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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 칼라파타르 산행기] -1편
기간: 2007년 1월10일-25일(14박15일)
첫째날 인천/카트만두(2007년 1월 10일)
그리운 네팔로
원래 일정은 오전 7시 30분 인천국제공항 C카운터앞에서 여행사 직원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오전 9시로 시간변경을 통보받고 아침시간이 여유로웠다. 그러나 정작 먼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였다. 아내를 동반하지 못한 미안함에 허겁지겁 아내의 인사를 뒤로하고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을씨년스런 한강의 겨울 풍경과 아직 잠에서 덜 깬 대도시의 화장끼 없는 추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일터로 숨가쁘게 달려가는 차량행렬에 88도로는 숨이차 허덕이고 있었다.
일찍부터 서두른 덕분에 30분이나 일찍 공항에 도착하였다. 겨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공항을 초만원이었다. 북경으로 관광여행을 떠난다는 시골 초등학교 학생들, 태국으로 가족휴양여행을 떠난다는 40대의 서울 사람, 꺼다란 골프백을 카트에 싣고 휴대폰으로 친구를 찾는 사람,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이지만, 이 곳에서는 전혀 그걸 느낄 수 없었다.우리나라 돈값어치가 올라가서인지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져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풍류를 좋아하는 민족성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공항을 초만원이었다.
<고조선 풍류선도>에 의하면 상고의 조선에서는 산중턱의 물가에 모여 맨먼저 풍류(風流)가 일어나고 제사와 물건 교환의 신시(神市)가 지나면 중요한 대소사를 일주일쯤 민주적으로 토의하는 화백(和白)이 진행되며, 그 맨 끝에 가서는 다시금 풍류가 크게 일어나 모두들 즐겁게 춤추고 노래하면서 완전한 전원합의에 도달했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일과 놀고 즐기는 풍류를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고 서로 합일하여 사회적 통합과 삶의 활력소로 삼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선조들의 삶의 지혜를 음미해 볼 때인 것 같다.
18번 게이트에서 10시 40분 boarding하고 11시 10분 이륙한 비행기는 한반도의 서해안을 따라서 날아갔다. 작은 산들과 리아스식 해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농촌과 어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도로들, 잘 정리된 경작지, 하늘에서 바라본 우리의 국토는 이제 풍요로워 보였다. 비좁은 땅에서 서로 어깨를 부비며 살아온 우리 민족, 이제 좁은 땅을 박차고, 전 세계로 떠나고 있다.
제주도를 지나서 바다로 나온 비행기는 이륙 후 약 2시간이 지나자 작은 배, 큰 배로 항구를 가득메운 상해항 위를 날고 있었다. 바다의 트래픽 잼, 섬과 상해항을 연결하는 수십km로 보이는 바다위의 교량,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 중국경제 성장의 힘찬 고동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초현대적인 푸동공항의 위용과는 달리 운영방식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트랜짓이 되지 않고, 짐을 찾아서 다시 입국수속과 출국수속을 하여야 하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또 세관검사도 까다로워 중국에 입국할 때에는 여행사에서 가져온 참기름을, 출국할 때에는 오징어를 빼앗겨서 맛있는 요리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공항로비에 철지난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산타할아버지 모자와 인형이 상가에 진열되어 있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크리스마스는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2중적 사고방식, 경제 따로 정치 따로 생각하는 실용정신과 다원주의 사고방식이 놀랍게 느껴진다.
중국시간 오후 3시에 카트만두로 출발하는 Royal Nepal Airline(RA412)에 탑승하였다. 통로 양쪽으로 3줄씩 있는 작은 비행기에 네팔인, 한국인, 일본인들이 많이 탑승하고 있었다. 의외로 중국인들은 많지 않았다. 1년 전에는 홍통공항에서 로얄네팔항공을 이용했는데, 이번에는 상해에서 이용하게 되었다. 1년 전 안나프르나 베이스 캠프(4,150m)를 트래킹할 때 황팀장이 해준 이야기가 기억나 혼자 슬그머니 미소를 띠었다. 그에 의하면 히말라야를 와본 사람은 히말라야에 사는 정령의 유혹을 받아서 반드시 3번 이상을 방문하여야 정령의 유혹에서 벋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래킹을 마친 후 거친 환경, 추위, 고소증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생활의 불편함 등으로 히말라야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다짐했지만 지금 다시 정령의 부름을 거절 못하고, 로얄네팔항공에 타고 있으니 히말라야 정령에 유혹당한 것은 아닐까?
푸동공항 이륙 후 6시간 만에 네팔 현지시간 오후 7시 30분에 땅거미가 지고 불빛이 휘황한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공항에서 비자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니 여행사 현지지사 요원들이 우리 일행들의 목에 가타(행운을 빌어주는 흰천의 목도리)를 걸어주면서 환영해 주었다. 1년 전에 비해서 공항비자 수속도 좀 빨라지고, 기후도 상쾌하여 장거리 비행에서 오는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었다. 카멜거리 인근에 있는 한국식당 비원에서 조금 늦은 저녁을 먹고 힐튼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산의 고등학교 교사이신 이선생님과 룸 메이트가 되어 이 후로 15일 동안 여행친구가 되었다. 젊잖고 핸섬한 50대 중반의 이선생님은 매우 공손하시고 남을 배려는 품성을 가지고 계셔서 여행을 마칠 때 까지 식벗, 말벗, 잠벗이 되어 좋은 추억을 남겨주셨다. 이 선생님 앞으로도 계속 건강하시소.
둘째날. 카트만두/루크라/챠프룽/팍딩
솔로쿰부의 품으로
기상상태에 따라서 에베레스트 등반의 시발점인 루크라행 비행기의 이륙여부가 결정된다고 해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아침 4시 기상하여 5시 30분에 호텔식당에서 준비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어제 도착한 카트만두국제공항 바로 옆에 있는 트리뷰반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새벽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공항 로비를 서성이고 있었다. 항공기 이륙시간이 7시 30분이었으나 활주로에 안개가 자욱하여 무작정 대기하고 있었다. 트리뷰반 공항의 보안검색은 작년에 비해서 신속하고, 예의바르게 진행되었다. 작년의 경우 승객의 소지품에 관심을 보이면서 줄 수 없으냐고 물었던 무뢰한 사람들은 이제 없어졌나보다. 네팔의 국내정세가 다소 호전되고 국가의 질서가 잡혀가는 모양이다. 로얄네팔 항공을 탑승할 때 신문을 보니 네팔의 국왕이 권력을 내놓고, 산중에서 정부군과 교전하던 마오이스트들이 산에서 내려와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든지 국민의 편에서 선정을 펴주기를 기대해 본다. 네팔의 국정이 안정되어야 세계의 자연유산인 히말라야를 잘 보전하고,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를 안전하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 트리뷰반 공항의 17인승 경비행기
10시쯤 되자 어느덧 안개가 거치고 활주로가 보이며 멀리 산과 도시가 보이기 시작한다. 10시 30분 예티항공을 타고 솔로쿰부 히말라야의 관문인 하늘아래 공항 루크라를 향해 이륙하였다. 지구의 등뼈인 히말라야 산맥을 왼쪽 창가로 조망하면서 험하지만 아름다운 네팔 의 내륙지방을 동쪽으로 비행하였다.
험한 산등성이까지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길을 만들어 사람이 왕래하는 자연 속의 삶,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네팔인, 이들의 자연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자 순례하는 마음으로 이 곳을 찾아왔다. 산이 높은 만큼 깊은 계곡에 피어나는 뭉게구름, 구름위에 겹겹이 쌓인 설산들, 신이 창조한 장엄하고 경이로운 교향곡. 척박하고 황량하지만 태고로부터의 장엄함이 있고, 설산에 비추는 따뜻한 햇살이 있어서 신의 넉넉한 품을 연상할 수 있는 풍경을 바라다보면서 항공기의 요란한 소음을 잊을 수 있었다. 비행기가 이륙한 후 10분쯤 지나자 왼쪽으로 설산의 연봉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그 장엄한 파노라마를 연출하였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산맥은 동서 2,400km,남북 200-300km 길이로 네팔, 인도, 티베트, 파키스탄에 걸쳐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죽음의 산’이라고 불리는 K2, 다울라기리, 안나푸르나 등 8,000m가 넘는 봉우리가 늘어선 이곳은 ‘세계의 정상(Top of the World'을 향한 전문 산악인들에게 가히 꿈의 산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설산에 대한 동경과 웅장한 자연에 대한 맛을 보기 위하여 트래커들이 몰려들고, 이들은 여기에서 웅장한 자연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네팔리들의 살아가는 모습에서 물질과 문명의 허상을 깨닫게 될 것이다. 수많은 관계가 얽히고 설킨 속세를 벗어나 이 곳에 오면 편안하고 푸근하게 우리를 감싸주는 자연이 있어서 자꾸만 네팔로의 여행이 그리워하는 것 같다.
루크라 공항에 접근하면서 계곡으로 들어가니 기압 차이 때문에 비행기가 뚝 떨어지면서 요동치고 높은 산들이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해발 2840m에 있는 세계 최단 거리의 활주로를 가진 루크라공항이 보였다.
▲ 세계최단거리의 활주로를 가진 루크라공항
공항 앞의 셀파롯지에서 앞으로 15일 동안 트래킹을 함께 할 포터 10명, 쿠커 5명, 12마리의 좁키오(야크와 버팔로의 교배종)를 몰고갈 몰이꾼 3명과 인사를 나누었다. 작년에 만났던 귀염둥이 청년 데꼬마루와 포옹으로 반가움을 나누었다. 데꼬마루는 네팔예찬이란 책에 표지모델로 나왔는데, 그 책의 저자가 트래킹 여행을 마치고 데꼬마루의 따뜻한 마음에 눈물로 이별을 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네팔청년을 루크라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우리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롯지의 식당에서 네팔 정통음식인 달받따까리(야채와 카레밥을 섞은 음식)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후 좁키오와 포터들이 우리 일행 12명의 카고 백과 한국과 카트만두에 날라 온 식자재 등을 나누어 싣고 오후 1시 30분 첫날 숙박지인 팍딩을 향해 출발하였다.
▲ 데꼬마루와 1년만의 재회를 기념하면서
루크라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앞쪽으로 눈덮인 콩대피크를 바라보면서 상당히 넓은 경작지에 겨울철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을 지나서 마니석으로 장식된 초르텐(돌탑)이 아름다운 챠프룽마을을 지났다. 이런 곳을 지날 때는 오른쪽에 마니석을 두고 시계방향으로 걸어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경스러운 일을 저지른 것이 된다. 또한 마을에는 대개 젯다(깃대에 불경을 적은 오색의 깃발)가 설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면서 여행객을 맞이한다. 이들은 바람에 뱃조각이 한번 흔들릴 대마다 불경을 한번 읽은 셈이 된다고 믿는다. 앞쪽으롬 보이는 콩대피크는 다음날 남체바자르에 갈 때까지 우리가 갈 방향을 안내해 준다. 앞으로 몇일을 더 벗하면서 걸어가야 할 우유빛 두드코시강을 줄다리로 건너서 팍딩의 타시타키 롯지에 오후 5시에 도착하였다. 두드코시의 두드는 젖이나 우유를 뜻하고 코시는 강이나 시내를 뜻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젖내’가 된다. 우리는 루크라에서 팍딩 그리고 내일 가야 할 몬조를 지나 조르살레까지 이 강을 끼고 걸어야 할 것이다. 때때로 이 강을 가로 지르는 흔들거리는 줄사다리를 건너면서 말이다.
▲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 준 콩대피크와 마을의 젯다
6시 30분쯤 저녁을 먹고, 8시쯤에는 밖으로 나가 산 계곡으로 쏟아지는 별을 관찰하였다. 인조의 불빛이 없고, 무공해의 자연 속에서 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다.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친다는 최선생님이 준비하여 온 레이져 빔을 밤하늘에 쏘아 올리면서 설명하는 별자리, 오리온좌, 다이아몬드좌, 카시오피아좌, 가장 밝게 빛나는 별중 하나인 시리우스 등을 희랍신화를 인용하면서 재미있게 설명해 주셨다. 하늘에 떠있는 아름다운 별들을 보고 우리 인간들은 사랑, 질투, 분노 등 우리의 감정을 섞어 의인화하고 있는 상상력이 놀라웠다. 작년에 칼라파타르를 다녀와서 올해는 임자체 피크(6,180m의 설산)를 등반할 목적으로 우리 일행과 합류하신 최선생님은 우리 일행에게 사전에 충분한 정보를 주어 여행을 펺게 해주셨다. 처음 만난 분이지만 쉽게 정이 가는 그런 타입이었다.
롯지의 레스토랑 난로가에 않아서 필리핀산 미구엘 맥주를 마시면서 산 이야기, 인생 이야기 등을 나누면서 길고 긴 히말라야의 첫밤을 보냈다. 고소증을 예방하기 위해서 하루 2리터 이상의 물을 마셔야 한다는 팀장의 지시에 방앞 화장실 여닫는 문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그 덕분에 두드코시강의 물소리를 아련히 들으면서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둘째날. 팍딩/몬주/조르셀레/남체바자르(1월 11일)
두드코시강을 따라서 솔라쿰부의 교역중심지로
오전 8시경 일행은 배낭을 꾸리고, 포터들은 좁티마에 카고백과 먹거리, 그리고 등산장비를 싣고 오늘 저녁의 숙박지 남체 바자르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일행 12명 중 3명은 임자체(일명 아일랜드 픽, 6180m) 등반팀이라 등산에 필요한 많은 장비를 운반하여야 했다. 솔로쿰부 지역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는 지역으로 5000m 이하의 산들은 이름도 없을 정도로 높은 산악지대이다. 따라서 빙하와 우기의 빗물에 씻기어 깊은 계곡을 만들고, 그 계곡에는 만녀설이 녹은 하얀 우유빛 강이 흐르고 있다. 상류로 올라가면서 강폭은 좁아지고 물살은 더 거칠어진다. 마으를 연결하는 길들은 주로 계곡을 따라서 나 있지만 지형에 따라서 계곡으로부터 멀리 떨어지 산허리를 휘감아 돌기도 하고, 상등성이를 넘기도 한다. 이 길을 따라서 사람들이 오가고, 삶에 필요한 물자가 이동한다. 평탄하다가 때로는 가파라지고, 자갈길을 가다가 흙길을 가고, 때로는 너덜지대를 건너기도 한다. 요즈으은 겨울 건기라서 대부분의 길에 흙먼지가 쌓여서 마스크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먼지가 날린다.
팍딩을 출발하면서 부터는 두드코시 강 계곡을 따라서 숲속을 지나기도 하고, 경작지를 지나기도 하였다. 비교적 인가가 많고, 농지가 많은 것으로 보아서 상대적으로 기후가 좋고 농토가 풍요로워 보였다. 두드코시강 위로 놓은 철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이름 없는 작은 마을(마을이라고 부르지만 네댓 가구의 농가들)과 뱅칼(Benkar 2,630)을 지나서 2시간쯤 걷자 몬조(Monjo 2,815m)가 나왔다.
▲ 수목지대를 흐르는 우유빛 두드코시강과 강가의 마을
몬조는 사가르마타(sagarmatha)국립공원의 관문이 있는 마을이다. 마을이 끝나는 언덕 아래 큰 바위 아래 국립공원 사무실이 있고, 자그마한 전시실이 있는데, 그 곳에는 히말라야의 사진과 각종 동식물에 대한 설명서가 붙어 있었다. 이 곳에서 입장권을 사야하고, 출입기록부에 이름과 국적 등을 기재하여야 한다.
몬조 마을은 경작지도 넓은 편이고, 풍광도 좋아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다. 겨울철인데도 밭에는 배추, 보리 등 작물이 한 낮의 따뜻한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몬조에서 한 시간쯤 더 가자 10여개의 롯지가 모여 있는 조르살레(Jorsale 2,740m)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점심을 먹고 바람결은 차겁지만 양지에서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다가, 옆 테이블의 씩씩하게 생긴 영국 아줌마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서 온 서양여자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여러 가지 한국에 대한 호기심을 나타내면서 한국에 꼭 가고 싶다고 하였다. 히말라야 오지에서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서양 아줌마들을 만날 수 있다니, 불과 10년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자. 세계속의 한국위상이 상당히 높아진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식사후 오후 1시경 남체바자르를 향해 출발하였다. 조르살레에서 남체바자르까지 가는데는 3개의 철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세 번째 철다리는 가장 높은 다리로서 어림잡아 100m 정도 되어 보이는 라르자 브리지(Larja Bridge)였다. 하늘 아래 철다리였다. 아스라이 높은 철다리를 건너자 좁치마 한 마리가 쓸어져서 숨을 헐떡이고, 일으켜 세우려는 야크몰이꾼의 채찍과 고함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오지에서 태어나 평생 짊을 싣고 이 길을 오르내렸을 좁티마도 비탈길에다 무거운 짐이 힘에 겨웠던지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한다. 등에 메었던 짐이 나동그라지고, 카고백이 찢어지는 불상사였지만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는 좁티마의 큰 눈망울에 슬픔과 고통이 어리는 듯 했다.
라자르 브릿지부터 남체바자르까지는 매우 가파른 길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가장 힘든 여정중 하나였다. 조르살레가 2,740m인데 3시간 거리의 남체바자르는 3,440m이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고도를 높이면서 급경사지를 700m 정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고소증이 염려되는 지점이다. 최선생이 가지고 온 고도계가 3000m를 가르키자 모두 어린아이들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고소증을 염려하여서 쉴 때마다 물을 억지로 마시고, 한발짝 씩 걸음을 떼는 히말라야 스텝으로 조심스럽게 먼지길을 올라갔다.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서 가깝게 들리던 두드코시 강물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그 대신 구름 위로 콩데 피크가 보이고 오른 쪽 계곡에는 캉테가(Kangtega 6685m)가 가끔씩 그 위용을 자랑하였다. 비탈길을 40분즘 올라가니 능선 위에 쉼터(히말라야 지역에는 30분 정도의 거리마다 쉼터가 있음)가 있고, 그 곳에서 초모랑마(원주민말로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멀리 보이긴 했지만, 로체, 로체살 좌측으로 구름에 덮여 있던 초모랑마가 수줍은 듯 살짝 얼굴을 보여 주었다.
조그만 언덕을 넘어가니 오늘의 숙박지 남체바자르가 문득 눈앞에 다가왔다.
남체 바자르(Namche bazar 3,440m)는 셀파족의 고향이며 솔로 쿰부 히말라야 지역의 교역 중심지이다. 원형극장처럼 생겼다고도 하고 말발굽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는 남체 바자르는 이 지역 최대 도시로서 1주일에 한 번씩 장이 선다고 한다. 장날에는 솔로 쿰부 지역은 물론 멀리 티베트에서 상인들이 온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날이 장날이었으나 오후라서 파장분위기였다. 시장이라고 해서 영구건물이 아니고 약 300평쯤 되어 보이는 노천에서 농산물, 의복, 식료품, 등을 사고파는 한국의 옛날 시골장터의 모습이었다. 물론 장터 앞에는 선술집과 간이식당이 있어서 고달픈 삶에 안식과 위로를 주고 있었다.
▲ 남체 바자르의 노천시장
오후 4시 30분 경 남체 바자르의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 하루의 힘들었던 여정을 마쳤다.
저녁 식사 후 식당의 난로가에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다. 산중에서는 큰 롯지임에도 세면기와 화장실에 있던 물통속의 물이 얼어서 쿠커들이 끓여준 물로 간단히 양치만 한 후 물통을 껴안고 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히말라야의 롯지들은 난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침낭속에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넣은 후 침낭속의 온도를 좀 높인 후 잠자리에 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날. 남체 바자르/상보체/에베레스트 뷰 호텔(1월 12일)
설산의 파노라마에 숨이 멈추다
▲ 콩대산과 남체 바자르
오늘은 남체 바자르에서 고소적응을 위해서 휴식하는 날이다. 그러나 약 2시간 거리에 에베레스트 산군을 가장 잘 조망 수 있는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 가보기로 하였다. 롯지 반대편 말발발굽 급경사지를 조금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고교리 가는 길이고, 오른쪽 등성이로 올라가면 상보체가 나온다. 말발굽 등성이에 오르니 아마다블람의 정상만 살짝 보이고 고도를 계속 높이니 서쪽으로 콩대(Kongde 6186m), 텡캉포체(tengkang poche 6500m), 파니요 살(Paniyo Shar 6549m) 등 룸딩 히말(Lumding Himal)이 우리 일행을 내려다 굽어보고 있었다. 경사지를 다 오르니 넓은 들판에 10개의 농가와 롯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여기가 상보체(Shangboche 3720)였다. 상보체에는 비포장 활주로가 있어서 가끔 비정기적으로 헬리콥터등이 착륙한다고 한다. 응급환자가 발생하거나 긴급물자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데 이용되는 민생형 공항이다.
상보체 활주로를 지나서는 거의 평지로 멀리 북쪽으로 소나무 숲에 쌓인 에베르스트 뷰호텔과 호텔 앞쪽으로 에베레스트 산군을 바라보면서 비교적 여유롭게 걸었다. 에베레스트 뷰호텔은 일본인이 건축한 호텔로서 에베르스트 산군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385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좋은 위치를 선점했구나라는 생각과 이 언덕을 그냥 조망대로만 이용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교차하였다.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 바라본 경치는 천하절경이었다. 동쪽으로는 캉테가(Kangtega 6685m)와 탐세르쿠(Thamerku 6608m), 약간 동북쪽으로는 부처님 모습을 닮아서 네팔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이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 같았다.
전망대의 북쪽으로는 오른쪽부터 바로 앞에 눈이 쌓이지 않은 검은색의 쿰비율라(Khumbi Yul Lha 5761m)가 장스처럼 서있고, 조금 멀리 촐라체(Cholatse 6335), 타보체피크(Taboche Peak 6367m)가 보이고, 그 옆으로 조금 더 멀리 에베레스트(Mt. Everest,Chomolungma, Sagarmatha 8848m), 로체(Lhotse 8414m), 로체 살(Lhotse Shar 8393m)이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위에서 우리를 미소로 맞이한다.
▲ 상보체에서 바라본 콩대 피크
이처럼 장엄하고 경이로운 자연에서 누가 감히 자신을 높이고 자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한없이 작고 겸손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숨 죽이고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목조로 지어진 일본식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에베레스트를 바라보면서 모처럼 원두커피의 진한 향에 피로가 말끔히 가시었다.
돌아오는 길에 쿰부마운틴 뷰포인트 가까이에서 일행중 한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면서 쓰러졌다. 트래킹 경험이 많은 젊은 사람이었지만, 고소란 아무런 예고없이 찾아온다. 먹이를 나꿔채기 위하여 히말라야의 고공을 맴도는 독수리처럼 고소증도 누구나 예고없이 기습하는 가장 무서운 적인 것이다. 평소에 건강하고 등산 많이 한 사람들이 특히 조심하여야 하나는데, 그 들은 자신의 능력만 믿고 너무 속도를 내기 때문이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것처럼 히말라야에서는 한발짝씩 걸음을 옮기는 히말라야 스텝을 밟아야 한다.
▲ 뷰포인트 전방에서 본 히말라야의 파노라마
오후 2시쯤 히말라야 롯지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후 남체 바자르 마을 구경을 나갔다. 남체바자르는 솔라 쿰부지역 교역의 중심지이자 등산의 전진기지로 발전한 마을로서 롯지가 많고 길옆으로 상가가 늘어서 있는 제법 규모를 갖춘 마을이다. 여러 사람에게 인구를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미용실, 병원, 학교가 있다고 하니 1000여명은 되어 보였다. 마산에서 오신 선생님들과 같이 상가를 돌아 다니면서 지도와 야크털로 짠 모자를 샀다. 이 곳은 솔라쿰부 지역의 고봉들을 등반하거나 트래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 기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기 때문에 등반관련 제품도 많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갖장 많은 제품은 인근지역 주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의복, 식품 등의 생활필수품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늘어선 상가들을 한바퀴 돌아보고 오후 5시경 롯지에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넷째날 남체/사나사/풍기텡가/텡보체(1월 13일)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가다.
히말라야롯지 뒤편으로 나 있는 돌로 포장된 잘 정비된 길을 따라서 남체바자르를 내려다 보면서 텡보체로 향하였다. 남체바자르는 교역의 중심지답게 교통의 중심지였다. 남체에서는 p 방향으로 길이 열려있다. 하나는 우리가 올라 온 조르살레를 거쳐서 루트라로 내려가는 남쪽 방향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북서쪽으로 타메(Thame 3820m)를 거쳐서 랑팔라를 넘어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세 번째는 정북쪽의 길로서 주로 화물을 실어나르는 헬리콥터가 뜨고 내리는 비포장 활주로가 있는 어제 다녀 온 상보체를 거쳐서 쿰부의 중심지인 쿰중(Khunjung 3780m)이나 쿤데(Khunde 3840m)로 넘어가는 길이다. 네 번째 길은 북동쪽의 길로서 사나사를 거쳐서 텡보체로 올라가는 가장 평탄한 길이다. 남체마을의 북쪽 언덕을 넘어서자 앞쪽 오른편으로 부처님이 않아있는 모습을 닮아서 네팔사람들이 신성시 한다는 아마다블람을 바라보며서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산길을 따라 30분쯤 지나자 로렉스 시계의 후원으로 건립한 힐러리경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셀파 텐징 노르게이와 그 외의 셀파들을 기념하는 초르텐(돌탑같은 모양으로 건조된 제단)이 우리를 맞았다. 초르텐은 꼭 요령을 엎어 놓은 모양이다. 이 모양은 자연과 존재의 법칙을 상징하고 있다. 맨 아래의 사각은 든든한 지구를 상징하고, 그 위에 성취를 의미하는 계단이 있고, 그 위에 물을 상징하는 원형이 있다. 물 위에는 노력을 상징하는 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공기를 상징하는 초승달이 놓여 있다. 맨 위에는 공간 혹은 영의 세계를 상징하는 꼭지가 달려 있다. 이는 우주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을 의미하는데, 티멧 사람들의 믿음을 형상화 한 것이다. 마침 초르텐에는 티베트에서 왔다는 승려들이 불경으로 기원해 주고 시주를 받고 있었다.
▲ 텐징 노르게이와 셀파들을 기념하는 초르텐
초르텐을 지나서 아득한 산길 앞쪽으로 구름에 가린 에베레스트와 로체연봉들이 우리에게 손짓하고 약간 오른쪽 앞으로 깊은 계곡 위로 신성한 산 아마다블람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끝없이 뻗쳐있는 길을 좋아하게 되었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미국 애리조나의 잘 포장된 길이건, 산허리를 휘돌아 굽이굽이 뻗어간 길이든, 길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고, 사람과 자연을 연결해 주며, 새로운 소식과 사랑을 배달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미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바닷길이건 산길이건 길을 따라가야지 새로운 사람,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소식과 만날 수 있다. 이런 산길은 새로움을 만난다는 기대와 더불어 애잔한 삶의 고통이 전해와 더욱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 우측이 신이 사는 산 아마다블람, 중앙 왼쪽이 에베레스트 우측이 로체연봉
캉주마(Kyangjuma 3550m)에서 아마다블람과 로체연봉, 그리고 그 밑에 있는 텡보체 사원을 바라보면서 차 한 잔 마시고 사나사(Sanasa 3600m)로 출발하였다. 장기간 트래킹 중에는 주로 홍차에 밀크를 넣고 설탕을 많이 넣어 마시는 밀크티를 즐기는데 이것이 피로회복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캉주마에서 사나사까지는 울창한 자작나무와 릴리그라스 숲길이다. 릴리그라스는 네팔의 국화로 어느 곳에서나 자주 볼 수 있는데 나무 줄기에 진홍빛 꽃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이 추운 초봄에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는 아름다운 동백꽃과 유사한 꽃이다. 불행하게도 계절이 지나서 꽃은 떨어지고 누런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릴리그라스 숲길이 추해 보였다. 봄이 되면 비나 눈이 와서 나무의 먼지를 털어내고 생명을 불어넣어 아름다운 꽃망울을 피우리라. 가끔 시야가 트인 개활지가 나올 땐 저 멀리 임자콜라(Imja Khola) 좌측으로 산허리를 휘돌아 북쪽으로 올라가는 고교(Gokyo 4790)로 가는 길이 보이고 정면에는 다보체피크(Taboche Peak 6367m) 아래로 포르체 마을이 아스라이 올려다 보였다.
▲ 다보체 피크와 포르체 마을 계곡아래가 푼키텡가 마을
몇 개의 롯지만 있는 사나사도 길이 네 방향으로 통하는데, 그 하나는 남쪽 길로서 우리가 올라온 남체 바자르로 통하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서쪽으로 쿰중으로 가는 길이다. 세 번째는 정북쪽 길로 몽 세라와(Mong Serawa)를 거쳐서 포르체(Phortse 3810m)로 이어지는 길이며, 네 번째는 푼키텡가(Phunki Tenga 3250m)로 내려갔다가 다시 텡보체로 올라 가는 길이다. 사나사가 3600m인데 푼키텡가는 3250m이므로 울창한 구상나무,잣나무, 소나무 숲길을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급하게 내려오면서 두드코시강물 소리가 점점 크게 그리고 가깝게 들려왔다. 두드코시 강가의 롯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텡보체로 출발하였다. 이제는 반대로 3250m의 푼키텡가에서 3860m의 텡보체(Tengboche)까지는 다양한 형태의 울창한 잣나무 숲길을 약 2시간 가량 올라가야 한다. 초입부터 중간까지는 경사가 급하면서 심하게 꼬부라진 꼬부랑길을 걷고, 그 다음은 제법 완만하고 시야가 터진 그런 길이다.
오후 4시경 오르막길에 기진맥진하여 텡보체에 도착하였다. 텡보체에는 유명한 텡보체사원이 있는데, 임자콜라강 우측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 에베레스트 뷰 호텔에서도 볼 수 있었고, 남체 바자르 이후 시야가 트인 개활지에서는 어데서나 이 사원을 볼 수 있었다. 사나사를 조금 지나면서 두드코시강은 왼쪽계곡을 따라서 포르체 텡가(Phortse Tenga)를 지나 고교쪽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우리가 가야할 텡보체 딩보체를 지나서 임자체(Imjatse 6189m)로 거슬러 올라가는 임자콜라로 그 이름이 바뀐다.
텡보체 사원은 쿰부지역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사원으로서, 왼쪽으로 다보체 피크, 오른쪽으로는 아마다블람, 그리고 뒤쪽으로는 에베레스트와 로체연봉이 병풍처럼 둘러쌓인 천혜의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텡보체에는 이 사원과 몇 개의 롯지가 있으며 사원 앞쪽으로는 넓은 광장이 있다. 이 광장 어디에서나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솔라쿰부 히말라야 지역의 아름다운 설산들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이 곳까지만 오는 트레킹 일정도 있다고 한다.
▲ 쿰부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텡보체 사원
고도가 3860m에 이르니 밤에는 추위가 심하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롯지 식당의 야크똥을 태우는 난로 가에 둘러 않아서 소주 한잔 마시면서 미국에서 온 트래커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코네티컷에서 왔다는 마이클과 한국말 반 영어반 섞어서 한미관계,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 등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미국 군사고문단으로 한국에서 2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어서 한국어와 한국의 군사정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다섯째날 텡보체/데보체/팡보체/소말레/딩보체
4000m를 넘어서 툰드라 지대로
텡보체에서 데보체(Deboche 3820m)로 내려오는 길은 자작나무와 릴리그라스 숲길로 제법넓은 길이었다. 가끔 숲 속의 나뭇가지에 기다란 이끼풀이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마 아열대지압에 널리 퍼져 있는 나무에 기생하는 이끼풀의 일종일 것이다. 여기도 고산지대지만 여름에는 비가 많이 오고 기온도 올라가서 아열대의 식물분포를 보이고 있다. 오른쪽으로 아마다블람, 왼쪽으로 쿰비율라(Khumbi Yul Lha 5761m)에 둘러싸인 디보체는 지대가 낮고 햇볕이 따뜻하며, 자작나무, 잣나무, 릴리그라스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아래 계곡에서 임자콜라강의 거친 물소리가 들려오는 등 휴양마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실제적으로도 이 마을에는 고령의 비구니 스님들이 사는 시설이 있다 .
▲ 텡보체광장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와 로체 연봉,그리고 아마다블람
디보체에서 30분쯤 걸으면 룽따가 펄럭이는 출렁다리를 건너서 임자콜라강 왼쪽으로 산길을 따라서 오르막 경사길을 지나면 시야가 트이면서 앞쪽으로 우람한 아마다블람이 점점 그 모습을 키워가면서 우리를 맞이한다. 팡보체마을 입구에 이르면 마니석을 쌓아놓은 아담한 초르텐이 나온다. 하얀색 초르텐과 아바다블람의 위용과 푸른 겨울 하늘이 조화를 이루어 선경에 온 느낌을 받는다.
▲ 초르텐과 아마다블람
팡보체(Pangboche 3930m)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있는데 윗마을에는 유명한 팡보체 사원이 있고, 아랫마을은 임자콜라 강변에 있다. 양 마을의 표고차이는 약 100m 정도인데, 우리는 아랫마을을 지났다. 팡보체 마을은 경작지가 넓었는데, 주산물은 감자, 채소, 무우, 그리고 버섯 등이나 겨울이라서 황량하였다. 최근에는 트래커들이 몰려와서 롯지가 많이 생기 고 있다고 한다.
팡보체에서 소마레(Syomare 4010m)까지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오르막길이었다. 남쪽으로는 탐세르쿠(Thamserku 6608m)와 캉테카(Kangtega 6685), 오른쪽 바로 앞에 아마다블람,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에베레스트 산군 등 신선들이 사는 선경에 들어오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면서 허둥대다가 머리가 아파오는 초기 고소증상을 느끼다., 사진 촬영하다가도 고소증이 온다는 말이 실감났다. 사진을 찍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서두르기 때문이다. 최선생이 휴대한 고도기가 4000m에 다다랐음을 알리자 우리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4000m 를 넘고 5000m를 지나서 5550m에 도전하여야 하지만 일단은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4000m를 지나자 바로 소마레가 나왔다.
소마레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30분경 딩보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소마레를 지나면서부터는 장엄한 눕체연봉을 보면서 오르는데, 에베레스트는 눕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에베레스트는, 마지막 일정인 칼라파타르에 오르면서 눕체를 빗겨나 그 위용을 보여준다. 소마레에서 거의 평평한 오르막길을 약 30분 정도 더 오르니 임자콜라 기슭의 개활지 오르쇼(Orsho)가 나온다. 이곳은 모두 팡보체 사람들의 여름 야크 방목지와 감자농사를 짓는 밭이 있는 곳이다. 지금은 트래커들을 위한 롯지가 하나 둘 생겨서 조그만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오르쇼에서 약 30분 정도 더 오르면 작은 찻집이 있는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언덕을 넘어 로부체콜라(Lobuche Khola)강을 따라서, 강기슭에 있는 페리체(Pheriche 4270)를 지나 토크라(Thokla 4620)로 오르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임자콜라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우리의 오늘밤 목적지인 딩보체를 지나서 페리체 윗길을 통해 토크라로 가는 길이다. 토크라에서 이 두 길은 만난다.
▲ 비수기라서 문을 닫은 삼거리의 찻집
우리는 오른쪽 길을 따라서 임자콜라 강으로 내려가서 다리를 건너 산비탈을 타고 딩보체로 향하였다. 4000m를 넘어서자 수목한계선을 지나서인지 나무가 보이지 않고 황량한 툰드라지대가 펼쳐진다. 산비탈에서 풀뿌리를 뜯어먹는 야크, 오후가 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차가운 구름이 몰려들어 앞을 가린다. 추위와 고소증에 시달리면서 황량을 개활지를 터덜터덜 걸으면서,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생존하는 이 곳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후 3시 30분경에 임자콜라 강기슭에 넓게 펼쳐진 딩보체(Dingboche 4410m)에 도착하였다. 이곳 롯지에는 우리 l일행만 머믈게 되어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여섯째날. 딩보체/추쿵
고소적응을 위해서 임자체 피크의 관문인 추쿵을 가다.
▲ 임자콜라 강 기숡을 따라서 딩보체로 오르는 황량한 개활지와 구름에 가린 눞체연봉
여섯째날은 고소적응을 위하여 딩보체에서 임자콜라강을 따라서 동북쪽으로 오르는 임자체 피크의 관문인 추쿵(Chhukhung 4730)에 다녀오기로 하였다. 딩보체보다 300m정도 더 높기 때문에 고소적응에 적합한 곳이고, 우리 일행 12명중 3명이 칼라파타르를 다녀온 후 딩보체에서 임자체 피크를 등반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자체 피크와 가장 가까운 추쿵에서 부족한 장비를 미리 임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아침식사 후 임자콜라강 기슭에 경작지를 따라서 넓게 펼쳐진 딩보체 마을을 지나서 북동쪽으로 올라가니 광활한 툰드라지대가 펼쳐졌다. 오래전 눞체연봉과 로체연봉, 그리고 임자체 피크 등에서 생성된 빙하가 중력에 의하여 남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산을 깍아 계곡을 만들면서 이루어진 빙쇄암지대였다. 산이 높은 만큼 개활지의 광대함과 웅장함이 우리를 압도하였다. 갑자가 까마귀 무리가 하늘에 무리지어 날아올랐다. 4500m의l 고도에서 생존하는 까마귀는 무엇을 먹고 사는 것일까?
앞에서 길잡이로 나선 셀파 주미는 휘파람으로 네팔 민요를 부르면서 히말라야 스텝으로 우리를 인도하였다. 하늘을 뒤덮으면서 날아다니는 까마귀떼, 휘파람으로 들려오는 산사람 셀파족의 애잔한 민요소리, 빙하의 찬 공기를 몰아서 남쪽으로 뿜어내는 히말라야의 겨울 바람, 그리고 황량한 툰드라에 내리쬐는 따뜻한 겨울 햇빛,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조화되어 히말라야의 영령이 되어 나의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이처럼 장엄한 경치를 보면서 마산의 모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시는 강선생님에게 감상을 한 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러나 표현할 말이 없으니 그냥 이대로 가슴에 묻어두라고 하신다. 그래 히말라야의 영령을 가슴에 묻어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영령들이 다시 살아나 나를 네팔로 인도하지 않을까 두렵다.
▲ 추쿵으로 올라가는 개활지, 왼쪽이 로체연봉, 오른쪽 낮은 산이 6200m의 임자체 피크
오후 1시경 4730m에 위치한 추쿵의 롯지에 도착하여, 모처럼 라면으로 점심을 먹으면서 기압계를 보니 평지의 절반수준인 563mb 였다. 임자체 팀의 장비예약이 끝나고 딩보체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고 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였다. 추쿵은 임자체 피크 등정의 출발점으로 여기서 한 시간 거리에 베이스캠프가 있고 제1캠프와 제2캠프를 거쳐서 6180m의 정상을 정복한다. 아마 임자체 등정 팀은 임자체를 바라보면서 우리와 다른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식사 후 오후 1시 50분경 딩보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구름에 가려서 방금 전까지 바로 앞에서 위용을 자랑하던 눕체, 로체연봉들이 보이지 않았다. 추쿵으로 올라오는 길에 인천의 이 선생님이 고소증을 호소하면서 딩보체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허름한 농가의 양지바른 곳에 남겨놓고 떠났었다. 이 선생의 사정이 궁금한 박대장님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고, 우리 일행을 주미의 안내를 받으면서 추운 개활지를 힘겹게 내려왔다. 가끔 황량한 개활지에서 먹이를 찾아 헤매는 야크가 측은해 보였다. 내려오면서 자세히 보니 딩보체 마을의 농가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데 이 곳은 고도가 높아서 겨울에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여름에만 올라와 감자, 옥수수 등을 재배한다고 한다.
▲ 겨울철이라 비어있는 딩보체의 농가들
오후 3시 30분경 딩보체의 롯지와 돌아와 보니 이 선생은 무사히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녁을 난로 가에 않아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박대장이 먼저 숙소로 돌아가면서 이 선생을 찾아 걸음을 재촉하였더니 고소증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30세의 박대장님, 히말라야를 여러 번 다녀온 그에게도 고소증이 찾아왔던 것이다.
나는 다행히 아침에 일어날 때 얼굴이 부었지만 식욕도 좋았고, 견딜 만 하였다. 작년에 안나프르나를 다녀온 덕분인지, 오기 전에 열심히 헬스장에서 체력을 단련한 탓이지 모르지만 아직은 건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도 1000m 정도를 더 올라가야 한다니 자신할 수 없었다. 물을 많이 마시고, 조심스럽게 걷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잘 대비하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10불을 주고 카메라 밧데리를 충전하였다. 남체바자르에서는 1불이었는데, 고도가 올라갈 수록 비싸다는 주인의 말에 쓰린 마음으로 거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도 히말라야의 추위와 긴긴밤을 어떻게 보낼지? 집 떠난지 1주일이 되니 집일도 궁금하고, 혼자만 여행 다닌다는 아내의 불평이 귓가에 쟁쟁하다. 아내여 미안하다. 그리고 이 밤 잘 자거라.
....2편으로 이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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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07년 12월 27일 출발 ~ 1월 11일 새벽에 귀국, 16일 일정으로 추진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