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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도포서원의 置廢와 유적지 현황
유 재 춘(강원대 교수)
1. 머리말
2. 도포서원의 치폐(置廢)
3. 도포서원 봉안 인물
4. 도포서원 유적지와 유물 현황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시대 강원도지역에는 모두 17개소의 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이 가운데 행정구역 변경으로 경상북도로 편입된 곳, 북한지역으로 편입된 곳에 소재하는 것을 제외하면 현재 강원도 지역을 기준으로 한다면 13개소의 서원이 있었다. 이러한 수는 경상도 지역에는 173개소가 있었다는 것과 단순 비교하면 1/10 수준으로 매우 큰 격차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원수의 지역별 단순 비교를 가지고 교육의 낙후성을 거론하기는 어렵다. 서원은 사액서원이 있기는 하였지만 공립학교인 향교와 대비되는 일종의 사립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수요, 즉 지역 인구와 관련이 있고 특히 서원 설립의 주체가 대부분 지역의 유학자 그룹이기 때문에 이러한 지역의 유학자 그룹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 더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서원 설립에 지역 유림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서원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고 학맥과 문중을 현창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면서 전국적으로 과잉적 설립이 이루어졌다. 이에 국가에서는 서원이 지역에 끼치는 부정적 요소도 있었기 때문에 대체로 남설(濫設)을 금지하는 조치를 하였지만 관료 그룹도 지역의 서원 설립에 간여하는 사례가 많아 정부에서 이를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춘천에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도포서원과 문암서원 두 곳의 서원이 있었고, 이 가운데 문암서원은 1648년(인조 26) 사액 서원이 되었고, 그로부터 2년후에 설립된 도포서원은 계속 비사액서원으로 운영되었다.
본 발표에서는 춘천 도포서원의 설립 과정과 봉안인물, 그리고 현재 도포서원 유적지에 대한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도포서원의 치폐(置廢)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신숭겸에 대한 선양 계기는 1452년(단종 즉위년) 숭의전 건립과 관련이 있다. 숭의전이 만들어지면서 신숭겸은 배현경, 홍유, 복지겸, 유금필,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정몽주와 함께 백성들에게 특별한 공로가 있는 인물로 선정되어 함께 제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손순효가 <장절공유사>를 작성하게 된 것도 아마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1479년(세조 5) 손순효가 작성한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는 1636년 간행된 평산신씨성보(平山申氏姓譜)에 실려 있는데, 유사(遺事) 기록 자체는 손순효가 작성한 것을 족보를 간행하면서 여기에 함께 수록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조는 엄청난 시련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는 왕조 존립 자체에 대한 위기감이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 와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충효를 크게 강조하게 되었고,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충의의 표상적 인물인 신숭겸에 대한 추앙이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서원, 사우 건설과 연결되었다.
1607년(선조 40)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표충사(表忠祠), 표충단, 충렬비를 세워서 신숭겸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이 시기가 아직 전쟁의 폐허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러한 신숭겸 관련 유적지에 대한 관심은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는 1672년(현종 13)에 이 서원에 사액(賜額)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다.
춘천 도포서원 설립도 신숭겸에 대한 이러한 전국적 추숭의 연장선에 있었다. 도포서원은 효종 원년(1650)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외손(外孫)인 춘천부사 박장원(朴長遠)이 비방동(悲芳洞 :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 장절공 묘역 밑에 창건하고 장절공 신숭겸(? - 927)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서원 설립과 관련하여 외형상으로 신숭겸의 외손인 춘천부사가 주도하는 형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숭겸이 역사상 ‘충(忠)’의 표상적 인물이면서 춘천사람이었기에 지역 유림(儒林)으로부터 적극적인 공의(公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숙종 24년(1694) 후손인 신회(申懷)가 강원도 관찰사로 왔다가 서원이 퇴폐한 것을 보고 민망하게 여겨 방동리 묘역에서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4.2km 떨어진 도장포(道藏浦 : 현재 춘천시 서면 신매리)의 오산(熬山)으로 옮기면서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과 우정(憂亭) 김경직(金敬直 : 1569-1634)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서원의 이름이 ‘도장포(道藏浦)’에서 따온 것이라면 방동리 신숭겸묘 아래에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도포서원(道浦書院)’이라는 명칭이 아닌 ‘장절사(壯節祠)’라는 사우(祠宇) 명칭, 혹은 ‘장절서원’이라고 불리웠을 가능성도 있다.
도포서원에 상촌 신흠이 도포서원에 추가로 배향되게 된 것은 그가 당대의 명망있는 선비였을 뿐만 아니라 1617년(광해군 9) 1월부터 1621년(광해군 13)년 8월까지 4년 7개월간 춘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춘천 유림(儒林)과 교유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정 김경직이 도포서원에 배향된 것은 그가 춘천 출신의 명망있는 지역 인물이었던 점도 있지만 상촌선생과는 광해군대에 퇴관하였다가 인조반정후 다시 관직에 나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상촌선생의 춘천 유배생활 때에 아마 지역 유림과의 교유관계에서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것이 후에 함께 도포서원에 배향된 큰 사유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신한장(申漢章)의 중수기에 의하면 도장포로 옮길 당시 서원 건립의 예산은 대체로 감영(監營)과 내외자손(內外子孫)들이 부담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국가에서 모금을 금하였기 때문에 재정이 모자라서 규모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그 뒤 후손인 신한장(申漢章)이 춘천부사로 있는 동안(1708-1709년) 자금을 염출하여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짓고 도포서원 설립의 전말을 밝히는 "도포서원중수기(道浦書院重修記)"을 지었다. 이때에 춘천에 사는 신숭겸의 외손인 황관(黃琯)도 적극 협력하였다고 한다. 도포서원은 비사액 서원으로,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철되게 되었다.
3. 도포서원 봉안 인물
1) 신숭겸
신숭겸의 출신지에 대해서는 춘천 출생설, 곡성 출생설, 곡성출생 춘천이거설 등이 있으나 문헌자료상으로 그의 출신지를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최근 연구에서 곡성에 신숭겸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있고 추모시설이 생기게 된 연유에 대해 곡성은 출생과 연관된 것보다 그가 전사한 후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설이 제기됨으로써 춘천 출생설은 한층 공고해 지게 되었다. 신숭겸의 신분 자체 대한 논란도 있기에 그가 출생한 지역을 단정할 만한 근거가 미약하지만 전사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춘천에 묘를 조성한 것을 본다면 적어도 그의 확실한 연고지역이 춘천이라고 하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신숭겸은 뛰어난 무예로 성장하여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복지겸(卜智謙)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이후 고려내에서 국왕인 왕건과 가장 친분이 두터운 무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태조를 피신시키고 대장(大將)이 되어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려의 국가체제 정비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994년(성종 13) 본격적인 묘정 신설에 나서 비로소 태조묘(太祖廟)에 배현경․홍유․복지겸․유금필과 신숭겸을 배향하였고, 1120년(예종 15) 팔관회 개최할 때에 유희를 관람하던 왕이 국초의 공신 김락, 신숭겸 등의 우상(偶像)을 보고 감개한 마음으로 직접 시를 지어 보였는 바, 이 노래가 유명한 도이장가(悼二將歌)이다. 이 두 장수를 애도하는 노래는 고려 태조가 팔관회를 열고 김낙과 신숭겸 등 전사한 공신들을 생각하고 가상(假像)을 만들어 열석(列席)시키고 술과 음식을 주었더니, 술이 곧 없어지고 가상(假像)이 일어나 꼭 산 사람같이 춤을 추었다는 일이 있은 후 이후 똑같은 일을 하며 내려오던 중 1120년 예종이 서경에서 행한 팔관회에서 이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두 장수의 후손을 물어 친히 시를 지어 내리고 또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신숭겸에 대한 추숭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고, 특히 조선후기에 와서는 대구의 표충사 및 순절단, 충렬비를 비롯하여, 춘천의 도포서원, 전남 곡성의 용산단(龍山壇)과 덕양서원(德陽書院), 충남 서천의 율리사(栗里祠), 경남 사천의 경백사(景白祠), 그리고 북한의 황해도 평산의 태사사(太師祠)와 동양서원(東陽書院) 등이 건립되어 신숭겸을 위패를 모시고 봉사(奉祀)하였다.
2) 신흠
조선중기의 관료이자 저명한 문장가이다. 특히 상촌은 사대문장가(月沙 李廷龜, 繼谷 張維, 澤堂 李植등과 함께 月象繼澤으로 불림)의 한 사람으로 칭해질만큼 명성이 있었다. 신흠은 1566년(명종 21) 1월 28일 한성부 장의동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 자는 경숙(敬淑), 호는 경당(敬堂), 백졸(百拙), 남고(南皐), 현헌(玄軒), 상촌거사(象村居士), 현옹(玄翁), 방옹(放翁), 여암(旅菴) 등이다. 아버지는 개성부 도사를 지낸 신승서(申承緖)이고,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 宋氏)로 의정부 좌참찬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1572년(선조 5, 7세) 당시 신흠의 아버지는 개성부 도사로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또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아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신흠은 외조부인 의정부 좌참찬 송기수의 손에 거두어지게 되는데, 송기수는 당시 알아주던 장서가로 집에는 많은 서책이 있었다. 8세가 되던 해부터 신흠은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글공부에 전념하였다. 1585년(선조 18, 20세)에 진사시와 생원시에 차례로 합격하고, 다음해인 1586년에는 승사랑(承仕郞)으로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2년전인 1583년 외숙인 대사간 송응개(宋應漑)가 율곡 이이(李珥)를 비판했던 탄핵문을 보고, “이이(李珥)는 사림의 중망을 받는 인물이니, 심하게 비난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한말이 와전되어, 당시 집권세력이던 동인들의 견제를 받게 되어, 벼슬생활을 순탄하게 할 수가 없었다. 급제후 성균관 권지에 제수되었고, 이어 함경도 경원의 훈도로 쫒겨갔다가 광주훈도를 거쳐 사재감참봉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어 동호 독서당에서 강학을 하게 되었다. 관직 초기의 불우함은 결국 당시 붕당정치의 역학속에서 어쩔 수 없는 그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1589년(선조 22, 24세)때 동인인 정여립(鄭汝立)이 역모를 꾀한 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수세에 몰리고 서인이 세력을 얻게 되자, 한림에 있던 신흠은 이듬해인 1590년(선조 23, 25세)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이 관직도 품계는 비록 9품이었지만, 왕에게 가까이 있으면서 그 행적을 기록하고 왕명을 대필하는 일을 맡아 보았기 때문에 매우 권위있고, 이후의 정치적 진출에도 기반이 되는 자리였다. 신흠의 관직생활도 이때부터 순로를 걷게 되었다. 이후 예문관의 대교, 봉교를 차례로 역임하고, 1591년에는 사헌부 감찰과 병조좌랑을 역임하였으나 일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1592년(선조 25, 27세)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동인들의 배척으로 양재찰방에 좌천되었으나 전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삼도순변사 신립(申砬)을 따라 조령전투에 참가하였다. 도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약하면서 삼남의 기무를 모두 맡아서 처리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하였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1593년 3월에는 체찰사를 따라 평안도 영유(永柔)의 행궁에 입조한 후, 5월에는 이조좌랑에 제수되었고, 당시 폭주하는 대명외교문서의 제작의 필요성과 함께 승문원에 교검이라는 관직을 신설하여 그에게 제수하고 지제교를 겸하게 하여 책임을 맡겼다. 그해 겨울 어가를 호위하여 서울로 돌아온 후, 원접사 이항복(李恒福)의 종사관이 되어 의주에서 명의 칙사를 영접하였다. 다음해 정월에 이조정랑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여러 직책을 거쳐 1596년에는 의정부 사인이 되었고, 1599년에는 장남 신익성(申翼聖)이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貞淑翁主)의 부마로 간택됨에 따라서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아 당상관이 되면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 예조참판,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한성부 판윤, 병조판서,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1608년에는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遺敎七臣) 중 한사람이 되었으며,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광해군이 두 번이나 대사헌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1609년에는 므로 이때부터 광해군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나 1609년 세자책봉주청상사(世子冊封奏請上使)로 중국에 갔다가 와서 숭정대부에 특가(特加) 되었으며 8월에 예조판서에 제수되고, 이후 동지경연사, 지충추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지만 1613년(광해군 5, 48세)에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유교칠신(遺敎七臣)으로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그해 김포로 가서 칩거하게 되었다.
1616년(광해군 8, 51세)에는 인목대비의 유폐 및 김제남(金悌男)에 대한 가죄(加罪)와 더불어 그해 9월 양사(兩司)에서 그를 한응인(韓應仁),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등과 함께 ‘사흉(四凶)’으로 지목하여 논죄한 후, 1617년 1월 춘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때부터 1621년(광해군 13, 56세) 8월에 사면되어 김포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4년 6개월간 춘천에서 유배생활을 계속하였다. 상촌의 유배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춘천부사가 그의 오랜 친구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춘천에서의 유배생활은 비교적 원만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상촌이 유배기간 동안 춘천에서 쓴 「춘성록(春城錄)」에,
「… 춘천에 도착하여 보니 춘천에도 士人들이 많아 찾아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는데, 모두 예전부터 알고 있던 얼굴들이 아니라서 서로 대하는 것이 어색하기만 하였다」
라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상촌이 춘천에 있는 동안 많은 춘천의 士人들을 만났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그가 비록 유배된 몸이지만 이미 고관을 지낸 명성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가 춘천 유배생활을 통하여 춘천의 유림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후에 그가 춘천의 도포서원에 배향되게 된 것도 상당 부분은 이 당시의 그와 춘천 유림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또 상촌은 당시 춘천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춘천은 평소 거처할 만한 골짜기와 산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집 지을 터를 잡으려 할 때에는 꼭 춘천을 말하곤 하였다. 내가 처음 이곳에 온 것은 태반은 춘천이 명소라고 하는 것 때문에 이끌려 왔는데, 막상 와서 보니 소양 일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평할 뿐 그다지 기이한 절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땅도 척박해서 메밀이나 귀리ㆍ콩 등을 많이 심는데 민간에서 밥을 먹는 자는 드물고 죽을 쑤어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땅이 사방으로 막혀 상거래하기에 불편한 관계로 고을에 호족(豪族)이 없고 순박하고 어리숙하기만 하여 제어하기 어려운 양남(兩南) 지방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나 근년 이래로 이곳의 풍속 역시 돈독했던 옛날의 도타운 것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춘천 사람들의 생활이 대체로 넉넉하지 못하고, 땅이 사방으로 막혀서 상거래가 왕성하지 못하여 부호가 없으며, 풍속이 순박하였는데 근래에는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었다.
1623년 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관직에 중용되어 이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으며, 7월에는 의정부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1624년 이괄의에 난일 일어나자 大妃를 호위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후 5월에 휴가를 청하여 김포로 돌아갔다가, 다음해에 다시 우의정으로서 세자관례빈(世子冠禮儐)이 되어 삼가례(三加禮)를 주관하였다. 이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제수되었고, 1628년(인조 6, 63세) 유효립(柳孝立)이 모반하려 한다는 허체(許諦)의 말을 듣도 군대를 출동시켜 입성자(入城者)들을 체포하였다. 이해 6월 29일 병으로 졸하였다.
신흠의 일생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인조실록에 실려있다. 사관은 그에 대해 “조정에 있은지 40년 동안에 화현직(華顯職)을 두루 거쳤으나, 일찍이 헐뜯는 말이 없었으며, 위란(危亂)을 겪으면서도 명의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았으므로 사림이 이 때문에 중하게 여겼다. 문정공의 시호를 받았고, 신묘년(1651년, 효종 2)에 인조묘정에 배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촌 신흠 묘는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영동리에 소재하며, 사후 인조의 묘정과 도포서원에 배향되었다.
3) 김경직(金敬直)
1569(선조 2)∼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이정(而正), 호는 우정(憂亭)이다. 고려 말의 절신(節臣)인 김주(金澍)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김구정(金九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맹련(金孟鍊)이고, 아버지는 사직(司直) 김광계(金光啓)이며, 어머니는 신달인(申達仁)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가 되었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 그 뒤 전적(典籍), 은계찰방(銀溪察訪) 등을 역임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실망, 관직에서 물러나 춘천의 우두촌(牛頭村)에 은거하였다. 이 때에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로 춘천에 유배 중이던 신흠(申欽)과 교유하게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낭천현감에 기용되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어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고, 예안현감(禮安縣監)⋅황해도 도사(都事) 등으로 임명되었지만 병조에서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대로 병조 근무하도록 하여 외직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병조정랑으로 오래 있다가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나갔고, 다시 들어와 성균관 사예(司藝」 직강(直講), 사도시정(司導寺正)이 되었다. 그후 평양서윤(平壤庶尹)⋅영해부사(寧海府使)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손자인 시헌(時獻)과 증손자인 덕기(德基)가 모두 품계가 2품에 이르렀으므로 거듭 증직(贈職)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게 되었다. 사거한 후 70여년이 지나 춘천 사람들이 향선생(鄕先生)으로 모셔 제사하기 위해 장절공 신숭겸의 사우(祠宇)에 제향케 하니 상촌(象村) 신흠과 더불어 함께 제사지내게 되었다. 죽천(竹泉) 김진규(金鎭圭)가 향사문(享祀文)을 지었는데 유양(揄揚)이 심히 지극하였다.
김경직의 묘는 춘천시 동면 지내 3리 재궁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묘갈은 1731년 세운 것으로, 비문은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민진원(閔鎭遠)이 썼다.
4. 도포서원 유적지와 유물 현황
도포서원터는 춘천시 서면 신매 3리 101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다. 이곳은 현재의 춘천시내를 중심으로 춘천의 서북쪽의 해당하는 곳으로, 북한강변으로부터 약 300여미터 떨어져 있다. 지금은 의암댐이나 춘천댐, 혹은 신매대교를 통하여 이곳으로 갈 수 있으나 예전에는 배 이외에는 별다른 교통 수단이 없던 곳이었다.
이곳은 화악산 자락이 흘러 내려와 강변에서 멈춘 지대로, 앞으로는 북한강이 바라다 보이고 그 건너편으로 멀리 봉의산을 비롯하여 춘천을 감싸고 있는 대룡산. 오봉산, 마적산, 구봉산 등 높은 산들이 조망된다. 또한 강 건너로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산인 고산이 그림처럼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의암댐이 건설되어 소양강과 북한강 일대가 모두 호수가 되고 우두평에 연결되었던 중도 일대가 떨어져 나가 섬이 되는 등 예전에 비해 지형이 크게 변화되었다.
지금은 이 서원터 뒷편으로 403번 지방도가 개설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금산1리 눈늪이라는 마을을 통해 강변쪽으로 통행로가 있었기 때문에, 이 통행로가 서원 남서쪽의 야산을 넘어 서원 앞쪽으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다. 이곳에 서원이 자리 잡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곳이 춘천의 곡창지대로 예전부터 양반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우두벌과 가까이 있으며, 바로 앞쪽에 나루가 있었다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도포서원이 처음 설립된 곳은 신숭겸묘 아래의 재실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도포서원터는 방동리 서원터와 신매리 서원터로 나눌 수 있다.
1) 방동리 서원터
기록에 의하면 도포서원은 당초 비방동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현재로서 당시 서원이 있었던 터가 정확히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신숭겸장군 묘역아래의 사당이 있는 곳으로 생각된다. 이는 신한장의 중수기문에 「… 박장원이 이 땅에 수령으로 와서 많은 선비들의 바램으로 인하여 비방동(悲芳洞)의 묘 아래에 사우(祠宇)를 창립하여 향사처(享祀處)로 삼았다」라고 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신매리 도장포로 옮긴 후에도 십수년간 서원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던 것을 보면 비방동에 처음 창건된 도포서원은 통상적인 서원 형태의 시설을 갖추지는 못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터 주변에는 사당을 비롯하여 신도비각, 재실(齋室) 등이 있으며, 신숭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원당(願堂)터가 이곳에 있었다.
1479년(세조 5) 손순효가 작성한 <장절공유사(壯節公遺事)>에 의하면 묘 아래에 원당(願堂)을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연혁에 대한 사항은 자세하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 이 원당은 신숭겸의 명복을 비는 암자(庵子)이면서 묘역을 수호하는 관리소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조선후기 안홍중(安弘重)이 쓴 <추원사기(追遠寺記)>를 보면 “묘역을 수호하는 것은 초화(樵火)를 금지시키는 것이니 절을 지어 승려를 모집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 풍속으로 장절공 신숭겸 때 그 제도를 처음 만든 이래 유명한 이의 묘역에 절이 없는 곳이 없다.” 라고 하여 묘 옆에 암자를 만들어 묘역 수호를 하게 한 제도는 신숭겸묘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춘천의 신숭겸묘는 왕이 아닌 사람의 묘역에 원당을 만든 최초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형태의 원당을 분암(墳庵)이라 지칭하기도 했는데, 신숭겸묘 아래에 있던 원당은 점차 불교색을 탈피하여 유교식 제사를 지내는 재실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원당이 조선시대에 와서 재실로 바뀌었다는 것으로 본다면 묘 아래 현재의 재실터 일대가 바로 원당터로 여겨진다.
2) 신매리 서원터
서원터가 있던 곳은 서면 신매리 100-1, 101번지 일대이다. 101번지 도포서원터에는 신숭겸의 후손인 신달수(申達秀)씨가 거주하다가 최근(2001. 2) 작고하였다. 신달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신달수씨의 증조인 진사 신건조(申建朝)가 건물을 허물고 위패를 강당이 있었던 근처의 강당봉(講堂峯)에 묻었다는 말을 조부인 신효선(申孝善)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신달수씨가 살았던 건물은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음식을 장만하던 행랑채였다고도 하며, 혹은 서원의 건물을 헐어 지었다고도 한다.
서원터는 집터의 뒷편인데, 주변에는 서원건물에 사용되었던 주초석과 장대석이 흩어져 있으며, 많은 와편과 백자편이 발견된다. 서원터는 전지(田地)로 이용되면서 모두 교란되어 외형상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상태이다.
신한장이 쓴 중수기에,
「성상(聖上) 갑술년에 후손 참판 신회(申懷)가 본도를 안찰하다 이 사우가 퇴락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유생들과 더불어 도장포 고산(孤山)에다 이건할 것을 논의하였다. 物力의 대부분은 감영 예산과 내외 자손으로부터 나왔다. 당시는 새로이 조정에서 禁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부조를 요청할 수가 없었다. 이에 역사(役事)를 크게 일으킬 수 없어서 체단(體段)도 전혀 구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보니 유생들이 유식(遊息)하는 장소 따위는 실마리를 얻지 못하여 사림들이 병통(病痛P)으로 여긴지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는 바, 이에서 보면 도장포로 이건하였을 당시 서원이 제대로 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신한장이 춘천부사로 부임하면서 여러 건물이 추가적으로 건설되어 비로소 서원의 체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당시 서원의 배치에 대해 “문원(門垣)과 외숙(外塾)은 옛 규례대로 하여 지난날에 겨를이 없었던 일을 지금 이미 수거(修擧)하여 창건하였고 …”라고 하여 도포서원이 대개 옛 규례에 의한 체제로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후손 신달수씨의 증언과 신한장의 중수기문에 나타난 단편적인 내용을 토대로 하여 당시 도포서원 건물 체제는 사당(祠堂), 강당(講堂), 동(東)․서재(西齋), 전사청(典祀廳), 내(內)․외삼문(外三門) 등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강당의 경우 통상적인 배치처럼 동․서재를 좌우에 끼고 있는 형태가 아니라 경남 사천의 경백사처럼 강당이 사당 왼편에 동쪽을 향해 배치되고 그 뒤에 서재 건물이 배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정확한 건물 배치에 대한 사항은 서원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경 도포서원지 원경(중앙의 가옥이 있는 곳 일대)
춘천시 서면 신매리 도포서원지
서원지 일대의 지적도
<도면 1> 도포서원지 현황(A구역이 사당터, B지점에 담장 석렬)
서원 건물지와 관련된 여러 증언 내용을 정리하면 위의 <도면 1>과 같다. A 구역은 사당이 있던 곳이다. 이는 서원터의 일부인 신매리 101번지에 거주하였던 후손 신달수씨의 증언에 의한 것으로, 氏의 선대로부터 그에 대한 내용을 직접 들었다고 하며 예전에는 건물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신달수씨의 증언에 의하면 사당은 정남향이었고 그 동쪽에 전사청(典祀廳)이 있었으며, 사당 동쪽에 협문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신달수씨는 사당 좌우에 동․서재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이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을 참고해 검토해 본 결과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현지에 거주하였던 신달수씨의 자제분들의 증언에 의하면 B 구역에 동서로 길게 석렬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담장의 흔적으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이 담장 안에 동․서재 건물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반적인 배치구조처럼 사당을 둘러친 담장 앞쪽에 강당이나 동․서재가 배치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최근 101번지 서쪽(그림의 C 구역) 부분에서도 지표하에 돌이 깔려 있는 곳이 있는데, 이것이 건물지와 관련이 있는지의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신대균씨의 증언에 따라 사당터 서쪽변을 조사해 본 결과 지표하에 큰 돌이 여러 곳에 놓여 있는데, 이것도 서원건물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명확한 것은 향후 발굴조사를 시행해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3) 유물 현황
도포서원과 직접 관련된 유물은 극히 적다. 서원 건물은 한 동(棟)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단지 서원 현판(懸板)과 현장 주변에 주초석․장대석․와편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서원 현판은 현재 신숭겸묘소 아래에 있는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다른 건물과 관련된 유물들이 현장 주변에 남아 있다. 이를 개별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포서원 현판
장절공 묘소 아래에 위치한 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가로 180cm, 세로 39cm이며 현판의 두께는 약 2cm이다. “道浦書院”이라고 크게 각자(刻字)하고 그 끝부분에 「上之十年丙午三月上旬日憂亭金先生六世孫義協謹書」라고 작은 글씨로 각자되어 있다. 이 연대 기록에 의하면 이 현판은 1786년(정조 10)에 만들어진 것이다.
(2) 주초석․장대석
현재 서원터 주변에는 여러개의 주초석들이 남아 있다. 신달수씨 증언에 의하면 예전에는 주변에 다듬은 초석들이 여러 개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묻기거나 다른 곳에 사용하기 위해 옮겨가서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것만 남았다고 한다. 특히 주변에 민가가 건축되면서 이곳의 석재들이 옮겨져 사용되었다. 현재 사당터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신대균씨 가옥에는 장독대를 비롯하여 집안 곳곳에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사당터 뒤쪽 뚝에도 일부 초석이 남아 있다.
또한 건물에 사용되었던 장대석들이 신대균씨 가옥내에 여러 개 남아 있다. 대개 길이 약 50~60cm 정도이며, 자연석을 대강 다듬은 것이거나 화강암을 치석(治石)하여 만든 것들이다.
(3) 와편․자기편 등
서원터 현장 주변에서는 초석이나 장대석 뿐만 아니라 많은 와편과 자기편이 발견된다. 와편은 주로 경질 회청색을 띤 무문(無紋), 혹은 창해파문 계통의 기와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기와 이다. 여러 종류가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 중수나 번와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 맺음말
도포서원은 문암서원과 더불어 조선시대 춘천에 건립된 서원의 하나로, 조선후기 국가적으로 충효에 대한 강조가 고조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숭겸이 전사한 대구 공산지역에 먼저 사우, 충렬비 건립 등 추숭사업이 시작되었고 여타 지역에서도 여러 봉사(奉祀)가 이어지게 되면서 도포서원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서원이 춘천의 서면에 설립될 수 있었던 첫째 요인은 서원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신숭겸의 묘소가 서면에 있었다는 것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지역의 사론(士論)을 주도하는 유학자 그룹이 서면지역에 일정 부분 포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도포서원은 여타의 서원과 비교하여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서원의 주향(主享)이 후삼국~고려초기 무장(武將)이라는 점이다. 서원에서는 흔히 전국적인 저명한 유학자 또는 지역의 명성있는 유학자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 때문에 조선후기에 설립된 서원은 대체로 설립 초기부터 봉안 인물이 누구냐에 따라 당색(黨色)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 때문에 적어도 1650년 창건되어 1694년 신흠과 김경직을 추가로 봉안하기 전까지는 뚜렷한 당색을 가진 서원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는 같은 춘천지역에 설립된 문암서원과 비교하면 문암서원은 퇴계 이황의 문인인 신식이 춘천부사로 와서 창건하고 퇴계 이황을 봉안하였고, 후에 이정형(李廷馨)과 조경(趙絅)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와 같이 문암서원에 봉안된 인물은 남인계 인물인 반면 도포서원은 1694년 신흠과 김경직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정치적으로 본다면 서인계통의 서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신흠이 비록 서인의 중심적인 인물이지만 도포서원 주벽에 봉안된 장절공 신숭겸의 동종(同宗)이고, 김경직 역시 모친이 평산신씨라고 하는 점에서는 단순히 같은 당색을 갖는 인물을 봉안한 것과는 다소 다른 점도 있다.
셋째는 도포서원이 서인계 인물을 배향함으로써 춘천지역에 학맥상으로 기호학맥이 보다 널리 형성되는 요인이 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위정척사에 투철한 하나의 주류를 이루는 고장이 되어 경기지역의 화서 이항로 문인과 연계된 주류 유학자그룹이 형성되는 배경이 되었다. 도포서원이 소재하던 서면 신매리에 거주하는 홍재구는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최근 강원도내 향교, 서원을 사회 교육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연구된 바 있다. 춘천은 아쉽게도 현존하는 서원 건물이 한 곳도 남아있지 않기에 당장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찾은 것은 불가한 일이지만 활용성이 높고 지역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적절한 복원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