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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부터 마산시에서는 불종거리에서 12. 31일 제야의 종 타종행사와 1월1일 아침에는 만날고개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한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순간을 시민들과 함께 하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지자체에서 잘 기획한 것 같다.
마산 불종거리 일원에서 개최된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시민의 건강과 화합, 안녕, 그리고 마산의 발전을 기원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의 희망을 시민과 함께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이라.
불종거리에 있었다는 불종은 구한말에 설치되었으나, 일제말기에 도로 확장으로 인해 철거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불이 나거나 비상시에 불종대에 올라가 종을 쳐서 알리던 곳이었다. 초, 중,고 시절 불종거리까지 5분내 거리에 있는 창동, 오동동, 중성동, 부림동, 상남동, 남성동에는 우리 30회 동문 친구들이 많이 살았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60년 부터 우리는 불종거리에서 불종을 본적이 없었다. 그러다, 마산시에서 향토사가들의 고증을 거쳐 1997년 옛 희다방 앞 인도변에 불종을 설치했었으나 불종의 규모가 작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시민 여론이 있자 1999년에 재복원했다.
재복원한 불종 형상의 높이 1.49m, 폭 0.82m 규모로 마산시 합포구 오동동 코아 제과 앞에서 창동 방면 SS패션간 간선도로변을 가로지르는 아치형 구조물 위에 설치되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불종은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모양을 기본으로 하고 있고 항도 마산을 상징하는 괭이갈매기의 비상하는 모습을 담은 '상대'와 시의 상징 마크가 조각된 '당좌' 및 장미 문양을 조각해 조화로운 시민정신을 나타내는 '하대' 등으로 구분돼 있다. 불종의 중앙 부분에는 마산 시민들의 불굴의 기상을 상징하는 3·15기념탑이 넣어져 민주 정신의 함성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아치형 구조물(높이 7.4M, 폭 13.8M)에는 3·15의거의 '3'과 시의 상징 마크에 들어 있는 3마리의 괭이 갈매기를 연상시키는 3개의 원기둥이 세워져 있다.
불종거리
불종거리는 좁고 짧은 거리지만 오랫동안 마산의 대표성있는 거리였고, 지금은 시세가 약화된 관계로 그 명성이 떨어졌으나, 예전 이 거리에는 각종 금융기관 본 지점, 유명 예식장 (희 예식장, 대광예식장 등), 맛집, 병원 (순안병원< 현 참여성병원>, 유광현 내과 등) 들이 즐비했었다. 상남동 월남다리 부근에서 아구찜집이 많은 일대 까지의 짧은 거리를 일컫는데, 오동동, 창동, 부림시장 등과 연결되는 상권의 중심지였고 월남다리변 까지 연결된 도로였다.
지금의 코아제과 , 국민은행(옛 주택은행) 마산지점 뒷 골목에는 유명한 요정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사회와 경제 환경이 달라지면서 불종거리와 오동동, 창동, 상남동, 부림동 일대 상권은 많이 쇠퇴했고, 오동동 지역엔 새로운 맛집이나, 통술집들이 많이 들어섰으나, 오동동 통술집 역시 시세 약화 및 구도심지 공동화 현상 때문에 서서히 줄어들더니, 신마산 일대에 새로히 통술집들이 다시 터전을 잡았다. 고향을 다시 찾을때 마다 , 불종거리, 오동동 부근 여기 저기 통술집이나 맛집, 그리고 그 옛날 찾던 아구국, 복국, 탱수국집등을 찾으면서 상실감에 물들어 가는 고향의 변천을 피부로 느끼며 씁쓸한 마음이었다.
* 1950년대 부터 불종거리에는 유명한 다방, 화랑이 많았다. 조각가 및 화가로 유명했던 문신씨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으며, 1950년대말 중성동 백랑 다방, 불종거리 외교구락부, 창동 일신다방, 신신다방, 콘티넨털 다방 등지에서 프랑스 유학기금마련을 위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3.15 의거 발생지
* 1960년 3.15 의거때는 불종거리가 연결된 오동동에서부터 민주 자유를 외치는 함성이 최초로 터져나왔다. 그때 우리는 초등학교 입학무렵 아이들이었으니, 왜 그랬었는지는 몰랐지만 , 마산 시가지가 며칠동안 엄청난 군중들의 구호,함성소리, 경찰의 칼빈 실탄 발포소리, 통행금지 야간 사이렌 소리가 이어졌고, 야간엔 정전사태 등으로 불안한 나날이 지속된 것으로 기억난다. 당시 불종거리 오동동엔 자유당 마산시 지부가 있어서 그곳에서 부터 부정선거 다시하자는 구호가 터져 나왔고, 시민과 학생들 데모대가 마산시청으로 가두 진출하였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민초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던 그 불종거리, 오동동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듯 조용히 새 시대를 맞고있다. 변해도 너무 변했다. 한때 전국 7대 도시, 경남 최대 도시였지만, 울산, 창원에 밀려 급격히 시세가 약화되면서 생동감있던 거리와 상권은 서서히 한적한 어느 남녁도시의 소박한 동네로 정착되어가는듯 하다. 하지만, 마창진 3개 시 통합을 통하여 마산 구시가지도 새로운 도약을 기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불종거리 전성시대
* 19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 마산 불종거리는 전성기였다. 시인 정진업, 작곡가 조두남 선생등이 문화적인 복고분위기를 재현하는 행사도 많았고, 부근 화랑에서는 유명 미술인들의 전시회가 줄을 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드나들던 남성동 파출소 부근 정원다방, 희다방, 오동동 송학다방, 백랑다방이 있었고, 불종거리 도로 양 옆 골목 등엔 유명한 맛집과 선술집들이 즐비했다. 그 당시 어느 친구의 말에 따르면, 70년대 마산은 언제나 잔칫집 같았다. 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등의 영향으로 마산 시내 상권은 대단했었다. 그러나 90년대를 지나면서 마산은 인근 창원 신사가지가 들어서면서 부터 서서히 도심지 공동화 현상이 일어났고, 불종거리와 창동은 버림받듯이 황폐화되어갔다. 북적되던 거리는 점점 한산해졌고 서서히 마산은 희미한 기억 속 추억으로 변해가는 듯 했다. 불종거리에 있던 한국은행 마산지점도 창원으로 옮겨가고, 법원, 금융기관의 경남 지부나 대표 지사들이 창원으로 이전했다.
시인 이선관
* 1970년대초 불종거리에 한국은행이 들어서기전 구 교도소가 있던 자리 공터엔 "못난이집" 이라는 선술집이 있었는데, 방학때만 되면 다시 마산으로 내려와 친구들과 어울리던 시절, 백랑 다방등 음악이 좋은 다방들은 젊은이들이 음악에 취하며 어줍잖케 인생을 논하던 자리 였다. 못난이집에서는 가끔 이선관 시인을 만나 인생이야기를 들으며, 젊음을, 마산을 이야기 하던 시절이었다. .
* 이선관 시인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적부터 평생을 뇌성마비 장애의 굴레에 묶여 살았지만, 첫시집 <기형의 노래>(1969)를 비롯해 13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가 문학을 통해 보여준 세계는 사람·지역·나라·자연에 대한 사랑과 실천이었다.
이선관
1942년 마산 출생으로, 1961년 경남대 국문과 3년 수학. 1971년 『씨 의 소리』 10호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마산시 문화상, 마창시민불교문화상, 마창환경연합이 주는 녹색문화상 수상. 시집으로 『기형의 노래』, 『인간선언』, 『독수대』, 『보통시민』, 『나는 시인인가』, 『살과 살이 닿는다는 것은』, 『창동 허새비의 꿈』,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 등.
동성동-창동 골목
마산 구도심지, 특히 창동, 오동동, 동성동, 중성동 일대는 유난히 골목이 많았던 곳이다. 마산시 남성동 파출소 직전 대신증권 등의 금융가에서 창동 ‘차 없는 거리’로 연결되는 통로등 골목에는 유명한 맛집, 주점들이 곳곳에 들어선 곳이었다. 지금도 주점이 많이 남아있다. 대신증권 한국투자증권 대한투자증권 경남은행 제일은행 등 한때 마산 금융가의 중심이 한쪽 편에 있었고, 반대쪽은 창동 중심가였다. 순안병원이 있던 뒷골목 일대에도 맛집과 선술집이 즐비했으나, 이제는 간판만 걸린 통술집이 몇개 남아있다.
고모령 골목
골목의 특징을 나타냈던 명물 중의 하나가 80년대 해거름 맞은편에 있었다는 "고모령"이다. 지역의 예술가들이 때가 되면 모여들었던 사랑방 같았던 ‘"고모령"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그 당시 부터 고향을 떠났기에 고모령에는 가보지는 못했다. 아마 80년부터 장사를 시작했다면 우리 세대는 잘 모른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선관 시인이 그 부근에서 식당을 했었다고 들었다. 이 시인의 집을 인수한 문여사란 분께서 "고모령" 기업했다고 하며, 이선관 형은 나중에 황금당 골목 쪽에서 79년경 "구월 찻집" 을 개업했었다. 고모령은 지역 예술인들의 산실로 알려진 곳이었다. 84년 마산의 문인과 화가들이 글 그림을 그려 만든 엽서를 고모령 벽에 전시한 것이 지금도 매년 연초에 대우백화점에서 열리는 "대동제"의 발단이라고 한다.
음악의 집
1970년대초 당시 마산에는 “음악의 집” 이란 선술집이 있었다. 처음 그곳에 갔던 때가 아마 중앙극장뒤 성호초등학교 뒷골목에 있을 때였다. 문창교회 뒷골목이다. 여름, 겨울 방학때만 되면 내려와 친구들과 그 집에서 자주 술마시며 어슬프게 인생을 토론하던 곳이었다. 예전
주점 " 음악의 집”에서 처음 들었던 곡이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었는데 그 때 그 집 아들래미가 6살 정도의 꼬마 아이였다. 주점 사장님인 아버지가 준 지휘봉을 잡고 베토벤의 운명을 지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집 사장님 연극인 출신의 조남융씨다. 이 사장님 인심 아주 후했고 당시 주머니 얇은 젊은이들이나 예술한다는 사람들에게 많이 퍼준 것으로 기억한다. 옛날 마산에서 원로시인 정진업 선생 등 많은 예술인들,이선관 시인 등도 그 집에 자주 오셨다. 젊은이는 물론 중,장년 마산 술꾼들이 자주 찾았던 낭만이 가득한 집이었다.
올 3월 중순 다시 마산에 갔을 때 밤늦게 친구들에게 떠밀려 간 곳이 바로 그 조남융 사장께서 다시 문을 연 불종거리 옆 골목 작은 선술집 "만초" 였다. 코아제과 건너편 골목안 이다. 친구들과 새벽1시까지 마셨던 것 같은데,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왔다. 라벨의 볼레로 였다. 조 사장님, 이젠 7순 후반으로 접어드시는데, 많이 늙으셨다. 우리도 이제 60을 바라보니 세월 무상이다. 그 선술집 벽엔 조사장께서 직접 찍은 수많은 손님들의 사진과 방문 객들의 글들이 붙어있다. 불종거리 술집들도 이제 활기찬 모습은 아닌것 같다. 하지만, 어쩌랴, 가는 세월을 그 무엇으로 막는단 말인가.
불종거리 맛집
불종거리, 동성동, 오동동, 남성동에는 유명한 맛집들이 많았다. 아구찜집들도 바로 부근에 있다. 예전에는 아구를 잡으면 배를 갈라 속에 든 물고기들을 꺼내고 버렸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아구 먹고 가자미 먹고'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구가 귀한 몸이 되었다. 아구는 수육으로 해도 부드럽게 쫀득쫀득 거리는 게 맛이 좋고, 찜이나 국으로 끓여도 속풀이에 그만이다.
생선국 전문점 '사돈집' : 아구국, 탱수국등 생선국 끓이기만 30여년. 이 집 마산 사람들이 꽤 알아주던 집이다. 주인장은 "아구수육과 아구탕은 아구찜의 매운 맛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즐긴다". "아구수육의 참맛은 아구의 내장에 있다"고 귀띔했다. 아귀의 내장 중에서도 간과 위가 가장 뛰어난 영양가와 맛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아귀의 간은 열량이 일반 고기의 다섯 배쯤 되고, 비타민 A가 많아 대부분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고 한다.
불종거리에서 부둣가로 가는 길목 아구찜 집들이 줄줄이 들어선 오동동 아구찜 골목에서도 아구의 애(간)는 따로 돈을 얹어줘야 겨우 맛 볼 수 있을 정도다. 생선가게에서도 아귀가 좀 크다 싶으면 한결같이 내장이 빠져 있으며, 특히 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아귀가 1kg에 5천원쯤 하면 아귀의 간은 5만원쯤 할 정도로 아주 귀하다.
알싸한 맛의 아구찜과 백김치 |
아구찜 거리
불종거리와 연결된 부근 아구찜 거리는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고 있다.
40~50여년 전만 해도 마산의 아구는 별 볼일 없는 어종이었다. 간혹 된장을 발라서 막걸리 안주로 쓰일 뿐이었다. 된장 발린 아구에 콩나물을 넣고, 고춧가루를 버무려 메뉴로 내놓은 것이 현재 마산 아구찜집에서 나오는 아구찜의 시초가 되었다.
3대에 걸쳐서 영업중인 구강할매아구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구찜집이 비슷한 맛으로 내놓는다. 단골마다 선호하는 맛이 다르겠지만, 고향떠난지 오래되어 그런지 말린 매운 아구찜은 익숙하지 못한 것 같다.
2대때 김수일 할머니가 맛을 책임지는 구강할매아구찜이나 기타 여러곳 (서로 원조라고 우기지만), 모두 마산에 오는 친구나 지인에게는 위 아구국, 아구수육, 탱수국등과 함께 권하고 있다. 아구찜과 함께 나오는 청양 백김치도 먹을만 하다.
아구찜의 맛의 비결은 뭘까 ? 각종 언론매체 인터뷰에 나오는 한결같은 대답이 있다. - "싱싱한 신토불이 진짜배기 재료를 쓰는 것과 요리에 쏟는 정성"이란다"
* 위 이야기는 지역 신문 및 향토역사 자료, 관련 홈페이지
자료와 실제 기억을 근거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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