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毓璜頂公園
小蓬萊라고도 부르는 이 공원은 연태시내에서 중요한 관광지 가운데 하나이다. 육황정공원은 시내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있으며, 해발 72M에 총면적은 89,100평방M, 건축면적은 4,800평방M이다. 원래 이곳은 백성들이 신에게 향을 피워 올렸던 곳이지만 1980년에 공원이 되었다. 공원의 동쪽과 서쪽에 있는 대문은 1982년에 새로 건설했으며, 현판은 산동성 부성장을 지낸 高啓雲이 썼다.
‘毓璜’이라는 두 글자는 원래 玉皇上帝라고 할 때의 ‘玉皇’이었다. 육황정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청의 도광 19년에 이곳에는 劉次垣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그는 항상 이곳에 찾아와 경치를 즐겼는데, 어느 날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아아! 옥황정이라는 이름은 너무도 깔보는 것 같구나! 이 산맥은 탑 꼭대기처럼 솟아 있어서 그 기세가 용처럼 꿈틀거리니 멀리서 바라보면 목마른 준마가 물을 찾는 듯하다가 이곳에서 한 묶음으로 되었구나! 동쪽으로는 군봉이 솟아 있어서 태양을 비단으로 감싸는 듯하고, 서쪽으로는 우거진 숲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도다! 그 가운데 서산이 홀로 우뚝 솟아 세속을 벗어난 듯하다. 이곳이야말로 실로 精華의 氣를 기르는 곳이로구나! 그러므로 이곳은 毓璜이라 부르는 것이 옳겠구나!’”
‘毓’은 기른다는 뜻이고 ‘璜’은 祥瑞러운 옥 또는 옥을 만든 그릇을 가리킨다. 따라서 ‘毓璜’이란 좌우에 산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그 푸른빛이 겹겹이 이어지는 곳에 높이 우뚝 솟은 곳으로 절경이라는 뜻이다. 옥황상제라는 이름을 이 산에 붙이면 이미 이곳의 아름다운 특징을 살리지 못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따라서 毓璜이라는 2자를 붙여서 毓璜頂이라 불렀다.
가. 山門
비교적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가파른 절벽 위에 鐘樓와 鼓樓가 따로 서있다. 氣勢가 비범할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아름다운 구조를 자랑한다. 2개의 누각에는 각각 ‘應霜’과 ‘起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보면 볼수록 의미심장한 題名이다. 옛날에는 묘당을 짓고 산문의 좌우에 각각 종루와 고루를 만들어 두었다. 새벽에는 종을 치고 저녁에는 북을 쳤던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晨鐘暮鼓’라고 부르지만, 이곳에서는 서리를 의미하는 ‘霜’字로 새벽을 나타냈고, 비(雨)가 내리기 전에 울리는 천둥소리로 북소리를 대신했던 것이다.
산문 앞에 있는 2개의 돌기둥에는 각각 ‘尊尙元窮統十萬而依眞宰’, ‘聖稱無極閱萬劫以履淸虛’라는 대련이 있다. 앞의 대련은 천상에 있는 옥황상제의 지위가 상하좌우, 동서남북에서 가장 높으며 최고의 통치자라는 의미이고, 뒤의 대련은 일체의 모든 영예가 그의 신상에 저절로 존재하게 되어, 영원히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린다는 의미이다. 즉 옥황상제는 우주의 天神으로서 영원히 세상을 주재한다는 찬양문이다.
산문의 좌우 양쪽에는 2개의 장군상이 있다. 하나는 秦瓊이고 다른 하나는 蔚遲敬德이다. 그들이 이곳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정설이 있다. 秦瓊과 蔚遲敬德은 唐太宗 李世民의 명장이었다. 어느 날 밤 당태종은 이상하게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 날 대신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두 사람이 그것은 귀신들의 행패이니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불침번을 서자, 과연 그날 밤 당태종은 편안히 잠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부하 장군들을 대단히 사랑했던 그는 매일 밤 그들에게 불침번을 서게 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다음부터는 두 장군들의 화상을 좌우의 대문에 붙여두었다. 그 이후로 진경과 울지경덕은 요괴를 내쫓는 수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동서 양쪽에 있는 행랑채는 淸代에 중수한 것이다. 서쪽에 있는 행랑채는 도사들이 사는 곳이고, 서쪽에 있는 행랑채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곳이다. 과거에는 매년 정월 초9일에 이 산위에서 반드시 廟會를 개최했다. 당시 연태에는 13개의 부락이 있었는데 각 부락의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서 여러 가지 의논을 했다고 한다.
가운데 있는 묘당은 옥황묘의 정전이다. 과거에는 이 정전을 靈霄寶殿이라 불렀다. 그 옆에는 옥황상제의 신상이 서있다.
나. 正殿
산문 앞에 있는 돌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이 있다.
“衛列勾陳樞奠紫垣尊帝座(위열구진추전자원존제좌),
淸符太乙化司元橐統仙靈(청부태을화사탁통선령)”
‘句陳’은 北極星으로 옥황상제의 玉座 아래에서 인간인 6군의 장군들이 侍衛를 하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樞’는 天樞 즉 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이며, 紫垣은 천자의 자리를 가리키는 별로서, 太微垣(上元), 紫微垣(中元), 天市垣(下元) 등의 三垣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천하를 통일한 황제가 중심에 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化司元’은 老子의 말에서 따왔다. 이 대련은 수많은 天將과 天兵들이 옥황상제를 호위하고 있으며, 옥황상제는 천지만물을 통솔한다는 뜻이다. 옥황상재의 신상이 이곳에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는 옛날 光嚴妙樂國의 국왕 淨德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왕위를 대신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普明香嚴山에 들어가 도를 닦은 후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천하의 禍福을 관장하여 하늘에서 가장 숭고한 天神이 되었다. 마치 인간세계에서 황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북송의 황제 徽宗은 그를 玉皇大帝에 봉하고 각지에 조칙을 내려 사당과 조상을 세우게 하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玉皇大帝의 좌우에는 金童玉女가 시립을 하고 있으며, 얼굴이 검은 南極仙翁과 얼굴이 흰 北極仙翁이 보좌를 하고 있다. 담장에 있는 벽화는 唐朝의 천문학자 袁天罡의 연구성과이다. 그는 하늘의 별자리 위치를 근거로 별마다 이름을 붙였다. 그것이 민간에 전해지는 二十八星宿이다. 동쪽 담장에는 二十八星宿가 차례대로 배열되어 있다.
정전에는 3개의 편액이 있다. 동쪽에 있는 ‘至尊無上’은 옥황대제를 의미한다. 가운데 있는 ‘澤備覆壽’는 옥황대제의 은택이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내려진다는 뜻이다. 서쪽에 있는 편액의 앞에 있는 2글자는 ‘시샹(西向)’으로 읽는다. 이 2자는 원래 고대에 살았던 벌레의 이름이다. 이 벌레는 보통 벌레가 아니라 손바닥에 올려놓고 방향을 물으면 머리가 그곳을 가리켰다고 한다. 일종의 나침반 구실을 한 것이다. 따라서 원래의 의미는 벌레가 아니라 옥황대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뒤에 있는 2개의 글자인 ‘潛通’은 아무런 소리가 없어도 통한다는 의미이다. 옥황상제에게 기원을 하면 조용히 원하는 바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매년 정월 초9일은 옥황대제의 생일이므로, 하루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毓璜頂으로 몰려와 향을 피우고 은택이 내려지기를 기원한다.
산문과 옥황전의 처마 밑에는 벽돌을 이용하여 600년전에 만든 ‘國泰民安’, ‘風調雨順’이라는 8개의 커다란 글자가 있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정성스럽게 만든 글자에 배어있다. 玉皇殿 후문에는 “位鎭南天本先天後天以成化, 道隆北極綜無極太極而資生”이라는 대련이 있다. 道는 天時보다 우선한다. 즉 자연물질을 넘어서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계의 발전준칙인 것이다. ‘北極’은 곧 ‘北辰’으로 ‘南天’과 상대적 개념이다. ‘無極’은 고대철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본원을 가리킨다. ‘太極’은 원시적 混沌 상태인 大氣를 가리키는 말로서 우주의 장관은 옥황대제가 가장 먼저 창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늘에서 가장 높은 곳인 북극에 자리를 잡고 있다.
다. 童叟奇觀
옥황전 원내에는 수령이 6백년이나 되는 석류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석류나무와 서쪽에 있는 작은 석류나무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여름에 석류나무에는 불꽃처럼 빨간 꽃이 피지만, 이 늙은 석류나무는 흰 꽃이 피고 열매도 역시 희다. 서쪽에 있는 작은 석류나무에는 빨간 꽃이 피고 열매도 역시 빨갛다. 마치 늙은이와 젊은이가 나란히 서있는 듯한 이 두 그루의 석류나무는 옥황전에서 신기한 구경거리로서 ‘童叟奇觀’이라 부른다. 매년 7, 8월이 되면 석류나무에 꽃이 핀다. 하얗고 빨간 석류꽃이 양쪽에 피어 있는 모습도 신기하지만, 10월이 되어 우거진 가지에 빨갛고 흰 열매가 가득 열린 것을 보는 것은 더욱 신기하다.
마치 교룡이 몸을 뒤틀고 있는 듯한 늙은 석류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1964년 중국공산당의 董必武 부주석이 연태를 방문했을 때 이곳 毓璜頂을 찾아왔다고 한다. 당시에 어떤 사람이 이 늙은 석류나무가 통행에 불편을 준다고 하여 없애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董必武가 그렇게 오래된 나무를 죽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살려두라고 했다. 동필무 덕분에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신기한 석류나무를 지금까지 볼 수가 있다.
라. 小蓬萊閣
청의 光緖 2년에 지었다. 小蓬萊는 小蓬萊閣, 向若亭, 瀛樞門, 小蓬萊石坊 등의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봄에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되면 사람들은 玉皇廟에 찾아와서 향을 피우고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기원을 한다. 福建省 閩縣 사람이었던 淸代의 進士 龔易圖는 집안의 珍藏品이었던 呂洞賓의 茄香木 彫像을 이곳으로 가져와 사당을 지을 때 공양을 올렸다. 사당 앞에 있는 비문에는 龔觀察이 사당을 지은 후에 呂洞賓의 彫像을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를 계기로 呂洞賓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사람들은 이곳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따라서 小蓬萊閣을 呂祖廟라고도 부른다.
기타 7명의 신선은 呂洞賓을 만나러 이곳에 함께 찾아 왔다. 왼쪽에 있는 火龍眞人은 呂洞賓에게 陣法과 무기를 다루는 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쳤으며, 오른쪽에 있는 文房先生은 여동빈에게 거문고, 바둑, 서화를 가르쳤다. 그 가운데 재미있는 것은 여동빈의 徒弟 柳樹精이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원래 버드나무였는데. 여동빈이 강의를 할 때 집중해서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람으로 변했지만 머리에 버드나무 가지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원래 있던 나무로 만든 조상은 1934년에 훼손되었고,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八仙’의 우두머리 여동빈의 彫像은 나중에 중수를 할 때 다시 새긴 것이다. 앞에 있는 迎風板이 ‘八仙圖’는 1980년에 그렸다.
마. 向若亭
청의 동치 5년인 候客廳과 함께 지었다. 向若亭의 ‘向’字는 ‘~쪽으로 마주한다.’는 뜻이고, ‘若’字는 海神의 이름으로 이곳에서는 ‘大海’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向若’은 대해를 마주본다는 뜻이다. 중국의 成語에는 ‘望洋興嘆’이라는 말이 있다. 《庄子 秋水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가을이 되어 물이 불어나니 온갖 하천의 물이 모두 황하로 흘러들었다. 장대한 황하의 흐름을 본 황하의 신인 河伯이 의기양양하여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관할 아래로 오였다고 생각했다. 하백은 황하의 물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는 대해가 있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알고 있었던 세계가 얼마나 작은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북해를 관장하는 北海若을 향해 다음과 같이 탄식을 했다.
‘경박한 자는 1백여 차례 도에 관한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이미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말이 저와 같은 자를 두고 한 말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공자의 박식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백이의 고결함을 비웃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 와서 대해를 바라보니 감히 헤아리지 못할 만큼 위대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저는 大道를 깨달은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뻔했습니다.’”
‘望洋興嘆’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넓은 세상을 보고 탄식한다는 뜻이다. 120년 전에 潘蔚이라는 사람이 정자를 짓고 나서 이곳의 경치에 반해 스스로 겸손해졌다는 의미에서 向若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바. 瀛樞門
문 위에 있는 ‘福地洞天’이라는 4개의 커다란 글씨는 청왕조의 마지막 登萊靑道臺道員이었던 천진인 徐世光이 宣統 3년 신해 6월에 쓴 것이다. 문 밖에는 전서체로 쓴 ‘瀛樞’라는 2글자가 있다. ‘瀛’字는 전설상의 삼신산 가운데 하나이며, 樞는 문의 지도리를 가리킨다. 따라서 瀛樞는 신선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신선이 되고 나오면 다시 사람이 된다니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고 싶을 뿐이다. 이 문은 小蓬萊에서 볼 만한 구경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을 커다란 여의주로 생각하면, 양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은 두 마리의 용과 같기 때문에, 이곳의 경치를 ‘二龍戱珠’라 부른다.
사. 石坊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小蓬萊石坊이 나온다. 정중앙에 걸린 ‘播濤’라는 2개의 글씨는 도가의 신선이 대해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래쪽에 세로로 걸린 ‘神仙飄渺’라는 글씨는 劉次垣의 아들 劉風彪가 천진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와 이곳을 구경할 때 쓴 것이다. 오른쪽에는 ‘吟風’, 왼쪽에는 ‘弄月’이라는 글씨도 있다. 양쪽에 있는 기둥에는 “金碧池臺雲露照灼, 丹靑岩壑風月澂寶”라는 대련이 있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소봉래의 모습이 바위에 그림을 새긴 것과 같고, 독특한 풍경은 바람에 떠다니는 신선과 같다는 뜻이다.
석방 앞쪽의 정중앙에는 登萊靑道員 龔易圖가 쓴 ‘小蓬萊’라는 3개의 글씨가 있다. 맨 꼭대기에는 ‘觀靜’이라는 2개의 글씨가 있는데, ‘觀’은 도교의 사원을, ‘靜’은 그윽하고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곳이 도가에서 수련을 하기에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왼쪽에는 ‘聽濤’, 오른쪽에는 ‘觀海’라는 글씨가 있다. 문설주에 귀를 대면 파도소리가 들리고, 눈을 들면 아득한 바다가 보인다는 뜻이다. 또 “天下文章莫大于是, 一時名士皆從其游”라는 대련도 있다. 小蓬萊에 와서 대해를 바라보며 파도소리와 웅대한 바다를 보면, 아무리 천하의 문장가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려우며,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이곳에 와서 놀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석방의 북쪽에 있는 비석에는 ‘神仙壯色’이라는 4개의 커다란 글씨가 있다. 毓璜頂에서 바라본 小蓬萊의 풍경에 畵龍點睛을 한 듯한 격조 높은 표현이다.
첫댓글 아! 觀海聽濤 많이 듣던 말씀인데...조만간에 연대에 가서 묵계님이 소개해 주신 곳을 두루 둘러 보겠읍니다. 쎄세!!
선생님오랜만이지요? 요빈이는잘크구요?단아사모님건강은?...이래저래 서울이그립습니다 이행복함와중에...연태...육황정공원 봄에 아이들데리고가족과함께 갈까합니다.저 비서하나두었는데 20살짜리 그아이 시켜서 선생님글 다외워 서울손님들오면 가이드하라고했어요알바이트로...언제라도오세요 선생님 보고싶습니다.
이렇게 유서깊은 연대인데,.,산업화로 많은 사람들이 잊고지내지요.요빈이 수술을 받았다고 하던데,,,
요것도 지식 두뇌세포 한쪽에 입력하고.... 묵계님 전번 짧은번개만남이 아쉬웠지요? 언제나 퍼질고 않자서 이야기 든지요?
♡,·´″```°³о † 감사합니다 † о³°```″´·,♡ 스크랩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