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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타자
2022년 3월 6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25-28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5: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5:27)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5: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사도의 편지는 일반적인 위로의 편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창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비로소 복음으로 드러난 그 내용이 담겨 있는 편지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 결정된 개인들의 운명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거룩한 입맞춤’이란 단순히 인간적인 친밀감을 가진 단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인간들의 단체를 해체시키고 새로운 단체로 구성시킬 친밀성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들은 못해내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내시는 ’요소입니다.
인간들의 우애나 정으로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 혹은 ‘너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거짓됨을 스스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를 들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양치기 소년은 어디까지나 자기 위주입니다. 산 위에서 양치면서 심심하니 자기를 즐겁게 할 장난을 치고 싶었습니다.
그는 오지도 않는 늑대가 온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신 밑의 마음 주님들은 소년을 돕기 위해 쇠스랑이나 농기구를 들고 황급히 산 위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늑대는 없었습니다. 소년과 마을 사람과의 친밀성이 깨어진 겁니다. 예수님 곁에서도 이와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의 친밀성을 극대화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사적인 복수를 감행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는데 있어 그동안 예수님과의 친밀성을 개입시킨 겁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마 26:48-49)
인간들이 본인의 선택해서 친구를 삼게 되면 자신을 해꽂이하거나 자신에게 손실을 끼칠 친구를 선택하지 않을 겁니다. 행여 자신에게 손실을 입힐 것같으면 언제든지 헤어지면 그만일 겁니다. 이처럼 양치기 소년은 자기를 향해 마을사람들의 친밀성을 이용해서 자신의 권태로운 일상을 재미를 더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양치기 소년을 황급히 산 밑의 마을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마을사람의 입장에서, 늑대가 오고 아니오고가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미 양치기 소년 자체가 ‘거짓된 존재’입니다. 인간은 본인들이 선택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만나게 되므로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그 일로 인하여 원래부터 자신이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에 직면해야만 합니다.
악마는 거짓된 영입니다.(왕상 22:22) 그리고 인간 세계는 이 거짓된 영의 영향력이나 지배력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산불을 내므로서 그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산불의 피해를 입은 것처럼, 아담 한 사람이 범죄하므로서 모든 자에게 죄와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롬 5:12)
따라서 종교의 힘으로 자신을 개선할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 좋은 존재, 훌륭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라는 인간은 ‘다른 존재’입니다. 즉 자신의 행한 모든 것들을 주저없이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은 완전한 다른 사실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보면 이러합니다.
창세 전부터 몰래 세상 안으로 들어온 ‘하나님의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아니면, 출생해서 어태껏 보아놓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려는 사람인지가 구분되어져야 합니다. 성도라면, 곧 과연‘다른 존재’가 되었다면, 어떻게 하든지 말씀이 자신과 자신의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이길 수 있는가를 생각할 겁니다.
이는 곧 “어떻게 하면 내가 말씀에게 패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이러한 일은 낯선 타자가 자기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낯선 타자는 ‘불가운데의 구원’을 말하는 분이며(유 1:23), 마지막 때에 심판의 불이 전면적으로 일어나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짓는다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만이 사도의 편지를 향기나는 편지로 여겨서 배척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다른 점은 안식일의 완성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점입니다.(겔 20:16-24) 안식일이란 일체 노동을 쉬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노동 덕으로 인생이 이어지는 것이 아님을 하나님쪽에서 통보해주시는 겁니다.
성도의 일생은 자신의 궤적이 아니라 주님의 궤적입니다. 이를 위하여 인생이란 형태가 바낀 고통에 불과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인생이란 똥 밟은 겁니다. 쓰레기가 더욱더 쓰레기임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신의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메뚜기를 통해 무자비한 심판을 이 세상에 행사하십니다.(욜 1:4)
쓰레기의 특징은 우주의 중심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웃고 있지만 전체로 보면 비극입니다. 여기에 낯선 타자는 사랑으로 찾아오십니다. 사랑의 원칙은 이러합니다. “너는 내가 될 수 없지만 나는 네가 될 수 있다”입니다. 낯선 타자, 곧 우리가 초청하거나 선택하지 않으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한 저주안의 죽음을 대신 처리하신 죽은 자로 찾아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미 이렇게 일방적으로 사랑이 성취되었기에, 성도의 성도는 그 낯선 타자만 홀로 앞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홀로 두지 않습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은 말을 많이 한다고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먹는 겁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으라” 이는 곧 ‘거짓을 고수하는 너 때문에 죽은 그 죽음’이 거짓된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바입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 2:3/4:11,
16/7:9)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확정된 창세 전의 비밀만 이야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3-06 18:55 28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25-28절(낯선 타자)2203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25-2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5-28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우리”라고 하는 사이에서 정말 우리 사이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이라 하는 것은 여기 “거룩하게 입맞춤으로”라는 26절의 말씀이 나옵니다. 옛날 그 시대에서는 아주 친근한, 친밀한 사이에서는 남녀구분하고 입맞춤으로서 서로를 용납했던 그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입맞춤이란 사회적 신분의 같음을 상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요즘 같으면 악수를 하는데요. 악수라 하는 것은 ‘내 손에 당신을 공격할 무기가 일체 없습니다.’ 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 악수입니다. ‘나는 당신을 칠 의사가 없습니다.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이 친밀함,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 아는 사이라는 말이지요.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우리’ 사이에서는 뭐가 빠져야 되느냐 하면, 거짓이라는 것이 빠져야 되겠지요. 실제로 마태복음 26장 48, 49절에 보게 되면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을 때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신호를 보내면)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예수님의 최측근, 열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할 때에 그 체포하는 자에게 보내는 신호가 입맞춤이었습니다. 이 뜻은, ‘그 예수라는 자는 나에 대해서 어떤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정도로 서로 친한 사이다. 허물없는 사이다.’ 그런 뜻입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이때를 통해서 그 당시 경찰들은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이 구약 시편에 보게 되면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누가 나를 넘어뜨리고 체포하느냐? 누가 나를 넘어뜨리느냐? 누가 나를 세상에 넘기느냐? 가장 가까운 친구로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나를 책망한 자가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찐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가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찐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시 55:12-14).”
그래서 이 친구라는 것이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는 적이 친구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들 사이에서는 어떤 거짓이라는 것이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양치기 소년>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요. 양만 쳐다보고 있다 보니 심심해가지고 산 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골탕 먹이는 그런 재미를 즐기기 위해서 늑대도 없는데 늑대 왔다고 소리쳤어요.
마을 사람들은 도와주기를 원해서 왔는데 보니까 거짓말이에요. 늑대도 안 왔는데 늑대가 왔다 하니까 마을 사람들이 곡괭이 들고 쇠스랑 들고 몰려오니까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던 모양입니다. 그걸 통해서 마을 사람들은 그 양치는 소년과 자기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위태할 때 어려울 때 도와주는 것으로서 표시를 다 했어요.
그런데 두 번씩이나 속였습니다. 자, 여기서 이 세상에 거짓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거짓되지 않고 도와주겠습니다. 우리는 친한 사이입니다.’라는 관계를 통해서 거짓이 우리 안까지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그런 자료가 상당히 부족하게 되지요.
양치는 소년에게 세 번째에 진짜로 늑대가 왔어요. 그런데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왔다고 다급해서 고함을 지르니까 마을 사람들은 안 도와줬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거짓이냐 진실이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이웃이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아무리 나한테 늑대가 오더라도 내 이웃한테 늑대가 안 오면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전에 그 양치는 소년이 두 번씩이나 거짓과 진실에 대해서 왜곡된 것을, 잘못된 판단을 산밑에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이미 일러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뭐 늑대가 그 소년의 양을 다 잡아먹었겠지요. 그러면 그 소년은 뭐냐 하면, 거짓의 희생자가 된 겁니다.
이 비슷한 일이 요근래 벌어졌어요. 마을 사람들끼리 친한데 서로 악수하는 사이고, 옛날 시대로 말하면 ‘서로 입맞춤할 수 있는 우리 사이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나는 당신을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뭐든지 솔직하게 주고받는 사이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마을로 평화롭게 사는데 어떤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 마을 사람들이 보기에 그 사람은 거짓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 사람을 왕따시켰습니다. 그래서 화가 난 그 사람이 토치라 해서 불붙이는 것 있어요, 토치를 가지고 불을 붙였어요. 나이는 한 60쯤 되었는데 불을 붙이니까 동해시에 산불이 나 버렸어요. 이유는 날 무시했다는 거예요.
한 사람이 산불 냄으로써 모든 사람이 산불의 영향력에 있는 것처럼 로마서 5장에 한 사람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어요.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아먹음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자신의 꿈과 희망은 다 사라지고 도망치기 바빴습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은 이겁니다. 인간은 자기 홀로 있을 때 그것이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거예요. 진실이라고. 자기 혼자 있을 때 양치는 소년은 자기가 심심한 게 진실이에요. 그리고 그 심심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재미난 일이 있으면 좋겠다, 그게 본인한테는 진실이에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한테는 그게 거짓이란 결과로 주어졌지요.
인간이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는 그게 거짓입니다.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낯선 타자, 낯선 타인을 우리에게 붙입니다. 낯선 타인을. 그래서 발생된 게 뭐냐? 입맞춤이에요. 인간 대 인간들이 서로 아는 사이라 하는 것은, 양치는 소년이나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 이게 진실할 수 없다는 것이 다 폭로되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인간 대 인간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3년 동안 따랐지만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느냐, 자기 이익을 우선시할 때 이미 그것은 거짓이에요. 그래서 내가 사람 믿다가 인생 조졌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보증 잘못 서 가지고 내 인생 망쳤다, 하는 게.
그런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친구 도와준다고 은행 보증 섰다가 재산 다 날렸다, 한 푼도 못 받았다,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인간은 그렇고 그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과의 인간적인 입맞춤 또는 악수, 그걸 통해서 기껏해야 ‘나는 잘못 없는데 저쪽에서 잘못했다.’ 이런 소리 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제대로 우리 자신을 알려면 그런 인간적인, 양치기 소년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들만 타인으로 만날 게 아니라 낯선 타인, 우리가 생각도 못 한, 나 같은 타인이 아니라 전혀 나 같지 않은 다른 타인을 만나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내가 여기 사는 것 자체가 내가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혀 다른 타인이에요.
그 낯선 타인은 지금껏 내가 했던 모든 행위를 다 지워버리고 다 털어버려도 괜찮아요. 그 낯선 타인이 내가 해낼 수 없는 것만 해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이 거짓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그분이 다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진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완전히 다른 사실. 세상에서 들은 것 말고 완전히 다른 사실, 그게 바로 인간세계와의 불연속성입니다.
그게 뭐냐? 완전히 다른 사실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주님의 비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주님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사람과 자기 비밀을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비밀을 움키고 있는 사람, 딱 두 종류밖에 없어요.
에베소서 3장 9-1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이게 비밀의 경륜이에요. 영원 전부터 이 땅 모든 창조 전부터 하나님이 생각해놓은 그것이 주님이 담고 있던 비밀이고 그 비밀이 낯선 타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에게 집어넣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인간들 자기가 만든, 자기가 움키고 있는 비밀이라는 것은 출생하고 난 뒤에 자기가 지금껏 모아놓은 자기의 자존감을 자기의 귀한 비밀로 간직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뭔가 누구와, 어떤 타인과 대화를 해 보면, 성도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걸어보면 주님의 비밀이 나와야 될텐데 끝까지 자기 비밀 지키는 것에 급급한 모습을 보이게 돼요. 도대체 속으로, 속으로입니다, ‘도대체 당신은 뭘 지키려고 움츠리고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아직도 지킬 게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가룟유다하고 비슷하게 주님을, 일반적인 사람들의 타인처럼 주님도 그렇고 그런 인간들, 타인으로 생각하고 만 거예요. 주님 오게 되면 ‘주님, 뭘 도와주렵니까? 제가 기도할 테니까 어떻게 응답하시렵니까?’ 이렇게 남을 이용해서 자기 이득을 취하는 것처럼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산밑의 마을 주민들 불러모아서 자기에게 덮친 늑대를 쫓아내는 용도로 쓰기 위해 양치기가 거짓말 하는 것처럼 ‘주님 저에게 무슨 도움을 주렵니까? 내가 태어나서 간직하고 있는 이 자존감 회복을 위해서 주님은 나에게 어떤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일반적인 타인으로 간주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나는 뭐 40년 교회 다녔다, 뭐 50년 교회 다녔다, 뭐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다 했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도바울의 편지는요, 일반적인, 그냥 우리 좋게좋게 하는 편지 내용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편지의 효과가 고린도후서 2장 15, 16절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편지를 줬는데 편지를 보는 어떤 사람은 편지를 찢어버려요. 악취가 나서 못 읽겠다는 겁니다. 내 자존감을 상하게 하는 내용이라고 하면서 아주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그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서 ‘아, 세상에 내가 평생 살아가면서 맡아온 모든 악취마저 깔끔하게 다 씻어내리는 향기다, 향수다.’ 이렇게 편지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거기에 대해서 설교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거기에 대한 서로 차이 나는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편지에 대해서 악취로 느끼는 사람은 망하는 자고 내 편지에 대해서 그걸 향수 맡듯이 맡는 사람은 이것은 영생을 얻는 자다.” 이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해버립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한다, 그러한 상식적인 종교적 차원에서 하나님은 살리기 위해서 왔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일반적으로 타인을 나한테 용납을 할 때, 악수를 청할 때 그것은 내가 선택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거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그 사람에게 악수를 청한다는 말은 자기한테 손상을, 손실을 안 입힐 것이라는 생각이 이미 내 선택과 내 결정에 게재된 상태에서 그 사람을 나에게 용납하는 거예요. 뒤에 사기를 당하든 말든 간에 일단은.
그러나 그 결정과 타인을 용납하는 그 선택에 인간들은, 자기에게는, 나는 나에게 오류가 없다고 생각하고 하자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는데 있어서는 예수님은 우리가 거짓된 존재라는 사실을 들추어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것은 성령이 오지 아니하면 누구도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악취 나는, 이것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누구나 이걸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제가 지난 낯 설교에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나오는 꿈 이야기에서 자식이 꿈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아버지여, 내가 지금 불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하고 자식이 막 화를 내는 그런 장면의 꿈 이야기를 제가 해 드렸지요. 유다서 1장 23절에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구출하라. 이 구출하기 이전의 상태를 뭘로 보느냐? 불 속이라 보는 거예요. 불, 지옥 불이라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교회 안 나오면 꿈에라도 “아버지여, 내가 지옥 불에 타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그런 꿈 같은 것들이 아버지한테 나타나야 되지요. “아버지, 지는 천당 가고 나는 지옥 불에 있어도 좋다는 이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물론 복음 아는 아버지가 자식보고 복음 이야기 안 할 리가 없거든요. 교회 나가자, 안 할 리가 없겠지요. 그러나 아들이 “지옥, 그런 것 없어요.” 하고 아버지 오히려 가르치려고 하고 “요즘 세상에 지옥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농담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건 왜 그러냐 하면, 그 자식이 세상에 나가면서, 학교에 다니면서 본인이 원하는 타인을 본인이 선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안 망가뜨리는 타인을 원한 거예요. 그런 친구를 원한 거예요. 지가 원하는 자와 악수했고 지가 원하는 자와 입맞춤한 거예요.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걸 친구로 만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불 속에서 건져내라, 지옥 불 속에서 건져내라,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양치기 소년 같은 인간으로서는 받아들이기 곤란한 거예요.
만약에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 하니까 마을 사람이 “너는 늑대한테 물려 죽어!” 이렇게 하면 그 양치기 소년이 마을 사람을 또다시 부르겠습니까? “너는 그 산 위에서 늑대한테 물려 죽어라. 양 다 물려 죽고 너도 물려 죽어라.” 이렇게 하면 부르겠어요? 안 부르겠지요.
바로 예수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너는 늑대한테 물려 뜯겨 죽어도 마땅함, 그런 존재라는 그 내용이 이 복음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기 자존감에 필요한 것들만 주워 모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창세 전에 어떤 일이 있다 하는 것은 인간들은 아주 그것을 무시하고 있어요.
마태복음 3장 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게 바로 울진 동해 산불이잖아요. 바람불어서 다 태워버린 거예요. 다 태워버려요. 태울 때 그 집에 있던 노인들 자기의 추억도 과거도 다 태워지는 겁니다. 그게 마땅한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는 지구 자체가 불에 태워져요. 우리는 그걸 마땅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강력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요. 왜? 살아오면서 나만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날 건드리면 나는 하나님이라도 거부하겠다는 방식이거든요. 아까 한 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불을 냄으로써 동해시 자체가 불바다 된 것처럼 아담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저주받게 되었다. 이게 바로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야, 이게 향수야. 이게 향기야. 나는 인생 그동안 몰랐어. 나 기쁘게 받아들이겠어.’ 이런 사람은 생명에 이르고 ‘이거 뭐 인간을 모독해도 이렇게 모독할 수가 있는가.’ 하고 ‘두 번 다시 교회 가면 내가 인간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 보면 나는 개다’ 이런 식으로 강력하게 거부하는 반응, 그것이 낯선 타자, 낯선 타인 주님 보시기에 가룟유다 같은, 너는 인간만을 친구로 상대하는, 거짓된 타인만 좋아하는 그게 바로 네 인생이라는 겁니다.
열왕기상 22장 22절에 보면 악마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짓말하는 영’이라고 되어 있어요. 악마는 거짓말하는 영입니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꾀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이 악마라는 존재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는데 언제 악마라는 존재가 나타나느냐 하면, 진짜 진리 되시고 길이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타날 때 그 때문에 극렬하게 그 예수님의 계획, 창세 전부터 예정된 비밀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발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일어난다면 그동안 우리는 마귀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이 편지에서 그냥 입맞춤이 아니에요. 거룩한 입맞춤이에요. 거룩한 분 안에서 같이 거룩한 분을 공유하는 것, 그 이야기를 하거든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말씀이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와 이 국가를 이길 수 있느냐? 말씀이, 내가 말씀을 이기는 게 아니고 어떻게 하면 말씀이 나를 이길 수 있느냐?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하면 내가 말씀에 대해서 패배할 수 있느냐? 여기에 대해서, 그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말씀에 대해서 패배하는 즐거움, 말씀에 대해서 나는 지고 말씀이 내 안에 살아나는 그 승리의 감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거룩한 입맞춤 사이라는 겁니다. 제발 네가 이 말씀 앞에 꼭 좀 지라는 겁니다. 계속 져버리라는 겁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형태가 바뀐 고통에 불과해요. 아무리 바꿔도, 어디 가도 고통이에요. 인생 똥 밟은 겁니다. 백날 살아도, 백 년을 살아도 똥 밟은 거예요. 아무 낙 없습니다. 사람은 교회 나와서 인간 자기 하나 개발하고 개선해 보려고 하는데 성경은……, 교회는 “당신은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고요, 성경은 복음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다른 인간이 되어야 돼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겁니다. 기존의 인간을 밟아버려야 돼요. 기존에 내가 생각한 인간을 밟아버려야 돼요.
그렇다면 다른 인간이 된다는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이익이 되는 그 사람만 나의 친구로서 입맞춤하고 악수하는 것,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기피하고 그냥 막 당신은 나의 가정을 파토 낼 자요, 이렇게 하면서 마구 밀어내고 싶은 그 대상,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나를 공격하는 것은 적으로 간주하는 우리의 거짓된 본성,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말씀과 말씀으로 밀어붙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38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 대해서 무차별 공격하는 겁니다. ‘네 가정이냐, 말씀이냐? 네가 태어나서 가정을 이루었던 그 아름다운 추억이냐, 그게 너의 맘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이것은 어떤 경우라도 지키고 싶은 나의 자존감이냐, 아니면 창세 전부터 흘러 내려온, 창세 전부터 계속해서 이 우주를 통해서 제공된 하나님의 주님의 비밀이었느냐? 둘 중 어느 쪽이냐? 어느 쪽을 너는 이야기하고 싶으냐?’
구약 요엘 보게 되면, 전에 수요일에 설교를 했습니다만, 요엘 1장 4절에 보면 거기에 메뚜기가 나옵니다.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황충이나 메뚜기나 늣이나 다 같은 말인데요, 이것은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싹쓸이해서 없애버리는 그러한 실제적인 일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정의실현이라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폭격기가 메뚜기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신의 폭력이지요. 하나님의 폭력이에요. 이게 바로 말씀입니다. 전부 다, 민간인이고 군대고 필요 없이 그냥 다 폭격해버려요. 이것은 제네바협정에서 쓰지 말아야 할 무기입니다, 그런 것 없어요. 그냥 싸그리 다 싹쓸이해버립니다. 그게 하나님이 생각하는 정의로움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 말씀 앞에, 하나님의 정의 앞에 우리가 패배하면 됩니다. 지면 돼요. 이기지 말고.
인생이라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생각하면 희극이지만 전체로 보면 비극이에요. 인간은 시건덩어리가 없어 가지고 자기 코앞에 있는 것만 보면서 헤헤 웃고 있어요. 그러나 전체를 보세요. 성경에 나오는 전체를 보세요. 인간은 누가 뭐래도 이건 비극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 정의를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이익과 손실을 계산해서 이게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만 따질 때 주님께서는 그걸 가지고 쓰레기로 보지요. 쓰레기의 특징은 아무 중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 우주의 중심을 모른다는 것,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이게 쓰레기의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내가 60 겨우 되었는데 치매 걸렸어요.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아내를 간호합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내 아내는 지금껏 살면서 너무 천사와 같아서 결혼해서 30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욕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욕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치매 걸린 순간부터 그다음부터는 욕 같은 욕들이 막 나오는데 도대체 어디에 눌려 있다가 나오는 욕인지 상상도 못 하는 거예요.
충동이 욕으로 나올 때 그게 치매입니다. 이성적 체제가 무너지니까 안에 감춰있던 충동이 나오는 거예요. 그 욕이 나온다는 말은 극단적으로 나를 지키고 싶다는 겁니다. 욕이 언어로 되어 있으니까. 무조건 나를 지키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그 천사 같은 아내가 결혼하기 전부터, 그리고 결혼해서부터 나부터 챙김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생이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가 남한테 지지 않으려고 하기에, 패배하지 않으려고 하기에 생긴 거예요. 질 줄 모르기 때문에 화를 자초하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인생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친한 사람에게는 친밀한 입맞춤 한다, 그거 하나 배운 거예요. 가룟유다가! 그런데 그걸 어디에 써먹었느냐 하면, 예수님 팔아먹는 데 써먹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부조화, 불일치, 사랑의 입맞춤이 사랑이 아니었던 거예요. 예수님에게 거짓된 입맞춤을 한다는 것은 가룟유다 입장에서 바깥에서 돌아가는 세상의 돌아감과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 현실과 부조화가 되고 불일치가 된 것에 대해서 자기가 굉장히 서럽게 생각하고 복수할 것만 계산한 거예요. ‘내가 저 예수라는 양반을 어떻게 복수할까?’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 당신한테 배웠던 거룩한 입맞춤으로 내가 당신한테 복수해줄 게.’ 그래서 입맞춤해서 예수를 팔아먹었잖아요.
이것이 우리 일상 가운데서도 숨기지 않고 계속 나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말실수, 실언, 행동의 실수, 이런 것들이 ‘아차, 잘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몰라서 그랬다.’ 이게 불일치, 부조화인데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의 실패로 그런 증상을 보이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만 사랑하는 가운데서 남들과 함께 살아가니까 남들에 대한 태도하고 자기에 대한 태도를 분리시킬 필요가 있어 가지고 억지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짐승같이 해서는 안 되니까, 아직까지 치매 안 걸렸으니까, 욕하고 싶을 때도 욕하지 말아야 되니까 어줍잖게 예의를 다하고 배려를 다 해주는데 이게 자꾸 어깃장 나는 거예요, 이게!
미안하다, 해놓고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고 말은 고맙다, 하는데 고마운 것도 아니고, 말은 예수님 사랑한다, 하는데 전혀 사랑이 없고. 이게 부조화에요. 가룟유다가 보여주는 부조화, 우리한테 그대로 있습니다. 왜? 거짓된 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악마는 언제 악마답게 등장하느냐 하면, 우리에게 복음이 들려올 때 가장 악마가 극렬하게 발작을 일으켜요. ‘너는 교회 50년 다니고 네가 하나님 앞에 이익 본 것 없잖아. 대충 믿어, 대충!’ 이런 식으로요. ‘이익 본 것 없잖아. 너 예수 믿고 너에게 도움된 것 뭐 있더냐? 아플 때 병이 나았느냐? 돈이 없을 때 돈이 생겼냐? 애가 공부를 잘하냐? 뭐 있느냐? 한번 챙겨봐. 하나하나 카운트해봐. 하나님께 얻어먹은 것 한번 카운트해봐. 없잖아. 그러니까 대충 걸쳐놔. 그냥 대충 믿어.’
이게 뭐냐 하면, 메뚜기 같은 폭격기, “아버지, 불 가운데 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것, 그러니까 산불 나서 다 태우듯이 마지막 타작마당에 알곡 남기고 가라지는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쓰레기는 다 태우는 겁니다. 쓰레기는 자기 중심되는 게 없기 때문에 눈치 보는게 평생의 재주에요. 눈치 보는 것, 사람 눈치 보는 게 재주에요.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음매 기죽어, 이래가지고 자기의 먹잇감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여기 데살로니가전서 5장 26-28절에 보면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자, 이것을 여러분이 망하는 자가 아니고 생명을 얻을 자, 이게 진짜 향기라고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받아들이시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행하지 않은 것, 내가 이룰 수 없는 것, 내가 해낼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도바울의 편지에 담아서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거룩한 입맞춤, 친밀함, 그것도 거룩한 친밀함, 그것을 두 자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랑이란 그분 혼자, 낯선 타인을 혼자 있게 하는 게 사랑이에요. 그분만 보이게 하는 것, 내가 안 보이고, 나의 손실이나 이익 계산이 보이는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하신 그분만 크게 내 앞에 살아계셔서 나타나는 게 그게 사랑입니다. ‘나 없어도 되고요, 당신만 있으면 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나는 크게 느껴지지 않고 주님만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사랑은 그냥 옛날처럼 나 너 사랑한다, 말과 말로 주고 받는 게 아니에요. 정말 사랑하는 사이라면 ‘부디 나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마세요’ 하면서 말이 필요 없이그냥 두 손만 굳게 잡을 뿐이에요. 말이 필요 없는 겁니다. ‘나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마세요. 주님, 주님이 거기 계시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족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요.
그냥 바라보면.
마음속에 있다는 걸.
오리온 초코파이 CF송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이 사랑에 대해서 구약 에스겔에서는 이걸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상과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상과의 차이점. 성경에서 우상이라 하지만 사실은 신이거든요.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과 진짜 창세 전에 예정된 비밀로서 나타난 하나님이 이런 점에서 차이 난다는 것을 에스겔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에스겔 20장 16절 보게 되면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좇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우상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언약이 없다. 그 정도는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단순히 율법이 있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이 아니에요. 유대인은 율법이 있어도 메시아를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율법을 안다, 율법 지식을 안다, 이래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그러면 뭐냐? 에스겔 20장 19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찌어다.” 여기에 안식일이 나와요. 에스겔 20장 내내 안식일 이야기를 합니다. 내 안식일을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 안식일의 특징이 뭐냐? 노동을 안 해도 되는 것, 나의 노동, 나의 행함, 내가 어떠함을 전혀 그런 것을 안 비춰도 되는 것, 그날이 안식일이에요. 노동을 하지 말라, 했거든요. 이 세상 그리고 너의 모든 인생, 네 앞길은 네 노동과 네 일함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의 인생은 주님의 궤적이지 너의 궤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네가 살아온 그 실선들이 아니고 주님이 너를 이끌고 가신, 질질 끌고 가신 그 길에 남겨진 흔적 같은 것, 그게 성도의 일생입니다. 안식일과 안식일의 의미와 취지가 계속 살아있으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끌고 가신 거예요. 주님이 우리 인생을 중심이 되어서 관통해 나가시게 되면 주님은 실이 되고 우리는 그 실에 붙어 있는 알곡이 되어서 그냥 주님 가신 그 나라에 쑥, 하고 그냥 쑥 꼴인! 하고 들어가 버리는 겁니다. 그게 진짜 감추어진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러나 우상은 내 쪽에서 신에게 뭔가 드리지 아니하면 갚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께서 안 갚아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안 줘도 갚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게 로마서 11장에 나와 있어요. 34, 35절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즉 “누가 하나님께 바쳐서 복 받았다 하는 자가 누구냐? 누구야? 나와봐! 누구야! 그런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야! 바치기 전에 내가 줬잖아.” 내가 이게 하나님이거든요. 그러니 주신 것을 찾으면 되지요. 그게 바로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낯선 타인으로 오신 이유가, 내가 골라서 온 타인이 아니고 주님이 일방적으로 들이닥친 타인은 뭐냐 하면, “너는 내가 될 수 없지만 내가 네가 되어줄 게.”
그래서 주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비밀로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들어오는가? 뭐 선물 사주고, 목걸이 사주고, 옷 사주고, 그렇게 뭘 사준다고 사랑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무를 주세요.” 하는 것처럼 먹는 거예요. 사랑은 먹는 거예요. 아가서에 있는 것처럼 사랑은 먹는 겁니다. 딸기도 같이 먹고, 포도도 같이 먹고. 포도나무에서.
신약에 오게 되면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라, 먹을 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거예요. 우리 안에, 이 누추한 곳에, 나밖에 모르는 이 쓰레기 같은 나, 자기 자존감이 중심이 되어서 살아왔던 나에게 “나를 먹어라.” 그러면 예수님 머리부터 이렇게 뜯어먹습니까? 아니. 내 살과 내 피, 내 살과 피를 먹는다는 것은 뭐냐?
네가 얼마나 못난 존재이기에 내가 대신 이 피를 흘렸고 대신 네가 찢겨질 살을, 하나님 앞에 저주받을 이 살을 내가 대신해서 찢겼다. 나는 이렇게 쓰레기만도 못하고 하찮은 인간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대신했다는 그 증거로서 우리에게 사랑의 내용이 되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내가 고르지 않은 이웃이에요. 내가 원치 않았던 이웃이었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이 가룟유다의 만남이 아니고 거룩한 입맞춤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주님은 말합니다.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주님이에요. 돈 같은 것, 뭐 부자되세요, 그런 것 말고요, 부자되세요, 그런 것 앞장세우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앞장세우며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인간이 되어라.” 이게 주님의 취지입니다.
“너는 아무리 남들이 죽여도,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폭탄 된 통으로 맞아서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되어라.” 이것은 무엇과 대조가 되느냐 하면, 부자 되세요, 이것과 정 대비가 되지요. 행복하세요, 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죽음을 불행이라 생각하잖아요. “그래, 불행에 불행, 또 추가적인 불행, 불행 곱하기 불행이 되더라도 너는 그 가운데서 오히려 사랑은 빛이 날 것이다.” 내 위력, 주님이 하신 위력은 나한테 빛이 날 거예요.
이게 거룩한 입맞춤으로 전달되는 겁니다. 그게 사도의 편지 안에 들어 있어요. 그래서 복음에서는 종교를 빼야 되는 겁니다. 종교를 깨야 돼요. 종교를 깨고 그 종교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돼요. 내 일상 속에 들어온 복음이 아니라 내 일상을 깨고 따로 나가신 그 복음, 그 복음 앞에서 내 일상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를 쳐다볼 게 없어야 돼요.
그냥 나한테 모든 것을 주신,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하신, 그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만 아니라 그 약속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작렬하도록 하신 그 분 앞에 그분만 있으면 그걸로 족한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사도바울이 아주 대범한, 대담한 말을 1장 19, 20절에서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모든 것은 창세 전에 예정된 비밀대로, 그 경륜대로 모든 것은 진행되어서 출생 안 해도 되는 내가 출생했잖아요. 그리고 타지 않는 산불이 홀라당 다 타버렸어요. 이것조차도 십자가를 위함이에요. 주님의 사랑은 내 집 건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있는 거예요. 내 집 없으면 내가 죽지만 십자가는, 죽여도 죽여도 안 죽는 십자가는 이게 영원한 나의 집이에요. 산불에도 타지 않는 영원한 나의 집입니다.
거기 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아멘’은 반응입니다. 나의 집은 이곳에 없다는 거예요. 도둑맞을 일도 없고 불날 일도 없는 곳. 여러분이 예배 처음에 했던 교독문 시편 27편의 내용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울산강의 두 번째 강의 마지막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이 세상 중심은, 대구 중심은 동성로고 서울의 중심은 강남이 아니라, 이 세상의 중심은 나의 고향도 아니라, 이 세상의 중심은 예수님, 예수님이 나의 중심이라고. 예수님이 중심이에요. 우리는 보이는 이곳을 떠나서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영원히 삽니다.
그곳은 나의 집이 아니고 원래 주님의 집이에요. 낯선 타인, 낯선 타인인 주님의 집에 우리가 영원히 삽니다. 이 낯선 타인에 대해서 인간들은 얼마나 여기에 대해서 두렵고 처음에 맞이할 때 겁나지요. 창세기 19장에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폭격을 받아 가지고 우크라이나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불바다를 만들었어요.
소돔과 고모라, 창세기 19장에 불바다를 만들었을 때에 주님께서 롯의 가정에 부탁한 것이 딱 하나였습니다. 십계명도 아니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도 아니었어요. “너 자신의 것에서 미련 갖지 마라. 너 자신의 것에서. 태어나서 주워 모은 너의 자존감에 대해서 미련 갖지 마라.”
네가 살던 고향은 고향이 아니었고 위험한 곳이었고 악마가 지배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처는 오직 불바다, 불심판 밖에 없어요. 그곳을 네가 이제는 미련 갖지 말고 도리어 그곳과 자기가 가야 될 곳과 비교해 보라는 겁니다. 주께서 어디에서 어디로 끄집어내는지, 왜, 유다서 1장 23절에서 왜 우리를 불 가운데서 구원했다 하는지, 왜 불 가운데서 구원했다는 말인지?
우리는 ‘산불 난 데만 지금 산불 났지 아무것도 안 일어나고 멀쩡한데?’ 멀쩡하니까 우리는 사는데 지장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나 오류 없다, 나 양치기 소년 아니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늑대라는 것은 생각도 못 했지요. 늑대라는 것은 굉장히 겁박용으로, 협박용으로, 실재도 아닌데 사람들이 겁먹어서 늑대 온다,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본인이, 양치는 소년 본인이 거짓된 것에 놀아난 것을 모르고 본인은 하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신만만한 거예요.
지금 이 세상 고생스러운 거요, 여러분, 이것은 맛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진짜 지옥은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죽고 나면 진짜 지옥이 시작됩니다. 세상을 좀 넓게 볼 필요가 있어요. 하나님이 처음에 찾아올 때 삼손의 아버지 어머니한테 찾아왔어요. 그때는 삼손이 없었습니다. 삼손이 하나님이거든요. 정확하게 삼손이 하나님의 모형이거든요.
그런데 마노아 가정에서는 삼손의 이름조차도 없어요. 왜? 애가 안 생겼으니까, 애를 못났으니까. 애 못 낳는 마노아 가정에 천사가 와서 “애가 있을 것이다.” 해서 삼손이 태어났습니다. 사사기 13장 16-18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이르시되 네가 비록 나를 머물리나 내가 너의 식물을 먹지 아니하리라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찌니라 하니 이는 마노아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지 못함을 인함이었더라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씀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룰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숭하리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내 이름은 기묘니라. 분명히 이름은 없는 게 아니고 있는데 인간들 이름 가운데는 없는 이름, 기묘한 이름, 그 기묘한 이름을 아는 자에게는 기묘한 천사와 더불어서 이 땅에 기묘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내가 또 남들에게 낯선 타자, 낯선 타인으로서 아직도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주께서 허락한 대로 더욱더 세상 생활에 일상에 나서야 되는 겁니다.
단 이름이 바뀌었어요. 훌륭한 존재가 아닙니다. 착한 사람 된 것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 된 겁니다. 이름은 있되 우리의 이름은 기묘한 이름, 주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겁니다. 이 하늘의 요소와 땅의 마노아 요소가 부딪힐 때 마노아는 얼마나 겁이 났는지 “우리는 이제 죽었다.” 하거든요.
그런데 마노아 아내가 현명한 게 “죽일 것 같으면 진즉 죽였지 주께서는 우리에게 일을 시키려고 기묘한 천사가 일을 시키려고 오셨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삼손이에요. 24절에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내가 예상한, 내가 기대한 타자가 아니라 낯선 타자가 나한테 쑥 들어와서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예정된 그 비밀을 우리에게 쏟아부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비밀이 통과하는 경로로써 사용해주신 그자가 누구냐? 그자가 거룩한 입맞춤으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하는 그 편지의 대상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