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중국은 조선이 중원대륙에 있음을 사서를 통하여 스스로 인정했다. 20세기에 25사를 새로 작성하면서 명사가 추가되었고 청사도 새로 만들어졌는데, 새로 만든 명사, 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1. 명사 첫머리
한이라고 부르기 전에 이땅은 조선이었다. 그 후 연나라 사람 위만에게 뺏겼다가 한무제가 이를 정복하고 4군을 설치했다. 한말의 부여사람 고씨가 그 땅을 차지하여 고구려라 했다. 평양에 도읍했으니 낙랑의 땅이다. 그 뒤 당나라와 싸워 동쪽으로 밀려갔다. 고구려 후에 왕건이 일어나 신라와 백제땅을 차지하고 송악에 도읍하여 동경이라 부르고 평양을 서경이라 하였다. (주1)
위의 한은 전한을 뜻하며 현역사부도에는 전중원대륙을 통일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한은 대륙의 중서부를 차지했고 북부는 북부여, 동남부는 삼한(마한,진한,변한)이 위치하여 열국시대를 열고 있던 때였다. 그 전한이 있기 전에 중원대륙땅이 조선, 즉 고조선, 대륙단군조선의 것이라고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지금의 대한교과서 역사부도에 있는 한반도와 현만주에 걸쳐있는 고조선의 모습과는 전혀 내용이 다르다. 단군조선은 근세조선의 근본이고 근세조선의 선조국가이며 대대로 단군을 모시는 사당도 중원대륙에 여러군데 있었다.
그리고 한무제는 위만 조선을 정복하고 4군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는 한4군이 한반도가 아니고 중원에 설치했다는 것, 즉 한나라 본토안에 4군을 두어 통치했다는 것이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그 한나라 땅을 고씨, 고주몽이 차지하여 그 땅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나와있다. 한나라의 수도 장안은 고구려가 정복하여 그곳에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세웠고 그 동쪽의 산이름을 고구려산이란 뜻의 려산(여산)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 평양은 원래의 한의 낙랑지역(한의 경기, 중국지역)이라 했다. 그리고 당나라(신라?)에 밀려 동쪽으로 갔다는 것은 신라에게 멸망당하고, 후에 동쪽 하북성쪽에 발해를 세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먼훈날 대륙고려의 왕건이 대륙후삼국을 평정하고 진정한 통일국가를 이룬다. 수도는 대륙신라의 수도 낙양근처 송악에 황도인 개경을 세운 것이다. 추측으로 애매모호한 단군조선사를 현중국의 역사책 명사는 분명한 중원대륙사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청사 첫머리
청나라?는 장백산에서 일어나 몽골을 굴복시켜 변방으로 삼았다. 중원을 치려고 하였으나 중원에서는 조선이 명나라?와 “팔꿈치와 겨드랑사이”로 있어서 청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다. (주1)
청사에 볼때 청은 결코 중원을 정복할 수 가 없었다. 강대한 두나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조선과 명?이 그것이었다. 중원을 치려고 했으나 그곳의 주인은 조선이었고 황제국인 조선을 제후국인 청?이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한반도에 조선으로 표기된 한국사와는 전혀 내용이 어긋난다. 이처럼 대한민국은 조선을 반도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데 반해 현중국은 25사에 있는 명사를 통해서 단군조선을, 대만은 청사를 통해서 근세조선을 각각 중원대륙에 있는 국가로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3. 25사
지금으로부터 7백 여년 전, 문천상은 이미 어디서부터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야할 지 난감해했다. 문천상이 살았을 당시 중국의 정사(正史)는 17사 이것만 해도 적잖은 양이지만, 여하튼 열 일곱 부의 역사에 불과했다. 그뒤 3백년이 흘렀을 때는 17사가 21사, 또 3백년이 흘렀을 때는 21사가 25사. 현재 우리가 보는 중국 정사는 25사인 것이다. 정사 25사에는 천자 치세(天子治世)의 연대기인 본기(本紀)와 저명한 개인의 사적(事績)을 기록한 열전(列傳)을 불가결의 요소로 하여 기전체(紀傳體)에 따른 중국 역대의 역사. 그 밖에 연표(年表)·계보(系譜) 또는 제도를 기록한 지(志, 또는 書) 등을 포함하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필수 조건은 아니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사기(史記)》에서 시작되는데,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고,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고,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이에 더하여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내어 24사로서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인행(印行)하였는데, 합하여 3,243권에 달한다. 민국 초에는 커사오민[柯?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주2) 청사는 후대에 대만에서 만들어진다.
고려 태조 왕건은 사천성에서 왕위를 오른다.
고려왕건 태조가 사천성성도에서 왕위 天子位에 오른다.
그 증거로 사천성 도읍지에 태조왕건능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는 일만리대국으로 통일신라를 계승하여 중원대륙을 통치하였으나 1271ㅡ1368년까지 97년간 원(징기스칸)의 세력에 밀려 25대 충렬황제 때 북평(북경)인 평양에서 심양으로 천도했다.
송사고려전에는 고려 왕건 태조는 개주인開州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개주는 중원대륙中原大陸에 땅이다. 따라서 이 땅은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를 촉막군蜀莫郡이라고 하였고 개성현開城縣이라고도 했다. 이 곳에는고려 태조의 능陵인 표석表石이 영릉永陵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영릉은 태조왕건 능이다.
이 곳은 안휘성 安徽省무위현無爲縣 또는 감숙성甘肅省 고원현固原懸이라고도 한다.
고증-문헌文獻:해동역사 속권제십일고려이 海東繹史 續卷第十一 高麗二
원사고려전 元史高麗傳
대청일통지 大淸一統志
따라서 정인지 수정 고려사에는 왕건은 송악 또는 태악인太岳人아라 했다.
송악은 대륙에 있는 태악이고 이곳은 평양平陽이며 분주汾州이다.
따라서 충주忠州 청주淸州 광주光州는 대륙지명大陸地名이다.
고증-고금지명대사전古今地名大辭典 463頁혈 830頁 286
성도의 왕건묘
대륙당국은 "전촉왕 왕건묘" 현지에서는 토속거주인은 "가우리(고려) 왕건묘" 라 부른다. 청뚜 시내의 영릉로에 있는 전촉왕 왕건묘 영릉임. 10세기 초 혼란기에 성도를 중심으로 전촉(前蜀:903~925)을 세운 왕건의 묘로 永陵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고려태조 왕건의 묘가 분명하다.
적사암으로 만든 묘실은 전실과 중실, 후실로 나뉘고, 전 길이 23.4㎝로 관좌양측에는 12위의 역사상(力士像)이 늘어서 있고, 동. 서. 남의 3방에는 24위의 각종 악기를 연주하는 기생상이 새겨져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동작의 특징을 보면 각각의 그림이 각기 다른 자태와 조형의 미를 보여주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왕건의 묘는 1942년에 발굴되었고 1961년 국무원에 의하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는데 무덤의 길이는 80m정도에 15m높이로 묘실이 남아 있다 . 왕건묘가 대한민국인에게 알려진 이후 왕건묘는 영릉으로 바뀌어 고려왕건의 이미지를 지우고 있다.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영릉로(英陵路)에 있는 왕건릉
정문에 王建陵이 아니고 王建墓라고 표시 되있다고 합니다.
처음발견당시의 왕건묘
후대 영릉으로 변경함
[사천성 성도(청뚜)]
성도는 사천분지의 서부평원으로 “천부지국”사천성의 성도이며 중국의 역사문화도시 중 하나로서 중국 서남부의 중요한 상업무역, 금융, 과학기술의 중심지이며
교통과 통신의 중추지역이다. 성도는 국무원에서 발표한 24개 역사문화도시 중 하나이며 전국 보호문화재 4곳을 보유하고 있다.(두보초당, 무후사,왕건묘, 도강언
수력공정),성급 보호문화재19곳, 시급 보호문화재 94곳이 있다. 성도의 주변지역으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낙산대불, 삼소사, 아미산, 구채구, 황룡사, 와룡산
자연보호구, 검문독도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폄하한 듯이 보이는 지나측 기록에의하면 왕건은 불량한 한량출신으로 전촉군주가 되었고 전촉이 망하고 고려군주가 되었다. 정인지 고려사는 조선때 수없이 개찬
된 왜곡사서지만 여기에는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으로 나온다- 이것이 고려사에 등장하는 보육과 작제건 신화다. (안원전홈페이지 참조)
왕건릉안의 정경
[의의]
1. 동시대에 있던 고려태조 왕건릉, 고려가 한반도에만 있었다면, 거론의 가치도 없건만, 고려가 대륙에 위치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왕건릉,왕건묘는 귀중한 발견이고, 귀중한 유물이다. 2. 사천성 성도(成都)에 왕건의 묘는 1942년 이곳 주민들이 일본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방공호를 파다가 우연히 발견이 되었으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 전국중점 문물보호 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前蜀王인 王建(AD.847-918) >
3. 왕건은 성씨로는 대륙에서 일인이라 한다. 한반도에 왕건이 없으므로 성도의 왕건은 태조왕건이 분명하다. 대륙에서는 한량군주로 폄하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선 대륙고려를 인정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재야역사가중 대륙고려 관련 연구회, 안원전등에서 왕건묘의 왕건을 태조왕건으로 인정하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끝.
조선이 곧 명나라요 명나라가 곧 조선이다.어름으로 연결되어있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대륙에 정착한 조선 선조들의 연 으로 정화제독은 함대를 파견하여 아메리카대륙에 이주민을 상륙시킨다.지금도 미국에서 발견되는 화폐에는 조선의 화폐명이 그대로 발견된다.얼마 전 중국당국은 실제 나무배를 만들어 미국으로 항해하여 미국의 항구에 도착함.01:46
첫댓글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사천성 성도의 "왕건 릉을 영릉"이라고 하지요. 오대사에 "왕건"의 활동내역이 나옵니다. "전촉왕"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대륙사의 기록은 수차례 개찬되면서 대륙의 조선 왕조를 숨기기 위한 것일 뿐, 그 밑바탕을 흐르는 조선왕조의 근본은 없앨 수 없습니다. 이미 현 대륙의 학자들은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할 경우, 더 큰 문제가 발생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입장은 내 놓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현재의 구도인 <대륙은 중국, 반도는 조선, 열도은 일본>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것이지요. 역사란 항상 강자의 것으로 치부됩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 합니다. 대륙=중국 반도=조선 열도=일본 공식을 유지 하고 싶다 그것이 강자의몫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후세에 필히 전해 주어야 할 사명감은 가져야 할 것 입니다. 사천성 성도에 제가 갔을 때 성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까오리 황제 능이라고... 이제 와서 우리 땅이니 돌려 달라고 한들......좌우당간 댓글 감사 드립니다
서량지는 한갑수씨를 만나서 고구려, 백제는 하북지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서량지는 고금지명대사전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염문명 북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율곤 선생님을 만나서 모든 것을 실토 했지요. 녹취록을 율곤학회에서 가지고 있고, 녹취록도 공개 되어 있습니다. 현 중국의 학계에서는 양심있는 인물들은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대륙조선에 대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부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죠.
첫댓글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사천성 성도의 "왕건 릉을 영릉"이라고 하지요. 오대사에 "왕건"의 활동내역이 나옵니다. "전촉왕"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대륙사의 기록은 수차례 개찬되면서 대륙의 조선 왕조를 숨기기 위한 것일 뿐, 그 밑바탕을 흐르는 조선왕조의 근본은 없앨 수 없습니다. 이미 현 대륙의 학자들은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할 경우, 더 큰 문제가 발생되기 때문에 공식적인 입장은 내 놓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현재의 구도인 <대륙은 중국, 반도는 조선, 열도은 일본>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은 것이지요. 역사란 항상 강자의 것으로 치부됩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 합니다.
대륙=중국 반도=조선 열도=일본 공식을 유지 하고 싶다 그것이 강자의몫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알고 후세에 필히 전해 주어야 할 사명감은 가져야 할 것 입니다.
사천성 성도에 제가 갔을 때 성도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까오리 황제 능이라고...
이제 와서 우리 땅이니 돌려 달라고 한들......좌우당간 댓글 감사 드립니다
서량지는 한갑수씨를 만나서 고구려, 백제는 하북지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서량지는 고금지명대사전의 원작자이기도 합니다.
염문명 북경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율곤 선생님을 만나서 모든 것을 실토 했지요.
녹취록을 율곤학회에서 가지고 있고, 녹취록도 공개 되어 있습니다.
현 중국의 학계에서는 양심있는 인물들은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대륙조선에 대한 것을 인정하고 있는지 부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죠.
그 판단은 그들 몫이 아니라 생각 합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새겨 두어야 할것 이라 사료 됩니다.
거짓이던 진실이던 우리가 가려 내어야 할.....댓글 진심으로 감사 하옵니다.
하 저거 제가 원작자인데 제 닉네임은 올리지 않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