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명한 정치문벌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부쉬 가족 ( Bush Family) 의 족장이라 할 수 있는 제41대 대통령 죠지 허버트 워커 부쉬 ( George Herbert Walker Bush) 전 태동령은 부인 바바라 부쉬 여사
( Barbara Bush)와의 사이에 총4남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중 큰 아들 죠지 떠블 유 부시 ( George W. Bush)와 둘째 아들 젭 부시 ( Jeb Bush)가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큰 아들 “떠블 유”
는 제43대 대통령으로 대통령직을 2001년부터
2009년가지 두 번이나 지냈으며, 둘째 아들 젭은 플로리다주의 제
43대 주지사로 ‘99년부터 2007년까지
투 텀 ( Two Terms) 주지사였다. 동생 젭은 내년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지금공화당 대통령 후보들중 한 명으로 주목받고 있는 거물급 정계 인사다. 그러나 두 형제중에서도 아무래도 대통령직을 두번이나 수행한
형인 “떠블 유” 부쉬가 동생보다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하겠다. 아직까지 동생 젭은 형님 죠지 떠블 유의 아성에
근접을 못했다.
(왼쪽 동생 젭 부시, 오른쪽 형 죠지 "떠블 유" 부쉬)
미국에서 인기있는 막장 리알리티 티비쇼의 대표급인 “
Keeping Up with Kardashians” ( “카데시안들을 따르며” 라
번역될 수 있음) 주인공들은 킴 ( Kim), 코트니
( Kourtney), 또 클로에
( Khloe) 란 자매 셋이다. 이 쇼가 얼마나 미국 시청자들에게 인기가 있는지 세자매가 벌어들이는 매년 수입만해도 한국돈으로 환불하면 백하고 도 수십억이 넘는다. 티비를 켜서 채널을 돌리거나 연예계 뉴스를 접해도 세자매들이 언급안되는 날은 거의 없을 정도이다. 매력적인 세자매들중 단연 가장 인기가 있고 제일 잘 알려진 자매는 첫째
킴이다; 그녀의 톡톡튀고 개성있는 성격및 치명적인 명품 뒤태의 관능미가 잘 어우려져 이 세대를 풍미하는 섹스심볼로
부상하며 단연 세자매중 갑이다.
(왼쪽 코트니, 가운데 클로에, 오른쪽 킴)
스포츠계에서 두각을 나타낸 형제나
자매들을 보더라도 꼭 누구 한 명은 더 유명하고 좀 더 큰 성과를 이룬것을 볼 수 가 있다. 나한테 친숙한 테니스계를 한 번 들여다 보자; 그랜드 슬램 7관왕에 빛나는 전 세계랭킹 1위 천재 테니스
선수 쟌 멕켄로 ( John McEnroe) 에겐 그랜드 슬램 한 번 못 따보고 세계랭킹
20위권에 머물렀던 막내동생 패츄릭 멕켄로가 있었고, 그랜드 슬램 을 무려 20번이나 재패한 흑진주 여왕 동생 서리나 윌리암스 (Serena Williams) 에겐 그랜드 슬램 7관왕에
머문 흑진주 요정 언니 비너스 윌리암스 ( Venus Williams) 가 있다. 분명 한 개인만을 놓고보면 패츄릭 멕켄로, 또 비너스 윌리암스도 남부럽지 않은 선수생활을 하였다
. 그러나 각각 형이나 여동생과 견주어 볼때 왠지 그들이
거둔 성과가 조금 초라해 보인다. 특히 비너스 윌리암스는 나중 테니스 명예의 전당 (Tennis Hall of Fame) 에 모셔질 괄록할만한 훌륭한 업적을 이룬 당대의 몇안가는 최고의
선수였다. 그러나 동생 서리나는 테니스역사상 최고의 여자선수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하늘이 내린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귀재중에 귀재인 것이다.
(왼쪽 동생 페츄릭 멕켄로, 오른쪽 형 쟌 멕켄로)
휘 광정 소산 선조의 생애를
살펴보면 항상 세살위 형님인 휘 상정 대산선조의 그늘에 가려져 본인의 훌륭한 생애와 학자로서의 남긴 뛰어난 업적이 제대로 세상에 드러나지 못하는
느낌이다. 형님되신 대산선생은 진실로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했던 18세기 영남의 최고 학자였었다. 그런 하늘이 내린 형님을 둔 까닭에 소산선생은 늘 뒷전으로 밀리는 느낌이고,
후대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해 드리는 섭섭한 감이
든다. 자꾸 대산, 대산, 대산선생 얘기만 나오고 동생인 소산 선생은 "푸대접" (?) 을 받는 느낌이다.
대산 선생은 바로 아래 동생인
소산선생을 무척이나 아꼈었다. 철부지기 어린 시절 두
형제가 막대기 하나 놓고 서로 장난감으로 삼으려고 다투다 모친께 꾸지람을 들은 후론, 대산 선생은 절대 그 이후론 동생
소산선생과 다투는 일없이 평생을 두고 동생을 아끼고 보살폈었다 한다. 어린나이때 (대산선생 6세, 소산선생 3세) 생모를 여윈 이후로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되어 형은
늘 동생을 보살피고 아꼈고, 동생은 형을 늘 믿고 의지하고 따랐다. 어린시절 외조부 밀암 이재에게 나아가 같이 글을 배웠었다.
대산선생의 벼슬한 기간은 6-7년밖에 미치지 않는 짧은 기간이였지만, 혹 외지에 나가 벼슬을 살을때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 매진한 동생 소산선생을 늘 걱정하며,
“근래에 무슨 서책을 보며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느냐?
주자서는 매일 몇 장 정도 읽느냐? 공부란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된다. 아우는 <이소> 나 <문선> 등의 시를 초록하고 잡서를 보고
있는데, 모두 진실된 공부는 아니다. 모름지기 사서나
<심경> 과 <근사록>
그리고 주자서 등을 구구절절이 음미해서 글의 의미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내가 조금 효력을 보았으므로 지금 이렇게 말을 한다.
이번에 보내는 편지를 자세히 보고 나의 말이 타당하지 않으면 회답을 주기를 바란다.” 라는 등의 서신을 보내며 소산선생의 학문적 성취를 걱정하고 궁금해하며 독려하였다.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하고 맑은 가난을 훈장처럼 달며 불쌍한 백성들 먼저 돌보느라 넉넉치 않은 자신의 재정상황에 동생 소산선생의 어려운 가정형편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대산선생은 늘 마음이 걸렸다.
집에 부리는 하인들이야 있었지만
늘 쪼이는 생활을 하던 것이 안동 소호문중과 소산선생의 보편된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 형님에 그 아우, 소산선생은 흉년이 들면 끼니도 건너뛰며 학문에 열중하고 선비의 절조를 지키려 하였다. 임금도 그런 소산
선생의 청렴한 생활을 전해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한다.
소산 선생은 나중 벼슬을 다 훌훌
내버리고 평생을 후진양성에 힘쓴 형님 대산 선생 곁에 늘 있었으며,
형과 더불어 퇴계학을 계승하여 당대 영남의 학풍을 이끈 주도적 역활을 담당하였다. 항상 대산선생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으려고 자문을 구하고 본인
스스로 또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조명천(趙命天), 이평중 (李平仲), 조성여 (趙聖與) 등과 교유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부친 휘 태화공과 형을 따라 진압군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1784년 (정조 8)에는 영남의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초계문신강의 (抄啓文臣講義)』를 검토-교정하는 데 참여하였기도 하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며 교관을 거쳐 관직이 별제에 이르렀다.
소산선생은 대산선생이 임종을
당했을때도 마지막까지 형님곁에서 임종을 지키며 대산선생과 끝까지 길을 같이 하였다.
소산선생의 아드님 휘 우 면암
선조가 또한 출중한 인물이여서 영남 유생 만여명이 서명을 하여 영조에게 올린 첫번째 “영남만인소” 의 우두머리인 소두가 되었던 분이다. 휘 우 면안선생의 아드님으로 소산선생의 손자되신
휘 병탁 선조님또한 향촌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수행하신 분이였다.
소산종가에서는 2011년 소장 고전적 가운데 고서류 261책,
고문서류 1,448건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한다. 고서는 『소산집』을 비롯한 문집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고 하는데, 휘 병탁 선조가 쓴 『구옹이병탁역상일기(癯翁李秉鐸曆上日記)』는 책력위에 쓴 것으로, 1814~1822년에 작성되어 19세기 초반 안동을 비롯한 영남 사림과 그들의 학풍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라 한다. 고문서 가운데는 간찰
883건, 시문 240건, 제문 91건으로 많은 양을 차지하고 그 밖에 호적 31건, 치부기 28건, 소지류 19건, 교지류 13건, 상소류 7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대산선생의 고고한 높이와 심오한 학문적 경지엔 이르지 못하였다 하여도, 평생 학문수양에 힘쓰며 청렴과 지조로 타의 모범이 되는 생활을 직접 실천하신, 향촌사회에서 주도적인 리러쉽을 발휘하며 자신만의 도도한 학문적 세계를 구축하신 소산선생 -- 그는 분명 명문 소호문중이 배출한 자랑스런 선조들 중 한 분이며 영남 유림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비범한 분임이 틀림없다.
소산종가는 –광정-우-병탁-수현-민직-장규-철구-일복-대원-준 으로 이어져 계승되어 가계도를 이었다.
밑에 올린 내용들은 , <청빈과 지조로 지켜 온 300년 세월, 안동 대산 이상정 종가> 에 실린 소산선조
행장을 스캔하여 올린 것이다.
첫댓글 형님 그늘에서 빛을 못 보셨군요. 大山 아래 小山으로...형제분이 다 훌륭하십니다.
일복 님이 종손이신지 궁금합니다 종손님으로 부터 책을 기증받았는데 ?
아마 종손이 맞을겁니다. 여기 부산카페의 회원들중에 소산선조의 6대손되시는 선공님이라고 계십니다.
@이주원 (周遠) 형님 제가 선공 고조부님 만나면 물어 볼께요 회장님이 얼피 보여 주시기는 석보 의 자 재화 명화 의화 공화인데 의화나 공화 쪽인것 같았는데요
소산쪽은 아닌것 ???? 이러나 저러나 같은 목은 할아버지 혈육이고 또한 소호문중 이니 더할나위 없이 좋습니다
@대원 아 그래? 예전에 본인이 "소산파"라 말씀하셨기에..여하튼 같은 안동일가니 더할나위없이 반갑더구만. 우린 50년전만해도 다 한 동네에서 오손도손 몇백년 같은 전통을 전수해 내려오며 한 조상 모시고 화목하게 살지 않았겠는가. 요즘에야 많이 타지로 빠졌지만..나같이 먼 이국땅에 와서도 살고..
일복 님이 종손이신지 궁금합니다 종손님으로 부터 책을 기증받았는데 ? 안동시내 거주하시는 대원님으로 부터 인것 같습니다 미안 합니다
자세한것은 모르지만 일복-대원으로 내려가니까 종손이 맞겠네요. ^^
형님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준 일가님 말한 종손의 개념이 요즈음은 같은 혈연의 직계에서 내러오면 다 종가라해서 사실 많이 변했습니다
간단한 소호문중 종가 이야기해보면
사실 저희는 문양공 - 판중추공( 현재 서울 수송영당 대종회 원주인) - 해산 - 수은 휘 홍조 안동입향시조입니다
그래서 원래 수은공파는 모두다 서산서원에 목은 할아버지와 수은 할아버지를 배향하는 것을 제일 첫번째로 하고 지내습니다 그래서 종가도 원칙적으로 말하면 기술상 존칭생략 수은 홍조 -효제 - 7형제 중 석관 맏이 -후정 계보 가 현재 수은종가로 안동수은공파 일명 소호리파의 가장큰 종택이자 종가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수은종가와 대산종가만이 "종가" 라 칭할수 있으니 불천위조상을 모셨기 때문. 아우님 말따나 세월에 따라 종가의 개념도 퇴색되고 변하는 지라 타문중들에서도 불천위 조상이 없는데도 왠만하면 다 종가라고 칭함. 나도 요근래에 "소산종가"란 단어를 접했는데 아마도 1985년에 소산선조가 고산서원에 유림에 의해 추가배향되어 후손들이 종가라 부르기 시작하지 않았나 함. 참, 대산선조가 시호를 받을때 시장을 써주신 분이 바로 휘 남규 수당선생이란걸 최근에 알게됨. 아마도 정치적으로 같은 남인계열이어서 일찌기부터 소호문중과 수당가계는 교분이 두터웠고 교유가 빈번하지 않았을까 추정
@이주원 (周遠) 형님 사실 휘 남규 선조님이 안동관하를 하셨기때문입니다 위 시장부분은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온라인 및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습니다
@대원 아 그런가? 미주카페에 시장전문을 며칠전에 올렸는데...
@이주원 (周遠) 다음에 자료보내도록 해 보겠습니다 현재 대산 종가 이방수 어르신이 알면 잘못된 부분 안좋아하실것 같습니다 제사견 이지문 못올림
@이주원 (周遠) 사전적의미로는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3-4년전 수은종가에 종부 휘 장원 대부님 문패에 꼭 나무조각같은 글씨로 4분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무엇인가 보니 수은공파의 종가로 대표되는 분들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월의 흐름속에 그 종가를 떠올려보았습니다 그만큼 수은종가 다음의 큰 맏이 종가였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분리된 느낌도 들지만 수은종가와 한울타리인 대산종가가 불천위되시기전에는 200년동안 수은종가 및 다음 종가(불천위는 못받았지만)의 이름과 같으면 안된다고 몇번을 고치고 한 이야기도 있고 그만큼 시제일에 파에 맞게 움직인것을 생각하면 그 존재는 아주 큽니다
@대원 그렇지. 아무래도 석보할아버지 손주님 휘 현정 약와 선조계보가 현달한 선조들을 많이 배출했으니 당연히 종가의 자격이 있지. 난 어렸을때 들은거라곤 "소산파"란 말만 들었네. 선대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바람에 문중행사엔 일체 등돌리고 족보하고도 담쌓고 몇대 살았으니..
@대원 알았네. 아우님이 자료보낼때까지 기다리고 일단 지금 올려진 대산 할아버지 시장을 카페에서 내리도록 하지.
@이주원 (周遠) 대산 선조님 사후 시호관련 글 예전에 담아두었는데 시대순 올려두었습니다 꼭 읽어보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마음 정리할 중요한 일이 있어 잠을 청해야하는데 잠이 안옵니다
꼭 120년전 까지쯤 거슬러 아마 300년전에도 아마 이렇게 문답하면서 학문을 넓혀간 것이 수은공파가 영남의 유교종중 중 학문이 최고였던 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양교육 일명 유대인 학습법이 아마 수은공파에서 어쩌면 제일 먼저 시도된 사례가 아닐까도 나혼자 재미난 상상의 유추를 해봅니다
@이주원 (周遠) 저희도 부산와서 조부는 여러번 부친 큰형님이 한두번 서산서원 복원 당시 참석하고 2011년 이장전까지 증조부님 산소가 서산서원 옆에 계서서 부산이주 후에도 기차타고 걸어가고 매년갔다왔다 ㅎ 사실 소실적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다가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산을 3개나 4개나 오르락 내리락 할려면 ㅎㅎ
@이주원 (周遠) 제가 형님이 올리신 시장내용은 안읽어보았지만 휘 남규 수당선조님과의 연관성은 낮습니다 안동의 독립운동인물사 책자에 물론 안동권씨 위주의 글이 많지만 그곳에 휘 돈우 선조님의 제자들이 선봉장으로 있는데
거두절미하고 휘 돈욱 휘 돈우 및 소호 문중 관료 대산학파 제자계열 및 호로삼문 및 타성씨 대산학파 계보도의 특출한 인물 등등의 공으로 보아야 맞는것 같습니다
@대원 ㅎㅎㅎ 나는 '99년도에 몸이 불편한 선친을 모시고 일직으로 찾아들어갔는데, 조부모님 산소까지 논두랭이 밭두랭이 언덕을 건너고...선친을 내가 업고 가다가 힘이 딸려 나중엔 힘좋은 택시기사 아저씨가 날 살렸지.^^
@대원 시장내용이 굉장히 길지않겠는가. 나도 이잡듯이 살펴본건 아니고 서두와 끝부분을 읽고 중간 부분은 대강 흝어봤으니 오류가 있었어도 그냥 지나쳤겠지. 내가 읽었을땐 잘못된 내용을 찾지 못했지. 그렇지만 선조님의 중요한 전기내용이니 조그마한 오차도 있으면 안되겠지. 일단 글을 내리고 내가 나중에 자세히 비교하겠네. 아우님의 말을 듣고보니 수당선조하고의 연관성이 내가 생각했던만큼은 높지 않은것 같네. 정치적인 이유로 계속 밀리다가 기적적으로 시호를 받아서 내가 당색쪽으로 넘 연관성을 높게 잡았던것 같군. 그러나 같은 야당으로 또 일가로 그 연관성이 아주 낮다곤 할 수 없을것 같은데..
그래서 효제선조님 이하 7분의 가장 맏이 파가 다음 종가 겸 종택으로 계보가 후대 양자등으로 이어 총 4분 정도가 두번째 큰 종가였습니다
석관-석구-석신-석보-석망-석형-석장중
통상 석보의 정수종가 및 종택
그리고 수은- 휘 효윤선조님 둘째아들으로 내러가는 종가 등입니다
그렇게 종가를 이어오다 대산선조님이 고종말년 정확히는 순종때 조선마지막왕때 시호를 받고 불천위를 받아서 종가가 되어습니다 물론 고산정사는 그이전의 일이지만요 그래서 지금은 불천위로 소호문중은 향사 및 시제일에 서산서원은 목은 수은 배향 고산서원은 대산소산 배향등을 합니다 그래서 통상 수은종가 대산종가라고합니다 수은종가 뒤 대산종가
준일가님이 이야기하시는 대원님은 안동에 여러분 있습니다 통상
석망-지화-소산 휘광정 후사이음 원래는 효제의 맏이 석관 - 자 후정 헌정 상정 광정 달정 식정중 소산 휘 광정은 휘 석망 -휘 지화선조님을 이어셨고 그 파가 일복- 대원-준 입니다 현대의미는 종가인데 100년전만 해도 안동에서는 소산계보는 수은종가쪽으로 보았던것 같습니다 현재는 고산서원 향사때 오시는 것 같은데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도 대원이지만 석보선조님 후손 안동에 저와 손윗누나제외하고 안동에 살았고 47년전에 부산에 왔습니다
안동 수은공파 이름에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더 말씀드리면 35년전 저희 조부님 이야기를 빌리면 그당시 일제시대이고 후손들이 일제의 만행때문에 손이 귀해지고 언제 졸할지 모르는 시기였지요 그래서 그당시까지만 해도 대부분 족보를 보고 항렬자를 쓰다보니 겹치는 분이 많이 나왔습니다 저희집안 파 쪽에서도 저와 같은 동명이인이 몇분 계십니다
여러 유익한 정보 감사~~ 아우님을 통해 문중얘기를 많이 전해 듣고 공부를 함. 근데 "대원"이란 이름은 가장 인기있는 이름중 하나가 아닌가 함. 자주 접하는 후손 이름들중 하나~ ㅎㅎ
@이주원 (周遠) ㅎㅎ 제가 초등학교때는 안좋은 이름이었습니다 돼지 원숭이 등등 놀림도 받고 연애인 대원이 나오면서 화제 그뒤 대발이가 나와서 비슷하다며 ㅎㅎ 성명학 공부 즉 태극 도설 응양 및 오행에서는 양 음 숫자가 안좋다하여 이름을 바꾸어 볼까도 했던 부끄러울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조부님의 깊은 뜻을 알기에 열심히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고있습니다
@대원 ㅎㅎㅎ 난 "이주일"이라고 불렸으니 아우님과 별 다를바는 없었네. 내가 태어났을때 선친께서 대구에 유명한 작명소에 가서 받아온 이름이라함. 주원이라할까, 철원이라할까하다 주원이가 됨. ^^
@이주원 (周遠) ㅎㅎㅎ 이주일 작고하셨지만 유명하시고 대단하셨죠
철원보다는 주원이 났습니다 육십년대 이야기하나 더하면 그당시 이름등재하러가서 담당관이 한자 못찾으면 바로 제일 쉬운것으로 통일하여 바꾼 이야기 자식 한자 받아서 신고가다가 잊어버려서 바뀐이야기 등등
안동분들 다 어디 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