 좋은거다.
또 형제간의 우애라는 것도 내 욕심을 전부 차리려고 하면 무너져 버리고,내가 조금 손해를 본다고 생각을 하면서 행동을 하면 두터워지는 법이라고 생각을 한다.
지금은 어머님마져 돌아 가시고 말었지만 지금도 내가 귀국을 하면 막내동생이 지키고 있는 고향집에서 5남매가(바로 밑의 동생이 취장암으로 세상을 버린 후에는 제수님이 반드시 참석을 한다) 모두 모여서 내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즐겁게 지내거나 어디로 함께 여행을 다니거나 하고 있다.
나는 이편이 재산 보다도 수백배 더 소중하고 좋은거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끝막으며
대단히 부끄럽기 짝이없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4회에 걸쳐서 올리고나니 내솎을 모두 까발린것 같은 생각에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간다.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은 위의 글에 실린 내용은 모두가 하나도 거짖이 없는 사실들이라는 점이다.
그이후 어머님도 돌아 가시고 나는 자식들의 교육등을 생각하여 귀국을 영원히 포기를하고 이곳에서 살기로 마음을 먹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나의 선친에 관한 댓글이 많이 올라 있는데 나의 선친은 무지무지하게 완고한 분이라서 나의 누님들이 학교에 다닐때 항상 귀에 못이 밖히도록 하는 말씀이 난 너희들이 연애질을 해서 내 얼굴에 먹칠을 하면 그꼴 보지 않고 자살을 할거다라고 하셔서 누님들은 꼼짝달쌀도 못했었다.
그러던 분이 어떻게 마음이 변해서 당신의 며느리는 편지도 번역을 해주시고 통역까지 해주셨는지 이해하기가 힘이들다고 지금도 누님들은 항상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은 아버지가 자살을 하실까봐 겁이나서 연애 한번 못해 보고 시집을 가서 억울하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글을 읽어주신 많은분들께 재미없는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과 쓸데없이 시간을 빼앗아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사람이 자기의 신변을 정리를 한다는 것은 죽을 날이 가깝다는 징조라고 들은적이 있는데 나도 아마 그런 부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2009.10.24
내가 일본에서 살게된 이유 5(蛇足)
옛날말에 “잘한다 잘한다하면 뒷간 똥다리에도 행주질을 한다”느니”잘한다 잘한다하면 포도청 문 고리도 빼온다”는 말이 있다.
별로 자랑거리도 없고 똑똑하지도 못한놈을 잘한다 잘한다 하면 정말로 잘하는줄 알고 기고만장 한다는 말로 이해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4회에 걸쳐서 재미도 없는 글을 올렸더니 많은 분들로 보터 댓글이 올려져서 촌놈 생각에 재미없는 글이지만 많은 분들이 보셨구나하는 생각을하니 불출 같이 공연히 우쭐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오늘은 뒷매김을 하고자 또 재미없는 글의 사족(蛇足)을 달아본다.
지난번 이야기에 고향의 재산 이야기를 썼더니 많은 분들이 힘든 결정을 했다고다고들 하시지만 실상 나자신이나 내 집사람은 힘든 결정을 했다고 생각 해 본적도 없고 또 아쉽게 생각을 해 본적도 없다.
선친께 불효를 한 나로서는 당연히 그래야 되는걸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도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때 기분 좋게 응해주신 두분 누님들과 사업을 합네 하면서도 항상 자금난에 쪼들리면서도 선뜻 나의 뜻을 따라준 지금은 세상을 버린 바로 믿의 아우이다.
지금이야 고향집 바로 앞에 철도역이 새로 생긴다고 해서 땅값이 많이 올라간 모양이지만 옛날에는 그저 시골의 땅에 불과하던 곳이였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앞에서도 조금 언급을 했지만 선친께서 남겨 주신 전장들은 돌러 볼때는 이게 모두 내땅이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돌러보곤 하니까 기분이 좋은거다.
또 집안이 될려고하니까 제수님들이 모두들 좋은분들이 들어 오셔서 형제들의 우애를 깊게 해 주시고 계신다.
지난 추석때는 추석인데도 고향에도 오지 못하며 송편도 못먹고 지내는 동생이 안스럽다고 큰누님이 우정 송편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떡쌀가루를 준비하고 또 송편 솎거리로 작은누님댁에서 농사를 지은 녹두등을 가지고 오셨다.
이왕에 송편을 만들어 먹는다면 집에서 우리끼리만 만들어 먹을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드나드는 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만들어 먹고자 住區쎈터라고하는 곳에서 한국요리 강습회겸 송편 만들기 시범을 보였다.
추석이라는 우리의 명절을 모르는 일본사람들에게 우리 전통 풍습과 우리나라 요리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모두들 좋아들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낼수가 있었다.
아주 불출짓을 하는 김에 우리집의 자랑을 한가지 하고자 한다.
우리 집에는 지금도 지켜내려 오고 있는 전통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가끔 귀국을 해서 누님들을 뵈올때는 언제나 큰절로 인사를 드리고 또 내동생도 나에게 큰절로 인사를 한다.
형제들이 그러니까 자연 조카들도 그래야 되는걸로 알고 반드시 어른들은 뵈올때는 큰절로 인사를 한다.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무슨 티를 내기 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어릴때 배운 예의를 내가 죽을때 까지 만이라도 지켜 보고 싶은 생각에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러자고 말을 꺼내서 우리집의 전통으로 지켜 내려 오고 있는 것이다.
가끔 나의 학교 동창들이 내집(실제로는 동생네 집이지만 나는 언제나 내집 내집하고 있다)에 놀러 와서 내가 집에 도착을 했을때 밖에 외출을 했던 동생이 집에 돌아와서 나를 보고 “형님 오셨습니까” 하면서 큰절을 하는 것을 보고는 모두들 놀라곤 한다.
재미없는 글을 길게 올려서 죄송한마음이다.
끝으로 지난번 큰딸애 결혼식때 도꾜에 왔던 형제들의 사진과 住區쎈터에서의 한국요리강습및 송편만들기때의 사진을 올린다.
사진 설명 딸애 부부와 뒷줄 왼쪽으로 부터 내 일본인 동서,작은매형님.동생,본인,집사람,큰누님,작은누님,큰제수님,작은제수님,처제,둘째딸,셋째딸.
住區쎈터에서의 한국요리 강습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