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화랑세기》... <11>문노와 그의 어머니
----------------------------------------------------------------------------
신라는 철저한 골품제 사회였으므로 출생신분에 따라 정치 사회적인 활동에 특권과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즉 진골이어야만 출세를 할 수 있었으나 문노는진골이 아니었다.
문노의 아버지인 비조공은 군대를 통솔하는 병부령을 지내는 등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원래 비조공은 아내인 청진(靑珍)공주가 있었지만 가야국에 사신으로 자주 가다가 몰래 가야국의 문화공주와 관계를 해 문노를 낳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진골신분이었으나 어머니가 가야국출신이어서 문노는 미천한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윤궁은 진흥왕의 첫아들인 동륜태자를 모셔 윤실공주를 낳았고 동륜이 죽자 5년간 과부로 살았다.
문노와 윤궁은 어떻게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문노는 어떻게 몸을 일으켜 마침내 진골의 신분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화랑세기 8세 풍월주 「문노조」의 내용. 진지왕의 뒤를 이은 진평왕이 6세 풍월주를 지낸 세종전군과 포석사에 나가자 동행했던 윤궁은 왕에게 문노와의 결혼을 허락하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제 문노가 진골이 되었으니 저와 혼인하게해주십시오. 그를 진정한 남편으로 받들고 싶습니다.』 당시 문노와 윤궁은 골품이 달라 혼인식을 올리지 못하고 아들셋 딸셋을 낳은 상태였다.
세월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문노를 사적으로 형으로 대우하고 있는세종전군이 진흥왕에게 문노가 고구려와 백제 등을 치는데 공을 많이 세웠으나신분이 미미하다고 은근히 압력(?)을 넣자 왕은 하급관등인 급찬의 위(位)를내렸다.
지도태후도 진지왕에게 문노를 따르는 낭도가 많고 인물이 출중하므로 국선(國仙)으로 임명해 달라고 청했다.
미실도 문노가 국선이 되려면 선모(仙母)가 있어야 되므로 윤궁에게 선모가될 의향이 없느냐고 은근히 떠보았다. 윤궁이 골품은 다르지만 그를 남편으로삼겠다며 선뜻 나섰다. 이리하여 문노와 윤궁이 맺어졌던 것. 이를테면 신라판「평강공주와 바보온달」스토리라 할만 하다.
당시 국선도 화랑의 우두머리였으나 왕이 임명했다는 점이 풍월주와 다르다.
풍월주보다 한 수 위인 셈이다. 문노가 국선이 된 것은 576년 10월. 그 뒤 진지왕의 폐위에 문노가 일조를 하자 문노는 신라관등 17등급중 6위인 아찬의 신분으로 격상한다.
미실의 허락을 얻은 윤궁은 풍월주 겸 국선인 문노와 같이 살면서 선모로서의 역할을 잘 해내 마침내 문노를 진골로 만든다. 이리하여 문노와 윤궁은 마침내 정식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것.
문노는 17세(554년)때부터 백제를 치는데 참가했고 18세때는 고구려를 쳤으며 20세때는 북가야를 쳐 여러번 공을 세운 인물이다. 문노는 「삼국사기」에선 열전제7 김흠운(金欽運)전에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언급 말고는 별다른 기록없이 역사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러나 화랑세기 문노조에 「낭도들은 문노를 죽음으로써 따랐으며 이 때문에 화랑도의 기풍이 크게 일어나 삼국통일의 대업이 일찍이 문노공으로부터 싹텄다」고 기록돼 있다.
문노가 진골로 신분격상된 것은 이같은 특출한 공훈과 인품 때문이었던 것.
진골출신이 아니었다가 공을 많이 세워 진골이 된 경우는 문노의 예가 유일하지만 이는 신라 중 고 시대의 골품제에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가 진골이 되자 정식 결혼식을 올린 윤궁은 검소하게 살며 낭도들에게 손수옷을 만들어 주었으며 문노가 종양을 앓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서 낫게 해줄만큼 헌신적이었다.
문노가 화랑조직을 재정비하고 화랑들의 힘을 모아 신라의 국력을 강화시키도록 옆에서 조언을 한 것도 그녀였다. 문노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윤궁을대했다. 윤궁은 남편이 죽자 곧 뒤따라 죽는다.
그래서 당시 신라인들은 『지아비를 택하는데는 마땅히 문노와 같아야 하고처를 얻는데는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화랑세기 문노조에는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가 가야국의 딸이라는기록과 함께 야국왕(野國王)이 신라에 공녀로 바친 왕녀라는 기록도 나온다. 야국은 일본이었다는게 학계 일부의 주장. 박창화씨가 화랑세기 필사본을 쓴시기가 일제시대였으므로 왜국(倭國)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가 어려워 야국으로 썼다는 것.
서강대 이종욱교수는 『박씨가 일본에서 진본 화랑세기를 보고 필사를 하면서 문노의 어머니인 문화공주가 왜국이 바친 왕녀라고 했을 경우에 닥쳐올 위험을 피하기 위해 왜국을 야국으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문노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 때문에 화랑세기는 일본인들이 공개를꺼린 책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조해훈기자 massjo@kookje.co.kr
《경남 송학동 채색석실분 B호 무덤》
지난 8월말 경남 고성군 송학동고분군에서 동아대박물관에 의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채색 석실분인 B호 무덤이 문노의 어머니 묘라는 흥미있는 추정이 제기되고 있다.
심봉근 동아대박물관장은 『화랑세기에 보이는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에서 온왕녀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 야국을 왜국으로 해석할 수 있다』며 『또 가야에 거주했던 점으로 보아 소가야의 마지막 왕릉인 B호분이 그녀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심관장은 『이 무덤은 국내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가야의 채색고분이다. 채색고분은 일본의 규슈지방과 간사이(關西)지방의 무덤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만큼일본과의 교류 흔적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이 고분에서 도굴되고남은 토기중 일본계 스에키(須惠)토기가 있는 점도 같은 의미이며 또 신라의 영향도 발견된다는 것.
그러니까 문노 어머니묘에서 일본계의 흔적이 나온 것은 당연하고 문노 아버지가 신라사람이니 신라의 흔적도 당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6세기대의것인 이 무덤의 전체 분위기는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소가야가 562년 대가야가멸망하기 전에 소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이 무덤의 조성시기가 문노의 어머니의 생몰시기와 비슷하다는 점도 그런 추측을 할 수 있는 근거라고 설명했다.
송학동고분군은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으로 알려졌으나 전방후원분이 아닌 몇개의 무덤이 별도로 조성된 것으로 최근 밝혀져 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무덤이다. 만약 동아대의 추론대로 이 무덤이 문노의 어머니 묘라면이는 한·일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생각된다.
첫댓글 잘읽고 갑니다. 춘추공님 감사합니다.계속 재미 있네요.